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라딘-이슬람 제일의 영웅

by 레옹
F9Wt2nVb_hHAa83E6Ke13l1LAE5GRxYstNMe3pSfdrCr1doTq_Ql5aLWKedEvSEUlSRBYKScFFCf3elSJ6xAWlNlsp9QPzCy3Kb7Yz5IHlvUIcD-bUiWChSUA7n2fqxnwCiUzI7eS3LRFp1GtBlofw.jpg

1187년 7월 4일, 갈릴리 호수 근처 하틴의 뜨거운 언덕에서 십자군 왕국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예루살렘 왕국의 기사들은 목마름과 열기 속에서 무너져 내렸고, 그들이 신성시하던 '신성한 십자가' 유물마저 적의 손에 떨어졌다. 이 결정적 승리를 이끈 인물은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우리에게는 살라딘으로 알려진 쿠르드족 출신의 술탄이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전장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승리 이후 보여준 태도에서 드러났다.


살라딘의 삶은 12세기 중동의 복잡한 정치 지형을 그대로 반영한다. 1138년경 티크리트에서 태어난 그는 쿠르드족 군인 가문의 아들로, 아버지 나즘 앗딘 아이유브와 숙부 아사드 앗딘 시르쿠흐 모두 시리아의 젱기 왕조를 섬기는 장군이었다. 그가 태어난 바로 그날 밤, 가족은 티크리트를 떠나 모술로 향했다. 시르쿠흐가 아무런 이유 없이 기독교인을 살해한 사건 때문에 칼리프의 노여움을 산 탓이었다. 이 사건은 어린 살라딘에게 기독교인과 유대인, 즉 '성서의 백성'에 대한 이슬람의 원칙을 깊이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어린 살라딘은 바알베크와 다마스쿠스에서 성장했다. 그는 쿠란 암송, 아랍 시, 수학, 법학을 공부했고, 특히 유명한 아랍 시인 아부 탐맘의 시를 즐겨 낭송했다. 당대 사료들은 그가 유클리드 기하학,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그리고 여러 종교학 분야에 정통했다고 기록하지만, 정작 본인은 군사 훈련보다 종교 연구에 더 관심이 많았다. 14세에 결혼한 그는 이른 나이부터 금욕적인 생활을 추구했다. 말에 대한 열정도 남달랐다. 그는 아라비아 명마들의 혈통을 외우고 있었으며, 뛰어난 폴로 선수로도 알려졌다. 체스 또한 즐겼는데, 이는 당시 귀족들 사이에서 흔한 취미였다. 그의 외모는 동시대 기록에 따르면 키가 작고 둥근 얼굴에 검은 수염을 기른, 날카롭고 민첩한 검은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살라딘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164년 숙부 시르쿠흐를 따라 이집트 원정에 나서면서부터였다. 당시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는 쇠퇴 일로를 걷고 있었고, 시리아의 누르 앗딘과 예루살렘 왕국이 이집트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하던 상황이었다.


1169년 숙부 시르쿠흐가 사망하자, 예상 밖으로 31세의 살라딘이 이집트의 재상에 임명되었다. 많은 이들이 그를 누르 앗딘의 꼭두각시로 여겼지만, 살라딘은 점진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1171년, 그는 200년간 이어진 시아파 파티마 왕조를 폐지하고 수니파 아바스 칼리프의 권위를 복원했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결단이 아니라 이슬람 세계의 통합을 향한 첫 걸음이었다. 1174년 누르 앗딘이 사망하자 살라딘은 시리아로 진출했고, 이후 10여 년간 다마스쿠스, 알레포, 모술 등을 차례로 장악하며 이집트와 시리아를 아우르는 아이유브 왕조를 건설했다.


살라딘의 군사적 천재성은 하틴 전투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십자군 왕국의 내부 분열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1186년, 강경파 기독교 기사 르노 드 샤티용이 메카로 향하는 무슬림 대상을 공격하고 휴전 협정을 파기하자, 살라딘은 이를 명분으로 대규모 원정을 개시했다. 하틴에서 그는 십자군을 물 없는 황무지로 유인한 뒤, 수적 우위와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갈증에 시달리던 십자군 기사들은 제대로 된 전투조차 벌이지 못한 채 항복했다. 예루살렘 왕 기 드 뤼지냥은 포로가 되었고, 르노 드 샤티용은 살라딘이 직접 처형했다. 이슬람 율법을 지키지 않은 배신자에 대한 정의의 실현이었다.


하틴의 승리 후 살라딘이 보여준 관용은 당대는 물론 후세에까지 깊은 인상을 남겼다. 1187년 10월, 88년 만에 예루살렘을 탈환한 그는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이 도시를 점령하며 자행한 대학살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포로들에게 몸값을 내고 떠날 기회를 주었다. 남자는 10디나르, 여자는 5디나르, 아이는 1디나르였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는 자신의 개인 재산으로 몸값을 대신 지불했고, 기독교 성지 순례를 허용했으며, 동방 정교회 신자들이 계속 도시에 거주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그는 자신의 업적을 기록할 두 명의 공식 전기 작가를 고용했는데, 이들은 그의 관용을 상세히 남겼다. 이슬람 사료뿐 아니라 기독교 연대기 작가들조차 그의 관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는 단순한 전략적 제스처가 아니었다. 살라딘은 진정으로 이슬람의 정의와 자비 원칙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러나 살라딘의 이야기를 단순히 이상주의적인 영웅담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그는 냉철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그는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했고, 라이벌 무슬림 세력들과도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그의 통치 25년 중 상당 기간을 다른 무슬림 통치자들과의 싸움에 소비했다는 사실은 그가 추구한 통합의 대가가 얼마나 컸는지 보여준다. 또한 그는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종교적 수사를 적극 활용했다. 지하드를 외치며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로 자리매김한 것은 신앙심만큼이나 정치적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편 살라딘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적들과도 맞서야 했다. 니자리 이스마일파의 비밀 조직인 하샤신(Hashshashin)은 당대 중동에서 가장 두려운 암살자 집단이었다. 이들은 1175년과 1176년, 두 차례에 걸쳐 살라딘을 암살하려 시도했다. 첫 번째 시도에서는 13명의 암살자가 그의 진영에 침투했으나 경호원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1176년 5월 22일, 알레포 근처에서 진을 치고 있던 살라딘은 텐트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암살자의 습격을 받았다. 암살자가 그의 머리를 노렸지만, 살라딘은 여전히 머리 갑옷의 캡을 쓰고 있었고 칼이 관통하지 못했다. 이어진 몸싸움에서 암살자는 살라딘의 옷을 찢었지만 경호원들에게 살해되었다.


이 사건 이후 살라딘은 심각한 편집증에 시달렸다. 그는 잠을 잘 때조차 쇠 갑옷을 입고 잤으며, 절대 혼자 있지 않았다. 한 이야기에 따르면, 그가 시리아의 하샤신 거점인 마시아프를 공성하던 중, 어느 날 아침 침대 옆에서 독이 든 단검과 함께 하샤신 특유의 뜨거운 스콘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쪽지에는 그가 공성을 풀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가 적혀 있었다. 단 일주일 만에 살라딘은 포위를 풀었고, 하샤신 지도자 라시드 앗딘 시난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 그 후로 하샤신은 더 이상 살라딘을 암살하려 하지 않았으며, 1192년에는 오히려 그의 동맹이 되었다.


제3차 십자군 원정은 살라딘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1189년부터 영국의 사자심왕 리처드, 프랑스의 필리프 2세,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가 이끄는 유럽 연합군이 성지를 되찾기 위해 밀려왔다. 특히 리처드 1세와의 대결은 살라딘의 군사적 역량을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올렸다. 1191년 아르수프 전투에서 리처드에게 패배했음에도, 살라딘은 끈질긴 방어전으로 십자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양측 모두 지쳐갔고, 1192년 라믈라 조약으로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예루살렘은 무슬림의 손에 남았지만 기독교 순례자들의 출입은 보장되었다.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으나, 살라딘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목표를 지켜냈다.


살라딘과 리처드의 관계는 역사의 흥미로운 장을 이룬다. 전장에서는 적이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존경심을 숨기지 않았다. 리처드가 병으로 고생할 때 살라딘이 과일과 얼음을 보냈다는 일화는 사실 여부를 떠나 당대인들이 살라딘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보여준다. 중세 유럽의 음유시인들은 살라딘을 "고귀한 이교도"로 묘사했고, 단테는 『신곡』에서 그를 지옥이 아닌 림보에 배치했다. 기독교 세계의 적임에도 불구하고, 살라딘은 기사도와 명예를 상징하는 인물로 기억되었다.


1193년 3월 4일, 살라딘은 다마스쿠스에서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가 남긴 재산은 놀라울 정도로 적었다. 한 금화와 몇 십 은화가 전부였다고 한다. 평생 전쟁을 치르고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술탄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청빈함이었다. 그는 자신의 부를 병사들에게 나누어주고,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데 써버렸다. 부인이 옷을 살 돈이 없다고 불평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더 이상 가진 것이 없소.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은 무슬림들을 위한 것이며, 당신을 위해 그들을 속이고 나 자신을 지옥불에 던질 생각은 없소." 그의 장례식에는 적이었던 십자군 기사들까지 애도를 표했다고 전해진다.


살라딘의 개인적 신앙심은 그의 공적 행동만큼이나 주목할 만하다. 그는 매일 다섯 번의 기도를 빠짐없이 수행했고, 라마단 기간에는 엄격하게 금식했다. 이슬람의 다섯 기둥 중 하나인 메카 순례도 실천했다. 그는 시와 정원을 사랑했으며, 학자와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동시대인 우사마 이븐 문키드는 살라딘이 자신의 즉흥시 낭송을 즐겼다고 기록했다. 이러한 문화적 교양과 학문에 대한 존중은 그를 단순한 전사가 아닌 르네상스적 군주로 만들었다.


살라딘의 가족 관계도 흥미롭다. 그의 주된 부인은 이스마트 앗딘 카툰으로, 원래 누르 앗딘의 부인이었다가 1174년 누르 앗딘 사후 살라딘과 결혼했다. 그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가장 유명한 이들은 알아프달, 아즈자히르 가지, 우스만, 마수드, 야쿱 등이다. 어떤 사료는 그가 16명 또는 17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주장하지만, 모두 확인된 것은 아니다. 흥미롭게도 그의 첫째 아들 알아프달은 1170년에 태어났는데, 이는 살라딘이 이집트에서 권력을 장악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살라딘의 유산은 복합적이다. 군사적으로 그는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고 십자군의 팽창을 저지한 영웅이었다. 하지만 그가 세운 아이유브 왕조는 그의 사후 곧 분열되기 시작했고, 1250년 맘루크 왕조에 의해 대체되었다. 그의 정치적 업적은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살라딘이라는 이름이 800년이 넘도록 생명력을 유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힘과 자비, 정의와 관용을 결합한 이상적인 통치자의 상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현대에도 살라딘은 다양한 방식으로 호출된다.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그를 서구 제국주의에 맞선 저항의 상징으로 삼았고, 시리아와 이라크의 독재자들은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의 이미지를 차용했다. 반면 서구 세계에서는 "문명화된 이슬람"의 표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러한 정치적 도구화는 역사적 살라딘과는 거리가 멀다. 진짜 살라딘은 완벽한 성인도, 무자비한 정복자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시대가 요구한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인간적 품위를 잃지 않으려 애썼던 한 인간이었다.


살라딘의 이야기가 오늘날에도 의미 있는 이유는 그가 증오와 폭력의 악순환을 끊으려 했다는 점에 있다. 히틴 이후 예루살렘에서 보여준 그의 관용은 복수가 아닌 화해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물론 그가 완벽하게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다. 십자군 전쟁은 그 후로도 거의 200년간 계속되었고, 기독교와 이슬람 세계의 적대는 여러 형태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한 순간, 한 사람이 다른 길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은 역사에 남을 만한 가치가 있다.


살라딘을 기억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권력과 원칙 사이의 균형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그는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마키아벨리적 군주도 아니었고, 현실을 외면한 이상주의자도 아니었다. 대신 그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 노력했다. 이는 오늘날의 정치 지도자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교훈이다. 권력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이어야 한다는 것, 승리는 상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살라딘은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었다.


역사는 종종 영웅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진정한 영웅은 신화적 완벽함이 아니라 인간적 결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지닌 존재들이다. 살라딘은 권력욕도 있었고, 정적에게 냉혹했으며, 때로는 잔인하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관용과 정의를 실천했고, 적에게조차 존경받는 품격을 지녔으며, 개인적 이익보다 대의를 우선시했다. 이러한 복합성이야말로 살라딘을 단순한 전설이 아닌 살아있는 역사적 인물로 만든다.


12세기 중동의 뜨거운 사막에서 벌어진 전쟁들은 이제 먼 과거의 일이다. 그러나 살라딘이 던진 질문들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힘을 가진 자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승리한 자는 패배한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정의와 자비는 양립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살라딘의 답변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진지했다. 그리고 그 진지함이 800년이 넘는 세월을 건너 오늘날까지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만드는 힘이다. 살라딘은 십자군 시대의 영웅이기 이전에,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품위와 명예의 한 가능성을 보여준 인물로서 역사에 남아 있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C%82%B4%EB%9D%BC%ED%9D%90%20%EC%95%97%20%EB%94%98%20%EC%9C%A0%EC%88%98%ED%94%84?from=%EC%82%B4%EB%9D%BC%ED%9D%90%20%EC%95%97%20%EB%94%98)

작가의 이전글하틴 전투-십자군 왕국의 붕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