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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인간의 본질을 묻다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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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1915년 독일어 월간지에 발표된 프란츠 카프카의 중편소설 『변신(Die Verwandlung)』은 이처럼 충격적인 문장으로 시작된다. 한 인간이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한다는 이 기괴한 설정은 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많은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지만, 동시에 우리 시대 가장 본질적인 질문들을 던지며 깊은 울림을 준다. 카프카는 왜 이토록 불편하고 불쾌한 이야기를 써야 했을까. 그리고 왜 이 작품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함께 20세기 문학의 대격변을 이끈 작품으로 평가받는 것일까.


카프카가 『변신』을 집필한 1912년은 유럽이 제1차 세계대전의 그림자 속으로 빠져들던 시기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라하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카프카는 독일어를 쓰는 소수자로서 삼중의 소외를 경험했다. 그는 체코인에게는 독일인으로, 독일인에게는 유대인으로, 유대인 공동체에게는 시온주의에 반대하는 이방인으로 취급받았다. 낮에는 노동자 상해보험국에서 성실한 공무원으로 일하며 틈틈이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헌신했지만, 밤이 되면 가족들이 모두 잠든 고요 속에서 펜을 들었다. 이 이중적 삶 속에서 카프카는 급격한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팽창이 인간을 어떻게 물화시키고 소외시키는지를 예리하게 포착했다.


작품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는 그레고르와 가족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는 과정을 치밀하게 추적한다.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외판원이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상사에게 큰 빚을 지게 되었고, 그 빚을 갚기 위해 그는 5년간 쉬지 않고 일했다. 새벽 네시에 일어나 기차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는 고된 노동 속에서도 그는 불평 없이 가족을 위해 헌신했다. 그의 유일한 꿈은 여동생 그레테를 크리스마스 이브에 음악 학교에 보낸다는 계획을 발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그는 자신이 거대한 갑충류로 변해 있음을 발견한다. "장갑차처럼 딱딱한 등", "활 모양의 각질로 나뉜 불룩한 갈색 배", "형편없이 가느다란 여러 개의 다리"를 가진 생물.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레고르의 첫 반응이다. 그는 자신이 벌레로 변했다는 끔찍한 사실에 대해 놀라기보다는, "어떻게 해야 출근할 수 있을까"를 먼저 걱정한다. 이 장면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어떻게 기계의 부품처럼 기능하도록 길들여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카프카가 표현한 '벌레'는 단순한 곤충이 아니다. 원문에서 사용된 'Ungeziefer'라는 단어는 해충을 의미하는 'Geziefer'에 부정적 의미를 강화하는 접두사 'Un-'이 붙은 형태로, 혐오와 배척의 대상을 의미한다. 카프카는 출판사에 보낸 편지에서 "곤충 그 자체를 그리지 말라"고 명시적으로 요청했다. 그가 원한 것은 독자들이 구체적인 곤충의 형상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변신이 의미하는 바를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었다. 초판 표지에는 어두운 방으로 통하는 문 앞에서 얼굴을 가린 채 멀어지는 젊은 남자의 뒷모습만이 그려져 있을 뿐이다. 이는 변신이 단순히 물리적 변화가 아니라 실존적 위기의 은유임을 암시한다.


제1부는 변신의 충격과 가족의 첫 반응을 다룬다. 출근하지 못한 그레고르를 확인하기 위해 직장 지배인이 찾아오고, 그레고르는 필사적으로 방문을 열어 자신이 일할 수 있음을 증명하려 한다. 하지만 문이 열리자 지배인은 경악하며 도망가고, 어머니는 기절하며, 아버지는 신문지와 지팡이로 그레고르를 방 안으로 다시 밀어 넣는다. 이 장면에서 카프카는 그레고르가 여전히 인간의 의식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가족의 말을 완벽히 이해하지만, 가족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이 일방적 소통 불가능성은 현대 사회에서 점점 더 심화되는 단절과 고립을 상징한다.


제2부에서는 그레테가 오빠를 돌보기 시작한다. 그녀는 그레고르가 좋아하는 음식을 찾아내고, 방을 청소하며, 가족 중 유일하게 그와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한다. 그레고르는 벌레의 몸으로 새로운 감각을 발견한다. 천장과 벽을 기어다니는 것이 즐거움을 주고, 방 안의 가구들은 "더듬어 보고 싶은 유리 액자가 있고 실바람이 흘러오는 작은 틈을 가진 창문이 있고 오래된 먼지가 붙어 있는 구석을 잇는 별스런 놀이터"가 된다. 이는 생존과 효율성에만 매몰되었던 과거의 삶에서는 불가능했던 순간들이다. 그러나 그레테와 어머니가 그의 방에서 가구를 치우려 하자, 그레고르는 저항한다. 특히 벽에 걸린 여인의 액자를 지키기 위해 그는 방 밖으로 나오고, 이로 인해 어머니가 기절한다. 분노한 아버지는 사과를 던져 그레고르의 등을 관통시키고, 이 상처는 곪아 들어가며 그의 몸을 서서히 약화시킨다.


제3부는 그레고르의 완전한 소외와 죽음으로 귀결된다. 경제적 위기 속에서 가족은 방 세 개를 세놓고, 그레테는 음악 학교 대신 점원으로 취직한다. 그레고르의 방은 더럽고 무질서해지며, 그레테는 더 이상 방을 청소하지 않는다. 어느 날 저녁, 하숙인들 앞에서 그레테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그레고르는 음악에 이끌려 거실로 나온다. 이 장면은 그가 여전히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인간의 영혼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하숙인들은 그를 보고 충격을 받아 떠나겠다고 선언하고, 그레테는 "우리는 이것을 제거해야 합니다"라고 외친다. 여기서 '이것'이라는 비인격적 표현은 그레고르가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레고르는 자신이 가족에게 짐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방으로 돌아간다. 그날 밤, 그는 "자신의 가족을 애정과 감동으로 생각하며" 조용히 죽는다. 벌레의 몸으로 죽어가면서도 그는 여전히 가족을 사랑했다. 하지만 가족은 그의 시체를 쓰레기처럼 치우고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역설적이게도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한 후 가족들은 오히려 활력을 되찾는다. 그레고르에게 의존하며 수동적으로 살던 아버지는 은행의 수위로 취직하고 제복을 입으며 권위를 되찾는다. 어머니는 바느질로 돈을 벌며, 그레테는 점원이 되어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된다. 독립적으로 변화한 가족은 그레고르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음을 증명한다. 그레고르가 죽은 후 가족은 전차를 타고 교외로 소풍을 떠나며, 봄날의 햇살 아래서 그레테의 아름다운 몸매와 밝은 미래를 이야기한다. 부모는 딸의 결혼을 상상하며 미소 짓고, 모든 것이 밝고 희망적이다. 이 장면은 독자에게 깊은 불편함을 안긴다. 누가 진정 '변신'한 것인가? 벌레가 된 그레고르인가, 아니면 인간성을 잃어버린 가족인가? 카프카는 여기서 두 가지 변신을 대비시킨다. 하나는 사회적 기능을 상실하면서 점차 주체성을 회복하는 그레고르의 변신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에 순응하며 실용적 인간으로 거듭나는 가족의 변신이다. 어느 쪽이 더 인간적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쉽게 답할 수 없다.


이 작품은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로 평가받지만, 정확히 말하면 카프카는 실존주의가 하나의 사조로 정립되기 전의 작가였다. 사르트르와 카뮈가 카프카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실존주의 철학을 발전시킨 것이지, 카프카 자신이 의도적으로 실존주의 작품을 쓴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신』이 실존주의의 핵심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니체가 말한 '마지막 인간'의 모습, 하이데거가 비판한 '일상성'에 매몰된 현존재의 모습이 그레고르의 변신 전 삶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본래적 가능성을 상실한 채 '세인(das Man)'으로 살아왔고, 변신을 통해서야 비로소 실존의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카프카의 비전은 철저히 암울하다. 그레고르는 변신을 통해 주체성을 회복하지만, 그 대가는 가족으로부터의 완전한 소외와 결국 죽음이다. 그는 방 안에 갇혀 점차 먹는 것도 거부하며, 자신의 존재 자체가 가족에게 짐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사라지기로 결심한다. 그의 마지막 순간은 처연하다. "그는 자신의 가족을 애정과 감동으로 생각했다." 벌레의 몸으로 죽어가면서도 그는 여전히 가족을 사랑했다. 하지만 가족은 그의 시체를 쓰레기처럼 치우고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이 대조는 인간의 존엄성과 현대 사회의 냉혹함 사이의 간극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변신』을 읽는 또 다른 방식은 정신질환에 대한 알레고리로 보는 것이다. 실제로 그레고르가 물리적으로 벌레가 된 것이 아니라 심각한 정신적 위기를 겪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작품은 정신질환을 앓는 가족 구성원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를 비판한다. 처음에는 돌보려 하지만 점차 짐스러워하고 결국 포기하는 가족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를 제기한다. 가족들이 괴물이 된 그레고르를 여전히 그레고르로 인식한다는 점은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일반적으로 거대한 벌레를 보고 가족이 변신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천재성은 이처럼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데 있다. 자본주의 비판, 인간 소외, 가족 관계의 붕괴, 실존의 문제,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편견,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 혼란 등 다양한 층위에서 이 작품을 읽을 수 있다. 문학평론가들은 "카프카의 모든 문장이 '나를 해석해보라'고 말하면서도 어떤 문장도 해석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이 난해함이야말로 작품의 힘이다. 명확한 답을 주지 않기에 독자는 스스로 질문하고 성찰할 수밖에 없다.


카프카는 평생 불행했다. 권위적인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심한 콤플렉스에 시달렸고, 여러 차례 약혼했지만 결혼하지 못했으며, 1917년 폐결핵 진단을 받은 후 1924년 41세의 나이로 빈 교외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모든 원고를 불태워달라고 유언했다. 만약 브로트가 이 유언을 따랐다면 우리는 20세기 문학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영원히 잃었을 것이다. 브로트는 친구의 유언을 어기고 『변신』을 비롯해 『소송』, 『성』 등을 출판했고, 이 작품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변신』을 읽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를 썼으며, 밀란 쿤데라는 자신의 작품에서 카프카의 모티프를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변신』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한 울림을 주는 이유는 카프카가 묘사한 현실이 결코 과거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1세기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도 그레고르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출근을 걱정하며 아침을 시작하는가? 경제적 생산성으로만 평가받는 삶 속에서 우리의 본래적 자아는 얼마나 위축되어 있는가? 쓸모없어졌다고 판단되는 순간 버려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은 현대인의 보편적 감정이다. 청년 실업, 조기 퇴직, 노인 빈곤의 문제는 모두 인간을 기능으로만 평가하는 사회 구조에서 비롯된다.


더 나아가 카프카는 가장 친밀해야 할 가족 관계조차 경제적 이해관계로 얽혀 있음을 폭로한다. 그레고르의 가족은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가 제공하는 경제적 안정을 사랑했다. 오늘날 가족이 해체되고 세대 간 갈등이 심화되는 현상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아니면 각자의 역할과 기능만을 기대하고 있는가? 소통의 부재는 『변신』의 핵심 주제 중 하나다. 그레고르는 벌레가 된 후에도 가족의 말을 이해하지만, 가족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이 일방적 소통 불가능성은 현대 사회에서 점점 더 심화되는 단절과 고립을 상징한다.


카프카의 문체는 이 모든 공포와 부조리를 극도로 냉정하고 객관적인 톤으로 서술한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했다는 사실은 마치 일상적인 사건처럼 담담하게 제시된다. 이 건조한 문체는 오히려 내용의 충격을 증폭시킨다. 아무도 "왜"를 묻지 않는다. 변신은 그저 일어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모든 관심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로 향한다. 이는 현대 사회가 근본적 질문을 회피하고 실용적 해결책에만 매달리는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묻지 않고, 어떻게 하면 더 잘 적응할 수 있을지만 고민한다.


그레고르의 변신이 가진 또 다른 의미는 바로 저항의 가능성이다. 비록 의도하지 않은 것이었지만, 그의 변신은 강요된 역할로부터의 탈출이다. 그는 더 이상 출근할 필요가 없고, 가족을 부양할 의무에서 해방되며,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에 순응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그 대가는 고립과 죽음이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진정한 자아와 대면한다. 방 안에서 벽과 천장을 기어다니며 그는 인간으로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자유를 맛본다. 여동생의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그는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을 느낀다. 이는 생존과 효율성에만 매몰되었던 과거의 삶에서는 불가능했던 순간들이다.


카프카는 그러나 낭만적 결말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레고르의 실존적 각성은 사회적 죽음으로 이어질 뿐이다. 이것이 카프카의 비전이 갖는 절망적 현실주의다. 사회의 요구를 거부하는 순간 개인은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 진정한 자아와 사회적 기능 사이에는 화해 불가능한 균열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는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무엇인가? 그레고르처럼 벌레가 되어 소외될 것인가, 아니면 가족처럼 사회에 순응하며 내면의 인간성을 포기할 것인가? 카프카는 이 잔혹한 이자택일의 구조 자체를 폭로한다.


『변신』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한 편의 소설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을 질문하는 행위다. 나는 얼마나 그레고르인가? 나는 무엇으로 평가받기를 원하는가? 내 존재의 가치는 내가 생산하는 것에 의해서만 결정되는가? 나를 둘러싼 관계들은 진정한 이해와 사랑에 기반하고 있는가, 아니면 서로에 대한 기능적 기대일 뿐인가? 이런 질문들 앞에서 우리는 불편해진다. 하지만 카프카가 의도한 것이 바로 이 불편함이다. 그는 "문학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말했다. 『변신』은 정확히 그런 도끼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그레고르의 시체가 치워진 후 가족은 전차를 타고 교외로 나들이를 떠난다. 봄날의 햇살이 따스하고, 그레테는 아름답게 성장했으며, 부모는 딸의 결혼을 상상하며 미소 짓는다. 모든 것이 밝고 희망적이다. 하지만 이 행복은 누군가의 죽음 위에 세워진 것이다. 카프카는 이 장면을 통해 묻는다. 이것이 정말 행복한 결말인가? 사회는 개인을 희생시키고 작동하며, 우리는 그 희생을 너무나 쉽게 망각한다. 그레고르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의 존재는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지워진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소외가 아닐까.


백여 년 전 프라하의 한 보험회사 직원이 밤마다 홀로 써 내려간 이 작품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보편적 인간 조건에 대한 가장 예리한 진단을 담고 있다. 카프카는 특정한 시대나 사회를 비판하지 않았다. 그는 근대성 자체가 내포한 구조적 모순, 자본주의와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비인간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상실되는 개인의 존엄성을 문제 삼았다. 이 문제들은 21세기에도,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기술이 발전하고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개인은 더욱 미세한 부품으로 쪼개지고, 대체 가능한 존재로 전락할 위험이 커진다.


『변신』이 위대한 작품인 이유는 답을 제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올바른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그레고르의 비극은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잠재적으로 마주할 수 있는 실존적 위기다. 우리는 매일 아침 일어나 거울을 본다. 그때 우리는 진정 우리 자신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의 가면을 보고 있는가? 어느 날 문득 그 가면이 벗겨졌을 때, 그 아래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카프카는 이 두려운 질문에서 도망치지 말라고, 정면으로 마주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한다.


결국 『변신』은 인간 존재의 본질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가? 외형인가, 기능인가, 관계인가, 의식인가? 그레고르는 벌레의 몸을 가졌지만 여전히 인간의 의식과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반면 가족들은 인간의 외형을 유지했지만 인간성을 상실했다. 이 역설은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인간다움의 기준을 뒤흔든다. 카프카는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그는 다만 우리 각자가 이 질문과 씨름하기를 바랄 뿐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불편하고, 불쾌하고, 때로는 읽기 힘든 작품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필독서다. 편안한 이야기는 우리를 위로할 수 있지만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카프카의 잔인한 거울은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여준다. 그 거울 앞에 서는 용기를 가진 자만이, 자신의 삶과 사회를 진정으로 성찰할 수 있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우리가 그레고르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깨어 있는 의식, 끊임없는 질문, 그리고 자신의 실존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 말이다. 카프카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깨어 있으라고, 질문하라고, 저항하라고 속삭인다. 그 속삭임이 백 년이 넘도록 메아리치는 이유는, 그것이 여전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B%B3%80%EC%8B%A0(%EC%86%8C%EC%84%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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