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4년 크리스마스 이브, 에데사 백작령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유럽에 전해졌을 때, 기독교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1차 십자군 전쟁의 가장 빛나는 성과 중 하나였던 이 땅이 모술의 총독 이마드 알딘 장기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장기의 공격은 신속하고 잔혹했다. 그는 28일간의 포위 끝에 12월 24일 성벽을 무너뜨렸고, 도시로 밀려든 그의 군대는 라틴계 주민들을 학살했다. 에데사 백작 조슬랭 2세는 도시 밖에 있었고, 그의 부재는 방어를 더욱 취약하게 만들었다. 성당들은 약탈당했고, 프랑크 귀족들은 포로로 잡혔다. 에데사는 단순한 전략적 거점이 아니었다. 그곳은 기독교 세계가 성지에 세운 첫 번째 십자군 국가였으며, 예루살렘 왕국의 북방 방어선이자 신앙의 상징이었다. 이 도시의 상실은 1099년 예루살렘 함락 이후 쌓아올린 십자군의 신화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여실히 드러냈다.
교황 에우제니우스 3세는 즉각 대응에 나섰다. 1145년 12월 1일, 그는 칙서 「퀀툼 프라에데체소레스」를 발표하며 새로운 십자군 전쟁을 선포했다. 이 칙서는 1차 십자군을 선포했던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수사를 반복하면서, 십자군 참여자들에게 죄의 사면과 재산 보호를 약속했다. 하지만 유럽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1차 십자군의 영광스러운 기억은 여전히 살아있었지만, 그것은 이미 반세기 전의 일이었다. 당시 유럽은 내부 권력투쟁과 영토 분쟁에 골몰해 있었다. 영국에서는 스티븐 왕과 마틸다 사이의 내전이 격화되고 있었고, 독일에서는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벨프 가문의 대립이 계속되었다. 머나먼 동방의 위기는 추상적인 걱정거리에 불과했다. 교황의 호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 운동에는 더 강력한 목소리가 필요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였다. 시토 수도회의 수도원장이자 중세 가톨릭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자였던 그는 1146년 3월 31일 부르고뉴의 베즐레에서 열린 집회에서 십자군 참여를 호소했다. 언덕 위에 세워진 연단에서 베르나르는 수만 명의 군중을 향해 외쳤다. 그는 에데사의 기독교인들이 겪은 고통을 생생하게 묘사했고, 성지를 구원하는 것이 모든 기독교인의 의무라고 역설했다. 베르나르의 설교는 전설이 되었다. 그의 언변은 너무나 열정적이고 설득력이 있어서, 준비해 온 십자가 표식이 모자라 자신의 수도복을 찢어 십자가를 만들어야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프랑스 왕 루이 7세는 이미 십자군 참여를 결심한 상태였다. 사실 루이는 1145년 말 비트리에서 벌어진 화재 사건으로 깊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가 샹파뉴 백작 티보와의 분쟁 중에 이 도시를 공격했을 때, 성당에 피신한 1,300명이 불에 타 죽었다. 이 참사는 루이를 깊은 회개로 이끌었고, 십자군은 그의 속죄 수단이 되었다. 베즐레에서 루이는 공개적으로 십자가를 받았고, 그의 왕비 엘레오노르도 함께 십자가를 받았다. 베르나르의 설교는 프랑스 전역에 십자군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베르나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독일로 건너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콘라트 3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콘라트는 처음에는 참여를 주저했다. 독일 내부의 정치적 불안정, 특히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사자공과의 긴장 관계가 그를 망설이게 했다. 더욱이 교황청과의 관계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하지만 1146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상황이 바뀌었다. 베르나르는 먼저 개인적으로 콘라트를 만나 설득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12월 27일 슈파이어 대성당에서 열린 미사에서 베르나르는 다시 한번 열정적인 설교를 펼쳤다. 그는 콘라트를 직접 거명하며, 최후의 심판 날 그리스도가 황제에게 "내가 네게 준 모든 것을 기억하라. 그런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라고 물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설교는 콘라트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즉석에서 십자가를 받았고, 그의 조카 슈바벤의 프리드리히(훗날의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와 많은 독일 귀족들도 뒤따랐다. 유럽의 두 가장 강력한 군주가 동시에 십자군에 나서기로 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이번 원정이 1차 십자군보다 더 위대한 승리를 거둘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원정은 시작부터 불길한 징조들로 가득했다. 1147년 5월 중순, 콘라트 3세가 이끄는 독일군이 레겐스부르크에서 출발했다. 그의 군대는 약 2만 명으로 추산되며, 기사들과 보병, 그리고 수많은 순례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다뉴브 강을 따라 동진하여 헝가리를 거쳐 9월 초 비잔티움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노스는 십자군을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1차 십자군 때도 서방의 기사들은 비잔티움의 도시를 약탈하고 황제의 권위를 무시했다. 더욱이 콘라트는 시칠리아의 노르만 왕 로제르 2세와 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로제르는 그리스 본토와 섬들을 공격하며 비잔티움을 괴롭히던 적이었다. 1147년 여름에도 로제르의 함대는 코린토스를 약탈했다. 마누엘은 십자군이 로제르와 협력하여 자신의 제국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콘라트에게 신속하게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로 가라고 압력을 넣었다.
9월 중순, 독일 십자군은 소아시아로 건너갔다. 콘라트는 두 갈래 길 앞에 섰다. 하나는 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더 안전하지만 더 긴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내륙을 가로질러 직접 안티오크로 향하는 더 짧지만 위험한 길이었다. 비잔티움의 안내자들은 내륙 길이 더 빠르고 물과 식량이 풍부하다고 말했다. 콘라트는 내륙 길을 선택했다. 이것은 첫 번째 치명적인 실수였다. 독일군은 니케아를 출발해 동쪽으로 향했지만, 곧 사막과 같은 고원 지대에 접어들었다. 물이 부족했고, 비잔티움 안내자들이 약속한 보급품은 나타나지 않았다. 10월 25일, 도릴라이온(현재의 에스키셰히르) 근처에서 독일 십자군은 룸 셀주크 투르크의 대규모 군대와 마주쳤다. 셀주크의 술탄 마스우드 1세는 독일군의 움직임을 계속 추적하고 있었다.
투르크군은 전형적인 유목민 전술을 사용했다. 그들은 경기병으로 독일군을 포위하고, 활을 쏘며 괴롭혔다. 독일 기사들의 중장기병 돌격은 효과가 없었다. 투르크 기병들은 돌격을 피해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화살을 쏘아댔다. 전투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고, 독일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많은 기사들이 전사했고, 보병들은 거의 전멸했다. 콘라트 자신도 머리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살아남은 병력은 간신히 대오를 유지하며 니케아로 후퇴했다. 독일군의 약 4분의 3이 이 재앙에서 목숨을 잃었다. 콘라트가 니케아에 도착했을 때, 그의 군대는 더 이상 십자군이라 부를 수 없는 패잔병 무리에 불과했다.
한편 루이 7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1147년 6월 11일 메츠를 출발했다. 그들도 다뉴브 강을 따라 동진하여 10월 초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프랑스군은 약 1만 5천 명 규모였고, 루이의 왕비 엘레오노르와 그녀의 시녀들, 그리고 많은 귀족들이 동행했다. 마누엘 황제는 프랑스군도 빨리 소아시아로 건너가기를 원했다. 콘스탄티노플 외곽에서 프랑스 십자군과 비잔티움 주민들 사이에 소규모 충돌이 발생했고, 이는 긴장을 고조시켰다. 10월 말, 루이는 보스포루스를 건너 니케아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참담한 패배를 당한 콘라트와 조우했다.
두 군주는 함께 남하하기로 했다. 콘라트는 부상과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었고, 결국 12월에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 치료를 받기로 했다. 마누엘은 직접 콘라트를 간호했고, 이것은 두 지도자 사이의 관계를 개선시켰다.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운명을 교훈 삼아 더 안전한 해안 경로를 택했다. 하지만 1148년 1월 초, 카드모스 산맥(현재의 혼나즈 산맥)을 넘는 과정에서 프랑스군도 투르크의 공격을 받았다. 좁은 산길에서 프랑스군의 전열은 길게 늘어져 있었다. 1월 6일, 선두 부대가 이미 고개를 넘어갔을 때, 투르크군이 후위부대를 공격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후위부대는 혼란에 빠졌고, 많은 병사들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거나 투르크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루이 자신도 위기에 처했다. 그는 중군에 있었는데, 투르크의 화살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한 순간 루이의 말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고, 왕은 바위 위로 올라가 등을 바위에 댄 채 칼로 적을 막아야 했다. 그의 갑옷이 왕임을 나타내는 표식을 가리고 있었기에, 투르크군은 그가 왕인 줄 몰랐다. 결국 템플 기사단의 기사들이 달려와 루이를 구출했지만, 후위부대는 거의 전멸했다. 수천 명이 죽었고, 귀중한 보급품과 금은보화가 약탈당했다. 십자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은 채 안탈리아에 도착했다.
안탈리아에서 루이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그곳의 비잔티움 총독은 충분한 배를 제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는 배가 더 있었지만, 총독은 십자군을 서둘러 보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루이는 자신과 기사들, 귀족들만 배를 타고 시리아로 가기로 하고, 보병과 병든 병사들은 육로로 이동하도록 명령했다. 이 결정은 사실상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나 다름없었다. 육로로 이동한 보병들은 안내자도 없이 산악 지대를 헤매다가 투르크군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다.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고, 살아남은 자들은 노예로 팔렸다. 역사가 오도는 이 사건을 "기독교인의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고 기록했다. 살아남은 루이는 1148년 3월 19일 안티오크에 도착했지만, 그의 군대는 이미 원정을 시작했을 때의 3분의 1도 채 되지 않았다.
안티오크에서 루이는 안티오크 공 레몽의 환대를 받았다. 레몽은 엘레오노르의 삼촌이자 예루살렘의 전설적인 왕 보두앵 2세의 아들이었다. 그는 전략적 안목이 뛰어난 지휘관이었고, 안티오크 공국의 군사적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레몽은 십자군의 진정한 목표는 에데사를 탈환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전략적 거점인 알레포를 공격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레포는 시리아 북부의 핵심이었고, 장기 왕조의 새로운 지도자 누르 알딘이 권력 기반을 다지고 있던 곳이었다. 레몽은 누르 알딘이 아직 완전히 권력을 공고히 하기 전에 알레포를 공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알레포를 장악하면 에데사는 자연스럽게 고립되고, 시리아 북부 전체를 통제할 수 있었다. 레몽의 계획은 군사적으로 타당했다.
하지만 루이는 레몽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 거절의 배경에는 복잡한 개인적, 정치적 이유가 얽혀 있었다. 엘레오노르는 안티오크에서 삼촌 레몽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함께 전략을 논의했고, 엘레오노르는 레몽의 계획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루이는 아내가 자신보다 레몽의 의견을 더 중시하는 것에 분노했다. 곧 안티오크의 궁정에서는 엘레오노르와 레몽 사이에 부적절한 관계가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십자군 연대기 작가 티루스의 윌리엄은 "레몽과 왕비 사이의 친밀함이 지나쳤고, 왕은 이를 의심했다"고 기록했다. 역사가들은 실제로 불륜이 있었는지에 대해 의견이 나뉘지만, 분명한 것은 루이가 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다는 것이다.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엘레오노르는 공개적으로 레몽의 편을 들었고, 루이가 알레포 공격을 거부하자 그와 이혼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녀는 자신과 루이의 결혼이 근친혼에 해당한다며 무효를 주장했다. 루이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레몽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모욕으로 느껴졌고, 자신의 권위가 무시당한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루이는 자신을 단순한 군사 지휘관이 아니라 순례자로 생각했다. 그의 목표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묘 교회에서 기도하고, 비트리 학살에 대한 속죄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는 정치적, 군사적 목표보다 개인적 구원이 더 중요했다. 결국 루이는 4월 말 서둘러 안티오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했고, 엘레오노르를 거의 강제로 데려갔다. 레몽은 격분했고, 루이와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예루살렘에서 루이는 5월 말 회복된 콘라트와 재회했다. 콘라트는 마누엘의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한 후 배를 타고 아크레에 도착했다. 루이는 성묘 교회에서 부활절 미사에 참여하며 자신의 순례를 완성했다. 이제 남은 것은 군사 행동이었다. 1148년 6월 24일, 아크레 근처의 팔메리아 평원에서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십자군 회의 중 하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예루살렘 왕 보두앵 3세와 그의 어머니이자 섭정인 멜리장드, 템플 기사단 총장, 병원 기사단 총장, 예루살렘, 트리폴리, 안티오크의 주요 귀족들, 그리고 두 십자군 군주가 참석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에데사를 탈환하려는 원래 목표를 포기하고, 다마스쿠스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전략적으로 재앙적이었다. 다마스쿠스는 당시 무슬림 세계에서 예루살렘 왕국과 가장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도시였다. 다마스쿠스의 지배자 우누르는 알레포와 모술의 장기 왕조와 대립하고 있었다. 1140년대 초, 장기가 다마스쿠스를 공격하려 했을 때, 우누르는 예루살렘 왕국과 동맹을 맺고 공동으로 방어했다. 이 적대 관계는 예루살렘 왕국에게 전략적 완충지대를 제공했다. 누르 알딘이 남하하려 해도, 다마스쿠스가 그의 배후에 있었기에 쉽지 않았다. 다마스쿠스를 공격하는 것은 이 균형을 깨뜨리고, 무슬림 세계를 통합하도록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크레 회의의 참석자들은 다마스쿠스 공격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첫째, 에데사는 너무 멀었고, 알레포는 더욱 어려운 목표였다. 반면 다마스쿠스는 예루살렘에서 불과 며칠 거리에 있었다.
둘째, 다마스쿠스는 부유한 도시였다. 그곳을 점령하면 막대한 전리품을 얻을 수 있었다. 유럽에서 온 십자군들은 성과를 원했고, 짧은 원정으로 쉽게 얻을 수 있는 승리를 바랐다.
셋째, 예루살렘 왕국의 일부 귀족들, 특히 왕의 어머니 멜리장드와 그녀의 측근들은 다마스쿠스를 예루살렘 왕국에 편입시키고 싶어했다. 그들은 우누르와의 동맹이 일시적이며 언젠가는 적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다마스쿠스를 오랫동안 알았던 현지 귀족들, 특히 트랜스요르단의 영주들은 이 계획에 반대했다. 그들은 다마스쿠스를 공격하면 우누르가 누르 알딘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이고, 그것은 무슬림의 통합을 촉진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무시되었다.
1148년 7월 24일, 약 5만 명의 십자군이 다마스쿠스를 향해 진군했다. 이것은 2차 십자군 전쟁에서 유일한 대규모 공세였다. 루이, 콘라트, 보두앵이 이끄는 연합군은 도시 서쪽에서 접근했다. 다마스쿠스 서쪽에는 구타라고 불리는 광활한 과수원 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이 과수원들은 풍부한 물과 그늘을 제공했지만, 군사적으로는 방어하기 좋은 지형이었다. 7월 24일, 십자군은 과수원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우누르의 군대는 과수원 안에서 완강하게 저항했다. 투르크 궁수들은 벽 뒤에 숨어 화살을 쏘았고, 십자군은 좁은 길에서 대형을 갖추기 어려웠다.
치열한 전투 끝에 십자군은 과수원의 상당 부분을 점령했다. 7월 25일과 26일, 그들은 계속 전진하여 다마스쿠스의 외곽 성벽에 접근했다. 도시 안에서는 공포가 퍼졌다. 우누르는 즉시 알레포의 누르 알딘과 모술의 사이프 알딘에게 긴급 구원 요청을 보냈다. 그는 평생의 적들에게 도움을 구해야 하는 굴욕을 감수했다. 다마스쿠스의 주민들도 성벽을 지키기 위해 나섰고, 여성들까지 돌을 나르며 방어에 참여했다. 역사가 이븐 알카라니시는 "도시의 모든 사람이 성전에 참여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7월 27일, 십자군 진영에서 이상한 결정이 내려졌다. 지휘관들은 서쪽 과수원 지대에서 철수하여 남동쪽의 더 개활된 평원 지대로 진지를 옮기기로 했다. 여러 이유가 제시되었다. 일부는 과수원의 좁은 길이 대규모 공격에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다른 이들은 남동쪽에서 공격하면 도시를 더 쉽게 포위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이유는 예루살렘 왕국의 일부 귀족들이 비밀리에 제시했다는 음모론이었다. 후대의 연대기 작가들, 특히 독일의 역사가들은 예루살렘의 귀족들이 다마스쿠스로부터 뇌물을 받고 진지 이동을 제안했다고 주장했다. 다마스쿠스가 함락되면 그 영토는 유럽에서 온 십자군 귀족들에게 돌아갈 것이고, 현지 귀족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의도적으로 원정을 실패시켰다는 것이다.
진실이 무엇이었든, 진지 이동은 재앙이었다. 새로운 진지에는 물이 없었다. 과수원의 풍부한 샘과 시냇물은 이제 다마스쿠스 수비군의 손에 있었다. 7월의 시리아는 작열하는 더위로 가득했고, 물 없이는 군대를 유지할 수 없었다. 더욱이 남동쪽의 개활지는 방어하기 어려웠다. 투르크 기병들이 쉽게 십자군 진영을 괴롭힐 수 있었다. 반면 과수원의 벽과 나무들은 어느 정도 보호를 제공했었다. 십자군은 이제 모든 이점을 잃었다.
더 큰 재앙은 정치적 차원에서 발생했다. 7월 28일, 누르 알딘이 이끄는 알레포의 구원군이 다마스쿠스에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모술의 군대도 함께 오고 있었다. 십자군 진영은 패배주의에 빠졌다. 지휘관들 사이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루이는 계속 포위를 유지하자고 주장했지만, 예루살렘의 귀족들은 철수를 요구했다. 그들은 구원군이 도착하면 십자군이 역포위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콘라트는 이미 지쳐 있었고, 소아시아에서의 참패가 여전히 그를 괴롭혔다. 물 부족으로 병사들은 갈증에 시달렸고, 말들도 쓰러지기 시작했다.
7월 28일 오후, 십자군 지휘관들은 철수를 결정했다. 그들은 포위를 시작한 지 불과 4일 만에 포기한 것이다. 철수는 혼란스러웠다. 투르크 기병들이 후위를 공격했고, 많은 병사들이 퇴각 중에 목숨을 잃었다. 다마스쿠스의 수비군은 성문을 열고 나와 도주하는 십자군을 추격했다. 십자군은 간신히 예루살렘 왕국의 영토로 돌아왔지만, 그들의 사기는 완전히 꺾여 있었다.
다마스쿠스에서의 참패는 2차 십자군 전쟁의 종말이었다. 루이와 콘라트는 더 이상 성지에 머물 이유를 찾지 못했다. 콘라트는 9월에 먼저 출발했다. 그는 마누엘과의 관계를 회복했고, 비잔티움을 거쳐 육로로 귀국했다. 1149년 2월, 그는 독일에 도착했다. 루이는 더 오래 머물렀다. 그는 안티오크의 레몽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1149년 6월, 레몽은 누르 알딘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머리는 잘려 알레포로 보내졌고, 누르 알딘은 그것을 바그다드의 칼리파에게 선물로 보냈다. 루이는 이 소식을 듣고 깊은 죄책감에 빠졌다. 만약 그가 레몽의 계획을 받아들였다면, 누르 알딘을 약화시킬 수 있었고, 레몽도 살아남았을지 모른다. 루이는 1149년 여름 시칠리아를 거쳐 배로 귀국했다. 1149년 11월, 그는 파리에 도착했다. 그는 2년 넘게 집을 떠나 있었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2차 십자군 전쟁의 실패는 기독교 세계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십자군의 실패를 설명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했다. 그는 「신에 대한 성찰」이라는 글에서 실패를 신의 뜻으로 설명하려 했다. 베르나르는 신이 십자군을 시험했으며, 인간의 죄 때문에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설명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들은 베르나르의 설교에 속았다고 느꼈다. 베르나르는 승리를 약속했지만,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십자군 운동 자체에 대한 환멸이 퍼졌다. 독일의 연대기 작가 오토 폰 프라이징은 "기독교 세계가 전례 없는 수치를 당했다"고 기록했다.
더 심각한 것은 전략적 결과였다. 십자군의 무능함과 분열은 무슬림 지도자들에게 십자군 국가들이 생각보다 약하다는 확신을 주었다. 다마스쿠스 포위는 무슬림 세계에 통합의 필요성을 각인시켰다. 우누르는 구원군이 도착한 후에도 다마스쿠스를 독립적으로 유지하려 했지만, 힘의 균형은 이미 기울었다. 1154년 4월, 누르 알딘은 다마스쿠스를 평화롭게 흡수했다. 우누르는 저항하지 않고 항복했다. 이제 누르 알딘은 알레포에서 다마스쿠스까지 시리아의 대부분을 통제했다. 예루살렘 왕국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누르 알딘은 단순한 군사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지하드를 이념으로 삼았고, 십자군을 성지에서 몰아내는 것을 생애의 목표로 삼았다. 그는 이슬람 세계의 통합을 추구했고, 정의와 경건함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치세 동안 알레포와 다마스쿠스에는 학교, 병원, 모스크가 세워졌다. 그는 무슬림 대중의 지지를 받았고, 그의 군대는 높은 사기로 충만했다. 1164년, 누르 알딘은 안티오크 공 보에몽 3세와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를 하림 전투에서 격파하고 그들을 포로로 잡았다. 1170년대에는 그의 부하 살라딘이 이집트를 장악했다.
살라딘은 누르 알딘의 유산을 계승했다. 누르 알딘이 1174년 사망한 후, 살라딘은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합하여 예루살렘 왕국을 완전히 포위했다. 1187년 7월 4일, 하틴 전투에서 살라딘은 예루살렘 왕 기 드 뤼지냥이 이끄는 십자군을 완전히 격파했다. 예루살렘 왕국의 주요 귀족들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고, 성 십자가의 유물이 살라딘의 손에 넘어갔다. 하틴 전투 후 3개월 만에, 1187년 10월 2일,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88년간의 프랑크 지배가 끝났다.
2차 십자군 전쟁에서 예루살렘 함락까지의 40년은 이 실패가 만든 역사적 귀결이었다. 1148년 다마스쿠스 성벽 아래서 십자군이 철수했을 때, 그들은 단순히 한 번의 전투에서 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무슬림 세계의 통합을 촉발시켰고, 누르 알딘과 살라딘이라는 위대한 지도자들이 등장할 무대를 마련했다. 2차 십자군 전쟁의 실패는 전략적 오판, 개인적 갈등, 그리고 정치적 근시안의 결과였다. 루이는 레몽의 현명한 조언을 무시했고, 개인적 순례를 군사적 목표보다 우선시했다. 예루살렘의 귀족들은 단기적 이익에 눈이 멀어 장기적 전략을 무시했다. 비잔티움은 십자군을 적으로 대했고, 십자군은 비잔티움을 신뢰하지 않았다. 무슬림 지도자들은 분열되어 있다가 십자군의 위협 앞에서 단합했다.
에데사 함락으로 시작된 2차 십자군 전쟁은 다마스쿠스에서 치욕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 파장은 40년 동안 계속되었고, 결국 예루살렘의 상실로 귀결되었다.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그들은 신의 뜻이 자신들과 함께한다고 믿었다. 1187년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탈환했을 때, 무슬림들은 알라가 승리를 주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역사는 신의 개입보다는 인간의 선택으로 만들어진다. 2차 십자군 전쟁의 지도자들이 현명하게 행동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질투, 탐욕, 근시안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결과는 기독교 세계의 가장 큰 성취 중 하나였던 성지의 상실이었다.
2차 십자군 전쟁은 중세 역사에서 가장 교훈적인 실패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이 원정은 위대한 야망으로 시작되었지만, 형편없는 실행으로 끝났다. 베르나르의 열정적인 설교는 수만 명을 동원했지만, 전장에서의 리더십 부재를 메울 수는 없었다. 두 명의 강력한 군주가 참여했지만, 그들 사이의 협력은 미약했다. 막대한 자원이 투입되었지만, 전략적 사고는 부족했다. 결국 2차 십자군 전쟁은 야망과 현실 사이의 괴리, 이상과 실제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가 되었다. 그것은 승리의 역사가 아니라 실패의 역사였고, 그 실패는 성지 전체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C%A0%9C2%EC%B0%A8%20%EC%8B%AD%EC%9E%90%EA%B5%B0%20%EC%9B%90%EC%A0%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