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말, 에도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였다.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도쿠가와 막부의 평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1603년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리로 권력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엄격한 신분제와 참근교대제를 통해 다이묘들을 통제했고, 쇄국 정책으로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극도로 제한했다. 나가사키의 데지마에서만 네덜란드와 중국 상인들이 제한적 무역을 할 수 있었다. 이 체제는 놀라울 만큼 안정적이었다. 250년간 일본은 큰 전쟁 없이 독특한 도시 문화와 상업 경제를 발전시켰다. 우키요에가 번성했고, 가부키가 대중을 사로잡았으며, 상인 계급은 경제력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이 평화의 이면에는 구조적 균열이 자라나고 있었다. 막부의 재정은 점차 악화되었다. 무사 계급은 쌀로 녹봉을 받았지만,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많은 무사들이 빚에 허덕였다. 특히 하급 무사들의 불만은 컸다. 동시에 상인들은 경제력을 가졌지만 신분제 최하층에 묶여 있었고, 농민들은 반복되는 흉작과 세금 부담에 시달렸다. 18세기 중반부터 백성들의 봉기는 점차 증가했다. 막부는 여러 차례 개혁을 시도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이러한 내적 모순이 쌓여가던 시기에, 외부로부터 결정적 충격이 찾아왔다.
그 충격은 세계사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9세기 중반, 서양 열강은 산업혁명의 힘으로 전 세계를 재편하고 있었다. 영국은 아편전쟁(1840-1842)으로 청나라를 굴복시켰고, 남경조약을 통해 홍콩을 할양받고 다섯 개 항구를 개방시켰다. 이 소식은 나가사키를 통해 일본에도 전해졌다. 수천 년간 동아시아 세계의 중심이었던 청나라가 서양의 함포 앞에 무너진 것이다. 미국은 캘리포니아를 획득한 후 태평양 진출에 박차를 가했고, 포경선의 기항지와 석탄 보급지가 필요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동진하며 극동에서의 영향력을 키우고 있었다. 일본은 더 이상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을 수 없었다.
1853년 7월 8일, 매튜 페리의 흑선 네 척이 우라가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에도는 공황에 빠졌다. 증기선은 일본인들이 본 적 없는 괴물 같았다. 연기를 뿜으며 바람 없이도 움직이는 검은 함선들은 단순한 기술의 차이를 넘어 문명의 격차를 상징했다. 페리는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답변을 받기 위해 이듬해 다시 돌아오겠다고 선언한 뒤 떠났다. 막부는 극도로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했다. 220년간 지켜온 쇄국 정책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전쟁을 각오하고 거부할 것인가? 막부는 전례 없는 결정을 내렸다. 다이묘들에게 의견을 물은 것이다. 이것은 막부의 권위가 약화되었음을 드러내는 신호였다.
1854년 페리가 더 많은 함선을 이끌고 돌아왔을 때, 막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가네가와 조약(미일화친조약)이 체결되었다. 시모다와 하코다테 두 항구가 개방되고, 미국에게 최혜국 대우가 부여되었다. 곧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도 유사한 조약을 맺었다. 1858년에는 더욱 굴욕적인 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관세 자주권을 포기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막부의 대로 이이 나오스케가 이 조약을 천황의 칙허 없이 강행했다는 점이었다. 교토의 고메이 천황은 외국과의 조약에 강력히 반대했다. 천황의 뜻을 무시한 막부의 행동은 일본 정치 질서의 근간을 흔들었다.
바로 이 시점에 존왕양이라는 이념이 폭발적으로 부상했다. 그런데 이 사상의 뿌리는 훨씬 깊은 곳에 있었다. 에도 시대 중기, 국학이라는 학문 조류가 발전했다. 가모노 마부치, 모토오리 노리나가 같은 학자들은 중국 유교의 영향을 받기 이전 순수한 일본 정신을 찾고자 했다. 그들은 『고사기』와 『만요슈』를 연구하며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신성한 기원을 강조했다. 동시에 미토번에서는 수호학(水戸学)이 발달했다. 2대 번주 도쿠가와 미츠쿠니가 시작한 『대일본사』 편찬 사업은 천황의 역사적 정통성을 재조명했다. 이 두 흐름은 에도 시대 내내 학문적 논의에 머물러 있었지만, 서양 열강의 위협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강력한 정치적 무기로 변모했다.
"존왕양이" 네 글자는 단순하지만 폭발적인 호소력을 가졌다. 천황을 존경하라는 것은 곧 천황의 뜻을 무시한 막부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오랑캐를 쫓아내라는 것은 굴욕적인 조약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 슬로건 아래 다양한 세력이 결집했다. 서남부의 외양 번(外様藩)들, 특히 조슈, 사쓰마, 도사, 히젠번은 막부에 대한 오랜 불만이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의 적이었던 이들은 250년간 변방에 머물며 중앙 정치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하급 무사들은 경직된 신분제 속에서 출세의 기회를 찾지 못했다. 상인과 농민들은 경제적 불만을 품고 있었다. 존왕양이는 이 모든 불만을 하나로 묶어내는 이념적 구심점이 되었다.
이이 나오스케는 이러한 움직임을 강경하게 진압하려 했다. 1858년부터 1859년까지 안세이 대옥(安政の大獄)이라 불리는 대규모 탄압이 진행되었다. 조약 체결을 비판한 다이묘들이 처벌받았고, 존왕양이파 지사들이 투옥되거나 처형당했다. 요시다 쇼인도 이때 처형되었다. 쇼슈번의 하급 무사였던 요시다는 쇼카손주쿠라는 사숙에서 젊은이들을 가르쳤는데, 그의 제자들 중에는 훗날 메이지 유신을 이끌 다카스기 신사쿠,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있었다. 요시다의 처형은 그를 순교자로 만들었고, 그의 사상은 더욱 강력하게 퍼져나갔다.
1860년 3월 3일 아침, 눈이 내리는 에도에서 역사의 흐름이 바뀌었다. 사쿠라다몬 외의 변이었다. 미토번과 사쓰마번 출신 낭인 18명이 이이 나오스케의 행렬을 습격했다. 눈 때문에 경호가 허술해진 틈을 타 그들은 막부의 실권자를 암살했다. 이것은 존왕양이파의 첫 승리였고, 막부 권위의 붕괴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이후 "천주(天誅)", 즉 하늘의 응징이라는 이름으로 막부 관리들과 개국파 인사들에 대한 암살이 이어졌다. 교토는 정치 테러의 무대가 되었다. 한편 막부는 권위 회복을 위해 고부합체(公武合体) 정책을 추진했다. 쇼군과 천황가의 혼인 동맹을 통해 조정과의 관계를 개선하려 한 것이다. 1862년,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고메이 천황의 여동생 가즈노미야의 혼인이 성사되었지만, 이미 정치 상황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조슈번은 존왕양이 운동의 최전선에 섰다. 조슈의 젊은 무사들은 교토에서 조정을 압박하며 영향력을 키웠다. 1863년 초, 그들은 천황으로부터 양이 실행 명령을 얻어냈다. 같은 해 5월, 조슈번은 실제로 시모노세키 해협을 지나는 서양 선박에 대한 포격을 시작했다. 미국 상선 펨브로크호를 시작으로 프랑스, 네덜란드 군함을 차례로 공격했다. 이것은 양이 사상의 실천이었지만, 동시에 무모한 도전이기도 했다. 서양 함선들은 즉각 보복했고, 조슈의 포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한편 교토에서는 정치적 격변이 계속되었다. 1863년 8월, 사쓰마번과 아이즈번이 연합하여 조슈 세력을 교토에서 축출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8월 18일의 정변이었다. 권력을 잃은 조슈 강경파는 다음 해 여름, 무력으로 교토를 되찾으려 했다. 1864년 7월 19일, 그들은 천황이 계신 궁궐을 향해 진격했다. 금문의 변(禁門の変)이었다. 하지만 막부군과 아이즈번, 사쓰마번 연합군에게 패배했고, 교토 시가지는 화염에 휩싸였다. 조슈는 이제 조정의 적, 즉 조적(朝敵)이 되었다. 존왕을 외치던 번이 역설적으로 조정의 적이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해 8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의 연합함대 17척이 시모노세키를 공격했다. 최신 함포의 위력은 압도적이었다. 조슈의 포대는 단 이틀 만에 완전히 파괴되었고, 외국 군대가 상륙하여 포대를 점거했다. 조슈는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이 두 번의 패배는 조슈번에게 뼈아픈 교훈을 주었다. 단순한 양이 사상만으로는 서양의 군사력을 막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천황의 이름을 앞세우는 것만으로는 정치적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슈는 근본적 변화를 선택했다.
다카스기 신사쿠는 1863년 기헤이대(奇兵隊)를 창설했다. 이것은 혁명적 군대였다. 전통적으로 무사만이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기헤이대는 농민, 상인, 심지어 천민까지 받아들였다. 능력과 의지만 있으면 신분을 불문했다. 이들은 서양식 소총과 전술로 무장했다. 조슈번은 사쓰마번과 마찬가지로 서양의 군사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양이를 외치면서도 서양의 무기와 전술을 배우는 이 역설적 상황은, 그들의 진정한 목표가 단순한 배외주의가 아니라 일본의 독립과 강화였음을 보여준다. 기도 다카요시는 번 정부를 개혁하여 능력 위주의 인사를 단행했다. 이러한 개혁은 조슈를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근대적 번으로 탈바꿈시켰다.
1864년 말, 막부는 조슈 정벌을 명령했다. 제1차 조슈 정벌이었다. 전국의 다이묘들이 동원되었고, 15만에 이르는 대군이 조슈를 포위했다. 하지만 조슈 내부에서 보수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막부에 항복하면서 전쟁은 피했다. 그러나 1865년, 다카스기 신사쿠를 중심으로 한 개혁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되찾았다. 개혁된 조슈는 막부의 두 번째 정벌에 맞설 준비를 했다. 1866년 여름, 막부가 다시 대군을 일으켰을 때, 조슈군은 예상을 깨고 승리를 거두었다. 서양식 무기와 전술, 그리고 신분을 초월한 새로운 군대 편성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250년간 군사적으로 도전받지 않았던 막부가 한 번의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 승리의 배경에는 사쓰마번과의 비밀 동맹이 있었다. 사쓰마는 원래 막부 편에서 조슈를 공격했던 번이었다. 하지만 사쓰마의 지도자들도 막부의 무능과 서양 열강의 위협을 절감하고 있었다. 사쓰마는 1863년 나마무기 사건(영국인을 살해한 사건)의 보복으로 1863년 가고시마를 영국 함대에게 포격당한 경험이 있었다. 시모노세키처럼 서양 군사력의 우위를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 경험 이후 사쓰마는 영국과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 같은 사쓰마의 지도자들은 일본의 미래를 위해서는 막부 체제를 넘어서야 한다고 판단했다.
1866년 1월, 교토의 한 여관에서 역사적 회담이 열렸다. 도사번 출신의 낭인 사카모토 료마가 중재하여 사쓰마와 조슈의 대표들이 만난 것이다.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 조슈의 기도 다카요시와 이토 히로부미가 참석했다. 그들은 비밀 동맹을 맺었다. 서로 군사적으로 지원하고, 궁극적으로는 막부를 타도하여 천황 중심의 새로운 정부를 수립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쓰조 동맹(薩長同盟)은 일본 역사의 흐름을 결정지었다. 가장 강력한 두 번이 연합하자, 막부의 운명은 사실상 결정되었다.
1867년은 급변의 해였다. 1월에 고메이 천황이 35세의 나이로 급서했다. 사인은 천연두로 알려졌지만,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고메이는 양이를 강력히 주장했지만, 정치적 혼란을 원하지는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의 아들 무쓰히토가 불과 15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훗날 메이지 천황으로 불리게 될 그는 아직 정치적 경험이 전혀 없었다. 이것은 개혁파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젊은 천황은 자신만의 정치적 기반이 없었고, 측근 공경들과 사쓰조 세력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11월 15일,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역사적 결정을 내렸다. 대정봉환(大政奉還)이었다. 도사번의 야마우치 요도가 제안한 것으로, 쇼군이 정권을 천황에게 돌려주는 것이었다. 요시노부는 어차피 막부 체제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는 정권은 반납하되 실권은 유지하려 했다. 도쿠가와가는 여전히 일본 최대의 영지를 가진 세력이었고, 요시노부는 자신이 새로운 정부에서도 중심적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사쓰마와 조슈의 급진파는 도쿠가와의 완전한 제거를 원했다.
12월 9일 밤, 교토 궁궐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사쓰마, 조슈, 도사번의 병력이 궁궐의 문들을 장악했다. 이른 아침, 왕정복고의 대호령이 선포되었다. 쇼군직과 섭정, 관백 같은 막부 시대의 직위들이 모두 폐지되고, 천황 친정 체제가 복원된다는 선언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로는 고대로의 복귀가 아니라 혁명이었다. 15세 천황이 직접 통치할 수는 없었고, 실권은 사쓰마와 조슈를 중심으로 한 하급 무사 출신 개혁파가 장악했다. 그들은 천황의 이름으로 새로운 일본을 만들려 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그를 따르는 번들은 이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막부는 여전히 일본 최대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긴장이 고조되던 1868년 1월 27일, 교토 남쪽 도바와 후시미에서 마침내 양측이 충돌했다. 보신 전쟁(戊辰戦争)의 시작이었다. 구막부군은 1만 5천, 신정부군은 5천 명 정도였다. 숫자상으로는 막부군이 우세했다. 하지만 전투는 신정부군의 승리로 끝났다. 결정적 요인은 금의(錦旗), 즉 천황의 깃발이었다. 신정부군이 이 깃발을 내걸자, 많은 막부군 병사들이 싸울 의지를 잃었다. 천황의 군대에 맞서 싸우는 것은 역적이 되는 것이었다. 존왕이라는 이념이 실제 전장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 것이다.
패배한 요시노부는 에도로 도망쳤다. 신정부군은 도카이도를 따라 동진했다. 각 지방의 번들은 신정부에 충성을 맹세하거나 저항을 선택해야 했다. 대부분은 대세를 읽고 신정부 편에 섰다. 1868년 4월, 신정부군은 에도에 도착했다. 신정부군 총독 사이고 다카모리와 막부측 가쓰 가이슈는 협상을 벌였다. 가쓰는 에도 시민 백만 명의 생명을 생각하여 무혈 개성을 제안했고, 사이고는 이를 받아들였다. 에도성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신정부에 넘어갔다. 일본 최대 도시가 전쟁의 참화를 피한 것은 양측 지도자의 현명함 덕분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동북 지방의 번들은 계속 저항했다. 그들은 오우에쓰 열번 동맹을 결성하고 신정부에 맞섰다. 특히 아이즈번의 저항은 처절했다. 아이즈번은 교토에서 천황을 수호했던 번이었다. 그들의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교토 수호직으로서 존왕의 신념을 실천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역적으로 낙인찍혔다.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1868년 9월, 신정부군은 아이즈 와카마쓰성을 포위했다. 한 달간의 공방전 끝에 성은 함락되었다. 이 과정에서 백호대(白虎隊)라 불리는 16-17세 소년 무사 20명이 성이 불타는 것을 보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오인하여 집단 자결했다. 이 비극은 보신 전쟁의 참혹함을 상징한다. 아이즈번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영지는 몰수되었다. 승자의 보복은 가혹했다.
전쟁의 마지막 무대는 북쪽 홋카이도였다. 막부 해군 부제독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함대를 이끌고 탈출하여 하코다테를 점령했다. 1868년 12월, 그들은 에조 공화국을 선포했다. 지도자를 선거로 뽑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공화정이었다. 에노모토는 신정부가 일본 전체를 지배하는 것을 인정하되, 홋카이도만큼은 독립된 영역으로 남겨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신정부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1869년 봄, 신정부군은 홋카이도로 침공했다. 5월, 결국 하코다테는 함락되었고 에노모토는 항복했다. 보신 전쟁은 1년 반 만에 끝났다. 사상자는 약 1만 5천 명으로 추정된다. 250년간 지속된 도쿠가와 막부는 완전히 사라졌다.
승리한 신정부는 급속한 개혁에 착수했다. 1869년 판적봉환으로 각 번의 영지와 백성이 천황에게 반납되었고, 1871년 폐번치현으로 번이 완전히 폐지되고 중앙정부가 임명한 지사가 다스리는 현으로 재편되었다. 신분제가 철폐되어 무사, 농민, 상인의 구별이 사라졌다. 1873년에는 징병제가 도입되어 모든 남자가 병역 의무를 지게 되었다. 이것은 무사 계급의 군사적 독점을 끝낸 혁명적 조치였다. 무사들의 녹봉도 폐지되었다. 한때 지배 계급이었던 무사들은 하루아침에 생계 수단을 잃었다. 이들 중 일부는 신정부의 관료나 군인이 되었지만, 대다수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했다.
이러한 급진적 개혁은 불만을 낳았다. 1877년,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사쓰마의 불만 무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세이난 전쟁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최고 지도자 중 한 명이 이제 자신이 만든 정부에 맞서 싸운 것이다. 사이고는 전통적 무사의 가치를 지키려 했지만, 신정부의 징병제 군대는 압도적으로 강했다. 근대적 무기와 조직으로 무장한 평민 병사들이 무사들을 격파했다. 사이고는 패배하고 자결했다. 이 전쟁은 무사 시대의 완전한 종말을 의미했다. 동시에 메이지 정부의 근대적 군대가 확고히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가장 큰 역설은 따로 있었다. 존왕양이를 외치며 시작된 운동이 결국 양이를 포기하고 서양 문명을 전면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메이지 정부는 "문명개화"를 국가 목표로 삼았다.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이 미국과 유럽을 순방하며 서양 제도를 연구했다. 사절단에는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같은 최고 지도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서양의 의회, 법률, 교육, 군사 제도를 배우고 돌아왔다. 철도가 부설되고, 전신선이 깔렸으며, 가스등이 거리를 밝혔다. 1872년 도쿄-요코하마 간 첫 철도가 개통되었을 때, 사람들은 경이로움에 휩싸였다. 서양식 학교 제도가 도입되어 초등교육이 의무화되었다. 한때 시모노세키에서 서양 함선에 포를 쏘았던 조슈번 출신들이 이제는 서양 기술을 가장 열심히 배우는 관료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동력은 무엇이었나? 청나라의 몰락이 그들에게 준 교훈이었다. 아편전쟁 이후에도 청나라는 근본적 개혁을 회피했고, 결국 1894-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배했다. 메이지 지도자들은 서양을 단순히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의 힘을 배워 대등해지는 것만이 진정한 독립을 지키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그들에게 "양이"의 본질은 외국인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일본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위해서는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여야 했다.
1889년 메이지 헌법이 반포되었다. 일본은 아시아 최초로 입헌 정치 체제를 갖춘 국가가 되었다. 물론 이 헌법은 천황의 절대적 권한을 인정하는 흠정헌법이었고, 의회의 권한은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나마 의회 제도를 도입한 것은 서구 열강과 대등한 문명국임을 보여주려는 전략이었다. 메이지 정부의 궁극적 목표는 불평등 조약의 개정이었다. 1858년 굴욕적으로 체결한 조약들을 폐기하고 평등한 조약을 맺는 것, 그것이 진정한 양이의 완성이었다. 이를 위해 일본은 서양의 기준에 맞는 "문명국"이 되어야 했다.
이 전략은 성공했다. 1894년 영국이 처음으로 치외법권 철폐에 합의했고, 다른 열강도 뒤따랐다. 1911년에는 마침내 관세 자주권도 회복했다. 50년 전 흑선 앞에서 굴욕을 겪었던 일본은 이제 열강의 일원이 되었다. 1902년 영일동맹은 일본이 서양 열강과 대등한 동맹국으로 인정받았음을 상징했다. 1904-05년 러일전쟁의 승리는 비서구 국가가 서구 열강을 이긴 최초의 사례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존왕양이를 외치던 무사들이 꿈꾸던 "오랑캐를 물리치는" 목표가, 그들이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달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 성공의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일본은 강국이 되기 위해 스스로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다. 1895년 청일전쟁 승리로 대만을 식민지로 삼았고, 1910년에는 한국을 병합했다. 일본이 서양 제국주의로부터 독립을 지키기 위해 근대화한 결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하는 제국이 된 것이다. 존왕양이 운동이 강조했던 일본의 신성함과 우월성은 점차 극단적 민족주의로 변질되었다. 천황 중심의 국가 체제는 1930년대 이후 군국주의의 정당화에 이용되었다.
천황제의 성격도 변화했다. 메이지 유신 초기, 천황은 개혁파 무사들이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상징이었다. 젊은 메이지 천황은 실권이 거의 없었고, 사쓰마와 조슈 출신 관료들이 "천황의 이름으로" 통치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천황은 점차 절대적 권위를 가진 현인신(現人神)으로 격상되었다. 교육칙어(1890)는 천황에 대한 충성을 국민의 최고 덕목으로 규정했다. 학교에서는 천황의 초상 앞에 절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존왕 사상이 강조했던 천황의 권위가, 메이지 시대를 거치며 국가 종교에 가까운 천황 숭배로 발전한 것이다.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사망했을 때, 많은 일본인들이 한 시대의 종말을 느꼈다. 육군 대장 노기 마레스케가 천황을 따라 순사(殉死)한 사건은 무사 정신과 천황 숭배가 결합된 극단적 사례였다. 다이쇼 시대(1912-1926)는 상대적으로 자유주의적 분위기가 있었지만, 1926년 쇼와 천황(히로히토) 즉위 이후 일본은 점차 군국주의로 기울었다.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그리고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천황의 이름은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존왕양이의 "존왕"이 극단으로 치달은 결과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태평양전쟁의 패배는 천황제에 또 다른 전환점이 되었다. 1945년 일본의 항복 이후, 연합군은 천황제 폐지를 검토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천황을 유지하는 것이 일본 점령과 민주화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1946년 히로히토 천황은 "인간 선언"을 통해 자신이 신이 아니라 인간임을 밝혔다. 1947년 신헌법은 천황을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규정하되, 정치적 권한은 완전히 박탈했다. 메이지 유신으로 복원되고 절대화되었던 천황의 권력이, 80년 만에 다시 상징적 존재로 돌아간 것이다.
오늘날 일본에서 천황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복잡하다. 많은 일본인들에게 천황은 전통과 연속성의 상징이다. 2천 년 이상 이어진 황실은 일본 역사의 독특함을 보여준다. 동시에 전쟁 책임 문제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쇼와 천황이 전쟁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 그는 책임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세대와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다르다. 2019년 레이와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새 천황 나루히토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이것은 전쟁의 기억으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존왕양이 운동과 보신 전쟁이 남긴 유산은 천황제만이 아니다. 메이지 유신으로 형성된 정치 구조는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친다. 사쓰마와 조슈 출신들이 메이지 정부를 장악한 결과, "번벌(藩閥)" 정치가 확립되었다. 20세기 초까지 총리대신의 대부분이 이 두 번 출신이었다. 이러한 파벌 정치는 형태를 바꾸어 오늘날에도 계속된다. 일본 정치의 특징인 파벌과 연공서열 문화는 메이지 시대의 유산이다.
지역 감정도 존왕양이 시대의 산물이다. 보신 전쟁에서 승리한 서남부 번들과 패배한 동북 지방 사이의 감정적 골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특히 아이즈 지역(현재의 후쿠시마현)과 조슈(현재의 야마구치현) 사이의 역사적 앙금은 유명하다. 2013년 야마구치현 지사가 아이즈를 방문하여 공식적으로 화해를 표명한 사건은, 150년 전 전쟁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보여준다. 역사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까지 영향을 미친다.
경제 발전 패턴도 메이지 시대에 뿌리를 둔다. 정부 주도의 급속한 산업화, 관료와 대기업의 밀접한 관계, 서양 기술의 적극적 도입, 이 모든 것이 메이지 정부의 "부국강병" 정책에서 시작되었다.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같은 거대 재벌(자이바쓰)은 메이지 시대에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재벌은 해체되었지만, 계열사 중심의 기업 집단(케이레쓰)으로 부활했다. 일본 경제의 독특한 구조는 메이지 유신이라는 위로부터의 근대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교육 제도도 메이지 시대의 유산이다. 1872년 학제가 반포되어 초등교육이 의무화되었다. 정부는 국민 모두를 교육시켜 근대적 인력을 양성하고자 했다. 이러한 교육 중시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일본의 높은 교육열과 입시 경쟁은 메이지 시대의 능력주의와 근대화 욕구에서 비롯되었다. 동시에 메이지 시대 교육은 충군애국 사상을 주입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전후 교육 개혁으로 민주주의 교육이 도입되었지만, 교육을 국가 발전의 핵심으로 보는 관점은 변하지 않았다.
존왕양이 운동은 또한 일본 내셔널리즘의 기원이기도 하다. 에도 시대까지 일본인들의 정체성은 주로 번 단위였다. 자신을 조슈 사람, 사쓰마 사람으로 여겼지, "일본인"이라는 통일된 정체성은 약했다. 존왕양이 운동은 천황을 중심으로 일본인 전체의 통합을 주장했다. 서양이라는 외부 위협 앞에서 "일본"이라는 네이션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신토가 국가 종교로 재정립되고, 일본의 독특함과 우월성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근대화의 동력이었지만, 동시에 배타성과 침략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아시아 다른 나라들에 미친 영향도 생각해야 한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아시아 개혁가들에게 희망이자 모델이었다. 중국의 강유위, 양계초 같은 개혁파는 일본을 배우려 했다. 한국의 개화파도 일본의 근대화를 참고했다. 그러나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하면서, 일본의 근대화는 아시아에 재앙이 되었다. 한국, 대만, 중국이 일본의 식민 지배와 침략을 겪으면서, 일본의 근대화는 부정적 유산을 남겼다. 오늘날에도 역사 문제로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갈등이 계속되는 것은 이 시기의 역사 때문이다.
존왕양이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결국 근대성의 이중성에 대한 이야기다. 전통과 근대, 동양과 서양, 독립과 침략, 이상과 현실 사이의 긴장이 만들어낸 역사다. 1853년 흑선에서 1945년 패전까지, 일본은 100년도 안 되는 기간에 봉건 사회에서 근대 국가로, 다시 제국으로, 그리고 패전국으로 변화했다. 이 격렬한 변화의 출발점이 바로 존왕양이 운동이었다.
오늘날 돌아보면, 존왕양이를 외쳤던 젊은 무사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세계를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외국을 배척하고 천황을 받들어 일본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투쟁은 일본을 서양 문명으로 이끌었고, 천황은 절대 권력자가 되었다가 다시 상징으로 돌아갔다. 일본은 독립을 지켰지만, 그 과정에서 다른 나라를 침략했다. 이념은 현실 속에서 변형되고, 혁명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왕양이 운동 없이 오늘날의 일본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좋든 나쁘든, 이 운동은 일본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시모노세키에서 포를 쏘던 조슈 병사들, 교토 거리에서 암살을 감행하던 지사들, 아이즈성을 끝까지 지키던 무사들, 보신 전쟁의 전장에서 싸우던 양측 군인들, 그들 모두가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역사의 결과가 그들의 의도와 달랐다 해도, 그들의 열정과 희생이 헛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존왕양이는 결국 이념과 현실, 전통과 변화, 독립과 근대화 사이에서 고민하던 한 나라의 이야기다. 오늘날에도 많은 나라들이 비슷한 갈등을 겪는다. 전통을 지키면서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독립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세계와 협력할 것인가? 자국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어떻게 보편적 가치를 받아들일 것인가? 존왕양이 시대 일본이 겪었던 이 질문들은, 형태만 바꾸어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는 거울이다. 150년 전 일본의 격동은 우리에게 여전히 많은 것을 말해준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A1%B4%EC%99%95%EC%96%91%EC%9D%B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