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멕베스는 인간 내면의 어둠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1606년경 집필된 이 비극은 스코틀랜드의 실존 인물 맥베스 왕을 소재로 하지만, 역사적 사실보다는 인간 본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에 더 가까운 작품이다. 셰익스피어는 권력욕이라는 씨앗이 어떻게 한 영웅을 폭군으로 변모시키고, 결국 파멸로 이끄는지를 보여주면서, 도덕적 선택의 무게와 그 결과가 초래하는 심리적 붕괴를 섬뜩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극은 천둥과 번개 속에서 세 마녀가 등장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름다운 것은 추하고, 추한 것은 아름답다"라는 그들의 주문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암시한다. 선과 악, 진실과 거짓,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세계, 그것이 바로 멕베스가 발을 디디게 될 세계다. 이 첫 장면은 단순한 분위기 조성을 넘어, 인간의 판단력이 얼마나 쉽게 왜곡될 수 있는지에 대한 예고편이다.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멕베스와 뱅코는 황야에서 마녀들을 만난다. 마녀들은 멕베스에게 코더의 영주가 되고, 궁극적으로는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뱅코에게는 왕은 되지 못하지만 그의 후손이 왕위를 이을 것이라는 예언을 한다. 멕베스는 던컨 왕을 위해 노르웨이군을 물리친 충성스러운 장군이었다. 그는 용맹함으로 칭송받았고, 왕의 신임을 받는 신하였다. 그러나 마녀들의 예언은 그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야망의 씨앗에 물을 준다. 첫 번째 예언인 코더의 영주 직위가 즉시 실현되자, 멕베스의 마음속에서는 더 큰 예언에 대한 갈망이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마녀들이 멕베스에게 왕을 죽이라고 명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단지 미래를 예언했을 뿐이다. 그 예언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행동할지는 전적으로 멘베스의 선택이다. 셰익스피어는 이를 통해 운명과 자유의지라는 철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멕베스의 비극은 외부적 운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내면에서 자라난 욕망과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로 한 선택의 결과다.
멕베스가 왕의 성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아내 레이디 멕베스는 남편의 편지를 통해 예언에 대해 알게 된다. 레이디 멕베스는 작품 속에서 가장 복잡하고 매혹적인 인물 중 하나다. 그녀는 남편이 "인간의 젖에 너무 가득 차" 있어서 왕위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잔인함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녀는 악령에게 자신의 여성성을 제거해달라고 간청하며, 자신을 잔인함으로 채워달라고 기도한다. 이 장면은 당시 젠더 관념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레이디 멕베스는 여성이 가진 것으로 여겨지던 자비와 온유함을 거부하고, 남성적이라고 간주되던 폭력성과 야망을 추구한다.
던컨 왕이 멕베스의 성을 방문했을 때, 멕베스는 심각한 내적 갈등에 빠진다. 그는 독백을 통해 던컨을 살해해야 할 이유와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저울질한다. 던컨은 훌륭한 왕이며, 자신에게 신뢰와 영예를 주었다. 멕베스는 신하로서, 친척으로서, 그리고 주인으로서 던컨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는 "야망 외에는 이 일을 부추기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인정한다. 이 독백은 멕베스가 자신의 행동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완전히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무지나 착각 속에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명백히 잘못된 줄 알면서도 야망에 이끌려 행동하기로 선택한다.
멕베스는 처음에는 계획을 포기하려 한다. 그러나 레이디 멕베스의 조롱과 설득에 무너진다. 그녀는 남편의 남자다움에 의문을 제기하며, 자신이라면 젖을 먹이던 아기의 두개골이라도 박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극단적인 비유는 레이디 멕베스의 결의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를 보여준다. 그녀의 영향력은 멕베스를 살인으로 몰아간다. 하지만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최종 선택은 멕베스 자신이 했다는 점이다. 그는 외부의 압력에 굴복했지만, 그 굴복 자체가 그의 선택이었다.
살인이 벌어지는 밤, 멕베스는 공중에 떠 있는 환영의 단검을 본다. 그 단검은 그를 던컨의 방으로 이끈다. 이 환각은 멕베스의 정신 상태가 이미 불안정해지기 시작했음을 암시한다. 그는 던컨을 죽이고 돌아와서는 피묻은 단검들을 들고 나온다. 레이디 멕베스는 냉정함을 유지하며 단검들을 다시 가져다 놓고 경비병들에게 피를 묻힌다. 그녀는 "조금의 물이면 우리를 이 일에서 깨끗하게 씻어낼 것"이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나중에 그녀 자신의 광기를 통해 무시무시하게 반박된다.
살인이 발견된 후, 멕베스는 분노한 척하며 경비병들을 죽인다. 이는 증거를 인멸하려는 계획적 행동이지만, 동시에 그의 폭력성이 통제 불능 상태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던컨의 아들들인 말콤과 도날베인은 자신들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각각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로 도망친다. 이들의 도주는 의도치 않게 멕베스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사람들은 왕자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도망친 것으로 의심하게 되고, 멕베스는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멕베스는 안정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뱅코에 대한 예언, 즉 뱅코의 후손이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에 사로잡힌다. 멕베스는 "불임의 왕관"을 쓰고 "열매 없는 왕홀"을 잡고 있다고 한탄한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팔아 얻은 왕위가 결국 뱅코의 자손에게 넘어갈 것이라는 생각을 견딜 수 없다. 첫 번째 살인이 두 번째 살인을 낳는다. 멕베스는 암살자들을 고용해 뱅코와 그의 아들 플리언스를 죽이려 한다. 뱅코는 죽지만 플리언스는 탈출한다. 이는 예언이 여전히 실현될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뱅코의 살해 후 열린 연회에서 멕베스는 뱅코의 유령을 본다. 이 장면은 멕베스의 심리적 붕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유령을 보고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손님들 앞에서 자신의 최책감을 거의 고백할 뻔한다. 레이디 멕베스는 필사적으로 상황을 수습하려 하지만, 멕베스의 정신은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가 보는 유령은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그의 죄책감이 만들어낸 환영이다. 셰익스피어는 이를 통해 범죄가 범죄자에게 미치는 심리적 영향을 탐구한다. 처벌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멕베스는 다시 마녀들을 찾아간다. 그는 더 많은 예언을 듣고 싶어 한다. 마녀들은 세 가지 환영을 보여준다.
첫째, 갑옷 입은 머리가 나타나 맥더프를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둘째, 피로 물든 아이가 나타나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는 멕베스를 해칠 수 없다"고 말한다.
셋째, 왕관을 쓴 아이가 나무를 들고 나타나 "버냄의 숲이 던시네인 언덕으로 오기 전까지는 멕베스가 정복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멕베스는 이 예언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며 안심한다. 숲이 움직일 수 없고, 모든 인간은 여자에게서 태어나므로, 그는 무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환영, 즉 뱅코의 후손들이 왕관을 쓴 긴 행렬을 보고 절망한다.
맥더프가 잉글랜드로 도망쳤다는 소식을 들은 멕베스는 그의 성을 습격해 맥더프의 아내와 아이들을 학살한다. 이 잔혹한 행위는 멕베스가 완전히 인간성을 상실했음을 보여준다. 처음 던컨을 죽일 때 그가 느꼈던 도덕적 갈등은 이제 사라졌다. 그는 이제 의심만으로도 사람들을 죽이는 폭군이 되었다. 맥더프 가족의 살해는 극 중에서 가장 비통한 장면 중 하나다. 순진무구한 아이들까지 학살하는 장면은 권력이 부패했을 때 얼마나 무서운 폭력을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한편 레이디 멕베스는 정신적으로 붕괴되고 있다. 그녀는 몽유병 상태에서 손을 씻는 행동을 반복한다. "나가라, 저주받은 얼룩이여!"라고 외치며, 손에서 피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아라비아의 모든 향료로도 이 작은 손을 향기롭게 할 수 없다"는 그녀의 대사는 죄책감이 씻어낼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한때 "조금의 물이면 깨끗해진다"고 말했던 그녀는 이제 어떤 것으로도 자신을 정화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의 광기는 억압된 죄책감이 표면으로 분출되는 것이다. 강철 같았던 그녀의 의지는 무너지고, 결국 그녀는 자살한다.
잉글랜드에서 말콤과 맥더프는 군대를 모아 스코틀랜드로 진군한다. 그들은 버냄의 숲을 지나며 병사들에게 나뭇가지를 꺾어 위장하도록 명령한다. 이렇게 해서 "숲이 움직인다"는 예언이 실현된다. 멕베스는 처음에 자신의 무적을 믿으며 싸우지만, 숲이 움직인다는 소식을 듣고 예언에 속았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는 "이제 나는 저 이중혀의 악마들이 우리와 장난쳤음을 의심하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전투에서 멕베스는 맥더프와 맞닥뜨린다. 멕베스는 여전히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는 나를 해칠 수 없다"는 예언을 믿으며 맥더프와 싸우기를 거부하려 한다. 그러나 맥더프는 자신이 제왕절개로 태어났기 때문에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밝힌다. 이 순간 멕베스는 자신이 완전히 예언의 함정에 빠졌음을 깨닫는다. 마녀들의 예언은 기술적으로는 진실이었지만, 그가 이해한 방식은 틀렸다. 그들은 그를 속인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를 속이도록 유도했다.
그럼에도 멕베스는 끝까지 싸운다. "나는 시도해보겠다"라는 그의 마지막 대사는 패배를 알면서도 항복하지 않는 비극적 영웅의 모습을 보여준다. 맥더프는 멕베스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들고 나타나며, 말콤이 정당한 왕으로 선포된다. 질서는 회복되지만, 그 대가는 엄청난 피와 고통이었다.
멕베스는 단순히 악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멕베스는 처음부터 악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용감한 장군이었고, 충성스러운 신하였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 있던 야망이라는 씨앗이 외부적 유혹과 만나면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자라났다. 셰익스피어는 선과 악이 명확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공존하며, 선택과 상황에 따라 어느 한쪽이 우세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이 400년이 넘도록 사랑받는 이유는 그것이 다루는 주제가 시대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권력욕, 야망, 죄책감, 도덕적 타락은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서 발견되는 인간 본성의 측면들이다. 멕베스의 비극은 단지 한 개인의 파멸이 아니라, 잘못된 선택이 어떻게 연쇄적인 파괴를 낳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성이 어떻게 상실되는지를 보여주는 보편적 이야기다.
또한 이 작품은 언어의 힘을 극대화한다. 셰익스피어의 시적 언어는 인물들의 내면 상태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멕베스의 독백들은 인간 심리에 대한 가장 깊은 통찰을 담고 있으며, "내일, 또 내일, 또 내일"로 시작하는 그의 허무주의적 독백은 삶의 무의미함에 대한 가장 강력한 표현 중 하나로 꼽힌다. "인생은 걸어다니는 그림자, 무대 위에서 잠시 거들먹거리다 사라지는 가련한 배우"라는 그의 말은 모든 것을 잃은 자의 절망을 완벽하게 포착한다.
멕베스는 또한 권력의 본질에 대한 정치적 논평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는 제임스 1세의 시대에 이 작품을 썼으며, 왕에 대한 충성, 정당한 계승, 폭정의 위험성 같은 주제들은 당시의 정치적 맥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던컨은 신성한 왕권의 화신으로 제시되며, 그의 살해는 자연 질서 자체에 대한 위반으로 묘사된다. 살인 후 말들이 서로를 잡아먹고, 낮인데도 어둠이 계속되는 등 자연계의 이상 현상들은 도덕적 질서와 자연적 질서가 연결되어 있다는 당시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힘은 인간 심리에 대한 탐구에 있다. 멕베스와 레이디 멕베스의 심리적 여정은 현대 심리학이 발견한 많은 것들을 선취한다. 억압된 죄책감이 어떻게 정신을 붕괴시키는지, 권력이 어떻게 사람을 타락시키는지, 자기 합리화가 어떻게 더 큰 악을 정당화하는지를 이 작품은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게 묘사한다. 멕베스는 첫 살인 후 점점 더 쉽게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데, 이는 도덕적 둔감화의 과정을 보여준다. 처음의 거대한 도덕적 장벽이 무너지고 나면, 다음 장벽들은 점점 더 쉽게 무너진다.
레이디 멕베스의 몰락은 특히 비극적이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고 "악령"이 되기를 원했지만, 억압된 것은 사라지지 않고 내면에서 썩어가며 결국 폭발한다. 그녀의 강인함은 진정한 힘이 아니라 자신을 속이는 것이었다. 인간의 양심은 그렇게 쉽게 제거될 수 없으며, 억압된 인간성은 결국 복수한다는 것을 그녀의 운명이 보여준다.
멕베스는 또한 자기 파괴적 예언의 메커니즘을 탐구한다. 마녀들의 예언은 그 자체로 멕베스의 선택을 제약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언에 대한 멕베스의 반응, 즉 그것을 실현하려는 그의 노력이 역설적으로 예언을 실현시킨다. 만약 그가 예언을 무시했다면, 혹은 그저 기다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어쩌면 자연스럽게 왕이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조급함과 불안이 그를 행동하게 만들었고, 그 행동들이 연쇄적으로 그의 파멸을 초래했다. 이는 운명에 대한 깊은 아이러니다. 우리는 종종 운명을 피하려는 노력을 통해 정확히 그 운명을 실현시킨다.
이 작품의 구조 또한 완벽하다. 극은 긴장감이 계속 고조되며, 각 행동이 다음 행동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첫 살인은 두 번째 살인을 낳고, 두 번째 살인은 세 번째를 낳는다. 멕베스는 "피 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서, 돌아가는 것이 앞으로 가는 것만큼 고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악의 논리다. 한 번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돌아가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 이미 저지른 범죄들 때문에 더 많은 범죄를 저지르게 되고, 결국 파멸로 치닫게 된다.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에서 이미지와 상징을 탁월하게 사용한다. 피, 어둠, 불면증은 반복되는 모티프다. 피는 죄책감의 상징이며, 씻어낼 수 없는 것이다. 어둠은 도덕적 혼란과 악의 영역을 나타낸다. 불면증은 양심의 가책을 의미한다. 멕베스는 "잠을 죽였다"고 말하며, 실제로 그와 레이디 멕베스 모두 정상적인 휴식을 찾지 못한다. 잠은 평화로운 양심의 상징이며, 그들이 잠을 잃었다는 것은 그들이 내면의 평화를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작품은 또한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흥미로운 탐구를 제공한다. 레이디 멕베스는 남편을 충동질할 때 그의 남성성에 도전한다. "남자가 되라"는 것은 폭력적이고 잔인해지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멕베스 자신도 살인자들을 고용할 때 그들의 남성성에 호소한다. 하지만 작품은 진정한 남성성이 폭력이 아니라 도덕적 용기에 있음을 암시한다. 맥더프는 가족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만, 바로 그 감정이 그를 멕베스에 맞서 싸우게 만든다. 말콤은 맥더프에게 "남자답게 행동하라"고 말하지만, 맥더프는 "먼저 인간으로서 느껴야 한다"고 대답한다. 이는 인간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하는 것이 진정한 강함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멕베스의 비극은 그가 완전히 악한 괴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자신의 행동을 의식하는 인간으로 남는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안다. 그는 후회한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다. "나는 너무 깊이 들어갔다"는 그의 인식은 비극의 핵심이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자신을 파멸의 길로 몰아넣었음을 알지만, 그 길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한다. 이것이 그를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 비극적 영웅으로 만든다.
멕베스는 인간 조건에 대한 가장 어두운 탐구 중 하나지만, 동시에 가장 정직한 탐구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는 우리에게 위안을 주지 않는다. 그는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직시하도록 강요한다. 하지만 바로 그 정직함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인식하고, 우리 자신의 선택이 가진 무게를 이해하게 된다. 멕베스의 이야기는 경고다. 야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도덕적 제약 없는 야망은 파괴적이다. 권력은 책임 없이는 폭정이 된다. 그리고 우리가 내리는 선택들은 단지 순간의 행동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의하고 우리의 운명을 형성하는 결정적 순간들이다.
작품의 결말은 정의의 회복처럼 보이지만, 그 승리는 쓴맛을 남긴다. 말콤이 왕위에 오르고 질서가 회복되지만,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희생되었는가. 맥더프의 가족, 뱅코, 던컨, 그리고 멕베스 부부 자신까지. 셰익스피어는 악이 패배하지만, 그 과정에서 엄청난 파괴가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의는 승리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크다. 이는 현실 세계의 진실이기도 하다. 폭정을 무너뜨리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이 야기한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멕베스가 현대 독자들에게 여전히 강력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중세 스코틀랜드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권력, 야망, 도덕적 선택에 대한 보편적 이야기다. 우리는 모두 내면에 멕베스를 가지고 있다. 우리 모두에게는 야망이 있고, 때로는 도덕적 경계를 넘고 싶은 유혹이 있다. 물론 우리 대부분은 왕을 살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더 작은 규모에서 비슷한 선택에 직면한다. 성공을 위해 윤리를 타협할 것인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가? 우리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멕베스는 또한 자기 기만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멕베스는 처음에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알았지만, 점차 자신을 정당화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을 마녀들의 예언 탓으로 돌리고, 레이디 멕베스의 압박 탓으로 돌리며, 결국에는 운명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작품은 명확하게 보여준다. 선택은 그의 것이었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시도는 그를 더 깊은 악으로 빠뜨릴 뿐이다. 우리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반복할 위험에 처한다.
작품의 언어적 복잡성도 주목할 만하다. 셰익스피어는 산문과 운문을 전략적으로 사용한다. 고귀한 인물들은 대부분 운문으로 말하지만, 정신이 혼란스러울 때는 산문으로 전환된다. 레이디 멕베스의 몽유병 장면은 산문으로 쓰여 있으며, 이는 그녀의 정신적 붕괴를 반영한다. 마녀들은 독특한 운율로 말하며, 이는 그들이 자연적 질서 밖에 존재함을 나타낸다. 멕베스 자신의 언어는 극이 진행되면서 변화한다. 처음에 그는 복잡하고 은유적인 언어로 자신의 내적 갈등을 표현하지만, 점차 그의 언어는 더 거칠고 직접적이 되며, 이는 그의 도덕적 둔감화를 반영한다.
이 작품에서 시간의 개념도 중요하다. 멕베스는 끊임없이 미래를 걱정한다. 그는 현재의 행복을 즐기지 못하고, 항상 다음 위협, 다음 예언, 다음 적에 대해 걱정한다. 그의 불안은 그를 끊임없이 앞으로 몰아가지만, 그가 추구하는 안정은 결코 오지 않는다. 왕위는 그에게 안전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더 큰 불안을 가져왔다. 뱅코를 죽이는 것도 안전을 주지 못했다. 플리언스가 도망쳤기 때문이다. 맥더프의 가족을 죽이는 것도 안전을 주지 못했다. 맥더프 자신은 여전히 살아있고 복수를 계획하기 때문이다. 멕베스의 비극은 그가 추구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달성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절대적 권력은 절대적 안전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적과 더 큰 불안을 만들어낼 뿐이다.
대조적으로, 던컨은 현재를 살았다. 그는 멕베스의 성에서 공기가 상쾌하다고 감탄했고, 사람들을 신뢰했으며, 선의를 베풀었다. 그의 순진함이 그를 죽게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는 의심과 불안 속에서 사는 것보다 신뢰와 선의 속에서 살다가 죽는 것이 더 나은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멕베스는 더 오래 살았지만, 그의 삶은 끊임없는 공포와 고통이었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이라는 그의 유명한 독백은 시간의 무의미함에 대한 절망적 명상이다. 그에게 시간은 더 이상 가능성으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 단지 죽음을 향한 느린 행진일 뿐이다.
멕베스와 레이디 멕베스의 관계도 작품의 중요한 측면이다. 극 초반에 그들은 강한 유대로 연결되어 있다. 멕베스는 아내를 "나의 가장 소중한 동료"라고 부르며, 그들은 공모자이자 파트너다. 하지만 범죄가 시작되면서 그들은 점차 멀어진다. 멕베스는 뱅코의 살해를 계획할 때 아내에게 알리지 않는다. "나의 소중한 부인이여, 무지한 채로 있으시오"라고 그는 말한다. 이는 보호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들 사이의 연결이 끊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더 이상 공유하지 않는다. 각자 자신의 악몽과 죄책감 속에 고립된다. 레이디 멕베스가 죽었을 때, 멕베스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냉담하다. "그녀는 언젠가 죽었어야 했다"고 그는 말한다. 이는 그가 완전히 감정적으로 메말랐음을 보여준다. 범죄는 그들을 하나로 묶은 것이 아니라, 각자를 고립시켰다.
작품 속의 자연 이미지들도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다. 던컨의 살해 전후로 자연계에 이상 현상들이 일어난다. 매가 올빼미에게 잡아먹히고, 말들이 서로를 물어뜯으며, 낮인데도 어둠이 지속된다. 이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세계관, 즉 우주가 위대한 연쇄로 연결되어 있으며 도덕적 질서와 자연적 질서가 상응한다는 믿음을 반영한다. 왕의 살해는 단순히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우주적 질서에 대한 위반이다. 던컨은 하늘이 기름 부은 왕이며, 그를 죽이는 것은 자연 자체를 거스르는 행위다. 현대 독자들은 이런 초자연적 요소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들이 상징하는 것, 즉 도덕적 위반이 초래하는 광범위한 혼란은 여전히 강력하다.
멕베스의 용기는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비극을 더욱 깊게 만든다. 그는 겁쟁이가 아니다. 전쟁터에서 그는 무시무시한 전사였다. 극의 끝에서도 그는 패배를 알면서도 끝까지 싸운다. 만약 그가 비겁했다면, 그는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싸운다. 이 용기가 더 나은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의 비극은 그가 약해서가 아니라, 그의 강점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그의 야망, 그의 용기, 그의 결단력, 이 모든 것들이 좋은 자질들이지만, 도덕적 나침반 없이는 파괴적이 된다.
마녀들의 역할은 작품에서 가장 논쟁적인 측면 중 하나다. 그들은 멕베스를 조종했는가, 아니면 단지 그의 내면에 이미 있던 것을 표면으로 끌어냈을 뿐인가? 셰익스피어는 의도적으로 이를 모호하게 남긴다. 마녀들은 분명히 초자연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예언은 실현된다. 하지만 그들은 멕베스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멕베스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동할지는 전적으로 그에게 달려 있다. 뱅코도 같은 예언을 들었지만, 그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는 외부적 유혹이 아무리 강력해도, 최종 선택은 개인에게 있음을 시사한다. 마녀들은 멕베스의 야망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극했을 뿐이다.
이 작품은 또한 언어와 의미의 불안정성을 탐구한다. 마녀들의 첫 대사 "아름다운 것은 추하고, 추한 것은 아름답다"는 의미가 전복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멕베스는 계속해서 단어들의 의미에 속는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숲이 움직인다"와 같은 표현들은 그가 이해한 것과 다른 의미를 가진다. 언어는 진실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숨기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이는 정치적 언어에 대한 비평이기도 하다. 권력자들은 종종 언어를 조작하여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멕베스 자신도 이를 한다. 그는 던컨의 살해를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완곡한 표현들을 사용한다. 언어는 진실을 마주하는 것을 피하는 방법이 된다.
극의 구조는 점점 가속화되는 느낌을 준다. 첫 번째 살인까지는 긴 준비와 망설임이 있다. 하지만 그 이후의 폭력들은 점점 더 빨리, 더 쉽게 일어난다. 멕베스는 "생각이 행동의 씨앗이다"라고 말하며, 이제는 생각하자마자 즉시 행동하겠다고 결심한다. 이는 그의 도덕적 붕괴를 보여준다. 처음에 그를 망설이게 만들었던 양심은 이제 완전히 침묵했다. 극의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멕베스가 통제력을 잃고 있음을 반영한다. 그는 이제 사건들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의해 몰리고 있다.
맥더프는 멕베스의 대척점으로 제시된다. 맥더프는 충성스럽고 정직하며 감정적이다. 그는 가족을 사랑하고, 그들의 죽음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 말콤이 그에게 "남자답게 행동하라"고 말할 때, 맥더프는 "먼저 인간으로서 느껴야 한다"고 대답한다. 이는 작품의 중요한 순간이다. 진정한 강함은 감정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느끼고 인정하면서도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이다. 맥더프는 슬픔을 느끼지만, 그 슬픔이 그를 복수로 이끈다. 하지만 그의 복수는 개인적 복수가 아니라 정의의 회복이다. 그는 스코틀랜드를 폭군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싸운다.
말콤은 처음에는 미성숙한 인물로 보이지만, 그는 정치적 지혜를 배운다. 그가 잉글랜드에서 맥더프를 시험하는 장면은 그의 성숙함을 보여준다. 그는 맥더프의 충성심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이 멕베스보다 더 나쁜 왕이 될 것이라고 거짓으로 주장한다. 맥더프가 이에 절망하자, 말콤은 진실을 밝힌다. 이는 말콤이 단순히 왕위를 되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정당하고 현명한 통치자가 되려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아버지의 순진함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의심하는 법을 배웠고, 사람들을 시험하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정의와 자비를 가진 통치자가 되려 한다.
멕베스의 마지막 독백들은 문학에서 가장 강력한 순간들 중 일부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로 시작하는 독백은 완전한 허무주의를 표현한다. 시간은 의미 없이 흘러가고, 인생은 "백치가 말하는 이야기, 소리와 분노로 가득하지만 아무 의미도 없다." 이는 멕베스가 도달한 절망의 깊이를 보여준다. 그는 모든 의미를 잃었다. 권력은 그에게 행복을 주지 못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고, 친구들을 잃었으며, 자신의 영혼까지 잃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공허함뿐이다. 이 독백은 개인적 절망이지만, 동시에 보편적 진실을 담고 있다. 도덕적 의미 없이 산 삶은 결국 공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완전한 허무주의로 끝나지 않는다. 말콤의 승리와 질서의 회복은 희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악은 강력하지만, 영원하지 않다. 폭정은 무너질 수 있다. 정의는 비록 느리고 고통스럽더라도 결국 실현될 수 있다. 맥더프, 말콤, 그리고 다른 충성스러운 귀족들은 개인적 위험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것을 위해 싸웠다. 이는 도덕적 용기가 여전히 가능하고,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멕베스는 단순한 오락물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심오한 탐구이며, 도덕적 선택의 중요성에 대한 강력한 논증이며, 권력의 부패하는 영향에 대한 경고다. 셰익스피어는 400년 전에 이 작품을 썼지만, 그것이 다루는 주제들은 오늘날에도 똑같이 관련성이 있다. 우리는 여전히 야망과 도덕 사이에서 갈등한다. 우리는 여전히 권력이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목격한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선택이 가져올 결과를 고민한다.
이 작품의 진정한 천재성은 그것이 단순한 답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멕베스는 악당이지만, 동시에 비극적 인물이다. 우리는 그를 비난하지만, 동시에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 레이디 멕베스는 끔찍한 범죄의 공모자이지만, 그녀의 붕괴는 우리의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셰익스피어는 인간을 단순하게 선과 악으로 나누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복잡성을, 우리 모두가 가진 빛과 어둠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그 복잡성이 이 작품을 영원하게 만든다. 우리는 멕베스 안에서 우리 자신의 일부를 본다. 그것이 편안하지 않지만, 그것이 진실이다. 그리고 그 진실을 직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위대한 예술이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