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2년 가을, 푸아티에와 투르 사이의 어느 도로에서 두 세력이 맞붙었다. 한쪽은 다마스쿠스에서 출발해 지중해 남안을 따라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피레네 산맥을 넘어온 우마이야 왕조의 군대였고, 다른 한쪽은 내분으로 갈기갈기 찢긴 프랑크 왕국을 가까스로 수습한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이 이끄는 군대였다. 이 전투는 훗날 기독교 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날 전장에 선 이들은 자신들이 세계사적 전환점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이것은 권력과 영토, 약탈품을 둘러싼 또 하나의 전쟁이었을 뿐이다.
8세기 초, 우마이야 왕조는 이슬람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있었다. 661년 무아위야가 제4대 칼리파 알리를 제압하고 다마스쿠스에 수도를 정한 이래, 이 왕조는 멈출 줄 모르는 확장을 거듭했다.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넘어 인더스 강 유역까지,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 전역을 휩쓸며 대서양 연안까지 그 영향력을 뻗쳤다. 왈리드 1세의 치세는 우마이야 왕조 팽창의 정점이었다. 그의 군대는 세 대륙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711년,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이끄는 아랍-베르베르 혼성군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넜다. 내전과 왕위 계승 분쟁으로 피폐해진 서고트 왕국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베리아 반도 정복은 놀라울 만큼 신속했다. 718년까지 거의 전 반도가 우마이야 왕조의 지배 아래 들어갔고, 오직 북부의 척박한 산악지대에서만 펠라요가 이끄는 소규모 저항 세력이 근근이 버티고 있었다. 알안달루스라 불리게 될 이 새로운 땅은 우마이야 왕조에게 단순한 영토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더 북쪽, 부유한 프랑크의 땅으로 향하는 관문이었다.
하지만 우마이야 왕조의 눈부신 확장 이면에는 심각한 내적 모순이 숨어 있었다. 아랍 정복자들은 같은 무슬림이 된 베르베르인과 페르시아인, 그리고 여타 피정복민들을 여전히 2등 시민으로 취급했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들조차 지즈야라 불리는 종교세를 계속 내야 했고, 군공을 세워도 아랍인만큼의 보상을 받지 못했다. 특히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정복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베르베르인들의 불만은 깊었다. 그들은 최전선에서 피를 흘렸지만 아랍인들로부터 야만인 취급을 받았다. 이러한 차별은 제국 전역에 걸쳐 불만의 씨앗을 뿌리고 있었고, 곧 폭발할 운명이었다.
한편 피레네 산맥 북쪽의 프랑크 왕국은 전혀 다른 종류의 위기에 빠져 있었다. 메로빙거 왕조의 전통적인 균분상속제는 왕국을 계속해서 분할했고, 왕권은 형식만 남은 채 무력화되었다. 실질적 권력은 궁재, 즉 왕 밑의 재상들에게 넘어갔다. 7세기 후반 프랑크 왕국은 네우스트리아와 아우스트라시아라는 두 지역으로 나뉘어 각각의 궁재들이 권력을 다투었다. 687년 테르트리 전투에서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 피핀 2세가 승리하면서 프랑크 왕국은 명목상 재통일되었지만, 중앙의 권위는 여전히 약했고 지방 귀족들은 제 갈 길을 갔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남부 아키텐 지방의 공작 외드는 사실상 독립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는 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정복이 완료된 직후인 720년대 초반, 갑자기 피레네를 넘어온 무슬림 군대와 맞닥뜨려야 했다. 721년 툴루즈 전투에서 외드는 압둘 라흐만 알 가피키가 이끄는 우마이야 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이슬람 세력이 유럽에서 당한 첫 번째 중요한 패배였다. 하지만 이 승리가 외드에게 가져다준 것은 영광만이 아니었다. 그는 프랑크 왕국 중앙정부와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고, 궁지에 몰린 그는 심지어 베르베르 귀족 오트만과 정략적 동맹을 맺으며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는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피핀 2세의 서자였던 카롤루스 마르텔은 715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치열한 권력 투쟁을 거쳐 궁재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명목상의 메로빙거 왕들을 허수아비로 삼아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다. 그의 별명 '마르텔'은 '망치'를 뜻했는데, 이는 그가 반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짓이기는 수완을 드러냈다. 하지만 카롤루스는 단순한 전사가 아니었다. 그는 분열된 프랑크 왕국을 재통합하고 강화할 야심을 품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외드와 같은 지방 권력자들을 견제해야 했다.
730년대 초, 우마이야 왕조의 알안달루스 총독으로 압둘 라흐만 알 가피키가 임명되었다. 그는 능력 있는 군사 지도자였으며, 피레네 북쪽으로의 원정을 재개할 계획을 세웠다. 732년 봄, 그는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북상했다. 이 원정의 목적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것이 프랑크 왕국 정복을 위한 체계적 전략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이들은 단순한 약탈 원정이었다고 본다. 실제로 압둘 라흐만의 군대는 아키텐을 가로지르며 여러 도시를 약탈했고, 외드의 군대를 보르도 인근에서 격파했다.
패배한 외드는 어쩔 수 없이 오랜 적수였던 카롤루스 마르텔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것은 카롤루스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이슬람 침략자를 물리침으로써 그는 프랑크 왕국 전체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고, 동시에 외드를 자신의 권위 아래 굴복시킬 수 있었다. 카롤루스는 신속하게 군대를 소집했다. 그가 동원할 수 있었던 병력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외드의 잔존 병력과 합친 프랑크 연합군은 상당한 규모였을 것이다.
한편 압둘 라흐만의 군대는 투르를 향해 계속 북상했다. 투르는 성 마르티노의 대성당이 있는 부유한 종교 도시였고, 약탈할 가치가 충분한 목표였다. 우마이야 군은 실제로 투르를 약탈한 후 전리품을 싣고 남쪽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카롤루스의 군대가 그들의 퇴로를 차단했다. 두 군대는 투르와 푸아티에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마주쳤다. 정확한 전투 장소조차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었는데, 이는 당시 기록의 부족과 불확실성을 보여준다.
양측 군대의 구성은 극명하게 달랐다. 우마이야 군은 기동력이 뛰어난 경기병 중심이었고, 아랍인과 베르베르인, 그리고 이베리아의 무슬림 전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반면 프랑크 군은 전통적으로 중무장한 보병이 주력이었다. 카롤루스는 방어적 대형을 구축했다. 프랑크 전사들은 밀집대형을 이루어 움직이지 않는 성벽처럼 서 있었다. 이것은 의도적인 전술이었다. 카롤루스는 적의 기병 돌격을 견뎌낸 후 반격할 계획이었다.
전투는 며칠에 걸쳐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 며칠간은 양측이 서로를 탐색하며 소규모 접전만 벌였다. 압둘 라흐만은 아마도 카롤루스가 먼저 공격해 오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크 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우마이야 기병대가 돌격을 개시했다. 화살이 빗발쳤고 말발굽 소리가 대지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프랑크 보병들의 밀집대형은 부서지지 않았다. 몇 차례 반복된 돌격은 모두 견고한 방패벽에 부딪혀 무너졌다.
전투의 결정적 순간은 압둘 라흐만의 전사였다. 혼전 중에 그는 프랑크 전사의 창이나 검에 맞아 쓰러졌다. 지휘관을 잃은 우마이야 군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졌다. 더욱이 그들은 투르에서 가져온 막대한 전리품을 진영에 쌓아두고 있었는데, 프랑크 군이 그것을 약탈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지자 혼란은 극에 달했다. 밤이 되자 우마이야 군은 조용히 진영을 버리고 남쪽으로 철수했다. 다음날 아침 프랑크 군이 경계하며 적진에 접근했을 때,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카롤루스는 추격을 명령하지 않았다. 그는 승리를 확보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투르 푸아티에 전투는 훗날 막대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18세기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이것을 "세계사를 바꾼 조우"라고 불렀다. 만약 카롤루스가 패배했다면 이슬람 세력이 유럽 전역을 정복했을 것이라는 가정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기독교 문명은 이슬람화의 위기에서 구원되었고, 카롤루스 마르텔은 유럽의 구원자로 칭송받았다. 특히 카롤루스의 후손들이 세운 카롤링거 왕조는 이 전투를 정권 정당성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이교도로부터 기독교 세계를 구한 영웅이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역사의 실상은 훨씬 복잡했다. 무엇보다 732년의 한 번의 전투로 우마이야 왕조의 프랑크 침공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후에도 무슬림 군대는 737년까지 여러 차례 피레네를 넘어 프랑크 남부를 약탈했고, 카롤루스는 그때마다 군대를 이끌고 대응해야 했다. 실제로 프랑스 영토에서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낸 것은 카롤루스의 아들 피핀 3세가 759년 나르본을 수복했을 때였다. 또한 압둘 라흐만의 원정이 체계적인 정복 전쟁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약탈 원정이었는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당시 우마이야 왕조는 내부 갈등으로 시달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진 프랑크 땅을 영구적으로 점령하고 지배할 의지나 능력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더욱이 우마이야 왕조의 확장을 저지한 것은 프랑크인들만이 아니었다. 717년부터 718년까지 계속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비잔틴 제국의 레온 3세는 우마이야 군의 대규모 공세를 격퇴했다. 이 패배는 우마이야 왕조에게 치명적 타격이었고, 이후 제국의 팽창은 현저히 둔화되었다. 비잔틴의 저항이 없었다면 우마이야 군은 발칸 반도를 거쳐 유럽 심장부로 진격했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비잔틴 제국이야말로 이슬람 확장을 막은 진정한 방파제였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우마이야 왕조의 쇠퇴를 가져온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분열이었다. 아랍인의 차별에 분노한 베르베르인들은 739년 '베르베르 대항거'를 일으켰다. 이 반란은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퍼졌고, 743년까지 계속되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반란을 진압하는 데 막대한 자원을 소모했고, 마그레브와 이프리키야의 대부분을 상실했다. 이베리아에서도 베르베르 귀족들의 철수로 북부 국경이 약화되었고, 아스투리아스의 알폰소 1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갈리시아와 레온 지역을 탈환했다.
740년대 후반부터 호라산에서 아바스 가문이 주도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비아랍 무슬림들의 불만을 파고든 아바스 세력은 빠르게 세를 키웠고, 750년 마침내 우마이야 왕조를 전복했다. 아바스 가문은 우마이야 왕족을 거의 모두 학살했다. 단 한 명, 아브드 알 라흐만만이 가까스로 살아남아 서쪽으로 도주했다. 그는 756년 이베리아 반도에 도착해 코르도바에서 후우마이야 왕조를 세웠다. 하지만 이 새로운 왕조는 아바스 왕조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한동안 칼리파가 아닌 아미르 칭호만을 사용했고, 피레네 북쪽으로의 팽창보다는 반도 내 기독교 왕국들과의 대치에 집중했다.
투르 푸아티에 전투가 진정 중요했던 이유는 군사적 결과보다 정치적 상징성에 있었다. 카롤루스 마르텔은 이 승리를 통해 프랑크 왕국 전역에서 자신의 권위를 확고히 했다. 그는 교회의 토지를 몰수해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나눠주며 충성을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봉토를 기반으로 한 주종 관계가 강화되었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중세 봉건제 형성의 중요한 계기였다고 주장한다. 비록 이 이론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카롤루스가 군사적 개혁을 통해 프랑크 왕국의 권력 구조를 재편한 것은 분명하다.
카롤루스의 아들 피핀 3세는 751년 마침내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왕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교황은 이 찬탈을 승인했는데, 이는 카롤루스 가문이 이교도로부터 기독교 세계를 지킨 공로 덕분이었다. 피핀의 아들 카롤루스 대제는 프랑크 왕국을 유럽 최강국으로 만들었고, 800년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관을 받았다. 투르 푸아티에 전투는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 되었다. 카롤링거 왕조는 자신들의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해 이 전투를 끊임없이 찬양했고, 그 결과 이것은 유럽 정체성 형성의 신화적 순간이 되었다.
후세의 해석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중세에 이 전투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성전으로 이해되었다. 십자군 시대에는 무슬림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부각되었다. 근대에 들어서는 유럽 문명과 동양 문명의 충돌로 재해석되었다. 식민주의 시대의 유럽인들은 투르 푸아티에를 문명화된 서구가 야만적 동양을 물리친 승리로 보았다. 20세기와 21세기에는 문명 충돌론의 상징으로 또다시 소환되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대의 아랍 사료들은 이 전투를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이것은 먼 변방에서 벌어진 불운한 패배 중 하나였을 뿐이다. 실제로 8세기 우마이야 왕조의 주된 관심사는 프랑크 왕국이 아니라 비잔틴 제국이었고, 내부의 종교적 정치적 갈등이었다. 압둘 라흐만의 원정은 거대한 전략의 일환이라기보다는 지역 총독의 개별적 작전에 가까웠다. 그가 전사한 것은 비극이었지만, 제국 전체의 운명을 바꿀 만큼의 사건은 아니었다.
이렇게 본다면 투르 푸아티에 전투는 실제 일어난 사건보다 그것이 만들어낸 신화가 더 중요했던 경우라 할 수 있다. 732년 그날, 푸아티에와 투르 사이의 들판에서 벌어진 것은 세계사적 운명의 대결이 아니라 권력과 약탈품을 둘러싼 지역적 충돌이었다. 하지만 그 전투는 승자의 후손들에 의해 기념비적 사건으로 재탄생했다. 카롤링거 왕조는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상의 승리를 찬양했고, 그 과정에서 역사는 신화가 되었다.
그럼에도 이 전투가 장기적으로 역사에 미친 영향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만약 압둘 라흐만이 승리했다면 프랑크 왕국은 더 깊은 혼란에 빠졌을 것이고, 카롤루스 마르텔의 권위는 치명적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카롤링거 왕조의 등장은 지연되거나 좌절되었을 수도 있다. 반대로 카롤루스의 승리는 그에게 프랑크 왕국을 통합하고 강화할 정치적 자본을 제공했다. 이것이 결국 중세 유럽 최강국의 출현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투르 푸아티에는 분명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동시에 이 전투는 프랑크 왕국과 이슬람 세계의 관계를 규정하는 틀을 만들었다. 8세기 후반부터 두 문명은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수세기 동안 대치했다.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과 기독교가 공존하고 충돌하는 독특한 공간이 되었다. 코르도바의 후우마이야 왕조는 찬란한 이슬람 문명을 꽃피웠고, 반대편에서는 아스투리아스와 레온, 카스티야와 아라곤 같은 기독교 왕국들이 성장했다. 이들 사이의 레콩키스타는 1492년 그라나다가 함락될 때까지 거의 8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투르 푸아티에 전투와 그것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역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기억되는지를 보여준다. 역사적 사건의 의미는 그것이 일어난 순간에 고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후대 사람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해석하고 재해석하면서 계속 변화한다. 카롤루스 마르텔과 압둘 라흐만은 자신들이 문명의 운명을 놓고 싸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 싸웠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의 후손들과 역사가들은 그 전투에 거대한 의미를 부여했고, 그것은 유럽 정체성의 일부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투르 푸아티에 전투를 돌아볼 때, 중요한 것은 신화를 해체하는 것도, 무조건 수용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의 복잡성을 이해하고,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서는 것이다. 732년의 그 전투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충돌이 아니었다. 그것은 팽창하는 제국과 분열된 왕국 사이의 충돌이었고, 야심 있는 지휘관들과 생존을 위해 싸우는 전사들의 이야기였다. 양측 모두 복잡한 동기와 내부 모순을 안고 있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차별과 내분으로 곧 무너질 운명이었고, 프랑크 왕국은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겨우 버티고 있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투르 푸아티에 전투가 바로 그 전형이다. 카롤링거 왕조가 집권하면서 이 전투는 유럽을 구한 결정적 순간으로 재탄생했다. 수많은 연대기 작가들이 카롤루스의 영웅적 승리를 찬양했고, 교회는 그를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로 높였다. 하지만 만약 압둘 라흐만이 살아서 코르도바로 돌아갔다면, 아랍의 역사가들은 이 전투를 어떻게 기록했을까? 아마도 단순히 "그해 프랑크 땅에서 많은 전리품을 얻었으나, 총독 압둘 라흐만이 순교했다"는 간단한 한 줄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서사의 비대칭성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서구 역사 교육에서 투르 푸아티에는 여전히 중요한 전환점으로 가르쳐진다. 하지만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역사 교과서에서 이 전투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이슬람 세계의 역사가들에게 8세기의 진정한 재앙은 732년의 프랑크 전투가 아니라 750년의 아바스 혁명이었다. 우마이야 왕조의 몰락과 그에 따른 대학살, 그리고 칼리파 수도가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이동한 것이 훨씬 더 중대한 역사적 단절이었다. 투르 푸아티에는 그저 멀리 떨어진 변방에서의 사소한 좌절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전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전투의 단기적 결과와 장기적 영향을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다. 단기적으로 보면 732년의 전투는 결정적이지 않았다. 우마이야 군은 패배했지만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고, 이후에도 프랑크 남부를 계속 위협했다. 프로방스 지역에는 이슬람 세력의 거점이 수십 년 더 남아있었다. 지중해 서부에서 우마이야 왕조의 해군력은 여전히 강력했고, 그들은 사르디니아와 코르시카, 시칠리아를 계속 공격했다. 만약 투르 푸아티에가 정말로 이슬람 확장의 종말을 의미했다면, 이후의 이런 활동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이 전투는 프랑크 왕국의 운명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카롤루스 마르텔은 이 승리로 얻은 정치적 자본을 활용해 왕국을 재편했다. 그는 교회 재산을 군사력 강화에 투입했는데, 이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논란적인 결정이었다. 성직자들은 격렬히 반발했지만, 카롤루스는 이교도와의 전쟁이라는 명분 아래 이를 정당화했다. 그는 몰수한 토지를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분배하면서 조건부 소유권을 도입했다. 받은 자는 군사적 의무를 다해야만 토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제도는 카롤링거 왕조 군사력의 기반이 되었고, 중세 유럽 사회 구조의 원형이 되었다.
카롤루스의 개혁은 기병 중심 전술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했다. 이전까지 프랑크 군대는 주로 도보 전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등자의 도입과 함께 중무장 기병이 전장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말을 소유하고 갑옷과 무기를 갖추고 전투 훈련을 받는 것은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이것은 오직 넉넉한 토지를 가진 자들만이 감당할 수 있었다. 이렇게 토지 소유와 군사적 역할이 결합되면서 귀족 전사 계급이 형성되었다. 후대의 기사 계급이 바로 여기서 싹텄다.
카롤루스는 739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지 못한 동쪽 영토를 정복하며 프랑크 왕국을 재통일했다. 그는 작센족과 프리지아인, 바이에른인들을 복속시켰다. 이러한 정복 전쟁에서 그는 이교도 토벌이라는 종교적 명분을 적극 활용했다. 교회는 그의 재산 몰수에도 불구하고 이교도 정복이라는 더 큰 그림 앞에서 그를 지지했다. 카롤루스 마르텔의 유산은 그의 아들들에게 온전히 전해졌다. 피핀 3세가 왕위를 찬탈할 수 있었던 것도, 카를 대제가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할아버지가 닦아놓은 기반 위에서였다.
반대편에서 우마이야 왕조의 쇠퇴는 가속화되었다. 베르베르 대항거는 제국의 자원을 고갈시켰다. 더 심각한 것은 아랍 부족들 간의 분열이었다. 북부 아랍 부족들(칼비스)과 남부 아랍 부족들(카이시스) 사이의 오랜 대립이 정치화되면서 왕조는 내전 상태에 빠졌다. 각 지역의 총독들은 중앙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746년 시리아에서 대지진이 발생해 수만 명이 죽고 도시들이 파괴되었는데, 이것이 마지막 칼리파 마르완 2세의 권위를 더욱 약화시켰다.
호라산에서 시작된 아바스 혁명은 사회적 불만을 교묘하게 동원했다. 비아랍 무슬림들, 특히 페르시아인들은 아랍 지배 계급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아바스 가문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백부 압바스의 후손이라는 정통성을 내세우며 "모든 무슬림이 평등한" 새로운 질서를 약속했다. 그들의 군대는 검은 깃발을 들고 서쪽으로 진군했다. 750년 1월 자브 강 전투에서 마르완 2세의 군대는 궤멸되었다. 칼리파는 이집트로 도주했지만 그해 8월 결국 붙잡혀 살해되었다. 아바스 군대는 우마이야 왕족을 체계적으로 사냥했다. 심지어 이미 죽은 칼리파들의 무덤까지 파헤쳐 시신을 모욕했다.
이 학살을 피한 유일한 우마이야 왕족 아브드 알 라흐만의 탈출기는 전설적이다. 그는 시리아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다시 이집트로, 북아프리카를 가로질러 마그레브까지, 마침내 지브롤터를 건너 이베리아에 도착했다. 756년 그는 코르도바를 점령하고 새로운 아미르로 즉위했다. 아바스 칼리파는 자객을 보내 그를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아브드 알 라흐만은 자신의 정권을 공고히 하는 데 성공했고, 그의 후손들은 929년까지 코르도바 아미르국을, 그 이후에는 칼리파국을 통치하며 이베리아에서 이슬람 문명의 황금기를 열었다.
코르도바는 10세기에 서유럽에서 가장 크고 발전된 도시가 되었다. 인구는 50만 명에 달했고, 상수도와 가로등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도서관에는 수십만 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었다. 이슬람 철학자와 과학자, 의사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의 저작은 후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의 지적 르네상스를 촉발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 무슬림이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하는 독특한 다문화 사회가 형성되었다. 반면 같은 시기 프랑크 왕국은 카를 대제의 사후 분열되어 여러 왕국으로 쪼개졌고, 바이킹의 침략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역설은 투르 푸아티에 전투의 신화에 의문을 제기한다. 만약 그 전투가 정말로 야만적인 이슬람이 문명화된 유럽을 침공하는 것을 막은 사건이었다면, 왜 그 후 수 세기 동안 이슬람 스페인이 기독교 프랑스보다 훨씬 선진적이고 관용적인 사회였는가? 진실은 732년에는 어느 쪽도 문명의 우월성을 주장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양측 모두 전쟁과 약탈로 얼룩진 군사 사회였다. 문명의 성취는 전투의 승패가 아니라 평화로운 시기에 이룩된다. 코르도바의 찬란함은 정복이 아니라 학문과 예술, 무역의 번영에서 나왔다.
투르 푸아티에는 또한 중세 유럽의 정체성 형성에 기여했다. 8세기 이전까지 "유럽"이라는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로마 제국의 서부는 여러 게르만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고, 그들 사이에는 공통의 정체성보다 경쟁과 갈등이 더 많았다. 그러나 이슬람이라는 외부의 타자가 등장하면서 기독교 유럽이라는 관념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다. 카롤링거 왕조는 이 관념을 적극 활용했다. 카를 대제는 스스로를 기독교 세계 전체의 수호자로 자임했고, 교황은 그에게 황제의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이를 승인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독교 대 이슬람의 이분법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실제 역사는 훨씬 복잡했다. 카롤링거 프랑크와 후우마이야 스페인은 때로 전쟁을 벌였지만 때로는 외교 관계를 맺기도 했다. 카를 대제는 아바스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와 사절을 교환했다. 두 통치자는 공동의 적, 즉 후우마이야의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를 견제하기 위해 협력했다. 이베리아의 기독교 왕국들은 때로 무슬림 아미르와 동맹을 맺고 다른 기독교 왕국을 공격했다. 종교는 중요한 정체성 표지였지만 권력 정치에서 유일한 요소는 아니었다.
더욱이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 사이에는 끊임없는 문화적 교류가 있었다. 이베리아는 그 교류의 가장 중요한 통로였다. 아랍어로 쓰인 그리스 철학서들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톨레도의 번역 학교를 거쳐 유럽으로 전해졌다. 아랍 과학자들이 발전시킨 대수학과 연금술, 의학 지식도 함께 유입되었다. 아라비아 숫자와 영점의 개념 없이 현대 수학과 과학은 상상할 수 없다. 르네상스 유럽은 이슬람 세계를 통해 고대 그리스의 지적 유산을 재발견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투르 푸아티에 전투는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문명 간 복잡한 상호작용의 한 에피소드였다. 전투는 일시적으로 경계선을 그었지만, 그 경계는 결코 불투과성의 벽이 아니었다. 사람과 상품, 아이디어는 계속해서 경계를 넘나들었다. 이슬람 상인들은 프랑크 도시에서 거래했고, 기독교 순례자들은 무슬림 영토를 통과했다. 양측의 지식인들은 서로의 언어를 배우고 책을 교환했다. 이러한 교류 속에서 중세 유럽 문명이 천천히 성숙해갔다.
732년 전투의 진정한 의미는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그것은 프랑크 왕국이 생존하고 발전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주었다. 만약 카롤루스가 패배했다면 프랑크는 더 오랜 혼란에 빠졌을 것이고, 카롤링거 왕조의 등장은 지연되거나 다른 형태를 띠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럽의 정치적 지형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이슬람의 유럽 정복을 의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마이야 왕조는 이미 과도하게 팽창해 있었고, 내부 모순으로 무너질 운명이었다. 프랑크를 완전히 정복하고 지배할 자원도 의지도 없었다.
역사에는 필연적인 것이 거의 없다. 투르 푸아티에 전투도 마찬가지다. 압둘 라흐만이 좀 더 신중했다면, 카롤루스가 조금 늦게 도착했다면, 날씨가 달랐다면, 수많은 우연한 요소들이 결과를 바꿀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달랐다고 해서 유럽의 역사가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갔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역사가들은 종종 특정 사건을 전환점으로 지목하고 싶어 하지만, 실제 역사는 무수한 작은 결정과 우연, 구조적 요인들이 얽혀 천천히 흘러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투르 푸아티에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유럽을 구한 기적적 승리로? 과장된 신화로? 아니면 그저 잊혀진 변방의 전투로? 아마도 그 모든 것이자 동시에 그 어떤 것도 아닐 것이다. 투르 푸아티에는 역사적 사실이자 정치적 신화이고, 중요한 전환점이자 사소한 에피소드이며, 기억할 가치가 있는 사건이자 과도하게 찬양된 승리다. 이 모순적 평가들이 모두 부분적으로 옳다.
우리가 이 전투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아마도 역사의 복잡성을 인정하는 것일 것이다. 단순한 선악 구도, 문명과 야만의 대립, 운명적 대결 같은 서사는 매력적이지만 현실을 왜곡한다. 732년 그날 프랑크인과 아랍인, 베르베르인들이 피를 흘린 것은 고상한 이념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생존과 권력, 부를 위해 싸웠다. 그것은 인간적이고 이해할 만한 동기였다. 그들의 후손들이 그 싸움에 우주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투르 푸아티에를 중세의 렌즈를 통해서도, 근대 제국주의의 렌즈를 통해서도 아닌, 21세기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서로 다른 문화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만났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일들 중 하나였다. 충돌이 있었고 피가 흘렀지만, 그 후에도 삶은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적응하고 교류하며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갔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수 세기 동안 이어진 공존과 갈등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결국 투르 푸아티에 전투는 우리에게 역사를 읽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준다. 역사는 승자가 쓰지만, 우리는 그 기록을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신화와 사실을 구분하되, 신화 또한 그 자체로 역사적 힘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카롤링거 왕조가 만들어낸 투르 푸아티에의 신화는 중세 유럽의 정체성 형성에 실제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이 과장이었다는 사실이 그 영향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732년 가을 어느 날, 푸아티에 근처의 들판에서 두 군대가 맞붙었다. 며칠간의 대치 끝에 한쪽 지휘관이 죽고 그의 군대는 철수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단순한 사실로부터 수 세기에 걸친 해석과 재해석, 신화화와 탈신화화의 과정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과정 자체가 투르 푸아티에 전투 못지않게 흥미로운 역사다. 우리는 사건뿐 아니라 그 사건이 기억되고 의미를 부여받는 방식을 통해서도 역사를 이해한다. 투르 푸아티에는 그 두 가지 차원 모두에서 중요한 사례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