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말 일본 열도는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오닌의 난 이후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는 명목상의 것에 불과했고, 각 지방의 다이묘들은 실질적인 독립 세력으로 군림하며 끊임없이 충돌했다. 이 혼란의 시대에 예상치 못한 세력이 권력의 무대에 등장했다. 그들은 무사도 아니었고 귀족도 아니었다. 그들은 염불을 외우는 정토진종의 신도들이었다. 역사는 이들의 봉기를 잇코잇키라 부른다.
잇코잇키라는 명칭은 정토진종이 일향종으로도 불렸고 그 신도들이 잇코슈로 지칭되었던 데서 유래한다. 하지만 이 이름 속에는 단순한 종교 운동 이상의 의미가 숨어 있다. 잇키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뭉친 집단 행동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것은 저항이었고,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으며, 때로는 새로운 질서를 향한 열망이었다. 무사들이 칼로 영토를 차지하던 시대에, 이들은 신앙으로 하나의 국가를 건설했다.
이 운동의 뿌리를 이해하려면 정토진종 자체의 특성을 살펴봐야 한다. 13세기 신란이 창시한 정토진종은 일본 불교사에서 혁명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신란은 아미타불의 자비에 대한 절대적 신뢰만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복잡한 수행도, 엄격한 계율도 필요 없었다. 단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을 진심으로 외우기만 하면 되었다. 이 단순하고 평등주의적인 교리는 엄격한 신분 질서에 억눌린 농민과 하층민들에게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처음으로 자신들도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확신을 얻었다.
하지만 신란의 사후 정토진종은 점차 제도화되고 조직화되었다. 특히 15세기 중반 렌뇨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극적으로 변화했다. 렌뇨는 탁월한 포교가이자 조직가였다. 그는 각지를 순례하며 설법했고, 수많은 편지를 통해 신도들을 결속시켰다. 그의 가르침은 명확했다. 신도들은 아미타불에 대한 신앙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이 공동체는 단순한 종교 집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호 부조의 네트워크였고, 때로는 무장한 자위 조직이었으며, 점차 정치적 실체로 발전했다.
렌뇨가 1471년 오쓰의 혼간지에서 쫓겨난 사건은 역설적으로 정토진종의 확장을 가속화했다. 그는 에치젠을 거쳐 호쿠리쿠 지방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그의 가르침은 폭발적으로 퍼져나갔다. 가가 지역에서 정토진종은 단순한 종교를 넘어 하나의 정치 체제로 성장했다. 1488년 가가의 정토진종 신도들은 슈고 다이묘 토가시 마사치카를 축출하고 사실상 이 지역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일본 역사상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 무사가 아닌 농민과 일반 신도들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자율적 공동체를 수립한 것이다.
가가의 백년 지배는 잇코잇키의 본질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이곳에서 정토진종 사원들은 행정 중심지 역할을 했고, 신도 대표들로 구성된 회의체가 의사 결정을 내렸다. 세금은 사원을 통해 징수되었고, 분쟁은 종교 지도자들이 중재했다. 이것은 종교 공화국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상향이 아니었다. 권력은 여전히 소수의 유력 신도와 승려들에게 집중되었고, 내부 분열과 권력 투쟁도 빈번했다. 그럼에도 이 실험은 전국시대 일본에서 무사 지배의 유일한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정토진종의 세력 확장은 필연적으로 다이묘들과의 충돌을 야기했다. 1563년 미카와에서 발생한 잇코잇키는 이 갈등의 전형을 보여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미카와를 장악하려 하자, 정토진종 신도들은 무장봉기로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이에야스의 많은 가신들이 주군을 배신하고 잇코잇키 편에 섰다. 신앙의 결속이 봉건적 충성보다 강력했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반년에 걸친 격렬한 전투 끝에 겨우 반란을 진압했지만, 이 경험은 그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종교 세력의 정치적 힘을 뼈저리게 실감한 그는 이후 정토진종과 신중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잇코잇키의 진정한 시험은 오다 노부나가와의 대결에서 찾아왔다. 노부나가는 단순히 영토를 확장하려는 다이묘가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질서를 건설하려는 혁명가였고, 그 과정에서 기존의 권위와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천황도, 쇼군도, 불교 세력도 그의 앞에서는 예외가 없었다. 정토진종 혼간지는 그의 천하통일 계획에서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1570년 시작된 이시야마 전투는 단순한 군사 충돌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앙과 세속 권력 사이의, 중세적 질서와 근대적 중앙집권 사이의 이념 전쟁이었다.
이시야마 혼간지는 렌뇨가 1496년 오사카 만을 내려다보는 전략적 요충지에 세운 사원이었다. 이곳은 단순한 종교 시설이 아니라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해상 교통의 요지였기에 물자 보급이 용이했고, 두터운 성벽과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신앙으로 무장한 수만 명의 신도들이 있었다. 11대 법주 겐뇨는 노부나가의 위협에 맞서 전국의 정토진종 신도들에게 호소했다. 순식간에 농민, 무사, 상인들이 이시야마로 모여들었다.
10년에 걸친 공방전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노부나가는 최정예 군대를 동원했고, 최신 화기를 아낌없이 사용했으며, 해상 봉쇄를 통해 혼간지를 고립시키려 했다. 하지만 혼간지는 꺾이지 않았다. 모리 가문과 손잡아 보급로를 확보했고, 철저한 농성으로 버텼다. 신도들은 자신들이 단순히 한 사원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 자체를 지키고 있다고 믿었다. 이 신념이 그들을 천하의 패자 노부나가와 맞서게 한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결국 혼간지에게 불리하게 흘러갔다. 모리 가문과의 동맹이 약해졌고, 내부에서도 화평론이 대두되었다. 겐뇨는 궁지에 몰렸다. 1580년 결국 그는 노부나가와 화의를 맺고 이시야마를 떠났다. 이것은 패배였지만 동시에 타협이었다. 혼간지는 물리적 거점을 잃었지만 교단 자체는 보존했다. 수만 명의 신도들이 목숨을 건졌다. 역사가들은 이것을 현실적 선택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겐뇨의 장남 교뇨는 아버지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계속 저항했고, 이 때문에 부자는 결별했다. 이 균열은 정토진종을 둘로 갈라놓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분열을 교묘하게 이용해 교토에 두 개의 혼간지를 세우도록 했다. 니시혼간지와 히가시혼간지의 분리는 정치권력이 종교를 어떻게 통제하는지 보여주는 냉혹한 사례였다.
잇코잇키의 역사는 단순히 실패한 반란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억압받던 민중이 신앙을 통해 집단적 정체성을 발견하고, 스스로를 조직하여 권력에 도전한 이야기다. 그들은 무사 지배 질서에 균열을 내었고, 일본 역사상 최초로 종교 기반의 자치 공동체를 실현했다. 가가의 백년 지배는 비록 지역적이고 한시적이었지만, 다른 형태의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물론 잇코잇키를 이상화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공동체에도 위계가 있었고, 때로는 폭력적이었으며, 교조적이기도 했다. 그들이 꿈꾼 평등은 제한적이었고, 그들의 통치는 완벽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전국시대라는 극한의 폭력 속에서, 무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던 시대에, 그들은 신앙과 연대만으로 백년을 버텼다. 이것 자체가 경이로운 성취다.
잇코잇키는 또한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종교는 순수하게 영적 영역에만 머물러야 하는가? 신도들이 세속적 억압에 맞서 저항할 때, 그것은 종교의 타락인가 아니면 정당한 자기방어인가? 정토진종의 지도자들은 처음에는 전란을 피하고 평화를 추구했다. 하지만 다이묘들의 탄압이 심해지자 무장을 선택했다. 그들은 신앙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정치권력이 되어야 했다. 이 딜레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결국 잇코잇키는 권력 통합의 거대한 흐름 앞에 굴복했다.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로 이어지는 통일 권력은 어떤 자율적 세력도 용인하지 않았다. 도쿠가와 막부는 사원 통제령을 통해 모든 불교 종파를 국가 감독하에 두었고, 정토진종도 예외가 아니었다.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했던 혼간지는 두 개로 분열되었고, 각각은 막부에 협조하는 순종적인 조직이 되었다. 저항의 역사는 망각되었고, 신도들은 다시 평범한 백성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잇코잇키의 유산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이 보여준 민중의 조직력과 저항 정신은 일본 역사의 중요한 한 장을 이룬다.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일본의 농민 운동과 민중 운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종종 잇코잇키에서 그 원형을 찾는다. 억압받던 사람들이 공동의 이념으로 뭉쳐 강력한 세력에 맞섰던 경험은, 형태를 달리하며 후대에 전승되었다.
오늘날 교토의 니시혼간지와 히가시혼간지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화려한 건축과 장엄한 의식에 감탄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격동의 역사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이 사원들이 한때 권력에 도전했던 거대 조직의 중심이었다는 사실, 수만 명이 신앙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권력의 계산 속에서 분열되고 길들여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잇코잇키의 역사는 우리에게 권력의 본질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권력은 항상 집중을 추구하고 이질적인 것을 배제한다. 자율적 공동체는 중앙집권 국가에게 위협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역사는 민중의 가능성도 보여준다. 평범한 사람들도 올바른 신념과 조직이 있다면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비록 그들이 궁극적으로 패배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도전 자체가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15세기와 16세기의 일본 열도에서, 염불을 외우던 민중들이 칼을 들고 성을 쌓았다. 그들은 신앙으로 국가를 만들었고, 백년을 버텼으며, 천하의 패자들과 맞섰다. 그리고 마침내 패배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역사는 기억하고, 우리는 질문한다. 진정한 신앙이란 무엇인가? 정당한 권력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민중은 어떻게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가? 잇코잇키는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질문을 남길 뿐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C%B9%B4%EC%99%80_%EC%9E%87%EC%BD%94_%EC%9E%87%ED%82%A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