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가 1922년에 발표한 소설 『싯다르타』는 한 인간의 영혼이 펼쳐 보이는 가장 투명하고도 절실한 순례의 기록이다.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온 지 백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성장소설 중 하나로 남아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던지는 질문들—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 소설은 그 어떤 철학서나 종교경전보다 솔직하고 구체적인 답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헤세는 인도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통해 동서양의 정신적 유산을 하나로 엮어내며, 깨달음이란 타인에게서 배우는 교리가 아니라 스스로 체험하는 삶 그 자체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헤세가 이 작품을 집필하던 시기는 그 자신에게 극도의 시련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목격하고 반전 입장을 견지하다 독일에서 매국노로 비난받았으며, 아내의 정신병과 아버지의 죽음, 자신의 우울증이 겹쳐 거의 1년 반 동안 창작이 불가능할 정도로 침잠했다. 정신분석 치료를 받으며 칼 융의 제자 요제프 랑 박사와 깊은 대화를 나눈 헤세는 비로소 자신의 내면을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싯다르타의 1부를 쓴 후, 작품 속 깨달음을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2부를 완성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는 놀라운 정직함이자 동시에 문학적 치열함의 표현이었다. 헤세는 실제로 1년 반의 내적 여정을 거친 후에야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고, 그렇게 탄생한 『싯다르타』는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한 영혼의 증언이 되었다.
소설은 인도 어느 마을의 한 브라만 가정에서 시작된다. 싯다르타는 석가모니의 이름을 빌려 왔지만, 역사적 붓다의 생애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이는 의도적인 선택이다. 헤세는 깨달음이란 특정한 인물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는 가능성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작품 속 싯다르타는 브라만 계급의 아들로 태어나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환경에서 자란다. 그는 총명하고 잘생겼으며,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다. 아버지는 그에게 베다를 가르치고, 제의를 집전하는 법을 가르친다. 그러나 젊은 싯다르타는 만족하지 못한다. 밤에 홀로 망고나무 아래 앉아 명상할 때, 그는 깨닫는다. 아버지를 비롯한 브라만들이 가르치는 지식과 제의가 진정한 깨달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베다를 외우고, 제물을 바치고, 성스러운 의식을 거행하지만, 정작 그들 자신도 브라만—우주의 근원적 실체—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에게는 지식이 아니라 체험이 필요했고, 이론이 아니라 삶 자체가 필요했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친구 고빈다와 함께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사문들—숲 속에서 고행하는 수행자들—이 마을을 지나갈 때, 그는 그들을 따라가기로 한다. 아버지는 반대한다. 아들이 브라만의 안락한 삶을 버리고 거지처럼 떠돌아다니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밤새도록 서서 아버지를 설득한다. 그의 의지는 확고하다. 결국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주고, 싯다르타와 고빈다는 사문들과 함께 숲으로 들어간다.
사문의 삶은 가혹하다. 그들은 거의 먹지 않고, 잠을 거의 자지 않으며, 명상과 고행으로 시간을 보낸다. 싯다르타는 뜨거운 태양 아래 서서 육체의 고통을 견디는 법을 배운다. 얼음처럼 차가운 강물에 들어가 몸의 감각을 잊는 법을 배운다. 호흡을 멈추고, 심장 박동을 늦추고, 자아를 비우는 법을 배운다. 그는 모든 수행자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3년이 지나자 사문들의 우두머리조차 그에게 배울 것이 없을 정도가 된다. 하지만 어느 날, 싯다르타는 깨닫는다. 이 모든 고행이 결국 자아로부터의 도피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는 고통을 통해 자아를 억누르고 있을 뿐, 진정으로 자아를 초월하지는 못하고 있다. 고행이 끝나면 자아는 다시 돌아온다. 마치 술에 취한 사람이 깨어나면 다시 현실로 돌아오듯이. 그는 고빈다에게 말한다. 사문들의 가르침도 결국 브라만의 가르침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둘 다 진정한 해탈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바로 그때, 그들은 소문을 듣는다. 고타마라는 이름의 깨달은 자가 있다는 것을. 그는 부처, 즉 깨달은 자라고 불리며, 생사의 수레바퀴를 벗어나 완전한 해탈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빈다는 흥분한다. 드디어 진정한 스승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싯다르타는 회의적이지만, 고빈다의 간청에 못 이겨 함께 고타마를 찾아 나선다.
그들은 제따바나 숲에서 고타마를 만난다. 부처는 검은 옷을 입고 조용히 앉아 있다. 그의 얼굴은 평온하고, 눈빛은 깊다. 그가 설법을 시작하자, 수백 명의 사람들이 침묵 속에서 듣는다. 고타마는 사성제를 설한다. 삶은 고통이고, 고통의 원인은 갈애이며, 갈애를 끊으면 고통이 사라지고, 갈애를 끊는 길은 팔정도라고. 그의 가르침은 명료하고 논리적이며 완벽하다. 고빈다는 깊이 감동받는다. 설법이 끝난 후, 그는 고타마의 승가에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다른 선택을 한다.
싯다르타는 고타마를 찾아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눈다. 그는 고타마에게 말한다.
"당신의 가르침은 완벽합니다. 세상에 대한 당신의 통찰에는 틈이 없습니다. 사성제도, 팔정도도 모두 논리적으로 완벽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완벽함에 문제가 있습니다. 고타마는 놀란 표정으로 젊은이를 바라본다. 싯다르타는 계속 말한다. 당신의 가르침은 세상을 완벽하게 설명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하나로 연결된 전체인데, 당신의 가르침은 그것을 인과의 사슬로 분해합니다. 생과 사, 고통과 행복, 선과 악을 구분합니다. 그러나 당신 자신의 깨달음은 그런 구분을 초월한 것이 아닙니까? 당신의 깨달음은 말로 전달될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고타마는 미소 짓는다. 그렇다고, 깨달음은 말로 전달될 수 없다고. 그러나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말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싯다르타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나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깨달음은 당신 자신의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무수한 생을 거쳐 스스로 체험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나도 나 자신의 깨달음을 찾아야 합니다."
고타마는 다시 미소 짓고, 싯다르타를 축복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진다. 고빈다는 스승을 따라 남고, 싯다르타는 홀로 다시 길을 떠난다.
혼자가 된 싯다르타는 처음으로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는 지금까지 세상을 마야—환영이자 베일—로 보도록 교육받았다. 세상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고, 초월해야 할 장애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다르게 생각한다. 나무를 보며 그는 생각한다. 이 나무가 왜 환영인가? 푸른 하늘, 흐르는 강물, 노래하는 새들이 왜 극복해야 할 대상인가? 그는 처음으로 세상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동안 그는 브라만만을 추구했고, 아트만—자아의 본질—만을 찾았다. 그러나 이제 그는 깨닫는다. 세상 그 자체가 신성하다는 것을. 모든 것이 브라만이라는 것을.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걷다가, 싯다르타는 한 도시에 이른다. 도시 외곽의 숲에서 그는 한 여인을 만난다. 카말라라는 이름의 기녀다. 그녀는 아름답고 우아하며, 황금빛 가마를 타고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다. 싯다르타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한다.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달라고. 카말라는 웃는다.
"당신은 거지 같은 사문이 아닌가요? 어떻게 사랑을 배우겠어요?"
싯다르타는 말한다.
"나는 생각할 수 있고, 기다릴 수 있고, 금식할 수 있습니다."
카말라는 흥미를 느낀다. 그녀는 싯다르타에게 말한다.
"당신이 사랑을 배우고 싶다면, 먼저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옷을 입고, 선물을 가져와야 합니다. 나는 가난한 남자와는 사랑을 나누지 않습니다."
싯다르타는 도시로 들어가 상인 카마스와미를 만난다. 카말라가 소개해준 사람이다. 카마스와미는 부유한 상인이지만 까다롭고 인색하기로 유명하다. 그는 싯다르타에게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소?"
싯다르타는 대답한다.
"생각하고, 기다리고, 금식할 수 있습니다."
카마스와미는 비웃는다.
" 그게 무슨 소용이오?"
하지만 싯다르타는 차분하게 설명한다.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본질을 꿰뚫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은 조급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금식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카마스와미는 싯다르타의 침착함에 감탄하고, 그를 고용한다.
싯다르타는 빠르게 상업을 배운다. 그는 거래를 하고, 배를 보내고, 계약서를 작성한다. 그러나 처음에 그는 이 모든 것을 일종의 놀이로 여긴다. 돈을 벌어도 집착하지 않고, 손해를 봐도 화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사문의 초연함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세속의 세계에 살고 있지만, 그것에 속하지는 않는다. 동시에 그는 카말라에게서 사랑을 배운다. 육체적 쾌락, 관능의 기술, 감각의 섬세함을 배운다. 카말라는 단순한 기녀가 아니라 예술가다. 그녀는 싯다르타에게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렇게 세월이 흐른다. 1년, 5년, 10년, 20년. 싯다르타는 점점 더 부유해진다. 그는 아름다운 집을 소유하고, 하인들을 거느리고, 연회를 열고, 도박을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변화가 시작된다. 처음에는 놀이처럼 여기던 것들이 진지해진다. 돈을 잃으면 화가 나고, 거래가 성사되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카말라와의 시간도 더 이상 기쁨이 아니라 습관이 된다. 그는 술을 마시고, 도박에 빠지고, 탐욕스러워진다. 마음은 무겁고, 영혼은 지쳐간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속의 수레바퀴에 갇혀버린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싯다르타는 꿈에서 깬다. 꿈속에서 카말라는 황금빛 새장에 갇힌 노래하는 새를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그 새가 죽어 있었다. 싯다르타는 죽은 새를 들어 창밖으로 던졌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 안에서 무언가가 죽었다는 것을 느꼈다. 잠에서 깨어난 싯다르타는 거울을 본다. 거울에는 늙고 지친 얼굴이 비친다. 뚱뚱하고, 눈가에 주름이 잡히고, 입가에 불만의 선이 깊게 패인 얼굴. 이것이 나인가? 젊고 빛나던 수행자의 얼굴은 어디로 갔는가? 그는 충격을 받는다.
싯다르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집을 나선다. 모든 것을 두고 간다. 돈도, 옷도, 하인들도. 그는 도시를 빠져나와 강으로 향한다. 강가에 이르렀을 때, 그는 깊은 절망에 빠진다. 자신의 삶이 완전한 실패라고 느낀다. 브라만으로서의 삶도, 사문으로서의 삶도, 세속인으로서의 삶도 모두 의미가 없었다. 그는 강물을 내려다본다. 저 물속으로 몸을 던지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그때,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의 소리가 들린다.
"옴."
우주의 근원적 소리, 모든 존재의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음절. 그 소리는 강물에서 울려 퍼지고, 나무들에서 울려 퍼지고, 그의 내면에서 울려 퍼진다. 싯다르타는 무릎을 꿇고 쓰러진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진다. 그것은 보통의 잠이 아니라, 영혼이 재생되는 잠이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지키고 있음을 느낀다. 눈을 뜨자, 옛 친구 고빈다가 그 앞에 앉아 있다.
고빈다는 이제 늙은 승려가 되어 있다. 그는 수십 년간 고타마를 따라 수행했지만, 여전히 완전한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는 숲속에서 자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뱀이나 야수가 해칠까봐 밤새 지켜준 것이다. 아침이 되어 그 사람이 깨어나자, 고빈다는 놀란다. 그것은 싯다르타였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의 재회.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본다. 그들의 삶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왔다. 고빈다는 스승을 따라 규율 있는 삶을 살았고, 싯다르타는 방황과 실패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고빈다도, 싯다르타도 아직 완전한 평화에는 이르지 못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고빈다는 다시 길을 떠나고, 싯다르타는 홀로 강가에 남는다.
싯다르타는 강을 바라본다. 강물은 끊임없이 흐른다. 어제의 물은 오늘의 물이 아니고, 지금 흐르는 물은 잠시 후면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 자체는 항상 같은 자리에 있다. 상류도 강이고, 중류도 강이고, 하류도 강이다. 물은 계속 변하지만, 강은 변하지 않는다. 이 역설을 생각하며 싯다르타는 한 사람을 떠올린다. 수십 년 전, 자신을 강 건너편으로 태워주었던 뱃사공. 그는 바주데바라는 이름이었고, 친절하고 평화로운 사람이었다.
싯다르타는 강을 따라 걷다가 바주데바의 오두막을 발견한다. 바주데바는 늙었지만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뱃사공으로 살고 있다. 그는 싯다르타를 알아본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싯다르타는 말한다. 나도 당신처럼 뱃사공이 되고 싶습니다. 바주데바는 미소 지으며 말한다. 좋습니다. 함께 삽시다. 그렇게 싯다르타는 강가에 정착한다.
처음에는 단순한 일상이다. 아침에 일어나 배를 손질하고, 사람들을 강 건너편으로 태워주고, 저녁에는 쌀밥을 먹고 잠든다. 그러나 바주데바는 말한다.
"강에서 배우십시오. 강은 모든 것을 가르쳐줄 것입니다."
싯다르타는 의아해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해하기 시작한다. 강은 단순히 흐르는 물이 아니다. 강에는 무수한 소리가 있다. 상류에서 흘러오는 물소리, 중류의 급류 소리, 하류의 잔잔한 물소리. 그리고 그 소리들이 모여 하나의 화음을 이룬다. 싯다르타는 점점 더 깊이 듣기 시작한다.
어느 날, 카말라가 아들과 함께 강에 나타난다. 그녀는 고타마가 죽어간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나기 위해 순례길에 오른 것이다. 싯다르타의 아들을 데리고. 그러나 강가 근처에서 독사에 물린다. 싯다르타와 바주데바가 그녀를 오두막으로 옮기지만, 이미 늦었다. 카말라는 싯다르타를 알아보고 미소 짓는다. 그녀는 아들을 그에게 맡기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싯다르타는 그녀의 시신을 화장하고, 아들을 돌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들은 순종적이지 않다. 그는 도시에서 자라 호화로운 삶에 익숙해 있다. 가난한 뱃사공의 오두막이 싫고, 싯다르타가 싫고, 모든 것이 싫다. 그는 반항하고, 거칠게 행동하고, 도망치려 한다. 싯다르타는 아들을 사랑하고, 그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바로 그 사랑이 집착이 된다. 아들을 잃을까봐 두려워하고, 아들에게 미움받는 것이 괴롭다. 바주데바는 조용히 말한다.
"당신도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아들도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들을 수 없다.
결국 어느 날, 아들은 배를 훔쳐 타고 도시로 도망친다. 싯다르타는 아들을 찾아 나서려 하지만, 바주데바가 막는다. 보내주십시오. 그는 자신의 길을 가야 합니다. 싯다르타는 괴로워하며 강가에 주저앉는다. 그때, 강이 말을 건다. 강물 소리가 웃음소리처럼 들린다. 싯다르타는 강물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 속에서 무수한 얼굴들을 본다. 자신의 아버지, 자기 자신, 자신의 아들. 모든 세대가 같은 고통을 겪는다. 아버지는 아들을 놓아주지 못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떠난다. 이것은 영원한 순환이다.
싯다르타는 오랫동안 강을 듣는다. 강물 소리가 점점 커진다. 그 속에서 그는 모든 소리를 듣는다. 웃음소리, 울음소리, 탄생의 소리, 죽음의 소리. 기쁨과 슬픔, 선과 악, 모든 대립적인 것들이 동시에 울려 퍼진다. 그리고 그 모든 소리가 하나로 합쳐져 "옴"이 된다. 싯다르타는 깨닫는다. 세상은 이분법적으로 나뉘지 않는다. 생과 사, 고통과 기쁨, 사랑과 미움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다. 강물은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지만, 동시에 바다에서 구름으로, 구름에서 비로, 비에서 다시 강으로 돌아온다. 순환은 끝이 없고, 모든 것은 영원하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과거, 현재, 미래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싯다르타가 아버지를 떠난 그날도, 아들이 자신을 떠난 오늘도, 모든 순간이 동시에 존재한다. 고통스러운 기억도 사라지지 않았고, 행복했던 순간도 지나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지금 여기에 있다. 강물처럼 흐르면서도, 강처럼 항상 같은 자리에 있다.
이 깨달음과 함께 싯다르타의 얼굴이 변한다. 아들을 잃은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것은 이제 더 이상 그를 짓누르지 않는다. 고통도 삶의 일부이고, 집착도 사랑의 일부이며, 상실도 존재의 일부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모든 것이 의미를 갖는다. 바주데바는 싯다르타의 변화를 알아본다. 그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한다. 이제 당신도 들었군요. 강이 말하는 것을. 그리고 며칠 후, 바주데바는 싯다르타에게 작별을 고한다. 나는 숲으로 갑니다. 당신이 이제 뱃사공입니다. 늙은 바주데바는 강을 떠나 깊은 숲 속으로 사라지고, 싯다르타는 홀로 남아 사람들을 강 건너편으로 태워준다.
세월이 또 흐른다. 싯다르타는 백발이 되고, 주름이 깊어지지만, 그의 얼굴은 평온하다. 그는 더 이상 무언가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도착해 있다. 매일 아침 해가 뜨는 것을 보고, 강물 소리를 듣고, 배를 젓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승려도, 상인도 모두 그의 배에 탄다. 그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같은 본질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브라만이 모든 존재 안에 있고, 모든 존재가 브라만이다.
어느 날, 한 늙은 승려가 강가에 나타난다. 고빈다다. 그는 여전히 깨달음을 찾아 순례 중이다. 고타마가 입멸한 후, 그는 더욱 열심히 수행했지만, 여전히 완전한 평화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는 강가의 한 뱃사공이 성자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뱃사공이 싯다르타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고, 싯다르타는 완전히 변해 있기 때문이다.
고빈다는 뱃사공에게 묻는다.
"당신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들었습니다. 저에게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싯다르타는 조용히 웃는다.
"나에게는 가르침이 없습니다. 지혜는 전달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의 지혜를 말로 표현하는 순간, 그것은 어리석음이 됩니다."
고빈다는 혼란스러워한다.
"그렇다면 모든 가르침이 무의미하단 말입니까? 고타마의 가르침도요?"
싯다르타는 말한다.
"가르침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깨달음 자체는 가르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언어로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싯다르타는 땅에서 돌멩이 하나를 집어든다.
"이 돌을 봅시다. 언젠가 이것은 흙이 될 것입니다. 흙에서 식물이 자랄 것이고, 식물은 동물이나 인간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돌은 이미 식물이고, 이미 동물이고, 이미 인간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돌을 사랑합니다. 이 돌이 돌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돌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강물을 사랑하고, 나무를 사랑하고, 모든 존재를 사랑합니다. 그것들이 무엇이든, 그것들이 어떻게 되든, 나는 사랑합니다."
고빈다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선과 악은 어떻습니까? 모든 것을 사랑한다면, 악도 사랑해야 합니까?"
싯다르타는 대답한다.
"세상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부처도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은 완전합니다. 모든 죄는 이미 용서를 담고 있고, 모든 아기는 이미 노인을 담고 있습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고통받는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미래를 봅니다. 언젠가 그는 행복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동정이 아니라 사랑을 느낍니다."
고빈다는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그는 평생 명확한 가르침, 확실한 길을 찾아왔다. 그러나 이 뱃사공은 모든 것을 모호하게 만든다. 그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말한다.
"당신의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싯다르타는 부드럽게 말한다.
"그럴 것입니다. 말은 항상 진리의 절반만 담습니다. 지혜를 추구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당신을 숨 막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찾으려 하지 말고, 진리를 경험하십시오. 세상은 마야—환영—가 아닙니다. 당신의 눈앞에 있는 이 나무, 이 강, 이 하늘이 진리입니다."
고빈다는 마지막으로 묻는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싯다르타는 미소 짓는다.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내 얼굴에 입을 맞춰보십시오."
고빈다는 놀란다. 뱃사공의 얼굴에? 그러나 그는 허리를 굽혀 싯다르타의 얼굴에 입을 맞춘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고빈다는 더 이상 친구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 그는 무수한 얼굴들을 본다. 물고기의 얼굴, 물고기를 낳는 잉어의 얼굴, 죽어가는 사람의 얼굴, 태어나는 아기의 얼굴, 살인자의 얼굴, 성자의 얼굴. 모든 얼굴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리고 모든 얼굴이 탄생하고, 고통받고, 늙고, 죽는다. 그러나 그 어떤 얼굴도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변하면서도 영원하다. 그리고 모든 얼굴 위에 또 다른 얼굴이 있다. 고타마의 얼굴이, 그리고 싯다르타의 얼굴이. 그들은 미소 짓고 있다. 완전한 평화와 사랑의 미소.
고빈다는 눈물을 흘린다. 그는 마침내 이해한다. 말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직관적으로 깨닫는다. 모든 것이 하나이고, 하나가 모든 것이다. 생과 사는 다르지 않고, 고통과 기쁨은 분리되지 않으며, 자아와 세상은 둘이 아니다. 그는 늙은 친구 앞에 깊이 절한다. 그리고 조용히 일어나 길을 떠난다. 싯다르타는 그를 배웅하고, 다시 강가로 돌아온다. 배를 저으며, 강물 소리를 들으며, 그는 미소 짓는다. 모든 것이 완전하다.
이것이 헤세가 『싯다르타』를 통해 들려주는 이야기다. 한 인간이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방황하고, 실패하고, 고통받고,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는 여정.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싯다르타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이야기다. 우리는 누구나 답을 찾아 헤맨다. 부모와 스승에게서, 책과 종교에서, 성공과 부에서, 사랑과 관계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진정한 답은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은 말로 전달될 수 없고,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헤세가 이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싯다르타와 같은 여정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건주의적 기독교 환경에서 자랐지만, 그것에 반발하고 신학교를 떠났다. 시인과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끊임없는 내면의 갈등에 시달렸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그는 전쟁에 반대하는 글을 썼고, 독일에서 매국노로 비난받았다. 아내는 정신병을 앓았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으며, 그 자신도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다. 정신분석가 칼 융의 제자 요제프 랑 박사와의 치료를 통해 그는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양 사상, 특히 불교와 힌두교 철학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는 『싯다르타』의 1부를 집필한 후, 1년 반 동안 붓을 멈췄다. 왜냐하면 그는 작품 속 깨달음을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2부를 완성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로서 놀라운 정직함이었다. 그는 단순히 머리로 이해한 것을 쓰고 싶지 않았다. 가슴으로, 온몸으로 체험한 것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스위스 몬타뇰라에 정착하여 정원을 가꾸고, 그림을 그리고, 명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면의 평화를 찾았다. 그때 비로소 그는 2부를 완성할 수 있었다.
『싯다르타』가 출간되었을 때, 독일에서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전쟁에서 패배하고 경제적 위기에 빠진 독일 사람들에게 동양 사상을 다룬 철학적 소설은 너무 먼 이야기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작품의 가치는 점점 더 인정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 사람들은 서양 문명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 나치즘, 홀로코스트를 경험하면서, 그들은 서양의 이성과 과학이 가져온 것이 진보만이 아니라 파괴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새로운 답을 찾기 시작했고, 동양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헤세의 작품들, 특히 『싯다르타』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1946년, 헤세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심사위원단은 그의 "대담하고 침투적인 심리학적 문제 제기와 고전적 인도주의적 이상"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헤세 자신은 명성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는 이미 자신만의 평화를 찾았고, 몬타뇰라의 작은 집에서 조용히 살고 있었다. 1960년대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히피 운동이 일어났다. 젊은이들은 기성 사회의 가치관을 거부하고, 물질주의와 전쟁에 반대하며, 영적 깨달음과 내면의 자유를 추구했다. 그들은 헤세의 작품, 특히 『싯다르타』에서 자신들이 찾던 답을 발견했다. 『싯다르타』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헤세는 젊은 세대의 영적 멘토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헤세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특정 시대나 특정 세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 보편의 진리였다. 『싯다르타』가 지금도 여전히 읽히는 이유는, 현대인들이 여전히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정보에 접근할 수 있고, 수많은 선택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 풍요로움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우리는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지 알지 못한다. 자기계발서를 읽고, 명상 앱을 다운로드하고, 성공한 사람들의 조언을 듣지만, 여전히 공허함을 느낀다.
헤세는 『싯다르타』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답은 밖에 있지 않다. 그것은 당신 안에 있다. 그러나 그것을 찾기 위해서는 당신 자신의 여정을 걸어야 한다. 타인의 길을 흉내 낼 수 없다. 싯다르타는 고타마의 가르침이 완벽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따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타인의 깨달음을 빌려오는 것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만의 강을 찾아야 하고, 그 강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헤세는 또한 실패와 방황의 가치를 말한다. 싯다르타가 세속에서 보낸 20여 년은 낭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시간이 없었다면, 그는 강이 가르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통 없이는 진정한 이해가 없고, 실패 없이는 진정한 성장이 없다. 현대 사회는 효율과 빠른 성공을 강조한다. 최단 시간에 최대의 결과를 얻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헤세는 우회로와 시행착오가 때로는 가장 직접적인 길임을 보여준다. 싯다르타는 40년이 넘는 세월을 방황했지만, 바로 그 방황 덕분에 그는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었다.
작품의 문체도 주목할 만하다. 헤세는 시적이면서도 명료한 언어를 사용한다. 강물의 흐름, 인도의 자연, 싯다르타의 내면 풍경이 모두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러면서도 결코 난해하거나 현학적이지 않다. 이는 헤세가 진정으로 깨달은 것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지혜는 복잡한 말로 포장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마음에 바로 와닿는다. 강의 묘사를 보라. "강물은 흐르고, 흐르고, 항상 흐른다. 그러나 항상 거기에 있고, 항상 같은 강이다." 이 단순한 문장 속에 시간과 영원, 변화와 불변의 역설이 담겨 있다.
『싯다르타』는 불교 소설로 분류되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이다. 헤세는 불교뿐만 아니라 힌두교, 도교, 기독교 신비주의의 요소들을 융합했다. 브라만과 아트만의 개념은 힌두교에서, 사성제와 팔정도는 불교에서, 만물의 합일과 무위자연은 도교에서 가져왔다. 그리고 사랑을 통한 구원이라는 주제는 기독교적이다. 하지만 헤세는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엮어내면서, 동시에 어떤 특정 종교에도 갇히지 않는 보편적 영성을 창조해냈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불교도에게도, 기독교도에게도, 무신론자에게도 의미 있게 읽힌다.
작품의 구조도 주의 깊게 설계되어 있다. 싯다르타의 여정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는 정신적 추구의 단계다. 브라만의 아들에서 사문으로, 그리고 고타마와의 만남까지. 이 단계에서 싯다르타는 지식과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 한다. 두 번째는 세속적 경험의 단계다. 카말라와의 사랑, 카마스와미 밑에서의 상업 활동, 부와 쾌락의 추구. 이 단계에서 싯다르타는 육체와 감각을 통해 삶을 배운다. 세 번째는 통합의 단계다. 강가에서의 삶, 바주데바와의 동행, 아들과의 관계, 그리고 최종적 깨달음. 이 단계에서 싯다르타는 정신과 육체, 수행과 삶, 초월과 세속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구조는 헤겔의 변증법—정(正), 반(反), 합(合)—을 연상시킨다. 싯다르타는 먼저 정신을 추구하고(정), 그 다음 육체를 경험하며(반), 마침내 둘을 통합한다(합). 그러나 헤세의 변증법은 헤겔과 다르다. 헤겔에게 합은 더 높은 단계로의 발전이지만, 헤세에게 합은 모든 것이 이미 완전했다는 깨달음이다. 싯다르타는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그 안에 있었고, 모든 순간에 있었고, 모든 곳에 있었다.
강이라는 상징도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강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유명한 격언—"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것은 변한다. 그러나 동시에 강은 불변의 상징이기도 하다. 물은 끊임없이 흐르지만, 강 자체는 항상 거기에 있다. 이 역설이 바로 싯다르타의 깨달음의 핵심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동시에 영원하다. 모든 순간은 독특하지만, 동시에 모든 순간은 같다. 생과 사는 다르지만, 동시에 하나다.
카말라와 아들의 에피소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카말라는 싯다르타에게 사랑과 감각의 세계를 열어준다. 그녀는 단순한 유혹자가 아니라 스승이다. 그녀를 통해 싯다르타는 육체가 정신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욕망이 반드시 악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배운다. 그리고 아들은 싯다르타에게 집착과 상실을 가르친다.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아들에 대한 집착으로 고통받는다. 이는 중요한 교훈이다. 깨달음은 한 번의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과정이고, 매 순간 새롭게 얻어야 하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아들을 통해 마지막 집착을 놓아버리는 법을 배우고, 그때 비로소 완전한 자유에 이른다.
고빈다의 역할도 흥미롭다. 그는 싯다르타의 대조적 인물이다. 두 사람은 같은 곳에서 출발했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고빈다는 스승을 따랐고, 싯다르타는 자신의 길을 갔다. 고빈다는 안전하고 확실한 길을 선택했고, 싯다르타는 위험하고 불확실한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스승을 따른 고빈다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고, 스승을 떠난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것이 헤세가 전하는 메시지다.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쉽지만, 진정한 자유와 깨달음은 그렇게 얻어지지 않는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 고빈다가 싯다르타의 얼굴에 입을 맞추고 모든 존재의 합일을 보는 장면은 소설 전체의 클라이맥스다. 이 장면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이미지로 보여준다. 고빈다는 평생 말로 된 가르침을 찾았지만, 진정한 깨달음은 말 없이, 직접적 경험을 통해 온다. 그가 보는 환상—모든 얼굴이 하나로 합쳐지는 비전—은 불교의 연기(緣起) 사상, 즉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가르침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얼굴 위에 떠오르는 고타마와 싯다르타의 미소는,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같은 곳에 도착했음을 보여준다.
『싯다르타』는 또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는 보편적 주제를 다룬다. 싯다르타는 자신의 아버지를 떠났고, 그의 아들도 그를 떠난다. 이 순환은 세대를 거쳐 반복된다. 각 세대는 이전 세대의 지혜를 거부하고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한다. 이것은 고통스럽지만 필연적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호하고 싶어하지만, 진정으로 아들을 사랑한다면 그를 놓아주어야 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경험에서 배울 수 없다. 그는 스스로 넘어지고, 스스로 상처받고,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삶의 법칙이다.
헤세 자신도 아버지와의 갈등을 겪었다. 그의 아버지는 경건한 기독교 선교사였고, 헤세가 신학교를 거부하고 작가의 길을 선택했을 때 깊이 실망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랫동안 긴장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헤세는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도 자신의 방식으로 진리를 추구했고, 자신의 아들을 사랑했다는 것을.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가 아들을 보내주는 장면은, 어쩌면 헤세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화해의 메시지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을 떠났지만, 당신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용서합니다.
작품에서 바주데바의 역할은 특별하다. 그는 많은 말을 하지 않지만, 가장 깊은 지혜를 지닌 인물이다. 그는 가르치지 않고 보여준다. 설명하지 않고 함께 있어준다. 그는 싯다르타에게 "강을 들으라"고만 말하고, 나머지는 싯다르타 스스로 발견하도록 놔둔다. 이것이 진정한 스승의 모습이다.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찾도록 돕는다. 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걷는 법을 배우도록 격려한다. 그리고 제자가 준비되었을 때, 조용히 떠난다. 바주데바가 숲으로 사라지는 장면은 선불교의 전통을 떠올리게 한다. 스승은 제자가 깨달음을 얻으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때 스승은 제자를 놓아준다.
헤세가 『싯다르타』에서 사용한 언어는 독일어이지만, 그 리듬과 어조는 동양적이다. 문장들은 반복되고, 변주되고, 다시 돌아온다. 마치 만트라를 외우듯이, 마치 경전을 읽듯이. 이는 의도적인 선택이다. 헤세는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을 통해서도 동양 사상의 본질을 전달하고자 했다. 서양의 문학은 전형적으로 선형적이고 진보적이다. 시작이 있고, 중간이 있고, 끝이 있다. 주인공은 성장하고, 변화하고, 목표에 도달한다. 그러나 『싯다르타』의 구조는 순환적이다. 싯다르타는 출발점으로 돌아온다. 그는 다시 강가에 있고, 다시 뱃사공이 되고, 다시 사람들을 건네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같은 장소, 같은 행위이지만,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순환 구조는 윤회 사상과도 연결된다. 불교에서 윤회는 무한히 반복되는 생사의 고리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으면 이 고리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헤세의 해석은 미묘하게 다르다. 싯다르타는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윤회 자체가 해탈임을 깨닫는다. 생과 사의 순환이 고통이 아니라 완전함이다. 벗어나야 할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는 전통적 불교보다는 대승불교나 선불교의 입장에 가깝다. 열반은 이 세상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에 있다. 번뇌가 곧 보리이고, 생사가 곧 열반이다.
『싯다르타』가 동양에서 특별한 반향을 일으킨 것도 흥미롭다. 서양인이 쓴 동양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 정작 동양에서 더 깊이 이해되고 사랑받았다. 인도에서는 이 작품을 모든 지역 언어로 번역하기 위해 헤르만 헤세 협회가 만들어졌다. 일본에서는 선불교 승려들이 이 책을 연구했다. 한국에서도 여러 번 번역되어 꾸준히 읽혀왔다. 이는 헤세가 단순히 동양 사상을 피상적으로 다룬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는 동양 철학을 공부한 것이 아니라 체득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동양 독자들에게도 진정성 있게 다가왔다.
물론 『싯다르타』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헤세가 불교와 힌두교를 자의적으로 혼합했다고 지적한다. 역사적 싯다르타는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와 베다 전통을 거부하고 불교를 창시했는데, 작품 속 싯다르타는 오히려 브라만으로 돌아가는 듯하다고 말한다. 또한 헤세가 동양 사상을 지나치게 낭만화하고 이상화했다는 비판도 있다. 실제 인도의 현실—빈곤, 카스트 차별, 사회적 불평등—은 작품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헤세의 인도는 역사적 인도가 아니라 상상적 인도, 서양인의 동양에 대한 환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헤세는 인도학자가 아니었고, 엄밀한 종교학적 고증을 목표로 하지도 않았다. 그는 시인이자 소설가로서, 동양 사상을 자신의 예술적 목적을 위해 사용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싯다르타』의 힘이기도 하다. 만약 헤세가 학자적 엄밀함을 추구했다면, 이 작품은 학술서적이 되었을 것이다. 대신 그는 예술가의 직관으로 동양 사상의 핵심을 파악하고, 그것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냈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불교도가 아니어도, 인도를 몰라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 되었다.
또한 헤세는 동양 사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그는 동양과 서양을 종합하려 했다. 싯다르타의 깨달음은 순수하게 동양적이지도, 순수하게 서양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둘의 만남이다. 동양의 명상과 직관, 서양의 개인주의와 자기 탐구가 결합되어 있다. 싯다르타는 고타마처럼 출가하지도 않고, 공동체를 만들지도 않는다. 그는 혼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깨달음을 얻는다. 이것은 매우 서양적이고 근대적인 개인주의의 발로다. 동시에 그는 모든 존재와의 합일을 경험한다. 이것은 동양적인 비이원론의 체험이다. 헤세는 이 둘을 모순 없이 통합해낸다.
『싯다르타』의 또 다른 중요한 주제는 시간에 대한 인식이다. 싯다르타가 강에서 깨닫는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시간의 환상이다. 그는 깨닫는다. 시간은 실재하지 않는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았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지금 여기에 있다. 이것은 현대 물리학의 상대성 이론과도 공명한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이 절대적이지 않고 관찰자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것을 밝혔다. 동양 철학은 수천 년 전부터 시간의 환상을 이야기해왔고, 헤세는 이를 문학적으로 표현했다. 싯다르타가 강물에서 보는 환상—모든 순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비전—은 시간을 초월한 영원의 체험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현대인에게 특히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시간에 쫓긴다.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걱정하며, 현재를 놓친다. 우리는 항상 어딘가로 가고 있고,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말한다. 도착할 곳은 없다. 당신은 이미 거기에 있다. 찾을 것은 없다. 당신은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마음챙김(mindfulness)의 핵심이다. 지금 이 순간에 완전히 깨어 있는 것.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
헤세는 작품 전체를 통해 이원론적 사고를 해체한다. 정신과 육체, 성과 속, 선과 악, 고통과 기쁨, 이 모든 대립은 환상이다. 싯다르타는 처음에는 정신을 추구하고 육체를 억압했다. 그 다음에는 육체를 탐닉하고 정신을 무시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깨닫는다.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몸과 마음은 하나이고, 세속과 신성은 하나이며, 고통과 기쁨도 하나다. 이것은 불교의 중도(中道) 사상이기도 하고, 도교의 음양 사상이기도 하며, 헤겔의 지양(止揚) 개념과도 통한다. 진리는 극단에 있지 않고, 대립을 초월한 곳에 있다.
그러나 이 초월은 무관심이나 냉담과는 다르다. 싯다르타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 그의 깨달음은 차갑고 추상적인 철학적 이해가 아니라, 뜨겁고 구체적인 사랑의 체험이다. 그는 돌멩이 하나를 사랑하고, 강물 한 방울을 사랑하고, 모든 생명을 사랑한다. 이것이 불교의 자비(慈悲)이고, 기독교의 아가페(agape)이며, 모든 종교가 말하는 보편적 사랑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선택적이지 않다. 좋은 사람만 사랑하고 나쁜 사람은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를 차별 없이 사랑한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가 본질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마지막, 고빈다가 보는 환상에서 이것이 가장 강렬하게 표현된다. 그는 모든 얼굴을 동시에 본다. 성자의 얼굴과 범죄자의 얼굴, 아름다운 얼굴과 추한 얼굴, 죽어가는 얼굴과 태어나는 얼굴. 그리고 그 모든 얼굴이 사랑스럽다. 모든 얼굴이 신성하다. 이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다.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 거부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는 것.
헤세 자신의 삶도 이러한 통합의 과정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극단을 오갔다. 금욕과 방종, 고독과 사교, 우울과 황홀 사이를 진자처럼 왔다 갔다 했다.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겪었고, 여러 번의 연애를 했다. 알코올에 의존하기도 했고,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특히 스위스 몬타뇰라에 정착한 후, 그는 점차 내적 평화를 찾아갔다. 그는 정원을 가꾸고, 수채화를 그리고, 산책을 하며 조용한 일상을 살았다. 이것이 그에게는 깨달음이었다. 거창한 신비 체험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찾는 평화. 나무에 물을 주고, 새소리를 듣고,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 바로 『싯다르타』가 말하는 삶이다.
헤세는 1962년에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전에 이미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명성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었다. 그의 무덤은 스위스 티치노의 작은 묘지에 있다. 간소한 묘비에는 그의 이름과 생몰 연대만 새겨져 있다. 그는 화려한 기념비를 원치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작품이었고, 작품을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였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지금도 살아 있다.
『싯다르타』는 출간된 지 100년이 넘었지만, 조금도 낡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현재적이 된다. 21세기의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행복하지 않다. 기술이 발전하고, 물질이 풍요로워졌지만, 정신적 공허함은 더 깊어졌다.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비하고, 무언가를 성취하려 하지만,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이것은 싯다르타가 세속에서 보낸 20년과 닮아 있다. 그도 부를 축적하고, 쾌락을 추구했지만, 영혼은 점점 메말라갔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한다. 더 많이 가져라, 더 높이 올라가라, 더 빨리 달려가라. 그러나 『싯다르타』는 정반대를 말한다. 멈춰라, 들어라, 느껴라. 답은 밖에 있지 않다. 그것은 당신 안에 있다. 당신이 찾아 헤매는 그것은 이미 당신과 함께 있다. 당신은 이미 완전하다. 다만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이것이 『싯다르타』가 우리에게 주는 궁극적 메시지다. 깨달음은 어디 먼 곳에 있지 않다. 특별한 수행법이나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 당신의 일상 속에 있다. 출근길에 보는 나무, 점심시간에 마시는 물 한 잔, 저녁에 듣는 빗소리, 이 모든 것이 진리를 담고 있다. 다만 우리가 너무 바쁘게 살아서, 너무 많은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싯다르타는 40년 넘게 방황한 끝에 강가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깨달았다. 자신이 찾던 것은 항상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그는 한 바퀴 돌아서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 제자리는 이제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는다. T.S. 엘리엇이 "네 개의 사중주"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탐험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탐험의 끝은 우리가 출발한 곳에 도착하는 것이고, 그곳을 처음으로 아는 것이다."
헤세는 『싯다르타』를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길을 떠나라. 방황하라. 실패하라. 고통받으라. 그것이 당신의 길이다. 그러나 동시에 알아라. 당신은 이미 집에 있다는 것을. 당신이 찾는 것은 이미 당신과 함께 있다는 것을. 강물처럼 흘러가라. 그러나 강처럼 항상 같은 자리에 있어라. 변하라. 그러나 본질은 잃지 말라. 살아라. 완전히, 전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그것이 유일한 진리이고, 유일한 깨달음이며, 유일한 자유다.
이것이 헤르만 헤세가 『싯다르타』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다. 한 세기 전에 쓰인 이 작품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읽히고, 사랑받고, 삶의 지침이 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이 작품은 특정 시대나 문화를 넘어서는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진리는 단순하다. 사랑하라. 받아들이라. 지금 여기에 존재하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전부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C%8B%AF%EB%8B%A4%EB%A5%B4%ED%83%80(%EC%86%8C%EC%84%A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