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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포에데라티-제국의 최후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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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이 무너진 것은 야만족의 침입 때문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국은 그들을 적으로 맞서 싸우다 패배한 것이 아니라, 동맹으로 받아들이다가 스스로를 잃어버렸다. 포에데라티(foederati)라 불린 이 동맹 부족들은 로마 역사에서 가장 역설적인 존재였다. 그들은 제국의 군사력을 보존하는 해결책이자 동시에 제국을 해체하는 촉매제였으며, 로마의 실용주의가 낳은 최고의 발명이자 최악의 실수였다.

포에데라티라는 용어는 라틴어 'foedus', 즉 조약이나 동맹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공화정 시대부터 로마는 정복한 민족들과 다양한 형태의 조약을 맺어왔다. 초기의 포에데라티는 이탈리아 반도 내의 동맹 도시들을 가리켰으며, 이들은 로마 시민권을 갖지 못했지만 군사적 의무를 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1세기 사회전쟁 이후 이탈리아 동맹자들이 시민권을 획득하면서, 포에데라티의 의미는 점차 제국 변경의 비로마 부족들, 특히 게르만 부족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변화했다.


3세기 위기는 이 제도의 전환점이었다.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가 동부를 위협하고, 게르만 부족들이 라인강과 도나우강 국경을 압박하면서, 로마는 심각한 병력 부족에 직면했다. 동시에 경제적 위기와 역병, 정치적 혼란이 겹치면서 전통적인 징병 체계는 붕괴 직전이었다. 이 시기 황제들은 실용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270년대에 고트족과 조약을 맺고 그들을 국경 수비대로 활용했으며, 이는 이후 수십 년간 로마의 표준 정책이 되었다.

4세기에 들어서면서 포에데라티 제도는 체계화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게르만 전사들을 대규모로 군대에 편입시켰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을 개별 병사로 흡수한 것이 아니라 부족 단위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지도자 아래서 싸웠고, 로마의 군사 훈련을 받지 않았으며, 로마 시민이 아니었다. 대신 로마는 그들에게 정착지를 제공하거나 금전적 보상을 약속했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효율적인 해결책이었다. 로마는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드는 훈련 없이 즉시 전투가 가능한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게르만 부족들은 안전한 거주지와 로마 제국의 보호를 얻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의 근본적인 문제는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 이후 명확해졌다. 발렌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군이 고트족에게 참패한 이 전투는 단순한 군사적 패배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전투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이후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382년 고트족과 전례 없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서 고트족은 트라키아 지역에 자치적인 집단으로 정착할 권리를 얻었으며, 자신들의 왕과 법을 유지하면서 로마 제국의 포에데라티로서 군사적 의무만 지게 되었다. 이것은 전통적인 로마의 통합 정책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난 것이었다.

이전까지 로마의 힘은 정복한 민족들을 로마화하는 능력에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갈리아인도, 히스파니아인도, 아프리카인도 로마인이 되었다. 그들은 라틴어를 배우고, 로마법을 따르며, 로마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4세기 후반부터 제국 내부에는 영구적으로 비로마적인 집단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들은 제국의 영토에 살면서도 제국의 법과 문화 밖에 있었다. 더욱이 그들은 무장하고 있었고, 자체적인 군사 조직을 유지했다.

5세기 초 서로마 제국의 실권자였던 스틸리코는 자신이 반달족 출신이었음에도,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 포에데라티의 위험성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는 제국의 군대를 재건하려 시도했지만, 이미 제국군의 상당 부분이 게르만 출신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406년 라인강이 얼어붙자 수에비족, 반달족, 알란족이 대거 제국 영토로 밀려들어왔다. 로마는 이들을 막을 군사력이 없었고, 결국 또다시 포에데라티 조약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 서고트족의 왕 아타울프는 411년 갈리아 남부에 정착했고, 반달족은 북아프리카로 이동했다. 각각의 경우 로마는 그들을 동맹으로 인정하고 정착을 허용했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일부 포에데라티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로마 제국의 일부로 여겼다. 서고트족의 아타울프는 처음에는 로마를 대체하려 했지만, 나중에는 로마 제국을 재건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후계자들은 로마 황제의 이름으로 통치했고, 자신들을 제국의 장군으로 간주했다. 이는 포에데라티 제도의 또 다른 역설을 보여준다. 그들은 제국을 파괴하면서도 동시에 제국의 정통성을 필요로 했다.


반면 다른 포에데라티들은 점차 독립적인 왕국을 건설했다. 반달족의 가이세리크는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을 장악하고 실질적으로 독립된 왕국을 세웠다. 그는 형식적으로는 로마의 동맹이었지만, 455년에는 로마를 약탈했다. 이것이 포에데라티 제도의 핵심적 모순이었다. 제국은 군사적 필요에 의해 이들에게 권력을 부여했지만, 그 권력을 통제할 수단이 없었다.

5세기 중반이 되자 서로마 제국은 사실상 포에데라티 왕국들의 느슨한 연합체가 되었다. 황제는 명목상의 권위만을 가졌고, 실제 권력은 게르만 출신 군벌들이 쥐고 있었다. 리키메르, 군도바드, 오도아케르 같은 인물들은 모두 포에데라티 출신이거나 그 후손이었으며, 그들은 황제를 세우고 폐위시키는 권력을 행사했다. 476년 오도아케르가 마지막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켰을 때, 이것은 혁명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어온 과정의 논리적 결말이었다.

흥미롭게도 동로마 제국은 다른 경로를 걸었다. 동로마 역시 포에데라티를 활용했지만, 중앙 정부가 훨씬 강력했고 경제적 자원이 풍부했다. 이들은 포에데라티를 서로 견제하도록 만들고, 필요할 때는 금전으로 회유하며, 위협이 되면 다른 포에데라티를 이용해 제거했다. 제노 황제는 489년 동고트족의 테오도리크를 이탈리아로 보내 오도아케르를 제거하도록 했는데, 이는 포에데라티 정책의 교묘한 활용이었다. 동로마는 골칫거리인 동고트족을 제국 영토에서 내보내면서 동시에 이탈리아의 또 다른 게르만 왕국을 제거한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동로마 제국도 포에데라티 제도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의 재정복 전쟁은 아이러니하게도 게르만 출신 장군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에 의해 수행되었다. 제국은 여전히 비로마 출신 군사력에 의존했고, 7세기 이후 이슬람의 확장에 직면했을 때 제국은 다시 한번 테마 제도라는 형태로 변형된 포에데라티 정책을 채택해야 했다.


포에데라티 제도가 남긴 유산은 복잡하다. 한편으로 이 제도는 로마 제국의 실용주의와 유연성을 보여준다. 로마는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려 했고, 전통적 방법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때 새로운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 포에데라티 제도는 제국이 수십 년, 어떤 의미에서는 수세기를 더 존속할 수 있게 해준 생명줄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제도는 제국의 근본적 성격을 변화시켰다. 로마는 더 이상 동화하는 제국이 아니라 공존하는 제국이 되었고, 결국 그 공존은 분열로 이어졌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포에데라티 제도는 로마 제국이 직면한 해결 불가능한 딜레마를 보여준다. 제국은 거대한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막대한 군사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군사력을 유지할 경제적, 인구학적 기반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3세기의 역병들로 인구가 감소했고, 경제는 정체되었으며, 세수는 줄어들었다. 동시에 외부의 압력은 증가했다. 게르만 부족들은 훈족의 압박으로 서쪽으로 밀려왔고, 페르시아는 계속해서 동부 국경을 위협했다. 이런 상황에서 포에데라티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 선택은 더 큰 문제를 야기했다. 포에데라티에게 토지와 자치권을 부여함으로써 제국은 자신의 세수 기반을 더욱 약화시켰다. 이들이 정착한 지역에서는 제국에 세금이 들어오지 않았고, 징병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제국이 더욱 포에데라티에 의존하게 만드는 악순환을 만들었다. 더욱이 포에데라티는 로마의 통제 밖에 있었다. 그들의 충성은 조약과 보상에 달려 있었지, 제도적 통합이나 문화적 동화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포에데라티 제도를 중세 봉건제의 선구로 본다. 실제로 많은 유사점이 있다. 토지를 대가로 한 군사적 봉사, 개인적 충성 관계, 중앙 권력의 약화와 지역 권력의 강화 등이 그것이다. 서고트족의 스페인 왕국, 프랑크족의 갈리아 왕국, 랑고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왕국은 모두 포에데라티 정착지에서 시작되었고, 이들은 중세 유럽 국가들의 기초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포에데라티 제도는 단순히 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새로운 유럽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로마에서 중세로의 전환으로만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포에데라티 제도는 제국의 약점만이 아니라 강점도 반영했다. 로마의 정치 문화는 놀라울 정도로 포용적이었다. 3세기에 황제가 된 필립푸스는 아랍 출신이었고, 4세기의 황제들 중 상당수가 발칸 지역의 비이탈리아계 출신이었다. 로마는 출신보다 능력과 충성을 중시했고, 이것이 제국을 강하게 만들었다. 포에데라티 정책은 이런 포용성의 극단적 확장이었다. 문제는 이번에는 통합 메커니즘 없이 포용만 했다는 것이다.


현대의 시각에서 포에데라티 제도를 바라보면, 이민과 통합의 문제에 대한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 로마는 새로운 집단을 받아들였지만 그들을 로마화하는 데 실패했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시간 부족이었다. 포에데라티는 대규모로, 단기간에 유입되었고, 제국은 그들을 천천히 동화시킬 여유가 없었다. 또한 제국 자체가 약해져서 동화의 매력이 감소했다. 4세기의 게르만 전사에게 로마 시민이 되는 것은 2세기만큼 매력적이지 않았다. 제국은 더 이상 번영과 안정의 보증이 아니었고, 오히려 포에데라티로서의 자치가 더 유리해 보였다.

포에데라티 제도의 실패는 또한 군사화의 위험을 보여준다. 제국이 점점 더 군사적 필요에 의해 주도되면서, 다른 모든 고려사항이 부차적이 되었다. 경제적 지속가능성, 사회적 통합, 문화적 동질성보다 당장의 군사적 효율성이 우선시되었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효과적이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제국의 기반 자체를 침식했다. 5세기 서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군대는 더 이상 로마의 것이 아니었다.

결국 포에데라티 제도는 로마 제국의 본질적 변화를 상징한다. 제국은 더 이상 정복하고 동화하는 팽창적 힘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타협하는 방어적 존재가 되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과정이었을지 모른다. 어떤 제국도 영원히 팽창할 수 없고, 어떤 체제도 무한정 지속될 수 없다. 로마는 500년 넘게 지중해 세계를 지배했고, 그 유산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포에데라티는 그 장대한 역사의 마지막 장이었고, 종말이자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었다.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제국의 쇠퇴와 몰락을 야만족의 침입과 기독교의 영향으로 설명했지만, 포에데라티의 역사는 더 복잡한 진실을 보여준다. 로마는 외부의 침입으로 멸망한 것이 아니라, 그 침입자들을 내부로 받아들이다가 스스로를 잃어버렸다. 이것은 패배가 아니라 변형이었고, 파괴가 아니라 진화였다. 포에데라티의 후손들은 자신들을 로마의 계승자로 여겼고, 중세 유럽의 왕들은 로마 황제의 권위를 계속해서 주장했다. 신성로마제국이 1806년까지 존속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포에데라티 제도가 만들어낸 로마적 정체성의 지속성을 보여준다.

포에데라티의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제국의 한계에 관한 이야기다. 로마는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제국 중 하나였지만, 결국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를 통제할 수 없었다. 제국은 너무 커졌고, 너무 복잡해졌으며, 너무 많은 적을 만들었다. 포에데라티는 이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실용적 대응이었지만, 그 대응 자체가 제국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제국을 구하려던 정책이 제국을 변형시켰고, 그 변형은 곧 제국의 종말이자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었다.


(이미지 출처 https://www.fmkorea.com/6471023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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