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비극 중에서도 『리어왕』만큼 관객에게 잔인하고 참혹한 인간 조건을 적나라하게 제시하는 작품은 드물다. 1605년경 집필된 이 작품은 단순한 가족 비극을 넘어서, 권력의 본질, 정의의 허상, 그리고 인간 존재의 근원적 취약성을 탐구하는 철학적 명상으로 기능한다. 리어왕이라는 한 노인의 몰락을 통해 셰익스피어는 문명이라는 얇은 베일 아래 숨겨진 혼돈과 잔혹함을 드러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모든 사회적 질서와 도덕적 확신에 의문을 품게 만든다.
극은 리어왕이 자신의 왕국을 세 딸에게 나눠주려는 결정으로 시작된다. 팔십 평생을 통치한 노왕은 이제 왕관의 무게를 내려놓고 여생을 편히 보내고자 한다. 그러나 이 분할은 단순한 상속이 아니라 사랑의 공개적 선언을 요구하는 기묘한 의례로 진행된다. 고네릴과 리건은 과장된 수사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경쟁적으로 표현한다. 고네릴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눈에 귀한 것보다, 자유와 건강보다"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리건은 언니의 말에 자신도 같은 마음이며 오직 아버지의 사랑 속에서만 행복을 찾는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화려한 수사에 만족한 리어는 왕국의 비옥한 땅을 나눠준다. 그러나 막내딸 코델리아는 "저는 제 본분대로 사랑합니다"라는 간결하고 진실한 답변을 내놓는다. 그녀는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언니들처럼 과장되게 말할 수는 없으며, 언젠가 결혼하면 남편에게도 사랑을 나눠야 한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이 순간 리어의 치명적인 결함이 드러난다. 그는 코델리아의 솔직함을 완고함과 불손으로 받아들이며 분노에 휩싸인다. "진실이 그대의 지참금이 되게 하라"며 코델리아를 상속에서 제외하고 추방한다. 왕국을 둘로 나눠 고네릴과 리건에게 주며, 자신은 백 명의 기사를 거느리고 두 딸의 집을 번갈아 방문하며 왕의 칭호만 유지하기로 한다. 충신 켄트 백작이 이 결정의 부당함을 간언하자, 리어는 그마저 추방해버린다. 프랑스 왕만이 지참금 없는 코델리아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인다. 리어는 자신이 진정한 사랑과 아첨을 구분하지 못하며, 실체보다 외양을,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코델리아를 추방하고 왕국을 두 악한 딸에게 나눠주는 그의 결정은 단지 개인적 실수가 아니라, 권력이 어떻게 인간의 판단력을 왜곡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행위다.
리어의 비극은 권력을 포기한 후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먼저 고네릴의 저택에 머무르던 리어는 딸이 자신의 수행원들을 문제 삼고 그들의 행동을 비난하는 것을 목격한다. 고네릴은 아버지에게 수행원 수를 줄이라고 요구하며, 리어가 손님이 아니라 자신의 집에 사는 사람임을 상기시킨다. 분노한 리어는 고네릴을 "타락한 독수리"라 부르며 저주를 퍼붓고 리건에게로 향한다. 그러나 리건의 태도는 더욱 냉혹하다. 두 자매는 합심하여 아버지의 수행원을 점점 더 줄이라고 압박한다. 리건은 "무엇 때문에 스물다섯 명이나 열 명이나 다섯 명이 필요합니까?"라고 묻고, 고네릴은 더 나아가 "아예 한 명도 필요 없지 않습니까?"라고 말한다. 왕관을 벗은 리어는 왕으로서의 권위도 함께 잃었음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이유를 따지지 마라! 가장 비천한 거지도 가장 하찮은 것에 대해 쓸모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삶을 필요한 것만으로 줄인다면,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외치는 리어의 절규는 인간 존엄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수모를 견디지 못한 리어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황야로 나선다. 충실한 광대와 변장한 켄트만이 그를 따른다. 폭풍우 장면은 이 작품의 정서적·철학적 중심부다. 광기로 치닫는 리어가 황야에서 폭풍우를 맞으며 자연의 격노와 자신의 내면적 혼란을 동일시하는 이 장면에서, 셰익스피어는 인간 존재의 나약함을 우주적 규모로 확대한다. "불어라, 바람아, 터질 때까지 불어라! 쏟아져라, 비야!"라고 외치는 리어는 더 이상 왕이 아니라 벌거벗은 인간이며, 문명의 보호막을 잃은 채 자연의 무자비한 힘 앞에 선 연약한 존재다.
폭풍우 속에서 리어는 미친 거지로 가장한 에드거를 만난다. 에드거는 글로스터 백작의 적자로, 사생아 동생 에드먼드의 음모로 아버지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가엾은 톰"이라는 거지로 변장하고 있다. 거의 벌거벗은 채 떨고 있는 이 거지를 보며 리어는 깊은 깨달음에 이른다. "그대가 인간의 본질인가? 인간은 가난하고 벌거벗고 두 갈래로 갈라진 동물에 불과하다"고 선언하는 리어는 스스로 옷을 벗으려 한다. 왕의 예복과 권력의 상징들을 모두 벗어던지면, 자신도 이 비참한 거지와 다를 바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인식한 것이다. 이 장면에서 리어는 동시에 개인적 비극을 겪는 한 노인이면서, 인간 조건 전체를 대변하는 보편적 인물이 된다.
글로스터의 부차적 플롯은 리어의 이야기를 반향하며 극의 주제를 강화한다. 교활한 사생아 에드먼드는 적자 에드거가 아버지를 배신하려 한다는 위조 편지를 꾸며 글로스터를 속인다. 에드먼드의 음모는 정교하고 냉소적이다. 그는 극 초반 독백에서 자신이 사생아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사회 질서에 분노를 드러내며, "자연이여, 그대가 나의 여신이다"라고 선언한다. 관습과 법이 아닌 자연의 약육강식 논리를 따르겠다는 그의 선언은 극 전체에 흐르는 문명과 야만, 질서와 혼돈의 긴장을 상징한다. 사생아 에드먼드의 음모로 적자 에드거를 의심하게 된 글로스터는 리어처럼 외양에 속아 진실을 보지 못한다.
글로스터는 리어에게 동정심을 보이고 그를 돕다가 리건의 남편 콘월 공작에게 발각된다. 콘월과 리건은 글로스터를 의자에 묶고 심문한다. 글로스터가 리어를 도버로 보내 코델리아와 만나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콘월은 잔혹한 처벌을 내린다. "내 눈이 그를 다시 보게 하지 마라"는 리건의 말에 따라, 콘월은 글로스터의 눈을 하나씩 손으로 뽑아낸다. 이 잔혹한 장면은 셰익스피어 전체 작품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육체적 폭력 중 하나이며, 무대 위에서 직접 실행된다는 점에서 관객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한 하인이 주군의 잔혹함을 견디지 못하고 칼을 들어 콘월을 공격하지만, 리건이 뒤에서 하인을 찔러 죽인다. 콘월도 부상으로 인해 곧 죽지만, 글로스터는 이미 두 눈을 모두 잃은 후다.
눈이 뽑힌 글로스터는 에드거가 무고했음을 깨닫고 절망에 빠진다. "나는 볼 수 있을 때 비틀거렸다"고 고백하는 그는 자살을 결심한다. 거지로 변장한 에드거가 아버지를 도버 절벽으로 안내하는 장면은 극 중 가장 기묘하고 연극적인 순간이다. 실제로는 평지에 있으면서도 에드거는 아버지에게 높은 절벽 위에 있다고 말하며, 글로스터는 뛰어내린다. 물론 그는 땅에 쓰러질 뿐이지만, 에드거는 목소리를 바꿔 절벽 아래에서 올라온 사람인 척하며 "그대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고 말한다. 이 기이한 연극 속 연극을 통해 글로스터는 죽음의 유혹을 극복하고 "앞으로는 썩을 때까지 견디겠다"는 초월적 수용에 도달한다. 육체적 시력을 잃은 후에야 글로스터는 비로소 영적 통찰을 얻는다. 이는 『리어왕』 전체를 관통하는 역설이다. 시각과 통찰, 권력과 무력함, 광기와 지혜가 끊임없이 전도되며, 겉으로 보이는 것과 실제 본질 사이의 간극이 비극의 핵심 동력으로 작용한다.
한편 코델리아는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아버지를 구하러 영국에 상륙한다. 그녀의 부하들이 미친 상태로 들판을 헤매는 리어를 찾아내고, 의사의 치료를 받은 리어는 정신을 차리고 코델리아와 재회한다. 이 장면은 극 전체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다. 깨어난 리어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 딸이 누구인지 혼란스러워한다. 코델리아가 무릎을 꿇자 리어는 "무릎 꿇지 마시오. 나는 어리석고 멍청한 늙은이요. 팔십이 넘었소"라며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한다. 권력의 위계는 완전히 역전되고 진정한 인간적 관계가 회복된다. 리어는 "내가 독을 마셔야 한다면 마시겠소. 나는 그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소"라고 말하지만, 코델리아는 "나를 사랑할 이유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라며 부드럽게 대답한다.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이는 인간이 고통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진정한 겸손과 공감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이 감동적 재회 이후에도 어떠한 위안이나 구원도 제공하지 않는다. 프랑스 군대는 에드먼드가 이끄는 영국군에게 패배하고, 리어와 코델리아는 포로가 된다. 에드먼드는 은밀히 부하에게 코델리아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한편 고네릴과 리건은 둘 다 에드먼드를 사랑하게 되어 서로 질투한다. 리건은 고네릴이 준 독에 중독되어 죽고, 진실이 밝혀지자 고네릴은 자살한다. 에드거는 결투에서 에드먼드를 치명상을 입히고, 죽어가는 에드먼드는 뒤늦게 양심의 가책을 느껴 코델리아 살해 명령을 취소하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극의 마지막 장면은 셰익스피어 비극 중에서도 가장 참혹하다. 리어가 교수형당한 코델리아의 시신을 안고 무대에 나타난다. "울부짖어라, 울부짖어라! 오, 여러분은 돌이요, 돌이라면 차라리 낫겠소"라고 절규하는 리어는 딸의 입에 깃털을 대어 숨결을 확인하려 한다. "왜 개나 말이나 쥐는 살아 있는데, 너는 숨을 쉬지 않느냐?"는 그의 질문에는 답이 없다. 우주는 도덕적으로 무관심하며, 선한 자가 보상받고 악한 자가 처벌받는다는 정의로운 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리어의 죽음조차 평화롭지 않으며, 그는 죽는 순간까지 코델리아가 살아 있기를 망상적으로 희망한다. 켄트는 "그를 불러내지 마시오. 그의 영혼을 고문의 틀에 더 오래 매어두지 마시오"라고 말한다. 살아남은 에드거와 올버니 공작은 황폐해진 왕국을 떠안으며, "우리는 본 것을 말해야 하고, 느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냉정한 대사로 극은 끝난다.
이러한 허무주의적 비전은 당대 관객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17세기 관객들은 이 결말이 너무 견디기 힘들어서, 1681년부터 1838년까지 영국 무대에서는 네이엄 테이트의 개작본이 공연되었는데, 이 버전에서는 코델리아가 살아남아 에드거와 결혼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작은 셰익스피어의 비전을 근본적으로 왜곡한다. 『리어왕』의 힘은 정확히 그 타협 없는 잔혹함에 있으며, 관객에게 편안한 해답을 제공하지 않고 인간 조건의 끔찍한 진실을 직시하도록 강요한다는 점에 있다.
『리어왕』이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강력한 울림을 유지하는 이유는 이 작품이 다루는 질문들이 여전히 답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력은 인간을 어떻게 부패시키는가? 우리는 어떻게 진실과 거짓을, 사랑과 아첨을 구분하는가? 세계에는 도덕적 질서가 존재하는가, 아니면 우리는 무관심한 우주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연약한 존재에 불과한가?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이 질문들과 씨름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깊은 연민과 냉정한 통찰로 그려내며, 관객 스스로가 이 근원적 문제들과 대면하도록 만든다.
결국 『리어왕』은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가장 어둡고도 가장 정직한 탐구 중 하나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편안함을 주지 않으며, 쉬운 해답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 속에서, 그 타협 없는 진실 추구 속에서, 셰익스피어는 인간 경험의 가장 깊은 층위를 건드린다. 리어의 절규는 4세기가 지난 지금도 우리 안에서 울려 퍼지며, 우리 자신의 취약함과 오만함,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인간 존엄의 가능성을 상기시킨다. 이것이 진정한 비극의 힘이며, 『리어왕』이 셰익스피어의 가장 위대한 성취 중 하나로 남아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