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세기 켈트 세계는 하나의 통일된 제국이 아니라 수많은 부족과 전사 집단이 뒤얽힌 복잡한 모자이크였다. 이 시대의 갈리아는 혈연보다 전투력으로, 영토보다 약탈로 결속된 전사 공동체들의 세계였다. 그 중에서도 가에사타이는 켈트 전사 문화의 가장 극단적이고 순수한 형태를 대표하는 존재였다. 그들은 부족도, 영토도, 왕국도 없었다. 그들에게 있었던 것은 오직 창과 금, 그리고 전장에서의 명예였다.
가에사타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들의 정체성을 압축한다. 고대 갈리아어 'gaisos'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창' 또는 '투창'을 의미하며, 가에사타이는 문자 그대로 '창을 든 자들'이었다. 이 명칭은 단순한 무기의 표기를 넘어서 하나의 생활 방식을 암시한다. 그들은 알프스 산맥과 론 강 유역의 척박한 땅에서 기원했으며, 농경이나 정착 생활보다 전쟁을 통한 생존을 선택했다. 폴리비우스는 가에사타이를 '용병'으로 번역했지만, 현대 언어학자들은 이 해석을 거부한다. 그들은 단순히 돈을 받고 싸우는 전문 군인이 아니었다. 가에사타이는 전쟁 자체가 삶의 목적인 전사 집단이었으며, 전투를 통해서만 자신들의 존재 의미를 증명할 수 있었다.
이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225년, 로마 공화정이 북부 이탈리아의 갈리아 영토를 침범하면서였다. 로마는 켈트족의 땅이었던 피케눔을 식민지화했고, 이에 격분한 키살피나 갈리아의 보이이족과 인수브레스족은 알프스 너머의 가에사타이에게 거액의 금을 지불하고 지원을 요청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가에사타이의 지도자들이 '왕'으로 불렸다는 점이다. 콘콜리타누스와 아네로에스테스는 그리스어로 '바실레우스'로 기록되었지만, 이는 영토를 가진 군주가 아니라 전사 집단의 전쟁 지도자를 의미했다. 그들의 권위는 혈통이나 땅에서 나오지 않았다. 오직 전투에서의 용맹과 약탈의 성공만이 그들의 지위를 보장했다.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약 3만 명의 가에사타이가 알프스를 넘어 포 강 평원으로 내려왔다. 이들은 타우리스키족과 합류하여 거대한 켈트 연합군을 형성했다. 초기 전투에서 이 연합군은 로마군을 격파했고, 로마로 가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전략적 판단 아래 그들은 약탈품을 챙겨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가에사타이의 본질적인 동기를 보여준다. 그들은 정복자가 아니라 약탈자였다. 영토 확장이나 제국 건설이 아니라, 전쟁을 통한 부의 획득이 그들의 목표였다.
그러나 로마는 그들을 그냥 보내주지 않았다. 집정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가 추격을 시작했고, 다른 집정관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가 에트루리아의 텔라몬에서 퇴로를 차단했다. 켈트 연합군은 전후방에서 로마군에 협공당하는 최악의 상황에 놓였다. 이때 가에사타이가 보여준 전투 방식은 고대 세계에서도 독특한 것이었다. 폴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보이이족과 인수브레스족이 바지와 가벼운 망토를 입고 싸운 반면, 가에사타이는 완전히 나체로 전선의 최전방에 섰다.
이 전술적 나체는 단순한 야만성의 표현이 아니었다. 폴리비우스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가시덤불에 옷이 걸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자신들의 신체적 자신감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설명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켈트 전사 문화에서 나체 전투는 신성한 의례이자 심리전의 도구였다. 디오도루스 시쿨루스는 일부 갈리아인들이 "자연의 보호"를 믿고 나체로 싸웠다고 기록한다. 이는 전사들이 초자연적 보호를 받는다는 믿음, 혹은 죽음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을 상징했다. 나체의 전사는 자신에게 숨길 것이 없음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그리고 전투에서의 순수한 용맹만을 믿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폴리비우스는 가에사타이의 모습이 로마 군단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기록한다. 그들은 모두 전성기의 건장한 남성들이었고, 금 목걸이와 팔찌로 화려하게 치장했다. 이 장식품들은 단순한 허영이 아니었다. 켈트 사회에서 금은 전사의 명예와 업적을 상징했으며, 전투에서 획득한 전리품이자 사회적 지위의 표식이었다. 나체로 싸우되 금으로 치장한다는 것은 역설적이면서도 완벽하게 논리적이었다. 그들은 물질적 보호를 거부하면서도 상징적 권위는 극대화했다. 이는 전쟁이 단순히 생존의 수단이 아니라 명예와 정체성의 문제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상징과 용맹만으로는 로마 군단을 이길 수 없었다. 가에사타이의 작은 방패는 로마의 필룸(투창)에 대한 방어력이 거의 없었다. 나체는 심리적 충격을 주었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했다. 로마 군단병들은 초기의 당혹감에서 벗어나자 오히려 금으로 치장한 적들을 쓰러뜨릴 생각에 더욱 전투 의욕이 고조되었다. 전투는 켈트 연합군의 대패로 끝났다. 폴리비우스는 4만 명의 갈리아인이 전사하고 1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고 기록한다. 콘콜리타누스는 생포되었고, 아네로에스테스는 소수의 추종자들과 탈출했지만 결국 자살했다.
텔라몬 전투의 패배는 가에사타이에게 결정적이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기원전 222년, 가에사타이는 다시 용병으로 고용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1만 명의 가에사타이가 클라스티디움 전투에 참여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도 로마 기병대에게 패배했다. 이후 가에사타이는 역사 기록에서 사라진다. 그들의 갑작스러운 소멸은 여러 해석을 낳는다. 일부 학자들은 가에사타이가 알로브로게스족의 전신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알로브로게스는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켈트 부족으로, 기원전 218년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을 때 같은 지역에서 등장한다. 만약 이 가설이 맞다면, 가에사타이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용병 전사 집단에서 정착 부족으로 전환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 다른 해석은 가에사타이를 중세 아일랜드의 피아나와 비교한다. 제임스 맥킬럽은 피아나가 어떤 왕국에도 속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활동한 무장 청년 집단이었다는 점에서 가에사타이와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이는 가에사타이가 단순히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켈트 문화에서 반복되는 구조적 현상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켈트 사회는 토지와 정착을 기반으로 한 부족 체제와 함께, 전쟁과 약탈을 생업으로 하는 유동적 전사 집단을 동시에 포함했다. 가에사타이는 후자의 극단적 형태였으며, 경제적 압박이나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출현하는 사회적 현상이었을 수 있다.
가에사타이의 역사적 의미는 그들의 군사적 성패를 넘어선다. 그들은 켈트 전사 문화의 본질적 특성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첫째, 전쟁의 경제화다. 가에사타이는 전쟁을 생계 수단으로 삼았으며, 부족 간 갈등을 이용해 자신들의 군사적 서비스를 판매했다. 이는 켈트 사회가 단순한 부족 연맹이 아니라 복잡한 경제적, 정치적 네트워크였음을 보여준다.
둘째, 명예의 물질화다. 금 장식품으로 치장한 나체 전사는 전쟁이 생존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정체성과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의례적 행위였음을 상징한다.
셋째, 유동적 정체성이다. 가에사타이는 고정된 영토나 혈연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으며, 전투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들의 집단 정체성을 재구성했다.
로마의 관점에서 가에사타이는 야만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적이었다. 그러나 켈트의 관점에서 그들은 전사의 이상을 구현한 존재였다. 그들은 토지에 묶이지 않은 자유, 전투를 통한 명예 획득, 그리고 약탈을 통한 부의 축적이라는 켈트 전사 계급의 핵심 가치들을 순수하게 추구했다. 나체로 싸운다는 선택은 이러한 가치관의 극단적 표현이었다. 그들은 물질적 보호를 거부함으로써 정신적, 상징적 힘을 극대화하려 했다. 이는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전쟁이 단순히 영토나 자원을 둘러싼 경쟁이 아니라 집단의 정체성과 명예를 증명하는 의례였던 시대에는 완벽하게 논리적인 선택이었다.
텔라몬에서의 패배는 가에사타이 개인들에게는 비극이었지만, 켈트 세계 전체에게는 더 큰 전환점이었다. 이 전투는 로마가 북부 이탈리아를 장악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켈트 부족들의 독립성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가에사타이의 소멸은 단순히 한 전사 집단의 패배가 아니라, 유목적이고 약탈 중심적인 켈트 전사 문화가 정착 제국의 조직적 군사력 앞에서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음을 의미했다. 로마 군단의 규율, 장비, 전술은 개인의 용맹과 상징적 위력만으로는 대항할 수 없는 체계였다.
그러나 가에사타이의 유산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이 보여준 극단적 용맹과 전투에 대한 순수한 헌신은 켈트 신화와 전설 속에 계속 살아남았다. 중세 아일랜드의 피아나 전설, 쿠 훌린의 영웅담, 그리고 수많은 켈트 전사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가에사타이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나체로 싸우고, 금으로 치장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사의 이미지는 켈트 문화의 집단 기억 속에 각인되었다. 이는 역사적 사실을 넘어 하나의 원형이 되었다.
가에사타이를 이해하는 것은 켈트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다. 그들은 예외적 존재가 아니라 켈트 사회의 구조적 특성이 극단화된 형태였다. 켈트 세계는 결코 통일된 국가나 제국을 형성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약점이 아니라 하나의 선택이었다. 켈트인들은 중앙집권적 권력보다 전사 집단의 자율성을, 영토 확장보다 약탈과 명예를, 정착보다 유동성을 선호했다. 가에사타이는 이러한 선택의 가장 순수하고 극단적인 표현이었다. 그들은 알프스의 척박한 땅에서 나와 로마 제국이라는 역사의 거대한 흐름과 충돌했고, 패배했다. 그러나 그 충돌의 순간, 금으로 치장하고 나체로 서서 로마 군단을 마주한 그 순간에, 그들은 켈트 전사 문화가 추구했던 모든 것을 완벽하게 구현했다.
(이미지 출처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humankind&no=128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