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4년 4월 13일,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이 무너졌다. 그러나 이 성벽을 무너뜨린 것은 이슬람 군대가 아니었다.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진 서유럽의 기사들이었다. 예루살렘을 되찾겠다는 신성한 서약 아래 모인 4차 십자군은 결국 기독교 세계의 가장 위대한 도시를 약탈하는 역사상 가장 기묘하고 비극적인 일탈을 저질렀다. 이 사건은 단순한 우연이나 불행한 사고가 아니었다. 정치적 야심, 경제적 이해관계, 종교적 분열, 그리고 인간의 탐욕이 복잡하게 얽힌 필연적 귀결이었다.
1198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새로운 십자군을 선포했을 때 유럽은 여전히 1187년 살라딘에게 예루살렘을 빼앗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불과 37세의 젊고 야심찬 교황은 교회의 권위를 회복하고 성지를 되찾기 위해 열정적으로 설교했다. 그는 십자군을 단순한 군사 원정이 아니라 기독교 세계의 통합을 위한 성전으로 구상했다. 교황의 권위 아래 동서 교회가 하나가 되고, 그 힘으로 이슬람을 물리치는 웅대한 비전이었다.
프랑스 북부의 귀족들이 가장 먼저 호응했다. 샹파뉴 백작 티보 3세,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9세, 블루아 백작 루이 등이 십자군에 참여하겠다고 서약했다. 이들은 대부분 20대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귀족들로, 명예와 영광에 대한 갈망, 신앙심, 그리고 모험에 대한 열망이 뒤섞여 있었다. 십자군에 참여한다는 것은 영혼의 구원을 보장받는 것이었고, 동시에 전리품과 새로운 영지를 얻을 기회이기도 했다. 교황은 십자군 참가자들에게 모든 죄의 사면을 약속했고, 그들의 재산과 가족을 교회의 보호 아래 두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십자군을 조직하는 것과 실제로 성지까지 이동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과거 십자군들의 경험이 증명했듯, 육로는 비잔티움 제국과 셀주크 투르크의 영토를 통과하면서 끊임없는 갈등과 위험에 시달려야 했다. 해로가 유일한 현실적 대안이었다. 문제는 프랑스 귀족들에게는 함대가 없었다는 점이다. 제노바 공화국이 제안을 거절하자, 이들은 당시 지중해 최강의 해상 세력이었던 베네치아 공화국과 협상을 시작했다.
1201년 5월, 빌아르두앵의 조프루아를 포함한 십자군 사절단이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그들을 맞이한 것은 86세의 노(老) 총독 엔리코 단돌로였다. 이미 시력을 거의 상실한 노인이었지만, 그의 정치적 수완과 야심은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단돌로는 베네치아의 유력한 법률가 가문 출신으로, 1172년 비잔티움과의 실패한 협상에 참여했을 때 실명했다는 설이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때부터 그가 비잔티움에 대한 깊은 적개심을 품었다고 주장한다.
협상은 베네치아에게 극도로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베네치아는 4,500명의 기사와 그들의 말, 9,000명의 종자, 20,000명의 보병을 이집트까지 수송하기로 약속했다. 여기에 완전무장한 갤리선 50척과 병력 1만 명을 추가로 제공하되, 정복지의 절반을 가져가기로 했다. 대가는 84,000마르크의 은화였다. 이는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금액이었고,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훗날 7차, 8차 십자군에서 준비한 선단(각각 36척, 39척)과 비교해도 규모가 압도적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베네치아가 이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치른 대가였다. 선단을 건조하려면 선원만 14,000명이 필요했는데, 이는 당시 베네치아 성인 남성의 절반에 해당했다. 공화국의 모든 상업 활동을 18개월간 중단시키고, 해외에 나가있는 선박들을 모두 귀환시켰다. 베네치아의 국운 전체를 이 사업에 걸었던 것이다. 만약 십자군이 대금을 지불하지 못한다면, 베네치아 공화국은 파산할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협정이 체결된 지 1년 후인 1202년 6월, 십자군은 베네치아의 리도 섬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재앙이 펼쳐졌다. 도착한 십자군의 수가 약 12,000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예상 인원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많은 십자군 참가자들이 베네치아를 거치지 않고 제노바, 마르세유 등 다른 항구에서 직접 성지로 출발했기 때문이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십자군의 지도자였던 티보 백작이 1201년 5월 출발 전 사망했다는 점이다. 그의 후임으로 이탈리아 북부의 몽페라토 후작 보니파초가 선출되었다.
보니파초는 비잔티움과 복잡하게 얽힌 인물이었다. 그의 형제 레니에르는 비잔티움 공주와 결혼했다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살해당했고, 또 다른 형제 콘라드는 예루살렘의 왕이 되었다가 암살당했다. 보니파초 가문은 동방 정치에 깊숙이 연루되어 있었고, 개인적 원한과 야심을 품고 있었다. 이것이 훗날 십자군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십자군은 약속한 금액의 절반인 약 51,000마르크조차 모으지 못했다. 귀족들이 사재를 털어 보태고, 교회의 성물을 팔아도 턱없이 부족했다. 베네치아인들은 이미 공화국의 운명을 건 엄청난 투자를 한 상태였다. 1년 넘게 상업 활동을 중단하고 함대 건조에 집중했으며, 도시의 모든 자원을 십자군 원정에 쏟아부었다. 90세가 넘은 노령의 총독 단돌로는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정치적 감각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는 십자군에게 제안을 했다. 베네치아의 옛 영토였다가 최근 헝가리 왕국에 반기를 든 아드리아 해의 자라를 공격하여 탈환하면 나머지 빚을 유예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자라는 원래 베네치아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헝가리 왕의 보호 아래 독립을 선언한 기독교 도시였다. 베네치아는 오래전부터 이 도시를 되찾고 싶어했고, 십자군은 완벽한 도구였다.
십자군 지도부는 깊은 갈등에 빠졌다. 교황은 이미 명확하게 기독교 도시 공격을 금지했다. 그러나 함대 없이는 어디로도 갈 수 없었고, 베네치아에 발이 묶인 채 빚만 늘어나는 상황이었다. 식량 공급마저 끊긴 상태에서 선택지는 없었다. 결국 1202년 11월, 십자군과 베네치아 함대는 자라를 향해 항해했다. 자라 시민들은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을 성벽에 걸며 항복 의사를 표시했다. 교황의 사절이 도착하여 철군을 요구했다. 그러나 단돌로는 교황의 명령을 무시했다. 그는 십자군 병사들을 선동하여 공격을 강행했고, 도시는 5일 만에 함락되었다. 단돌로는 자라를 철저히 파괴하고 주민들을 추방했다. 십자군은 처음으로 기독교인의 피를 흘렸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분노했다. 그는 십자군 전체를 파문하려 했으나, 상황은 복잡했다. 십자군을 완전히 파문하면 성지 회복의 꿈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베네치아인들만 파문하고 십자군은 용서했다. 베네치아는 공화정 원칙상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파문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여전히 이 원정이 예루살렘에 도달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단돌로는 이미 다음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자라에서 겨울을 나는 동안, 역사의 방향을 완전히 바꿀 제안이 도착했다. 비잔티움 제국 황제 이사키오스 2세의 아들 알렉시오스 앙겔로스가 사절을 보낸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드라마틱했다. 1195년, 그의 아버지 이사키오스 2세는 형제 알렉시오스 3세에게 쿠데타로 폐위되고 눈이 뽑힌 채 감옥에 갇혔다. 젊은 알렉시오스 왕자는 간신히 탈출하여 서유럽을 떠돌며 지원을 구하고 있었다. 그는 십자군에게 매력적인 제안을 했다. 만약 자신을 콘스탄티노플의 황제로 복위시켜준다면, 20만 마르크의 은화를 지불하고, 1만 명의 비잔티움 군대를 1년간 십자군에 제공하며, 동방정교회를 로마 교회에 복속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이 제안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듯 보였다. 십자군은 베네치아에 빚을 갚고, 강력한 군사적 지원을 받아 이집트를 공격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거대한 이익을 얻고 동지중해의 경쟁자였던 비잔티움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교황은 오랜 숙원이었던 동서 교회의 통합을 이룰 수 있었다. 몽페라토 후작 보니파초는 특히 열성적으로 이 계획을 지지했다. 그의 형제 레니에르는 비잔티움 공주와 결혼했다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살해당했고, 또 다른 형제 콘라드는 예루살렘의 왕이 되었다가 암살당했다. 보니파초 가문은 동방 정치에 깊숙이 연루되어 있었고, 이번 기회는 가문의 세력을 확장할 절호의 찬스였다.
물론 반대도 있었다. 많은 십자군 기사들은 이것이 그들의 서약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토회 수사들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지도부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 1203년 6월, 십자군 함대는 콘스탄티노플 앞바다에 나타났다. 이 도시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부유한 도시였다. 인구 40만 명, 난공불락의 성벽, 찬란한 궁전과 교회들, 그리고 수세기 동안 축적된 부가 그곳에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은 874년 동안 단 한 번도 정복당한 적이 없는 도시였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이중 삼중으로 둘러쳐져 있었고, 높이 12미터의 외벽 뒤로 20미터 높이의 내벽이 솟아 있었다. 96개의 탑이 성벽을 지키고 있었고, 황금빛 돔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십자군 기사들은 처음 이 도시를 보았을 때 경외감에 압도되었다. 빌아르두앵의 연대기는 "그토록 거대한 성벽과 탑들, 부유한 궁전들과 높은 교회들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기록했다. 대부분의 십자군은 파리나 베네치아 같은 서유럽의 도시들을 알고 있었지만, 콘스탄티노플은 그 모든 것을 압도했다. 이 도시는 고대 로마의 시민 구조, 공중 목욕탕, 광장, 기념물, 수도교를 거의 온전히 보존하고 있었다. 서유럽이 암흑시대를 거치는 동안, 콘스탄티노플은 문명의 등대로 빛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계획대로 진행되는 듯했다. 십자군의 공격 앞에서 무능한 황제 알렉시오스 3세는 귀중한 보물들을 챙겨 트라키아로 도망쳤고, 눈이 먼 노(老) 이사키오스 2세가 감옥에서 나와 다시 황제가 되었다. 그의 아들 알렉시오스 4세가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 1203년 8월, 젊은 황제는 약속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곧 심각한 문제가 드러났다. 비잔티움 제국의 국고는 전임 황제들의 무능과 부패로 이미 바닥나 있었다. 약속한 20만 마르크를 지불할 방법이 없었다. 알렉시오스 4세는 교회의 성물들을 녹여 은화를 만들어야 했고, 이는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더욱이 동방정교회를 로마에 복속시키겠다는 약속은 비잔티움인들에게는 배신으로 여겨졌다.
콘스탄티노플 시민들과 십자군 사이의 긴장은 날로 고조되었다. 십자군은 도시 밖 갈라타에 진을 치고 있었지만, 식량과 물자를 계속 요구했다. 알렉시오스 4세는 약속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국고를 탈탈 털었다. 그는 궁전의 보물을 팔고, 교회의 성물을 압수했으며, 심지어 모스크를 약탈하여 무슬림 주민들을 분노케 했다. 시내에서는 작은 충돌들이 발생했다. 프랑스 기사들과 베네치아 상인들은 거만하고 오만했으며, 비잔티움인들은 이들을 미개한 야만인으로 여겼다. 8월 중순, 긴장은 폭발했다. 플랑드르 병사 무리가 시내의 모스크를 공격하자 대규모 화재가 발생했고, 3일 동안 타오른 불은 도시의 광대한 지역을 파괴했다. 수천 명의 라틴계 주민들이 십자군 진영으로 피난했다.
1204년 1월, 궁정 내부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 알렉시오스 두카스라는 귀족이 반란을 일으켜 알렉시오스 4세를 교살하고 알렉시오스 5세 무르추플루스를 자칭했다. 새로운 황제는 즉시 십자군에 대한 지불을 중단하고 그들을 적으로 규정했다. 그는 성벽을 보강하고, 십자군의 배를 공격하기 위해 화공선을 준비했으며, 도시 방어를 강화했다. 비잔티움인들은 처음으로 단결했다. 라틴인들에 대한 증오가 모든 계층을 하나로 묶었다.
십자군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그들은 베네치아에 여전히 엄청난 빚을 지고 있었고, 이제 콘스탄티노플에서도 한 푼도 받을 수 없었다. 돌아갈 수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다. 이때 베네치아 총독 단돌로와 십자군 지도자들은 대담한, 어쩌면 파렴치한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완전히 정복하고 그 부를 나누어 갖기로 합의했다. 그들은 심지어 미리 전리품 분배 방식까지 문서로 작성했다. 베네치아가 4분의 3을, 십자군이 4분의 1을 가져가기로 했다. 새로운 라틴 제국을 세우고, 황제를 선출하며, 영토를 분할하는 계획까지 세밀하게 수립되었다.
1204년 4월 9일, 첫 번째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베네치아의 함선들이 성벽에 접근했고, 공성 사다리가 놓였다. 그러나 비잔티움의 방어는 예상보다 견고했다. 바랑기아 친위대(북유럽 출신 용병들로 구성된 황제의 정예 호위대)가 성벽 위에서 격렬히 저항했다. 그리스 화염(비잔티움의 비밀 무기로, 물 위에서도 타는 액체 화염)이 배들을 불태웠다. 십자군은 격퇴당했고, 수십 명이 전사했다.
4월 12일, 두 번째 공격이 감행되었다. 이번에는 바람의 방향이 십자군에게 유리했다. 강한 북풍이 베네치아의 높은 함선들을 성벽으로 밀어붙였다. 배 꼭대기의 통로가 성벽 위 탑에 닿았고, 플랑드르 기사들이 성벽 위로 뛰어올랐다. 한 탑이 함락되었고, 곧 다른 탑들도 무너졌다. 지상에서는 병사들이 벽돌로 막힌 성문을 곡괭이와 삽으로 파헤쳤다. 클라리의 알레움이 좁은 구멍을 통해 기어들어갔고, 그 뒤를 수백 명이 따랐다. 그들은 안쪽에서 성문을 열었고, 십자군이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알렉시오스 5세는 궁전을 버리고 도망쳤다.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은 중세 역사상 가장 끔찍한 약탈 중 하나였다. 단돌로는 관례에 따라 3일간의 약탈을 허용했다. 약탈에 굶주리고, 1년 넘게 성 밖에서 고생한 데 대한 분노로 가득 찬 2만여 명의 군대가 도시로 쏟아져 들어갔다. 지휘부 역시 22년 전 제위 찬탈 과정에서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수만 명의 서유럽인을 학살한 사건에 대한 보복심에 불타 있었다. 십자군은 눈에 띄고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약탈했다.
교회와 수도원이 가장 먼저 표적이 되었다.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는 창녀들이 총주교좌에 앉아 외설적인 노래를 불렀다. 은으로 만든 제단이 조각나 나누어졌고, 노새와 말들이 성당 안으로 끌려와 보물을 실었다. 짐을 견디지 못해 쓰러진 짐승들은 그 자리에서 칼로 찔려 죽었고, 성당 안은 짐승의 피와 악취로 가득 찼다. 비잔티움 역사가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는 눈물로 이렇게 기록했다. "그들은 성상들을 부수고 순교자들의 신성한 유물들을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곳에 집어던지고, 구세주의 살과 피를 여기저기 뿌렸다."
수백 년간 축적된 고대의 예술품들이 파괴되거나 녹아내렸다. 고전 그리스와 로마의 청동 조각상들이 화폐를 만들기 위해 용광로에 던져졌다. 거대한 헤라클레스 청동상은 재물에만 눈이 먼 십자군에 의해 청동 덩어리로 녹여졌다. 판토크라토르 수도원의 묘역에 있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를 비롯한 역대 황제들의 무덤이 열려 약탈당했다. 황금 장신구, 진주 목걸이, 보석들이 모조리 강탈되었다. 이들 무덤의 양식과 부장품은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프랑스 기사들은 파괴와 약탈에 광분했지만, 베네치아인들은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돈이 될 만한 보물을 골라 체계적으로 본국으로 운송했다. 니케타스는 "사라센인들조차 이보다 자비로웠을 것"이라고 절규했다.
약탈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베네치아로 실려간 보물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오늘날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대성당 앞에 서 있는 네 마리의 청동 말 조각상이 바로 그때 히포드롬(경마장)에서 강탈해온 것이다. 수많은 성유물들이 서유럽의 교회들로 흩어졌다. 파리의 생트샤펠에 있는 가시관도 이때 약탈된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학자들은 약탈당한 재산의 가치를 현대 가치로 환산하면 수십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한다. 이 약탈은 "단일 사건으로 역사상 최대의 문명적 재앙"으로 기록되었다.
십자군 지도자들은 약속대로 새로운 제국을 세웠다. 약탈품은 사전 합의대로 분배되었다. 4분의 1은 황제의 몫으로, 나머지는 프랑크군과 베네치아군이 반반씩 나누었다. 공식적으로 집계된 금액만 40만 마르크에 달했지만, 실제로 개인이 숨긴 보물은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이 초대 라틴 황제로 선출되었다. 보니파초 후작은 황제가 되기를 원했지만, 단돌로가 반대했다. 베네치아는 친베네치아 성향의 보두앵을 원했고, 보니파초가 너무 강력해지는 것을 경계했다. 보두앵은 5월 16일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는 봉건 영지들로 분할되었다. 베네치아는 제국 영토의 8분의 3을 차지했다. 크레타, 에우보이아, 펠로폰네소스 남부, 이오니아 제도들이 베네치아의 수중에 들어갔다. 단돌로는 "로마 제국 전체의 4분의 1을 다스리는 군주"라는 칭호를 획득했다. 실제로 베네치아는 이번 원정에서 가장 많은 이득을 보았다. 그들은 동지중해 무역을 완전히 장악했고, 경쟁자였던 제노바와 피사를 압도했다. 몽페라토 후작 보니파초는 테살로니키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보니파초와 보두앵은 곧 영토 분쟁으로 갈등을 빚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귀족들은 그리스 전역에 공국들을 세웠다. 아테네 공국, 아카이아 공국이 건국되었고, 에게해의 섬들은 베네치아 귀족들에게 분배되었다.
그러나 이 라틴 제국은 처음부터 허약했다. 비잔티움 귀족들은 니케아와 에페이로스, 트레비존드에서 망명 정부를 세우고 저항을 계속했다. 특히 니케아 제국은 조직적인 저항의 중심이 되었다. 전임 황제 알렉시오스 3세의 사위였던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가 니케아에서 황제를 칭하고, 비잔티움 제국의 정통 계승자임을 선언했다. 라틴 제국은 실제로 콘스탄티노플 주변과 트라키아 일부만을 직접 지배했을 뿐, 나머지는 명목상의 종주권만 행사했다. 각 공국과 왕국은 사실상 독립적으로 행동했고, 서로 경쟁하고 갈등했다. 보두앵 1세는 1205년 불가리아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고, 감옥에서 죽었다. 라틴 제국은 결국 1261년까지만 지속되었고, 니케아 제국의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가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은 결코 이전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57년간의 단절과 약탈로 인한 경제적·문화적 손실은 복구 불가능했다.
4차 십자군의 결과는 기독교 세계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동서 교회의 분열은 더욱 깊어졌고, 그 상처는 오늘날까지도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1054년의 동서 대분열은 1204년에 이르러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악화되었다. 동방정교회 신자들은 라틴인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어떤 비잔티움 귀족은 "교황의 관보다는 차라리 투르크의 터번을 보겠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 말은 예언이 되어,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에게 함락될 때 서유럽은 효과적인 지원을 보내지 않았다. 비잔티움 사람들은 250년이 지난 후에도 오스만의 점령이 "단돌로가 이끈 십자가를 든 기독교 악마보다는 나았다"고 평가했다. 4차 십자군이 심어놓은 불신의 씨앗이 결국 비잔티움의 멸망에 기여한 것이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처음에는 승리를 자축했다. 동서 교회가 통합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곧 약탈의 참상이 보고되자 태도를 바꾸었다. 그는 십자군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당신들은 십자가의 군사가 아니라 악마의 군사처럼 행동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십자군 운동의 도덕적 권위는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십자군을 순수한 성전으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정치와 탐욕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800년이 지난 200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게 로마 가톨릭이 그리스 교회에 저지른 만행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2004년, 사건 800주년을 맞아 양 교회는 표면적으로 화해했지만, 깊은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다.
4차 십자군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고귀한 이상이 어떻게 추악한 현실로 전락하는가? 종교적 열정은 어떻게 폭력과 탐욕의 은폐막이 되는가? 소수의 결정권자들이 내린 선택이 어떻게 수만 명의 운명을 좌우하고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가? 1204년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단순히 중세의 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본성의 복잡성, 권력과 종교의 위험한 결합, 그리고 선의로 포장된 악행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원한 교훈이다.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기독교인들을 공격하고 약탈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냉혹하다. 성지를 해방하러 간 전사들이 기독교 세계의 가장 위대한 도시를 파괴했고, 이슬람과 싸우러 간 군대가 기독교 제국을 무너뜨렸다. 4차 십자군은 의도와 결과 사이의 간극이, 이상과 현실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클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사건은 또한 경제적 이해관계가 종교적 명분을 어떻게 조작할 수 있는지, 빚이 어떻게 도덕적 판단을 왜곡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베네치아의 상업적 야심, 프랑스 귀족들의 영토 욕심, 교황의 정치적 야망이 뒤섞이면서, 처음의 신성한 목적은 완전히 변질되었다.
800년이 지난 지금도, 콘스탄티노플의 폐허는 우리에게 경고한다. 신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죄악이 가장 용서받기 어렵다는 것을. 그리고 문명의 파괴는 순식간이지만, 그 복구에는 수세기가 걸린다는 것을. 1204년에 사라진 고대의 예술품들, 불탄 도서관의 책들, 녹아내린 청동상들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인류의 문화유산이 탐욕의 제단에 희생된 것이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C%A0%9C4%EC%B0%A8%20%EC%8B%AD%EC%9E%90%EA%B5%B0%20%EC%9B%90%EC%A0%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