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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복수와 실존 사이의 방황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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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1600년에서 1601년 사이에 쓰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4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인간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지며 독자와 관객을 사로잡는다. 이 비극은 단순히 덴마크 왕자의 복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행동과 사유, 정의와 광기, 삶과 죽음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는 인간 의식의 초상화이며, 우리 모두가 직면하는 실존적 딜레마의 가장 순수하고도 고통스러운 표현이다.


극은 덴마크 엘시노어 성의 야경 장면으로 시작된다. 한밤중 성벽 위에서 경비병들은 연속으로 나타나는 유령 때문에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 유령은 최근 죽은 햄릿 왕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완전무장한 채 침묵 속에 배회한다. 햄릿의 친구 호레이쇼가 이 소식을 듣고 확인하러 왔을 때, 유령은 다시 나타나지만 말을 하려는 순간 새벽 닭이 울자 사라진다. 이 불길한 시작은 작품 전체를 지배할 분위기를 설정한다. 덴마크에는 무언가 썩은 것이 있으며, 죽은 왕이 무덤에서 나온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가 무너졌음을 상징한다. 호레이쇼는 젊은 햄릿 왕자에게 이 기괴한 출현을 알리기로 결심한다.


한편 궁정에서는 새로운 질서가 확립되고 있다. 햄릿 왕이 죽은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그의 동생 클로디어스가 왕위에 올랐고 형수였던 거트루드와 결혼했다. 클로디어스는 능숙한 정치가답게 조정을 개최하여 노르웨이 문제를 처리하고, 폴로니어스의 아들 레어티스에게 프랑스 유학을 허락하며, 햄릿에게는 비텐베르크로 돌아가지 말고 궁정에 남으라고 설득한다. 그러나 햄릿은 검은 상복을 입고 우울에 잠겨 있다. 그는 어머니의 성급한 재혼에 충격을 받았고, "나약한 것, 그대 이름은 여자"라며 여성 전체에 대한 환멸을 드러낸다. 첫 독백에서 그는 "오, 이 너무나 견고한 육체가 녹아 이슬이 되어 사라진다면"이라고 탄식하며, 자살을 생각하지만 신의 계율이 자살을 금하고 있음을 상기한다.


복수극이라는 외피를 걸친 『햄릿』은 사실 복수극의 관습을 의도적으로 전복시킨다. 토마스 키드의 『스페인 비극』이나 셰익스피어 자신의 초기작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와 같은 당대 복수극들은 주인공이 신속하게 행동하고 피로 얼룩진 보복을 실행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햄릿은 다르다. 그는 1막에서 아버지의 유령을 만나 클로디어스가 살인자임을 알게 되지만, 극이 끝날 때까지 결정적인 행동을 미룬다. 그날 밤 성벽에서 유령이 다시 나타나자, 햄릿은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유령을 따라간다. 유령은 자신이 연옥에서 고통받고 있으며, 형제 클로디어스에게 살해당했다고 폭로한다. 클로디어스는 정원에서 낮잠을 자던 왕의 귓속에 독을 부어 그를 죽였고, 왕위와 왕비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유령은 햄릿에게 복수를 명령하지만, 거트루드는 해치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 지연은 단순한 우유부단함이 아니라, 셰익스피어가 탐구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철학적 문제다. 햄릿은 행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의미와 정당성,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한다.


햄릿은 유령의 말을 믿으면서도 의심한다. 악마가 자신을 유혹하기 위해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광기를 가장하기로 결심한다. "이상한 행동"을 할 것이니 놀라지 말라고 호레이쇼와 경비병들에게 맹세를 받는다. 이 가짜 광기는 그에게 자유롭게 행동하고 관찰할 여유를 준다. 그러나 이 전략은 곧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는다. 폴로니어스는 햄릿의 이상한 행동이 오필리아에 대한 거절당한 사랑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실제로 폴로니어스는 딸에게 햄릿을 멀리하라고 명령했고, 오필리아는 순종적으로 햄릿의 편지를 돌려보내고 만남을 거부했다. 햄릿과 오필리아의 관계는 이미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햄릿의 가장 유명한 독백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이 작품의 철학적 깊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대사는 종종 자살에 대한 고민으로만 해석되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복잡한 실존적 질문을 담고 있다. 햄릿은 수동적으로 고통을 견디는 것과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 사이에서, 존재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과 그것을 끝내는 것 사이에서 갈등한다. "죽음이라는 미지의 나라에서 돌아온 여행자는 없다"는 그의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방금 아버지의 유령이라는 죽음의 여행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의미심장하다. 햄릿은 유령의 말을 믿으면서도 의심하고, 복수를 결심하면서도 주저한다. 이는 인간이 확실성 없이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실존적 곤경을 완벽하게 구현한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이상과 그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로젠크란츠와 길든스턴이 그를 방문했을 때, 햄릿은 장엄한 독백을 펼친다.

"인간이란 얼마나 놀라운 작품인가! 이성에 있어서는 얼마나 고귀한가! 능력에 있어서는 얼마나 무한한가! 형태와 동작에 있어서는 얼마나 표현적이고 감탄스러운가! 행동에 있어서는 천사와 같고, 이해력에 있어서는 신과 같다! 세상의 아름다움이요, 동물의 모범이로다!"

그러나 이 찬가는 즉시 냉소적 반전을 맞는다.

"그러나 나에게 인간은 무엇인가? 이 먼지 덩어리가 나를 즐겁게 하지 못한다."

이러한 극적인 대조는 르네상스적 낙관주의와 실존적 허무주의 사이의 긴장을 드러낸다.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교육받은 햄릿은 마르틴 루터가 가르쳤던 곳에서 사유하고 분석하고 질문하도록 훈련받았다. 이것은 단순한 배경 설정이 아니다. 비텐베르크는 종교개혁의 중심지였고, 전통적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고 개인의 양심과 이성을 강조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성적 능력이 그를 마비시킨다. 그는 너무 많이 생각하고, 너무 깊이 의심하며, 너무 철저히 검증하려 한다. 햄릿 자신도 이를 인식한다. 포틴브라스의 군대가 무가치한 땅을 위해 행진하는 것을 보고 그는 독백한다.

"진정한 위대함은 큰 목적 없이 싸우지 않지만, 명예가 걸린 문제라면 지푸라기 하나를 위해서도 크게 싸우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질책하며 "나에게는 죽여야 할 아버지와 더럽혀진 어머니가 있는데, 이성과 피와 판단이 나를 부추기는데도 나는 그저 잠만 잔다"고 탄식한다.


클로디어스를 살해할 완벽한 기회가 찾아왔을 때, 햄릿이 행동을 미루는 장면은 이러한 심리적 복잡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극 중 극이 끝난 후 동요한 클로디어스는 홀로 기도하러 간다. 햄릿은 그를 발견하고 칼을 뽑지만, 기도하는 순간에 죽이면 그의 영혼이 천국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며 칼을 거둔다. "나의 아버지는 식사 중에 죽임을 당했고, 그의 죄는 만개한 상태였다"며, 아버지처럼 클로디어스도 죄 가운데서 죽어야 한다고 다짐한다. 표면적으로 이는 더 완벽한 복수를 위한 계산처럼 보이지만, 많은 비평가들은 이것이 행동을 회피하기 위한 합리화라고 해석한다. 극적 아이러니는 이 장면에서 절정에 달한다. 클로디어스는 기도를 시도했지만 진정으로 회개할 수 없었다. "내 말들은 위로 날아가지만, 내 생각은 아래에 머문다. 생각 없는 말은 결코 천국에 이르지 못한다"고 독백한다. 햄릿이 그를 죽였다면, 클로디어스는 천국에 가지 못했을 것이다. 햄릿은 복수를 원하면서도 두려워하고, 행동해야 함을 알면서도 행동의 도덕적 의미에 사로잡혀 있다. 이는 현대인들이 경험하는 분석 마비와 놀랍도록 유사하다. 우리는 너무 많은 정보와 선택지 앞에서 종종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완벽한 순간을 기다리다가 기회를 놓친다.


폴로니어스의 죽음은 비극적 연쇄반응을 촉발한다. 클로디어스는 햄릿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즉시 그를 영국으로 보낸다. 표면적으로는 안전을 위한 조치지만, 실제로는 영국 왕에게 햄릿을 죽이라는 밀서를 동봉한다. 한편 오필리아는 아버지의 죽음과 햄릿의 거부로 인해 완전히 무너진다. 그녀는 진정한 광기에 빠져 노래를 부르며 배회한다. 그녀의 노래들은 죽음과 배신, 그리고 성적 타락에 관한 것들이다. "발렌타인 축제날 아침 일찍 내가 창가에 서 있을 때"라는 노래는 순결을 잃은 처녀에 관한 것으로, 그녀의 억압된 감정과 성적 의식이 광기 속에서 분출된다. 레어티스가 프랑스에서 급히 돌아와 아버지의 죽음과 여동생의 상태를 보고 분노하지만, 이미 오필리아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얼마 후 거트루드는 오필리아가 버드나무 아래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고 전한다. "그녀는 개울에서 꽃으로 화환을 만들려다가 가지가 부러져 물에 떨어졌다"는 보고는 아름답고도 슬프다. 오필리아는 물에 잠기면서도 한동안 노래를 부르다가 "옷이 무거워져 가련한 아이를 진흙 같은 죽음으로 끌어당겼다"고 한다. 이것이 자살인지 사고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교회 사람들도 의심하지만 그녀를 기독교식으로 매장하는 것을 허락한다.


햄릿과 오필리아의 관계는 이 작품의 또 다른 비극적 차원을 드러낸다. 한때 순수한 사랑을 나누었던 두 사람은 엘시노어 궁정의 독성적 분위기 속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햄릿이 오필리아에게 "수녀원으로 가라"고 외치는 장면은 그의 내면적 혼란과 여성 일반에 대한 환멸을 동시에 보여준다. 어머니 거트루드가 아버지가 죽은 지 두 달도 안 돼 클로디어스와 재혼한 것은 햄릿에게 깊은 배신감을 주었고, 이는 그의 세계관 전체를 오염시켰다. "나약한 것, 그대 이름은 여자"라는 그의 독백은 개인적 상처가 어떻게 편견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오필리아는 아버지 폴로니어스와 오라버니 레어티스, 그리고 햄릿 사이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잃고, 결국 광기에 빠져 익사한다. 그녀의 죽음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무력함의 비극적 결말이다.


『햄릿』의 극 중 극 장면은 셰익스피어의 메타연극적 천재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진실과 허위, 현실과 연기 사이의 경계를 흐린다. 햄릿은 순회극단에게 아버지 살해 장면을 재연하도록 요청하여 클로디어스의 반응을 관찰한다. "연극은 왕의 양심을 사로잡을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예술은 진실을 드러내는 거울이 된다. 극단이 도착하자 햄릿은 그들에게 "곤자고의 살해"라는 극에 자신이 쓴 대사 몇 줄을 삽입해달라고 부탁한다. 이 극의 줄거리는 놀랍도록 햄릿 왕의 살해와 유사하다. 극 중의 루시아누스는 자고 있는 조카의 귓속에 독을 붓고, 그의 아내를 유혹한다. 관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장면이 펼쳐지자, 클로디어스는 동요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불을 켜라!"고 외치며 퇴장한다. 햄릿은 이제 확신을 얻었다. 유령의 말은 진실이었고, 클로디어스는 정말로 살인자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엘시노어 궁전 전체가 이미 하나의 무대다. 클로디어스는 정당한 왕을 연기하고, 거트루드는 행복한 왕비를 연기하며, 햄릿 자신도 광기를 연기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자아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연기하는 역할과 우리의 본질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현대의 정체성 논의와도 깊이 공명한다.


햄릿의 가짜 광기는 작품 전체를 통해 가장 논쟁적인 요소 중 하나다. 처음에 햄릿은 의도적으로 미친 척하기로 결심하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그의 광기가 어디까지 연기이고 어디서부터 진짜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폴로니어스와의 대화에서 그는 겉보기에 무의미한 말들을 늘어놓지만, 그 속에는 날카로운 진실이 숨어있다. 폴로니어스가 "무슨 책을 읽고 계십니까?"라고 묻자 햄릿은 "말, 말, 말"이라고 대답하고, 책의 내용에 대해 "늙은이들은 회색 수염에 주름진 얼굴을 가졌고, 눈에서는 진득진득한 것이 흐르고, 재치와 허리가 약하다"고 말한다. 이는 바로 눈앞의 폴로니어스를 조롱하는 것이다. 폴로니어스는 옆에서 "광기이긴 하지만 방법이 있다"고 중얼거린다. 로젠크란츠와 길든스턴 앞에서 햄릿은 더욱 복잡한 이중성을 보인다. 그들이 왕의 명령으로 자신을 감시하러 왔다는 것을 즉각 간파하고, 그들과 대화하면서도 끊임없이 진실과 거짓, 연기와 현실 사이를 오간다. 오필리아의 진정한 광기와 대조될 때, 햄릿의 광기는 더욱 복잡한 의미를 띤다. 오필리아는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노래와 말장난 속에서 방황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의 노래는 무의식적 욕망과 억압된 기억의 분출이다. "내 사랑이 창가로 왔을 때, 처녀로 왔지만, 처녀가 아니고 떠났네"라는 노래는 성적 순결의 상실을 노래하며, 이는 그녀 자신의 햄릿에 대한 감정과 배신감을 암시한다. 반면 햜릿의 광기는 날카로운 통찰과 진실을 담고 있으며, 때로는 다른 어떤 수단보다 효과적으로 진실을 말한다. "광기 속에도 방법이 있다"는 폴로니어스의 관찰은 정확하다. 햄릿은 광기라는 가면 뒤에서 자유롭게 진실을 말하고, 궁정의 위선을 폭로하며,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표현한다. 그러나 이 가면이 점차 그의 진짜 얼굴과 구별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비극이다.


폴로니어스는 희극적 인물로 보일 수 있지만, 그의 존재는 엘시노어 궁정의 부패를 상징한다. 그는 끊임없이 다른 이들을 감시하고 조종하며, 심지어 자신의 아들 레어티스를 염탐하기 위해 첩자를 보낸다. 그의 조언들은 표면적으로는 현명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허한 상투어에 불과하다.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진실하라"는 그의 유명한 충고는 아이러니하게도 평생을 거짓과 음모 속에서 산 인물의 입에서 나온다. 햄릿이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러 갈 때, 폴로니어스는 거트루드의 침실 커튼 뒤에 숨어 엿듣기로 한다. 격렬한 대화가 오가던 중 거트루드가 비명을 지르자, 폴로니어스도 커튼 뒤에서 "도와주시오!"라고 외친다. 햄릿은 그것이 왕이라고 생각하고 커튼을 향해 칼을 찔러 넣는다. "쥐다, 쥐가 한 마리 있군. 쥐 한 마리, 죽은 쥐"라고 말하며 커튼을 젖히자 그곳에는 폴로니어스가 쓰러져 있다. 햄릿은 충격을 받지만 곧 "운명이 나를 징벌의 채찍으로, 이 사람을 징벌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 우연한 살인은 극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놓는다. 폴로니어스는 말 그대로 엿듣다가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는 감시와 속임수로 얼룩진 그의 삶의 논리적 결말이다.


거트루드는 『햄릿』에서 가장 해석이 분분한 캐릭터 중 하나다. 그녀가 남편 살해에 가담했는지, 클로디어스의 범죄를 알고 있었는지는 극 전체에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모호성은 의도적이다. 거트루드는 능동적 악인이라기보다는 약하고 감각적이며 자기기만에 빠진 인물로 그려진다. 그녀는 편안함과 안정을 원하며, 불편한 진실을 외면한다. 침실 장면에서 햄릿은 어머니 앞에 두 개의 초상화를 내보이며 비교한다. 죽은 아버지의 초상화는 "히페리온의 이마, 전쟁의 신 마르스 같은 눈"을 지닌 이상적 왕의 모습이고, 클로디어스의 초상화는 "곰팡이 슨 이삭"처럼 타락한 모습이다. 햄릿은 어머니에게 "어떻게 이런 고귀한 왕에서 이 사람에게로 갈 수 있었습니까?"라고 절규한다. 거트루드는 "그만해요, 내 눈을 내 영혼 속으로 돌리게 하는구나"라고 외친다.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이 회피해온 진실과 마주한다. 햄릿은 계속해서 어머니의 성적 욕망을 비난하고, "당신 나이에 그런 욕정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라며 잔인하게 공격한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이 그녀를 변화시키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가 독이 든 잔을 마시는 것이 자살인지 우연인지도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클로디어스는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가장 복잡한 악당 중 하나다. 그는 단순히 악한 인물이 아니라, 양심과 야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입체적 캐릭터다. 극 중 극이 끝난 후 그는 홀로 남아 기도를 시도한다. 이 독백은 그의 내면을 가장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

"오, 내 죄는 악취를 풍긴다. 그것은 하늘에 닿을 만큼 저주받았다. 그것은 가장 오래된 저주를 받고 있다. 형제의 살해!"

그는 성서의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떠올리며 자신의 죄의 무게를 인식한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는 불가능하다.

"내가 여전히 내가 살인을 저지른 대가들을 소유하고 있는데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내 왕관, 내 야망, 내 왕비를."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려 하지만 자신의 위선을 인정한다.

"내 말들은 위로 날아가지만, 내 생각은 아래에 머문다. 생각 없는 말은 결코 천국에 이르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죄를 알고 있으며 심지어 후회하지만, 그 죄의 대가를 포기할 수는 없다. 이는 인간의 도덕적 딜레마를 날카롭게 포착한다. 우리는 종종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그것을 행할 용기나 의지를 갖지 못한다. 클로디어스는 유능한 통치자로 묘사되며, 정치적으로는 햄릿보다 더 실용적이고 효과적이다. 극의 시작 부분에서 그는 노르웨이와의 외교 문제를 능숙하게 처리하고, 궁정을 안정시키며, 과거 왕의 죽음으로 인한 혼란을 수습한다. 그는 적절한 때에 슬픔과 기쁨을 균형있게 표현하며, "지혜로운 슬픔으로 형제를 추모하면서, 우리 자신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묘사는 권력과 도덕, 능력과 정당성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제기한다. 과연 유능한 악인과 무능한 선인 중 누가 더 나은 통치자인가? 셰익스피어는 이 질문에 대한 단순한 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극의 마지막 장면은 피의 카타르시스와 함께 모든 긴장이 폭발한다. 영국으로 가던 중 해적에게 습격당한 햄릿은 덴마크로 돌아온다. 그는 항해 중에 클로디어스의 밀서를 발견하고, 교묘하게 내용을 바꿔 로젠크란츠와 길든스턴이 대신 죽임을 당하도록 만들었다. 묘지 장면에서 햄릿은 무덤을 파는 광대와 대화를 나누며 죽음의 평등함에 대해 성찰한다. 광대가 파낸 해골이 왕이었을 수도, 변호사였을 수도, 심지어 알렉산더 대왕이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때 장례 행렬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오필리아의 장례식이다. 햄릿은 충격을 받고, 레어티스가 누이의 무덤에 뛰어들어 슬퍼하자 자신도 뛰어들어 "나는 오필리아를 사랑했소. 사만 명 형제의 사랑도 내 사랑에는 미치지 못했소"라고 외친다. 레어티스와 햄릿은 무덤 속에서 격투를 벌인다.


클로디어스는 이 대립을 이용하여 레어티스와 햄릿의 결투를 조직한다. 레어티스는 아버지와 누이의 복수를 위해 햄릿을 죽이기로 클로디어스와 공모한다. 그들은 이중 삼중의 계획을 세운다. 레어티스의 칼날에 독을 바르고, 또한 햄릿이 목말라할 때를 대비해 독이 든 포도주를 준비한다. 결투가 시작되고 처음에는 햄릿이 우위를 점한다. 거트루드는 아들을 격려하며 독이 든 잔을 들어 "왕이여, 아들의 행운을 위하여 마시겠습니다"라고 말한다. 클로디어스가 말리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결투가 계속되고 레어티스는 햄릿을 찌른다. 격투 중에 칼이 바뀌고 햄릿도 레어티스를 찌른다. 이제 둘 다 독이 든 칼에 베였다. 거트루드가 쓰러지며 "오, 내 햄릿, 포도주가, 포도주가 독이 들었구나!"라고 외친다. 레어티스는 "왕이여, 왕이 죄가 있소"라고 폭로하며, 자신과 햄릿 모두 곧 죽을 것이라고 말한다. 햄릿은 마침내 결정적으로 행동한다. 독이 든 칼로 클로디어스를 찌르고, 남은 독주까지 그의 입에 부어 넣으며 "저주받은 덴마크 사람이여, 네 독약을 마셔라!"고 외친다.


레어티스와의 결투에서 햄릿, 레어티스, 거트루드, 클로디어스 모두가 죽음을 맞이한다. 이 집단적 죽음은 복수의 순환이 가져오는 파괴적 결과를 보여준다. 레어티스는 죽어가면서 햄릿과 화해한다.

"햄릿, 당신은 죽었소. 당신을 찌른 칼에는 독이 있었소. 세상의 어떤 약도 당신을 구할 수 없소. 왕이, 왕이 책임이 있소. 햄릿, 나를 용서하시오."

햄릿도 그를 용서하며 "하늘이 너를 용서하소서. 나도 뒤따르겠소"라고 답한다. 레어티스는 아버지와 누이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추구하다가 결국 자신도 희생자가 된다. 햄릿은 마침내 클로디어스를 죽이지만, 그 자신도 독이 든 칼에 찔려 죽어간다. 복수는 정의를 가져오는가, 아니면 단지 폭력의 연쇄를 확장할 뿐인가? 셰익스피어는 답을 제시하지 않고 질문만 남긴다.


햄릿의 마지막 대사들은 그가 평생 추구해온 의미와 명예에 대한 집착을 보여준다. 독이 몸에 퍼지는 것을 느끼며 햄릿은 호레이쇼가 자신을 따라 죽으려 하자 격렬히 만류한다.

"오, 신이시여, 호레이쇼, 내가 죽은 후 내 평판이 상처받는다면 무슨 명예가 되겠소? 만약 당신이 한 번이라도 나를 당신의 가슴에 품었다면, 천국의 행복에서 잠시 떨어져, 이 가혹한 세상에서 고통 속에 숨을 쉬며, 내 이야기를 전하시오."

호레이쇼는 포도주 잔을 들고 자살하려 하지만, 햄릿이 그의 손에서 잔을 빼앗으며 "나는 당신에게 명령한다, 친구로서, 당신이 나에게 빚진 사랑과 우정으로, 이 잔을 마시지 마시오"라고 간청한다. 포틴브라스가 전쟁에서 돌아오는 소리가 들리고, 햄릿은 그가 다음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며 "그는 내 죽어가는 목소리를 얻을 것이오"라고 말한다. 그의 마지막 말은 완성되지 못한 문장이다.

"나머지는 침묵이다."

이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말은 언어의 한계, 죽음의 신비, 그리고 모든 인간 노력의 궁극적 무의미함을 암시한다. 그러나 "나머지는 침묵이다"라는 말 이전에, 그는 호레이쇼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간청했다. 죽음 앞에서도 햄릿은 자신이 어떻게 기억될지를 염려한다. 이는 인간의 근본적 욕구, 즉 의미를 남기고 이해받고자 하는 욕구를 반영한다. 호레이쇼는 생존자로서 증인이 되어 이야기를 전하겠다고 약속한다.

"이제 왕족의 마음이 멎었구나. 착한 밤, 다정한 왕자여, 천사들의 노래가 그대를 잠들게 하길."

그러나 호레이쇼가 포틴브라스와 영국 대사들에게 약속하는 설명은 과연 진실을 온전히 담을 수 있을까?

"당신들은 피로 물든 잔인하고 부자연스러운 행위들, 우연한 심판들, 우발적 학살들, 계략과 강요로 인한 죽음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음모가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진 계획들에 대해 들을 것입니다."

극은 사건에 대한 해석과 재해석의 문제를 끝까지 제기한다.


포틴브라스의 등장은 『햄릿』에 또 다른 층위의 의미를 더한다. 노르웨이의 왕자 포틴브라스는 햄릿과 대조적으로 주저 없이 행동하는 인물이다. 그는 "가치 없는 땅 한 조각"을 위해서도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벌인다. 햄릿은 포틴브라스의 결단력을 부러워하면서도, 그러한 무의미한 폭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극의 마지막에 포틴브라스가 도착하여 덴마크의 왕위를 차지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사유하고 고뇌한 햄릿은 죽고, 단순하게 행동한 포틴브라스가 승리한다. 이는 실용주의가 이상주의를 이긴다는 냉소적 결론인가, 아니면 행동과 사유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교훈인가?


『햄릿』이 400년 넘게 관객을 사로잡는 이유는 그것이 보편적인 인간 경험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확실성 없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을 마주한다. 우리는 행동해야 할지 기다려야 할지, 복수할지 용서할지, 진실을 말할지 침묵할지 고민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의 배신을 경험하고, 정의와 현실 사이의 간극에 좌절한다. 햄릿의 실존적 고뇌는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을 통해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질문을 제기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진실을 아는 것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행동이 필요한가? 복수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현대 독자들에게도 여전히 긴급하고 절실하다. 『햄릿』은 시대를 초월한 걸작이 아니라, 모든 시대가 새롭게 읽고 해석해야 하는 살아있는 텍스트다. 햄릿의 방황은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이 작품을 읽고 무대에서 보는 모든 이들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D%96%84%EB%A6%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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