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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영원 회귀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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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가 1883년부터 1885년까지 네 부분으로 나누어 집필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서양 철학사에서 가장 이례적이면서도 가장 오해받은 작품 중 하나다. 이 책은 철학서라기보다 예언서에 가깝고, 논증이라기보다 선언에 가까우며, 체계적 사유라기보다 시적 직관에 의존한다. 하지만 바로 그 형식적 파격 속에 니체가 전하고자 한 핵심 메시지가 숨어 있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존재이며, 우리가 믿어온 모든 가치는 재평가되어야 하고, 삶은 그 자체로 긍정되어야 한다는 혁명적 사상이 그것이다. 니체는 전통적인 철학 논문 형식을 의도적으로 거부했다. 대신 그는 시와 산문, 우화와 설교, 노래와 비유가 뒤섞인 독특한 양식을 선택했다. 이러한 형식적 선택 자체가 내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성적 논증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삶의 역동성, 가치의 창조, 존재의 깊이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니체는 이 책을 집필하면서 의도적으로 고대 페르시아의 예언자 조로아스터를 차용했다. 역사적 조로아스터는 기원전 6세기경 활동한 인물로, 선과 악의 이원론을 최초로 체계화했다. 그의 가르침은 후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도덕적 세계관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니체는 도덕적 이원론을 창시한 바로 그 인물이 이제 그것을 폐기해야 한다는 역설적 구도를 만들기 위해 이 인물을 선택했다. 잘못을 저지른 자가 그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일종의 역사적 책임이었다.

서른 살에 산으로 들어가 십 년간 고독 속에서 지혜를 쌓은 차라투스트라가 마흔 살이 되어 산을 내려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가 내려온 이유는 단순하다. 혼자만의 지혜는 의미가 없으며, 넘치는 것은 흘러내려야 한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지혜를 꿀처럼 모아왔고, 이제 그것을 나눠줄 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의 잔이 다시 비워지기를 원하며, 금잔이 다시 물로 변하기를 원한다. 이 설정 자체가 니체 철학의 핵심을 암시한다. 지혜는 축적되어 보관될 대상이 아니라 흘러넘쳐 나눠져야 할 에너지다. 고독은 자기 충만을 위한 과정이지 목적이 아니다. 진정한 지혜는 나눔을 통해 완성된다.

산을 내려오는 길에 차라투스트라가 처음 만난 것은 숲속의 늙은 성자였다. 이 은자는 신을 사랑하기 위해 인간을 떠났고, 이제 신을 찬양하며 노래하고 울고 웃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차라투스트라를 알아보고 반가워하지만, 동시에 그가 인간들에게 가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대는 숲에 살았으니 내가 말하는 것을 알 것이다. 사람들은 성자를 의심하고 믿지 않는다."

그는 차라투스트라가 선물을 가져가도 사람들은 그것을 의심하고 조롱할 것이라 경고한다.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말을 듣지만 자신의 길을 간다. 하지만 그가 숲을 벗어났을 때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가능한 일인가? 이 늙은 성자는 숲속에서 아직 신이 죽었다는 것을 듣지 못했구나!"

이 짧지만 강렬한 장면은 니체가 선언한 '신의 죽음'이라는 명제가 단순히 무신론적 주장이 아님을 보여준다. 신의 죽음은 사실 진술이 아니라 문화적 진단이다. 서양 문명을 지탱해온 초월적 가치 체계, 즉 기독교적 세계관이 더 이상 현대인의 삶에 실질적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는 통찰이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이 죽음을 인식하지 못한 채 죽은 신의 그림자 아래에서 여전히 살아간다는 점이었다. 숲속의 성자처럼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신을 섬기며, 더 이상 의미를 주지 못하는 가치에 매달린다. 니체에게 이것은 지적 정직성의 문제였다. 우리는 우리가 정말로 믿는 것에 따라 살아야 하며, 믿지 않는 것을 믿는 척해서는 안 된다.


차라투스트라가 가장 가까운 마을에 도착했을 때 시장에는 군중이 가득했다. 그들은 밧줄 위를 걷는 곡예사를 보러 모인 것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기회를 틈타 군중 앞에서 '위버멘쉬'(Übermensch), 즉 초인에 대해 설파한다.

"나는 여러분에게 초인을 가르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여러분은 인간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그는 원숭이가 인간에게 웃음거리가 되듯이, 초인에게도 인간은 웃음거리이거나 고통스러운 수치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에서 초인으로의 길은 번개와 같다. 번개는 광기이며, 번개는 빛이다. 흔히 번역되는 '초인'이라는 단어는 오해를 낳기 쉽다.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는 생물학적으로 진화된 슈퍼맨이 아니며, 다른 인간을 지배하는 독재자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극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초인은 도달해야 할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극복의 과정 그 자체다. "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린 밧줄.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길 위에 있는 것도 위험하며, 뒤를 돌아보는 것도 위험하고, 전율하며 멈춰 서는 것도 위험하다"라는 차라투스트라의 선언은 인간 존재의 과도기적이고 위태로운 성격을 드러낸다. 우리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되어가는 과정 속에 있는 존재이며, 그 과정은 위험으로 가득하다. 안전한 길은 없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현재에 머무는 것도, 과거로 돌아가는 것도 모두 위험하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심연 위의 밧줄이다.


하지만 군중은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비웃으며 "우리에게 저 최후의 인간을 달라!"고 외친다. 그들은 위험한 극복의 길이 아니라 안전한 정체의 길을 원한다. 그러자 차라투스트라는 최후의 인간에 대해 말한다. 최후의 인간은 사랑하는 법도, 창조하는 법도, 동경하는 법도 모르며, 땅 위에 가장 오래 사는 것을 자랑한다.

"사랑이 무엇인가? 창조가 무엇인가? 동경이 무엇인가? 별이 무엇인가?"

최후의 인간이 묻고는 눈을 깜빡인다. 땅이 작아졌고, 그 위를 모든 것을 작게 만드는 최후의 인간이 깡충깡충 뛴다. 그의 종족은 벼룩처럼 근절할 수 없다. 최후의 인간이 가장 오래 산다. "우리는 행복을 발명했다"고 최후의 인간은 말하며 눈을 깜빡인다. 그들은 노동을 떠났지만 노동은 여전히 오락이다. 하지만 오락이 너무 피곤하게 만들지 않도록 조심한다. 더 이상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으며, 둘 다 너무 번거롭다. 누가 지배하려 하는가? 누가 복종하려 하는가? 둘 다 너무 번거롭다. 목자도 없고 모두가 평등하다. 누구나 똑같기를 원하며, 다르게 느끼는 자는 스스로 정신병원에 간다. 이 최후의 인간에 대한 묘사는 단순한 풍자가 아니라 니체가 본 근대 문명의 종착점이었다. 평등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최종 목표가 바로 이 최후의 인간이라는 것이 니체의 진단이었다. 모든 고통을 제거하고, 모든 위험을 회피하며, 모든 것을 작고 관리 가능하게 만드는 것. 니체가 보기에 이것은 인간의 완성이 아니라 인간의 종말이었다.


바로 그때 곡예사가 탑에서 나와 밧줄 위로 걷기 시작한다. 그가 한가운데쯤 이르렀을 때 반대편 탑에서 다른 사람이 뛰쳐나온다. 그는 화려한 옷을 입고 광대처럼 보이지만 민첩하게 움직인다. "길을 비켜라, 나태한 자여, 주저하는 자여, 겁쟁이여!"라고 그가 소리치며 곡예사를 향해 뛰어간다. 곡예사는 멈춰 서지만, 광대 같은 사나이는 멈추지 않고 그의 머리 위로 뛰어넘는다. 그 순간 곡예사는 균형을 잃고 막대기를 놓치며 땅으로 떨어진다. 시장과 군중은 폭풍 속의 바다처럼 뒤흔들리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차라투스트라만이 움직이지 않고 떨어진 곡예사 곁에 남는다. 죽어가는 곡예사는 눈을 뜨고 차라투스트라를 본다.

"나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악마가 나를 넘어뜨릴 것을. 이제 악마가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간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손을 잡고 말한다.

"그대의 영혼에 맹세하건대, 그대가 말하는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악마도, 지옥도 없다. 그대의 영혼은 그대의 육체보다 더 빨리 죽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라!"

곡예사는 의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본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나는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차라투스트라는 대답한다.

"그렇지 않다. 너는 위험을 네 직업으로 삼았다. 그것은 경멸받을 일이 아니다. 이제 네 직업 때문에 망해가는구나. 그래서 내가 내 손으로 너를 묻어주겠다."

곡예사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죽는다. 차라투스트라는 밤새 그의 시신을 어깨에 메고 간다. 이 장면은 깊은 상징성을 담고 있다. 곡예사는 심연 위에서 균형을 잡으려 했던 인간의 모습이며, 군중은 그것을 단순한 구경거리로만 소비했다. 오직 차라투스트라만이 그 시도의 가치를, 그 위험을 감수한 용기를 인정한다. 곡예사는 실패했지만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최후의 인간보다 위대하다.


차라투스트라는 밤새 시신을 메고 가다가 한 은자의 오두막을 지나간다. 은자와 그의 개들은 자고 있다. 하지만 그가 지나가자 개들이 크게 짖으며 깨어난다. 은자는 나와 차라투스트라에게 왜 시체를 메고 가느냐고 묻는다. 차라투스트라는 대답한다.

"나는 한 시체를 메고 가는 중이오. 사람이 되기는 어렵소."

은자는 경고한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지시오. 밤에 무덤을 파헤치는 자들이 있소. 그들은 당신의 시체를 훔칠 것이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웃으며 답한다.

"내 시체라니요? 나는 내 시체를 훔치는 자에게 내 물고기 한 마리를 선사하겠소. 나는 인간 사냥꾼이 아니라 인간 낚시꾼이오. 내가 그들에게 미끼를 던지겠소."

은자는 다시 오두막으로 들어가고, 차라투스트라는 계속 나아간다. 마침내 숲속 깊은 곳에서 나무 아래 움푹 파인 곳을 발견하고 그곳에 곡예사를 묻는다. 그는 시체 옆에서 밤을 지새우며 생각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자신은 군중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군중에게 초인과 최후의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나는 군중에게 말하지 않으리라. 죽은 자들과 경찰에게 말하는 것은 똑같이 금지되어 있다."

그는 새로운 결심을 한다.

"나는 동반자를 찾으리라. 나와 함께 창조하는 자, 나와 함께 수확하는 자, 나와 함께 축제를 여는 자를. 나는 그들에게 무지개를, 초인으로 가는 모든 계단을 보여주리라."


이 경험 이후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 방식이 변한다. 그는 더 이상 시장에서 군중에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소수의 동반자, 제자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그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친구를 가르치노라. 나는 너희에게 고독을 가르치노라."

제자들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 차라투스트라는 다양한 주제로 설교한다. 이 설교들은 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각각이 니체 철학의 중요한 측면을 다룬다. "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라는 설교에서 그는 정신의 세 단계 변화를 설명한다.

먼저 정신은 낙타가 된다. 낙타는 무겁고 존경할 만한 것들을 짊어지기를 원한다. "가장 무거운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고는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어 짐을 싣는다. 무엇이 가장 무거운가? 자신을 낮추어 자신의 고귀함을 상하게 하는 것, 자신의 지혜를 조롱하기 위해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것,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이 자신을 거짓말쟁이라 부를 때 그들과 결별하는 것. 이 모든 무거운 짐을 낙타는 짊어지고 사막으로 간다.

사막에서 가장 고독한 곳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정신은 사자가 된다. 사자는 자유를 쟁취하고자 하며 자신의 마지막 주인의 사막에서 주인이 되고자 한다. 그는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위대한 용과 싸운다. 이 용의 비늘 하나하나에는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라는 금빛 글자가 빛나며, 수천 년의 가치들이 그 위에 반짝인다. 용은 말한다.

"모든 가치는 이미 창조되었고, 모든 창조된 가치는 바로 나다. 진실로 더 이상 '나는 원한다'는 있어서는 안 된다!"

사자는 대답한다.

"아니다, 나는 원한다!"

사자는 의무의 용과 싸워 승리하고 자유를 쟁취한다. 하지만 사자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없다. 그는 파괴할 수 있지만 건설할 수는 없다. 새로운 가치의 창조를 위해서는 세 번째 변화가 필요하다. 사자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어린아이는 순수함이며,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이다. 어린아이는 스스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고, 신성한 긍정이다. 창조의 유희를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얻는다. 이 세 단계는 니체 철학의 핵심 구조를 보여준다. 전통을 짊어지고 견디는 단계, 전통에 맞서 싸워 자유를 얻는 단계,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단계. 파괴는 창조를 위한 전제조건이며, 진정한 창조는 순수한 긍정에서 나온다.


다른 설교들에서도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핵심 사상들을 전개한다.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에서 그는 전통 철학과 종교의 육체 경시를 비판한다.

"나는 네게 하나의 말을 하노니, 네 육체는 큰 이성이다. 많은 의미를 지닌 하나의 것, 전쟁이며 평화, 가축 떼이며 목자인 하나의 것."

정신은 육체의 작은 도구, 작은 장난감에 불과하다. 네 육체 안에는 네가 작은 이성이라 부르는 것보다 더 많은 이성이 있다. 이것은 플라톤 이래 서양 철학을 지배해온 영혼-육체 이원론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니체에게 육체는 극복해야 할 감옥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 그 자체다.

"즐거운 섬에 대하여"에서는 창조의 기쁨을 노래한다. 창조는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며, 삶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창조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고통과 많은 변화를 겪어야 한다.

"동정하는 자에 대하여"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동정심의 함정을 경고한다. 동정은 종종 우월감의 다른 이름이며, 동정받는 자를 더욱 약하게 만든다. 진정한 사랑은 동정이 아니라 함께 성장하는 것, 함께 높이 날아오르는 것이다.

"새 우상에 대하여"에서는 국가를 가장 차가운 괴물이라 부른다. 국가는 "나, 국가가 바로 민중이다"라고 거짓말한다. 국가가 생긴 곳에서는 소수만이 태어나며, 대부분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태어난다. 국가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늑대처럼 여러분을 유혹한다. 여기서 니체의 반국가주의적, 반집단주의적 성향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가르침의 시간이 지나고 차라투스트라는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어느 날 그는 제자들을 떠나 다시 산으로 돌아간다고 선언한다. 제자들은 슬퍼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단호하다.

"이제 내가 여러분을 떠나 혼자 가라고 명한다. 그리고 여러분도 가서 혼자 있으라! 나는 그것을 원한다. 진실로 나는 여러분에게 충고한다. 나를 떠나 차라투스트라로부터 자신을 지키라! 그리고 더 좋은 것은, 그를 부끄러워하라! 그가 여러분을 속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제자들에게 스승을 배신하라고 말한다. 진정한 제자는 스승을 넘어서야 한다.

"여러분이 나를 숭배한다면, 여러분은 나를 제대로 존경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의 신앙이 무너진다면 그것은 어떻게 되는가? 여러분의 신으로서의 나를 조심하라!"

차라투스트라는 제자들이 자기 자신을 찾기를 원한다. 그들이 모두 그를 부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가 그들에게 돌아오겠다고 약속한다.

"이제 나는 가노라, 혼자 간다. 나의 제자들이여! 여러분도 이제 가라, 혼자! 나는 그것을 원한다. 진실로 나는 여러분에게 충고한다. 나를 떠나라!"

이것은 니체 철학의 핵심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진정한 스승은 제자를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독립시킨다. 진리는 권위에 복종함으로써가 아니라 스스로 탐구함으로써 얻어진다. 차라투스트라는 예수나 붓다와 달리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하지 않고 자신을 떠나라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니체가 꿈꾼 새로운 유형의 스승이다.


산으로 돌아간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고독 속에서 자신의 가장 깊은 사상과 씨름한다. 영원회귀라는 사상이 그를 사로잡는다. 이 사상은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라는 장에서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산길을 오르고 있다. 그의 어깨 위에는 난쟁이가 올라타 있어 그를 무겁게 한다. 이 난쟁이는 "무거움의 정령"이며, 차라투스트라의 영원한 적이다. 난쟁이는 그의 귀에 말을 떨어뜨린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지혜의 돌이여! 너는 너 자신을 높이 던졌다. 그러나 던져진 모든 돌은 떨어져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용기를 내어 외친다.

"난쟁이여, 너인가 나인가!"

그리고 그들은 한 문 앞에 멈춰 선다. 그 문의 이름은 "순간"이다. 이 문에서 두 개의 긴 길이 만난다. 아직 아무도 그 끝까지 걸어본 사람이 없다. 뒤쪽의 긴 길은 영원히 뒤로 뻗어 있다. 앞쪽의 긴 길도 영원히 앞으로 뻗어 있다. 이 두 길은 서로 모순된다. 이 문에서 머리를 맞대고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난쟁이에게 묻는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이 이미 이 뒤쪽 길을 걸어가지 않았을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이 이미 일어나고, 행해지고, 지나가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이 순간도 이미 존재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모든 것이 단단히 얽혀 있어서, 이 순간이 뒤따를 모든 것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자기 자신까지도?"

이것이 영원회귀의 핵심이다. 모든 순간은 과거의 모든 순간에 의해 결정되며, 동시에 미래의 모든 순간을 결정한다. 만약 시간이 무한하고 사건이 유한하다면, 모든 조합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차라투스트라는 계속 말한다.

"그렇다면 이 거미도, 이 달빛도, 그리고 이 순간과 내 자신도 이미 존재했으며 다시 돌아올 것이다. 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는 거듭거듭 뒤집히고, 너, 티끌 같은 너도 함께!"

난쟁이는 조롱하듯 대답한다.

"모든 진리는 굽어 있고, 시간 그 자체는 원이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화를 낸다. 난쟁이는 사태를 너무 쉽게 만든다. 영원회귀는 단순한 우주론적 사실이 아니라 실존적 도전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차라투스트라는 어린 시절 개가 울부짖던 것을 기억한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자 난쟁이는 사라지고 대신 젊은 목동이 땅에 누워 몸부림치고 있다. 검은 뱀이 그의 입속으로 기어들어가 목구멍에 매달려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뱀을 잡아당기려 하지만 허사다. 그는 소리친다.

"물어뜯어라! 머리를 물어뜯어라! 물어뜯어라!"

목동은 뱀의 머리를 물어뜯고 멀리 뱉어낸다. 그리고 일어선다. 더 이상 목동이 아니고,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빛으로 둘러싸인, 웃는 자가 되어 있다. 이 신비로운 환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뱀은 영원회귀의 사상, 특히 그것의 가장 무거운 측면을 상징한다. 목동은 그것을 삼키려다 질식할 뻔한다. 하지만 그가 뱀의 머리를 물어뜯는 순간, 즉 영원회귀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순간, 그는 변화한다. 인간을 넘어선 존재가 된다. 이것이 초인으로의 변화다. 영원회귀를 받아들이는 것이 초인이 되는 길이다.


그러나 영원회귀의 진정한 공포는 다른 장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쾌유하는 자에 대하여"에서 차라투스트라는 7일 동안 침상에 누워 죽은 듯이 있다가 8일째 되는 날 깨어난다. 그의 동물들, 독수리와 뱀이 그의 곁을 지킨다. 차라투스트라가 깨어나자 동물들은 기뻐하며 묻는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당신은 이제 쾌유하셨습니까?"

차라투스트라는 대답한다.

"나는 아직 쾌유하지 못했다. 나는 가장 혐오스러운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본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인간의 작은 것"이 영원히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위대한 인간만이 아니라 최후의 인간도, 가장 비천한 순간도, 가장 하찮은 것도 영원히 반복된다는 끔찍한 진실이다.

"아! 인간은 영원히 돌아온다! 작은 인간이 영원히 돌아온다!"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나는 인간을 보았다. 가장 작고, 가장 비천한 인간을. 그리고 그것이 나를 메스껍게 했다. 그리고 영원회귀가 말했다. '이것도 마찬가지다!'"

그는 거대한 도시를 보았다. 그곳에는 작은 자들만 가득했다. 가장 작은 자조차도 너무 크다고 생각하는 곳.

"나는 인간에게 메스꺼움을 느낀다! 그것이 나의 가장 큰 고통이다. 나는 과거와 미래를 견딜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지금'을 견딜 수 있겠는가! 작은 인간이 영원히 돌아온다니!"

이것이 영원회귀의 진정한 무게다. 만약 우리가 살아온 모든 순간이, 심지어 가장 비천하고 의미 없었던 순간까지도 영원히 반복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위대함만의 영원회귀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 심지어 가장 경멸스러운 것까지 포함한 영원회귀를 긍정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이 차라투스트라를, 그리고 니체를 거의 파괴할 뻔했다. 7일간의 침상은 이 사상과의 처절한 투쟁을 상징한다.


차라투스트라의 동물들은 그를 위로하려 한다. 독수리와 뱀은 그에게 말한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영원회귀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것이 당신의 운명입니다."

그들은 영원회귀를 노래한다.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다시 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굴러간다.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꽃핀다. 존재의 해는 영원히 달린다."

동물들은 영원회귀를 자연스러운 순환으로 본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안다. 영원회귀는 단순한 자연의 순환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라는 것을. 그것을 능동적으로 원할 수 있는가, 모든 순간이 다시 돌아오기를 정말로 원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천천히 회복한다. 그는 자신의 동물들에게 말한다.

"오, 너희 짓궂은 놈들아! 너희는 나의 고통으로부터 배럴 오르간을 만들었구나!"

하지만 그는 웃는다. 이제 그는 영원회귀와 화해하기 시작한다. 가장 무거운 짐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이 과정을 통해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사명을 깨닫는다. 가장 어려운 사상,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이 그의 운명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지겠다고 결심한다.


제3부에서는 차라투스트라가 다시 인간 세계로 내려간다. 그는 이제 더 성숙해졌고, 자신의 사상에 대해 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배를 타고 항해하며 그는 다양한 섬들을 방문하고 새로운 설교를 한다. "오래된 서판과 새 서판에 대하여"라는 긴 장에서 그는 자신의 핵심 사상들을 30개의 짧은 절로 정리한다. 이것은 일종의 반(反) 십계명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산에서 내려오며 말한다.

"보라, 이것이 새로운 서판이다. 그러나 나의 형제들이여, 어디에 나와 함께 그것을 인류의 천 년 서판에 새길 자들이 있는가?"

그는 "창조하는 자들이여, 옛 서판을 깨뜨려라!"고 외친다. 전통 도덕에서 선으로 여겨진 것들, 즉 겸손, 순종, 자기부정, 동정심 같은 것들을 니체는 약자의 도덕이라 비판한다. 이것들은 삶을 부정하고 약화시키는 가치들이다. 그는 묻는다.

"선한 자와 의로운 자가 나를 가장 증오하고 나의 가장 나쁜 적이라는 것, 이것이 이상한가?"

선한 자들은 창조하지 못하며, 언제나 시작의 끝이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고, 저주하며, 자기들과 다른 모든 것을 악이라 부른다. 차라투스트라는 새로운 가치를 제시한다.

"창조하라, 그것이 자유와 삶에서 벗어나는 위대한 해방이다."

그는 힘, 자부심, 자기 극복, 창조성을 옹호한다.

"높은 곳으로 자라나고 싶은 나무는 밝은 곳으로 뻗어야 한다. 그러나 그 뿌리는 어둠 속으로, 깊은 곳으로, 악 속으로 향한다."

선과 악의 전통적 구분은 해체되어야 한다. 진정한 도덕은 삶을 긍정하고 향상시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힘에의 의지"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는 생명의 본질이 자기 보존이 아니라 자기 확장, 힘의 증대라고 본다.

"생명 자체가 나에게 이 비밀을 말했다. '보라, 나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너희는 그것을 생식 충동이라 부르거나 목적을 향한 충동, 더 높은 것, 더 먼 것, 더 다양한 것을 향한 충동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이며 하나의 비밀이다. 나는 차라리 파멸하기를 원하지, 이 하나를 포기하지는 않겠다. 진실로, 파멸이 있는 곳, 나뭇잎이 떨어지는 곳에 보라, 생명이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있다. 권력을 위하여!"

이것은 단순한 권력욕이나 지배욕이 아니다. 예술가가 작품을 창조하는 것도, 사상가가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도, 심지어 식물이 빛을 향해 뻗어가는 것도 모두 힘에의 의지의 표현이다. 생명은 본질적으로 확장하고 성장하려는 힘이다. 이 힘을 억압하는 모든 도덕은 반생명적이다.


제3부의 마지막 장 "일곱 개의 봉인"은 책 전체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렬한 부분이다. 이 장은 일곱 개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연은 "오, 내가 어떻게 영원을, 혼인의 반지 중의 반지인 회귀의 반지를 동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로 끝난다. 차라투스트라는 마침내 영원회귀를 전적으로 긍정한다. 그는 운명을 사랑하게 되었다(amor fati).

첫 번째 연에서 그는 노래한다. "만약 내가 예언자이며 창조하는 정신으로 가득 차 있다면, 미래로 날아가는 그 독수리처럼, 그리고 만약 나의 말이 창조자의 말이라면, 네가 돌아오기를 어찌 동경하지 않겠는가!"

두 번째 연에서는 "만약 내가 운명을 사랑한다면, 그리고 항상 열린 바다와 정오를 사랑한다면, 네가 돌아오기를 어찌 동경하지 않겠는가!"

세 번째 연은 더욱 열정적이다. "오, 하늘이여, 내 위에 있는 순수하고 깊은 하늘이여! 네게서 나는 모든 거미와 거미의 철학, 그리고 모든 무덤과 무덤지기와 영혼들을 학습한다!"

차라투스트라는 모든 것을 긍정한다. 고통도, 기쁨도, 실패도, 성공도 모두. "이것이 나의 축복이다. 모든 사물 위에 서서 그것들의 변호인, 구원자, 정당화자로서." 일곱 번째 연에서 그는 절정에 이른다. "오, 인생이여! 내가 너를 바라보았던가? 나는 죽음의 눈 속을 들여다본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경험한다면, 네가 천 번 돌아오기를 어찌 동경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조건 없는 긍정의 순간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제 삶 전체를, 그 모든 측면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그리고 그것이 영원히 반복되기를 원한다. 이것이야말로 니체가 꿈꾼 최고의 긍정,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다.


제4부는 가장 논란이 많고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니체는 이 부분을 1885년에 완성했지만 극소수에게만 배포했고, 나중에 공개 출판을 주저했다. 이 부분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다양한 "고등인간들"을 만난다. 그는 동굴에서 나와 다시 세상으로 향하는데, 길에서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먼저 예언자를 만난다. 예언자는 허무주의의 화신으로,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설파한다.

"모든 것은 똑같다, 아무것도 가치가 없다, 세계는 의미가 없다, 지식은 질식시킨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를 위로하려 하지만, 예언자의 말은 그의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어서 그는 두 명의 왕을 만난다. 왕들은 왕관과 자주색 옷을 입고 있지만 당나귀를 끌고 간다. 그들은 차라투스트라에게 말한다.

"우리는 가장 고등한 인간을 찾아 나섰다. 그는 우리와 다른 인간, 반대되는 인간, 가장 고등한 인간이다."

현대 세계에서 진정한 왕은 없고, 대중이 지배한다. 진정한 고귀함을 찾아 그들은 방황한다.


차라투스트라는 계속 가다가 양심적인 지식인을 만난다. 이 학자는 평생을 거머리의 뇌를 연구하는 데 바쳤다. 그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이것이 나의 세계다!"

그는 좁은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했다. 니체는 이를 통해 현대 학문의 협소함을 비판한다. 진정한 지혜는 전체를 보는 것인데, 현대 학자들은 점점 더 좁은 영역에만 집중한다. 다음으로 마술사를 만난다. 마술사는 예술가의 상징이다. 그는 울부짖으며 고통받는 척하지만, 사실은 연기를 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그를 폭로하자 마술사는 인정한다.

"나는 지쳤다. 나의 나쁜 예술이 나를 지치게 한다. 나는 더 이상 위대한 것이 아니다. 왜 나는 그것을 숨기는가?"

현대 예술은 진정성을 잃고 효과만을 노린다. 자발적 거지도 만난다. 그는 부유했지만 가난한 자들 가운데 진리를 찾으려 모든 것을 버렸다. 하지만 가난한 자들도 진리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배와 내장에만 관심이 있었다.

가장 충격적인 인물은 "추한 인간"이다. 그는 흉측하게 생겨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숨어 산다. 차라투스트라가 그를 발견하자 추한 인간이 고백한다.

"그것은 나였다! 나는 신을 죽인 자다!"

그는 왜 신을 죽였는가?

"신은 보았다. 항상, 어디서나, 모든 것을 보았다. 그는 인간을 보았다. 그 신은 죽어야 했다! 인간은 그러한 증인이 살아 있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신은 너무 많이 알았다. 신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까지, 가장 추한 부분까지 모든 것을 보았다. 인간은 그런 시선을 견딜 수 없었다. 신의 동정하는 눈길이 인간을 수치스럽게 했다.

"그는 언제나 나를 보았다. 그러한 증인에게 나는 복수하고 싶었다. 아니면 스스로 죽어야 했다. 모든 것을 보는 신, 인간까지도 보는 신은 죽어야 했다!"

이것은 신의 죽음에 대한 놀라운 해석이다. 니체의 다른 작품에서 신은 인간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여기서는 그 이유가 설명된다. 신은 인간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았고, 인간은 그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모든 고등인간들을 자신의 동굴로 초대한다. 마지막으로 늙은 교황도 온다. 그는 은퇴한 교황으로, 신이 죽은 뒤 더 이상 섬길 주인이 없다. 그는 차라투스트라에게 말한다.

"신은 죽었다. 이제 가장 고등한 인간이 살기를 원한다."

그는 여전히 신을 그리워하지만, 신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동굴에 모인 고등인간들은 함께 만찬을 나눈다. 이것은 최후의 만찬에 대한 패러디다. 그들은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나의 첫 손님들이다. 나의 동굴의 첫 시민들이다."

하지만 그는 곧 실망한다. 이 고등인간들도 아직 진정한 초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거 시대의 위대함의 잔재일 뿐이다.

그날 밤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차라투스트라가 동굴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니 고등인간들이 당나귀를 숭배하고 있다. "당나귀 축제"가 시작된 것이다. 늙은 교황이 설교한다.

"이 당나귀는 가장 오래 참고, 가장 침묵하며, 가장 겸손하다. 그는 항상 '예'라고 말한다."

그들은 당나귀에게 찬양의 노래를 부른다.

"아멘!"

차라투스트라는 이 광경을 보고 분노한다. 신이 죽은 뒤에도 사람들은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곧 그는 웃기 시작한다. 그는 이해한다.

"여러분은 아직 웃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들의 경건함보다 차라리 그들의 어리석음을 사랑한다. 적어도 그들은 정직하게 어리석다.

"더 나은 당나귀 축제보다는 신을 믿는 편이 낫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당나귀 축제의 형태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옛 신앙에 대한 기념비를 세우는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을 용서한다. 그들은 아직 배우는 중이다.


이튿날 아침 차라투스트라는 동굴 밖으로 나간다. 그는 사자들에 둘러싸여 있고, 비둘기 떼가 그의 머리 위를 날아다닌다. 사자들은 그를 핥으며 웃는 것처럼 보인다. 비둘기들은 그의 하얀 머리카락에 앉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광경을 보고 깨닫는다. 이것이 그가 기다리던 신호다.

"이것은 나의 아침이다. 나의 날이 밝아온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위대한 정오여!"

그는 동굴로 돌아가 고등인간들에게 말한다.

"오, 나의 손님들이여, 이상한 손님들이여, 너희는 아직 내가 찾는 자들이 아니었구나!"

그가 찾던 것은 고등인간이 아니라 초인을 향해 가는 자들이었다. 고등인간들은 과거의 잔재이지만,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미래를 창조하는 자들이다. 사자와 비둘기가 온 것은 그의 아이들, 진정한 제자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다. 책은 이렇게 열린 결말로 끝난다. 차라투스트라는 마침내 내려갈 준비가 되었다. 이번에는 제자를 찾는 것도, 군중에게 설교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내려간다. 그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진정으로 시작된다.


이 서사 구조 전체를 통해 니체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정신의 변화 과정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여러 번 올라가고 내려오며, 혼자 있다가 사람들과 함께하고, 가르치다가 침묵한다. 이 순환적 운동 자체가 영원회귀를 반영한다. 진리는 한 번에 도달하는 목표가 아니라 끊임없이 재발견되고 재해석되어야 하는 과정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제자들을 떠나보낸 것은 그들이 스스로 이 과정을 경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답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 이것이 진정한 가르침이다. 책의 구조 자체가 선형적 진보를 거부한다. 1부에서 4부로 가면서 차라투스트라가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문제들을 더 깊이 파고든다. 첫 번째 하산에서 그는 초인을 선언했지만 아직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두 번째 하산에서 그는 제자들을 가르치지만 곧 그들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세 번째 하산에서 그는 영원회귀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고등인간들을 만난다. 각 단계는 더 깊은 이해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니체가 이 책에서 사용한 문체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의도적으로 성경, 특히 신약성경의 문체를 패러디했다. 예수의 산상수훈에 대응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산에서 내려와 가르친다. 하지만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정반대다. 예수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했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창조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한다. 예수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라고 했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한다. 니체는 기독교의 언어를 빌려 기독교를 전복시킨다. 이것은 단순한 문학적 기교가 아니라 전략적 선택이다. 서양 문명은 수천 년간 성경의 언어로 생각하고 느껴왔다. 그 언어를 완전히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신 니체는 그 언어를 재전유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차라투스트라는 반(反) 그리스도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복음을 전하는 자이기도 하다.


책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시적 이미지들도 중요하다. 산과 골짜기, 빛과 어둠, 독수리와 뱀, 사자와 비둘기, 태양과 정오 등의 상징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독수리는 긍지와 고고함을 상징하며, 뱀은 지혜와 영원회귀(자기 꼬리를 무는 뱀, 우로보로스)를 상징한다. 이 두 동물은 차라투스트라의 동반자로 계속 함께한다. 산은 고독과 명상의 공간이며, 골짜기는 인간 세계를 의미한다. 태양은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주는 존재로, 차라투스트라가 되고자 하는 모습이다. 정오는 그림자가 가장 짧아지는 순간으로, 진리가 가장 명확해지는 시간이다. "위대한 정오"는 인류가 극복의 정점에 도달하는 순간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이고 감각적으로 만든다. 니체는 철학을 머리로만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끼게 하려 했다.


책의 리듬과 음악성도 중요한 요소다. 니체는 작곡가 바그너의 친구였으며 스스로도 음악을 작곡했다. 그는 『차라투스트라』를 "교향곡"처럼 구성했다. 각 부는 악장과 같으며, 주제들이 반복되고 변주된다. 어떤 장은 느리고 명상적이며, 어떤 장은 빠르고 열정적이다. "밤의 노래", "춤의 노래", "무덤의 노래" 같은 장들은 제목부터 음악적이다. 특히 "밤의 노래"는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외로움을 노래하는 아름답고 슬픈 장이다.

"빛이다, 나는. 아, 내가 밤이었다면! 그러나 이것이 나의 고독이다. 나는 빛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

그는 모든 것을 주지만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이것이 창조자의 운명이다. "춤의 노래"에서는 삶 자체를 여성으로 의인화하여 춤을 춘다. 이 장들은 철학적 논증이 아니라 정서적 경험을 전달한다. 니체는 독자가 차라투스트라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라 느끼기를 원했다.


니체가 이 책을 통해 제시한 것은 단순한 철학 이론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그것은 편안하거나 위안을 주는 가르침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불편하고 요구가 많으며, 끊임없는 자기 극복을 요구한다. 차라투스트라는 구원자가 아니라 길잡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따라오라고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길을 가라"고 말한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자율성이다. 더 이상 신에게, 사회에게, 전통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입법자가 되라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책임을 동반한다. 신이 없다면, 객관적 도덕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택에 온전히 책임을 져야 한다. 변명할 곳이 없다. "신의 뜻이었다", "사회가 강요했다"라고 말할 수 없다. 이 자유는 무겁다. 하지만 니체가 보기에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존엄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창조할 수 있는 존재다.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1부는 1883년에, 2부는 같은 해 여름에, 3부는 1884년에 출간되었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니체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40부가 팔렸다"고 한탄했다. 4부는 1885년에 완성되었지만 출판사를 찾지 못했다. 니체는 자비로 40부를 인쇄하여 극소수의 친구들에게만 배포했다. 그는 자신이 "시대를 앞서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1888년 그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이렇게 썼다.

"언젠가는 나와 연관되어 무언가 엄청난 것, 위기 같은 것, 가장 깊은 양심의 충돌 같은 것이 기억될 것이다."

그는 『차라투스트라』를 "다이너마이트"라고 불렀다. 세상을 뒤흔들 폭발물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것을 보지 못한 채 1889년 1월 3일 토리노 거리에서 정신적 붕괴를 겪었다. 그는 말이 채찍질당하는 것을 보고 말의 목을 끌어안고 울다가 쓰러졌다. 그 후 11년간 정신병 상태로 지내다가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에서 사망했다. 그의 예언은 맞았다. 20세기에 들어 이 책은 문학, 철학, 심리학, 예술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니체로부터 진정성과 자기 창조의 개념을 이어받았다. 하이데거는 니체를 서양 형이상학의 완성자이자 극복자로 해석했다. 그는 힘에의 의지를 존재 자체에 대한 마지막 형이상학적 해석으로 보았다.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자신의 핵심 명제가 니체의 영향 아래 있음을 인정했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영원회귀와 유사한 주제를 다루었다. 부조리한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하는 것, 이것이 카뮈가 본 니체의 유산이었다.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니체의 진리 비판과 해석학을 더욱 발전시켰다. 푸코는 니체로부터 권력에 대한 계보학적 분석 방법을 배웠다. 진리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는 니체의 통찰은 푸코의 모든 작업의 기초가 되었다. 들뢰즈는 니체를 "철학자들의 철학자"라 불렀으며, 차이와 반복, 생성과 긍정의 철학을 니체에게서 찾았다. 데리다는 니체의 텍스트를 해체하며 서양 형이상학 전체를 해체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니체의 영향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누이 엘리자베트 푀르스터-니체는 니체 사후 그의 작품들을 관리하며 왜곡했다. 그녀는 반유대주의자이자 독일 민족주의자였으며, 오빠의 작품을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맞게 편집했다. 그녀는 니체의 메모들을 모아 『힘에의 의지』라는 책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니체가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1930년대 나치는 니체를 자신들의 이데올로그로 전유했다. 히틀러는 니체 기록 보관소를 방문했고, 무솔리니는 니체의 흉상을 선물받았다. 초인은 아리아인 우월주의로, 힘에의 의지는 군사적 정복으로, 주인 도덕은 인종주의로 왜곡되었다. 전쟁 후 수십 년간 니체는 파시즘의 선구자로 비난받았다. 하지만 이것은 심각한 오독이었다. 니체는 반국가주의자였고, 반민족주의자였으며, 범유럽주의자였다. 그는 독일 민족주의를 경멸했고, 반유대주의를 "병든 자들의 원한"이라 불렀다. 그는 누이의 반유대주의적 남편과 절교했다. 초인은 생물학적 개념이 아니라 정신적 이상이었다. 나치의 니체 전유는 역사상 가장 악의적인 오독 중 하나였다.


20세기 후반 학자들의 노력으로 니체의 진정한 사상이 복원되었다. 발터 카우프만, 질 들뢰즈, 미셸 푸코 같은 사상가들이 니체를 왜곡에서 구해냈다. 오늘날 니체는 근대성의 가장 예리한 비판자로, 포스트모던 사상의 선구자로, 실존주의의 아버지로 인정받는다. 그의 사상은 여전히 논쟁적이지만, 그 중요성은 부인할 수 없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특히 문학과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1896년 같은 제목의 교향시를 작곡했다. 이 곡의 유명한 도입부("일출")는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사용되어 더욱 유명해졌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니체의 영향 아래 쓰였으며, 토마스 만의 『마의 산』도 니체적 주제들을 탐구한다. 현대 대중문화에서도 니체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신은 죽었다"는 말은 무수한 노래, 영화, 소설에 인용되었다. 초인 개념은 슈퍼히어로 장르에 영향을 미쳤다(비록 왜곡된 형태지만).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진정한 가치는 학술적 영향력이나 문화적 파급력을 넘어선다. 이 책은 여전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당신이 믿는 가치들은 진정으로 당신 자신의 것인가, 아니면 사회로부터, 부모로부터,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인가? 당신은 당신의 삶을, 그 모든 실패와 고통을 포함해서, 다시 살고 싶은가? 영원히 반복된다 해도 후회 없이 살 수 있는가? 당신은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있는가, 아니면 현상 유지에 안주하고 있는가? 당신은 무엇을 창조하고 있는가? 이 질문들은 니체가 살았던 19세기 말뿐만 아니라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어쩌면 더욱 절박하게 느껴진다. 전통적 가치 체계가 무너진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여전히 의미를 갈구하면서도 그것을 창조할 용기는 부족하다. 우리는 여전히 죽은 신들의 그림자 아래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


니체가 예견한 허무주의는 오늘날 현실이 되었다. "신은 죽었다"는 선언은 이제 문화적 사실이다. 서양 사회의 대부분은 더 이상 기독교를 진지하게 믿지 않는다. 하지만 니체가 경고한 대로 우리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고 있다. 대신 우리는 소비주의, 상대주의, 냉소주의 속에서 표류한다. 모든 것이 의견의 문제가 되고, 모든 가치가 상대화되며, 진지함은 순진함으로 여겨진다. 이것이야말로 니체가 말한 "수동적 허무주의", 즉 더 이상 아무것도 믿지 못하고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하는 상태다. 니체는 이것을 넘어서는 "능동적 허무주의"를 요구했다. 옛 가치를 파괴하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 의미의 부재를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니체의 도전이었고, 여전히 우리의 도전이다.


동시에 니체의 경고는 더욱 적절해졌다. 그가 비판한 "최후의 인간"은 오늘날 어디서나 볼 수 있다. 편안함과 안전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위험을 회피하고, 모든 것을 작고 관리 가능하게 만들려는 사람들. 큰 열정도, 큰 고통도, 큰 사랑도 없이 적당히 살아가는 것을 행복이라 부르는 사람들. 물론 편안함과 안전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가치가 될 때, 성장과 극복과 창조를 희생할 때, 우리는 니체가 경고한 최후의 인간이 된다. 현대의 웰빙 문화, 자기계발 산업, 행복 추구는 때로 이 함정에 빠진다. 진정한 성장은 불편함을 요구한다. 진정한 창조는 위험을 동반한다. 진정한 의미는 안락함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니체의 도전에 응답할 수 있는가?

첫째, 정직해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믿는 것과 단지 믿는 척하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와 우리 자신의 가치를 구분해야 한다.

둘째, 용기를 가져야 한다.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자기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은 용기를 요구한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안전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셋째, 창조해야 한다. 불평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부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할 무언가를 창조해야 한다.

넷째, 극복해야 한다. 어제의 나를 오늘 넘어서고, 오늘의 나를 내일 넘어서야 한다. 정체는 퇴보다.

다섯째, 긍정해야 한다. 삶을 조건부로가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만 아니었다면"이 아니라 "이것이었기에"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니체는 자신이 "시대를 앞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독자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의 시대에 속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사후에야 태어난다." 어쩌면 그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신의 죽음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 모든 확실성이 의심스러워진 시대를 경험하는 우리, 의미를 갈구하면서도 그것을 창조할 책임을 회피하는 우리를 말이다. 차라투스트라의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라. 스스로를 극복하라.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라. 영원히 반복된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방식으로 살라. 이것은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실존적 도전이다. 그리고 그 도전은 여전히 유효하다. 어쩌면 오늘날 더욱 절실하다. 우리는 차라투스트라가 말한 "순간의 문" 앞에 서 있다. 과거의 긴 길과 미래의 긴 길이 만나는 곳. 우리는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 뒤로 돌아갈 것인가,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니체가 제시한 제3의 길, 영원회귀의 길을 택할 것인가? 모든 순간을 영원히 반복하고 싶을 만큼 충만하게 사는 길 말이다. 이것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우리에게 남긴 물음이다. 그리고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C%B0%A8%EB%9D%BC%ED%88%AC%EC%8A%A4%ED%8A%B8%EB%9D%BC%EB%8A%94%20%EC%9D%B4%EB%A0%87%EA%B2%8C%20%EB%A7%90%ED%96%88%EB%8B%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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