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7년 7월 4일 새벽, 갈릴리 호수 서쪽의 건조한 언덕 히틴에서 십자군 역사상 가장 참혹한 패배가 펼쳐졌다. 예루살렘 왕국의 왕 기 드 뤼지냥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2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물 없는 사막을 가로질러 살라딘의 군대와 맞서기로 결정했다. 7월의 팔레스타인은 지옥 같았다. 기온은 섭씨 40도를 넘었고, 갑옷을 입은 기사들은 이동하는 용광로나 다름없었다. 살라딘은 이를 정확히 계산했다. 그는 십자군을 물에서 멀리 유인했고, 그의 궁수들은 불화살로 주변의 마른 풀에 불을 질렀다. 연기가 십자군 진영을 뒤덮었고, 갈증과 더위로 지친 병사들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쓰러져갔다.
전투는 학살이 되었다. 십자군 기사들은 필사적으로 물을 찾아 돌격했지만, 매번 살라딘의 기병들에게 격퇴당했다. 정오쯤, 기 왕의 텐트가 무너졌다. 이것은 왕국의 멸망을 상징하는 순간이었다. 기 왕과 주요 귀족들이 모두 포로로 잡혔고, 가장 신성한 유물인 '신성한 십자가'가 무슬림의 손에 떨어졌다. 하지만 가장 끔찍한 순간은 그 다음에 왔다. 살라딘은 포로가 된 템플 기사단과 구호기사단 기사들, 약 200명을 모두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처형은 수피 신비주의자들과 학자들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그들 대부분은 검을 제대로 다룰 줄도 몰랐고, 처형은 서툴고 잔혹했다.
히틴의 재앙은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예루살렘 왕국의 주요 도시들이 하나씩 항복했다. 9월 20일,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성 안에는 여자와 어린이, 노인들만 남아 있었다. 방어를 지휘한 것은 발리앙 디블린이라는 귀족이었다. 그는 기적적으로 협상을 통해 학살을 막았다. 88년 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거리는 피로 물들었고 수만 명이 학살당했다. 살라딘은 다른 길을 택했다. 그는 몸값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은 풀어주었고, 나머지는 노예로 삼았다. 10월 2일 금요일, 무함마드의 천상 여행을 기념하는 날, 살라딘은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바위의 돔에 걸려 있던 거대한 십자가가 제거되었고, 그 광경을 본 무슬림들은 환호했다.
이 소식이 유럽에 도착했을 때의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교황 우르바누스 3세는 소식을 듣고 8일 후 사망했다. 사람들은 그가 충격으로 죽었다고 말했다. 새로 선출된 그레고리우스 8세는 즉위 후 며칠 만에 회칙을 발표했다. 이 문서는 히틴의 패배를 기독교 세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했다. 교황은 금식과 회개를 요구했고, 유럽의 모든 군주에게 십자군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살라딘 십일조"라 불리는 새로운 세금이 도입되었다. 모든 수입과 재산의 10분의 1을 십자군을 위해 바쳐야 했다. 예루살렘의 상실이라는 충격 앞에서, 많은 이들이 마지못해 동의했다.
유럽의 세 위대한 군주가 십자가를 받들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프랑스 왕 필리프 2세 오귀스트, 영국 왕 리처드 1세 사자심왕. 이 세 명은 각자의 방식으로 중세 유럽의 권력을 상징했다.
바르바로사는 60대 후반이었지만 여전히 강인한 전사였다. 붉은 수염을 가진 이 노황제는 30년 이상 제국을 통치하며 교황, 이탈리아 도시국가들, 반항적인 독일 제후들과 끊임없이 싸워왔다. 그에게 십자군은 단순히 종교적 의무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제국의 위신을 높이며, 분열된 독일 제후들을 하나로 묶을 기회였다. 1188년 3월 27일, 마인츠에서 열린 황제의 궁정 회의에는 4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바르바로사는 십자군 서약을 하고, 참석한 제후들에게도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그의 카리스마와 권위는 압도적이었다.
준비는 일 년 이상 걸렸다. 바르바로사는 세심하게 계획을 세웠다. 그는 헝가리 왕, 세르비아 대공, 비잔틴 황제와 사전에 협상하여 자신의 군대가 그들의 영토를 통과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는 엄격한 군기를 강조했다. 약탈자는 손을 잃고, 살인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명령이 내려졌다. 1189년 5월 11일, 그는 레겐스부르크를 출발했다. 그의 군대는 약 15,000명으로 추산되었는데, 이 중 절반 정도가 기사들이었다.
리처드와 필리프는 다른 길을 택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처음부터 복잡했다. 필리프는 1165년생으로 리처드보다 두 살 연상이었다. 1180년, 15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필리프는 계산적이고 냉철한 정치가였다. 그의 목표는 명확했다. 프랑스 왕권을 강화하고, 플랜태저넷 가문이 프랑스에서 차지하고 있는 광대한 영토를 되찾는 것이었다. 리처드의 아버지 헨리 2세는 프랑스 영토의 거의 절반을 지배했다. 이것은 프랑스 왕에게는 견딜 수 없는 상황이었다.
1180년대 중반, 리처드와 필리프는 친밀했다. 일부 연대기 작가들은 그들이 같은 침대에서 잤다고 기록했는데, 이것은 중세에서 친밀한 우정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이 우정은 정치적 편의에 기반한 것이었다. 1189년, 헨리 2세가 사망하고 리처드가 왕위에 올랐을 때, 역학 관계가 변했다. 이제 리처드는 자신의 광대한 영토를 지켜야 하는 왕이었고, 필리프는 그 영토를 빼앗으려는 적이었다. 십자군은 이 갈등을 일시적으로 동결시켰다. 1188년 1월, 두 왕은 기제에서 만나 십자군 서약을 했다. 하지만 불신의 씨앗은 이미 뿌려져 있었다.
여정은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도나우 강을 따라 행군하며 헝가리를 통과했다. 여름이었고 날씨는 좋았다. 군대는 질서정연했고, 현지인들과의 충돌도 최소화되었다. 하지만 비잔틴 제국에 들어서면서 상황이 변했다. 비잔틴 황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그는 명목상 기독교 군주였고 십자군을 지원해야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살라딘과 동맹 관계에 가까웠다. 비잔틴 제국은 십자군 국가들과 관계가 좋지 않았고, 거대한 독일군이 자신의 영토를 지나가는 것을 위협으로 느꼈다.
이사키오스는 양면 정책을 폈다. 표면적으로는 독일군을 환영했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진군을 방해했다. 시장에서의 식량 판매를 금지하고, 지역 주민들에게 독일군을 공격하도록 부추기기까지 했다. 1189년 가을, 독일군이 아드리아노플 근처에 도착했을 때, 비잔틴군이 그들을 공격했다. 소규모 충돌들이 계속되었다. 바르바로사는 분노했다. 11월, 그는 아드리아노플을 포위하고 도시를 공격했다. 독일군은 우세했고, 도시는 거의 함락 직전까지 갔다.
이 시점에서 바르바로사는 극단적인 계획을 고려했다. 그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고 비잔틴 제국을 정복할 가능성을 논의했다. 그는 교황과 서유럽 군주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만약 이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4차 십자군보다 15년 일찍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외교가 승리했다. 1190년 2월, 이사키오스는 굴복했다. 그는 독일군에게 배를 제공하여 아나톨리아로 건너갈 수 있게 했다. 바르바로사는 자신의 목표가 예루살렘이지 콘스탄티노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지만, 몇 달의 시간을 낭비했다.
아나톨리아는 또 다른 시련이었다.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 킬리지 아르슬란 2세는 명목상 살라딘의 동맹이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다. 그는 독일군과 협상하면서도 동시에 공격했다. 아나톨리아의 지형은 가혹했다. 여름의 열기, 물 부족, 끝없는 산과 사막. 투르크 기병들은 끊임없이 독일군을 괴롭혔다. 그들은 히트앤드런 전술을 사용했다. 말을 타고 접근해서 화살을 쏘고는 재빨리 사라졌다. 독일 기사들은 중무장했기 때문에 이들을 추격할 수 없었다. 보급은 악화되었고, 병사들은 굶주렸다.
5월 18일, 코니아 전투에서 독일군은 셀주크군을 격파하고 도시를 점령했다. 이것은 사기를 높였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군대는 여전히 지쳐 있었고, 목적지는 아직 멀었다. 그리고 6월 10일, 재앙이 일어났다. 독일군은 아르메니아 킬리키아의 살레프 강에 도착했다. 강은 작았지만 물살이 빨랐다. 그날의 정확한 사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버전에 따르면, 바르바로사는 더위를 식히기 위해 강물에서 목욕을 하다가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67세의 황제가 얕은 강에서 익사했다. 그는 수십 번의 전투에서 살아남았고, 30년 동안 제국을 통치했으며,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했다. 그리고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물에 빠져 죽었다.
그의 죽음이 독일 십자군에 미친 영향은 재앙적이었다. 군대의 단결은 바르바로사의 개인적 권위에 의존했다. 그가 사라지자, 제후들 사이의 오래된 경쟁과 갈등이 다시 표면화되었다. 수천 명이 귀국하기로 결정했다. 바르바로사의 시신을 보존하기 위해 식초에 넣었지만, 여름의 더위 속에서 부패는 막을 수 없었다. 안티오크에 도착했을 때, 시신의 상태는 너무 나빠서 그곳에 묻어야 했다. 황제는 결코 예루살렘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폰 슈바벤이 남은 군대를 이끌었지만, 1191년 1월 20일, 그마저도 병으로 사망했다. 바르바로사의 위대한 원정은 이렇게 비극으로 끝났다.
1190년 7월 4일, 리처드와 필리프는 각각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출발했다. 목적지는 시칠리아의 메시나였다. 그곳에서 겨울을 나고, 이듬해 봄에 성지로 향할 계획이었다. 필리프가 먼저 도착했다. 그는 9월 16일 메시나에 입성했고, 시칠리아 왕 탄크레드와 평화롭게 관계를 맺었다. 리처드는 9월 23일에 도착했다. 그의 도착은 폭풍 같았다. 리처드의 함대는 엄청났다. 100척이 넘는 배가 메시나 항구를 가득 메웠다.
문제의 핵심은 리처드의 여동생 조안나였다. 그녀는 시칠리아 왕 굴리엘모 2세와 결혼했었는데, 남편이 1189년에 사망한 후 과부가 되었다. 새로운 왕 탄크레드는 조안나를 팔레르모의 한 궁전에 사실상 감금했고, 그녀의 지참금과 유산을 반환하지 않았다. 리처드는 이것을 개인적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탄크레드에게 조안나의 석방과 금화 2만 온스의 지참금을 요구했다. 탄크레드는 거절했다. 10월 4일, 리처드는 행동에 나섰다. 그는 메시나 해협 건너편의 바뇰라 수도원을 점령했다.
10월 4일, 상황은 폭발했다. 메시나 시민들이 영국 병사들을 공격했고, 리처드는 이것을 도시 전체를 공격할 구실로 삼았다. 그는 전군에 돌격을 명령했다. 영국군은 성벽을 기어올랐고, 문을 부수고, 도시로 밀려들어갔다. 전투는 불과 몇 시간 만에 끝났다. 리처드는 메시나를 점령하고, 자신의 깃발을 성벽에 걸었다. 이것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십자군이 기독교 도시를 공격한 것이다. 필리프는 분노했다. 결국 탄크레드는 협상에 응했다. 그는 조안나를 석방하고, 금화 2만 온스를 지불했다. 리처드는 메시나를 탄크레드에게 돌려주었지만, 그는 도시 밖에 나무로 요새를 건설했다.
메시나에서의 겨울은 긴장으로 가득했다. 리처드와 필리프는 같은 도시에 있었지만, 서로를 신뢰하지 않았다. 더 심각한 문제가 터졌다. 리처드는 필리프의 누이 알리스와 오랫동안 약혼한 상태였다. 하지만 소문에 따르면, 리처드의 아버지 헨리 2세가 알리스를 정부로 삼았고, 심지어 그녀에게서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리처드는 이 결혼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여자, 나바라의 베렝가리아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리처드의 어머니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놀라운 70세의 나이에 알프스를 넘어 베렝가리아를 직접 메시나로 데려왔다. 이것은 필리프에 대한 명백한 모욕이었다.
3월, 협상이 결렬되었다. 리처드는 명확하게 말했다. 그는 알리스와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필리프는 굴욕감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리처드는 지참금을 보상하겠다고 제안했고, 필리프는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두 사람 사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필리프는 결코 이 모욕을 잊지 않았다. 3월 30일, 필리프가 먼저 메시나를 떠났다. 그는 직접 아크레로 향했다. 리처드는 4월 10일에 출발했다. 그의 함대는 200척이 넘었고, 병력은 약 8,000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직접 아크레로 가지 않았다. 운명이 그를 다른 곳으로 인도했다.
폭풍이 함대를 강타했다. 여러 배가 키프로스 해안에 난파했다. 그 중에는 리처드의 약혼녀 베렝가리아와 여동생 조안나를 태운 배도 있었다. 키프로스는 당시 비잔틴 제국의 반란자 이사키오스 콤네노스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자칭 황제를 칭했고, 실제로는 해적 두목에 가까웠다. 이사키오스는 난파한 배들을 약탈했고, 생존자들을 감금했다. 더 나쁜 것은, 그가 베렝가리아와 조안나를 태운 배를 억류하려 했다는 것이다.
5월 6일, 리처드가 키프로스에 도착했다. 이사키오스는 처음에는 친선을 가장했다. 그는 리처드를 해안에서 만나 선물을 주고 사과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포로들의 석방과 약탈한 물건의 반환, 그리고 십자군에 대한 보급과 지원을 요구했다. 이사키오스는 협상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도망쳤다. 리마솔 전투는 짧고 결정적이었다. 이사키오스는 약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해안을 방어하려 했지만, 영국군의 상륙을 막을 수 없었다. 리처드는 개인적으로 선두에 서서 돌격했다. 키프로스군은 패주했고, 리마솔은 하루 만에 함락되었다.
5월 12일, 리처드는 리마솔에서 베렝가리아와 결혼했다. 결혼 후, 리처드는 키프로스 정복을 계속했다. 그는 섬 전체를 체계적으로 장악해 나갔다. 이사키오스는 계속 도망다녔지만, 결국 포위되었다. 항복 협상에서 이사키오스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그는 쇠사슬에 묶이지 않기를 원했다. 리처드는 동의했다. 그리고는 은으로 만든 사슬을 준비했다. 기술적으로 약속을 지킨 것이다. 6주 만에 키프로스 전체가 리처드의 손에 떨어졌다. 이것은 놀라운 군사적 업적이었다. 리처드는 키프로스에서 엄청난 전리품을 얻었다. 더 중요한 것은 전략적 가치였다. 키프로스는 성지에서 불과 10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고, 완벽한 보급 기지였다.
아크레는 1189년 8월부터 포위되고 있었다. 히틴 이후 살아남은 십자군들이 도시를 되찾기 위해 모여들었지만, 그들의 병력은 부족했다. 역설적으로, 포위군이 살라딘의 군대에 의해 역포위당하는 상황이었다. 십자군은 도시와 살라딘의 군대 사이에 끼어 있었다. 보급은 해상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질병이 창궐했고, 굶주림이 만연했다. 1189년 가을, 레오폴트 5세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십자군이 도착했다. 1190년 봄, 바르바로사의 독일군 잔존 세력이 합류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돌파구는 없었다.
필리프는 1191년 4월 20일에 도착했다. 그는 약 600명의 기사와 수천 명의 보병을 이끌고 왔다. 그의 도착으로 공성전이 본격화되었다. 필리프는 공성 무기 전문가였다. 그는 거대한 투석기들을 건설하도록 했다. 이 투석기들은 하루에 수백 개의 돌을 성벽에 던졌다. 하지만 아크레의 방어는 강력했다. 성벽은 두껍고 높았으며, 수비군은 용감했다. 매번 십자군이 성벽에 구멍을 뚫으면, 수비군은 밤에 그것을 수리했다.
6월 8일, 리처드가 마침내 도착했다. 그의 함대가 항구에 들어오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200척이 넘는 배가 돛을 펼치고,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십자군 진영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리처드는 즉시 상황을 장악했다. 그는 필리프보다 더 카리스마가 있었고, 병사들이 더 따랐다. 그는 또한 더 부유했다. 키프로스의 전리품으로 그는 병사들에게 후하게 보상할 수 있었다. 그는 새롭고 더 큰 공성 무기들을 건설했다. 그의 투석기 중 하나는 "하나님의 돌팔매"라고 불렸고, 다른 하나는 "악마의 돌팔매"라고 불렸다.
리처드와 살라딘은 서로 적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서로를 이해했다. 그들은 둘 다 전사였고, 둘 다 명예를 중시했으며, 둘 다 자신들이 싸우는 전쟁이 단순히 영토나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권력, 정통성, 그리고 역사에서의 위치에 관한 것이었다. 후대의 작가들은 이 두 사람을 낭만화했다. 리처드는 용감한 기사의 화신이 되었고, 살라딘은 고귀한 이교도의 이상이 되었다. 하지만 현실의 리처드는 밤낮으로 끊임없는 공격을 명령했다. 수비군에게 휴식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공성탑들이 건설되었고, 지하 갱도가 파여졌다. 하지만 리처드는 도착하자마자 병에 걸렸다. 일부 기록은 그것을 괴혈병이라고 하고, 다른 기록들은 열병이라고 한다. 리처드는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지휘는 계속했다. 그는 심지어 침대를 전선으로 옮겨서 거기서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필리프도 병에 걸렸다. 그는 머리카락이 빠지고 손톱이 빠졌다고 한다. 포위전은 양측 모두에게 악몽이었다. 성 안의 수비군은 굶주렸다. 그들은 말을 잡아먹었고, 그다음에는 개와 고양이를, 마지막에는 쥐를 먹었다. 밖의 십자군들도 좋지 않았다. 질병이 창궐했고, 사망자가 계속 늘어났다.
7월이 되자 상황이 임계점에 도달했다. 십자군의 공격은 더욱 격렬해졌다. 7월 3일, 성벽의 한 부분이 무너졌다. 십자군들이 돌격했지만, 수비군이 간신히 막아냈다. 7월 11일, 또 다른 공격이 있었다. 이번에는 여러 곳에서 동시에 공격이 이루어졌다. 수비군은 점점 더 지쳐갔다. 살라딘은 도시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는 십자군 진영을 여러 번 공격했지만, 격퇴당했다. 7월 12일, 아크레의 수비대장이 항복을 제안했다.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수비군은 목숨을 보장받는다. 2,700명의 무슬림 포로들이 석방된다. 20만 금화가 지불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성스러운 십자가 유물이 반환된다.
7월 12일, 아크레가 항복했다. 십자군들이 성문을 통해 들어갔다. 그들은 거의 2년 만에 처음으로 도시를 점령했다. 환호가 터져나왔다. 병사들은 울었고, 기도했으며, 승리를 축하했다. 하지만 곧 새로운 갈등이 시작되었다. 리처드와 필리프는 각자의 깃발을 성벽에 걸었다. 레오폴트 5세도 자신의 깃발을 걸었다. 리처드는 분노했다. 그는 레오폴트가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깃발을 찢어서 해자에 던져버렸다. 이것은 엄청난 모욕이었다. 레오폴트는 결코 이것을 잊지 않았다.
더 심각한 갈등은 예루살렘 왕위 계승 문제였다. 두 명의 경쟁자가 있었다. 기 드 뤼지냥과 콘라드 드 몽페라. 기는 히틴에서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던 불운한 왕이었다. 콘라드는 티레의 영주로, 1187년 그가 도시를 지켜낸 것은 영웅적이었다. 리처드는 기를 지지했고 필리프는 콘라드를 지지했다. 이 갈등은 십자군 내부를 분열시켰다. 결국 타협이 이루어졌다. 기는 당분간 왕으로 남지만, 그가 죽으면 콘라드가 왕위를 계승한다. 아무도 이 타협에 만족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최악의 갈등을 피할 수 있게 했다.
8월이 되자 필리프가 폭탄 선언을 했다. 그는 프랑스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그의 이유는 건강 문제였다. 하지만 모두가 진짜 이유를 알았다. 그는 리처드와 경쟁에서 이길 수 없었다. 리처드는 더 인기 있었고, 더 부유했으며, 더 카리스마가 있었다. 리처드는 필리프를 붙잡으려 했다. 그는 십자군 서약을 상기시켰다. 하지만 필리프는 단호했다. 그는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리처드가 성지에 있는 동안 그의 영토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8월 3일, 필리프가 아크레를 떠났다. 그의 출발은 십자군에게 큰 타격이었다.
필리프의 출발 후, 리처드는 사실상 십자군의 유일한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첫 번째 행동은 냉혹했다. 살라딘은 아크레 항복 조건을 이행하지 않고 있었다. 몸값은 지불되지 않았고, 십자가 유물은 반환되지 않았으며, 포로 교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살라딘은 의도적으로 협상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그는 시간을 벌어 방어를 강화하고 싶었다. 리처드는 인내심이 없었다. 8월 20일, 그는 충격적인 명령을 내렸다. 2,700명의 무슬림 포로들을 모두 처형하라.
처형은 아크레 성벽 밖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살라딘의 군대가 보는 앞에서. 포로들은 묶여서 끌려나왔다. 그들 중에는 여자와 어린이도 있었다. 처형은 몇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칼로, 창으로, 도끼로. 피가 땅을 적셨다. 살라딘의 군대는 충격에 빠졌다. 그들은 구하려고 시도했지만, 십자군의 방어선을 뚫을 수 없었다. 처형이 끝났을 때, 2,700구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 이것은 3차 십자군의 가장 어두운 순간이었다. 리처드의 결정은 냉혹한 군사적 계산이었다. 포로들은 짐이었다. 그들을 데리고 행군하면 속도가 느려졌다. 살라딘이 협상을 지연시키는 한, 포로들은 가치가 없었다. 리처드는 그들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8월 22일, 리처드는 남쪽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그의 목표는 야파였다. 그곳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열릴 것이었다. 리처드의 군대는 약 15,000명으로 추산되었다. 진군은 느리고 조심스러웠다. 리처드는 해안을 따라 이동했다. 그의 오른쪽은 지중해로 보호되었고, 함대가 해안을 따라 이동하며 보급을 제공했다. 하지만 왼쪽은 취약했다. 살라딘의 군대가 계속해서 괴롭혔다. 투르크와 아랍 기병들이 끊임없이 공격했다. 그들은 말을 타고 접근해서 화살을 쏘고는 재빨리 물러났다.
리처드는 엄격한 행군 대형을 유지했다. 보병들이 바깥쪽에 서서 방패벽을 만들었다. 그 안에 기사들이 말을 타고 이동했다. 십자궁수들이 보병들 사이에 배치되어 적 기병들을 저지했다. 가장 중요한 명령은 대형을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돌격해서는 안 되었다. 만약 기사들이 대형을 이탈하면, 전체가 무너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엄청난 인내를 요구했다. 기사들은 전사로 훈련받았다. 그들의 본능은 적을 보면 돌격하는 것이었다. 화살에 맞으면서도 가만히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은 고문이었다.
8월 말, 더위는 극심했다. 병사들은 갑옷 안에서 구워지는 것 같았다. 물은 귀했다. 살라딘의 전술은 우물을 독살하거나 메우는 것이었다. 십자군은 자주 목마름에 시달렸다. 질병도 계속되었다. 이질, 말라리아, 열병. 매일 병사들이 죽었다. 시신들은 길가에 버려졌다. 하지만 리처드는 계속 전진했다. 그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종종 최전선에 있었다. 그는 병사들과 함께 걷고, 그들을 격려했다.
9월 7일, 아르수프 근처에서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살라딘은 이번에는 정면 대결을 선택했다. 그는 약 20,000명의 군대를 모았다. 그의 계획은 십자군 종대를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하여 대형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공격이 시작되었다. 무슬림 궁수들이 화살비를 퍼부었다. 기병들이 돌격했다. 북소리와 나팔소리, 전투 함성이 전장을 가득 메웠다. 십자군은 계속 전진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대형을 유지하면서. 화살들이 방패에 꽂혔고, 병사들이 쓰러졌다. 하지만 대형은 무너지지 않았다.
정오가 되자 공격은 더욱 격렬해졌다. 살라딘은 특별히 후위대를 집중 공격했다. 후위는 구호기사단이 맡고 있었다. 그들은 엄청난 압력을 받았다. 기사들과 말들이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구호기사단장은 리처드에게 사자를 보내 돌격 허가를 요청했다. 리처드는 거절했다. 아직 때가 아니었다. 기사단장은 다시 요청했다. 리처드는 다시 거절했다. 긴장은 극에 달했다. 구호기사단 기사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오후 2시쯤, 두 명의 기사가 명령을 어기고 돌격했다. 그들은 참을 수 없었다. 다른 기사들이 그들을 따랐다. 순식간에 구호기사단 전체가 돌격했다.
이것은 위기였다. 만약 리처드가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면, 전체 대형이 무너질 수 있었다. 하지만 리처드는 즉시 판단을 내렸다. 구호기사단을 멈출 수 없다면, 전군을 투입하는 것이 낫다. 그는 나팔을 불게 했다. 돌격 신호였다. 템플 기사단이 돌격했다. 리처드 자신이 예비대를 이끌고 돌격했다. 수천 명의 기사가 동시에 돌진했다. 땅이 흔들렸다. 중무장한 기병의 돌격은 중세 전쟁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무슬림 전선이 무너졌다. 살라딘의 기병들은 십자군 기사들의 충격을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은 흩어졌다. 십자군은 계속 돌격했다. 그들은 무슬림 진영 깊숙이까지 밀고 들어갔다. 살라딘은 예비대를 투입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의 군대는 패주했다. 수천 명이 전사했다. 무슬림군은 내륙으로 도망쳤고, 십자군은 추격하지 않았다. 리처드는 규율을 회복했다. 그는 추격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흩어진 군대는 취약했다. 승리로 충분했다.
아르수프 전투는 리처드의 군사적 천재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위기의 순간에 완벽하게 대응했다. 그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가, 순간적으로 결단을 내렸다. 그의 타이밍은 완벽했다. 전투 후, 십자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들은 무적의 살라딘을 격파했다. 리처드는 전설이 되었다. 무슬림들도 그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들은 우는 아이들에게 "조용히 하지 않으면 말리크 리크(리처드 왕)가 온다"고 말했다고 한다.
9월 10일, 십자군은 야파에 도착했다. 도시는 텅 비어 있었다. 살라딘이 철수하면서 파괴한 것이다. 성벽은 무너졌고, 건물들은 불탔다. 하지만 항구는 여전히 사용 가능했다. 리처드는 도시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성벽을 수리하고, 건물을 재건했다. 야파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의 핵심 거점이었다. 여기서 약 60킬로미터만 가면 예루살렘이었다. 리처드의 다음 목표는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상황은 복잡했다.
첫째, 계절이 문제였다. 이미 가을이었고,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의 겨울은 비가 많고 춥다. 진군과 공성전이 어려워진다. 둘째, 보급이 문제였다. 예루살렘은 내륙 깊숙이 있었다. 해안에서 60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산악 지형이었다. 보급선이 길고 취약했다. 셋째,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해도 유지가 문제였다. 도시는 적대적인 영토로 둘러싸여 있었다. 리처드는 이 모든 것을 고려했다. 그는 군사 전문가들과 회의했다. 대부분은 신중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지적했다.
10월과 11월, 리처드는 야파와 아스칼론 사이의 해안 지대를 강화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남쪽의 아스칼론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아스칼론은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을 연결하는 핵심 지점이었다. 만약 십자군이 아스칼론을 장악하면, 살라딘의 보급선을 끊을 수 있었다. 11월, 리처드는 아스칼론으로 이동했다. 도시는 살라딘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다. 성벽은 땅에 평평하게 되었고, 모든 건물이 부서졌다. 리처드는 재건을 명령했다. 이것은 엄청난 작업이었다. 수천 명의 병사가 석공이 되었다. 리처드 자신도 돌을 나르며 일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국에서 온 소식은 걱정스러웠다. 리처드의 동생 존이 반란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더 나쁜 것은, 필리프가 약속을 어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노르망디를 공격하고 있었다. 리처드는 분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성지에 있었고, 프랑스는 멀었다. 그는 어머니 엘레오노르에게 편지를 보내 상황을 관리하도록 했다. 70대의 엘레오노르는 놀라운 에너지로 리처드의 이익을 지켰다. 하지만 리처드는 불안했다. 그는 너무 오래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12월 말, 논란 끝에 리처드는 예루살렘으로 진군하기로 결정했다. 십자군의 압력이 너무 컸다. 그는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1192년 1월 3일, 십자군은 야파를 출발했다. 날씨는 악화되고 있었다. 비가 쏟아졌고, 길은 진흙탕이 되었다. 진군은 느렸다. 병사들은 젖었고 추웠다. 질병이 다시 창궐했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 전진했다. 1월 중순, 십자군은 베이트 누바에 도착했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불과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맑은 날에는 성벽이 보였다. 십자군들은 흥분했다. 그들은 마침내 목표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리처드는 주저했다. 그는 정찰병들을 보냈고, 그들의 보고는 우려스러웠다. 예루살렘의 방어는 강화되었다. 살라딘은 수비군을 증강했고, 보급품을 비축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도시 주변의 모든 우물을 독살하거나 메웠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날씨가 계속 악화되고 있었다. 비는 끊임없이 내렸고, 밤에는 서리가 내렸다.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1월 13일, 리처드는 군사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는 격렬했다. 일부 귀족들, 특히 프랑스 기사들은 즉시 공격을 주장했다. 그들은 이렇게까지 왔는데 물러설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템플 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의 지도자들, 그리고 예루살렘 왕국의 현지 귀족들은 반대했다. 그들은 겨울에 예루살렘을 포위하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 주장했다. 설령 도시를 점령한다 해도, 유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리처드는 이들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그는 군사적 현실주의자였다. 감정보다는 계산이 우선이었다.
1월 13일 밤, 리처드는 결정을 내렸다. 후퇴. 이것은 그의 경력에서 가장 어려운 결정 중 하나였다. 많은 병사들이 울었다. 일부는 분노했다. 그들은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했고, 수많은 전투를 치렀으며, 동료들이 죽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제 목표가 눈앞에 있는데 돌아가야 한다. 후퇴는 비참했다. 폭우 속에서, 진흙을 헤치며, 십자군은 해안으로 돌아갔다. 그것은 패배처럼 느껴졌다.
리처드는 다른 전략을 추구하기로 했다. 아스칼론을 완전히 재건하고 요새화하는 것이었다. 2월부터 4월까지, 리처드는 아스칼론에 집중했다. 거대한 성벽이 재건되었고, 탑들이 세워졌으며, 해자가 파여졌다. 리처드는 개인적으로 감독했다. 그는 건축가들과 상의했고, 설계를 수정했으며, 직접 현장에서 일했다. 이 기간 동안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무슬림 측 기록들조차도 리처드의 에너지와 결단력을 칭찬했다.
하지만 정치적 문제들은 계속되었다. 예루살렘 왕위 계승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4월, 십자군 지도자들의 투표가 있었다. 결과는 명확했다. 콘라드 드 몽페라가 압도적으로 선출되었다. 리처드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는 기에게 키프로스의 완전한 소유권을 주는 것으로 보상했다. 콘라드는 승리를 축하했다. 그는 티레로 돌아가 왕관을 받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왕이 되지 못했다.
4월 28일, 콘라드는 저녁 식사 후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티레의 거리는 좁고 어두웠다. 갑자기 두 명의 남자가 나타나 그를 공격했다. 칼이 번쩍였다. 콘라드는 몇 번 찔렸다. 그는 말에서 떨어졌다. 호위병들이 달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암살자 중 한 명은 그 자리에서 죽었고, 다른 한 명은 체포되었다. 콘라드는 집으로 옮겨졌지만, 몇 시간 후 사망했다. 그의 임신한 아내 이자벨라가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암살자들은 심문을 받았다. 그들은 '산의 노인' 라시드 앗딘 시난의 부하들이었다고 자백했다.
누가 암살을 의뢰했는가? 이것은 3차 십자군의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가 되었다. 일부는 리처드를 의심했다. 하지만 증거는 없었다. 리처드는 격렬하게 부인했고, 그를 아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가 그런 비겁한 방법을 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은 살라딘을 의심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시난이 자신의 이유로 행동했다는 것이다. 진실은 무엇이든, 콘라드의 죽음은 정치적 교착 상태를 해결했다. 며칠 후, 이자벨라가 재혼했다. 그녀의 새 남편은 샹파뉴의 앙리였다. 그는 리처드의 조카이자 필리프의 친구였다. 5월, 앙리는 예루살렘 왕으로 선포되었다.
5월이 되자 리처드는 예루살렘을 향해 두 번째 진군을 시도했다. 십자군 내부의 압력이 다시 높아졌기 때문이다. 프랑스 기사들, 특히 부르고뉴 공작이 이끄는 세력은 리처드가 예루살렘을 공격하기를 거부한다고 비난했다. 이번에는 조건이 더 나아 보였다. 여름이었고, 날씨는 좋았으며, 군대는 보강되었다. 6월 7일, 십자군은 다시 베이트 누바에 도착했다.
하지만 똑같은 문제들이 다시 나타났다. 물 부족, 취약한 보급선, 강화된 예루살렘 방어. 리처드는 또다시 회의를 소집했다. 이번에는 더 많은 목소리가 신중함을 요구했다. 심지어 일부 프랑스 기사들도 마음을 바꿨다. 그들은 현실을 직시했다.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것은 가능할 수 있지만, 유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6월 말, 또 다른 소식이 도착했다. 살라딘이 야파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리처드에게 결정의 구실을 주었다. 그는 야파를 구해야 했다. 예루살렘 공격은 또다시 연기되었다.
7월 27일, 살라딘은 야파를 공격했다. 그의 군대는 도시를 빠르게 포위했다. 야파의 수비군은 약했다. 단 며칠 만에 성벽의 일부가 무너졌다. 7월 31일, 무슬림군이 도시로 밀려들어갔다. 거리 전투가 벌어졌다. 수비군은 요새로 후퇴했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바로 그때 리처드가 도착했다. 그는 해상으로 와서 단 80명의 기사와 400명의 궁수만을 이끌고 있었다. 그의 주력 군대는 아직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리처드는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물속으로 뛰어들어 해안으로 헤엄쳐갔다. 그의 기사들이 따랐다.
리처드의 도착은 극적이었다. 그는 젖은 옷을 입고, 칼을 휘두르며 무슬림군에게 돌격했다. 그의 용맹함은 전설이 되었다. 그는 마치 한 사람의 군대 같았다. 무슬림군은 놀라서 혼란에 빠졌다. 그들은 리처드가 훨씬 더 큰 군대와 함께 온 것으로 생각했다. 리처드는 거리를 장악하고, 수비군과 합류했다. 밤새도록 그는 방어를 조직했다. 다음 날 아침, 살라딘은 대규모 공격을 준비했다. 그는 수천 명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리처드는 불과 수백 명만을 가지고 있었다.
8월 5일 새벽, 무슬림군이 공격했다. 리처드는 놀라운 전술을 사용했다. 그는 궁수들을 앞에 세우고, 기사들을 두 줄로 배치했다. 한 줄은 무릎을 꿇고, 다른 줄은 서 있었다. 무릎 꿇은 기사들은 창을 땅에 고정했고, 서 있는 기사들은 창을 들었다. 이것은 창의 벽을 만들었다. 궁수들은 쉴 새 없이 화살을 쏘았다. 무슬림 기병들이 돌격했지만, 창의 벽을 뚫을 수 없었다. 공격은 계속되었다. 리처드는 전선을 따라 이동하며 병사들을 격려했다. 한 순간, 그의 말이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리처드는 떨어졌지만 즉시 일어났다. 그는 도보로 계속 싸웠다.
무슬림 기사들은 그의 용맹함에 감탄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살라딘의 동생 알아딜이 리처드에게 두 마리의 말을 선물로 보냈다고 한다. "위대한 전사가 걸어서 싸우는 것은 불명예"라는 메시지와 함께. 정오쯤, 무슬림군은 후퇴했다. 그들은 이 작은 부대를 격파할 수 없었다. 리처드는 야파를 구했다. 이것은 그의 경력에서 가장 놀라운 업적 중 하나였다. 단 수백 명의 병력으로 수천 명의 적을 물리쳤다. 그의 용기와 전술적 창의성은 전설이 되었다. 무슬림들 사이에서도 그는 "말리크 리크", 즉 "리처드 왕"으로 존경받았다.
하지만 리처드는 지쳐 있었다. 그는 거의 2년 동안 성지에서 싸웠다.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그는 여러 번 병에 걸렸고, 수많은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더 중요한 것은, 영국과 프랑스에서의 소식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필리프는 리처드의 영토를 계속 잠식하고 있었다. 그는 노르망디의 여러 성을 점령했다. 존은 더 대담해져서, 공개적으로 리처드에 대항하여 반란을 준비하고 있었다. 리처드의 어머니 엘레오노르는 편지를 보내 아들에게 돌아오라고 간청했다. 상황이 위급했다. 리처드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는 십자군 서약을 완수하지 못했다. 예루살렘은 아직 무슬림의 손에 있었다. 하지만 그가 더 오래 머물면, 자신의 왕국을 잃을 수 있었다.
살라딘도 비슷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의 군대는 5년 동안 전쟁을 치렀다. 병사들은 지쳤고, 제후들은 불만스러웠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토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살라딘의 재정은 고갈되고 있었다. 전쟁 비용은 엄청났다. 그는 또한 건강 문제를 겪고 있었다. 50대 중반의 살라딘은 더 이상 젊지 않았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양측 모두 평화를 원했다. 하지만 누구도 먼저 제안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약함의 표시로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협상은 사절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시작되었다. 리처드는 자신의 조카 앙리 드 샹파뉴를 보냈다. 살라딘은 동생 알아딜을 보냈다. 흥미롭게도, 리처드와 알아딜 사이에는 일종의 상호 존중이 발전했다. 그들은 직접 만나지 않았지만, 선물을 교환했고, 서로에 대해 존경어린 말을 했다. 한때 리처드는 놀라운 제안을 했다. 그의 여동생 조안나와 알아딜이 결혼하고, 그들에게 예루살렘을 공동 통치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혁명적인 아이디어였다. 기독교 공주와 무슬림 왕자가 성지를 함께 다스린다. 양측 종교의 성직자들은 경악했다. 조안나는 격렬하게 거부했다. 살라딘도 회의적이었다. 이것이 진지한 제안이었는지, 아니면 협상 전술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협상은 몇 주 동안 계속되었다. 주요 쟁점은 명확했다. 예루살렘의 통제권, 해안 도시들의 소유, 그리고 기독교 순례자들의 권리. 리처드는 예루살렘을 원했지만, 살라딘은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세 번째 성지였다. 그것을 기독교인들에게 넘기는 것은 살라딘의 명성을 완전히 파괴할 것이었다. 리처드도 이것을 알았다. 그는 또한 자신이 예루살렘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타협이 필요했다. 8월 말, 윤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십자군은 해안 도시들을 유지한다. 무슬림은 예루살렘을 유지한다. 기독교 순례자들은 무장하지 않고 성지를 방문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남았다. 아스칼론. 리처드는 막대한 자원을 투자하여 도시를 재건했다. 그는 그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살라딘은 아스칼론이 이집트로 가는 문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것을 십자군의 손에 남겨둘 수 없었다. 이것은 협상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마침내 타협이 이루어졌다. 아스칼론은 파괴될 것이다. 양측 모두 그것을 가질 수 없다면, 아무도 가질 수 없었다. 리처드는 이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는 수개월 동안 도시를 재건하는 데 일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돌을 날랐다. 그리고 이제 그것을 부수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현실적이었다. 이것이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9월 2일, 1192년, 야파 조약이 서명되었다. 공식 명칭은 '야파와 람라의 평화'였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휴전은 3년 3개월 동안 지속된다. 십자군은 티레에서 야파까지의 해안 지대를 통제한다. 무슬림은 내륙을 통제한다. 예루살렘은 무슬림의 손에 남지만, 기독교 순례자들은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다. 무장하지 않고, 세금만 내면 된다. 아스칼론은 파괴된다. 포로들은 교환된다. 무역은 재개된다. 이것은 완벽한 해결책이 아니었다. 양측 모두 타협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이었다. 그것은 전쟁을 끝냈고, 양측에 시간을 주었다.
조약 서명 후, 많은 십자군 기사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그들은 성묘 교회에서 기도했고, 골고다를 방문했으며, 자신들이 성지에 왔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가지 않았다. 이것은 주목할 만한 결정이었다. 그는 성지를 구하기 위해 왔지만, 그것을 정복자로서가 아니라면 방문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연대기 작가들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리처드가 언덕에서 예루살렘의 윤곽을 보았을 때, 그는 방패로 얼굴을 가렸다. "내가 도시를 정복할 수 없다면, 도시를 볼 자격도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리처드의 성격에 맞는 이야기다. 그는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순례자로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은 그에게 패배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10월 9일, 리처드는 성지를 떠났다. 그의 출발은 조용했다. 화려한 환송도, 승리의 축제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예루살렘은 탈환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십자군 국가들을 구했다. 해안 도시들은 확보되었고, 키프로스는 십자군의 손에 있었다. 그리고 살라딘의 팽창은 멈추었다. 이것들은 중요한 성과였다. 리처드의 함대는 아크레를 떠나 북쪽으로 향했다. 그는 직접 서유럽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항해는 재앙이었다. 폭풍이 함대를 강타했다. 리처드의 배는 아드리아 해에서 난파했다. 그는 일부 동료들과 함께 간신히 살아남았다. 리처드는 비밀리에 유럽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변장을 했다. 상인처럼 입었고, 거짓 이름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의 신분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그는 너무 유명했고, 그의 행동은 너무 왕다웠다. 12월, 그는 오스트리아 근처에서 인식되었다. 체포한 것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였다. 레오폴트는 아크레에서의 모욕을 잊지 않았다. 그의 깃발이 해자에 던져진 것을. 이제 복수할 시간이었다.
리처드의 체포는 국제적 스캔들이었다. 십자군은 교회의 보호 아래 있었다. 십자군 전사를 체포하는 것은 심각한 죄였다. 교황은 레오폴트를 파문했다. 하지만 레오폴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리처드를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넘겼다. 하인리히는 더 큰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는 리처드를 정치적 레버리지로 사용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돈이 필요했다. 하인리히는 엄청난 몸값을 요구했다. 150,000 마르크. 이것은 영국 왕국 연간 수입의 2-3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그것은 약 34톤의 순은에 해당했다.
리처드는 1193년 초부터 1194년 초까지 포로로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영국에서는 드라마가 펼쳐졌다. 리처드의 동생 존은 왕위를 차지하려 했다. 그는 필리프와 공모했다. 필리프는 하인리히에게 리처드를 계속 가두어 두도록 뇌물을 제공했다. 그는 리처드가 풀려나지 않게 하기 위해 몸값만큼의 돈을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인리히는 이것을 리처드에게 알려주었다. "당신의 동생과 당신의 적이 당신을 가두어 두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리처드를 분노하게 했지만, 또한 흥정의 여지를 주었다.
영국에서 리처드의 어머니 엘레오노르는 7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에너지를 발휘했다. 그녀는 몸값을 모으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모든 교구가 세금을 내야 했다. 교회의 금과 은 성물들이 녹여졌다. 귀족들은 소유지의 4분의 1 가치를 내야 했다. 이것은 엄청난 부담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리처드를 원했다. 그는 영웅이었다. 1194년 2월, 마침내 충분한 돈이 모였다. 34톤의 은이 독일로 운송되었다. 하인리히는 돈을 받고 리처드를 석방했다. 리처드가 포로로 있었던 기간은 1년 6주였다.
리처드는 즉시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3월 13일 런던에 도착했다. 환영은 열광적이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두 번째 대관식을 가졌다. 그의 권위를 재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존은 도망쳤다가 나중에 용서를 빌었다. 리처드는 유명하게도 말했다. "두려워 마라. 너는 내 동생이다." 하지만 그는 존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리처드는 영국에 몇 주만 머물렀다. 그의 진짜 관심사는 프랑스였다. 필리프가 그의 영토를 차지했다. 이제 되찾아야 할 시간이었다. 1194년 5월부터 1199년까지, 리처드는 대부분의 시간을 프랑스에서 보냈다. 그는 필리프와 계속 싸웠다.
1193년, 살라딘이 사망했다. 리처드보다 몇 달 먼저. 그는 다마스쿠스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55세였다. 그의 죽음은 조용했다. 화려한 전투가 아니라 질병으로. 살라딘의 개인 소유물을 조사했을 때,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그의 금고에는 47나스리의 은화와 1디나르의 금화만 있었다. 이것은 거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장 강력한 무슬림 통치자가 거의 무일푼으로 죽은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자선과 전쟁에 썼다. 그의 장례식을 치를 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친구들이 돈을 모아야 했다. 이것은 살라딘의 성격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그는 권력을 추구했지만, 개인적 부를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통치자였지만, 또한 신앙인이었다.
살라딘의 죽음 후, 그의 제국은 빠르게 분열되었다. 그의 아들들과 형제들이 영토를 나누었고, 곧 그들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가 이룩한 통일은 그의 개인적 권위에 의존했다. 그가 사라지자, 제국도 사라졌다. 하지만 살라딘의 명성은 살아남았다. 그는 이슬람 세계에서 영웅이 되었다. 흥미롭게도, 그는 또한 유럽에서도 존경받았다. 중세 기독교 작가들조차도 살라딘을 칭찬했다. 그는 고귀한 이교도의 모델이 되었다. 단테는 그를 지옥이 아닌 림보에 배치했다. 이것은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명예였다.
1199년 3월, 리처드는 리무쟁에서 반란 진압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샬뤼-샤브롤 성을 포위하던 중, 성벽 위의 한 석궁수가 그를 쏘았다. 피에르 바질이라는 이름의 이 궁수는 프라이팬을 방패 삼아 리처드를 조롱하고 있었다. 리처드는 그의 대담함에 감탄하면서도 공격을 명령했다. 석궁의 화살이 리처드의 왼쪽 어깨에 박혔다. 리처드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화살을 뽑으려 했지만, 화살촉이 깊이 박혀 있었다. 군의관이 호출되었지만, 그는 서툴렀다. 화살을 뽑는 과정에서 상처가 더 악화되었다. 감염이 시작되었다. 괴저가 퍼졌다. 중세에는 이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리처드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유언을 작성했다. 그의 왕국은 동생 존에게 갈 것이었다. 다른 선택이 없었다. 리처드는 또한 자신을 쏜 석궁수를 용서하라고 명령했다. 성이 함락된 후, 피에르 바질이 포로로 잡혔다. 리처드는 그를 불러 물었다. "왜 나를 쏘았는가?" 피에르는 대답했다. "당신이 내 아버지와 형제들을 죽였습니다. 이제 당신이 나를 죽이려 합니다.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당신이 죽는 것을 본다면 기꺼이 고통을 받겠습니다." 리처드는 그의 용기에 감탄했다. 그는 피에르를 석방하고 100실링을 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리처드가 죽은 후, 그의 부하들은 명령을 무시했다. 그들은 피에르를 잡아 산 채로 가죽을 벗겼다. 복수는 완성되었지만, 그것은 리처드가 원하지 않았던 방식이었다. 리처드는 4월 6일 사망했다. 그는 41세였다. 그는 10년 동안 왕이었지만, 영국에는 6개월도 머물지 않았다. 그는 전사의 삶을 살았고, 전사의 죽음을 맞았다. 그의 죽음은 어리석은 사고였다. 위대한 전투가 아니라 작은 성을 포위하던 중. 영웅적 돌격이 아니라 감염으로.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적절했다. 리처드는 결코 쉬지 않았다. 그는 항상 싸우고 있었다. 크든 작든.
3차 십자군은 표면적으로는 실패였다. 예루살렘은 탈환되지 않았고, 원정에 참여한 세 왕 중 한 명은 도착하기도 전에 죽었으며, 다른 한 명은 중도에 포기했고, 마지막 한 명은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더 복잡하다. 십자군은 해안 지대를 확보했고, 이는 십자군 국가들이 또 다른 100년을 버틸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아크레는 새로운 수도가 되어 번영했다. 키프로스는 십자군의 중요한 기지가 되었다. 무엇보다, 3차 십자군은 십자군 운동이 단순히 종교적 열정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복잡한 정치, 군사 전략, 외교, 그리고 무엇보다 막대한 자원을 필요로 했다.
3차 십자군의 유산은 여러 층위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군사적으로, 그것은 제한된 성공이었다. 예루살렘은 탈환되지 않았지만, 십자군 국가들은 생존했다. 야파 조약은 3년 3개월 동안 지속되기로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더 오래 지속되었다. 십자군 국가들은 또 다른 세기 동안 버텼다. 아크레는 번영하는 도시가 되었고, 1291년까지 십자군 국가들의 수도로 남았다. 키프로스는 십자군의 중요한 기지로 남았고, 1571년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될 때까지 기독교인들의 손에 있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3차 십자군의 성과 덕분이었다.
정치적으로, 3차 십자군은 유럽 권력 구조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리처드의 막대한 지출과 긴 부재는 영국 왕권을 약화시켰다. 그가 남긴 것은 엄청난 빚과 불만스러운 귀족들이었다. 그의 동생 존은 이 부담을 물려받았고, 그것은 결국 1215년 마그나 카르타로 이어지는 위기의 한 원인이 되었다. 역설적으로, 리처드의 십자군은 영국 입헌 정치의 발전에 기여했다. 필리프 2세는 리처드의 부재를 이용해 프랑스 왕권을 크게 강화했다. 그는 노르망디와 다른 플랜태저넷 영토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이것은 프랑스를 유럽의 지배적 세력으로 만드는 과정의 중요한 단계였다.
경제적으로, 3차 십자군은 막대한 자원을 동원했다. 십자군세의 징수는 더 체계적인 과세 시스템의 발전을 촉진했다. 십자군은 또한 신용과 은행 시스템의 발전을 가속화했다. 템플 기사단과 같은 군사 수도회들은 일종의 은행 역할을 했고, 십자군들이 안전하게 자금을 이동할 수 있게 도왔다. 이것은 초기 형태의 국제 금융이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 특히 베네치아, 제노아, 피사는 십자군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그들은 수송, 보급, 금융 서비스를 제공했고, 동방과의 무역 독점권을 얻었다. 이것은 나중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문화적으로, 3차 십자군은 동서 교류를 촉진했다. 전쟁 동안, 양측은 서로에 대해 배웠다. 십자군들은 이슬람 문명의 정교함에 놀랐다. 의학, 수학, 건축, 문학에서 이슬람 세계는 많은 면에서 유럽보다 앞서 있었다. 일부 십자군들은 아랍어를 배웠고, 이슬람 학자들과 대화했다. 그들은 책을 가져갔고, 아이디어를 교환했다. 이것은 나중에 유럽 르네상스에 기여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아랍어 번역을 통해 유럽에 재도입된 것은 부분적으로 십자군 시대의 접촉 덕분이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 의학에 관한 아비센나의 저작, 천문학과 대수학의 발전—이 모든 것이 십자군 시대의 문화 교류를 통해 유럽으로 흘러들어왔다.
군사 기술도 발전했다. 십자군들은 새로운 공성 무기를 보았고, 새로운 전술을 경험했다. 그들은 이것들을 유럽으로 가져갔다. 성의 설계가 변화했다. 십자군 시대의 성들은 이전 것들보다 더 복잡하고 강력했다. 동심원 성벽, 다각형 탑, 살인 구멍—이 모든 혁신들은 십자군 경험에서 나왔다. 십자군들은 또한 무슬림들의 전술, 특히 경기병의 효과적인 사용을 관찰했다. 이것은 유럽 군사 전술에 영향을 미쳤다. 석궁의 사용도 증가했다. 그것은 강력하고 정확했지만, 교회는 처음에는 그것을 "신의 뜻에 반하는" 무기로 여겼다. 하지만 실용성이 신학을 이겼다.
종교적으로, 3차 십자군은 복잡한 유산을 남겼다. 한편으로는 종교적 열정을 보여주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신앙을 위해 집을 떠나고, 고난을 겪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가 얼마나 쉽게 정치적 목적에 이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십자군의 이상과 십자군의 현실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었다.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한 것은 이 간극의 극단적인 예였다. 십자군 운동은 점점 더 그 순수성을 잃었고, 마침내 1291년 아크레가 함락되면서 끝났다.
3차 십자군은 또한 증오와 편견을 강화했다. 양측은 상대방을 악마화했다. 아크레 학살과 같은 잔혹 행위는 오랫동안 기억되었다. 이 증오는 세대를 거쳐 전해졌다. 21세기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 여파를 느낀다. 십자군이라는 단어 자체가 중동에서는 서구의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용어가 되었다. 일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서구의 중동 개입을 "십자군"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부정확하지만, 그것은 십자군이 중동에서 여전히 강력한 상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3차 십자군은 공존의 가능성도 보여주었다. 야파 조약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타협이었다. 양측이 서로의 권리를 인정했다.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을 방문할 수 있었고, 무슬림들은 도시를 통제했다. 이것은 상호 존중의 한 형태였다. 리처드와 살라딘은 결코 만나지 않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일종의 이해가 있었다. 그들의 관계는 적대적이었지만, 또한 어떤 면에서는 존중에 기반했다. 이것은 중요한 교훈이다. 전쟁 중에도, 심지어 종교 전쟁 중에도, 상호 존중과 인간성의 순간들이 있을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3차 십자군을 돌아볼 때, 우리는 여러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군사력만으로는 정치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리처드는 모든 전투에서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이기지 못했다. 예루살렘은 탈환되지 않았다.
둘째, 종교적 열정은 강력한 동기가 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실용적인 전략, 보급, 외교가 모두 필요하다.
셋째, 적들도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다. 십자군과 무슬림들은 전쟁을 했지만, 또한 교류했다.
넷째, 타협은 약함이 아니라 지혜의 표시다. 야파 조약은 양측 모두에게 불만족스러웠지만, 그것은 쓸데없는 유혈을 막았다.
다섯째,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인정해야 한다. 십자군들은 성지를 되찾기 위해 왔지만, 그들은 또한 땅과 부를 추구했다. 그들은 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싸웠지만, 그들은 또한 인간적 동기에 의해 움직였다. 이것은 위선이 아니라 인간 조건의 복잡성이다.
여섯째, 역사는 단순한 선과 악의 이야기가 아니다. 리처드는 영웅이었지만 또한 잔인했다. 살라딘은 관대했지만 또한 무자비했다. 그들은 모두 불완전한 인간이었고, 자신들의 시대의 산물이었다.
일곱째, 장기적 결과는 종종 예측할 수 없다. 3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탈환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유럽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그것은 과세 시스템을 변화시켰고, 금융을 발전시켰으며, 문화 교류를 촉진했고, 군사 기술을 향상시켰다. 이것들은 모두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다. 역사는 종종 우리가 계획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여덟째, 개인이 역사를 만든다. 만약 바르바로사가 강에서 익사하지 않았다면, 만약 필리프가 성지에 남았다면, 만약 콘라드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개인의 결정, 우연한 사건, 예상치 못한 죽음이 모두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
아홉째, 전쟁의 비용은 항상 승리의 가치보다 크다. 수만 명이 죽었고, 더 많은 이들이 부상당하고 병들었다. 엄청난 부가 소비되었다. 왕국들이 빚에 빠졌다. 그리고 무엇을 얻었는가? 해안의 좁은 띠, 불안정한 휴전, 그리고 계속되는 갈등. 전쟁은 항상 그것을 시작한 사람들이 약속하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고, 더 적은 것을 성취한다.
마지막으로, 역사는 현재와 대화한다. 우리는 3차 십자군을 공부함으로써 우리 자신에 대해 배운다. 우리는 여전히 같은 질문들과 씨름한다. 정의로운 전쟁이란 무엇인가? 신앙과 이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다른 문화와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3차 십자군의 이야기는 결국 인간 본성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어떻게 위대한 이상을 추구하지만 불완전한 수단으로 그것을 실현하려 하는지, 어떻게 용기와 비겁함이 같은 사람 안에 공존할 수 있는지, 어떻게 명예와 잔혹함이 같은 행동에서 나타날 수 있는지. 8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그 이야기에 매료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 조건의 어떤 근본적인 것,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와 우리가 치르는 대가, 우리가 꿈꾸는 이상과 우리가 직면하는 현실 사이의 영원한 긴장에 대해 말해주기 때문이다.
3차 십자군은 끝났지만, 그것이 제기한 질문들은 영원하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그 이야기를 읽고, 연구하고, 논쟁한다. 역사는 단지 과거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현재와 미래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한다. 그리고 어쩌면, 단지 어쩌면, 우리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이것이 역사 공부의 진정한 가치다. 날짜와 전투를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조건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 이해를 통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것. 3차 십자군은 우리에게 이 교훈을 가르쳐준다. 완벽한 승리는 없으며, 완벽한 패배도 없다. 오직 선택들과 그 결과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배우려는 우리의 의지만이 있을 뿐이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C%A0%9C3%EC%B0%A8%20%EC%8B%AD%EC%9E%90%EA%B5%B0%20%EC%9B%90%EC%A0%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