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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 신화-영원한 투쟁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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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한 암울한 현실 속에서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를 통해 인간 실존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왜 우리는 살아야 하는가? 삶이 무의미하다면, 자살하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들은 단순한 철학적 사변이 아니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문명의 허상을 목격한 20세기 인간의 절박한 외침이었다.

카뮈가 선택한 은유는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였다. 신들을 기만한 죄로 바위를 산 정상까지 굴려 올리는 영원한 형벌을 받은 시지프. 정상에 도달하면 바위는 다시 굴러떨어지고, 시지프는 끝없이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의 삶이라고 카뮈는 말한다. 우리는 매일 일어나 출근하고, 일하고, 잠들고, 다시 일어난다. 이 반복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지만 카뮈의 천재성은 절망에서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무의미한 반복 속에서도 인간이 행복할 수 있으며, 오히려 그 부조리한 조건 자체가 인간 존재의 위대함을 드러낸다고 주장했다. 이는 단순한 낙관주의가 아니라, 냉철한 현실 인식 위에 세워진 실존적 반항의 철학이다.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l'absurde)는 우연한 발견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합리성과 세계의 무관심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충돌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의미를 추구한다.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삶에 논리와 질서가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세계는 대답하지 않는다. 자연재해는 선악을 가리지 않고 닥쳐오고,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이성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던 계몽주의의 꿈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산산조각 났다.

이러한 부조리의 인식은 세 가지 단계를 거쳐 나타난다. 먼저 일상의 기계적 반복에서 오는 권태이다. "일어나고, 전차를 타고, 네 시간 사무실에서 일하고, 식사하고, 전차를 타고, 네 시간 일하고, 식사하고, 잠들고..." 이 리듬이 갑자기 무너질 때, 인간은 자신의 삶이 얼마나 무의미한 반복인지 깨닫는다.

두 번째는 타인의 비인간성을 목격하는 순간이다. 전화 통화하는 사람을 유리창 너머로 볼 때, 그의 몸짓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타인이 갑자기 낯선 존재로 느껴지는 이 순간, 우리는 인간관계의 근본적 고립을 체험한다.

세 번째는 죽음의 확실성과 삶의 무상함을 직시하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적 가치와 의미는 색깔을 잃는다. 권력도, 사랑도, 예술도 결국 죽음으로 귀결된다면,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인가?

그러나 카뮈에게 부조리의 발견은 절망의 끝이 아니라 진정한 삶의 시작이다. 부조리를 인식하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모든 환상과 위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종교의 구원도, 철학의 체계도, 이념의 약속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인간은 오직 자기 자신의 힘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근본적 조건과 마주하게 된다.


부조리를 인식한 인간 앞에는 세 가지 길이 놓여 있다. 첫 번째는 자살이다. 삶이 무의미하다면 아예 삶을 끝내버리는 것이 논리적이지 않은가? 많은 철학자들이 이 길을 택했다. 키르케고르는 신에게로의 도약을,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부조리로부터 도피했다.

하지만 카뮈는 자살을 부조리에 대한 배반이라고 규정한다. 자살은 부조리한 조건을 제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이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접근이다. 부조리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므로, 인간이 사라지면 부조리도 사라진다. 하지만 이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도피일 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살이 삶에 대한 최종적 판단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자살하는 순간, 인간은 삶이 살 가치가 없다고 결론짓는다. 하지만 카뮈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그런 최종적 판단을 내릴 권리가 없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현재뿐이다.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단정할 수 없다.

두 번째 길은 철학적 자살이다. 이는 물리적 자살 대신 부조리를 합리화하거나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키르케고르의 신앙으로의 도약, 종교적 희망, 또는 합리주의적 체계를 통해 부조리를 해소하려는 모든 시도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부조리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대신, 더 높은 차원의 의미나 진리를 상정함으로써 부조리를 해소하려 한다.

그러나 카뮈는 이 역시 배반이라고 본다. 부조리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려는 이런 시도는 자기모순이다. 진정한 태도는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 번째 길은 무엇인가? 카뮈는 이를 부조리한 삶이라고 부른다. 이는 부조리한 조건을 받아들이되, 그 조건 하에서 최대한 치열하게 사는 것이다. 부조리한 인간은 의미를 포기하는 대신 강도(intensité)를 선택한다. 삶의 질보다는 양을, 깊이보다는 넓이를 추구한다.

카뮈는 부조리한 인간의 전형을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는 돈 후안이다. 그는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는다. 대신 가능한 한 많은 여성을 사랑하며, 각각의 사랑에 전력을 다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랑의 영원성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강렬함이다. 돈 후안은 일부일처제라는 사회적 약속을 거부하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산다.

둘째는 배우이다. 배우는 무수한 인생을 살아본다. 오늘은 햄릿이고, 내일은 오셀로이며, 모레는 리어 왕이다. 그는 어떤 하나의 정체성에도 매이지 않는다. 일반인이 한 번의 인생만을 사는 동안, 배우는 무수한 인생을 경험한다. 이를 통해 그는 인간 존재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험한다.

셋째는 정복자이다. 그는 권력이나 영광을 위해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정복 행위 자체를 위해 정복한다. 나폴레옹이 "나는 정복하므로 존재한다"고 말했듯이, 정복자에게는 행동 자체가 목적이다. 그는 결과보다는 과정을, 성취보다는 노력을 중시한다.

이 세 유형의 공통점은 미래에 대한 희망 없이 현재를 충실히 산다는 것이다. 그들은 내세나 이상향을 꿈꾸지 않는다.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며, 주어진 조건 하에서 최선을 다한다. 이것이 바로 부조리한 인간의 삶의 방식이다.


부조리한 인간의 또 다른 전형은 창조자이다. 카뮈에 따르면 진정한 예술 작품은 부조리한 조건에서만 탄생한다. 예술가가 절대적 진리나 영원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면, 그는 부조리를 배반하는 것이다. 대신 그는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부조리를 깊이 탐구했지만, 결국 종교적 해답을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 카뮈와 다른 길을 걸었다. 카뮈에 따르면 진정한 부조리 예술가는 해답을 제시하려 하지 않고, 부조리한 인간 조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

반면 부조리한 예술가는 자신의 조건을 받아들인다. 그는 작품을 통해 세계를 변혁하거나 독자를 구원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경험한 부조리한 현실을 치밀하게 묘사할 뿐이다. 이런 예술에는 특별한 힘이 있다. 그것은 위안이나 희망을 주지 않지만, 대신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조건을 더 명확히 인식하게 한다.

부조리한 예술의 또 다른 특징은 형식에 대한 집착이다. 의미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예술가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형식뿐이다. 말라르메의 시나 조이스의 소설이 극도로 정교한 형식을 추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내용의 혼란을 형식의 완벽함으로 보상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카뮈는 형식주의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부조리한 예술가는 형식과 내용, 기법과 열정 사이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지나친 형식주의는 예술을 삶으로부터 유리시키며, 지나친 내용 중심주의는 예술을 선전으로 전락시킨다.


이제 우리는 카뮈 철학의 핵심에 도달했다. 시지프는 왜 행복한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시지프 신화』 전체의 결론이다.

먼저 시지프의 상황을 다시 살펴보자. 그는 영원히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한다. 바위를 산 정상까지 굴려 올리면, 바위는 다시 굴러떨어진다. 어떤 진보도, 완성도, 해방도 없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조건이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비슷한 일상을 반복한다. 우리가 이룬 모든 성취는 결국 죽음 앞에서 무력해진다.

그런데 카뮈는 시지프가 산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에 주목한다. 바위를 굴려 올린 후 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그 짧은 시간. 이때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의식한다. 그는 자신이 영원히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함을 안다. 그리고 바로 이 의식이 그를 자유롭게 만든다.

신들은 시지프에게 희망을 박탈했다. 그는 언젠가 자신의 고통이 끝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질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그를 자유롭게 한다. 희망이 없다면 실망도 없다. 기대가 없다면 좌절도 없다. 시지프는 순전히 현재만을 의식하며 살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시지프의 반항이다. 그는 신들의 형벌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에 굴복하지는 않는다. 매일 바위를 굴려 올리는 행위 자체가 신들에 대한 반항이다. "너희가 나에게 이런 형벌을 내렸지만, 나는 굴복하지 않겠다. 나는 이 일을 계속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나 자신으로 존재할 것이다."

카뮈가 말하는 행복은 일반적 의미의 행복과 다르다. 그것은 만족이나 쾌락이 아니라, 자신의 조건을 온전히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 태도이다. 시지프는 자신의 바위를 사랑한다. 그 바위가 자신의 운명이자 동시에 자신이 반항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은 결코 체념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적극적인 삶의 자세이다. 부조리한 조건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조건 하에서 최대한 치열하게 살겠다는 결의이다. 시지프는 매일 바위를 굴리지만, 그 행위에 자신의 모든 힘을 쏟는다. 결과가 무의미하다고 해서 과정까지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부조리한 인간이 오직 자신의 체험에만 충실하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닌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카뮈는 이 문제를 『반항하는 인간』에서 더 자세히 다루지만, 『시지프 신화』에서도 그 실마리를 제공한다. 부조리를 인식한 인간은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같은 조건에 처해 있음을 안다. 모든 인간이 죽는다. 모든 인간이 의미 없는 반복을 겪는다. 모든 인간이 부조리한 조건에서 살아간다.

이런 인식에서 연대가 싹튼다. 그것은 공통의 이상이나 가치에 기반한 연대가 아니라, 공통의 조건에 기반한 연대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배를 타고 있다. 그 배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는 함께 항해하고 있다.

부조리한 인간은 또한 자신의 한계를 안다. 그는 절대적 진리를 소유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 이런 겸손함이 관용을 낳는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부조리와 맞서고 있다면, 굳이 하나의 방식만이 옳다고 주장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것이 상대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부조리한 인간에게도 분명한 금기가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부조리한 조건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면, 그 권리를 박탈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다.

이런 관점에서 카뮈는 사형제도를 반대했고, 모든 형태의 독재와 전체주의를 거부했다. 그에게 정치적 살인은 철학적 살인이었다. 그것은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카뮈가 『시지프 신화』를 쓴 지 80여 년이 지났다. 그 사이 세상은 많이 변했다. 냉전은 끝났고, 인터넷이 등장했으며, 인공지능이 발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카뮈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한가?

오히려 카뮈의 통찰은 더욱 절실해졌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인은 전례 없는 풍요와 자유를 누리지만, 동시에 전례 없는 허무와 고독을 경험한다. SNS는 연결을 약속하지만 실제로는 고립을 심화시킨다. 무한한 선택의 자유는 선택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삶을 편리하게 하지만,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더욱 첨예하게 만든다.

특히 현대의 노동은 시지프의 형벌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비슷한 일을 반복한다. 그 일이 사회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자신에게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의심하면서도 계속한다. 왜냐하면 살기 위해서는 일해야 하고, 일하기 위해서는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카뮈의 메시지는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현대의 시지프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바위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을 의미 있게 만들려고 억지로 합리화하는 대신, 그 일 자체에서 만족을 찾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현실 도피나 체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부조리한 조건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조건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런 노력의 결과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는 뜻이다. 혁명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개혁이 이루어지든 좌절되든, 그 자체로는 삶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행위 자체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카뮈가 말하는 반항의 진정한 의미이다.


『시지프 신화』는 절망의 철학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희망의 철학이다. 그것은 삶의 조건을 미화하지도, 왜곡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 조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위대함을 노래한다.

카뮈의 시지프는 비극적 영웅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지 않으며, 신들에게 복수를 꿈꾸지도 않는다. 그는 단순히 자신의 일을 한다. 매일 바위를 굴리고, 내려가고, 다시 굴린다. 그리고 이 반복 속에서 자신만의 행복을 찾는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에게 필요한 태도이다. 거대한 의미나 궁극적 목적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용기.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 없이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 타인의 승인이나 사회적 성공에 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자유.

카뮈는 『시지프 신화』의 마지막 문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이다. 우리가 시지프의 행복을 상상할 수 있다면, 우리도 자신만의 바위를 굴리며 행복할 수 있다.

결국 삶의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시지프처럼 우리도 매일 자신의 바위를 굴린다. 그 바위가 무엇인지는 각자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일이고, 누군가에게는 사랑이며, 누군가에게는 창작이다. 중요한 것은 그 바위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굴리는 행위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다.

이것이 알베르 카뮈가 『시지프 신화』를 통해 전하려던 메시지이다. 부조리한 세계에서 굴복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의 존엄성. 의미 없는 반복 속에서도 자신만의 행복을 창조할 수 있는 인간의 창조성. 절망적 조건을 희망의 근거로 바꿀 수 있는 인간의 반항 정신.

시지프는 여전히 바위를 굴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도 각자의 바위를 굴리며 살아간다. 다만 이제 우리는 그 행위가 형벌이 아니라 자유의 표현임을 안다. 카뮈의 가르침 덕분에 우리는 시지프처럼 행복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C%8B%9C%EC%A7%80%ED%94%84%20%EC%8B%A0%ED%9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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