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튼 기사단: 십자군의 이상과 야망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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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0년 여름, 제3차 십자군 원정 중 아크레 요새의 포위전이 한창이던 무렵, 동지중해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수천 명의 십자군 병사들이 병과 부상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가 아나톨리아의 강을 건너다 익사한 뒤, 그의 군대는 지휘 체계가 무너진 채 팔레스타인에 도착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독일어만 구사할 수 있었고, 성전기사단이나 구호기사단이 운영하는 병원에서는 의사소통의 장벽으로 인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바로 이 절박한 상황에서 뤼베크와 브레멘의 상인들이 나섰다. 그들은 자신들이 타고 온 배의 돛을 이용해 임시 텐트를 만들고, 그 안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부상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가 이 노력을 적극 지원했고, 1190년 11월 19일 이 야전 병원을 정식 조직으로 승인했다.


이것이 훗날 동유럽의 판도를 바꿔놓을 튜튼 기사단, 정식 명칭으로는 '예루살렘의 성 마리아 독일인 병원 기사단(Ordo domus Sanctæ Mariæ Theutonicorum Hierosolymitanorum)'의 시작이었다. 아크레가 함락된 1191년 7월, 이 병원 조직은 도시 내에 영구적인 본부를 얻었다. 교황 클레멘스 3세는 같은 해 2월 6일 교서 '쿼티엔스 포스툴라투르(Quotiens postulatur)'를 통해 "예루살렘의 성 마리아 독일인 교회의 형제단(fratrum Theutonicorum ecclesiae S. Mariae Hiersolymitanae)"을 정식으로 승인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자선 단체에 불과했던 이 조직이 어떻게 유럽 중세사에서 가장 강력하고 논란이 많은 세력 중 하나로 성장했는지, 그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십자군 운동의 본질과 중세 유럽의 팽창주의가 맞닿은 지점을 목격하게 된다.


아크레가 함락된 후 튜튼 기사단은 도시 내에 영구적인 거점을 마련했다. 하지만 병원 조직에서 군사 수도회로의 전환은 단순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 조직은 초기에 구호기사단의 관할 아래 있었고, 성 요한 병원의 규칙을 따랐다. 1143년부터 예루살렘에 존재했던 독일인 병원(domus Theutonicorum)의 전통이 있었지만, 살라딘이 1187년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면서 그 유산은 단절되었다. 아크레의 독일 상인들은 이 전통을 부활시킨 것이었다.


1198년 3월 5일, 진정한 전환점이 찾아왔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예루살렘 왕국의 아말릭 2세, 그리고 독일의 제후들과 주교들이 모여 이 병원 조직을 군사 수도회로 개편하기로 결정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가 1197년 사망하면서 그가 계획했던 대규모 팔레스타인 원정이 무산되었고, 이미 도착한 독일 십자군들이 귀환하려 하자 인력 공백을 메우기 위한 조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라인란트 출신의 기사 헤르만 발포트 폰 바센하임이 초대 대총장(magister generalis)으로 임명되었다. 기사단은 성전기사단의 규칙을 채택하고, 사제 수도사들은 성 도미니코의 규칙을 따르기로 했다. 이 이중 구조는 튜튼 기사단의 독특한 특징이 되었다.

1199년 2월 19일,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공식적으로 이 새로운 군사 수도회를 승인했다. 하지만 기사단의 위상은 여전히 불확실했다.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은 이미 팔레스타인의 핵심 요새들과 영토를 장악하고 있었고, 후발 주자인 튜튼 기사단이 끼어들 여지는 많지 않았다. 1211년, 기사단은 몽포르(Montfort, 독일어로는 슈타르켄베르크 Starkenberg) 성과 그 주변 영토를 획득했다. 이 성은 예루살렘과 지중해 연안을 잇는 중요한 통로를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의 재정 지원을 받아 기사단은 이곳을 이중 방어벽과 요새화된 수도원을 갖춘 강력한 거점으로 만들었다. 1229년, 몽포르는 기사단의 공식 본부가 되었다.


하지만 성지에서 기사단의 입지는 근본적으로 취약했다. 14세기 연대기 작가 페터 폰 두스부르크의 기록에 따르면, 1210년 무렵 튜튼 기사단이 전장에 투입할 수 있는 기사는 고작 10명에 불과했다. 1210년에는 아르메니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기사단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고, 겨우 20명의 기사만이 살아남았다. 이는 기사단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규모도 작고 자원도 부족한 상태에서, 튜튼 기사단은 이미 확고한 기반을 구축한 두 거대 기사단의 그늘에 가려 있었다. 1244년 가자 근처 라 포르비 전투에서는 더욱 참혹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유브 왕조의 군대와 맞선 이 전투에서 440명의 튜튼 기사 중 437명이 전사했다. 생존율이 1%도 되지 않는 대참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단은 조금씩 성장했다.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1216년부터 1227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기사단에 총 113개의 교서를 발표하여 특권을 부여했다. 이 교서들은 기사단이 교황청과 맺는 봉건 관계를 명확히 하고, 세속 권력에 종속되는 것을 금지했다. 대총장이 취임할 때마다 교황청에 인지세(recognizance fee)를 납부해야 했지만, 그 대가로 기사단은 상당한 자율성을 얻었다. 1240년 1월 12일,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발표한 교서 '딜렉티 필리(Dilecti filii)'는 "아크레의 성 마리아 독일인 병원의 형제들(fratres hospitalis S. Mariae Theutonicorum in Accon)"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여전히 구호기사단 대총장의 관할 아래 있음을 확인했다. 이 종속 관계가 완전히 해소되기까지는 수십 년이 더 걸렸다.


튜튼 기사단의 독특한 정체성은 그들의 독일적 특성에서 비롯되었다. 기사단원 자격은 독일 귀족 출신으로 제한되었다. 이는 성전기사단이나 구호기사단이 다양한 국적의 기사들을 받아들인 것과 대조적이었다. 12세기 중반부터 예루살렘에는 "현지 언어나 라틴어를 모르는(patriæ linguam ignorantibus atque Latinam)" 독일 순례자들을 위한 특별한 시설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튜튼 기사단은 이러한 독일인 공동체의 필요에서 탄생했고, 그 정체성을 계속 유지했다. 1211년, 기사단은 검은 십자가가 새겨진 흰색 망토를 착용할 권리를 획득했다. 성전기사단은 이 결정에 격렬히 반대했다. 흰 망토는 그들만의 상징이었고, 후발 주자가 같은 색을 사용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교황청은 튜튼 기사단의 요청을 승인했다. 검은 십자가는 튜튼 기사단의 영원한 상징이 되었고, 훗날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 제국의 철십자훈장(Eisernes Kreuz)으로 계승되었다.


성지에서 제한적이던 기사단의 활동 범위는 유럽 본토에서는 달랐다.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특히 오늘날의 독일과 이탈리아 지역에서 기사단은 상당한 토지와 재산을 기증받았다. 하인리히 6세와 프리드리히 2세 치하에서 호엔슈타우펜 왕가가 시칠리아를 지배하면서, 튜튼 기사단은 남부 이탈리아에도 거점을 확보했다. 1197년, 황제 하인리히 6세는 팔레르모의 성 토마스 병원을 기사단에 넘겼고, 같은 해 황제와 황후는 팔레르모의 산타 트리니타 교회를 기사단에 하사했다. 1190년부터 1220년까지 시칠리아에서 세 개의 십자군 기사단에 부여된 재산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튜튼 기사단은 성전기사단이나 구호기사단보다 더 많은 황제의 은총을 받았다. 이는 기사단이 호엔슈타우펜 왕조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재산과 특권에도 불구하고, 성지에서 기사단의 미래는 불확실했다.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이 이미 핵심 영토를 장악한 상황에서, 튜튼 기사단이 성장할 공간은 제한적이었다. 기사단의 운명을 바꾼 것은 한 명의 탁월한 지도자의 출현이었다.


이 미약한 조직을 유럽 정치의 중심부로 끌어올린 인물이 바로 헤르만 폰 잘차였다. 1210년부터 1239년까지 약 30년간 대총장을 역임한 그는 중세 유럽 정치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튀링겐 지방의 하급 귀족 가문 출신으로, 아마도 1165년경 랑엔잘차 근처의 드리부르크 성에서 태어난 그는 순수한 능력만으로 기사단의 최고위직에 올랐다. 그가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209년 6월로, 이미 대총장 직위를 맡고 있었다. 헤르만은 튀링겐 변경백 루트비히 3세와 함께 1189년부터 1191년까지 진행된 아크레 포위전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고, 1197년에는 튀링겐 변경백 헤르만 1세와 함께 십자군 원정에 나섰을 수도 있다. 이러한 초기 경험들이 그를 기사단의 지도자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헤르만의 천재성은 그가 동시대의 두 거대한 권력, 즉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교황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양측으로부터 모두 신뢰를 얻어냈다는 점에 있다. 1216년, 헤르만은 독일에서 프리드리히 2세를 처음 만났다. 이때 프리드리히는 겨우 스물두 살의 젊은 왕이었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후원으로 막 독일 왕위에 올랐던 참이었다. 이 만남은 두 사람에게 모두 결정적이었다. 연령 차이에도 불구하고, 헤르만과 프리드리히는 역사상 드물게 양측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정치적 우정을 형성했다. 헤르만은 사실상 프리드리히의 외무장관이 되었고, 황제와 교황청 사이의 주요 중재자 역할을 맡았다.


1219년, 헤르만은 프리드리히와 함께 제5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여 이집트의 다미에타를 공격했다. 교황 특사 페라구스 추기경이 지휘하는 십자군은 초기에 다미에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헤르만은 이 전투에서 용맹함을 인정받았고, 예루살렘 왕 장 드 브리엔느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1221년, 십자군은 재앙적인 실패를 맞이했다. 페라구스 추기경은 헤르만의 조언을 무시하고 카이로로 진격하기로 결정했다. 헤르만은 황제의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지휘관들은 즉시 공격하기로 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나일강 범람기에 이집트의 진흙 벌판에서 기병대는 제대로 기동할 수 없었고, 십자군은 포위되어 전멸 직전까지 몰렸다. 1221년 8월, 십자군은 항복했고 다미에타를 술탄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직후 프리드리히 2세의 증원군이 다미에타에 도착했지만, 그들이 구원할 십자군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십자군의 패배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프리드리히 2세에게 돌아갔다. 교황은 황제가 약속한 대군을 이끌고 오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실제로 프리드리히가 제시간에 도착했더라도 이집트의 진흙탕에서 기병이 돌격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교황청은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프리드리히는 파문 직전까지 몰렸다. 이때 헤르만 폰 잘차의 외교력이 빛을 발했다. 그는 교황 호노리우스 3세를 설득하여 황제에 대한 처벌을 유예시켰다. 이후 1220년대 내내 헤르만은 끊임없이 황제와 교황 사이를 오가며 중재했다. 프리드리히는 여러 차례 십자군 원정을 약속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취소했고, 그때마다 헤르만의 외교술이 교황의 분노를 달래주었다.


헤르만은 십자군 운동을 촉진하기 위해 독창적인 방법을 고안했다. 그는 프리드리히 2세가 예루살렘 왕국의 상속녀인 이사벨라와 결혼하도록 주선했다. 이사벨라는 장 드 브리엔느의 딸로, 예루살렘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1225년 11월 9일, 브린디시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프리드리히는 즉시 예루살렘 왕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장인인 장 드 브리엔느를 사실상 밀어냈다. 이는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되었지만, 헤르만의 계산대로 황제가 십자군 원정에 더욱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1225년, 프리드리히는 또다시 십자군 출발을 연기했고, 이번에는 헤르만도 교황의 파문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는 황제의 잘못이 아니었다. 전염병이 십자군 진영을 휩쓸었고, 프리드리히 자신도 병에 걸렸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즉위한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1227년 9월 29일 프리드리히를 파문했다. 헤르만은 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1228년, 파문당한 황제가 십자군 원정을 강행하도록 설득했다. 프리드리히와 헤르만은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성지로 향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프리드리히는 현지에서 엄청난 적대감에 직면했다. 황제의 파문 소식이 이미 전해져 있었고,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은 그를 격렬히 비난했다. 성직자들은 파문된 황제와의 협력을 거부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전투 대신 외교를 선택했다. 그는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카밀과 협상을 벌여, 1229년 2월 18일 놀라운 협정을 맺었다. 예루살렘, 베들레헴, 나사렛을 포함한 성지가 10년간 기독교도의 통치 아래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는 군사적 승리 없이 외교만으로 얻어낸 성과였다. 하지만 교황청과 현지 기독교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파문된 황제가 맺은 조약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1229년 3월 18일,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의 성묘 교회에서 스스로 왕관을 쓰는 의식을 거행했다. 주교가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헤르만은 프리드리히에게 굴복한 주교를 시켜 대관식을 강행하면 교황청과의 화해가 영원히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는 자신이 직접 왕관을 쓰는 세속적 의식을 선택했다. 이는 1804년 나폴레옹이 자신의 황제 대관식에서 교황의 손에서 왕관을 빼앗아 스스로 쓴 것보다 575년이나 앞선 사건이었다. 현지 귀족들과 성직자들의 적대감 때문에 프리드리히와 그의 군대는 서둘러 철수해야 했다. 황제가 시칠리아로 돌아왔을 때, 그의 왕국은 교황의 용병들에게 침략당한 상태였다.


이 모든 혼란 속에서도 헤르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1230년 7월 23일, 산 제르마노에서 역사적인 조약을 중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조약으로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청에 성 베드로의 유산(Patrimony of St. Peter)을 돌려주었고, 그 대가로 파문이 해제되었다. 헤르만의 외교적 승리였다. 산 제르마노 조약은 황제와 교황 사이의 긴장을 일시적으로나마 완화시켰고, 튜튼 기사단은 양측의 신뢰를 모두 얻는 독특한 위치를 확보했다.


헤르만의 중재 능력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그의 사후에 드러났다. 1239년 3월 20일 살레르노에서 헤르만이 사망하자, 프리드리히 2세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 사이의 모든 의사소통이 중단되었다. 두 권력자를 이어주던 유일한 다리가 무너진 것이다. 1239년 이후 황제와 교황 사이의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결국 죽음을 건 대결로 치달았다. 이는 헤르만 폰 잘차라는 한 개인의 외교적 재능이 얼마나 큰 역사적 의미를 가졌는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하지만 헤르만의 업적은 외교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220년대 내내 그는 교황청으로부터 튜튼 기사단을 위한 특권을 하나씩 확보해나갔다.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1216년 교서 '레리지오삼 비탐(Religiosam vitam)'을 통해 기사단의 규칙을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지역 교회 관할권으로부터의 면제와 기사단원들에 대한 면죄를 부여했다. 이는 튜튼 기사단을 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는 조치였다. 1220년대 중반, 기사단은 마침내 검은 십자가가 새겨진 흰 망토를 공식적으로 착용할 권리를 얻었다. 성전기사단의 격렬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이 권리는 유지되었다. 1250년대까지 기사단은 교황의 허가 없이 자체적으로 규칙을 수정할 권리까지 획득했다. 이는 전례 없는 자율성이었다.


헤르만은 또한 기사단의 조직을 전문화하고 체계화했다. 그는 최소한 10명의 완전무장 기사를 항상 유지하도록 했고, 임시적인 순례자 지원에서 지속 가능한 십자군 조직으로 전환했다. 기사단의 행정 구조를 정비하고, 유럽 각지에 지부(commandery)를 설립하여 안정적인 수입원을 확보했다. 1237년, 헤르만은 리보니아 검의 형제단(Livonian Brothers of the Sword)을 튜튼 기사단에 통합시키는 데 성공했다. 검의 형제단은 1202년 리보니아(오늘날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의 이교도들을 정복하기 위해 창설된 군사 수도회였지만, 1236년 사울레 전투에서 리투아니아군에게 괴멸적인 패배를 당했다. 살아남은 검의 형제단원들은 튜튼 기사단의 일부가 되었고, 리보니아는 기사단의 영토가 되었다.


헤르만은 말년에 몸이 쇠약해지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살레르노로 은퇴했다. 기사단 내에서는 대총장이 너무 오랫동안 정치 활동에 전념하느라 수도회의 종교적 임무를 소홀히 한다는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헤르만이 기사단에 남긴 유산은 막대했다. 그가 대총장에 취임했을 때 겨우 10명의 기사를 보유하고 성지의 한구석에서 근근이 버티던 조직이, 그가 사망할 무렵에는 유럽 전역에 걸친 네트워크와 황제와 교황 양측의 신뢰를 받는 강력한 세력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헤르만이 기사단의 미래를 위한 법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그 토대는 성지가 아닌 동유럽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헤르만 폰 잘차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성지가 아닌 동유럽에 있었다. 십자군 국가들이 무슬림 세력에 점점 밀리고 있던 상황에서, 헤르만은 기사단의 미래가 성지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고 판단했다. 첫 번째 시도는 1211년 헝가리였다. 헝가리 왕 안드라시 2세는 트란실바니아 동남부 국경을 위협하는 쿠만족(Cumans)의 반복적인 침입에 시달리고 있었다. 쿠만족은 투르크계 유목 민족으로,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헝가리 영토를 약탈했다. 안드라시는 헤르만 폰 잘차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기사단은 부르첸란트(Burzenland) 지역을 받는 조건으로 헝가리로 향했다.


기사단은 부르첸란트에 정착하여 크론슈타트(오늘날 루마니아의 브라쇼브)를 포함한 지역에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쿠만족의 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고, 국경 방어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곧 문제가 발생했다. 기사단은 부르첸란트에서 자율적인 통치를 주장하기 시작했고, 헝가리 왕의 간섭을 거부했다. 그들은 성을 건설하고 도시를 세우며 독립적인 영토를 구축해나갔다. 헝가리 귀족들은 이에 격렬히 반발했다. 외국인 군사 수도회가 헝가리 왕국 내에 사실상의 독립국을 만들어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기사단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교황청에 직접 호소했다. 1222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부르첸란트를 교황의 직할령으로 선언했다. 이는 기사단이 헝가리 왕의 권위에서 벗어나 교황에게만 충성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안드라시 2세는 이를 자신의 주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로 받아들였다. 헝가리 귀족들의 압력도 거세졌다. 1225년, 안드라시 2세는 결국 튜튼 기사단을 헝가리에서 강제로 추방했다. 기사단은 건설했던 요새들을 버리고 떠나야 했다. 이 실패는 헤르만에게 귀중한 교훈을 주었다. 다음번에는 더 신중하게, 더 확실한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사단이 세울 국가는 어떤 세속 권력의 영향권 밖에 있어야 했다.


기회는 곧 찾아왔다. 마조비아 공작 콘라트 1세가 이교도인 고대 프로이센족의 습격에 시달리며 도움을 요청해온 것이다. 프로이센족은 발트해 남동안에 거주하던 발트계 부족들로, 수백 년 동안 서쪽의 폴란드인들과 충돌해왔다. 997년, 프라하의 아달베르트 주교가 프로이센인들을 개종시키려다 순교했다. 1009년, 그의 후계자 브루노 폰 크베르푸르트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1세는 1015년 프로이센 땅의 대부분을 황폐화시켰지만, 프로이센인들을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했다. 이후 2세기 동안 폴란드와 프로이센 사이에는 끊임없는 약탈과 보복이 이어졌다. 프로이센 전사들은 국경 지역인 헬름노 땅과 마조비아를 습격하여 노예를 사로잡아갔다. 많은 프로이센인들이 강압에 못 이겨 세례를 받았지만, 폴란드군이 철수하면 곧바로 이교 신앙으로 돌아갔다.


1166년, 헨리크 폰 산도미에시는 프로이센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볼레스와프 4세는 대군을 이끌고 프로이센을 침공했지만 게릴라전에 패배했다. 카지미에시 2세는 평화를 강요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가 1194년 사망하자 전쟁이 재개되었다. 1208년, 콘라트 1세는 프로이센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209년, 1219년, 1220년, 1222년 대규모 전투와 십자군이 이어졌지만, 프로이센인들은 성공적으로 저항했다. 콘라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228년 도브진 기사단(Order of Dobrzyń)이라는 지역 군사 수도회를 창설했지만, 이들도 프로이센인들에게 패배했다.


절박해진 콘라트는 1225년경 헤르만 폰 잘차에게 편지를 보냈다. 프로이센인들을 정복하고 기독교로 개종시켜준다면, 헬름노(Chełmno, 독일어로는 Culm) 땅과 앞으로 기사단이 프로이센에서 정복할 모든 영토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헤르만은 관심을 보였지만, 당시 그의 주요 관심사는 제5차 십자군을 돕는 것이었다. 또한 헝가리에서의 쓰라린 경험이 있었기에, 헤르만은 이번에는 철저히 준비하기로 했다.


1226년 3월, 헤르만은 이탈리아 리미니에서 프리드리히 2세를 만났다. 그는 황제에게 프로이센 정복이 신성로마제국의 국경을 방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프로이센인들이 기독교화되면, 그들의 동맹인 리투아니아인들의 반격도 약화될 것이라는 논리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동의했다. 1226년 3월, 황제는 역사적인 '리미니의 황금 문서(Golden Bull of Rimini)'를 발표했다. 이 문서는 튜튼 기사단에게 헬름노 땅과 "프로이센에서 정복할 모든 영토"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부여했다. 더 나아가 대총장은 제국 제후(Reichsfürst)의 지위로 격상되었다. 이는 기사단의 대총장이 신성로마제국 내의 다른 제후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협상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황금 문서는 기사단에게 막대한 권한을 주었다. 세금 징수, 화폐 주조, 성 건설, 도시 건설, 항구 운영, 시장 개설, 천연자원 개발 등 주권 국가가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권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 권리들이 콘라트 공작이나 폴란드 왕이 아닌, 황제로부터 직접 부여되었다는 점이다. 기사단은 헝가리에서처럼 지역 세속 권력에 종속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황제와 교황에게만 책임을 졌다.


1230년 6월 16일, 기사단은 추가로 폴란드와 크루슈비차 조약(Treaty of Kruszwica)을 체결했다고 주장한다. 이 조약에서 콘라트 공작은 황금 문서의 조건을 재확인하고, 헬름노 땅과 미래의 정복지를 기사단에 넘긴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 조약의 원본은 유실되었고, 많은 폴란드 역사가들은 그 진위를 의심해왔다. 폴란드 측의 관점에서 보면, 콘라트는 헬름노 땅을 프로이센 정복을 위한 임시 기지로만 제공했을 뿐이고, 정복된 땅은 마조비아 공작의 권위 아래 있어야 했다. 하지만 헤르만 폰 잘차는 이 문서를 기사단이 교황청과 황제를 제외한 모든 권위로부터 독립적으로 영토를 소유할 권리로 해석했다. 최근의 폴란드 역사학 연구는 크루슈비차 조약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경향이지만, 양측의 해석 차이는 훗날 수백 년간 이어질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1234년, 헤르만은 또 하나의 결정적인 문서를 확보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리에티의 교서(Bull of Rieti)를 발표하여, 프로이센에서 기사단이 정복한 모든 영토를 교황의 직할령(proprietas Sancti Petri)으로 선언했다. 동시에 이 땅을 튜튼 기사단에게 영구 임대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는 기사단을 지역 주교들의 간섭으로부터 보호하는 조치였다. 프로이센의 주교들은 기사단에게 명령할 수 없었다. 기사단은 교황에게만 직접 보고했다.


황제와 교황, 두 권력으로부터 이중의 승인을 받은 튜튼 기사단은 이제 법적으로 완벽한 위치에 섰다. 헤르만 폰 잘차는 헝가리에서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어떤 지역 세속 권력도 기사단의 주권에 도전할 수 없었다. 프로이센 정복의 무대가 마련된 것이다.


1230년, 튜튼 기사단의 본격적인 프로이센 정복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헤르만 폰 잘차가 7명의 기사와 100명의 종자(squire)로 구성된 선발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이들만으로는 부족했고, 곧 프로이센 란트마이스터(Landmeister, 지역 총사령관)로 임명된 헤르만 발크가 20명의 튜튼 기사와 200명의 하사관을 이끌고 합류했다. 숫자로만 보면 초라했지만, 그들이 갖춘 무기와 전술은 압도적이었다.


기사단의 군사적 우위는 여러 요소에서 비롯되었다.

첫째, 중장갑 기병이었다. 튜튼 기사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갑으로 무장했고, 그들이 타는 말 역시 갑옷으로 보호되었다. 이들이 일제히 돌격할 때, 그 충격력은 가벼운 갑옷을 입은 보병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프로이센 전사들은 주로 활과 도끼, 창으로 무장한 경보병이었다. 그들의 무기는 중장갑 기사에게는 거의 무력했다.

둘째, 석궁이었다. 튜튼 기사단은 당시 최신 무기인 석궁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석궁은 장궁보다 사거리가 짧았지만, 관통력이 훨씬 강했고 훈련이 덜 필요했다. 프로이센인들도 활을 사용했지만, 석궁의 강력한 관통력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석조 요새 건설 기술이었다. 프로이센인들은 나무로 만든 언덕 요새(hillfort)를 사용했지만, 기사단은 석재와 벽돌로 견고한 성을 지었다. 이 성들은 프로이센 전사들의 공격을 쉽게 막아낼 수 있었다. 1260년대의 대프로이센 봉기 때, 프로이센인들은 많은 목조 요새를 함락시켰지만, 벽돌로 지은 성들은 대부분 버텨냈다. 이 경험 이후 기사단은 모든 주요 요새를 벽돌이나 석재로 재건했다. 쾨니히스베르크는 석재로, 마리엔베르더는 벽돌로 재건되었다.

넷째, 수상 전력의 우위였다. 기사단은 500명의 병력을 실을 수 있는 코그선(cog)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배들은 비스와강과 그 지류를 통해 병력과 보급품을 신속하게 이동시킬 수 있었다. 노가트강에 위치한 마리엔부르크(Marienburg, 오늘날 폴란드의 말보르크)는 이러한 수상 교통의 중심지였다. 발트해에서 온 무역선들이 비스와강을 거슬러 올라와 노가트강으로 들어오면, 마리엔부르크에서 물자를 하역했다. 기사단은 통행하는 배들로부터 통행세를 징수하여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또한 호박(amber) 무역의 독점권을 장악했다. 발트해 연안은 세계 최대의 호박 산지였고, 이 귀중한 상품의 거래를 통제함으로써 기사단은 재정적 기반을 탄탄히 다질 수 있었다.


정복은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기사단의 전략은 세 단계로 이루어졌다.

첫째, 비스와강이나 그 지류를 따라 전략적 요충지에 성을 건설한다.

둘째, 그 성을 중심으로 주변 프로이센 부족을 공격하고 정복한다.

셋째, 정복한 지역에 독일인 정착민을 이주시켜 영구적인 지배를 확립한다. 1230년, 기사단은 비스와강에 포겔상(Vogelsang) 성을 건설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1231년에는 헬름노에 성을 세웠고, 이곳은 기사단의 초기 본부가 되었다. 1233년에는 토른(Thorn, 오늘날 폴란드의 토루니)이 건설되었다. 이 도시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출생지로 유명하게 되었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정복 초기에는 상당히 순조로웠다. 프로이센 부족들은 통일되어 있지 않았고, 기사단은 이들 사이의 분열을 교묘히 이용했다. 일부 프로이센 부족장들은 기사단과 동맹을 맺었다. 그들은 세례를 받고 기사단의 봉신이 되는 대가로, 자신의 영지와 권력을 보장받았다. 이들은 기사단의 전쟁에 보조 병력을 제공했다. 하지만 많은 프로이센인들은 격렬히 저항했다. 기사단은 저항하는 부족에 대해 무자비한 전술을 사용했다. 마을을 불태우고, 수확물을 파괴하고, 포로를 노예로 팔았다. 일부 프로이센 지도자들은 고문당하거나 처형되었다. 14세기 연대기 작가 페터 폰 두스부르크는 이러한 정복의 잔혹함을 기록하면서도, 그것을 이교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필요악으로 정당화했다.


1237년, 기사단은 중대한 영토 확장을 이루었다. 리보니아 검의 형제단을 흡수한 것이다. 검의 형제단은 1202년 리보니아를 정복하기 위해 창설되었지만, 1236년 사울레 전투에서 리투아니아군에게 참패했다. 48명의 기사 중 절반이 전사했고, 대총장도 전사했다. 생존자들은 교황청의 중재로 튜튼 기사단에 합병되었다. 이로써 오늘날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 해당하는 리보니아 전역이 기사단의 영토가 되었다. 리보니아는 별도의 지부로 운영되었고, 리보니아 란트마이스터는 상당한 자율성을 누렸다. 15세기가 되면 리보니아 란트마이스터는 사실상 프로이센의 대총장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1243년, 교황 특사 모데나의 빌헬름은 프로이센을 네 개의 주교구로 나누었다. 헬름노, 포메사니아, 에름란트, 잠란트가 그것이다. 각 주교구에는 주교가 임명되었다. 교황청은 기사단이 정복한 영토의 3분의 1을 교회에 할당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기사단이 쥐고 있었다. 주교들은 종교적 권위는 가졌지만, 세속적 통치권은 제한적이었다. 게다가 기사단은 교황청으로부터 주교들의 간섭을 받지 않을 특권을 받았기 때문에, 주교들은 기사단의 활동에 대해 사실상 발언권이 없었다.


1242년, 기사단은 리보니아에서 중대한 패배를 경험했다.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알렉산드르 넵스키 대공이 이끄는 러시아군이 페이푸스 호수(Lake Peipus, 러시아어로는 추트스코예 호수)에서 리보니아 기사단을 격파한 것이다. 이 전투는 훗날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알렉산드르 넵스키』(1938)로 유명해졌다. 영화에서는 무거운 갑옷을 입은 튜튼 기사들이 얼어붙은 호수의 얼음이 깨지면서 물에 빠져 죽는 극적인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얼음이 깨졌는지는 역사적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기사단이 참패한 것은 사실이다. 이 패배는 기사단의 동쪽 확장을 저지했다. 기사단은 러시아 정교회 지역으로의 진출을 포기하고, 남쪽의 프로이센과 리투아니아에 집중하기로 했다.


1249년부터 1254년까지, 기사단은 프로이센 서부를 거의 완전히 정복했다. 하지만 그들의 지배는 아직 공고하지 않았다. 많은 프로이센인들이 강압에 못 이겨 세례를 받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이교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다. 기사단은 이를 알고 있었고, 정복한 프로이센인들에게 일정한 권리를 부여하기로 했다. 1249년 2월 7일, 기사단은 프로이센 부족장들과 크리스트부르크 조약(Treaty of Christburg)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개종한 프로이센인들에게 특정 권리를 보장했다. 그들은 재산을 소유하고, 상속할 수 있으며,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고, 성직자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권리들은 조건부였다. 그들이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고 기사단에 충성하는 한에서만 유효했다.


1254년, 보헤미아 왕 오토카르 2세가 거대한 십자군을 이끌고 프로이센에 도착했다. 이는 기사단에게 큰 전력 보강이었다. 오토카르의 군대는 마지막으로 독립을 유지하던 프로이센 부족인 삼비아(Sambia)를 공격했다. 오토카르는 정복을 기념하여 그곳에 요새를 건설했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왕의 산'이라는 뜻)라고 명명했다. 이 도시는 훗날 위대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고향이 되었다. 1259년, 삼비아인들은 항복하고 명목상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로써 30년도 안 되어 튜튼 기사단은 프로이센 전역을 정복했다.


하지만 정복은 안정을 의미하지 않았다. 1260년, 리보니아 기사단이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벌인 두르베 전투(Battle of Durbe)에서 참패했다. 150명의 기사 중 절반이 전사했고, 란트마이스터도 전사했다. 이 소식이 프로이센에 전해지자, 전역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역사가들은 이를 '대프로이센 봉기(Great Prussian Uprising, 1260-1274)'라고 부른다. 프로이센 부족들은 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고, 기사단의 지배에 맞서 싸웠다. 봉기군은 기사단의 요새들을 하나씩 공격했다. 마리엔베르더 같은 강력한 요새도 함락되었다. 상황이 너무나 심각해서 교황 우르바누스 4세는 원래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계획했던 십자군을 발트해로 전환했다.


기사단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들은 기독교로 개종한 프로이센 귀족들의 도움을 받았다. 일부 프로이센 부족장들은 기사단 편에 서서 봉기군과 싸웠다. 이는 프로이센인들 사이의 내전으로 변질되었다. 1274년, 14년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봉기는 진압되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엄청났다. 양측 모두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었다. 프로이센의 많은 지역이 황폐화되었다. 기사단은 봉기에 참여한 프로이센인들에게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크리스트부르크 조약에서 보장했던 권리들 중 상당수가 박탈되었다. 많은 프로이센인들이 농노로 전락했다. 수천 명이 리투아니아 대공국이나 수도비아로 피난을 떠났다. 기사단은 빈 땅을 독일인 정착민으로 채웠다.


봉기 이후 기사단은 정책을 바꾸었다. 그들은 프로이센인들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규모 독일인 이주 정책이 본격화되었다. 슐레지엔, 중부 독일, 북부 독일에서 농민, 장인, 상인들이 프로이센으로 이주했다. 기사단은 이들에게 토지를 제공하고, 세금 감면과 자치권을 약속했다. 새로 건설되는 도시들은 마그데부르크 법(Magdeburg Law)이나 뤼베크 법(Lübeck Law)에 따라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마그데부르크 법은 독일 도시법의 대표적인 형태로, 도시민들에게 상당한 자치권과 상업 활동의 자유를 보장했다. 엘빙(Elbląg)만 예외적으로 뤼베크 법을 적용받았는데, 이는 뤼베크 상인들이 기사단에 물류 지원을 제공한 대가였다.


도시들의 건설은 놀라울 정도로 체계적이었다. 엘베강과 오더강 사이에 세워진 다른 독일 도시들과 달리, 프로이센의 도시들은 훨씬 더 규칙적이고 계획적인 가로 배치를 가졌다. 직사각형의 격자 패턴, 중앙의 시장 광장, 그 주변의 시청과 교회 - 이 모든 것이 사전에 설계되었다. 고고학적 발굴과 도시 계획 연구에 따르면, 튜튼 기사단은 중세 유럽에서 가장 앞선 도시 계획 기법을 사용했다. 마리엔부르크, 쾨니히스베르크, 엘빙, 단치히(그단스크) 등의 도시들은 모두 이러한 계획적 건설의 산물이었다.


1308년, 기사단은 또 하나의 중대한 영토 확장을 이루었다. 폴란드의 바디스와프 1세가 포메렐리아(Pomerelia)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기사단에 도움을 요청했다. 기사단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의 군대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바디스와프가 약속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자, 1308년 11월 프로이센 란트마이스터 하인리히 폰 플뢰츠케가 이끄는 기사단 병력은 그단스크를 점령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튜튼 기사단의 기록에 따르면, 반란 지도자 60명이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폴란드 측 문서에서는 최대 1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한다. 진실은 아마도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폴란드는 교황청에 이 문제를 제소했고, 수년간 법적 분쟁이 이어졌다. 결국 1309년, 기사단은 혐의에서 벗어났다.


1309년 졸딘 조약(Treaty of Soldin)으로 튜튼 기사단은 그단스크, 슈비에치에, 체프 성과 그 배후지를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으로부터 1만 은 마르크에 정식으로 매입했다. 포메렐리아의 획득은 기사단에게 전략적으로 엄청난 가치가 있었다. 이제 기사단의 국가는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와 육로로 연결되었다. 힌터포메른(Hinterpommern)을 거쳐 포메렐리아를 통해 프로이센으로 가는 통로가 열렸다. 십자군 증원군과 보급품이 더 이상 바다를 거칠 필요 없이, 육로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폴란드는 발트해로의 직접적인 접근을 상실했다. 이전까지 대체로 우호적이었던 폴란드는 이제 기사단의 적으로 돌아섰다. 이 적대감은 한 세기 이상 지속되며 양국 관계를 규정했다.


1309년 9월, 또 하나의 중대한 결정이 내려졌다. 대총장 지크프리트 폰 포이히트방엔이 기사단의 본부를 베네치아에서 마리엔부르크로 이전한 것이다. 1291년 아크레가 함락된 후, 기사단은 십자군 국가 회복을 위한 준비 기지로 베네치아에 본부를 두었었다. 하지만 성지 회복의 희망이 점점 희미해지자,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기사단의 미래는 동유럽에 있었다. 마리엔부르크는 상징적 선택이었다. 이 성은 1274년경 대프로이센 봉기를 진압한 후 건설되었다. 노가트강의 남동쪽 기슭에 위치한 이 성은 수상 교통의 요충지였다. 성의 이름은 튜튼 기사단의 수호성인인 성모 마리아를 기념하여 마리엔부르크(Mary's castle)로 지어졌다.


지크프리트 폰 포이히트방엔과 그의 후계자들은 마리엔부르크를 대대적으로 확장했다. 원래 1300년경 완성된 성은 상부 성(Upper Castle)으로 불리는 수도원 건물과 외부 방어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309년 이후 중부 성(Middle Castle)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곳은 기사단 국가의 정치적, 행정적 중심지가 되었다. 대총장의 궁전, 회의실, 접견실, 기록 보관소 등이 세워졌다. 1330년대와 1340년대에는 외부 성(Outer Castle 또는 Lower Castle)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곳은 무기고, 대장간, 마구간, 양조장, 그리고 하인들을 위한 예배당 등 실용적인 건물들로 채워졌다.


1406년 건설이 완료되었을 때, 마리엔부르크는 세계에서 가장 큰 벽돌 성이 되었다. 21헥타르(52에이커)의 면적을 차지하는 이 거대한 건축 복합체는 중세 고딕 건축의 걸작이었다.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성벽, 해자, 아치, 그리고 석재와 테라코타 장식으로 꾸며진 탑들 - 마리엔부르크는 튜튼 기사단의 권력과 부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내부는 정교하게 조각된 세부 장식, 기둥, 깃발, 가고일, 그리고 벽과 천장을 따라 새겨진 기하학적 문양들로 가득했다.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들은 성경의 장면이나 역사적 사건들을 묘사했다. 성은 중세 미술, 도자기, 유리, 회화, 가구, 태피스트리의 인상적인 컬렉션을 자랑했다. 종교적 인물, 저명한 튜튼 기사, 그리고 신화적 생물의 조각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14세기 중반부터 15세기 초까지, 마리엔부르크는 유럽 기사도의 메카가 되었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보헤미아 등지에서 온 귀족 기사들이 리투아니아에 대한 십자군 원정(Reisen 또는 Litauenreisen)에 참여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기사단은 이들을 위해 성대한 연회와 토너먼트를 열었다. 영국의 헨리 4세(재위 전 더비 백작 헨리 볼링브로크)는 1390-1391년과 1392년 두 차례 프로이센을 방문했고, 그의 여행 기록은 당시 기사단의 화려함을 생생하게 전한다. 기사단은 손님들에게 사치스러운 연회를 베풀었고, 특히 명예의 탁자(Ehrentisch)에 앉는 것은 최고의 영예로 여겨졌다. 한 겨울에 리투아니아로의 원정(Winterreise)을 마친 기사들은 마리엔부르크로 돌아와 전리품을 나누고, 용맹한 행위를 기념하는 축제를 벌였다.


하지만 이 모든 화려함 뒤에는 어두운 현실이 있었다. 프로이센의 원주민들은 점차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잃어갔다. 기사단은 이교 신앙을 철저히 탄압했다. 프로이센어는 공식 문서에서 사용이 금지되었고, 독일어와 라틴어만 인정되었다. 프로이센의 전통 신앙, 신화, 의례는 악마 숭배로 낙인찍혀 박해받았다. 17세기가 되면 프로이센어는 거의 사어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프로이센'이라고 부르는 개념은 발트계 원주민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은 독일인 기사단이 만든 국가이고, 훗날 호엔촐레른 가문이 통치하게 될 프로이센 공국이며, 더 나아가 19세기 독일 통일을 주도한 프로이센 왕국을 의미한다. 원래의 프로이센인들은 역사에서 지워졌다.


하지만 이 팽창은 필연적으로 충돌을 낳았다. 특히 폴란드와의 관계가 결정적이었다. 원래 튜튼 기사단은 폴란드의 동맹으로서 이교도 프로이센족과 리투아니아인들을 상대로 싸웠다. 그러나 1308년, 상황은 극적으로 변했다. 폴란드의 바디스와프 1세가 포메렐리아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기사단에 도움을 요청했다. 기사단은 브란덴부르크 군대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대가 지불을 거부하는 바디스와프에게 그 해 11월, 프로이센 란트마이스터 하인리히 폰 플뢰츠케가 이끄는 기사단 병력은 그단스크를 점령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일부 사료는 60명의 반란 지도자가 처형되었다고 기록하지만, 다른 문서에서는 최대 1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한다. 진실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수도 있다. 법적 분쟁이 이어졌지만, 결국 기사단은 혐의에서 벗어났다. 1309년 졸딘 조약으로 튜튼 기사단은 그단스크, 슈비에치에, 체프 성과 배후지를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으로부터 1만 마르크에 매입했다.


포메렐리아의 장악은 기사단에게 전략적으로 엄청난 가치가 있었다. 이제 기사단의 국가는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와 연결되었다. 십자군 증원군과 보급품이 힌터포메른을 거쳐 포메렐리아를 통해 프로이센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반면 폴란드는 발트해로의 접근이 차단되었다. 이전까지 대체로 우호적이었던 폴란드는 이제 기사단의 적으로 돌아섰다. 이 적대감은 한 세기 이상 지속되며 양국 관계를 규정했다.


14세기 말, 유럽의 정치 지형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1386년,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는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와 결혼했고, 요가일라는 폴란드 국왕 바디스와프 2세로 즉위하면서 리투아니아를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이는 튜튼 기사단에게 심각한 타격이었다. 기사단 존재의 명분, 즉 이교도를 정복하고 개종시킨다는 십자군의 이상이 무너진 것이다. 리투아니아가 이미 기독교 국가가 된 상황에서, 기사단의 지속적인 공격은 정당성을 잃었다. 더욱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은 기사단보다 훨씬 강력한 세력이었다.


1409년, 사모기티아에서 튜튼 기사단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바디스와프 2세와 비타우타스 대공은 반란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했고, 8월 6일, 기사단의 대총장 울리히 폰 융잉겐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선전포고했다. 기사단은 두 나라를 각개격파할 계획이었지만, 양국이 연합하자 전략을 수정해야 했다. 1409년 10월, 쌍방은 휴전에 합의했다. 휴전 기간은 1410년 6월 24일까지였다. 양측은 이 시간을 활용해 전쟁을 준비했다. 바디스와프 2세와 비타우타스는 동맹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지만, 폰 융잉겐은 베네슬라우스와 지기스문트 왕으로부터 모호한 지원 약속만 받아낼 수 있었다. 기사단은 용병에 의존해야 했다.


1410년 6월 27일, 바디스와프 2세의 폴란드군이 비스와강의 체르빈스크에 집결했다. 51개 기치 아래 1만 8천 명의 병력이 모였다. 며칠 후 비타우타스의 리투아니아군이 합류하면서 연합군의 병력은 약 2만 9천에 달했다. 기사단도 비슷한 규모의 병력을 동원했다. 7월 15일 새벽, 두 군대는 그룬발트와 타넨베르크 마을 사이의 들판에서 마주했다. 양군 모두 일찍 전열을 갖추었지만, 정오까지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무거운 갑옷을 입은 기사들은 여름 햇살 아래서 고통스럽게 기다려야 했다. 울리히 폰 융잉겐은 적을 먼저 공격하도록 도발하려 했다. 기사단은 두 문의 대포를 발사했지만, 가벼운 비가 내리면서 화약이 젖어 효과는 미미했다. 결국 대총장은 모욕적인 제스처로 바디스와프와 비타우타스에게 두 자루의 검을 보냈다. "전투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조롱이었다. 이 검들은 훗날 '그룬발트의 검'으로 불리며 폴란드의 국가적 상징이 되었다.


전투는 리투아니아 경기병의 돌격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타타르 기병대와 함께 기사단의 좌익을 강타했다. 초기에는 리투아니아군이 선전했지만, 곧 기사단의 정예 중기병이 우세를 되찾았다. 리투아니아군은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 퇴각했다. 기사단 기병대가 추격에 나섰다. 한편 폴란드 중기병은 기사단의 우익과 중앙을 공격했다. 리투아니아군의 패주를 본 폴란드군도 사기가 떨어졌지만, 스몰렌스크 부대가 기사단의 측면 공격을 막아내며 폴란드 우익을 구했다. 전투는 치열했다. 폴란드의 크라쿠프 기치가 일시적으로 기사단에게 빼앗겼다가 역공으로 되찾는 일도 있었다.


그때 전장에 극적인 반전이 찾아왔다. 리투아니아 경기병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들의 퇴각이 위장이었는지 아니면 재집결한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들은 기사단 좌익의 후방을 강타했다. 이제 포위된 것은 기사단이었다. 울리히 폰 융잉겐은 목에 창을 맞고 전사했다. 대총장의 죽음과 함께 기사단의 전열은 무너졌다. 일부는 숲으로 도망쳤고, 일부는 그룬발트 마을 근처의 야영지로 후퇴해 수레를 쇠사슬로 묶어 방어선을 구축했다. 하지만 이 방어선도 곧 무너졌다. 익명의 연대기 작가는 야영지와 그 주변에서 전장의 다른 어느 곳보다 많은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기록했다. 도주하는 기사단 기병에 대한 추격은 황혼까지 계속되었다.


그룬발트 전투의 결과는 참혹했다. 기사단의 급여 기록에 따르면, 마리엔부르크로 돌아와 급여를 받은 병사는 겨우 1,427명이었다. 그단스크에서 파견된 1,200명 중 살아남은 자는 300명뿐이었다. 기사단은 거의 모든 지휘부를 잃었다. 대총장을 비롯한 수백 명의 기사들이 전사했다. 바디스와프 2세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마리엔부르크를 포위했지만, 9월 19일 포위를 풀어야 했다. 기사단은 급히 잃었던 성들을 대부분 탈환했다. 1411년 2월 토른 평화조약이 체결되었지만, 영토 분쟁은 계속되었다. 1422년 멜노 조약이 최종적으로 국경을 확정했다.


그러나 그룬발트의 진정한 의미는 영토 변화가 아니라 권력의 이동에 있었다. 기사단은 다시는 이전의 지배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전쟁 배상금의 재정적 부담은 내부 갈등을 촉발했고, 경제는 침체에 빠졌다. 1440년, 프로이센 도시들이 프로이센 연방을 결성하며 기사단의 지배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1454년, 이는 13년 전쟁으로 발전했다. 카지미에시 4세의 폴란드군은 기사단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1466년 제2차 토른 평화조약에서 기사단은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헬름노 땅, 그단스크, 마리엔부르크 성을 포함한 서부 프로이센을 폴란드에 할양했고, 남은 동부 프로이센마저 폴란드의 봉신국이 되었다. 대총장은 폴란드 왕에게 충성 서약을 해야 했다. 본부는 마리엔부르크에서 쾨니히스베르크로 이전되었다.


1525년, 마지막 타격이 왔다. 대총장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는 종교개혁을 받아들여 기사단을 세속화했다. 그는 루터교로 개종하고, 프로이센 공국의 공작이 되었으며, 폴란드 왕에게 봉신 서약을 했다. 36년 후인 1561년, 리보니아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리보니아 지부장 고트하르트 케틀러가 기사단 영토를 쿠를란트 공국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로써 발트해 연안에서 튜튼 기사단 국가는 사라졌다.


독일 본토에서 기사단은 다른 형태로 살아남았다. 도이치마이스터가 1530년 대총장이 되었고, 본부는 마리엔부르크에서 메르겐타임으로 옮겨졌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호 아래 기사단은 존속했지만, 독립성을 잃고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 동원되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에는 가톨릭, 루터교, 칼뱅파 기사들이 공존하는 특이한 조직이 되었다. 1809년, 나폴레옹은 대부분의 독일 지역에서 기사단을 해산시켰다. 오스트리아에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기사단은 1834년 오스트리아 황제에 의해 자선 종교 단체로 재조직되었다. 1929년, 교황은 기사단을 순수한 사제 수도회로 개편했다. 더 이상 기사는 서임되지 않았고, 마지막 기사는 1970년 사망했다.


오늘날 튜튼 기사단은 빈에 본부를 둔 가톨릭 자선 단체로 존재한다. "돕고, 방어하고, 치유한다(Helfen, Wehren und Heilen)"는 모토 아래 병원과 요양원을 운영하며, 중세의 영광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들의 역사는 십자군 운동이 어떻게 식민지 팽창으로 전환되었는지, 종교적 이상이 어떻게 정치적 야망과 뒤섞였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튜튼 기사단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중세 유럽의 복잡한 모순을 마주하게 된다. 병자를 돌보기 위해 시작된 조직이 어떻게 정복 국가로 변모했는가? 십자가의 이름으로 시작된 운동이 어떻게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귀결되었는가? 헤르만 폰 잘차는 탁월한 외교관이었지만, 그가 마련한 법적 토대는 프로이센 원주민의 정복과 동화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룬발트 전투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게는 영광스러운 승리였지만, 수천 명의 목숨이 들판에 흩어진 비극이기도 했다.


중세 유럽의 역사가들, 특히 독일과 폴란드 학자들 사이에서 튜튼 기사단은 오랫동안 민족주의적 논쟁의 대상이었다. 20세기 전반, 독일 사학계는 기사단을 동방으로의 문명화 사명을 수행한 영웅으로 그렸고, 폴란드 학자들은 침략자와 억압자로 묘사했다. 나치 독일은 기사단을 '동방으로의 돌진(Drang nach Osten)'의 선구자로 선전했고, 이는 기사단의 이미지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제2차 세계대전 중 SS 기갑사단 하나가 헤르만 폰 잘차의 이름을 딴 것은 이러한 왜곡의 극단적 사례였다.


하지만 최근 수십 년간 학계의 연구는 훨씬 더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폴란드의 토룬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대학에서 개최되는 콜로퀴아 토루넨시아 히스토리카 학회는 독일어와 영어로 논문을 발표하며, 기사단의 역사를 민족주의적 프레임을 넘어 객관적으로 재평가하고 있다. 영어권에서는 윌리엄 어번의 『프로이센 십자군』(1975)과 에릭 크리스티안센의 『북방 십자군』(1980)이 고전으로 자리 잡았고, 2000년대 이후에는 기사단의 영성과 종교 생활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2013년 출간된 『튜튼 기사단 국가의 성스러운 공간』이나 2015년의 『리보니아와 프로이센의 튜튼 기사단: 정치적·교회적 구조』 같은 저작들은 기사단을 다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풍부한 자료를 제공한다.


이러한 연구들이 밝혀낸 것은, 튜튼 기사단이 단순히 악의 화신도, 문명의 전파자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의 시대가 부여한 신앙과 야망,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길을 찾으려 했던 역사적 행위자들이었다. 아크레의 야전 병원에서 시작해 발트해 연안의 광대한 국가를 건설했다가, 결국 내부 모순과 외부 압력에 무너진 그들의 궤적은 중세 유럽 역사의 복잡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십자군 정신이 식민지 팽창으로 변질되는 과정, 종교 개혁이 중세 질서를 해체하는 과정, 그리고 근대 국가 체제가 중세의 신정 국가들을 대체하는 과정이 모두 튜튼 기사단의 역사에 새겨져 있다.


오늘날 우리가 튜튼 기사단의 역사를 돌아볼 때, 거기서 발견하는 것은 과거의 먼 이야기가 아니다. 종교적 명분 아래 수행된 정복,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 폭력,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 권력의 흥망성쇠—이 모든 주제는 여전히 현재의 세계와 공명한다. 튜튼 기사단의 역사는 인간 사회가 어떻게 고귀한 목표를 추구하면서도 폭력과 억압의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구조가 결국 어떻게 자기 모순으로 무너지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1190년 아크레의 야전 병원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2026년 빈의 자선 단체로 이어지지만, 그 사이의 8세기가 남긴 교훈은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준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D%8A%9C%ED%84%B4_%EA%B8%B0%EC%82%AC%EB%8B%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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