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소송-부조리한 세상

by 레옹
250px-Kafka_Der_Prozess_1925.jpg

프란츠 카프카가 1914년에 쓰기 시작해 미완으로 남긴 『소송』은 20세기 문학사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작품 중 하나다. 이 소설은 어느 날 아침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체포되는 은행 차장 요제프 K.의 이야기를 다룬다. 카프카는 이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고, 1924년 결핵으로 사망하기 전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모든 원고를 불태워달라고 유언했다. 다행히도 브로트는 이 부탁을 거부했고, 1925년 『소송』을 출간했다. 만약 브로트가 친구의 유언을 따랐다면, 우리는 현대 실존주의 문학의 가장 중요한 텍스트 중 하나를 영원히 잃었을 것이다.


『소송』의 첫 문장은 충격적이다.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모략한 게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는데도 어느 날 아침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소설 전체의 핵심을 압축한다. K.는 자신이 무슨 죄로 기소되었는지 알지 못하며, 소설 내내 그 죄목을 밝히려 애쓰지만 끝내 실패한다. 서른 살 생일 아침, K.가 평소처럼 아침 식사를 기다리고 있을 때 두 명의 감시인이 그의 하숙방에 나타난다. 이들은 프란츠와 빌렘이라는 이름을 가진 하급 관리들로, K.의 아침 식사를 먹어치우고 그의 옷을 입어보며 무례하게 군다. 그들은 K.가 체포되었다고 말하지만, 무슨 혐의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K.가 범죄자라면 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지 묻자, 그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소관이 아니라고 답한다.

더 기괴한 것은 감독관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그는 K.의 이웃 빌스트너 양의 방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그곳에서 세 명의 은행 하급 직원들을 증인으로 소환한다. 이 직원들은 K.의 동료들로, 평소 K.가 업무상 우위를 점하던 사람들이다. 이제 그들은 K.의 체포를 목격하는 증인이 되어, 묘한 우월감과 호기심 섞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감독관은 K.에게 체포 사실을 확인시키지만, 역시 혐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K.에게 "생각해보시오, 당신은 체포되었지만 그것이 당신을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으로부터 방해하지는 않는다"고 말할 뿐이다. 이 역설적 상황은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체포는 물리적 구속이 아니라 심리적, 존재론적 구속이며, K.의 모든 삶을 오염시킨다.

K.의 첫 반응은 분노와 당혹감이다. 그는 자신이 무고하다고 확신하며, 이 상황이 곧 해결될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감시인들이 떠난 후, K.는 빌스트너 양의 방이 어질러진 것에 대해 그녀에게 사과하려다가 충동적으로 그녀에게 키스한다. 이 장면은 K.의 내면에 있는 무질서와 욕망을 암시한다. 그는 자신이 완벽하게 합리적이고 도덕적이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다. 빌스트너 양은 이후 K.를 철저히 피하며, 결국 이사를 간다. K.의 첫 번째 인간적 접촉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일주일 후, K.는 일요일 아침에 전화로 심문에 참석하라는 통지를 받는다. 장소는 교외의 허름한 아파트 건물이다. K.는 주소는 받았지만 정확한 방 번호는 듣지 못했다. 그는 건물을 돌아다니며 법정을 찾아야 한다. 이 탐색 과정 자체가 카프카적이다. 법정은 숨겨져 있으며, 찾기 어렵고, 명확한 표시가 없다. K.는 결국 "라스트너라는 목수를 찾는다"고 거짓말을 하며 한 문을 두드린다. 목수가 그곳에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 법정을 찾는 암호라고 그가 직관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문 뒤에 법정이 있다.

법정은 K.가 상상했던 장엄한 공간이 아니라, 낮은 천장의 비좁고 답답한 방이다. 공기는 숨 막힐 듯하고, 방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관중들은 모두 수염을 기른 남자들로, 검은 옷을 입고 있다. 그들은 법정 관계자인 것 같지만, 정확히 무슨 역할을 하는지는 불분명하다. K.가 늦게 도착했다고 심문 판사가 질책하자, K.는 반박한다. 그는 정확한 시간을 통지받지 못했으며, 어쨌든 이제 도착했다고 말한다. 이 순간 K.는 용기를 낸다. 그는 판사에게 질문하는 대신, 청중에게 직접 연설하기로 결심한다.

K.의 연설은 열정적이고 비판적이다. 그는 자신의 체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설명하며, 감시인들의 부패와 무능을 폭로한다. 그는 프란츠와 빌렘이 자신의 속옷을 요구했고, 자신의 아침 식사를 먹었으며, 심지어 자신에게서 뇌물을 기대했다고 말한다. 그는 이 조직 전체가 부패했으며, 그 유일한 의미는 무고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무의미한 심문을 진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청중은 박수를 친다. K.는 잠시 승리감을 느낀다. 그는 자신이 이 부조리한 시스템을 논리와 웅변으로 무너뜨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K.가 연설을 계속하려 할 때, 그는 청중의 반응이 변하는 것을 느낀다. 방 한쪽에서 비명 소리가 들린다. K.가 보니, 한 남자가 한 여자를 구석으로 끌고 가고 있다. 여자는 저항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무관심하다. K.는 혼란스럽다. 그의 열정적인 연설은 순식간에 중단되고, 청중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심문 판사는 K.에게 다음 주 같은 시간에 다시 오라고 말하고 심문을 종료한다. K.는 법정을 나서지만, 자신이 무엇을 성취했는지 확신할 수 없다.


다음 주 일요일, K.는 다시 같은 장소로 간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도 없다. 방은 비어 있고, 단지 몇 개의 의자와 책상만 남아 있다. K.는 깨닫는다. 그의 출석 여부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며, 그의 열정적인 연설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그는 허탈함을 느끼지만, 동시에 이상한 호기심에 사로잡힌다. 그는 방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한쪽 끝에 작은 연단이 있고, 그곳에 법률 서적이 놓여 있다. K.는 그 책들을 펼쳐본다. 첫 번째 책의 제목은 "그레테가 받은 괴로움 - 남편 한스가 주는 것"이고, 내용은 음란한 삽화로 가득 차 있다.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다. 법률 서적이라고 믿었던 것들은 모두 저급한 포르노그래피였다.

바로 그때 세탁부 여인이 나타난다. 그녀는 이 방에 산다고 말한다. 그녀의 남편은 법정 하급 관리이고, 그녀는 법정의 빨래를 한다. 그녀는 K.에게 이상한 관심을 보이며,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심문 판사가 그녀에게 관심이 있으며, 그녀가 판사에게 K.에 대해 좋게 말해줄 수 있다고 제안한다. 대화 중에 한 법학도가 나타난다. 그는 세탁부에게 노골적으로 접근하며, 그녀를 안아 올린다. 세탁부는 K.에게 도와달라고 애원하지만, K.는 망설인다. 법학도는 세탁부를 들어 올려 계단을 올라가고, 그녀를 심문 판사에게 데려간다고 말한다. K.는 이 광경을 무기력하게 바라본다.

세탁부의 남편이 나타나 K.에게 법정 사무실을 구경시켜준다. 그들은 좁고 낮은 복도를 지나간다. 복도는 끝없이 이어지고, 양쪽에는 문들이 줄지어 있다. 각 문 뒤에는 법정 관리들이 일하고 있다. 공기는 숨 막히고, K.는 점점 현기증을 느낀다. 그는 피고인들이 이 복도에서 기다리는 것을 본다. 그들은 구부정한 자세로 벤치에 앉아 있으며, 허리가 거의 직각으로 굽어 있다. 이것이 오랜 소송이 피고인의 몸에 남기는 흔적이다. K.는 공포를 느낀다. 그는 숨을 쉴 수 없고, 쓰러질 것 같다. 두 명의 법정 관리가 그를 밖으로 데려간다. K.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회복하지만, 그가 본 것의 의미는 그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다.


이 경험 이후, K.는 점점 더 소송에 집착한다. 그는 은행 업무를 소홀히 하기 시작한다. 그의 삼촌이 프라하로 찾아와 K.의 소송에 대해 듣고 충격을 받는다. 삼촌은 K.가 가족 전체를 수치스럽게 만들고 있다고 비난하며, 변호사를 소개한다. 변호사 후르트는 유명한 법률가지만, 이미 늙고 병들어 침대에 누워 지낸다. 그는 심장병을 앓고 있으며, 어두운 방에서 촛불 하나만 켜고 지낸다. 그러나 그는 법정의 고위 관리들과 개인적 친분이 있다고 자랑한다. 그는 K.에게 자신의 인맥을 통해 소송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다고 약속한다.

변호사의 집에는 간호사 레니가 있다. 그녀는 삼촌과 변호사가 이야기하는 동안 K.를 따로 불러낸다. 그녀는 K.에게 직접적으로 접근하며, "모든 피고인은 매력적이다"라고 말한다. 그녀는 K.에게 자신의 손을 보여준다. 그녀의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과 약지 사이에는 물갈퀴 같은 막이 있다. 이 기형은 그녀가 정상적인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녀는 법정의 세계에 속한 존재이며, 그 세계의 논리로 산다. K.와 레니는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이것은 K.가 법정의 세계로 더 깊이 빨려 들어가는 순간이다.

그 후 몇 달 동안, 변호사 후르트는 K.의 소송을 위해 일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눈에 보이는 진전은 없다. K.는 여러 번 변호사를 찾아가지만, 변호사는 항상 침대에 누워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그는 법정이 얼마나 복잡하고 비밀스러운지, 자신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지 설명하지만, 구체적인 전략이나 결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K.는 점점 더 좌절감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소송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어느 날 변호사의 집에서 K.는 블록이라는 상인을 만난다. 블록은 5년 넘게 소송을 진행 중인 피고인이다. 그는 완전히 소송에 삶을 빼앗겼다. 그의 사업은 거의 파산 상태이고, 그는 하루 종일 변호사의 집 근처를 서성이며 소송 소식을 기다린다. 블록은 후르트 외에도 다섯 명의 변호사를 더 고용했다. 그는 각 변호사에게 다른 변호사의 존재를 숨기며, 끊임없이 그들 사이를 오간다. 그는 법정에 관한 온갖 미신을 믿으며, 특정한 날에 특정한 판사에게 탄원서를 제출하면 효과가 있다는 등의 헛소문에 집착한다. K.는 블록을 보며 공포를 느낀다. 이것이 자신의 미래인가?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어느 밤 K.가 목격한 것이다. 레니가 K.를 변호사의 방으로 부른다. 거기서 K.는 블록이 변호사 침대 옆에 무릎 꿇고 있는 것을 본다. 변호사는 블록을 마치 개처럼 대한다. 그는 블록에게 "좀 더 가까이 오라"고 명령하고, 블록은 복종한다. 변호사는 블록의 소송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잔혹하게도 소송이 잘못되고 있다고 말한다. 블록은 절망하며 거의 울먹인다. 그는 변호사에게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애원한다. 변호사는 차갑게 대답한다. "나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블록은 완전히 굴종했다. 그는 더 이상 독립적인 인간이 아니라, 법정과 변호사의 자비에 의존하는 존재일 뿐이다.

이 광경을 본 K.는 결심한다. 그는 변호사를 해고해야 한다. 그는 블록처럼 되지 않을 것이다. 며칠 후, K.는 변호사를 찾아가 해고를 통보한다. 변호사는 충격을 받으며, K.가 얼마나 큰 실수를 하는지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K.는 확고하다. 그는 자신의 소송을 스스로 책임지겠다고 말한다. 레니는 K.를 말리려 하지만, K.는 듣지 않는다. 그는 변호사의 집을 나서며 해방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 해방감은 착각이다. 변호사를 해고한다고 해서 소송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K.의 소송은 계속된다. 은행의 한 동료가 K.에게 화가 티토렐리를 소개한다. 티토렐리는 법정 판사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로, 법정의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다고 한다. K.는 티토렐리의 작업실을 찾아간다. 작업실은 도시 외곽의 가난한 동네에 있는 다락방이다.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K.는 어린 소녀들이 그를 따라오며 웃고 속삭이는 것을 본다. 그들은 성적으로 조숙하며, K.를 놀리듯 따라다닌다. 이 소녀들은 법정 세계의 또 다른 기형적 산물이다.

티토렐리의 방은 비좁고 더우며 숨이 막힌다. 방 안에는 완성되지 않은 초상화들이 있다. 판사들은 모두 비슷하게 생겼으며, 높은 의자에 앉아 위엄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의자의 뒷받침이 왕좌의 상징처럼 보이도록 그려져 있다. 티토렐리는 판사들이 이런 식으로 자신들을 미화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설명한다. K.는 화가에게 무죄 판결의 가능성에 대해 묻는다.

티토렐리의 대답은 절망적이다. 그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한다.

첫째는 진짜 무죄 판결이다. 이것은 피고인이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이지만, 티토렐리는 단 한 번도 그런 경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전설 속에나 존재할 뿐이다.

둘째는 외관상의 무죄 판결이다. 이것은 판사가 피고인을 일시적으로 무죄로 선언하는 것이지만, 소송 파일은 닫히지 않고 계속 순환한다. 언제든지 상급 판사가 파일을 다시 열어 소송을 재개할 수 있다. 피고인은 항상 불안 속에 살아야 한다.

셋째는 소송 연기다. 이것은 소송을 가장 초기 단계에 계속 머물게 하는 것이다. 피고인과 조력자들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며, 소송은 결코 진전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판결은 나지 않는다.

K.는 묻는다.

"그렇다면 진짜 무죄는 불가능한가?"

티토렐리는 대답한다.

"제 경험으로는 그렇습니다."

이 순간 K.는 자신이 처한 상황의 절망적 본질을 이해한다. 법정은 무죄를 선언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법정의 목적은 피고인을 끝없이 소송 과정에 묶어두는 것이다. K.가 티토렐리의 방을 나가려 할 때, 화가는 그에게 뒷문을 보여준다. K.가 그 문을 열자, 놀랍게도 그곳은 또 다른 법정 사무실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사무실에도 또 다른 문이 있고, 그 너머에도 또 법정 사무실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K.는 깨닫는다. 어디를 가든, 어떤 문을 열든, 결국 모든 길은 법정으로 통한다는 것을. 도망칠 곳은 없다.


K.의 일상은 무너진다. 그는 은행에서 중요한 업무를 맡고 있었지만, 이제 동료들이 그를 비웃는 것을 느낀다. 부장은 K.에게 중요한 이탈리아 고객을 안내하는 임무를 맡긴다. 이것은 K.가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다. K.는 약속 시간에 대성당에서 고객을 기다린다. 그러나 고객은 나타나지 않는다. K.는 혼자 어두운 대성당 안을 걷는다.

갑자기 설교단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요제프 K.!"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부른다. K.가 올려다보니, 법원 사제가 설교단에 서 있다. 사제는 K.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다. K.는 다가간다. 사제는 K.에게 말한다.

"당신의 소송은 나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유죄라고 생각합니다."

K.는 반박한다.

"그러나 나는 무죄입니다."

사제는 말한다.

"그것은 유죄인 사람들이 모두 하는 말입니다."

사제는 K.가 너무 많이 다른 사람들, 특히 여자들에게 도움을 구했다고 비판한다. 그는 K.에게 이야기를 하나 들려준다. 이것이 '법 앞에서' 우화다. 시골에서 온 한 남자가 법에 들어가려 한다. 법 앞에는 문지기가 서 있다. 남자가 들어갈 수 있는지 묻자, 문지기는 말한다.

"지금은 안 된다."

남자는 문을 들여다본다. 문은 열려 있고, 문지기는 옆으로 비켜서 있다. 남자는 들어가려 하지만, 문지기가 경고한다.

"내가 허락한다고 해도, 나는 단지 가장 낮은 문지기일 뿐이다. 홀에서 홀로 갈수록, 각 문마다 문지기가 있고, 각각이 이전 것보다 강력하다. 나는 세 번째 문지기의 모습만 봐도 견딜 수 없다."

남자는 기다리기로 결정한다. 문지기는 그에게 의자를 주고, 문 옆에 앉게 한다. 남자는 거기 앉아 날마다, 해마다 기다린다. 그는 문지기에게 끊임없이 들여보내달라고 간청한다. 문지기는 가끔 간단한 질문들을 한다. 남자의 고향에 대해, 그리고 다른 것들에 대해. 그러나 그것은 단지 "보고서를 위해서"일 뿐이며, 마지막에는 항상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아직은 안 된다." 남자는 문지기를 설득하려고 모든 것을 시도한다. 그는 선물을 준다. 문지기는 그것들을 받지만 말한다. "나는 단지 네가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이것을 받을 뿐이다."

세월이 흐른다. 남자는 늙는다. 그는 문지기를 수년간 관찰하며, 문지기의 모피 옷깃에 있는 벼룩들까지 알게 된다. 그는 벼룩들에게까지 문지기를 설득해달라고 부탁한다. 결국 남자의 시력이 약해진다. 그는 주변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지만, 법의 문에서 나오는 빛을 본다. 그 빛은 점점 더 밝아진다. 이제 그는 죽을 때가 가까워졌다. 죽기 직전, 그의 머릿속에 평생 동안 품어왔던 질문이 떠오른다. 그는 문지기를 불러 묻는다.

"모든 사람이 법을 추구하는데, 어떻게 이 수년 동안 나 말고는 아무도 입장을 요구하지 않았습니까?"

문지기는 남자가 이미 죽어가고 있음을 보고, 그의 귀에 대고 소리친다.

"이곳으로는 아무도 입장을 허락받을 수 없었다. 이 입구는 오직 너만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가서 문을 닫겠다."


사제는 우화를 끝내고 K.를 바라본다. K.는 혼란스럽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사제는 K.에게 여러 가지 해석을 제시한다. 문지기가 남자를 속였는가? 어떤 해석에서는 문지기가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고 본다. 그는 남자에게 지금은 들어갈 수 없다고만 말했고, 영원히 들어갈 수 없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다른 해석에서는 문지기가 남자에게 동정심을 가졌다고 본다. 그는 남자에게 의자를 주었고, 선물을 받았으며, 대화 상대가 되어주었다. 또 다른 해석에서는 문지기 자신도 자유롭지 않다고 본다. 그는 법에 속박된 종이며, 남자가 들어가든 말든 그는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한다.

K.는 반박한다. 그는 문지기가 남자를 속였다고 생각한다. 사제는 말한다.

"그 견해를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텍스트에 너무 많은 주의를 기울이면 안 됩니다. 텍스트는 변경할 수 없고, 그것에 대한 의견들은 종종 단지 텍스트에 대한 절망의 표현일 뿐입니다."

이 말은 카프카 문학의 핵심을 드러낸다. 의미는 확정될 수 없으며, 모든 해석은 불완전하다. 사제와 K.는 계속해서 우화를 토론하지만, 어떤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사제는 K.에게 경고한다.

"법정은 너에게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법정은 네가 올 때 너를 받아들이고, 네가 갈 때 너를 보내줄 뿐이다."

K.는 묻는다.

"당신은 법정에 속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어떻게 나에게 이런 것을 말할 수 있습니까?"

사제는 차갑게 대답한다.

"나는 먼저 사제이고, 그 다음에 법정에 속한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이것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위안도 공허하다. 사제는 K.를 돕고 싶어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단지 K.에게 진실을 말할 뿐이고, 그 진실은 절망적이다. K.는 대성당을 떠난다. 밖은 이미 어두워졌다.


소설의 마지막 장은 K.의 서른한 살 생일 전날 밤에 일어난다. K.는 혼자 집에 있다. 저녁 9시에 두 남자가 그를 찾아온다. 그들은 검은 연미복을 입고 실크 모자를 쓰고 있으며, 창백하고 뚱뚱하다. 그들의 외모는 우스꽝스럽다. K.는 그들이 삼류 테너 가수나 늙은 배우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왔는지 안다. 그들은 그의 처형인이다.

K.는 순간적으로 저항을 생각한다. 그는 문을 잠글 수도 있고, 창문으로 뛰어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이제 사람들이 말하는 모든 어리석음을 행동으로 옮길 것인가?"

그는 결정한다.

"내가 체포되었을 때부터 계속해서 주장해온 논리가 있다면, 나는 끝까지 그것을 유지해야 한다."

그는 모자를 쓰고, 두 남자와 함께 간다. 세 사람은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걷는다. K.는 가운데 있고, 두 남자가 양쪽에서 그를 붙잡고 있다. 그들의 보조는 완벽하게 일치한다.

거리를 걷는 동안, K.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것을 의식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본다. K.는 생각한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 두 남자는 내가 고용한 배우들이고, 우리는 어떤 장면을 연기하는 것처럼 보일까?" 그는 수치심을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이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이것이 정말 그의 마지막 밤인가?

그들은 강을 따라 걷는다. 어떤 지점에서 K.는 빌스트너 양을 본다. 아니면 그녀처럼 보이는 여자를. 그녀는 작은 광장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른다. K.는 그녀를 따라가고 싶다. 그는 생각한다. "나는 광장이 내 목적지임을 미리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확신한다." 그러나 빌스트너 양은 사라진다. K.와 두 남자는 계단을 올라 광장에 도착하고, 그것을 가로질러 교외로 나간다.

그들은 채석장에 도착한다. 거기에는 독립적으로 서 있는 작은 건물이 있다. 달이 밝게 빛난다. 두 남자는 K.의 외투를 벗긴다, 그의 조끼를 벗긴다, 마지막으로 셔츠를 벗긴다. K.는 떨린다. 추위 때문인지, 공포 때문인지 알 수 없다. 그들은 그를 바위 옆으로 데려가 그곳에 눕힌다. K.의 머리를 바위 위에 놓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정중하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그를 다룬다.

한 남자가 외투를 벗고 그 안에서 긴 도살용 칼을 꺼낸다. 두 남자는 K.의 머리 위에서 칼을 서로에게 건넨다. K.는 이것을 본다. 그는 이해한다. 그들은 그가 칼을 빼앗아 스스로 찌르기를 기대한다. 그들은 그에게 자살의 권리와 의무를 주려는 것이다. 그러나 K.는 하지 않는다. 그는 생각한다.

"나는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노동을 떼어낼 수는 없다. 책임을 끝까지 맡지 못한 죄는 관리들에게 남을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그 책임을 빼앗을 힘이 부족하다."

그의 눈이 인근 건물의 최상층으로 간다. 갑자기 창문이 열린다. 희미하고 약한 빛 속에서 한 인물이 몸을 밖으로 내밀고 팔을 더욱 멀리 뻗는다. 그는 누구인가? 친구인가? 착한 사람인가? 동정하는 사람인가? 도움을 주고 싶어하는 사람인가? 단독으로 행동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사람인가? 여전히 도움이 있는가? 여전히 잊혀진 이의가 있는가? 여전히 주장이 있는가? 물론 있다. 논리는 흔들릴 수 없지만, 살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저항할 수 없다. 논리는 어디에 있는가? K.는 그것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논리는 어디에도 없다.

이 순간 한 남자가 K.의 목을 잡고, 다른 남자가 심장에 칼을 깊이 찔러 넣고 두 번 돌린다. 희미해지는 눈으로 K.는 두 남자가 자신의 얼굴 가까이에서, 뺨에 뺨을 대고 관찰하는 것을 본다. 그들은 최종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K.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다. "개처럼!" 그리고 마지막 생각은 이것이다. 마치 수치가 그를 살아남을 것처럼.


이것이 『소송』의 결말이다. K.는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이해하지 못했고, 법의 본질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자신의 운명을 바꾸지 못했다. 그는 단지 체제의 논리에 따라 처리되고 제거될 뿐이다. 그의 죽음은 비극적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예상된 것이기도 하다. 소설의 첫 페이지부터 K.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었다. 그의 모든 투쟁과 노력은 이미 정해진 결말을 향한 지연일 뿐이었다.

카프카가 살았던 프라하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였고, 관료제의 미로 같은 복잡함으로 악명 높았다. 유대인이었던 카프카는 이중 삼중의 소외를 경험했다. 그는 체코인들 사이에서는 독일어를 쓰는 외부인이었고, 독일어권 공동체에서는 유대인이었으며, 유대 공동체 내에서는 전통적 신앙에 거리를 둔 세속적 지식인이었다. 더욱이 카프카는 자신의 아버지와도 깊은 갈등 관계에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상인으로,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인물이었다. 카프카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아버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하고 죄책감을 느꼈는지 고백한다. 이러한 개인적 경험은 『소송』에서 K.가 느끼는 설명할 수 없는 죄의식과 권위 앞에서의 무력감으로 변형된다.


소설 속 법정은 현실의 어떤 법정과도 다르다. 법정은 다락방에 있고, 법률 서적은 음란물로 가득 차 있으며, 판사와 변호사들은 부패하고 무능하다. 그러나 이 기괴한 법정이야말로 카프카가 포착하려 한 진실의 핵심이다. 카프카는 법률 자체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법이라는 이름으로 작동하는 불투명한 권력 구조, 그리고 그 앞에서 무력해지는 개인의 조건을 드러내려 했다. K.가 마주하는 것은 구체적인 법률이 아니라 '법'이라는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권위다. 이 권위는 어디에나 있으면서 동시에 어디에도 없고, 모든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소송』의 구조 자체도 의미심장하다. 소설은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카프카는 그 순서를 확정하지 않았다. 브로트가 출판할 때 장들의 순서를 정했지만, 일부 장들은 미완성 상태였다. 이러한 구조적 불완전성은 우연이 아니라 소설의 주제와 일치한다. K.의 소송이 명확한 시작과 끝이 없듯이, 소설 자체도 명확한 구조를 거부한다. 어떤 비평가들은 장들의 순서를 바꿔도 소설의 의미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소송 자체의 본질을 반영한다. 어떤 순서로 사건이 벌어지든, 결말은 동일하다.


'법 앞에서' 우화는 실제로 카프카가 독립적으로 발표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1915년에 이 우화를 따로 출판했는데, 이는 그가 이 이야기를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시사한다. 우화 속 문과 문지기의 이미지는 카프카의 다른 작품들에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미완성 소설 『성』에서도 주인공은 성에 들어가려 하지만 끊임없이 거부당한다. 카프카에게 있어 접근 불가능한 권위, 도달할 수 없는 진리는 반복되는 강박관념이었다.

흥미롭게도, 우화 속 남자의 실패는 능동성의 부재에서 온다. 그는 문지기의 허락을 기다리지만, 실제로 문은 열려 있다. 그가 원했다면 들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문지기는 그를 물리적으로 막지 않았다. 단지 "지금은 안 된다"고 말했을 뿐이다. 남자는 스스로를 억제한다. 그는 권위를 내면화하고, 그 권위가 자신을 배제하는 것을 받아들인다. K.도 마찬가지다. 그는 소송을 거부하고 도망갈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체제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무죄를 증명하려 한다. 이 인정 자체가 그를 유죄로 만든다.


『소송』이 출간된 1925년은 유럽이 제1차 세계대전의 상처에서 회복하려 애쓰던 시기였고, 곧 파시즘의 부상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카프카의 소설은 예언적이었다. 나치 독일의 관료적 학살 기계, 스탈린주의 소련의 보여주기식 재판, 그리고 20세기 전체주의 체제의 부조리는 모두 『소송』에서 예견된 악몽이었다. 카프카의 세 여동생은 모두 홀로코스트에서 살해되었다. 만약 카프카가 1924년에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그 역시 같은 운명을 맞았을 것이다. 그의 문학은 개인적 경험에서 나왔지만, 곧 도래할 집단적 비극을 미리 형상화했다.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은 카프카적 현실이 실제로 구현된 사례다. 아이히만은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낸 나치 관료였다. 재판에서 그는 자신이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며, 개인적으로는 유대인에 대한 악의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완벽한 관료였다.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고 부른 것이 바로 이것이다. K.를 처형한 두 남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악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할 뿐이다. 그들은 심지어 K.를 정중하게 대한다. 이것이 관료적 악의 본질이다. 개인적 책임은 분산되고, 모두가 시스템의 일부일 뿐이며, 누구도 진정한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소송』의 현대적 의미는 20세기 전체주의에 국한되지 않는다. 21세기의 독자들은 이 소설에서 새로운 공명을 발견한다. 알고리즘에 의해 결정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신용 점수, 투명하지 않은 기업의 의사결정 과정, 복잡한 관료제 속에서 책임의 주체를 찾을 수 없는 현대 사회의 구조들은 모두 카프카적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모니터링되고 평가되지만, 누가 무슨 기준으로 우리를 판단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서 우리의 계정이 정지될 수 있고, 대출 신청이 거부될 수 있으며, 비자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K.처럼 우리도 이해할 수 없는 시스템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도록 강제받는다.

더 나아가, 『소송』은 현대적 감시 사회를 예견한다. K.는 체포된 후에도 자유롭지만, 그가 어디를 가든 법정의 세계가 따라온다. 그는 은행에 있을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여자들과 함께 있을 때도 소송을 의식한다. 그의 삶 전체가 법정의 관할 아래 놓인다. 이것은 푸코가 말한 '판옵티콘' 효과와 유사하다. 실제로 누가 감시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주체가 자신이 감시받고 있다고 믿고, 그에 따라 행동을 조정한다는 것이다. K.는 스스로를 검열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한다.


카프카는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질문을 던질 뿐이다. 법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개인은 거대한 체제 앞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얼마나 통제하는가? 죄의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정말로 무고한가, 아니면 단지 우리의 죄를 모를 뿐인가? 이 질문들은 대답하기 불가능하지만, 바로 그 불가능성이 카프카 문학의 핵심이다. 『소송』은 편안한 해답을 거부하고, 독자를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근본적으로 이해 불가능할 수도 있으며, 우리가 믿는 질서는 실제로는 카오스의 얇은 베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카프카의 문체는 이러한 내용과 완벽하게 조응한다. 그의 문장은 명료하고 사무적이며, 마치 법률 문서나 관료적 보고서 같다. 환상적이고 악몽 같은 사건들이 가장 현실적이고 무미건조한 문체로 서술된다. 이 문체적 선택은 소설의 공포를 증폭시킨다. 만약 카프카가 고딕적이거나 표현주의적 문체를 사용했다면, 독자는 이것이 '단지 문학적 과장'이라고 안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냉정하고 객관적인 문체는 독자에게 경고한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세계는 정말로 이렇게 작동한다고.

카프카의 문체적 정밀함은 그의 직업 경험에서 나온다. 그는 낮에는 노동자 상해 보험 회사에서 일했고, 밤에 글을 썼다. 그는 보험 청구서와 법률 문서를 다루는 데 익숙했다. 이 경험은 그의 문학에 깊이 스며들었다. 『소송』의 문장들은 관료적 언어의 정확성과 비인간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의도적 선택이다. 카프카는 관료제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 언어가 인간성을 어떻게 배제하는지 보여준다.


결국 『소송』은 인간 존재의 조건에 대한 가장 솔직하고 용감한 탐구 중 하나다. 카프카는 우리에게 위안을 주지 않는다. 그는 해피엔딩을 약속하지 않고,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지 않으며, 의미의 확실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우리를 K.의 자리에 앉히고, 같은 질문과 씨름하게 한다. 그리고 바로 이 불편함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카프카의 『소송』은 읽기 쉬운 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독자에게 편안함을 주지 않으며, 명확한 해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이 어려움이 소설의 가치다. K.가 법정의 의미를 이해하려 분투하듯, 독자도 소설의 의미를 붙잡으려 애쓴다. 이 과정 자체가 카프카적 경험이다. 우리는 명확성을 추구하지만, 얻는 것은 더 많은 질문뿐이다. 우리는 확실성을 원하지만, 마주하는 것은 끝없는 모호함이다.

그러나 진지하게 우리 시대를 이해하려는 모든 독자에게 이 소설은 피할 수 없는 텍스트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어떤 의미에서 요제프 K.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규칙에 따라 살아가며, 투명하지 않은 권위에 복종하고, 설명되지 않는 판단을 받는다. 우리는 모두 때때로 죄책감을 느끼지만 정확히 무엇에 대한 죄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을 통제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힘들에 의해 움직인다.


『소송』이 제기하는 가장 불편한 질문은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K.는 정말로 무고한가? 소설은 그가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K. 자신의 관점이다. 소설 전체에서 K.는 여러 여성들과 무책임한 관계를 맺고, 그들을 이용하려 한다. 그는 자기중심적이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다. 세탁부가 법학도에게 끌려갈 때 그는 효과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며, 블록의 굴욕을 목격하면서도 단지 자신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는 자신의 무죄를 확신하지만, 그 확신의 근거는 무엇인가? 카프카는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자신이 무고하다고 확신하는가? 그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질문은 더 깊은 철학적, 신학적 차원을 가진다.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인이다. 원죄의 개념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죄를 지녔다고 말한다. 우리는 무엇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이기 때문에 유죄다. K.의 상황은 이 신학적 딜레마의 세속적 변형이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그가 무고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의 죄는 존재 자체에 있는지도 모른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소송』에서 실존적 불안의 완벽한 형상화를 보았다. 하이데거의 '피투성'(Geworfenheit) 개념, 즉 우리가 선택 없이 세계에 던져졌다는 생각은 K.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한다. K.는 자신이 원하지 않은 소송에 던져졌고, 이해할 수 없는 규칙들에 따라 살아야 한다.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도 『소송』과 공명한다. K.에게 미리 주어진 본질이나 의미는 없다. 그는 스스로 의미를 창조해야 하지만, 법정의 구조는 그러한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카프카를 부조리 작가로 분류했다. 카뮈에게 부조리란 인간의 의미 추구와 세계의 무의미함 사이의 충돌이다. K.는 끊임없이 의미를 찾지만, 세계는 의미를 주기를 거부한다. 그는 논리와 이성으로 상황을 이해하려 하지만, 상황은 논리를 초월한다. 그러나 카뮈는 시지프가 바위를 굴리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K.는 결코 평화를 찾지 못한다. 그의 투쟁은 끝없는 고통일 뿐이다.

발터 벤야민은 카프카 문학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된 세계를 보았다. 그는 카프카의 세계를 "세계의 왜곡된 지옥"이라고 불렀다. 이 세계에서 신은 완전히 부재하거나, 있다면 이해 불가능하고 도달 불가능한 존재다. '법 앞에서' 우화에서 법은 신의 은총을 대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의 은총과 달리, 법은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남자는 평생을 기다리지만 허사다. 이것이 카프카적 세계의 참혹함이다. 구원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영원히 지연된다.

막스 브로트, 카프카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그의 작품을 세상에 알린 사람은 카프카를 종교적 작가로 해석했다. 브로트는 카프카가 진정한 신앙을 추구했으며, 그의 소설들은 신과의 관계에 대한 탐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해석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카프카 자신은 전통적 종교에서 거리를 두었고, 그의 신 개념(만약 있다면)은 정통 유대교나 기독교의 신과는 매우 달랐다. 『소송』에 등장하는 법원 사제도 위안을 주지 못한다. 그는 K.에게 진실을 말하지만, 그 진실은 구원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 소수적 문학을 위하여』에서 카프카를 정치적으로 읽는다. 그들은 카프카 문학이 권력 구조와 그것이 어떻게 욕망을 생산하고 통제하는지를 드러낸다고 본다. 『소송』에서 법정은 단순히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K.로 하여금 자신의 유죄를 믿게 만들고, 법정의 정당성을 인정하게 만든다. 이것이 권력의 가장 효과적인 형태다. 외부로부터의 강제가 아니라 내부화된 복종. K.는 도망칠 수 있었지만 하지 않는다. 그는 법정과 싸울 수 있었지만 그 안에서 무죄를 증명하려 한다. 그는 이미 패배했다.


『소송』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공간의 의미다. 소설 속 공간들은 모두 불안하고 비정상적이다. 법정은 다락방에 있고, 변호사는 어두운 침실에 갇혀 있으며, 화가의 작업실은 숨 막히고, 대성당은 텅 비어 있다. 이 공간들은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다. 그들은 일상적 공간처럼 보이지만, 악몽의 논리를 따른다. K.가 어디를 가든 그는 갇혀 있다. 심지어 열린 거리에서도 그는 자유롭지 않다. 공간 자체가 그를 포위한다.

이러한 공간의 폐쇄성은 카프카 자신의 경험을 반영한다. 프라하는 아름다운 도시였지만, 카프카에게는 감옥이었다. 그는 이 도시를 떠나고 싶어했지만 가족과 직업이 그를 묶어두었다. 그는 부모의 집에 살면서 독립을 갈망했다. 이러한 개인적 경험이 『소송』의 폐소공포증적 공간들로 변형되었다. K.도 물리적으로는 움직일 수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소송에 묶여 있다.


여성 인물들의 역할도 주목할 만하다. 『소송』의 모든 여성은 법정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빌스트너 양은 K.를 피하고, 세탁부는 법정 관리의 아내이며, 레니는 변호사의 간호사이자 다른 피고인들과도 관계를 맺는다. 심지어 K.의 삼촌이 데려온 여성조차 법정과 연결되어 있다. 여성들은 K.에게 접근하지만, 그들은 결코 그를 구원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과의 관계는 K.를 법정 세계로 더욱 깊이 끌어들인다.

이러한 여성 묘사는 카프카의 여성관을 반영하는 것으로 종종 비판받았다. 카프카는 여러 여성과 약혼했지만 결혼하지 못했다. 그는 친밀함을 갈망하면서도 두려워했다. 그의 일기와 편지들은 여성에 대한 복잡하고 모순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소송』의 여성들은 유혹자이자 배신자로 그려진다. 그들은 도움을 약속하지만 실제로는 K.를 더 깊은 곤경에 빠뜨린다. 이것은 카프카 자신의 관계에 대한 불안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여성들이 법정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법정의 권력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침투적인지를 보여준다. 법정은 단지 제도적 공간이 아니라, 모든 인간 관계를 포괄하는 총체적 시스템이다. 사랑도, 욕망도, 친밀함도 법정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것이 카프카가 그리는 세계의 참혹한 전체성이다.


『소송』의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K.는 "개처럼!"이라고 말하며 죽는다. 이 단어의 선택은 의미심장하다. 개는 복종하는 동물이고, 주인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K.는 자신이 단지 체제에 복종하는 존재로 죽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은 항의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인간으로서 대우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의 죽음은 굴욕적이고, 무의미하다. 그는 영웅적으로 저항하지도, 평화롭게 수용하지도 못한다. 그는 단지 제거될 뿐이다.

"수치가 그를 살아남을 것처럼"이라는 마지막 생각은 더욱 비극적이다. K.는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명예를 걱정한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기억할지 생각한다. 이것은 그가 끝까지 사회적 규범과 타인의 판단을 내면화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체제에 저항하기보다는 체제의 승인을 갈구했다. 이것이 그의 비극이다. 그는 자신을 억압하는 바로 그 시스템의 가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카프카는 K.를 단순히 비겁한 인물로 그리지 않는다. K.는 여러 번 저항을 시도했다. 그는 법정에서 연설했고, 변호사를 해고했으며,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의 실패는 개인적 결함이 아니라 구조적 불가능성에서 온다. 시스템은 저항을 허용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모든 저항은 이미 시스템에 흡수되고, 무력화된다. K.의 연설은 관중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변호사 해고는 상황을 개선하지 못했으며, 무죄 주장은 귀담아듣는 이가 없었다.

이것이 『소송』이 제시하는 가장 어두운 전망이다. 개인의 행위는 무의미하고, 체제는 변하지 않으며, 정의는 실현되지 않는다. 이러한 비관주의는 많은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우리는 희망을 원한다. 우리는 노력이 보상받고, 진실이 승리하고, 정의가 구현되는 이야기를 원한다. 『소송』은 이 모든 것을 거부한다.


그렇다면 『소송』을 읽는 것은 단지 우울한 경험일 뿐인가? 아니다. 카프카의 천재성은 절망 속에서도 진실을 드러낸다는 데 있다. 『소송』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실제 작동 방식을 폭로한다. 그것은 우리가 믿고 싶어하는 신화들—법이 공정하다, 진실이 밝혀진다, 무고한 자는 보호받는다—을 벗겨낸다. 이 폭로는 고통스럽지만 필요하다. 왜냐하면 진실을 직면하지 않고는 변화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소송』은 독자에게 능동적 역할을 요구한다. 카프카는 해석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는 독자가 스스로 의미를 구성하도록 한다. 사제가 '법 앞에서' 우화에 대해 여러 해석을 제시하듯, 독자도 소설 전체에 대해 자신의 해석을 만들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수동적 소비자가 아니라 능동적 사유자가 된다. 독자는 K.와 함께 의미를 찾아 헤매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과 세계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소송』은 또한 저항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 K.의 실패는 저항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방식이 효과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K.는 체제의 규칙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승리하려 했다. 그러나 체제의 규칙 자체가 문제였다. 진정한 저항은 체제를 거부하고, 그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K.가 처음부터 소송을 거부하고, 체포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물론 이것도 실패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자신의 조건으로 죽었을 것이다.

카프카 자신이 『소송』에서 무엇을 의도했는지 우리는 결코 완전히 알 수 없다. 그는 소설을 완성하지 않았고, 그것을 출판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어쩌면 그는 이 작품이 너무 개인적이거나, 너무 절망적이거나, 너무 노골적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독자들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브로트의 "배신"—친구의 유언을 어긴 것—은 세계에 선물이 되었다. 『소송』은 출판되었고, 세계는 그것을 필요로 했다.

오늘날 『소송』은 세계 문학의 정전으로 자리 잡았다. 그것은 수없이 번역되고, 연구되고, 각색되었다. 오손 웰스의 1962년 영화는 소설의 악몽 같은 분위기를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무수한 연극과 오페라가 이 이야기를 재해석했다. 카프카의 이름은 형용사가 되었다. "카프카적"이라는 말은 이제 부조리하고 악몽 같은 관료주의적 상황을 설명하는 보편적 용어다.

그러나 『소송』의 진정한 영향력은 문화적 현상을 넘어선다. 이 소설은 우리가 권력과 정의, 법과 개인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카프카 이전에는 법이 공정하다고 가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카프카 이후, 우리는 법 자체를 의심하고 비판할 수 있게 되었다. 카프카 이전에는 무고한 사람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믿었다. 카프카 이후, 우리는 무고함이 보호막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카프카의 문학은 우리에게 세계를 다르게 보도록 가르친다. 일상적인 것 속에서 부조리를 발견하고, 당연한 것에 질문하고, 보이지 않는 권력 구조를 인식하도록 한다. 이것은 단지 문학적 기교가 아니라 정치적, 윤리적 행위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 말해지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 이것이 비판적 문학의 역할이다.

『소송』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독자에게 불편함과 불안을 준다. 그것은 명확한 해답이나 위안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어려움이 이 소설을 100년이 지난 지금도 중요하게 만든다. 우리는 여전히 카프카가 제기한 질문들과 씨름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투명하지 않은 권력 구조 속에서 살아가고, 이해할 수 없는 규칙에 복종하고, 설명되지 않는 판단을 받는다. 우리는 여전히 정의가 무엇인지, 법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개인이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묻는다.

카프카는 이 질문들에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 질문들을 물을 수 있게 만들었다. 그는 우리에게 세계를 비판적으로 보는 언어를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문학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할 수 있는 공간을 여는 것. 『소송』은 그러한 공간이다. 불편하고, 불안하고, 때로는 절망적인 공간이지만,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공간.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러한 공간을 필요로 한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8B%AC%ED%8C%90_(%EC%86%8C%EC%84%A4)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08화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영원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