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3년 여름, 매튜 페리가 이끄는 미국 흑선 함대가 에도만에 나타났을 때, 일본은 200년 넘게 유지해온 평화로운 고립을 끝내야 했다. 대포를 갖춘 증기선 앞에서 도쿠가와 막부는 무력했다. 개항을 강요당한 굴욕은 일본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다. 사무라이들은 분노했고, 지식인들은 공포에 떨었다. 서양 열강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한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운명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이 위기의식이 일본을 변화시켰다. "부국강병"은 생존의 문제였고, 강해지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절박함이 일본 근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은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문명의 대전환이었다. 15세 소년 천황을 내세운 신정부는 봉건제를 해체하고 중앙집권 국가를 건설했다. 사무라이 계급이 폐지되었고, 신분제가 무너졌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무라이들이 생계 수단을 잃었다. 1877년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끈 사쓰마의 난은 구시대에 대한 마지막 저항이었지만, 근대식 군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정부는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탐욕스럽게 받아들였다. 독일에서 군사제도를, 프랑스에서 법률을, 영국에서 해군을, 미국에서 교육제도를 배웠다. 하지만 이 근대화는 처음부터 위험한 씨앗을 품고 있었다. 천황을 신격화하고, 군대를 천황 직속으로 두며, "만세일계"의 신화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만드는 작업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근대화는 곧 군국주의와 동의어가 되어갔다.
1880년대가 되자 일본은 눈을 밖으로 돌렸다. 조선반도는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는 "생명선"으로 여겨졌다. 1875년 운양호 사건으로 조선에 개항을 강요한 일본은, 조선에서 청나라와 충돌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군은 청군을 압도했다. 뤼순과 웨이하이웨이에서 벌어진 학살은 일본군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전조였다. 승리의 대가는 컸다.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타이완을 손에 넣었고, 막대한 배상금을 받았다. 하지만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간섭으로 랴오둥 반도를 돌려주어야 했다. 이 굴욕은 일본인들에게 깊은 원한을 남겼다. "와신상담"이라는 말이 유행했고, 배상금의 상당 부분은 군비 증강에 쏟아부어졌다. 타이완에서는 가혹한 식민통치가 시작되었다. 저항하는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토지를 빼앗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했다. 일본의 식민지배는 착취와 억압으로 점철되었다.
러시아에 대한 복수는 10년 뒤에 찾아왔다. 1904년 러일전쟁은 일본의 운명을 결정짓는 도박이었다. 전쟁 비용은 국가 재정의 몇 배에 달했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장으로 끌려갔다. 하지만 뤼순 공방전에서의 승리와 쓰시마 해전에서의 압도적 승리는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아시아 국가가 유럽 강대국을 물리친 최초의 사례였다. 포츠머스 조약으로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고, 남사할린과 관동주 조차권을 얻었다. 이 승리는 일본인들에게 위험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우월한 민족"이며, 아시아를 "지도"해야 한다고 믿기 시작했다. 승리의 도취감 속에서, 일본은 타국의 고통에 무감각해졌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5년 뒤 한국을 완전히 병합했다. 저항하는 이들은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헌병경찰 제도를 도입해 공포정치를 펼쳤다. 한국인들은 집회와 언론의 자유를 빼앗겼고, 일본 경찰은 태형을 남용했다. 토지조사사업이라는 명분으로 농민들의 땅을 약탈했다. 소유권을 증명하지 못한 토지는 모두 조선총독부 소유가 되었고, 일본 지주들에게 헐값에 넘어갔다. 수백만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많은 이들이 만주로, 일본으로 떠나야 했다. 1910년대는 "무단통치"의 시대였다. 조선인 교사들도 칼을 차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는 체계적으로 말살되었다. 일본은 한국인들을 열등한 민족으로 규정하고, "내선일체"라는 허울 좋은 구호 아래 동화정책을 강요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일본에게 기회였다. 유럽 열강이 전쟁에 몰두하는 동안, 일본은 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독일의 산둥 반도 조차지와 남태평양 제도를 점령했다. 1915년 위안스카이 정부에 강요한 "21개조 요구"는 일본의 야욕을 드러냈다. 중국을 사실상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이 요구는 중국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19년 5·4 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중국 민중의 분노가 폭발한 사건이었다. 같은 해 한국에서는 3·1 운동이 일어났다. 200만 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본의 대응은 잔혹했다. 수원 제암리에서는 교회에 주민들을 가둔 채 불을 질렀다. 전국에서 7천 명 이상이 살해되고, 수만 명이 투옥되었다. 국제사회의 비난에 직면한 일본은 통치 방식을 "문화통치"로 바꾸었다고 선전했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경찰력은 오히려 증강되었고, 감시는 더욱 치밀해졌다.
1920년대 일본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꽃피었다. 보통선거법이 통과되고, 정당 정치가 발전했으며, 문화가 다양해졌다. 하지만 이 자유의 시기는 짧았고 취약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은 도쿄와 요코하마를 폐허로 만들었다. 혼란 속에서 재일 조선인 학살이 벌어졌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가 퍼지자, 자경단과 경찰이 조선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6천 명 이상이 살해되었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은폐하고 책임자를 처벌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일본 사회에 뿌리 깊은 민족 차별과 폭력성을 드러냈다. 1927년 금융공황과 1929년 세계 대공황은 일본 경제를 강타했다. 농촌은 파탄났고, 실업자가 넘쳐났으며, 사회 불안이 커졌다. 군부는 이 위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그들은 "부패한 정당정치"를 비난하며, 만주 침략만이 일본을 구할 수 있다고 선동했다.
1931년 9월 18일 밤, 관동군은 류탸오호에서 철도를 폭파하고 중국군의 소행이라 위장했다. 이 자작극을 명분으로 관동군은 만주 전역을 점령했다. 도쿄 정부는 군부를 통제하지 못했다. 오히려 언론은 만주 침략을 "국권 확장"이라 찬양했고, 국민들은 열광했다. 1932년 괴뢰국 만주국이 세워졌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내세웠지만, 실권은 모두 일본군이 쥐고 있었다. 만주는 일본의 자원 공급지이자 이민 식민지로 변했다. 중국인들의 토지를 강제로 수용해 일본인 이민자들에게 나눠주었다. 저항하는 중국인들은 "비적"으로 몰려 토벌되었다. 731부대는 하얼빈 근처에 세워져 생체실험을 자행했다. 중국인, 조선인, 러시아인 포로들을 "마루타"라 부르며 인간 이하로 취급했다. 페스트균, 탄저균, 콜레라균을 감염시키고, 생체 해부를 하고, 동상 실험을 했다. 최소 3천 명이 이곳에서 참혹하게 죽었다. 전쟁이 끝난 뒤 731부대의 데이터는 미국에 넘어갔고, 책임자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국제연맹이 만주 침략을 규탄하자, 일본은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고립은 더욱 심해졌다. 군부의 영향력은 날로 커졌고, 반대하는 목소리는 "국적"으로 몰려 탄압받았다. 1932년 5·15 사건에서 해군 장교들이 이누카이 수상을 암살했다. 1936년 2·26 사건에서는 육군 청년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재무대신과 내대신을 살해했다. 비록 진압되었지만, 이후 정치는 군부의 그림자 아래 놓였다. 정당 정치는 사실상 끝났다. 군부와 협력하지 않는 정치인은 "비국민"이었다. 언론은 검열되었고, 출판물은 통제되었으며, 사상범들은 특고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천황제 파시즘 체제가 확립되었다. "천황 폐하를 위해", "대동아공영을 위해"라는 구호가 모든 것을 정당화했다.
1937년 7월 7일 베이징 근처 루거우차오에서 일본군과 중국군이 충돌했다. 이 사건은 전면적인 중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일본군은 상하이를 점령한 뒤 수도 난징으로 진격했다. 1937년 12월, 난징에서 일본군은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만행 중 하나를 저질렀다. 6주 동안 최소 20만 명, 많게는 30만 명의 중국인이 학살되었다.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 여성, 어린이, 노인 할 것 없이 무차별로 살해되었다. 수만 명의 여성이 강간당했고, 많은 이들이 강간 후 살해되었다.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어린아이를 총검으로 찔러 죽이고, 사람들을 생매장하고 불태웠다. 살인 경쟁도 벌어졌다. 일본 신문은 "백 명 목 베기 경쟁"을 자랑스럽게 보도했다. 이 학살은 조직적이고 의도적이었다. 상급 지휘관들은 묵인했고, 일부는 장려하기까지 했다. 난징대학살은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중국 전선은 예상과 달리 장기전이 되었다. 중국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2차 국공합작으로 일본에 맞섰다. 일본군은 주요 도시와 철도를 장악했지만, 광활한 농촌 지역은 통제할 수 없었다. 게릴라전에 시달린 일본군은 "삼광작전"으로 대응했다. "모두 죽이고, 모두 불태우고, 모두 약탈한다"는 이 작전은 수많은 마을을 폐허로 만들었다. 중국인에 대한 비인간화가 극에 달했다. 일본군은 중국인을 "청카"라 불렀고, 인간 이하로 취급했다. 포로를 총검술 연습 대상으로 삼았고, 민간인 학살을 일상적으로 자행했다. 1940년까지 중국에서만 수백만 명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자원 부족은 심각해졌다. 특히 석유가 문제였다. 미국은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1941년 석유 수출을 전면 금지했다. 영국과 네덜란드도 동참했다. 일본 지도자들은 기로에 섰다. 중국에서 철수하거나, 동남아시아를 침략해 자원을 확보하거나. 그들은 "영광스러운 죽음"을 택했다. 1940년 일본은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맺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진군했다. 전쟁은 불가피했다. 1941년 10월, 도조 히데키가 총리가 되면서 전쟁 준비는 가속화되었다. 평화 협상은 기만이었다. 일본은 이미 전쟁을 결정한 상태였다.
1941년 12월 7일 새벽, 일본 해군 항공대가 진주만을 기습했다. 2,400명의 미국인이 사망했고, 전함 여러 척이 침몰했다. 전술적으로는 성공이었지만, 전략적으로는 자살 행위였다. 일본은 세계 최강의 산업 국가를 적으로 만들었다. 미국 국민은 분노했고, 루스벨트는 "치욕의 날"이라 선언했다. 일본군은 동남아시아를 휩쓸었다.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버마가 잇따라 함락되었다. "대동아공영권"을 선전했지만, 실상은 가혹한 군사 점령이었다. 싱가포르에서는 중국계 주민 수만 명을 학살했다. 말레이시아와 필리핀에서는 저항 세력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수백만 명을 강제 노동에 동원했다. 태국-버마 철도 건설에는 연합군 포로와 현지인 수십만 명이 강제 동원되었고, 그 중 10만 명 이상이 굶주림, 질병, 학대로 죽었다. "죽음의 철도"였다.
한반도와 타이완, 만주에서는 전시 수탈이 강화되었다. 1938년부터 국가총동원법이 적용되어 모든 자원과 인력이 전쟁에 동원되었다. 쌀과 곡물을 강제 공출했고, 금속이라는 금속은 모두 징발했다. 1939년부터는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한국인들에게 일본식 이름을 갖게 해 정체성을 말살하려 했다. 거부하는 이들은 취업과 배급에서 차별받았다. 1943년부터는 징병제가 실시되어 조선 청년들을 전쟁터로 끌고 갔다. 더 끔찍한 것은 군 위안부 제도였다. 수십만 명의 조선, 중국, 대만, 동남아시아 여성들이 속임수와 강제로 끌려가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었다.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동원된 소녀들은 끔찍한 고통을 당했다. 하루에 수십 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고, 탈출하면 살해되었으며, 임신하면 강제 낙태를 당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수치심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평생을 살아야 했다. 일본 정부는 오랫동안 이 범죄를 부인했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주력 항공모함 4척을 잃으며 결정적 패배를 당했다. 전쟁의 흐름이 바뀌었다. 미국의 압도적인 산업력 앞에서 일본은 무력했다. 과달카날, 타라와, 사이판으로 이어지는 전투에서 일본군은 완강히 저항했지만, 패배는 거듭되었다. 군국주의 교육을 받은 병사들은 항복을 수치로 여겼다. "살아서 포로의 치욕을 받지 말라"는 전진훈이 세뇌되어 있었다. 사이판이 함락되자 민간인들까지 집단 자살했다. 절벽에서 뛰어내린 수천 명의 시신이 바다를 뒤덮었다. 이오지마 전투에서 일본군 2만 명 중 생존자는 200명뿐이었다. 오키나와 전투는 더욱 참혹했다. 일본군 10만 명이 죽었고, 민간인 10만 명이 전투에 휘말려 죽거나 자살했다.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을 방패막이로 썼고, "집단 자결"을 강요했다. 가족끼리 서로를 죽이는 비극이 벌어졌다.
1944년부터 가미카제 특공 작전이 시작되었다. 폭탄을 실은 항공기로 적함에 돌진하는 자살 공격이었다. 군국주의 교육은 청년들을 기꺼이 죽음으로 내몰았다. "천황 폐하를 위해",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라 세뇌되었다. 3천 명 이상의 조종사가 특공으로 죽었고, 그들 중 다수는 학도병이었다. 인간 어뢰 "가이텐", 인간 폭탄 "후쿠류"도 개발되었다. 인명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광기였다. 본토에서는 B-29 폭격기들의 공습이 계속되었다. 도쿄, 오사카, 나고야, 고베 등 주요 도시들이 불바다가 되었다. 1945년 3월 9일 밤, 도쿄 대공습에서는 10만 명 이상이 불에 타 죽었다. 소이탄이 목조 가옥들을 삼켰고, 사람들은 불길에 갇혀 죽거나 강물로 뛰어들어 익사했다. 전국에서 60만 명 이상이 공습으로 사망했다.
본토에서 민간인들의 삶은 지옥이었다. 식량 배급은 턱없이 부족했고, 많은 이들이 굶주렸다. 남자들은 모두 전쟁터로 끌려가고, 여성과 노인, 어린이들만 남았다. 학생들은 공장과 농장에 동원되었다. "근로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노동에 혹사당했다. 공습 때마다 방공호로 대피해야 했고, 매일이 공포였다. 하지만 군부는 "본토 결전"을 외쳤다. 국민들에게 죽창을 들고 상륙하는 적과 싸우라고 선동했다. "일억 총옥쇄"를 부르짖었다. 모든 국민이 죽을 각오로 싸우라는 것이었다. 광기가 일본 열도를 지배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 상공에서 원자폭탄이 폭발했다. 도시는 순식간에 증발했다. 7만 명이 즉사했고, 연말까지 14만 명이 죽었다. 방사능 피해는 수십 년간 계속되었다. 3일 뒤 나가사키에도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7만 명이 더 죽었다. 그 사이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진격했다. 관동군은 무너졌다. 만주에 남겨진 일본인 민간인들은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 일본군은 그들을 버리고 도망쳤다.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천황이 라디오 방송으로 항복을 선언했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으라"는 천황의 음성에 많은 이들이 무너져 내렸다. 군인들 중 일부는 자결했다. "신국 일본"의 불패 신화는 산산조각 났다.
패전 후 일본이 마주한 현실은 처참했다. 주요 도시 60개가 폐허였고, 900만 명이 집을 잃었다. 해외에서 돌아온 600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난민이 되었다. 경제는 붕괴했고, 인플레이션이 치솟았으며, 암시장이 판쳤다. 식량 부족으로 수백만 명이 굶주렸다. 310만 명의 일본인이 전쟁에서 죽었다. 하지만 일본이 아시아에 가한 피해는 비교할 수 없이 컸다. 중국에서만 1,500만 명에서 2,000만 명이 사망했다. 한국, 동남아시아, 태평양 지역까지 합치면 수천만 명이 일본의 침략으로 목숨을 잃었다. 강제 노동, 학살, 생체 실험, 성노예, 약탈로 인한 피해는 헤아릴 수 없었다.
1945년부터 1952년까지 연합군의 점령 아래 일본은 재건되었다. 전범 재판이 열렸지만, 천황은 소추되지 않았다. 미국은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을 동맹으로 만들기로 했다. 731부대의 전범들은 데이터를 미국에 넘기고 처벌을 면했다. 많은 전범들이 전후 일본 정치와 경제의 지도자가 되었다. 기시 노부스케는 전범 용의자였다가 풀려나 총리가 되었다. 과거 청산은 불완전했고, 피해국들과의 관계는 계속 갈등을 빚었다. 일본 우익은 침략을 "아시아 해방"이라 미화했고, 전쟁 책임을 부정했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A급 전범들이 합사되었고, 일본 정치인들의 참배는 이웃 국가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일본제국의 역사는 근대화의 성공과 제국주의의 광기, 그리고 파멸이라는 세 막으로 이루어진 비극이었다. 서양 열강의 위협에서 시작된 변혁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불과 반세기 만에 봉건국가에서 산업국가로, 아시아의 약소국에서 세계 열강의 반열로 올라섰다. 하지만 그 성공은 처음부터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힘에 대한 숭배, 군국주의, 천황 신격화, 민족적 우월의식이 일본 근대화의 이면이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는 일본에게 위험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서양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착각, 아시아를 지도해야 한다는 오만함이 팽창주의를 정당화했다. 한국 병합, 중국 침략, 동남아시아 점령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일본은 스스로 증오하던 서양 제국주의의 가장 잔혹한 모습을 재현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그들보다 더 악랄했다. 난징대학살, 731부대의 생체실험, 위안부 제도, 강제 노동, 삼광작전은 인간성의 최저점을 보여주는 범죄들이었다.
1930년대 일본이 파시즘으로 치달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메이지 유신 이래 구축된 천황제 군국주의 체제는 이미 그 씨앗을 품고 있었다. 군부의 정치 개입, 의회에 대한 군부의 우위, 천황의 신성불가침성, 국가신도의 이데올로기화는 모두 파시즘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 경제 위기와 사회 불안은 이 경향을 가속화했고, 만주 침략은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의 길로 접어드는 출발점이었다. 국제 사회로부터 고립되면서도 일본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영미의 포위망"에 맞서 싸운다는 피해의식으로 더욱 공격적이 되었다.
중일전쟁의 장기화는 일본을 수렁으로 끌고 갔다. 광대한 중국 대륙에서 일본군은 승리할 수 없었다. 주요 도시를 점령해도 농촌을 통제할 수 없었고, 정규군을 격파해도 게릴라는 사라지지 않았다. 좌절한 일본군은 더욱 잔혹해졌다. 민간인과 군인의 구별을 포기하고, 무차별 학살과 약탈로 공포를 조성하려 했다. 하지만 이는 중국인들의 저항을 더욱 강화시켰을 뿐이었다. 자원과 인력을 중국 전선에 계속 쏟아부으면서도, 일본 지도자들은 전쟁을 끝낼 수 없었다. 멈추는 것은 곧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군부의 권위와 체제 전체를 무너뜨릴 터였다. 그래서 그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동남아시아로, 태평양으로, 파멸을 향해.
진주만 공격은 전략적 자살이었다. 일본 지도자들은 속전속결로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욕망을 현실로 착각한 것이었다. 미국의 산업력, 자원, 인구는 일본과 비교할 수 없었다. 일본이 항공모함 한 척을 건조하는 동안, 미국은 열 척을 만들었다. 일본이 전투기 백 대를 생산하는 동안, 미국은 천 대를 만들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격차는 벌어졌다. 하지만 일본 군부는 "정신력"이 물질을 이긴다고 주장했다. 병사들에게 대나무 창을 들고 탱크와 맞서라고 했고, 민간인들에게 폭탄을 안고 적 탱크에 뛰어들라고 선동했다. 광기는 이성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패배가 명백해진 뒤에도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다. 1945년 여름, 도시들이 폐허가 되고 수십만 명이 공습으로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군부는 "본토 결전"을 외쳤다. 그들은 국민 전체를 길동무로 삼아 "영광스럽게" 죽으려 했다. 원자폭탄과 소련의 참전이 아니었다면, 일본은 더 많은 희생을 치르며 저항했을 것이다. 천황의 항복 선언 후에도 일부 장교들은 쿠데타를 시도했다. 그들에게 국민의 생명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국체 호지", 즉 천황제와 군부의 권위를 지키는 것만이 중요했다.
전후 일본의 부흥은 놀라웠다. 폐허에서 일어나 경제 대국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정착시켰으며, 평화헌법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과거에 대한 청산은 불완전했다. 전범들 중 상당수가 처벌을 면했고, 많은 이들이 전후 일본 사회의 지도층이 되었다. 침략 전쟁을 미화하는 역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했고, 정치인들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며 피해국들의 상처를 덧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어 증언했을 때, 일부 일본인들은 그들을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였다. 난징대학살을 부정하는 책들이 출판되었고, 731부대의 만행은 오랫동안 은폐되었다.
이러한 역사 부정은 단순히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희생자들에 대한 모욕이며, 역사로부터 배우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같은 잘못을 반복할 위험을 키우는 것이다. 일본제국이 저지른 범죄들은 철저히 기록되고 교육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일본은 진정으로 과거와 단절하고, 이웃 국가들과 진실한 화해를 이룰 수 있다. 그래야만 동아시아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
일본제국의 흥망은 우리에게 여러 교훈을 남긴다.
첫째, 힘만으로는 지속 가능한 질서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은 군사력으로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지만, 그것은 억압과 착취에 기반한 것이었기에 결국 무너졌다.
둘째, 민족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으면 파괴적이 된다는 것이다.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구호는 아시아인들을 해방시킨 것이 아니라 더 큰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셋째, 군부의 정치 개입을 막고 민주적 통제를 확립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일본에서 군부가 정치를 장악하면서 모든 합리적 제동 장치가 무너졌고, 국가는 파멸로 치달았다.
넷째, 전쟁의 참상과 인간성 상실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보여준다. 난징대학살, 위안부 제도, 생체실험은 문명국이라 자처하던 일본이 저지른 야만이었다. 전쟁은 사람들을 괴물로 만들고, 평범한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잔혹함을 실행하게 만든다.
다섯째, 역사를 직시하고 책임을 인정하는 것의 중요성이다. 독일이 나치의 범죄를 철저히 반성하고 피해국들과 화해한 것과 달리, 일본의 불완전한 과거 청산은 오늘날까지도 동아시아 국가 간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77년간의 일본제국사는 한 국가가 어떻게 근대화에 성공하고,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서고, 파시즘에 빠지고, 결국 자멸하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의 개혁가들은 일본을 강하게 만들어 서양의 침략으로부터 지키려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일본은 자신이 증오하던 제국주의의 가해자가 되었고, 더 나아가 그것보다 더 잔혹한 파시스트 침략국이 되었다. 힘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인간성을 잃었고, 영광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수치스러운 범죄를 저질렀으며, 생존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멸의 길로 들어섰다.
오늘날 우리가 일본제국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과거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국가주의가 극단으로 치닫는 위험, 군국주의의 파괴성, 타민족에 대한 멸시와 비인간화가 낳는 범죄, 과거를 부정하고 미화하는 것의 해악을 기억해야 한다. 일본제국은 강대국이 되었지만 존경받지 못했고,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지만 사랑받지 못했으며, 군사적으로 강했지만 도덕적으로 파산했다. 진정한 국가의 위대함은 군사력이나 영토가 아니라, 정의와 인권, 평화에 대한 헌신에서 나온다는 것을 일본제국의 몰락은 웅변한다.
역사는 단순히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거울이다. 일본제국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정의를 향한 외침, 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배상 요구,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는 모두 그 역사의 연장선에 있다. 진정한 화해와 평화는 과거를 정직하게 마주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의 고통에 공감할 때만 가능하다. 일본제국의 흥망사는 힘의 추구가 어떻게 파멸로 이어지는지를, 그리고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교훈으로 남아 있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C%9D%BC%EB%B3%B8%20%EC%A0%9C%EA%B5%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