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틴 전투-십자군 왕국의 붕괴

by 레옹
osf5iloHKajWiUFdjVCQtwWUIO0GjeLr8C9V16ljROEHKnYmYK4NWKl9VKHSGNq5uhH7Jyj8XXod6vtnp4TmdKjsBP7XxVi0pMgc9cI6L1GioKlbXQL0cuWNzs3u28wp07WTEubiANJE3SV_a2k9uQ.jpg

1185년 5월, 예루살렘 왕국의 왕 보두앵 4세가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나병이 그의 몸을 완전히 파괴한 지 오래였다. 손은 갈고리처럼 굽어 있었고, 눈은 실명했으며, 발의 궤양으로 더 이상 걷지도 못했다. 그러나 2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 젊은 왕은 살라딘의 거듭된 침공을 막아냈고, 왕국의 존립을 지켜냈다. 1177년 몽지사르 전투에서는 불과 16세의 나이에, 들것에 실려 전장에 나가 20배가 넘는 병력을 이끈 살라딘을 격퇴했다. 신체는 무너져갔지만 정신은 결코 꺾이지 않았던 이 나병왕은, 자신이 살아있는 한 왕국이 무너지지 않을 것임을 증명했다.


그러나 그가 떠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불과 2년 뒤인 1187년 7월 4일, 예루살렘 왕국의 군대는 하틴의 뿔이라 불리는 언덕에서 완벽하게 괴멸당했다. 2만 명의 병력 중 200명의 기사만이 간신히 탈출했다. 왕 기 드 뤼지냥은 포로가 되었고,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의 기사들은 대부분 살라딘의 명령으로 참수당했다. 3개월 뒤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88년간 유지되던 십자군 국가는 사실상 붕괴했다. 역사상 보기 드문 완벽한 재앙이었다. 그리고 이 재앙은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보두앵 4세가 세상을 떠난 후 왕위는 그의 조카인 일곱 살 소년 보두앵 5세에게 넘어갔다. 섭정은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가 맡았다. 레몽은 왕국에서 가장 경험 많은 귀족 중 한 명으로, 보두앵 4세의 치세에서도 섭정을 지낸 바 있었다. 그는 현실주의자였다. 살라딘이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합하며 십자군 국가를 포위한 상황에서, 무모한 공세보다는 방어와 외교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살라딘과 4년 휴전 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어린 왕은 1186년 여름, 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제 후계자 문제가 급부상했다. 보두앵 4세의 누이 시빌라와 이복동생 이자벨라 중 누가 왕위를 이을 것인가. 고등법원은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랑스와 잉글랜드 왕의 결정을 기다려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시빌라의 삼촌이자 지지자인 조슬린 드 쿠르트네가 레몽을 티베리아스로 보내 총회를 준비하게 한 사이, 예루살렘에서 재빠르게 시빌라를 여왕으로 대관했다. 그리고 시빌라는 즉시 남편 기 드 뤼지냥을 왕으로 임명했다.


이것은 왕국의 귀족들에게 재앙 같은 소식이었다. 기 드 뤼지냥은 1180년 정치적 위기 속에서 황급히 시빌라와 결혼한 푸아투 출신의 기사였다. 보두앵 4세는 처음에 그를 섭정으로 임명했지만 곧 그의 무능함을 깨달았다. 1183년 살라딘이 케락 성을 포위했을 때, 보두앵 4세는 기가 군대를 효과적으로 지휘할 수 없다고 판단해 직접 들것에 실려 구원에 나섰다. 그 후 보두앵 4세는 기를 왕위 계승에서 배제하려 했고, 왕국의 주요 귀족들 - 레몽, 발리앙 디벨랭, 안티오크의 보에몽 3세 - 모두가 기의 왕위 계승에 반대했다. 그러나 보두앵 4세가 죽고 어린 보두앵 5세마저 사망하자, 정치적 음모를 통해 기가 왕이 된 것이다.


레몽은 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티베리아스로 돌아갔다. 왕국은 분열되었다. 한쪽에는 신참 귀족들과 성전기사단 총장 제라르 드 리드포르를 비롯한 기의 지지자들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레몽을 중심으로 한 오랜 현지 귀족들이 있었다. 기는 레몽이 반역했다며 1186년 10월 갈릴리를 침공하기까지 했다. 왕국은 외적 앞에서 내전 직전의 상황이었다.


1187년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케락의 영주 레노 드 샤티용이 살라딘과의 휴전 협정을 깨고 메카 순례단을 습격했다. 이것은 치명적인 도발이었다. 살라딘은 레노를 죽이겠다고 맹세했고, 본격적인 침공 준비에 들어갔다. 5월에는 그의 군대가 크레송 샘에서 성전기사단이 이끄는 십자군 병력을 궤멸시켰다. 150명의 기사와 300명의 보병이 전사했다. 이 패배는 왕국의 사기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지만, 동시에 분열된 왕국을 통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전기사단이 무슬림 창끝에 꽂힌 자신들의 머리를 보고 충격을 받은 레몽은 마침내 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6월 말, 살라딘은 골란 고원에서 자신의 생애 최대 규모인 약 4만 명의 군대를 집결시켰다. 그 중 1만 2천 명은 정규 기병이었다. 6월 30일 그는 요르단 강을 건넜고, 7월 2일 티베리아스를 포위했다. 도시는 함락되었고 레몽의 아내 에시바 백작부인이 성채에서 항전하고 있었다. 이것은 명백한 미끼였다. 살라딘은 십자군이 출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십자군 군대는 사포리에(라 세포리)에 집결했다. 여기는 풍부한 물이 있고 방어하기 좋은 위치였다. 군대의 규모는 약 2만 명으로, 예루살렘과 트리폴리에서 온 1,200명의 기사, 안티오크에서 온 50명의 기사, 그리고 약 1만 명의 보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십자군 국가의 모든 성과 요새에서 수비대를 차출한 결과였다. 이것은 일종의 전부 또는 무 전략이었다. 이 야전군이 패배하면 왕국도 끝이었다.


7월 2일 밤 군사회의가 소집되었다. 레몽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티베리아스로 진군하는 것은 정확히 살라딘이 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포리에는 물이 충분하고 방어하기 좋은 위치라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영지인 티베리아스를 잃더라도 왕국의 안전을 위해서는 여기 머물러야 한다고 역설했다. 보두앵 4세도 과거에 같은 전략을 썼다. 1183년 살라딘이 거대한 군대로 침공했을 때, 보두앵 4세는 요새화된 위치를 고수하며 결전을 피했고, 결국 살라딘은 병력을 유지할 수 없어 철수했다.


그러나 성전기사단 총장 제라르 드 리드포르와 레노 드 샤티용이 레몽을 비겁자라고 비난했다. 제라르는 특히 격렬했다. 그는 크레송 전투의 패배를 레몽 탓으로 돌렸고, 이제 다시 레몽이 왕국을 배신하려 한다고 몰아붙였다. 기는 흔들렸다. 그는 1183년 보두앵 4세가 섭정으로 임명했을 때, 공격하지 않고 수비에만 치중했다가 무능하다는 비난을 받았던 기억이 있었다. 역사가들은 기가 레몽의 충성심을 의심했고, 다시 한번 비겁자로 낙인찍히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분석한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가 헨리 2세의 기부금으로 군대를 소집했기에 전투 없이 해산시키기 싫었을 것이라고도 추측한다.


회의가 끝난 후 기는 사포리에에 머물기로 결정한 듯했다. 그러나 그날 밤 제라르가 기의 막사를 찾아갔고, 둘이서만 밤늦게까지 대화를 나누었다. 다음날 새벽, 기는 군대에 티베리아스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레몽은 절망했지만 왕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7월 3일 아침, 십자군 군대는 사포리에를 떠났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어 갔다. 무슬림 경기병들이 끊임없이 화살을 퍼부었다. 행군은 느려졌고, 병사들은 지쳐갔다. 여름의 갈릴리는 뜨겁고 건조했다. 무거운 갑옷을 입은 기사들과 보병들은 숨이 막혔다. 그들은 투란 샘을 지나갔지만 거기서는 2만 명의 군대에게 충분한 물을 공급할 수 없었다. 살라딘의 병력이 계속 수원을 차단했다.


정오 무렵, 레몽은 그날 밤까지 티베리아스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 기는 방향을 바꾸어 카프르 하틴 샘으로 향하기로 합의했다. 거기는 불과 10킬로미터 거리였다. 그러나 무슬림 군대가 이미 그 샘과 군대 사이를 차단했다. 십자군은 하틴 근처의 메스케나라는 마른 고원에서 야영할 수밖에 없었다. 물은 없었다. 갈릴리 호수는 바로 눈앞에 보였지만, 무슬림 군대가 길을 막고 있었다. 무슬림 사료는 기록한다. "고양이 한 마리도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무슬림 군대가 십자군 진영을 완전히 포위했다고. 십자군은 "절망적이고, 목마름에 고통받았고" 반면 살라딘의 병사들은 "승리를 예감하며 환호했다."


그날 밤은 지옥이었다. 물 없이, 적에게 포위되어, 끊임없는 화살 공격을 받으며 밤을 보내야 했다. 일부 역사가는 십자군이 그날 밤 내린 잘못된 결정 - 사포리에로 돌아가지 않고 하틴에 머물기로 한 것 - 이야말로 진정한 치명적 실수였다고 본다.


7월 4일 아침, 살라딘은 마른 풀에 불을 질렀다. 연기가 진영을 뒤덮었다. 숨쉬기도 어려웠고, 목마름과 더위는 화염의 열기로 더욱 악화되었다. 살라딘은 잔인한 심리전을 벌였다. 그의 병사들은 갈릴리 호수의 물로 채운 항아리를 십자군 진영 앞에 가져와서는 목마른 십자군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물을 쏟아버렸다. 그리고 화살 공격이 계속되었다.


기는 즉각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동생 아모리가 병력을 조직했고, 레몽이 선봉에 섰다. 레몽은 기병을 이끌고 살라딘의 전선을 향해 돌격했다. 무슬림 기병들이 길을 열어주었다. 레몽과 그의 부하들은 적진을 돌파했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었다. 무슬림 병력은 즉시 간격을 메웠고, 레몽은 뒤로 돌아가려 해도 점점 두터워지는 적군을 통과할 수 없었다. 그는 사페드로, 그리고 티레로 탈출했다. 시돈의 레지날드와 발리앙 디벨랭도 레몽과 함께 탈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빠져나간 기사는 100명에서 200명 정도에 불과했다.


나머지 십자군은 하틴의 뿔이라 불리는 쌍봉 언덕으로 후퇴했다. 보병들이 먼저 무너졌다. 그들은 갈릴리 호수로 물을 찾아 내려가려 했지만 대부분 살해당했다. 기사들은 언덕에서 여러 차례 돌격을 시도했지만 소용없었다. 무슬림 궁수들은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며 계속 화살을 쏘아댔다. 십자군의 갑옷과 근접 전투 능력의 우위는 무의미해졌다. 말들이 화살에 맞아 쓰러지고, 기사들은 물 없이, 지친 상태에서 적의 화살 세례를 받았다.


기의 막사 주변에 마지막 방어선이 형성되었다. 진귀한 성유물인 성 십자가의 일부가 막사에 있었다. 아크레의 주교가 전투에 가져온 것이었다. 십자군은 언덕 위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 일부 기사들은 마지막 돌격을 시도했고, 살라딘 가까이까지 접근해 그가 부하들에게 격려를 외쳐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곧 그 돌격도 무너졌다. 오후가 되자 기의 진지는 완전히 포위되었고, 곧 함락되었다.


기 왕과 대부분의 귀족들이 포로로 잡혔다. 레노 드 샤티용, 성전기사단 총장 제라르 드 리드포르, 구호기사단 총장, 집정관 에메리 드 뤼지냥, 울트라주르당, 토론, 지블레의 영주들이 모두 포로가 되었다. 살라딘은 포로들을 자신의 막사로 데려왔다. 그는 목이 마른 기에게 얼음물을 주었다. 기가 물을 레노에게 건넸다. 살라딘이 말했다. "저 저주받은 자는 내 허락 없이 물을 마셨다. 만약 내가 허락했다면 그는 안전했을 것이다." 그리고 레노를 꾸짖었다. 휴전 협정을 깨뜨렸고, 메카와 메디나라는 두 성스러운 도시를 공격하려 했다고. 살라딘은 직접 일어나 자신의 손으로 레노의 목을 베었다. 기는 공포에 질렸지만 살라딘은 그를 안심시켰다.


포로가 된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 기사들 - 약 200명 - 은 다른 운명을 맞았다. 살라딘은 그들을 십자군 군대에서 가장 효과적인 전사들로 여겼고, 그들을 모두 참수하라고 명령했다. 제라르 드 리드포르만이 총장이라는 이유로 처형을 면했다. 투르코폴 - 십자군을 위해 싸운 현지 기독교인 기병들 - 도 살해당했다. 살라딘은 그들이 한때 무슬림이었다가 개종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머지 포로들은 노예로 팔렸다.


2만 명이 출발했던 십자군 군대에서 살아남은 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약 3천 명의 보병이 어떻게든 주변 시골로 도망쳐 성과 요새화된 도시로 피신했다. 1,200명의 기사 중 레몽, 시돈, 에데사, 이벨랭 같은 네 명의 귀족과 100~200명의 기사만이 포로가 되지 않고 탈출했다. 왕국의 야전군은 사실상 궤멸당했다.


결과는 즉각적이고 재앙적이었다. 성과 도시들의 수비대는 야전군을 만들기 위해 이미 소진된 상태였다. 살라딘의 군대가 한 도시, 한 요새씩 나타났을 때, 시민들은 선택해야 했다. 항복하고 목숨과 소지품을 가지고 떠나거나, 저항하다가 학살당하거나. 당시 전쟁 관습상 저항은 학살, 강간, 노예화를 정당화했다. 당연히 도시들은 하나씩 항복했다. 7월 5일 티베리아스의 에시바 백작부인이 항복했고 트리폴리로 떠났다. 나사렛이 함락되었고, 7월 8일 아크레가, 그 다음 하이파, 카이사레아, 아르수프, 자파, 람라, 이벨랭, 다룸, 시돈, 베이루트, 지블레, 나블루스, 아스칼론이 차례로 떠어졌다. 9월 중순까지 52개의 도시와 요새가 살라딘의 수중에 떨어졌다.


방어할 만한 위치에 있던 티레만이 버텼다. 시빌라의 첫 남편의 형제인 몽페라의 콘라드가 도착해 방어를 지휘했다. 레몽과 시돈의 귀족, 항복한 도시들의 수비대가 티레로 철수했다. 살라딘은 티레 공성전에서 큰 손실을 입고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예루살렘이었다. 10월 2일, 시빌라 여왕, 예루살렘의 라틴 총대주교 헤라클리우스, 그리고 발리앙 디벨랭이 항복을 협상했다. 살라딘은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의 학살과 달리 자비를 베풀었다. 몸값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은 떠날 수 있었고, 지불할 수 없는 사람들은 노예가 되었다. 동방 기독교인들은 보호받는 소수자로 남을 수 있었다.


로마에 패배 소식이 전해졌을 때, 우르바노 3세 교황이 충격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후계자 그레고리오 8세는 즉시 새로운 십자군을 촉구하는 교서를 발표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십자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살라딘 세금이 제정되었다. 제3차 십자군은 1189년에야 시작되었지만, 세 명의 유럽 군주 -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프랑스의 필리프 2세, 영국의 리처드 1세 - 가 참여하는 대규모 원정이 되었다.

레몽 드 트리폴리는 하틴 전투에서 탈출한 후 트리폴리로 돌아갔다. 그는 1187년 9월, 아마도 늑막염으로 사망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하틴의 끔찍한 패배에 대한 슬픔이 그의 병을 악화시켰다고 말한다. 그는 분열된 남자로 역사에 남았다. 일부는 그를 반역자로, 일부는 왕국을 구하려던 현실주의자로 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조언이 옳았다는 것이다. 사포리에를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하틴 전투는 피할 수 있었던 재앙이었다. 그것은 살라딘의 뛰어난 전략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십자군 지도부의 치명적인 실수들의 결과였다. 보두앵 4세는 나병으로 병든 몸으로도 살라딘을 막아냈다. 그는 신중했고, 경험 많은 귀족들의 조언을 들었으며, 불리한 지형에서의 결전을 피했다. 그러나 기 드 뤼지냥은 정반대였다. 그는 군사적 경험이 부족했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욕망이 전략적 판단을 흐렸으며, 무엇보다 레몽 같은 경험 많은 귀족들의 조언을 무시했다.


중세 역사에서 하틴만큼 지도자의 무능으로 인한 패배가 명확한 경우는 드물다. 기 드 뤼지냥은 왕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보두앵 4세가 그것을 알았고, 왕국의 귀족들도 알았다. 그러나 정치적 음모와 왕위 계승의 혼란 속에서 그는 왕이 되었다. 그리고 2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불필요한 전투로, 불리한 지형으로, 물 없는 사막으로 행군했다. 역사가들은 기록한다. 어떻게 젊고 활력 넘치는 왕이, 나병으로 고통받는 소년이 거듭 승리로 이끈 같은 군대를 완전한 패배로 몰아갈 수 있었는가?


하틴의 재앙은 단순히 한 전투의 패배가 아니었다. 그것은 88년간 유지되던 예루살렘 왕국의 사실상의 종말이었다. 십자군은 티레와 몇몇 성을 제외하고 성지에서의 지배력을 상실했다. 제3차 십자군이 일부 해안 도시들을 되찾았지만, 예루살렘은 무슬림의 수중에 남았다. 십자군 국가는 또 다른 세기 동안 해안선을 간신히 유지했지만, 하틴 이후 그들은 결코 이전의 세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나병왕 보두앵 4세가 2년만 더 살았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적어도 티베리아스로 가는 치명적인 행군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 그가 떠나고 무능한 후계자가 왕위를 차지했으며, 1187년 7월 4일 하틴의 메마른 언덕에서 십자군 국가의 꿈은 피와 먼지 속에 무너져 내렸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D%95%98%ED%8B%B4%20%EC%A0%84%ED%88%AC)

작가의 이전글나병왕 보두앵 4세-불굴의 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