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톨스토이가 1877년 완성한 『안나 카레니나』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첫 문장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적 명제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에서 19세기 러시아 귀족사회를 무대로 사랑과 결혼, 도덕과 열정,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규범 사이의 근본적인 갈등을 탐구한다. 그는 8년에 걸쳐 이 작품을 집필하며 여러 차례 전면적으로 수정했고, 그 과정에서 당초 계획했던 타락한 여인에 대한 도덕적 경고서는 인간 존재의 복잡성을 탐구하는 거대한 서사시로 변모했다.
안나 카레니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꽃이다. 아름답고 우아하며 지적인 그녀는 스무 살이나 연상인 관료 카레닌과 결혼하여 여덟 살 난 아들 세료자를 두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그녀의 삶은 완벽하다. 남편 알렉세이 카레닌은 고위 관료로서 권력과 명예를 누리고 있고, 안나는 그의 완벽한 아내로서 사교계에서 존경받는다. 하지만 모스크바로 오빠 스티바의 불륜 문제를 해결하러 갔다가 기차역에서 젊은 장교 브론스키를 만나는 순간, 그녀의 운명은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기차역에서 한 철도 노동자가 기차에 치여 죽는 사고가 발생하는데, 이는 안나의 운명을 암시하는 불길한 징조다. 브론스키는 키티 공작영애의 구혼자였지만, 안나를 본 순간 그녀에게 빠져든다. 안나 역시 자신이 느껴보지 못한 격렬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처음에 그녀는 이 감정을 부정하려 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소설을 읽으며 자신이 소설 속 여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톨스토이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관계를 묘사하면서 사랑의 이중성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처음에 두 사람의 만남은 짜릿한 흥분과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브론스키는 안나를 끈질기게 추구하고, 페테르부르크의 무도회에서 그녀와 춤을 추며 키티의 마음을 완전히 짓밟는다. 키티는 그날 밤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병에 걸린다. 안나는 남편과의 무미건조한 결혼생활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생생하게 살아있는 존재인지를 잊고 있었다. 카레닌은 규칙과 형식을 중시하는 관료일 뿐, 진정한 애정을 보여주지 못한다. 안나가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후 남편을 보는 장면은 충격적이다. 그녀는 처음으로 남편의 큰 귀가 눈에 들어온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브론스키는 그녀에게 다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이 열정은 곧 고통으로 변한다.
브론스키가 경마 대회에서 말을 타다가 추락하는 장면은 두 사람의 관계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다. 안나는 관중석에서 그의 낙마를 보고 절규하며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이로써 그녀와 브론스키의 관계가 공개적으로 드러나고, 카레닌은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게 된다. 안나가 브론스키와의 관계를 받아들이고 임신하게 되면서, 그녀는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기 시작한다. 남편 카레닌은 체면을 지키기 위해 이혼을 거부한다. 그는 안나에게 외형상의 결혼생활을 유지할 것을 요구하며, 스캔들을 피하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안나는 이 위선적인 상황에 숨이 막히지만 아들 세료자 때문에 참는다. 그녀가 브론스키의 딸을 출산할 때 산욕열로 죽을 뻔한 순간이 온다. 죽음의 문턱에서 안나는 남편에게 용서를 구하고, 카레닌은 처음으로 진정한 기독교적 용서의 감정을 느낀다. 그는 브론스키까지 용서하고 안나의 사생아도 받아들이려 한다. 하지만 안나가 회복하자 이 모든 것이 변한다. 카레닌의 용서는 죽어가는 여자에 대한 것이었지, 살아서 여전히 브론스키를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흥미로운 점은 톨스토이가 안나의 파멸을 단순히 간통의 결과로만 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안나를 둘러싼 사회 전체의 위선을 폭로한다. 안나의 오빠 스티바는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지만 남자라는 이유로 용서받는다. 소설 시작 부분에서 그는 집안의 가정교사와 불륜을 저질렀고, 아내 돌리는 절망에 빠져 있다. 하지만 스티바는 약간의 불편함 후에 곧 평소대로 돌아간다. 그는 여전히 사교계를 누비고, 좋은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며, 새로운 관직을 얻는다. 사교계의 남성들은 자유롭게 정부를 두지만, 안나는 같은 행동으로 추방당한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베트시 공작부인 같은 여성들이 교묘하게 불륜을 즐기면서도 형식을 지켰다는 이유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한다는 점이다. 카레닌은 기독교적 용서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명예와 체면만을 생각한다. 그는 안나가 회복한 후 이혼을 해주겠다고 했다가 마음을 바꾸고, 안나가 딸을 보는 것조차 금지한다. 그가 안나를 용서하려 했던 유일한 순간은 그녀가 출산 후 죽을 것 같았을 때였고, 그마저도 그녀가 회복하자 곧 증오로 바뀐다.
안나의 비극은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만약 그녀가 교묘하게 관계를 숨기고 표면적인 결혼생활을 유지했다면, 스티바처럼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에 정직하며, 그 정직함이 그녀를 파괴한다. 브론스키와 함께 이탈리아로 떠난 후 돌아왔을 때, 안나는 완전히 고립된다. 그들은 브론스키의 시골 영지에서 살지만, 안나는 법적으로 여전히 카레닌의 아내이기 때문에 정당한 지위가 없다. 극장에 갔을 때 사람들이 그녀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장면은 참을 수 없이 잔인하다. 한 귀부인은 안나를 보고 오페라 글라스를 들어 노골적으로 관찰하더니 옆 사람에게 뭔가 속삭인다. 사람들은 안나가 있는 박스석을 쳐다보며 웃고, 안나가 알던 사람들조차 그녀를 못 본 척한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 세료자를 볼 수도 없다. 한 번 몰래 세료자의 생일날 그를 찾아갔지만, 카레닌이 이를 알고 더욱 엄격히 금지한다. 세료자는 어머니를 그리워하지만 아버지와 가정교사의 통제 아래 점차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지워간다. 안나는 사회적 지위도 잃었으며, 점점 브론스키조차 자신을 떠날 것이라는 집착에 사로잡힌다.
톨스토이는 안나의 심리적 몰락을 섬세하게 추적한다. 처음에는 당당했던 그녀가 점점 불안과 질투에 잠식되어간다. 브론스키가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것도,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그녀에게는 배신처럼 느껴진다. 브론스키는 처음에는 안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점차 제한된 삶에 답답함을 느낀다. 그는 지방 선거에 관심을 갖고, 영지 경영에 몰두하려 하지만, 안나는 그가 자신에게서 멀어진다고 느낀다. 아이러니하게도 브론스키는 안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안나가 원하는 전부가 될 수 없다. 안나는 모든 것을 걸었지만, 브론스키에게는 그 밖의 삶이 필요하다. 그녀는 아편 팅크에 의존하게 되고, 밤에 잠을 자기 위해, 낮에 깨어있기 위해 약을 먹는다. 현실과 망상의 경계가 흐려진다. 그녀는 거리를 걸으며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비난한다고 느끼고, 지나가는 간판과 광고 문구들조차 자신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날 브론스키와 사소한 일로 다투고 나서, 그녀는 그에게 전보를 보낸다. 하지만 답장이 오지 않자 절망한다. 마침내 기차역으로 가서 그녀는 자신의 삶이 시작된 그 장소에서, 첫 만남에서 목격했던 철도 노동자의 죽음을 떠올리며 달려오는 기차 밑으로 몸을 던진다. 그녀의 마지막 생각은 "주님, 모든 것을 용서하소서"라는 기도였고, 그 순간 촛불처럼 환하게 빛나던 그녀의 삶은 영원히 꺼진다.
하지만 『안나 카레니나』는 안나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톨스토이는 안나의 비극과 병행하여 레빈이라는 인물을 통해 전혀 다른 삶의 궤적을 보여준다. 레빈은 톨스토이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인물로, 러시아 귀족이지만 도시 생활을 싫어하고 자신의 영지에서 농민들과 함께 일하며 살아간다. 그는 콘스탄틴 드미트리치 레빈으로, 이름에서도 톨스토이 자신의 이름 레프(Lev)의 흔적이 보인다. 레빈은 지식인이지만 이론보다 실천을 중시하고, 귀족이지만 농민의 삶에 깊이 공감한다. 그는 키티를 사랑하지만 처음에 거절당한다. 키티가 브론스키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키티는 브론스키의 화려함과 안나를 본 후 상처받은 레빈의 소박함 사이에서 잘못된 선택을 한다. 하지만 브론스키가 안나에게 빠지면서 키티는 버림받고, 깊은 상처와 함께 병을 앓는다. 그녀는 독일 온천 마을로 요양을 가고, 거기서 가식적인 자선 활동의 허구를 깨닫는다. 키티는 진정한 선행이란 요란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실천하는 것임을 배우고 성숙해진다.
레빈과 키티의 사랑은 안나와 브론스키의 열정적인 사랑과 대조를 이룬다. 레빈이 키티에게 다시 청혼하는 장면은 조용하면서도 진실하다. 그는 테이블에 분필로 첫 글자만 쓰고, 키티는 그것을 읽는다. "당신은 그때 제게 그럴 수 없다고 하셨지만, 그것이 영원히 불가능한 것이었습니까?" 키티는 머뭇거리지 않고 답한다. 그들의 결혼은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다. 레빈은 결혼 전날 밤 자신의 과거를 솔직히 밝히기 위해 일기를 키티에게 보여주는데, 그 안에는 그의 과거 연애와 방탕했던 시절의 기록이 담겨 있다. 키티는 충격을 받고 눈물을 흘린다. 신혼 초기에도 그들은 사소한 것들로 다투고 오해한다. 레빈은 가정 경제에 대해 키티가 무지하다고 생각하고, 키티는 남편이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현실적이다. 톨스토이는 이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두 불완전한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을 그린다. 그들은 싸우고 화해하고, 오해하고 이해하며, 점차 진정한 부부가 되어간다.
레빈의 형 니콜라이가 죽어가는 장면은 소설에서 가장 강렬한 부분 중 하나다. 니콜라이는 폐결핵을 앓고 있는 레빈의 이복형으로, 방탕한 삶을 살다가 초라한 시골 여관에서 죽어간다. 레빈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느끼며 형의 방에 들어서기조차 두려워한다. 그는 형의 앙상한 몸과 죽음의 냄새 앞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하지만 임신한 키티는 자연스럽게 병자를 돌본다. 그녀는 방을 청소하고, 병자를 씻기고, 약을 먹이며, 니콜라이에게 위안을 준다. 죽음과 생명이 공존하는 이 장면에서 톨스토이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제기한다. 니콜라이는 죽음을 앞두고도 회복될 것이라는 망상에 매달리고, 레빈은 그 거짓말에 동조하면서 자신의 비겁함을 느낀다.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인간은 끝까지 그것을 부정하려 한다.
레빈은 평생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인물이다. 그는 농사일에 몰두하면서도, 철학책을 읽으면서도, 답을 찾지 못한다. 그는 농업 개혁에 대한 책을 쓰려 하지만, 이론과 실제 사이의 간극에 좌절한다. 그는 러시아 농민의 삶에서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려 하지만, 농민들은 그의 이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느 여름날 레빈은 농부들과 함께 건초를 베며 육체노동의 기쁨을 느낀다. 낫을 휘두르고, 땀을 흘리고, 농부들과 함께 빵을 먹는 그 순간에 그는 완전한 행복을 경험한다. 하지만 이 행복도 오래가지 않는다. 그가 아들이 태어난 후에도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은 인간적이다. 아들을 처음 봤을 때 그는 기대했던 것과 달리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연민과 혐오감을 느낀다. 이 작고 붉은 생명체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기가 재채기를 할 때, 레빈은 처음으로 부성애를 느낀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레빈은 한 농부와의 대화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 레빈은 밭에서 일하는 농부 표도르와 이웃 농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표도르는 어떤 사람은 자기 배만 채우려 살지만, 어떤 사람—이웃 포카니치 같은 이는—"영혼을 위해", "하느님을 위해" 산다고 말한다. 이 단순한 진리가 레빈에게 번개처럼 다가온다. 그는 이성적으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지만, 의미는 이미 그가 살아온 방식 속에 있었다. 선하게 살고, 사랑하고, 타인을 돕는 것, 그것이 바로 의미였던 것이다. 그는 철학자들의 책에서가 아니라 무학한 농부의 입에서 진리를 발견한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이것을 거창한 계시로 그리지 않는다. 레빈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폭풍우를 만나고, 아내와 아들이 있는 나무 아래로 번개가 떨어질 뻔한 것을 보고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는 여전히 화를 내고, 마부에게 짜증을 내고, 불완전한 인간이다.
톨스토이는 안나와 레빈이라는 두 개의 축을 통해 인간 존재의 양극단을 탐구한다. 안나는 열정을 선택하고 파멸하며, 레빈은 단순한 삶과 신앙을 통해 구원을 찾는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안나를 단순히 비난하지 않는다. 그녀의 비극은 그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위선적이고 불평등한 사회구조의 산물이다. 동시에 레빈의 삶이 완벽한 답은 아니다. 소설 마지막 장면에서 레빈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갑자기 성자가 된 것이 아님을 안다. 그는 여전히 화를 낼 것이고, 짜증을 낼 것이고, 실수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에게는 어둠 속에서 길을 비춰주는 별이 있다. 그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계속 살아갈 힘을 얻었을 뿐이다. 이것이 톨스토이가 제시하는 겸손한 지혜다.
『안나 카레니나』가 15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강력한 이유는 톨스토이가 제기한 질문들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행복과 사회적 규범이 충돌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열정과 의무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사랑이 충분한가, 아니면 다른 무엇이 필요한가. 삶의 의미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톨스토이는 이 질문들에 쉬운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그는 깊이 있는 인간들의 삶을 통해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800페이지가 넘는 이 장편소설에는 수십 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각자의 이야기가 촘촘히 짜여 있다. 돌리의 고통, 키티의 성장, 스티바의 쾌락주의, 카레닌의 경직성, 브론스키의 좌절, 그리고 레빈의 탐구—이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태피스트리를 이룬다.
안나가 기차 밑으로 뛰어드는 순간, 우리는 그녀에게 연민을 느낀다. 동시에 레빈이 건초밭에서 농부들과 함께 일하며 느끼는 단순한 기쁨에도 공감한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진실이라는 것, 인간 삶이 이처럼 복잡하고 모순적이라는 것,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톨스토이의 위대함이다. 그는 도덕주의자도, 허무주의자도 아니다. 그는 단지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들의 기쁨과 고통을 똑같이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안나 카레니나』는 한 여인의 비극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탐구이며, 그렇기에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책을 덮고 나서도 우리는 안나의 마지막 눈빛을, 레빈이 본 별빛을 잊지 못한다. 그것이 위대한 문학의 힘이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95%88%EB%82%98_%EC%B9%B4%EB%A0%88%EB%8B%88%EB%82%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