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5년 11월, 클레르몽의 광장에 모인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입을 열었을 때, 그 누구도 이것이 향후 2세기 동안 유럽과 중동의 역사를 재편할 거대한 물결의 시작이 될 줄 예상하지 못했다. 교황의 연설은 단순한 종교적 호소를 넘어서, 중세 유럽 사회가 안고 있던 복합적인 모순과 욕망을 하나의 원정으로 수렴시키는 촉매제였다. 성지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해방'하라는 그의 외침은 신앙심 깊은 기사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지만, 그 이면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절박한 구원 요청, 교황권의 정치적 야망, 그리고 유럽 귀족들의 영토 확장 욕구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가 교황에게 보낸 서한은 절박함으로 가득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투르크에게 참패한 이후, 비잔티움은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상실했고 제국의 심장부까지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알렉시오스가 기대했던 것은 용병 수준의 제한적 군사 지원이었다. 하지만 우르바누스 2세는 이 요청을 훨씬 더 웅대한 비전으로 변모시켰다. 동방 기독교인들을 돕는다는 명분은 서방 교회의 영향력을 동방으로 확장하고, 1054년 대분열 이후 갈라진 동서 교회를 교황권 아래 재통합할 수 있는 기회였다. 동시에 이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와의 서임권 투쟁에서 밀리던 교황권이 유럽 기독교 세계의 진정한 지도자임을 입증할 절호의 찬스이기도 했다.
클레르몽 공의회에서의 연설 이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데우스 볼트Deus vult, 하느님의 뜻이다"라는 구호가 프랑스 전역에 울려 퍼졌고, 사람들은 앞다투어 십자가를 옷에 달았다. 하지만 이 열광적 반응을 단순히 종교적 광기로만 해석한다면 11세기 유럽 사회의 구조적 맥락을 놓치게 된다. 당시 유럽은 인구 증가와 장자 상속제도의 확산으로 토지를 상속받지 못한 차남, 삼남 귀족들이 급증하고 있었다. 이들은 기사 계급으로서의 정체성과 무력은 있었지만 경제적 기반이 없었고, 끊임없는 사적 전쟁과 약탈로 사회 불안의 원인이 되고 있었다. 십자군은 이들에게 영혼의 구원이라는 종교적 보상과 함께 새로운 영지를 얻을 수 있는 현실적 기회를 동시에 제공했다. 교회가 추진하던 '신의 평화' 운동이 유럽 내부의 폭력을 억제하는 데 한계를 보이던 상황에서, 십자군은 이 무력을 외부로 전환시키는 탁월한 해법이었던 것이다.
1096년 봄, 정규 십자군이 출발하기도 전에 이른바 '민중 십자군'이 먼저 길을 나섰다. 은자 베드로와 기사 발터 무일푼이 이끈 이 무질서한 군중은 대부분 가난한 농민, 도시 빈민, 그리고 모험을 꿈꾸는 하층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종교적 열정으로 충만했지만 군사적 훈련도, 충분한 보급도 없었다. 라인란트를 지나면서 이들 일부는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부터 응징해야 한다는 왜곡된 논리로 유대인 공동체를 습격하고 학살했다. 슈파이어, 보름스, 마인츠의 유대인 거주지가 불타올랐고,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십자군 운동이 처음부터 종교적 순수성과는 거리가 먼, 폭력과 편견으로 얼룩진 면모를 드러낸 것이었다.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민중 십자군은 비잔티움인들에게 혼란과 공포를 안겨주었고, 알렉시오스 황제는 이들을 서둘러 소아시아로 건너보냈다. 1096년 10월, 니케아 근처 치베토투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에게 습격당한 민중 십자군은 거의 전멸했다. 수만 명이 살해되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민중 십자군의 비극적 종말이 알려질 무렵, 진짜 전투력을 갖춘 정규 십자군이 네 갈래로 나뉘어 동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로렌의 고드프루아와 그의 동생 부용의 볼드윈,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블루아 백작 스티븐,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타란토의 보에몽과 그의 조카 탄크레드 등 서유럽의 주요 귀족들이 각자의 군대를 이끌고 참여했다. 특히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 귀족 보에몽의 참여는 의미심장했다. 그의 가문은 비잔티움과 오랜 전쟁을 벌여온 적대 세력이었고, 보에몽 자신도 발칸 반도에서 비잔티움군과 싸운 경험이 있었다. 그가 십자군에 합류한 것은 순수한 신앙심보다는 동방에서 새로운 영지를 확보하려는 정치적 야망 때문이었다. 1096년 말부터 1097년 봄에 걸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십자군 지도자들에게 알렉시오스 황제는 난처한 딜레마였다. 그는 십자군이 정복할 옛 비잔티움 영토를 제국에 반환하겠다는 충성 서약을 요구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마지못해 이에 동의했지만, 이 서약은 이후 비잔티움과 십자군 사이에 끊임없는 긴장과 배신의 씨앗이 되었다.
1097년 5월, 십자군은 셀주크 투르크의 수도 니케아를 포위했다. 성벽은 견고했고 방어군은 완강히 저항했지만, 십자군은 인내심 있게 포위를 유지했다. 비잔티움 해군이 이즈니크 호수를 봉쇄하면서 성은 완전히 고립되었고, 6월에 성안의 투르크 수비대는 십자군이 아닌 비잔티움 황제에게 항복했다. 이는 알렉시오스가 의도적으로 협상한 결과였지만, 약탈을 기대했던 십자군 병사들은 크게 실망했다. 이 사건은 십자군과 비잔티움 사이의 목표 차이를 극명히 드러냈다. 알렉시오스는 영토 회복과 외교적 해결을 원했지만, 십자군은 무력 정복과 전리품을 추구했다.
니케아 함락 후 십자군은 소아시아 내륙의 가혹한 길로 접어들었다. 1097년 7월 1일, 도릴라이움 근처에서 십자군 선발대가 킬리지 아르슬란이 이끄는 대규모 셀주크 기병대의 기습을 받았다. 투르크의 경기병들은 빠른 속도로 이동하며 화살을 퍼부었고, 십자군은 순식간에 포위되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보에몽의 지휘 아래 십자군은 필사적으로 방어 진형을 유지했고, 후속 부대가 적시에 도착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십자군의 중기병 돌격은 투르크 기병대를 격파했고, 킬리지 아르슬란은 진영을 버리고 도주했다. 이 승리는 십자군에게 심리적 우위를 안겨주었지만, 진짜 시련은 이제부터였다. 여름 열기가 극에 달한 아나톨리아 고원을 가로지르는 행군은 지옥 같았다. 물과 식량이 부족했고, 말들이 갈증과 탈진으로 죽어나갔다. 기사들은 무거운 갑옷 때문에 특히 고통스러웠고, 일부는 개와 염소에게 짐을 싣고 갈 정도였다.
1097년 9월, 십자군은 토러스 산맥을 넘어 킬리키아로 진입했다. 여기서 볼드윈과 탄크레드가 주도권 다툼을 벌이며 처음으로 십자군 내부의 균열이 표면화되었다. 볼드윈은 곧 본대를 떠나 동쪽으로 향했다. 그는 유프라테스 강변의 아르메니아 기독교 도시들을 차례로 장악했고, 1098년 3월 에데사의 지배자 토로스가 암살당한 후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것이 첫 번째 십자군 국가인 에데사 백국의 탄생이었다. 볼드윈의 행동은 십자군의 본래 목표가 예루살렘 '해방'이라는 명분과는 별개로, 개별 지도자들이 자신의 영지 확보에 더 관심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본대는 1097년 10월 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 이 거대한 도시를 마주한 순간, 십자군은 자신들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에 직면했는지 깨달았다. 안티오키아는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400개가 넘는 망루가 솟아 있었으며, 성벽의 길이만 해도 12킬로미터에 달했다. 도시를 완전히 포위하기에는 십자군의 병력이 부족했고, 겨울이 다가오면서 보급 문제가 심각해졌다. 포위는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결국 7개월 이상 계속되었다. 굶주림과 질병이 십자군 진영을 황폐화시켰고, 일부 기사들은 탈영했다. 1098년 초, 식량 부족이 극심해지자 병사들은 나무껍질과 가죽을 삶아 먹었고, 심지어 시체를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블루아 백작 스티븐은 절망 속에서 십자군을 떠나 귀국했는데, 공교롭게도 그가 떠난 직후 상황이 극적으로 반전되었다.
1098년 6월 3일 새벽,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보에몽이 몇 달 전부터 비밀리에 매수해둔 아르메니아계 성벽 수비대장 피루즈가 세 망루의 문을 열어준 것이다. 십자군은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넘어 도시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7개월의 고통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 십자군은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했다. 무슬림뿐 아니라 동방 기독교인들도 희생되었고, 거리는 피로 물들었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불과 며칠 후, 모술의 아타베그 케르보가가 이끄는 대규모 이슬람 연합군이 도시를 포위했다. 포위자가 피포위자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이번에는 십자군이 성안에 갇혀 식량과 물이 바닥나는 절망적 상황에 처했다.
이때 한 가난한 농민 출신 병사 베드로 바르톨로메오가 환시를 보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성 베드로 대성당 바닥 아래 예수를 찔렀던 '성창'이 묻혀 있다고 말했다. 프로방스 백작 레몽의 후원 아래 발굴이 시작되었고, 정말로 창끝이 발견되었다. 이것이 진짜 유물인지 아니면 조작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지만, 그 효과는 명백했다. 절망에 빠져 있던 십자군은 신이 자신들과 함께한다는 확신을 얻었고, 사기가 급상승했다.
1098년 6월 28일, 십자군은 단식과 기도로 영적 정화를 거행한 후, 성문을 열고 케르보가의 군대에게 돌격했다. 놀랍게도 이슬람 연합군은 혼란에 빠졌다. 다양한 세력으로 구성된 연합군은 내부 결속력이 약했고, 십자군의 필사적 공격 앞에서 무너졌다. 케르보가는 퇴각했고, 십자군은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안티오키아 함락 후, 십자군 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보에몽은 자신이 도시를 손에 넣었으니 안티오키아의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몽은 비잔티움 황제와의 서약을 지켜야 한다며 반대했지만, 실상 그 자신도 도시를 원했다. 결국 보에몽이 안티오키아 공국의 군주가 되었고, 이는 두 번째 십자군 국가의 탄생이었다. 이 과정에서 알렉시오스 황제에 대한 서약은 완전히 무시되었고, 비잔티움과 십자군 사이의 관계는 회복 불가능하게 악화되었다. 레몽은 불만을 품고 예루살렘으로 향할 것을 주장했지만, 많은 기사들은 지쳐서 안티오키아에 머무르기를 원했다. 여름 내내 지도자들은 논쟁을 계속했고, 일반 병사들은 이에 질려버렸다. 결국 병사들의 압력과 위협 속에서 1099년 1월, 십자군은 마침내 예루살렘을 향해 남진을 시작했다.
지중해 연안을 따라 내려가는 행군은 상대적으로 순조로웠다.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의 이슬람 도시들은 십자군과 싸우기보다는 조공을 바치고 통과를 허락했다. 파티마 칼리프국은 십자군과의 협상을 시도했고, 심지어 예루살렘을 제외한 팔레스타인 영토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십자군은 예루살렘 이외의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1099년 6월 7일, 십자군은 마침내 예루살렘의 성벽 앞에 섰다. 2년 반에 걸친 고난의 여정이 목적지에 도달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도중에 죽거나 각자의 영지에 정착했기 때문에, 예루살렘 앞에 선 십자군은 출발할 때보다 훨씬 적은 수였다. 대략 1만 2천에서 1만 5천 명 정도로 추산되며, 이 중 기사는 1,500명도 되지 않았다.
예루살렘의 파티마 수비대는 십자군의 도착을 예상하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성 밖의 우물을 메우거나 독을 풀었고, 가축을 성 안으로 몰아넣었으며, 도시 안의 기독교인들을 추방하거나 수감했다. 십자군은 즉시 공격을 시도했지만 사다리가 부족했고, 돌을 던지는 투석기도 없었다. 첫 번째 공격은 실패했다. 설상가상으로 6월의 팔레스타인은 무더웠고, 물 공급이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병사들은 15킬로미터 떨어진 실로암 샘까지 가서 물을 길어와야 했다.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일부는 이집트에서 대군이 오고 있다는 소문에 공포를 느꼈다.
이때 구원이 제노바와 영국에서 왔다. 6척의 제노바 선박이 야파 항구에 도착해 목재, 밧줄, 못 등 공성 장비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자재를 실어왔다. 십자군은 열정적으로 일했고, 불과 몇 주 만에 세 개의 거대한 공성탑과 다수의 투석기를 완성했다. 고드프루아가 이끄는 로렌 부대는 북쪽 성벽에, 레몽의 프로방스 부대는 남쪽 시온 산 근처에 공성탑을 배치했다. 7월 13일부터 14일 밤까지, 십자군은 밤낮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투석기가 성벽을 두드리고, 궁수들이 화살 세례를 퍼부었으며, 공성탑이 천천히 성벽으로 다가갔다. 수비군도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들은 화살과 돌을 던지고, 끓는 기름을 부었으며, 불붙은 횃불을 던져 공성탑을 태우려 했다.
1099년 7월 15일 정오경, 고드프루아의 공성탑이 마침내 북쪽 성벽에 닿았다. 다리가 내려지고 기사들이 성벽 위로 쏟아져 들어갔다. 몇 시간 후 레몽의 부대도 남쪽에서 돌파했다. 성문이 열렸고 십자군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왔다.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은 중세 전쟁의 가장 참혹한 학살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십자군은 거리마다 무슬림과 유대인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았다. 목격자들은 거리가 무릎까지 차오르는 피로 뒤덮였다고 기록했다. 유대인들은 회당으로 피신했지만, 십자군은 회당에 불을 질러 그들을 산 채로 태워 죽였다. 알아크사 모스크로 피신한 무슬림들도 무참히 학살당했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사망자 수를 수천 명에서 수만 명으로 추정한다. 당시 십자군 연대기 작가들은 이 학살을 신의 정의로운 심판이 이루어진 것으로 묘사했고, 그날 저녁 피로 얼룩진 손으로 성묘 교회에서 감사 기도를 드렸다고 기록했다.
학살이 끝난 후, 십자군 지도자들은 예루살렘 왕국의 지배 구조를 놓고 다시 논쟁을 벌였다. 대부분은 고드프루아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리스도가 가시관을 쓴 곳에서 황금 왕관을 쓸 수 없다'며 왕의 칭호를 거부하고 대신 '성묘의 수호자'라는 겸손한 직함을 택했다. 이것이 순수한 경건함 때문인지 아니면 정치적 계산 때문인지는 불분명하다. 레몽은 여전히 불만스러웠지만 대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로 임명된 피사의 다임베르토는 교회가 도시의 진정한 주권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긴장을 야기했다.
예루살렘 함락 한 달도 안 되어, 이집트의 파티마 칼리프국이 대군을 이끌고 북상했다. 아스칼론의 재상 알아프달이 이끄는 이 군대는 십자군보다 훨씬 수적으로 우세했다. 대부분의 십자군이 서원을 이행했다며 유럽으로 돌아간 상황에서, 예루살렘에 남은 병력은 겨우 1,200명의 기사와 9,000명의 보병뿐이었다. 하지만 1099년 8월 12일 아스칼론 전투에서 십자군은 또다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고드프루아와 레몽의 기사들이 감행한 대담한 기습 공격이 이집트군을 패주시켰고, 알아프달은 간신히 도망쳤다. 이 승리로 새로 탄생한 예루살렘 왕국의 생존이 보장되었다.
1년 후인 1100년, 고드프루아가 예상치 못하게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동생 볼드윈이 에데사에서 내려와 예루살렘 왕으로 즉위했고, 이번에는 왕의 칭호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볼드윈 1세는 뛰어난 정치가이자 전략가였다. 그는 해안 도시들을 하나씩 정복하여 왕국의 영토를 확장했고, 베네치아와 제노바 같은 이탈리아 해양 도시국가들과 동맹을 맺어 해상 보급로를 확보했다. 그는 또한 현실주의적으로 무슬림 영주들과도 조약을 맺고 때로는 동맹하여, 이슬람 세력의 통일된 반격을 막았다. 예루살렘 왕국, 안티오키아 공국, 에데사 백국, 그리고 나중에 추가된 트리폴리 백국으로 구성된 십자군 국가들은 향후 거의 2세기 동안 레반트 지역에 존속하게 된다.
1차 십자군의 성공은 여러 요인의 우연한 결합이었다. 무엇보다 이슬람 세계가 분열되어 있었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수니파 셀주크 투르크와 시아파 파티마 칼리프국은 서로 적대 관계였고, 셀주크 제국 자체도 여러 아타베그들로 분열되어 있었다. 만약 이슬람 세력이 통일되어 있었다면 십자군은 아마도 실패했을 것이다. 십자군 지도자들의 군사적 재능과 끈질긴 의지도 중요했다. 그들은 수없이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지만 매번 극복했다. 비잔티움의 초기 지원, 이탈리아 해군의 도움, 그리고 무엇보다 병사들의 광적인 종교적 확신이 불가능해 보이는 과업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1차 십자군의 유산은 복합적이고 모순적이다. 서방 기독교 세계의 관점에서 이는 신앙의 승리이자 기적이었다. 예루살렘은 '회복'되었고, 성지는 기독교인의 손에 들어왔다. 수천 명의 기사와 순례자들이 자신들의 영혼을 구원받았다고 믿으며 유럽으로 돌아갔다. 십자군은 중세 기독교 문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 경험이 되었고, 향후 수세기 동안 유럽의 문학, 예술, 정치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기사도 정신의 이상이 형성되었고, 성전기사단과 병원기사단 같은 군사 수도회가 탄생했다.
동시에 1차 십자군은 잔혹한 폭력, 종교적 불관용, 그리고 문명 간 충돌의 씨앗을 뿌렸다. 예루살렘 학살은 이슬람 세계에 깊은 상처와 분노를 남겼다. 당시 이슬람 연대기 작가들은 십자군의 잔학 행위를 생생히 기록했고, 이는 세대를 거쳐 전승되었다. 십자군 국가들의 존재는 지속적인 전쟁과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12세기 중반 잔기와 누르 앗딘, 그리고 살라딘의 등장으로 이슬람 세력이 재통합되면서, 십자군 국가들은 점차 압박을 받게 되었다. 1187년 하틴 전투에서 살라딘이 십자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탈환한 것은 1차 십자군이 거둔 성과가 얼마나 일시적이었는지를 보여주었다.
더 깊은 차원에서, 1차 십자군은 동서방 기독교 사이의 분열을 회복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우르바누스 2세가 꿈꾸었던 교황권 아래 교회의 재통합은 실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십자군 지도자들의 배신과 탐욕은 비잔티움인들에게 라틴인들을 영원히 신뢰할 수 없는 야만인으로 각인시켰다. 이 적대감은 1204년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면서 절정에 달했고, 동서 교회의 분열은 오늘날까지도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박해는 유럽에서 반유대주의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이후 십자군마다 반복되는 비극의 패턴을 만들었다.
1차 십자군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관점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중세 기독교인들에게 이는 신의 섭리가 현현한 거룩한 승리였다. 현대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를 서양 문명의 활력과 확장의 상징으로 보기도 한다. 반면 다른 학자들은 이를 종교적 광신주의가 초래한 비극이자, 제국주의적 침략의 초기 형태로 규정한다. 이슬람 세계에서 십자군은 서구의 침략과 식민주의의 원형으로 기억되며, 현대 중동 정치에서도 여전히 강력한 상징으로 작용한다.
아마도 가장 균형 잡힌 이해는 1차 십자군을 그 시대의 맥락 속에서, 그리고 그것이 드러낸 인간 본성의 복합성 속에서 바라보는 것일 것이다. 십자군 참가자들은 진정한 신앙심과 영적 열망으로 움직였지만, 동시에 세속적 야망, 경제적 이익, 그리고 폭력에 대한 욕구에도 이끌렸다. 그들은 숭고한 희생과 비인간적 잔혹함을 모두 보여주었다. 그들은 기적적인 인내심과 용기를 발휘했지만, 동시에 배신과 탐욕으로 얼룩졌다. 1차 십자군은 중세 유럽 사회가 품고 있던 모든 모순을 압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역사적 거리를 두고 볼 때, 1차 십자군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아마도 그것이 촉발한 장기적 과정들일 것이다. 십자군 국가들의 존재는 동서 문명 간 접촉을 극적으로 증가시켰다. 무역이 확대되었고, 지식과 기술이 교환되었으며, 문화적 영향이 쌍방향으로 흘렀다. 아랍의 과학, 의학, 철학이 유럽으로 전해졌고, 이는 12세기 르네상스의 한 축을 이루었다. 설탕, 향신료, 비단 같은 동방의 물품에 대한 유럽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지중해 무역이 활성화되었고, 베네치아와 제노바 같은 도시들이 번영했다. 이는 결국 대항해시대와 유럽의 전지구적 팽창의 전주곡이 되었다.
동시에 십자군은 종교적 타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위험한 선례를 남겼다. '이단'과 '이교도'에 대한 십자군이 유럽 내부에서도 선포되었고, 알비파 십자군은 남프랑스에서 수만 명을 학살했다. 발트해 연안의 십자군은 이교도 슬라브인과 발트인들을 강제 개종시켰다. 레콩키스타로 불리는 이베리아 반도의 재정복 운동은 십자군 정신과 결합하여 더욱 가혹해졌다. 1492년 그라나다 함락 후 무슬림과 유대인에 대한 추방과 박해가 이어졌고, 이는 스페인 종교재판의 공포로 이어졌다.
1차 십자군은 또한 서양의 자기 인식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 세계'라는 초국가적 정체성이 강화되었고, 이슬람은 영원한 적으로 규정되었다. 이러한 이분법적 세계관은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고, 제국주의 시대에 '문명화 사명'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변형되어 부활했다. 심지어 20세기와 21세기에도 십자군의 이미지와 수사는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2001년 부시 대통령이 대테러 전쟁을 'crusade'라고 표현했을 때의 파장은, 천 년이 지난 후에도 그 말이 얼마나 강력한 감정적 공명을 불러일으키는지 보여주었다.
결국 1차 십자군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었던 십자군이면서 동시에, 그 성공이 얼마나 문제적이고 비극적 결과들을 낳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그것은 신앙의 힘이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지만, 동시에 종교적 확신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도 드러냈다. 그것은 인간의 용기와 인내를 증명했지만, 또한 인간의 잔혹함과 광신도 입증했다. 1차 십자군을 연구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한 사건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와 정치, 이상과 현실, 신앙과 폭력이 교차하는 인간 조건의 근본적 딜레마를 마주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딜레마는 여전히 우리 시대에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