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릿다 전쟁-이슬람 내전

by 레옹
WHsbpPgRI76SbyBzCgUPD7ok7260ePzrYxYyLpARJZVJ2T5o7LI4TaCBa74QXirSpRJ9xA6c-qpB_Z4aF9deJgNgSevWhkIIDSPgRDM6fpiwGhUXyA7Li1mbg7QBwPn_FOS_suAeI1z_DRepRgD90A.jpeg

632년 6월 8일,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의 죽음은 새로 형성된 이슬람 공동체에 전례 없는 위기를 가져왔다. 그의 시신이 아직 메디나의 모스크에 안치되기도 전에, 아라비아 반도 전역에서 부족들이 메디나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카트(종교세) 납부를 거부했고, 일부는 이슬람 자체를 포기했으며, 몇몇은 무함마드에 대항하는 자신들만의 예언자를 옹립했다. 아부 바크르가 초대 칼리프로 선출되었을 때, 그가 직면한 것은 단순한 정치적 반란이 아니라 이슬람 국가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실존적 위기였다. 이것이 바로 릿다 전쟁(배교의 전쟁)의 시작이었다.


무함마드의 죽음이 가져온 혼란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생전에 무함마드는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을 이슬람의 깃발 아래 통합했지만, 많은 부족들에게 이것은 개인적 충성의 문제였다. 이들의 시각에서 볼 때, 무함마드와 맺은 계약은 그의 죽음과 함께 종료되었다. 이는 아랍 부족사회의 오랜 전통이었다. 족장이 죽으면 동맹도 끝나는 것이었다. 따라서 많은 부족들은 자신들이 "배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종료된 협정을 갱신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부 바크르와 메디나의 무슬림들에게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도전이었다. 이슬람은 단순히 한 사람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알라에 대한 복종이었고, 이는 무함마드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초기 국면에서 상황은 메디나에 극도로 불리했다. 무함마드가 죽기 직전 명령했던 우사마 이븐 자이드의 비잔티움 원정군은 여전히 메디나에 주둔하고 있었다. 많은 지도자들이 반란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이 군대를 시리아로 보내는 것에 반대했다. 우마르를 포함한 주요 동료들은 아부 바크르에게 원정을 취소하고 군대를 메디나 방어에 투입할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아부 바크르는 단호했다. "설령 들짐승이 나를 끌어가더라도, 나는 무함마드가 보낸 군대를 철회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전략적 판단이었다. 약함을 보이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었다. 아부 바크르는 메디나가 무함마드의 명령을 계속 실행할 만큼 강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우사마의 군대는 출발했고, 아부 바크르는 메디나의 방어를 위해 소수의 병력만을 남겼다. 이 대담한 결정은 곧 정당화되었다. 우사마의 원정은 북부 아라비아의 여러 부족들을 다시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고, 40일 만에 전리품과 포로들을 이끌고 개선했다. 이것은 메디나가 여전히 강력하다는 명확한 신호였다. 하지만 진짜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632년 8월, 반란 세력이 메디나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가타판 부족의 히발이 이끄는 군대가 메디나에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두 키사에 집결했다. 아부 바크르는 즉각 대응했다. 그는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탈하 이븐 우바이둘라, 주바이르 이븐 알아왐 같은 베테랑 동료들을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하라스 와 슈르타(정예 근위대)를 조직했다. 이들은 밤에 낙타를 타고 메디나 주변 산악 요새로 이동하여 적의 공격을 차단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우사마의 원정으로 모든 훈련된 말과 낙타가 북부로 보내졌기 때문에, 메디나에 남은 이들은 훈련되지 않은 짐용 낙타로 싸워야 했다.

첫 번째 충돌에서 이것은 재앙을 불렀다. 히발이 언덕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하자, 훈련되지 않은 낙타들이 패닉에 빠져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다. 무슬림 군대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반란군은 며칠 전 잃었던 거점을 다시 탈환했다. 하지만 아부 바크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 날, 그는 안-누만 이븐 무까린의 병력과 합류하여 두 키사 전투를 재개했다. 이번에는 충분한 준비를 했다. 아부 바크르가 중앙을 지휘하고, 안-누만이 우익, 압둘라 이븐 무까린이 좌익, 수와이드 이븐 무까린이 후방을 맡았다. 기습 공격이 성공했고, 우카샤 이븐 알미산이 전투 중 히발을 처치했다. 반란군은 패주했고, 메디나는 구원되었다.

하지만 두 키사는 시작에 불과했다. 패배한 반란군은 아브라크로 후퇴했고, 그곳에서 더 많은 가타판, 하와진, 타이이 부족들이 합류했다. 그들은 다시 부자카로 이동했고, 거기서 가장 위험한 적 중 하나인 툴라이하 이븐 후와일리드와 합류했다. 툴라이하는 바누 아사드 부족의 족장으로, 자신이 예언자라고 주장했다. 그는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많은 부족들이 그를 무함마드의 적법한 계승자로 여겼다. 아부 바크르는 이제 전면전에 대비해야 했다.

아부 바크르의 군사 전략은 치밀했다. 그는 사용 가능한 병력을 11개 군단으로 나누었고, 각 군단에 특정 임무를 부여했다. 가장 강력한 군단은 칼리드 이븐 알왈리드에게 맡겨졌다. 칼리드는 이미 무함마드 시절부터 뛰어난 전술가로 알려져 있었고, 아부 바크르는 그에게 가장 위험한 적들을 상대하는 임무를 주었다. 다른 지휘관들(이크리마, 암르 이븐 알아스, 슈라흐빌, 알알라 알하드라미, 후다이파, 아르파자, 무하지르)은 바레인, 오만, 마흐라, 하드라마우트, 예멘 등 부차적이지만 여전히 중요한 지역에 배치되었다. 이것은 동시다발적 작전이었다. 아부 바크르는 적들이 서로 지원할 수 없도록 그들을 동시에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칼리드의 캠페인은 릿다 전쟁의 전환점이었다. 부자카로 진군하기 전에, 아부 바크르는 툴라이하의 동맹을 약화시키기 위한 외교 작전을 펼쳤다. 타이이 부족은 툴라이하에 대한 지지가 확고하지 않았고, 그들의 족장 아디 이븐 하팀은 독실한 무슬림이었다. 아부 바크르는 아디를 부족 장로들과 협상하도록 보냈고, 협상은 성공했다. 타이이 부족은 툴라이하의 군대에서 철수했고, 500명의 기병을 칼리드의 군대에 합류시켰다. 같은 방식으로, 자딜라 부족도 아디의 설득으로 항복했고, 1,000명의 전사를 칼리드에게 보냈다. 이제 훨씬 강해진 칼리드는 부자카로 진군했다.

632년 9월 중순, 부자카 전투가 벌어졌다. 칼리드는 툴라이하의 군대를 완파했다. 툴라이하 자신은 전장에서 도주했고, 그의 동맹인 우야이나 이븐 히슨도 패주했다. 칼리드는 즉시 추격을 명령했고, 우야이나를 감라까지, 약 100킬로미터를 추적했다. 여러 차례 교전 끝에, 우야이나는 포로로 잡혔다. 전승에 따르면, 칼리드는 직접 우야이나의 경호원들과 싸웠다고 한다. 툴라이하의 잔존 세력은 감라에서 재집결을 시도했지만, 9월 셋째 주에 감라 전투에서 다시 패배했다. 툴라이하의 반란은 사실상 끝났다. (흥미롭게도, 툴라이하는 나중에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용서받았고, 이후 이슬람 정복 전쟁에서 용맹한 전사가 되었다.)

부자카에서의 승리 후, 칼리드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나끄라에서 바누 술라임 부족을 격파했고, 10월 셋째 주에는 자파르 전투에서 여성 족장 살마를 물리쳤다. 그러나 가장 논란이 많은 사건은 말리크 이븐 누와이라의 처형이었다. 말리크은 바누 타밈 부족의 족장으로, 용맹한 전사이자 유명한 시인이었다. 무함마드 생전에 그는 부족의 세금 징수관으로 임명되었다. 무함마드가 죽자, 말리크은 징수한 세금을 부족민들에게 돌려주며 "이제 너희 재산은 너희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입장에서, 족장이 죽으면 충성도 끝나는 것이었다.

칼리드가 나지드에 도착했을 때, 말리크은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 부하들을 흩어지게 했다. 하지만 칼리드의 기병대 지휘관 디라르 이븐 알아즈와르가 말리크의 가족을 체포했다. 이들이 아잔(기도 소집)에 응답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말리크은 결국 붙잡혔고, 칼리드 앞으로 끌려갔다. 심문 중에 말리크은 무함마드를 "당신의 주인"이라고 지칭했고, 이것이 칼리드를 격노시켰다. 칼리드는 말리크을 반란자이자 배교자로 선언하고 즉결 처형을 명령했다. 이 결정은 극도로 논란이 많았다. 많은 동료들은 말리크이 진정으로 배교했는지, 아니면 단지 자카트 납부를 거부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나중에 우마르는 칼리드가 월권을 저질렀다고 주장했지만, 아부 바크르는 칼리드를 옹호했다. 칼리프에게 이것은 명확한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이슬람 국가에 대한 불복종은 용납되지 않는다.


릿다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는 야마마 전투였다. 무사일리마는 바누 하니파 부족의 지도자로, 자신을 예언자라고 주장하며 야마마의 비옥한 지역을 장악했다. 그의 군대는 전승에 따르면 4만 명에 달했다고 하며, 이것은 무슬림이 직면한 가장 강력한 반란 세력이었다. 아부 바크르는 처음에 이크리마 이븐 아비 자흘을 보냈지만, 명시적으로 칼리드가 도착할 때까지 교전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크리마는 명령을 무시하고 632년 9월 초에 공격을 감행했다. 결과는 참패였다. 분노한 아부 바크르는 이크리마를 오만으로 재배치했다.

두 번째로 보내진 슈라흐빌도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그 역시 칼리드를 기다리지 않고 무사일리마를 공격했고, 다시 패배했다. 아부 바크르는 이제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는 칼리드에게 즉시 야마마로 향하라고 명령했고, 슈라흐빌의 잔존 병력을 칼리드와 합류시켰다. 추가로, 아부 바크르는 메디나에서 새로운 안사르와 무하지룬 군대를 소집하여 칼리드에게 보냈다. 12월 초, 칼리드의 군대는 부타에서 이 증원군과 합류했고, 총 병력은 1만 3천 명에 달했다.

632년 12월 셋째 주, 야마마 전투가 벌어졌다. 이것은 릿다 전쟁 중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였다. 무사일리마의 군대는 숫적으로 우세했고, 잘 조직되어 있었다. 전투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고, 한때 무슬림 군대는 후퇴 직전까지 몰렸다. 전투의 전환점은 "정원의 전투"라고 불리는 국면이었다. 무사일리마의 군대가 요새화된 정원으로 후퇴했을 때, 무슬림 군대는 벽을 넘어 안으로 침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자이드 이븐 알하탑(우마르의 형제)과 다른 용감한 전사들이 벽을 넘어 문을 열었다. 치열한 백병전 끝에, 무사일리마는 전사했다. 그를 누가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대부분의 자료는 와흐시 이븐 하르브(이전에 무함마드의 삼촌 함자를 죽인 사람으로, 나중에 개종했다)가 창을 던져 무사일리마를 죽였고, 안사르 전사 아부 두자나가 마무리를 했다고 전한다.

야마마 전투의 승리는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무슬림 측에서 약 1,200명이 전사했고, 그 중에는 꾸란을 암송할 수 있는 70명 이상의 "꾸란 암송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막대한 손실은 나중에 우마르가 꾸란을 문서로 편찬할 것을 제안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전략적으로, 이것은 결정적인 승리였다. 중앙 아라비아의 가장 강력한 반란이 분쇄되었고, 야마마의 요새 도시는 평화롭게 항복했다. 칼리드는 야마마에 본부를 설치하고, 아끄라바 평원 전역에 병력을 파견하여 지역을 완전히 평정했다.


릿다 전쟁의 다른 전선들도 체계적으로 진압되었다. 오만에서는 후다이파 이븐 미산이 아즈드 부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들의 지도자 라끼트 이븐 말리크(통칭 "두 알타지", 왕관을 쓴 자)는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 역시 예언자임을 주장했다. 후다이파는 칼리프에게 증원을 요청했고, 아부 바크르는 이크리마를 야마마에서 오만으로 보냈다. 632년 11월, 두 군대는 딥바에서 두 알타지의 요새를 공격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두 알타지는 전사했고, 오만은 다시 무슬림 통제하에 들어갔다. 후다이파는 오만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이크리마는 주변 지역을 평정했다.

바레인에서는 알라 이븐 알하드라미가 반란군을 상대했다. 야마마 전투 후 아부 바크르가 보낸 그는 바레인에 도착하여 반란군이 하지르에 집결한 것을 발견했다. 알라는 야간 기습 공격으로 도시를 점령했다. 반란군은 해안 지역으로 후퇴했지만, 거기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대부분이 항복하고 이슬람으로 돌아왔다. 이 작전은 633년 1월 말에 완료되었다.

예멘의 상황은 더 복잡했다. 예멘은 릿다 전쟁 중 여러 차례 반란을 겪었다. 첫 번째 반란은 632년 3월, 무함마드가 죽기 전에도 일어났다. 안스 부족의 족장이자 자칭 예언자 알아스와드 알안시가 봉기를 일으켜 산아를 점령했다. 그는 사산 조 페르시아계 총독 바드한의 아들 샤흐르를 죽였다. 무함마드의 명령으로 파이루즈 알다일라미(역시 페르시아계 무슬림)가 알아스와드를 암살했고, 파이루즈는 산아의 총독이 되었다. 하지만 무함마드의 죽음 후, 예멘의 두 족장 암르 이븐 마디 야크립과 그의 조카 카이스 이븐 막슈흐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알아스와드 진압을 도왔던 이들은, 칼리프가 임명한 새 행정관에 불만을 품고 세 명의 칼리프 대리인을 암살했다.

무하지르 이븐 아비 우마이야가 알아브나(페르시아계 주민들)를 이끌고 카이스에 맞섰고, 이크리마가 마흐라에서 도착하여 암르와 카이스의 군대를 격파했다. 파이루즈 알다일라미가 두 지도자를 포로로 잡았고, 그들은 무하지르의 호위 아래 메디나로 보내졌다. 아부 바크르 앞에서 암르는 이슬람으로 돌아올 것을 약속했고, 칼리프는 그를 용서했다. 놀랍게도, 암르는 나중에 이슬람 정복 전쟁에서 용맹한 전사가 되었다.


릿다 전쟁의 마지막 큰 반란은 킨다 부족의 것이었다. 그들은 나즈란, 하드라마우트, 동부 예멘 지역에 거주했으며, 633년 1월까지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하드라마우트의 무슬림 총독 지야드 이븐 루바이드가 그들을 공격했지만, 킨다의 지도자 알아샤스 이븐 카이스가 이끄는 반란군은 너무 강력했다. 양측의 세력이 균형을 이뤄, 어느 쪽도 선제공격을 감히 하지 못했다. 지야드는 증원을 기다렸다.

처음에는 알아샤스가 주르칸 계곡에서 더 큰 무슬림 군대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군대에는 킨다의 대규모 사쿤 지파 출신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크리마 이븐 아비 자흘이 이끄는 추가 무슬림 군대가 도착하자, 알아샤스는 부하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이끌고 알누자이르 요새로 후퇴했다. 무하지르 이븐 아비 우마이야가 예멘에서의 작전을 마치고 도착했고, 이크리마도 합류했다. 세 무슬림 군단이 알누자이르를 포위했다. 633년 2월 중순, 요새는 함락되었다. 알아샤스는 일부 친족들의 안전한 통행을 협상했지만, 나머지 포위된 전사들은 처형되었다. 알아샤스 자신은 포로로 잡혀 메디나로 보내졌다.

흥미롭게도, 알아샤스의 운명은 다른 반란 지도자들과 달랐다. 아부 바크르는 그가 회개한 후 석방했고, 알아샤스는 메디나에 거주하게 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부 바크르가 그를 자신의 여동생 움 파르와와 결혼시킨 것이다. 이것은 매우 드문 영예였고, 다른 어떤 릿다 전쟁 지도자도 이런 대우를 받지 못했다. 알아샤스는 나중에 이슬람 정복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의 아들 무함마드 이븐 알아샤스는 이슬람 역사에서 주요 인물이 되었다.

633년 6월, 아라비아 반도의 마지막 반란 거점이 무너졌다. 11년 동안(이슬람력으로) 지속된 캠페인이 끝났다. 아부 바크르는 아라비아 반도 전체를 중앙 권위 아래 통합했다. 이것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 이상이었다. 릿다 전쟁은 이슬람이 한 사람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부족 연합이 아니라, 살아남고 확장할 수 있는 제도화된 국가임을 증명했다. 무함마드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던 것이다.


릿다 전쟁의 영향은 지대했다. 군사적으로, 이 전쟁은 칼리드 이븐 알왈리드를 이슬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 중 한 명으로 확립시켰다. 그의 전술적 천재성, 특히 기동전과 기습 공격의 활용은 전설이 되었다. 그는 나중에 "알라의 검"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이슬람의 정복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릿다 전쟁에서 단련된 군대와 지휘관들은 이후 10년 동안 중동 전역을 정복하는 기반이 되었다.

정치적으로, 릿다 전쟁은 칼리프 제도의 권위를 확립했다. 아부 바크르의 단호한 대응은 중앙 정부가 지방 자치나 부족 독립을 용인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했다. 자카트 거부는 단순한 세금 문제가 아니라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이슬람 국가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더 이상 부족들의 느슨한 연합이 아니라, 명확한 위계와 중앙 집권적 통제를 가진 국가가 된 것이다. 이 선례는 이후 우마이야 왕조와 아바스 왕조의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의 기초가 되었다.

종교적으로, 릿다 전쟁은 이슬람의 다섯 기둥, 특히 자카트의 의무성을 확립했다. 아부 바크르의 유명한 선언은 이를 명확히 했다. "알라께 맹세코, 그들이 무함마드에게 주던 염소 한 마리의 새끼줄이라도 나에게 주기를 거부한다면, 나는 그것 때문에 그들과 싸울 것이다." 이것은 이슬람의 의무들이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적이며, 국가가 그 이행을 강제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후 이슬람 법학에서 배교와 반란, 세금 거부의 구별이 발전했지만, 그 기원은 릿다 전쟁에 있었다.


하지만 릿다 전쟁의 유산은 논란이 없지 않다. 말리크 이븐 누와이라의 처형은 초기 이슬람 공동체 내에서도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우마르는 칼리드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아부 바크르는 "나는 알라의 검을 칼집에 넣지 않을 것이다"라며 거부했다. 이 사건은 권력과 정의, 실용주의와 원칙 사이의 긴장을 보여준다. 칼리드의 가혹함이 필요했는지, 아니면 과도했는지에 대한 논쟁은 오늘날까지 이슬람 학자들 사이에서 계속되고 있다.

또한 릿다 전쟁은 "배교"의 정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자카트 납부를 거부하는 것이 배교인가? 아니면 단순히 세금 저항인가? 새로운 예언자를 따르는 것은 명백히 배교지만, 단지 메디나의 정치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어떤가? 이러한 질문들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릿다 전쟁의 광범위한 해석은 나중에 정치적 반대자들을 "배교자"로 낙인찍는 데 사용되었고, 이는 이슬람 역사에서 수많은 내전과 박해로 이어졌다.


릿다 전쟁은 또한 이슬람 팽창주의의 서막이었다. 633년 3월, 히즈라력 12년이 시작되었고, 아라비아 반도는 완전히 칼리프의 통제하에 있었다. 아부 바크르는 이제 외부로 눈을 돌렸다. 그의 의도가 전면적 정복이었는지, 아니면 단지 사산 조와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의 완충 지대를 확보하려는 것이었는지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다. 하지만 결과는 명확했다. 칼리드는 1만 8천 명의 자원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페르시아로 진군했고, 페르시아의 가장 부유한 지방인 이라크를 정복했다. 동시에 다른 군대들이 비잔티움의 시리아를 침공했다. 릿다 전쟁에서 단련된 군대는 이제 세계 정복에 나섰다.

이러한 급속한 팽창은 우연이 아니었다. 릿다 전쟁은 아랍 부족들을 전례 없는 방식으로 통합했다. 이전에는 서로 적대적이던 부족들이 이제 공통의 정체성과 목적 아래 단결했다. 전쟁 중에 형성된 군단들은 부족 경계를 넘어섰다. 메디나의 무하지룬과 안사르, 타이이와 아사드, 타밈과 하니파 출신들이 함께 싸웠다. 이러한 범부족적 군대 조직은 이후 정복의 핵심이었다. 또한, 릿다 전쟁은 엄청난 수의 숙련된 전사들을 배출했다. 1년 동안의 지속적인 전투는 군대를 강철처럼 단련시켰다. 이들은 사막 전투의 달인이었고, 기동전에 능숙했으며, 무엇보다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또한 릿다 전쟁은 경제적 동기도 제공했다. 전쟁 중에 무슬림 군대는 상당한 전리품을 획득했다. 야마마의 비옥한 땅, 바레인의 진주 어업, 오만의 무역로 등이 칼리프의 통제하에 들어왔다. 하지만 전쟁은 또한 파괴적이었다. 야마마 전투에서만 1,200명 이상의 무슬림이 전사했다. 아라비아 경제도 1년간의 전쟁으로 피폐해졌다. 새롭게 통합된 부족들을 먹여 살리고 고용하기 위해서는 외부로의 확장이 거의 필연적이었다. 페르시아와 비잔티움의 풍요로운 땅은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릿다 전쟁은 이슬람 정복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634년 8월, 아부 바크르는 죽었다. 그의 짧은 통치(단 2년)는 대부분 릿다 전쟁에 소비되었다. 하지만 그 2년 동안 그는 이슬람의 미래를 결정했다. 그의 결단력과 전략적 통찰력이 없었다면, 이슬람은 무함마드의 죽음과 함께 붕괴했을 수도 있다. 대신, 그것은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번성했다. 아부 바크르의 후계자 우마르가 물려받은 것은 안정되고 통합되고 강력한 국가였다. 우마르의 10년 통치 동안, 이슬람 군대는 사산 조 제국을 멸망시키고 비잔티움 제국의 중동 영토 대부분을 정복했다. 이 모든 것은 릿다 전쟁에서 놓인 기초 위에서 가능했다.


역사적 평가에서 릿다 전쟁은 종종 간과되거나 단순화된다. 그것은 이후의 극적인 정복들에 가려져, 단순히 "배교자들에 대한 진압"으로 축소되곤 한다. 하지만 이것은 릿다 전쟁의 복잡성과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이다. 릿다 전쟁은 신학적 분쟁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권력 투쟁이었고, 정체성의 위기였으며, 국가 건설의 과정이었다. 부족 사회에서 제국으로의 전환을 나타냈다. 관습법에서 종교법으로, 개인적 충성에서 제도적 권위로의 이행을 상징했다.

또한 릿다 전쟁은 이슬람 군사 전통의 형성에 결정적이었다. 칼리드가 개발한 전술들(특히 집중된 기병 공격, 적의 보급선 차단, 심리전의 활용)은 이후 한 세기 동안 이슬람 군대의 표준이 되었다. 11개 군단을 동시에 운용한 아부 바크르의 전략적 계획은 고대 군사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전 중 하나였다. 제한된 자원으로 여러 전선에서 적을 동시에 격파하는 능력은 탁월한 조직력과 통신 체계를 보여준다.

사료적 관점에서, 릿다 전쟁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주로 타바리, 이븐 이샥, 알발라주리 같은 후대 이슬람 연대기 작가들에게서 나온다. 이들의 기록은 종종 모순되고 경향성이 있다. 예를 들어, 무사일리마의 군대 규모는 자료에 따라 4만 명에서 10만 명까지 다양하게 기록된다. 말리크 이븐 누와이라의 사건에 대한 서술은 특히 논쟁적이다. 일부 자료는 그를 충실한 무슬림으로, 다른 자료는 명백한 배교자로 묘사한다. 이러한 불일치는 초기 이슬람 공동체 내의 정치적 분열을 반영한다. 말리크의 처형은 나중에 칼리드를 지지하는 세력과 비판하는 세력 사이의 논쟁거리가 되었다.

현대 학자들은 이러한 자료들을 조심스럽게 다룬다. 프레드 도너 같은 학자들은 릿다 전쟁의 많은 부분이 후대에 각색되고 극화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예언자" 툴라이하와 무사일리마, 사자의 신학적 주장에 대한 상세한 기록들은 의심스럽다. 이들을 이단적이고 거짓된 예언자로 묘사하는 것은 승자의 서사일 수 있다. 실제로 이들 중 일부는 단순히 정치적 자율성을 추구했을 수도 있고, "예언자" 주장은 정당성을 얻기 위한 수사적 장치였을 수 있다. 하지만 전투들의 기본적 개요와 순서, 주요 인물들의 역할은 여러 독립적 자료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므로, 핵심 사건들의 역사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릿다 전쟁은 또한 이슬람 법학의 발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배교에 대한 처벌, 반란자와 배교자의 구별, 전쟁 포로의 처우 등에 관한 법적 논의는 모두 릿다 전쟁의 선례에서 파생되었다. 샤리아 법의 주요 학파들(하나피, 말리키, 샤피이, 한발리)은 모두 릿다 전쟁의 사건들을 인용하여 자신들의 법적 입장을 정당화했다. 예를 들어, 배교자에 대한 사형은 말리크 이븐 누와이라의 처형에서 정당성을 얻었고, 회개한 배교자의 용서는 암르 이븐 마디 야크립과 툴라이하의 사례에서 근거를 찾았다.

오늘날 릿다 전쟁은 여전히 논쟁적이다. 일부 이슬람 학자들은 그것을 신앙의 순수성을 지킨 정당한 방어로 본다. 배교는 단순히 개인적 신념의 변화가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배신이었고, 국가는 그것을 진압할 권리와 의무가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학자들은 더 비판적이다. 그들은 릿다 전쟁이 과도하게 폭력적이었고, 진정한 신학적 분쟁보다는 정치적 통제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자카트 거부를 배교와 동일시한 것은 종교적 의무와 세금을 혼동한 것이며, 이것이 나중에 정치적 반대를 종교적 이단으로 낙인찍는 위험한 선례를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현대의 극단주의 집단들도 릿다 전쟁을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해왔다. 그들은 현대의 무슬림 정부들을 "배교자"로 규정하고, 아부 바크르처럼 그들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릿다 전쟁의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아부 바크르는 합법적으로 선출된 칼리프로서 실제 반란에 대응했고, 대부분의 반란군은 결국 화해하고 용서받았다. 반면 현대 극단주의자들은 자신을 권위로 임명하고 임의로 다른 무슬림들을 배교자로 선언한다. 이것은 릿다 전쟁의 정신과 정반대다.

결론적으로, 릿다 전쟁은 이슬람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 중 하나였다. 그것은 무함마드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던 종교 운동이 제도화된 국가로 변모하는 과정이었다. 아부 바크르의 단호한 지도력, 칼리드의 군사적 천재성, 그리고 수많은 무명 전사들의 희생이 이슬람의 생존을 보장했다. 1년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아라비아 반도는 통합되었고, 이슬람 국가는 확고히 확립되었다. 이 기초 위에서 이슬람은 다음 세기 동안 세계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릿다 전쟁 없이는 이후의 정복도, 이슬람 문명의 황금기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것은 진정으로 이슬람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D%95%A0%EB%A6%AC%EB%93%9C%20%EC%9D%B4%EB%B8%90%20%EC%95%8C%20%EC%99%88%EB%A6%AC%EB%93%9C?uuid=2498b555-a3e5-4652-b2f7-5d1f5c60a01a)

keyword
작가의 이전글오스만 제국의 시파히-제국의 수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