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05년 10월 6일, 론 강변의 아라우시오에서 로마 공화정은 상상할 수 없는 재앙을 목격했다. 두 개의 로마 군단이 하루 만에 완전히 증발했다. 8만 명의 정규군과 4만 명의 보조병, 종자들이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의 맹공 앞에 무너졌다. 시체는 들판을 덮었고, 피는 론 강을 붉게 물들였다. 훗날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전투가 벌어진 땅은 인간의 유해로 너무나 비옥해져서 '엄청난 양'의 수확을 거두었다." 이것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었다. 칸나이 전투 이래 최악의 참사였으며,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처음으로 로마 본토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대재앙이 발생하기 8년 전, 로마인들은 이 위협의 전조를 포착하지 못했다. 기원전 113년, 유틀란트 반도에서 남하한 킴브리족이 노레이아에서 로마 군단을 격파했을 때도, 로마는 이를 변방의 작은 소동 정도로 치부했다. 당시 로마는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마케도니아를 정복하며 지중해의 패권을 확립한 직후였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무릎을 꿇었고, 그리스와 북아프리카는 로마의 손아귀에 있었다. 승리에 취한 로마에게 북방의 '야만족'은 단지 또 하나의 정복 대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게르만 부족들은 로마가 과거에 상대했던 적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들은 정복을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기원전 120년경 유틀란트 반도를 덮친 극심한 기근과 홍수로 인해 킴브리족, 테우토네스족, 암브로네스족은 30만 명이 넘는 거대한 집단 이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전투원만이 아니라 여자와 아이들, 노인들까지 모두 이끌고 움직였다. 마차에는 그들의 모든 소유물이 실려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단 하나, 새로운 정착지를 찾는 것이었다. 로마의 기록에는 이들이 로마군과 조우할 때마다 먼저 협상을 시도했으며, 로마군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결코 먼저 전투를 개시하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도 로마는 협상 대신 무력을 택했다. 기원전 109년, 집정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에서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을 공격했으나 패배했다. 기원전 107년에는 티구리니족이 부르디갈라 전투에서 집정관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전사시켰다. 연이은 패배에도 로마는 게르만족의 진짜 전투력을 과소평가했다. 그리고 이 오만함은 아라우시오에서 대가를 치렀다.
아라우시오의 참극은 로마의 내부 모순이 빚어낸 필연적 결과였다. 전직 집정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와 현직 집정관 그나이우스 말리우스 막시무스는 같은 전장에 있었지만 서로 협력을 거부했다. 카이피오는 고귀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고, 막시무스는 평민 출신의 '신인'이었다. 카이피오는 자신보다 계급이 낮은 막시무스의 명령을 받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그는 막시무스와 별도로 진을 쳤고, 협력 요청을 무시했다. 킨브리족의 왕 보이오릭스가 막시무스와 협상을 시도하자, 카이피오는 막시무스가 전공을 독차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단독으로 킴브리족을 공격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준비가 부족했던 카이피오의 군단은 순식간에 포위되어 학살당했다. 승리에 고무된 킴브리족은 즉시 막시무스의 진영으로 진격했다. 이미 카이피오의 패잔병들이 혼란에 빠진 막시무스의 군대로 밀려들어 대형은 무너진 상태였다. 킴브리족은 로마군을 론 강가로 몰아넣었다. 강을 등진 로마군은 도주할 수도 없었다. 갑옷을 입은 채 강을 건너는 것은 불가능했다. 살아남은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 중에는 훗날 명장이 될 세르토리우스도 있었는데, 그는 론 강을 헤엄쳐 건너 목숨을 구했다.
아라우시오에서 포로가 된 로마인들은 더 끔찍한 운명을 맞았다. 킴브리족은 포로들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다. 이는 그들이 숭배하던 전쟁의 신 오딘에게 바치는 제물이었다. 기원전 108년 집정관을 지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스카우루스도 포로가 되어 보이오릭스 왕 앞에 끌려갔다. 그는 포로의 몸이면서도 킴브리족에게 군을 되돌릴 것을 요구하며, 그렇지 않으면 로마군에게 섬멸당할 것이라 경고했다. 이 오만한 태도에 분노한 보이오릭스는 즉시 그를 처형했다.
로마에서는 공포가 도시를 휩쓸었다. '테러 킴브리쿠스(terror cimbricus)', 즉 킴브리의 공포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사람들은 킴브리족이 언제든 로마 성문 앞에 나타날 것이라 믿었다. 그들이 포로를 신에게 제물로 바친다는 소문이 퍼지며 공포는 더욱 증폭되었다. 원로원은 깊은 수치심에 빠졌다. 두 명의 집정관이 전사했고, 12개 군단이 전멸했다. 로마의 군사력은 바닥났고, 알프스 고개는 무방비 상태였다. 이탈리아 본토는 언제든 침공당할 수 있었다.
이 절망적인 순간에 로마인들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가이우스 마리우스. 그는 아르피눔 출신의 평민으로, 고귀한 혈통이 없는 '노부스 호모(새로운 사람)'였다. 그러나 그는 최근 북아프리카의 유구르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명성을 얻었다. 무엇보다 그는 병사들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았다. 로마 시민들은 헌법을 무시하고 마리우스를 기원전 104년부터 기원전 100년까지 5년 연속 집정관으로 선출했다. 이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법에 따르면 집정관은 10년이 지나야 재선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적 위기 앞에서 법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마리우스는 로마 군사 체계의 근본적 문제를 직시했다. 전통적으로 로마 군단은 재산을 소유한 시민들로 구성된 민병대였다. 시민들은 자비로 무장했고, 전쟁이 끝나면 농장으로 돌아갔다. 이 시스템은 짧은 전쟁에는 효과적이었지만, 이제 한계에 봉착했다. 연이은 전쟁으로 인력이 고갈되었고, 재산 요건을 충족하는 시민이 부족했다. 게다가 민병대는 훈련이 부족했고, 장기 작전에 부적합했다.
마리우스는 대담한 결단을 내렸다. 그는 재산 요건을 폐지하고 무산자 계급인 '카피테 첸시(머리수로 세는 자들)'에게도 입대를 허용했다. 이것은 혁명적 변화였다. 이제 가난한 자들도 군인이 될 수 있었다. 국가는 그들에게 무기와 갑옷, 훈련을 제공했다. 군복무는 직업이 되었다. 마리우스는 3만 명의 로마인과 4만 명의 이탈리아 동맹군을 모집했다. 그는 이들을 악수아이 섹스티아이(현대의 엑상프로방스) 근처에 주둔시키고 혹독한 훈련을 시작했다.
마리우스의 개혁은 단순히 병력 확충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군단의 전술 단위를 재편했다. 전통적인 마니풀루스(소대) 체계를 폐지하고 코호르스(대대)를 주요 전술 단위로 만들었다. 하나의 코호르스는 약 480명으로 구성되었고, 군단은 10개의 코호르스로 이루어졌다. 이는 더 유연한 기동과 효과적인 지휘를 가능하게 했다. 그는 또한 필룸(투창)의 디자인을 개선했다. 새로운 필룸은 적의 방패에 박히면 구부러져 제거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아퀼라(독수리 표준)를 모든 군단의 상징으로 지정한 것이었다. 이는 군단원들에게 강력한 결속력과 자부심을 부여했다.
마리우스는 병사들을 극한까지 훈련시켰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긴 행군을 반복했다. 병사들은 자신들을 '마리우스의 노새들'이라 불렀다. 하지만 이 혹독한 훈련은 효과가 있었다. 마리우스는 또한 병사들이 게르만 전사들의 거대한 체격과 사나운 외모에 익숙해지도록 했다. 킴브리족은 맹수의 입을 형상화한 투구와 화려한 갑옷을 착용했다. 그들의 전투 함성은 로마 병사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마리우스는 병사들에게 이런 광경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며 심리적 저항력을 키웠다.
한편 킴브리족은 이상하게도 로마를 즉시 침공하지 않았다. 그들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로 향했다. 거기서 그들은 로마군이 아닌 켈티베리아 부족 연합군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당했다. 테우토네스족은 갈리아에 머물며 약탈을 계속했다. 왜 그들이 방어가 허술한 이탈리아를 즉시 공격하지 않았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역사가 테오도르 몸젠은 그들의 전쟁 방식이 본질적으로 켈트족의 그것과 유사했다고 설명한다. 그들은 약탈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고, 때로는 협상을 통해 평화롭게 이동하려 했다. 어쩌면 그들은 여전히 평화적 정착지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귀중한 시간 동안 마리우스는 군대를 완성했다. 그리고 기원전 102년, 드디어 그 순간이 왔다. 테우토네스족과 암브로네스족이 이탈리아로 진군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리우스는 그의 군단을 이끌고 남부 갈리아의 악수아이 섹스티아이로 이동했다. 그는 적을 관찰할 수 있는 고지를 점령하고, 마르켈루스가 이끄는 5개 코호르스를 근처 숲에 매복시켰다.
게르만족은 로마군을 발견하고 즉시 공격했다. 그들은 수적 우위를 믿고 언덕을 돌격했다. 그러나 마리우스의 병사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훈련받은 대로 밀집 대형을 유지하며 필룸을 던졌다. 투창이 게르만 전사들의 방패에 박히자, 그들은 방패를 버리거나 무겁게 구부러진 투창 때문에 방패를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로마군은 글라디우스(단검)로 빈틈을 찌르며 적을 밀어냈다. 언덕을 오르며 지친 게르만 전사들은 조직적인 로마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바로 그 순간, 마르켈루스의 매복 부대가 게르만족의 후방을 공격했다. 협공에 놀란 테우토네스족과 암브로네스족은 대혼란에 빠졌다. 대형은 무너졌고, 그들은 도주하기 시작했다. 로마군은 무자비하게 추격했다. 수만 명의 게르만 전사가 학살당했다. 테우토네스족의 왕 테우토보드는 포로가 되어 로마의 쇠사슬에 묶였다. 게르만 여성들은 로마의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했다. 그들은 집단 자살을 감행했다. 일부 여성들은 자신의 아이들까지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킴브리족은 여전히 건재했다. 기원전 101년, 킴브리족은 마침내 알프스를 넘어 북부 이탈리아로 침입했다. 마리우스의 동료 집정관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는 알프스 고개를 방어하는 데 실패했다. 그는 포 강 너머로 후퇴했고, 비옥한 이탈리아 평야는 침략자들에게 개방되었다. 킴브리족은 이탈리아 북부를 약탈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것은 그들의 치명적 실수였다.
마리우스는 악수아이 섹스티아이에서 승리한 군단을 이끌고 증원군과 함께 도착했다. 킴브리족은 로마군을 보자 사절을 보냈다. "우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땅을 주신다면 로마군으로 복무하겠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진정한 목적이 정착이지 정복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마리우스는 협상을 거부했다. 대신 그는 포로로 잡힌 테우토보드 왕을 그들 앞에 데려왔다. 그제서야 킴브리족은 형제 부족인 테우토네스족이 전멸했다는 것을 알았다.
동맹군을 잃은 킴브리족의 왕 보이오릭스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마리우스에게 전투의 장소와 날짜를 정하라고 요구했다. 로마인들이 공정하게 싸울 의지가 있는지 시험한 것이다. 마리우스는 이 도전을 받아들였다. 기원전 101년 7월 30일, 세시아 강과 포 강의 합류점 근처 베르켈라이(현대의 베르첼리)의 라우딘 평원이 최후의 결전장으로 선택되었다.
마리우스와 카툴루스가 이끄는 로마군 10개 군단이 10만 명 이상의 보병과 기병으로 이루어진 킴브리족 대군단과 마주했다. 평원에서의 결전은 로마 기병대의 우월성을 입증할 기회였다. 전투가 시작되자 로마 기병은 킴브리족의 측면을 공격했다. 동시에 마리우스의 보병은 훈련된 규율로 전진하며 적을 압박했다. 킴브리족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조직화된 로마군의 전술적 유연성을 당해낼 수 없었다.
참패 속에서 킴브리족은 사실상 전멸했다. 보이오릭스 왕과 루기우스는 모두 전사했다. 로마군이 킴브리족의 진영으로 쇄도하자, 여성들은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다. 그들은 마차를 바리케이드로 삼고 무기를 들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도 압도되었다. 노예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수많은 여성들이 자신과 자녀들을 죽였다. 이렇게 거대한 이동으로 시작된 전쟁은 패배와 대규모 자살로 끝났다.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은 역사에서 거의 완전히 사라졌다.
베르켈라이의 승리로 킴브리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이 전쟁이 로마에 미친 영향은 막대했다. 무엇보다도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로마군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시민 민병대는 직업 군인으로 대체되었다. 이들은 더 이상 자신의 농장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급료와 전리품을 위해 싸웠다. 그들의 충성은 국가보다는 자신들에게 급료를 주고 승리를 선사하는 장군에게 향했다. 이것은 로마 공화정의 종말을 예고하는 변화였다.
마리우스 자신도 이 변화의 상징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었지만, 군사적 능력으로 최고의 권력에 올랐다. 그의 5년 연속 집정관 재임은 로마의 전통적 제도를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었다. 이것은 위험한 선례를 남겼다. 베르켈라이 전투 직후, 마리우스는 원로원의 허가 없이 이탈리아 동맹군 약 1천 명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 그는 "전투의 소음 속에서는 로마인과 동맹군의 목소리를 구별할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 이것은 명백한 권한 남용이었지만, 승리한 장군을 처벌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은 마리우스와 그의 부관 술라 사이에 갈등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술라는 킴브리 전쟁에서 마리우스 휘하에서 싸웠지만, 그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마리우스의 평민적 권력 상승을 경멸했다. 킴브리 전쟁이 끝난 후, 두 사람의 경쟁은 점점 격화되었고, 결국 로마 최초의 대규모 내전으로 폭발했다. 술라의 로마 진군, 마리우스의 망명과 귀환, 그리고 피의 숙청은 모두 킴브리 전쟁의 여파였다. 공화정의 제도들은 강력한 군벌들의 야망을 억제할 수 없었다.
킴브리 전쟁의 심리적 유산도 오래 지속되었다. 아라우시오의 악몽은 한 세대가 지나도 로마인들의 기억 속에 생생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58년 갈리아 원정을 시작했을 때, 그의 병사들은 게르만족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공포에 떨었다. 그들은 아라우시오를 떠올리며 게르만족의 거대한 체격과 강인한 힘, 험상궂은 외모에 대해 서로 이야기했다. 일부 병사들은 유언장을 작성하기까지 했다. 카이사르는 병사들을 달래느라 큰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직접 연설하여 사기를 회복해야 했다.
킴브리 전쟁은 로마에게 게르만족이라는 새로운 적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이후 로마의 역사는 게르만족과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킴브리 전쟁의 교훈을 잊지 않고 게르마니아 정벌을 시도했다. 그는 대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를 보내 게르만 부족들을 복속시키려 했다. 기원전 9년부터 시작된 게르마니아 전쟁에는 11개 군단이 투입되었다. 이것은 제2차 포에니 전쟁, 킴브리 전쟁, 갈리아 전쟁에 이은 네 번째로 거대한 규모의 병력 집결이었다.
그러나 서기 9년,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게르만족은 다시 한 번 로마를 충격에 빠뜨렸다.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게르만 연합군은 바루스의 3개 군단을 전멸시켰다. 로마인들은 이를 '클라데스 바리아나(바루스의 재앙)'라고 불렀다. 아우구스투스는 머리를 벽에 부딪치며 "바루스여, 나의 군단을 돌려다오!"라고 외쳤다고 한다. 킴브리 전쟁으로부터 110년이 지났지만, 게르만족은 여전히 로마의 악몽이었다.
결국 4세기 후반, 훈족의 압박을 받은 게르만 부족들의 대이동이 시작되었을 때, 서로마 제국은 붕괴했다. 그 의미에서 킴브리 전쟁은 단순한 하나의 전쟁이 아니라, 로마와 게르만족 간의 5세기에 걸친 투쟁의 서막이었다. 기원전 113년 유틀란트 반도를 떠난 킴브리족의 마차 행렬은, 결국 서기 476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의 폐위로 이어지는 긴 역사적 과정의 시작점이었다.
킴브리 전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첫째, 외부의 위협을 과소평가하는 오만은 치명적 결과를 낳는다. 로마는 노레이아에서 첫 패배를 당했을 때 경종을 울렸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게르만족을 단순한 야만족으로 치부하며 근본적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아라우시오였다.
둘째, 내부의 분열은 외부의 적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아라우시오의 재앙은 킴브리족의 전투력이 아니라 카이피오와 막시무스의 불화가 초래한 것이었다. 계급 간 갈등과 개인의 영광에 대한 욕망이 8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셋째, 위기는 혁신의 기회가 된다. 마리우스는 절망적 상황에서 로마 군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수 있었다. 만약 아라우시오의 재앙이 없었다면, 보수적인 원로원은 그의 급진적 개혁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위기는 기존의 제도와 관습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하게 만든다.
넷째, 제도적 혁신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는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로마를 당장의 위기에서 구했지만, 장기적으로는 공화정 체제를 붕괴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직업 군인들은 국가보다 자신들을 먹여 살리는 장군에게 충성했고, 이것은 군벌 시대의 도래를 예고했다.
다섯째, 협상과 외교는 때로 전쟁보다 현명한 선택이다.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은 처음부터 정복자가 아니라 난민이었다. 그들은 여러 차례 협상을 시도했고, 심지어 로마군으로 복무할 의사까지 표명했다. 만약 로마가 그들에게 변방의 땅을 제공하고 정착을 허용했다면, 1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외교적 유연성의 중요성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역사적 트라우마는 세대를 넘어 지속된다. 아라우시오의 공포는 한 세대가 지나도 로마 병사들의 마음속에 생생했다. 카이사르 시대의 병사들은 게르만족이라는 말만 들어도 떨었다. 집단적 트라우마는 쉽게 사라지지 않으며, 그것은 이후의 정책 결정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마니아 정벌 시도도, 그 이후 로마가 라인 강을 넘어 확장하지 않기로 한 결정도, 모두 킴브리 전쟁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킴브리 전쟁은 단순히 로마가 게르만 침략자들을 물리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한 제국이 생존의 위기 앞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변화시켰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어떻게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의 거울이다. 기원전 113년부터 101년까지 12년간의 투쟁은 로마 공화정의 전환점이었다. 킴브리 전쟁 이전의 로마와 이후의 로마는 근본적으로 다른 국가였다. 시민 민병대는 직업 군인으로, 귀족 중심의 정치는 군사 실력주의로, 안정된 공화정은 군벌들의 각축장으로 변모했다.
아라우시오에서 흘린 피는 베르켈라이에서 복수되었지만, 그 승리의 대가는 공화정의 종말이었다.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 카이사르의 독재, 그리고 결국 아우구스투스의 제정으로 이어지는 길은 킴브리 전쟁에서 시작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바로 여기에 있다. 로마를 구한 개혁이 동시에 로마 공화정을 파괴했던 것이다.
그리고 론 강변에서, 악수아이 섹스티아이에서, 베르켈라이 평원에서 쓰러진 수십만 명의 시체는 한 가지 진실을 증언한다. 역사는 종종 작은 결정들의 연쇄로 이루어지지만, 그 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유틀란트 반도에서 홍수를 피해 남하하기로 한 킴브리족의 결정이, 귀족과 평민 출신 집정관의 불화가,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이, 모두 합쳐져 로마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킴브리 전쟁은 끝났지만, 그것이 촉발한 변화는 수세기 동안 계속되었고, 결국 서로마 제국의 멸망이라는 최종 결말에 이르렀다.
오늘날 베르첼리의 들판을 걷는 여행자는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지웠다. 하지만 그 땅 아래 어딘가에는 여전히 로마 군단병의 검과 킴브리족 전사의 투구가 묻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침묵 속에서 증언한다. 제국의 영광과 몰락, 개혁과 혁명, 승리와 파멸이 얼마나 가까이 붙어 있는지를. 킴브리 전쟁은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여준 거대한 역사의 드라마였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B2%A0%EB%A5%B4%EC%BC%88%EB%9D%BC%EC%9D%B4_%EC%A0%84%ED%88%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