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해보라. 당신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손에 넣었다고 가정해보자. 철학, 법학, 의학, 심지어 신학까지 완벽하게 마스터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책으로 빽빽이 채워진 서재에 홀로 앉아 이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 뭐?"
이것이 바로 괴테의 『파우스트』가 시작되는 방식이다. 주인공 파우스트 박사는 인류 최고의 지성인이지만, 동시에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그는 독백한다. "철학, 법학, 의학, 그리고 슬프게도 신학까지 모두 공부했건만, 여전히 나는 가엾은 바보로구나."
이 대목이 섬뜩한 이유는 뭘까? 우리는 지식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그 반대를 경험했다. 알면 알수록 더 공허해졌다. 마치 인스타그램 피드를 끝없이 스크롤하면서도 점점 더 허무해지는 현대인처럼 말이다.
파우스트의 서재를 상상해보자. 천장까지 책으로 가득 찬 공간. 먼지 쌓인 양피지, 고대 언어로 쓰인 문서들, 연금술 도구들. 그는 평생을 이 공간에서 보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실험을 하고, 토론을 벌였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존경했다. "파우스트 박사님께 물어보면 답을 아실 거야."
하지만 정작 파우스트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독백한다. "십여 년 동안 학생들을 이끌어왔지. 위로, 아래로, 여기저기로. 그리고 깨달았지.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이것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다. 실존적 위기다.
파우스트가 발견한 것은 지식의 근본적 한계다. 그는 모든 학문을 정복했지만, 정작 중요한 질문들에는 답할 수 없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죽음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책은 이론을 제공하지만 확신을 주지 못한다. 지식은 축적되지만 지혜는 오지 않는다.
절망한 파우스트는 마법으로 눈을 돌린다. 그는 금지된 책을 펼친다. "대우주의 정령"을 소환하는 주문을 외운다. 불꽃이 타오르고 거대한 형상이 나타난다. 파우스트는 환희에 찬다. "드디어 진정한 지식에 다가가는구나!"
하지만 정령은 그를 경멸한다. "넌 나와 같지 않다. 네가 이해할 수 있는 정령을 찾아라." 그리고 사라진다. 파우스트는 바닥에 무너진다. 마법조차 그에게 답을 주지 못한다. 그는 초월적 진리에 닿을 수 없다. 인간의 한계는 명확하다.
이 순간 파우스트는 결단을 내린다. 자살. 그는 독약을 준비한다. 수정 잔에 담긴 녹색 액체. 그는 잔을 들어올리며 말한다. "이제 새로운 해안으로 가는 여정을 시작하리라." 죽음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겠다는 것이다.
부활절 종소리
잔이 입술에 닿으려는 순간, 창밖에서 소리가 들린다. 교회 종소리. 합창.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도다!" 부활절 새벽 예배가 시작된 것이다.
파우스트는 멈춘다. 그를 멈추게 한 건 종교적 신념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신앙을 잃었다. 하지만 종소리와 함께 밀려오는 것이 있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 어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에 갔던 봄날. 친구들과 뛰어놀던 부활절 아침. 삶의 감각적 기억들.
그는 잔을 내려놓으며 울먹인다. "너희는 나를 지상에 다시 끌어당기는구나." 그를 구한 건 형이상학적 진리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삶의 경험이었다. 괴테는 여기서 중요한 테제를 제시한다. 인간을 살게 하는 것은 추상적 지식이나 초월적 확신이 아니라 삶 자체의 구체성이다.
파우스트는 창밖을 본다. 부활절 아침.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눈이 녹고 꽃이 피고 새들이 노래한다. 상인들이 장터를 열고,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걷고, 아이들이 뛰어논다.
파우스트는 깨닫는다. 삶은 책 속에 있지 않다. 삶은 저 밖에 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그는 이미 늙었다. 60대의 노학자. 젊음은 지나갔고 새로운 시작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아니, 정말 그럴까?
이때 누군가 그의 서재 문을 두드린다. 검은 푸들 한 마리가 들어온다. 파우스트는 개를 쓰다듬는다. 하지만 개가 이상하게 행동한다. 점점 커지고, 으르렁거리고, 불꽃을 뿜는다. 파우스트는 주문을 외운다. 그리고 개는 변신한다.
한 남자가 나타난다. 우아한 신사 복장. 냉소적인 미소. 메피스토펠레스.
메피스토펠레스는 전통적인 뿔 달린 악마가 아니다. 그는 세련된 르네상스 신사처럼 보인다. 붉은 망토, 깃털 달린 모자, 칼을 찬 모습. 하지만 그의 눈에는 수천 년의 냉소가 담겨 있다.
"자기소개를 하지요." 메피스토펠레스가 말한다. "나는 항상 부정하는 정신의 일부입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생성되는 모든 것은 파괴될 가치가 있으니까요."
이 자기소개는 심오하다. 메피스토펠레스는 단순히 악을 저지르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부정의 원리 자체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조롱하고, 해체한다. 인간의 고귀한 이상? 위선이다. 사랑? 욕망의 가면이다. 진리? 환상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메피스토펠레스는 우주적 질서의 일부다. 작품 초반, 천상의 서곡에서 신이 등장한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신 앞에서도 건방지다. "인간들이 또 제게 불평하러 오겠지요. 당신이 그들을 너무 불쌍하게 만드셨어요."
신은 웃는다. 그리고 놀라운 말을 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지." 신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파우스트를 시험해도 좋다고 허락한다. 왜? "너 같은 존재는 나를 거의 성가시게 하지 않는다. 인간은 너무 쉽게 편안함을 추구하니까.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자극을 주는 친구를 기꺼이 주지."
이것은 괴테의 변증법적 세계관이다. 선과 악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한다. 부정이 없다면 긍정도 없다. 파괴가 없다면 창조도 없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신의 계획에서 필요악이 아니라 필수 요소다. 그는 인간을 자극하고, 흔들고, 움직이게 만든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제안한다. "내가 이승에서 당신을 섬기지요.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대신 저승에서는 당신이 나를 섬기시오."
일반적인 악마의 계약이다. 하지만 파우스트의 반응은 예상 밖이다. "저승? 나는 저승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이미 내세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천국도 지옥도 그에게는 의미 없는 개념이다.
파우스트는 다른 조건을 제시한다. "만약 내가 어떤 순간에게 말한다면, '머물러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그때 나를 데려가라. 그때 나는 멸망해도 좋다."
메피스토펠레스는 당황한다. 이건 기묘한 조건이다. 파우스트가 원하는 건 쾌락도 권력도 아니다. 완벽한 만족. 절대적 충족. 더 이상 갈망할 것이 없는 상태. 순간이 너무 아름다워서 "영원히 이대로 있고 싶다"고 말하는 그 순간.
하지만 이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욕망이다. 왜? 인간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하고, 욕망하고, 전진한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하고 바라는 순간, 그 순간은 이미 지나가고 있다. 정지된 완벽함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이것을 안다. 그래서 자신만만하게 계약서에 서명한다. 그는 확신한다. '파우스트를 만족시킬 수 있다. 내가 그에게 보여줄 쾌락들, 그가 경험할 환희들, 그는 분명 어느 순간 "멈춰라!"고 외칠 것이다.'
파우스트도 서명한다. 하지만 그는 다른 이유로 확신한다. '나는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내 갈망은 무한하다. 어떤 순간도 나를 채우지 못할 것이다.'
계약이 체결된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를 마녀의 주방으로 데려간다. 그곳은 기괴한 장소다. 큰 가마솥이 끓고 있고, 원숭이들이 춤을 추며, 마녀가 주문을 외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마녀에게 명령한다. "이 사람에게 젊음의 묘약을 주시오." 마녀는 의식을 행하고 파우스트에게 녹색 액체가 든 잔을 건넨다. 파우스트는 주저 없이 마신다.
그의 몸이 변하기 시작한다. 주름이 사라지고 머리카락이 검어진다. 60대 노학자가 20대 청년으로 변신한다. 파우스트는 거울을 본다. 낯선 얼굴. 아니, 잊고 있었던 자신의 얼굴. 40년 전의 자신.
메피스토펠레스가 속삭인다. "이제 세상으로 나가시지요. 모든 여자가 당신의 헬레네로 보일 겁니다." 이것은 예언이자 저주다. 파우스트는 이제 욕망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리고 첫 번째 희생자를 곧 만나게 된다.
젊어진 파우스트는 거리를 걷는다. 모든 것이 새롭다. 햇빛, 공기, 사람들의 웃음소리. 40년 동안 서재에 갇혀 있던 남자가 처음으로 세상을 보는 것 같다.
그때 그녀가 지나간다. 마르가레테. 사람들은 그녀를 그레트헨이라고 부른다. 14세 소녀. 교회에서 돌아오는 길이다. 소박한 옷, 땋은 머리, 겸손하게 고개를 숙인 모습.
파우스트는 그녀에게 다가간다. "아름다운 아가씨, 제가 팔을 빌려 집까지 모셔다 드려도 될까요?"
그레트헨은 고개를 젓는다. "저는 아가씨도 아니고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혼자서도 집에 갈 수 있어요." 그리고 그를 피해 간다.
이 거절이 파우스트를 불태운다. 그녀의 순수함, 겸손함, 자존감. 그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외친다. "저 소녀를 데려와! 내가 그녀를 가져야 해!"
메피스토펠레스는 냉소한다. "무슨 소녀인데요? 방금 고해성사에서 나온 소녀를 유혹하라고요? 저는 그런 소녀에게는 힘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방법을 찾는다. 항상 그렇듯이.
메피스토펠레스는 그레트헨의 방에 보석 상자를 몰래 놓는다. 그레트헨이 돌아와 상자를 발견한다. 호기심에 연다. 금목걸이, 진주 귀걸이, 다이아몬드 반지.
그녀는 거울 앞에서 목걸이를 걸어본다. 가난한 소녀가 귀족 부인처럼 보인다. 그녀는 노래한다. "왕이 예전에 있었지, 큰 벼룩 한 마리를..." 순진무구한 민요. 하지만 그녀 안에서 무언가 깨어난다.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 더 나은 삶에 대한 꿈.
어머니가 들어온다. 보석을 보고 기겁한다. "이건 도둑질한 거야! 아니면 더 나쁜 것일 수도 있어!" 그녀는 보석을 교회에 바친다. 그레트헨은 실망한다.
메피스토펠레스는 더 큰 보석 상자를 가져온다. 이번에는 그레트헨의 이웃 마르테가 개입한다. 마르테는 과부다. 그녀는 세상물정을 안다. "이 보석을 교회에 바치면 신부들이 가져갈 거야. 우리가 가지자."
마르테는 그레트헨과 파우스트의 만남을 주선한다. 네 사람이 정원에서 만난다. 파우스트, 그레트헨, 메피스토펠레스, 마르테. 메피스토펠레스는 마르테를 유혹하며 그녀의 주의를 끈다. 파우스트와 그레트헨은 정원을 거닌다.
그들은 대화를 나눈다. 파우스트는 세상에 대해, 철학에 대해, 감정에 대해 말한다. 그레트헨은 단순한 질문을 한다. "당신은 종교를 믿나요?"
파우스트는 대답을 피한다. 복잡한 말들, 범신론적 수사들. "신이라는 이름을 누가 말할 수 있나요? 누가 '나는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나요?" 그레트헨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에게 종교는 단순하고 명확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사랑에 빠진다. 파우스트의 열정, 지성, 그의 눈에 담긴 불꽃. 그는 그녀가 만난 그 누구와도 다르다. 그는 그녀의 작은 세계를 폭발시킨다.
파우스트는 그레트헨과 밤을 보내고 싶어한다. 하지만 어머니가 같은 방에서 잔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수면제를 준다. "어머니에게 이걸 드리세요. 몇 방울이면 충분합니다."
그레트헨은 망설인다. 하지만 파우스트의 키스, 그의 팔, 그의 속삭임. 그녀는 수면제를 어머니에게 준다. 그리고 파우스트와 밤을 보낸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는 일어나지 않는다. 과다복용. 그레트헨은 어머니를 죽였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는 명확하다. 그녀의 첫 번째 죄.
그레트헨은 임신한다. 작은 마을에서 이것은 재앙이다. 미혼모는 사회에서 추방당한다. 그녀의 오빠 발렌틴은 군인이다. 그는 명예를 중시한다. 여동생이 창녀가 됐다는 소문을 듣고 격노한다.
발렌틴은 그레트헨의 집 앞에서 파우스트를 기다린다.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가 나타난다. 발렌틴은 칼을 뽑는다. "네가 내 여동생을 망쳤어!"
결투가 벌어진다. 파우스트는 검술을 모른다. 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가 그의 팔을 마비시킨다. 파우스트의 칼이 발렌틴의 가슴을 찌른다. 발렌틴은 쓰러진다.
죽어가는 발렌틴은 그레트헨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너는 창녀야! 네가 첫 번째 남자와 몰래 자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었어. 하지만 더 많은 남자들이 올 거야. 열두 명이 네 몸에 손을 댈 때, 온 마을이 너를 거부할 거야!"
그레트헨은 무너진다. 오빠마저 죽였다.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손가락질한다. 교회에서 쫓겨난다. 임신한 배를 안고 거리를 떠돈다.
그레트헨은 아기를 낳는다. 어디선가. 혼자서. 그녀는 이미 정신이 나간 상태다. 아기를 보며 생각한다. '이 아이는 아버지가 없다. 사생아. 사람들이 이 아이를 손가락질할 것이다. 나처럼.'
그녀는 결단을 내린다. 아기를 연못에 빠뜨린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아기가 죽게 내버려둔다. 그녀는 체포된다.
감옥에 갇힌 그레트헨. 그녀는 짚더미에 누워 노래한다. 어린아이 같은 노래. "내 어머니, 창녀 / 나를 죽였네 / 내 아버지, 도둑 / 나를 먹었네..." 그녀의 정신은 산산조각 났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명령한다. "그녀를 구해!" 메피스토펠레스는 감옥 열쇠를 훔친다. 한밤중, 둘은 감옥으로 간다.
파우스트는 그레트헨의 감방 문을 연다. "그레트헨! 나야! 너를 구하러 왔어!"
그레트헨은 그를 본다. 하지만 알아보지 못한다. "당신은 누구세요? 사형집행인인가요? 벌써 아침인가요?" 그녀는 파우스트를 죽음의 사자로 착각한다.
파우스트는 필사적으로 그녀를 설득한다. "나야, 파우스트! 우리 도망가자!" 그레트헨은 점차 정신을 차린다. 그를 알아본다. "헨리! 당신이에요!" (파우스트의 이름은 하인리히다)
하지만 그녀는 거절한다. "나는 갈 수 없어요. 나에게는 미래가 없어요. 무덤만 있을 뿐. 어머니의 무덤, 오빠의 무덤, 내 무덤, 아기의 무덤..."
파우스트는 그녀를 끌어내려 한다. 그레트헨은 저항한다. "당신의 손이 피로 젖어 있어요! 어머니의 피가!" 그녀는 외친다. "심판이여! 신의 심판이여! 나를 당신께 맡깁니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재촉한다. "서둘러요! 날이 밝아옵니다! 우리가 단죄될 겁니다!" 파우스트는 그레트헨에게 마지막으로 손을 뻗는다. 그레트헨은 뒤로 물러서며 외친다. "헨리! 당신이 무서워요!"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는 도망친다. 그레트헨은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구원받았다(Gerettet)!"
메피스토펠레스는 외친다. "단죄받았다(Gerichtet)!" 하지만 하늘의 목소리가 반복한다. "구원받았다!"
누가 구원받았는가
이 장면은 『파우스트』 1부의 정점이다. 누가 구원받은 것일까? 명백히 그레트헨이다. 그녀는 죄를 지었지만 회개했다. 인간의 구원이 아니라 신의 심판을 선택했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그는 도망친다. 사랑했던 여자를 감옥에 남겨두고. 메피스토펠레스가 그를 끌고 간다. "헨리! 헨리!" 그녀의 외침이 메아리친다. 하지만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이것이 파우스트의 본질이다. 그는 사랑하지만 머물지 않는다. 후회하지만 돌아가지 않는다. 그는 앞으로만 나아간다. 끊임없이. 이것이 그의 저주이자 그의 구원이다.
괴테는 여기서 근대성의 핵심을 포착한다. 진보는 파괴를 수반한다. 새로운 것의 탄생은 낡은 것의 죽음을 의미한다. 파우스트는 그레트헨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그의 사랑이 그녀를 죽였다. 이것이 바로 근대적 개인의 비극이다.
『파우스트』 2부는 1부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 개인의 비극에서 벗어나 파우스트는 이제 역사와 문명 전체의 무대를 종횡무진한다. 그는 황제의 궁정에서 경제 고문이 되고, 고대 그리스로 시간여행을 떠나며, 거대한 토목 공사를 지휘한다. 1부가 한 남자의 내밀한 욕망과 죄의식을 다뤘다면, 2부는 인류 문명 전체의 야망과 환상을 무대에 올린다.
파우스트가 처음 도착한 곳은 파산 직전의 제국이다. 황제는 전쟁과 낭비로 국고를 탕진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기발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지하에 매장된 금을 담보로 지폐를 발행하는 것이다.
이게 뭐가 마법적이냐고? 생각해보라.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금을 기반으로 종이에 가치를 부여한다. 사람들은 그 종이를 믿고 거래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 금융 시스템의 작동 원리다. 괴테는 19세기 초반에 이미 화폐의 환상적 본질을 꿰뚫었다. 제국은 순식간에 풍요로워지지만, 이 풍요는 모래성처럼 불안정하다.
이 에피소드는 우스꽝스럽지만 섬뜩하다. 사람들은 실재하지 않는 부를 믿고, 그 믿음이 잠시나마 현실을 만들어낸다. 2008년 금융위기를 겪은 우리에게 이 장면은 전혀 낯설지 않다.
파우스트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는 더 근본적인 무언가를 원한다. 완벽한 아름다움, 절대적 이상. 메피스토펠레스는 그를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으로 데려간다. 이곳은 고대 그리스 신화의 모든 존재들이 살아 숨 쉬는 환상의 공간이다.
여기서 파우스트는 그녀를 만난다. 헬레네. 트로이 전쟁을 일으킨 그 미녀. "천 척의 배를 띄운 얼굴". 파우스트는 첫눈에 반한다. 하지만 헬레네는 3000년 전 사람이다.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메피스토펠레스조차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힘이 약하다. 그곳은 기독교의 악마가 아니라 그리스 신들이 지배하는 영역이다. 파우스트는 스스로 지하 세계로 내려가 헬레네를 데려와야 한다. 이것은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찾아 저승으로 간 것과 같은 여정이다.
파우스트는 성공한다. 헬레네를 근대 세계로 데려온다. 그녀가 파우스트의 중세 성에 도착했을 때, 두 시대가 충돌한다. 헬레네는 고대 그리스어로 말하고, 엄격한 운율로 대화한다. 파우스트는 근대 독일어로, 자유로운 형식으로 응답한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헬레네가 파우스트의 말하는 방식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녀는 운율(rhyme)을 발견한다. "그대의 말이 내 귀에 닿으니, 아름답고 좋구나(Mir tönt das Wort, es scheint so schön)." 파우스트가 대답한다. "그렇다면 내 가슴도 그대 것이 되리(Dann scheint auch mein Busen dir zu gehören)."
이 장면은 문학사적 순간이다. 고대 그리스 비극의 형식과 근대 낭만주의의 감수성이 만난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결혼한다. 이것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다. 서양 문명의 두 거대한 축,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화해이자 종합이다.
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다. 오이포리온. 그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다. 태어나자마자 뛰어다니고, 노래하고, 춤춘다. 그는 무한한 에너지와 창조성의 화신이다. 괴테는 오이포리온을 당대의 천재 시인 바이런(Lord Byron)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바이런은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전했다가 요절한 낭만주의의 아이콘이었다.
오이포리온은 하늘을 동경한다. 그는 점점 더 높이 뛰어오르고,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날개를 펼친다. "어머니, 아버지, 저 넓은 세계를 보세요! 나는 날아야 합니다!" 그는 하늘로 치솟다가 추락한다. 땅에 떨어진 순간, 그의 몸은 사라지고 목소리만 남는다. "나를 어둠 속에 혼자 두지 마세요!"
이 장면은 가슴 아프다. 무한을 추구하는 낭만주의적 열망은 아름답지만 치명적이다. 인간은 하늘을 꿈꾸지만 중력의 법칙에 묶여 있다. 오이포리온의 추락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다. 이것은 운명이다. 유한한 존재가 무한을 추구할 때 필연적으로 맞이하는 결말.
아들의 죽음과 함께 헬레네도 사라진다. 그녀는 파우스트에게 말한다. "행복도 미도 오래 결합할 수 없구나." 그녀의 몸은 구름처럼 흩어지고, 파우스트 손에는 그녀의 옷과 베일만 남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옷이 파우스트를 들어올려 하늘로 날려 보낸다.
이 상징은 심오하다. 우리는 완벽한 아름다움, 절대적 이상을 소유할 수 없다.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건 그 흔적뿐이다. 하지만 그 흔적이 우리를 들어올린다. 비록 이상 자체는 사라져도, 이상을 추구했던 경험이 우리를 고양시킨다.
괴테는 여기서 예술의 본질에 대해 말한다. 예술은 영원한 미를 포착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그 포착은 항상 불완전하다. 우리는 헬레네를 손에 쥘 수 없다. 다만 그녀의 옷, 즉 예술 작품을 남길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불완전한 흔적이 다음 세대를 영감을 주고, 그들을 더 높은 곳으로 이끈다.
헬레네 에피소드는 『파우스트』에서 가장 아름답고 슬픈 부분이다. 파우스트는 여기서 중요한 깨달음을 얻는다. 완벽함은 지속될 수 없다. 고전적 이상과 낭만적 열정의 결합은 잠시 빛나지만 곧 사라진다. 오이포리온은 날아오르지만 추락한다. 헬레네는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하지만 이것이 허무주의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파우스트는 새로운 결심을 한다. 영원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대신, 현실 세계에서 실제적인 일을 하겠다고. 이상을 향한 갈망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제 그는 땅으로 돌아와 땅을 개척하기로 한다.
이것이 바로 파우스트가 간척 사업으로 향하는 이유다. 구름 속의 성이 아니라 진흙 속의 현실을. 하지만 우리가 곧 보게 되듯, 현실의 프로젝트 역시 그 나름의 비극을 안고 있다.
노년의 파우스트는 마지막 야심을 품는다. 바다로부터 땅을 빼앗아 수백만 명이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거대한 간척 사업. 이것은 근대 문명의 완벽한 상징이다. 자연을 정복하고, 기술로 세계를 재설계하며, 인류의 복지를 위한 대규모 프로젝트.
파우스트는 해안가에 서서 파도를 바라본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 무의미하고 무목적적인 운동. 그는 생각한다. '이 힘을 생산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바다가 차지한 이 공간을 인간이 사용할 수 있다면?'
그의 상상력이 펼쳐진다. 제방을 쌓고 바닷물을 막는다. 바다 밑이 드러나고 비옥한 땅이 된다. 그곳에 마을을 짓고 농장을 만든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공간. "자유로운 땅 위의 자유로운 사람들!"
파우스트는 열정적으로 말한다. "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원한다. 그들이 완전히 안전하지는 않더라도 자유롭고 활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 비전은 숭고하다. 이것은 계몽주의의 꿈이다. 이성과 기술로 자연을 정복하고 인류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한다.
메피스토펠레스는 냉소적이지만 협력한다. 그는 마법을 동원해 수천 명의 노동자를 소집한다. (사실은 악령들이지만 인간의 형상을 한다.) 거대한 공사가 시작된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파우스트는 계획을 세우고 명령을 내린다. 실제 일은 메피스토펠레스와 그의 부하들이 한다. 그리고 그들의 방법은 잔혹하다.
노동자들은 가혹한 조건에서 일한다. 많은 이들이 죽는다. 파우스트는 이것을 본다. 하지만 정당화한다. "위대한 목표를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 이것은 모든 전체주의 프로젝트의 논리다.
제방이 점점 길어진다. 바다가 밀려난다. 새로운 땅이 나타난다. 파우스트의 비전이 현실이 되고 있다. 그는 만족한다. 거의.
하지만 문제가 있다. 해변의 작은 언덕에 노부부가 산다. 필레몬과 바우키스. 그들은 작은 오두막과 예배당을 가지고 있다. 린든 나무들이 그들의 집을 둘러싸고 있다. 교회 종이 하루를 알린다.
파우스트의 눈에 이것은 흠집이다. 그의 완벽한 프로젝트에 작은 예외. 그는 노부부에게 제안한다. "다른 곳에 더 좋은 집을 지어드리겠습니다. 이곳을 제게 팔아주십시오."
노부부는 거절한다. 이곳이 그들의 집이다. 평생을 여기서 살았다. 이 나무들을 그들이 심었다. 이 종소리에 맞춰 하루를 살아왔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파우스트는 점점 짜증이 난다. 노부부의 종소리가 그를 괴롭힌다. 그는 밤에 그들의 예배당에서 들려오는 기도 소리를 듣는다. 이것이 그를 자극한다. 왜? 그것은 그의 프로젝트가 제거할 수 없는 과거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전통, 신앙, 뿌리 내린 삶.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명령한다. "그들을 이주시켜라. 하지만 폭력은 쓰지 마라." 이것은 위선적 명령이다. 강제 이주 자체가 폭력이다. 그리고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본성을 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더 직접적인 해결책을 택한다. 한밤중, 그와 부하들이 노부부의 집을 찾아간다. 그들은 불을 지른다. 오두막이 타오른다. 예배당이 무너진다. 린든 나무들이 불길에 휩싸인다.
필레몬과 바우키스는 도망치려 하지만 실패한다. 연기에 질식해 죽는다. 그들의 손님(오래 전 노부부를 방문했던 여행자)도 함께 죽는다. 세 구의 시체.
다음 날 아침, 파우스트는 연기를 본다. 메피스토펠레스가 보고한다. "일이 좀 거칠게 진행됐습니다. 노인들이 완고하게 저항했고... 뭐, 어쩔 수 없었습니다."
파우스트는 분노한다. "내가 이주시키라고 했지, 죽이라고 하지 않았어!" 하지만 그의 분노는 공허하다. 그는 무엇을 기대했는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부탁하면서 깨끗한 결과를 바랐는가?
괴테는 여기서 근대성의 핵심 모순을 폭로한다. 위대한 진보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직접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그들은 "더 큰 선"을 말하고 명령을 내린다. 실제 폭력은 타인이 저지른다. 그리고 책임은 희석된다.
파우스트는 죄책감을 느낀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멈추지는 않는다. "이미 벌어진 일이다. 계속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진보의 논리다. 과거는 되돌릴 수 없다. 미래로 계속 전진할 뿐이다.
필레몬과 바우키스의 죽음은 그레트헨의 죽음과 메아리친다. 파우스트는 또다시 타인의 삶을 파괴했다. 그는 의도하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그의 야망이 죽음을 초래했다.
그날 밤, 네 여인이 파우스트를 찾아온다. 결핍, 빚, 궁핍, 그리고 근심. 처음 셋은 파우스트의 부에 막혀 들어오지 못한다. 하지만 근심은 열쇠구멍을 통해 들어온다.
근심은 파우스트에게 묻는다. "나를 아는가?" 파우스트는 대답한다. "난 단지 세상을 통과해 달려왔을 뿐이다. 모든 욕망을 머리카락으로 움켜잡았지.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내버려두고, 내 손을 빠져나간 것은 가게 내버려뒀다."
근심은 말한다. "나를 한 번이라도 경험한 사람은 영원히 나를 떨쳐버릴 수 없다." 그녀는 파우스트에게 숨을 불어넣는다. 파우스트는 장님이 된다.
시력을 잃은 파우스트는 밖에서 삽질 소리를 듣는다. 그는 생각한다. '내 간척 사업이 완성되고 있구나! 마지막 제방이 세워지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메피스토펠레스가 시키는 악령들(레무레스, 죽은 자들의 유령)이 파우스트의 무덤을 파고 있을 뿐이다. 파우스트는 환상 속에 있다. 그는 현실을 보지 못한다. 문자 그대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파우스트는 미래를 상상한다. 완성된 간척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모습. 그는 황홀경에 빠진다. 그리고 말한다.
"그러한 순간을 예감하며, 나는 지금 최고의 순간을 누린다. 그러한 순간에 나는 말할 수 있으리라: 머물러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계약의 조건이 충족되었다. 파우스트는 쓰러진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승리를 확신한다. "다 끝났다! 정말 어리석은 말이지. 왜 끝났나?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았던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의 승리는 짧다.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그들은 장미꽃잎을 뿌리며 노래한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장미꽃잎에 타격을 받는다. (장미는 사랑의 상징이고, 악마는 사랑을 견딜 수 없다.)
천상의 구출
천사들은 파우스트의 영혼을 들어올린다. "불멸하는 부분"을 구해낸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항의한다. "나와 계약했어! 나한테 약속했잖아!"
하지만 천사들은 노래한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 우리는 그를 구원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위로부터의 사랑이 그에게 관심을 가졌다면, 신성한 무리가 그를 맞이할 것이다."
이 구절은 『파우스트』의 신학적 정점이다. 파우스트는 완벽하지 않았다. 그는 실수했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었으며, 메피스토펠레스와 동맹을 맺었다. 그런데도 구원받는다. 왜?
첫째, 그는 멈추지 않았다. 끊임없이 노력했다. 만족하지 않고 계속 추구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둘째, "위로부터의 사랑"이 그를 도왔다. 누구의 사랑? 그레트헨의 사랑.
천상의 장면이 펼쳐진다. 성스러운 은자들, 천사들, 참회한 여인들. 그중 한 명이 Una Poenitentium(이전에 그레트헨이라 불렸던 이)다.
그레트헨의 영혼이 나타나 간청한다. "그를 저에게 맡겨주세요. 그는 아직 새로운 빛에 눈부셔합니다. 제가 그를 인도하겠습니다."
영광의 성모(Mater Gloriosa)가 나타나 말한다. "올라오너라, 더 높은 영역으로. 그가 너를 예감한다면, 그는 너를 따를 것이다."
그레트헨이 파우스트를 구원한다. 그녀를 파멸시킨 남자를 그녀가 구원한다. 이것은 기독교 신학의 핵심이다. 용서와 사랑이 심판보다 강하다. 희생자가 가해자를 용서하고 구원한다.
작품은 신비로운 합창으로 끝난다. "모든 덧없는 것은 비유일 뿐.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여기서 이루어진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여기서 성취된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린다(Das Ewig-Weibliche zieht uns hinan)."
이 마지막 구절은 논쟁적이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성? 사랑? 은총? 이상?
괴테는 아마도 모든 의미를 포함시켰을 것이다. 여성성은 수용, 용서, 사랑, 창조의 상징이다. 파우스트는 평생 남성적 방식으로 살았다. 정복하고, 지배하고, 건설했다. 하지만 구원은 여성적 원리를 통해 온다. 그레트헨의 사랑, 성모의 은총.
더 깊은 의미는 "끌어올리는 힘(das Ziehende)"에 있다. 우리를 위로, 앞으로, 너머로 이끄는 힘. 갈망, 동경, 추구. 이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우리는 결코 완전히 만족하지 못한다. 항상 더 많은 것을, 더 나은 것을, 더 높은 것을 원한다. 이 끊임없는 추구가 우리의 저주이자 우리의 영광이다.
『파우스트』를 읽으면 기묘한 느낌이 든다. 이건 200년 전 작품인데 마치 지금 이야기 같다. 파우스트가 지식의 공허함을 느낀다면,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의미를 잃는다. 파우스트가 끝없이 새로운 경험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FOMO(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린다. 파우스트가 거대한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누군가를 희생시킨다면, 현대 문명은 매일 같은 일을 한다.
파우스트는 근대인의 원형이다. 그는 중세를 거부하고 근대를 선택했다. 전통적 지혜 대신 개인적 경험을. 신의 뜻 대신 인간의 의지를. 정적 질서 대신 역동적 변화를.
하지만 이 선택의 대가는 무엇인가? 그레트헨의 파멸. 필레몬과 바우키스의 죽음. 끊임없는 불만족.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완성.
우리도 같은 딜레마에 직면한다. 우리는 진보를 원한다. 하지만 진보는 파괴를 수반한다. 우리는 자유를 원한다. 하지만 자유는 책임을 요구한다.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추구한다. 하지만 선택은 포기를 의미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는 이미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었다. 편리함을 위해 프라이버시를 포기했다. 우리의 데이터를 기업에 넘기고 맞춤형 서비스를 받는다. 성장을 위해 환경을 파괴한다. GDP는 올라가지만 빙하는 녹는다. 효율성을 위해 인간성을 희생한다. 알고리즘이 우리의 선택을 대신한다.
파우스트처럼 우리도 묻는다. "이게 정말 내가 원하던 거였나?" 스마트폰이 우리를 더 자유롭게 만들었나, 아니면 더 얽매이게 만들었나? 소셜 미디어가 우리를 연결했나, 아니면 고립시켰나? 기술이 우리에게 시간을 주었나, 아니면 빼앗았나?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그레트헨들이 있다. 진보의 이름으로 희생되는 사람들. 재개발로 쫓겨나는 원주민들. 기후변화로 고통받는 미래 세대들. 자동화로 일자리를 잃는 노동자들. 우리는 "더 큰 선"을 말한다. 파우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필레몬과 바우키스도 어디에나 있다. 그들의 작은 오두막은 진보의 길에 놓인 장애물로 간주된다. 전통, 공동체, 느린 삶. 이런 것들은 효율성의 관점에서는 비합리적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사라질 때 우리는 무엇을 잃는가?
괴테는 파우스트를 구원하면서 논쟁적인 메시지를 남긴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는 구원받는다." 이것은 성과주의 문화의 정당화인가? 쉬지 않고 일하고, 끊임없이 개선하고, 결코 만족하지 않는 것이 미덕인가?
아니다. 괴테의 메시지는 더 미묘하다. 파우스트는 성공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게 아니다. 그의 프로젝트는 실패했다. 그는 환상 속에서 죽었다. 그가 본 미래는 환영이었다. 실제로는 무덤이 파여지고 있었을 뿐이다.
파우스트가 구원받은 이유는 그가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수하고, 넘어지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계속 나아갔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진실했다. 성공하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이것은 인간 조건의 본질이다. 우리는 완벽할 수 없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우리는 실수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는 것이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초월을 꿈꾸는 것이다.
하지만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파우스트를 최종적으로 구원하는 것은 그레트헨의 사랑이다. 그녀는 파우스트를 파멸시킨 사람을 용서하고 구원한다. 이것은 단순한 감상주의가 아니다.
괴테는 여기서 중요한 통찰을 제시한다. 우리는 혼자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 우리는 타인이 필요하다. 우리의 실수를 용서해줄 사람,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줄 사람,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할 사람.
현대 사회는 개인주의를 강조한다. 자수성가, 자기계발, 혼자 힘으로 성공하기. 하지만 파우스트의 이야기는 다른 것을 말해준다. 구원은 관계 속에서 온다. 용서는 공동체를 통해 작동한다. 사랑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린다." 이 구절을 21세기에 어떻게 읽어야 할까? 생물학적 여성성이 아니라 원리로서의 여성성. 수용, 포용, 돌봄, 연결.
파우스트의 삶은 남성적 원리에 지배되었다. 정복, 지배, 건설, 진보. 이것들은 필요하고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균형이 필요하다. 건설과 파괴, 진보와 보존, 개인과 공동체, 남성적 원리와 여성적 원리.
현대 문명은 균형을 잃었다. 우리는 너무 많이 정복하고 너무 적게 돌본다. 너무 많이 건설하고 너무 적게 보존한다. 너무 빨리 달리고 너무 적게 성찰한다. 괴테가 말하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은 이 균형을 회복하라는 요청이다.
『파우스트』는 해답을 주는 책이 아니다.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그리고 좋은 질문은 답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지식을 추구하되 지혜를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경험을 갈망하되 타인을 해치지 않으려면? 진보를 추구하되 인간성을 지키려면?
무한한 추구와 유한한 존재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균형을 찾을 것인가?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과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진보의 이름으로 무엇을 희생할 수 있고 무엇은 희생할 수 없는가? 효율성과 인간성 사이에서 어디에 선을 그을 것인가?
이 질문들은 200년 전에도 절실했고, 지금도 여전히 절실하며, 앞으로도 계속 절실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 딜레마이기 때문이다.
파우스트는 죽었지만 구원받았다. 그의 이야기는 끝났다.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아직 진행 중이다.
우리는 매일 선택한다. 서재에 머물 것인가, 세상으로 나갈 것인가? 완벽한 지식을 기다릴 것인가, 불완전한 행동을 시작할 것인가? 안전한 정체를 선택할 것인가, 위험한 변화를 감수할 것인가?
우리는 파우스트처럼 메피스토펠레스와 거래한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무언가를 포기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포기하는지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가 정당한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이다.
우리는 파우스트처럼 실수할 것이다. 타인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의도와 결과 사이의 간극에서 고통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멈출 수는 없다. 멈추는 것은 죽음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파우스트의 계약을 기억하라. "순간에게 머물러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그가 이 말을 했을 때, 그는 환상 속에 있었다. 그가 본 미래는 실현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가?
어쩌면 괴테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이다. 완벽한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적 만족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 추구하는 과정 자체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완성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의미 있다. 우리는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 수 없다. 하지만 순간을 충만하게 살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하지만 계속 질문할 수 있다.
마지막 말
파우스트는 장님이 되어 환상을 보며 죽었다. 그런데도 구원받았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어쩌면 진정한 지혜는 완벽한 비전을 갖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비전으로도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모든 답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질문을 계속 던지는 것이다. 실수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수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파우스트는 끊임없이 추구했고, 끊임없이 실패했고, 끊임없이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구원받았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멈추지 않는다면. 만약 우리가 질문을 계속한다면. 만약 우리가 타인을 용서하고 우리 자신도 용서받을 수 있다면.
『파우스트』의 이야기는 끝났다. 하지만 파우스트적 질문은 계속된다.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우리 문명의 진로 속에서. 우리 종의 미래 속에서.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위대한 문학의 본질일 것이다.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살아있게 하는 것. 200년 전의 텍스트가 오늘날에도 우리를 흔들고, 도전하고, 변화시키는 것.
파우스트는 말했다. "순간에게 머물러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하지만 순간은 머물지 않는다. 순간은 흘러간다. 그리고 새로운 순간이 온다. 우리는 그 흐름 속에 산다.
완벽한 순간을 기다리지 마라. 불완전한 지금을 살아라. 모든 답을 알기를 기다리지 마라. 올바른 질문과 함께 나아가라. 실수하지 않기를 바라지 마라. 실수로부터 배우기를 선택하라.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라. 파우스트를 구원한 것은 그레트헨의 사랑이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도 서로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용서와 연민과 연대.
파우스트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