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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명함과 손

by 레옹

돈은 본래 아무런 가치가 없는 물건이었다. 조개껍데기든, 금속 조각이든, 종이든 - 그 자체로는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살 곳을 제공할 수도 없는 무의미한 존재였다. 마치 명함과 같았다. 명함 자체는 단순한 종이 조각에 불과하지만, 그 뒤에 있는 사람의 능력과 인격, 그리고 제공할 수 있는 가치를 대변하는 상징이었다.

초기의 돈 역시 마찬가지였다. 농부의 곡식, 대장장이의 기술, 직조공의 솜씨를 효율적으로 교환하기 위한 매개체였을 뿐이다. 돈은 그저 "이만큼의 노동력"이나 "이만큼의 창조성"을 담보하는 증명서 역할을 했다. 중요한 것은 여전히 그 돈을 벌어들인 사람의 손이었고, 그 손이 만들어낸 가치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관계가 서서히 뒤바뀌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사람 → 노동/창조 → 가치 생산 → 돈'이라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있었다. 사람이 주체가 되어 노동하고 창조해서 가치를 만들어내고, 그 결과로 돈을 얻었다. 돈은 그 사람의 능력과 노력을 증명하는 '결과물'이었다. "저 사람은 훌륭한 장인이니까 돈을 많이 번다"는 식으로 사람의 가치가 먼저 인정되고, 돈은 그에 따른 당연한 보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반대가 되었다. '돈 → 사람의 가치 판단 → 사회적 지위 결정'이라는 구조로 바뀐 것이다. 돈이 '수단'에서 '목적'으로, '결과'에서 '원인'으로 자리를 바꾸었다. "저 사람은 돈이 많으니까 훌륭한 사람이다"라는 역전된 논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명함이 실질적인 가치를 갖게 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그 명함을 제시하는 손 자체의 가치를 빼앗아버리게 된 것이다.


이 변화의 핵심은 돈이 축적 가능한 권력이 되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농부가 곡식을 팔아 얻은 돈으로 필요한 것을 사면 거래가 끝났다. 하지만 현대의 돈은 다르다. 돈은 더 많은 돈을 만들어낼 수 있고, 그 돈은 또 다른 돈을 낳는다. 마치 생명체처럼 스스로 증식하면서, 원래 그것을 만들어낸 인간의 손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더 나아가 돈은 이제 사람의 가치를 역산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뛰어난 장인이 좋은 작품을 만들어 돈을 벌었다면, 이제는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뛰어난 사람으로 여겨진다. 심지어 사랑과 우정, 존경과 같은 인간관계마저도 돈의 논리에 오염되기 시작했다. "그 사람 돈 많아"라는 말이 칭찬이 되고, "돈도 없으면서"라는 말이 모든 의견을 무력화시키는 마법의 주문이 되어버렸다. 돈이라는 도구가 이제는 인간의 존재 자체를 재단하는 잣대가 된 것이다.


문제는 이미 늦어버렸다는 점이다. 돈의 가치가 확실해진 지금, 이것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어버린 이유는 여러 층위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돈은 이미 사회의 모든 구조 속에 뿌리 깊게 박혀버렸다. 교육 시스템은 '좋은 직장'과 '높은 연봉'을 목표로 설계되었고, 의료 시스템은 돈이 없으면 생명조차 위험해지는 구조가 되었다. 주거, 교통, 심지어 인간관계까지 돈을 매개로 한 교환 관계로 재편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이 "돈보다 중요한 게 있다"라고 외치는 것은 시스템 전체에 맞서는 것과 같다.


둘째로, 돈의 논리는 스스로 확산되는 바이러스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 한 사람이 돈의 게임에서 이기면, 다른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그 게임에 참여해야 한다.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 집을 사지 않은 사람도 결국 그 가격에 맞춰 살아야 하고, 사교육이 보편화되면 하지 않는 가정의 아이들도 불리해진다.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집단의 강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무엇보다 현대 사회는 돈 없이는 기본적인 생존조차 불가능한 구조로 완성되었다. 과거에는 농사를 짓거나 물건을 만들어 직접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상품화되어 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집값, 교육비, 의료비로 이어지는 생존의 고리가 모두 돈과 직결되어 있는 상황에서, 돈을 거부하는 것은 곧 사회적 죽음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돈의 힘은 이제 개인을 넘어서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까지 지배하고 있다. 경제 성장률, GDP, 무역 수지 등 국가의 모든 지표가 돈으로 환산되어 측정된다. 개인이 아무리 다른 가치를 추구하려 해도, 그가 속한 사회 전체가 돈의 논리로 돌아가고 있다면 혼자만의 힘으로는 그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결국 개인의 관점으로는 집단의 관점을 바꿀 수 없고,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시스템을 만든 것도 결국 사람들이지만, 이제는 그 시스템이 너무 거대해져서 개별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괴물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자기 가치관을 지키면서도 돈의 룰에 따라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는 필연적으로 이중생활을 의미한다. 겉으로는 돈의 게임에 참여하면서도, 속으로는 "이것이 진정한 나는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분열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왜 이런 고통스러운 분열을 감수해야 할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완전히 돈의 논리에 매몰되면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빠지면, 결국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모르게 된다. 돈이라는 수단이 목적을 완전히 잠식해 버리는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주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돈을 만드는 기계가 되어버린다.


동시에 사회적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 게임에 참여해야 한다. 아무리 돈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믿어도, 당장 집세를 내지 못하거나 아이의 교육비를 마련하지 못하면 그런 이상은 무의미해진다. 현실적 필요 앞에서는 타협할 수밖에 없고, 그 타협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이건 진짜 내가 아니야"라는 내적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또한 완전한 체념은 더 큰 절망을 가져온다. "그래, 세상이 원래 이런 거야. 돈이 전부야"라고 완전히 받아들여버리면, 삶의 의미 자체가 사라진다. 분열된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은 최소한 "다른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이 분열 자체가 일종의 저항이다. 비록 작고 무력해 보이지만, 돈의 논리를 완전히 내재화하지 않겠다는 의지 표현이다. 이는 개인적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저항 방식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분열된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정신적으로 꽤 소모적일 수밖에 없다. 매 순간 자신을 부정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피로감, 진정성과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해야 하는 스트레스는 현대인이 감당해야 할 무거운 짐이 되었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이런 모순은 더욱 첨예하게 드러난다. 취업을 위해 스펙을 쌓고 연봉을 비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끊임없이 자문한다. 생존을 위해서는 그 게임에 참여해야 하지만, 완전히 그 게임에 매몰되지는 않으려고 애쓴다.


결국 현대인의 삶은 끊임없는 타협점을 찾는 과정이 되었다. 완전히 순수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자신만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이는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낸 문명의 역설적 결과물에 대한 현실적 대응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상황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명함이 손의 가치를 가려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한, 우리는 최소한 그 손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억 자체가, 비록 작을지라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은 인간성의 증거일 것이다.


우리가 만든 도구가 오히려 우리를 지배하게 된 이 시대에서, 어쩌면 가장 인간다운 선택은 그 모순을 안고 살아가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명함과 손, 둘 다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그 사이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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