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4년 10월 17일,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유럽 전역을 뒤흔들었다. 호라즘 투르크족이 이집트의 아이유브 술탄과 결탁하여 성지를 공격했고, 불과 이틀 만에 도시가 함락되었다. 십자군 수비대는 거의 전멸했으며, 기독교 민간인들은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이것은 단순한 군사적 패배가 아니었다. 1229년 프리드리히 2세가 협상을 통해 되찾았던 성지가 15년 만에 다시 잃어버린 것이었고, 이는 유럽 기독교계에 심리적 충격을 안겼다.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즉각 새로운 십자군 원정을 촉구했지만, 유럽의 군주들은 침묵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과의 권력 투쟁에 몰두했고, 그는 이미 파문당한 상태였다. 잉글랜드의 헨리 3세는 귀족들과의 갈등으로 국내 정치에 발이 묶여 있었고, 독일 제후들은 제국의 분열 속에서 십자군에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루이 9세만은 달랐다. 당시 30세였던 그는 이미 15년간 통치하며 프랑스를 유럽 최강국으로 만든 유능한 군주였지만, 동시에 하루에 여러 차례 미사에 참석하고 개인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극도로 경건한 신자이기도 했다. 루이에게 십자군은 단순한 정치적 모험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과 직결된 신성한 소명이었다.
루이 9세의 십자군 결심은 극적이었고, 그 과정은 중세 신앙과 권력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준다. 1244년 12월, 그는 퐁투아즈 성에서 심각한 열병으로 사경을 헤맸다. 당시 의학으로는 정확한 병명을 알 수 없었지만, 현대 학자들은 말라리아나 장티푸스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며칠 동안 왕은 고열에 시달리며 의식을 잃었고, 시종들은 그의 죽음을 준비했다. 왕비 마르그리트는 임신 중이었고,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불안이 궁정을 휩쓸었다. 그러나 12월 어느 날 밤, 루이는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의식이 돌아온 왕이 처음 한 일은 놀랍게도 십자군 서약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십자가 표시가 새겨진 천을 가슴에 꿰매달라고 명령했다. 이것은 중세에서 십자군 참여를 공식화하는 상징적 행위였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충격에 가까웠다. 어머니이자 섭정이었던 카스티야의 블랑슈는 아들을 설득하려 했다. 블랑슈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중 하나였으며, 루이가 어렸을 때부터 프랑스를 통치하며 왕권을 강화해온 정치적 거인이었다. 그녀는 아들에게 프랑스가 왕을 필요로 한다고 호소했고, 십자군은 젊은 왕자들의 모험이지 성숙한 군주의 책임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고위 귀족들도 반대했다. 특히 브르타뉴 공작과 샹파뉴 백작은 프랑스를 비우는 것이 잉글랜드에게 침공의 기회를 줄 것이라고 경고했다. 심지어 왕의 고해신부였던 도미니크회 수사들조차 우려를 표했다. 그들은 왕의 서약이 열병으로 인한 섬망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무효라고 주장했다. 교회법에 따르면 자유의지가 아닌 상황에서의 서약은 구속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이는 단호했다. 그는 주교들을 소집하여 공개 선언을 했다. "만약 제가 병에 걸렸을 때 한 서약이라면, 이제 건강을 되찾았으니 그 서약은 더욱 신성합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죽음에서 구해주신 것은 제가 그분을 섬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말에는 루이의 신학적 세계관이 담겨 있었다. 그는 자신의 회복을 신의 직접적 개입으로 해석했고, 따라서 십자군 참여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였다. 블랑슈는 아들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자, 다른 전략을 택했다. 그녀는 교황과 접촉하여 왕의 서약을 연기하도록 요청했다. 교황은 실제로 루이에게 몇 년간 유예를 주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루이는 이마저 거부했다. "저는 하느님과 약속했습니다. 교황님도 그 약속을 취소할 권한은 없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왕의 고집이 아니라, 중세 기독교 세계관이 한 인간의 영혼을 얼마나 깊이 지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루이에게 십자군 원정은 정치적 계산의 대상이 아니라 신과의 계약이었고, 그 계약을 어기는 것은 영원한 저주를 의미했다.
준비 과정은 거의 4년이 걸렸고, 이 기간 동안 루이는 역사상 가장 체계적으로 조직된 십자군을 만들어냈다. 1245년부터 1248년까지 프랑스는 사실상 전시 경제 체제로 전환되었다. 루이는 우선 재정 기반을 확보해야 했다. 그는 프랑스 전역에서 특별세를 거두었는데, 이것은 단순한 과세가 아니라 정교한 재정 시스템이었다. 왕실 재무관들은 각 지방의 부유층을 조사하여 재산에 비례한 세금을 부과했다. 귀족들은 연간 수입의 20분의 1을, 성직자들은 10분의 1을, 평민들은 수입과 재산에 따라 차등적으로 세금을 냈다. 교회 재산도 예외가 아니었다. 교황은 프랑스 교회에 3년간의 특별세를 승인했고, 이것만으로도 막대한 금액이 모였다. 수도원들은 은제 성유물함을 녹여 금화로 만들어야 했고, 주교들은 토지를 담보로 차입금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루이는 이탈리아의 제노바와 베네치아 상인들로부터 거액의 차입금을 받았다. 현대 환산으로 수억 달러에 달하는 금액이었고, 상환 조건은 가혹했다. 연이율 20%가 넘는 고리였지만, 루이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총 비용은 당시 프랑스 연간 왕실 수입의 약 6배인 150만 리브르 투르누아에 달했다. 이것이 얼마나 천문학적 금액인지 이해하려면, 당시 숙련 석공의 하루 임금이 약 2수(1리브르=20수)였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한 명의 노동자가 400만 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다. 이 비용은 프랑스 경제에 장기적 부담을 주었지만, 루이는 이를 신앙의 투자로 정당화했다.
군사 조직도 혁신적이었다. 루이는 단순히 봉건 영주들의 자발적 참여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는 왕실 직속의 상비군을 창설했고, 이들에게 정기적인 급여를 지급했다. 기사 한 명의 일당은 약 3리브르였고, 일반 보병은 하루 4수를 받았다. 루이는 또한 최신 무기를 대량으로 주문했다. 석궁 2만 개, 화살 100만 개 이상, 창과 검 수만 자루가 제작되었다. 갑옷 제작을 위해 전국의 대장간이 동원되었고, 말 5,000마리가 구입되었다. 공성무기도 준비되었다. 투석기, 공성탑, 파성추 등이 설계되고 제작되었으며, 이것들을 운반할 특수 수송선도 건조되었다.
루이의 외교도 치밀했다. 그는 우선 후방을 안정시켜야 했다. 1258년 파리 조약의 전조가 된 협상들이 이미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루이는 잉글랜드의 헨리 3세와 7년간의 휴전 조약을 맺었다. 이것은 양보를 대가로 한 것이었다. 루이는 헨리에게 가스코뉴 지방에 대한 일부 권리를 인정해주었고, 이것은 프랑스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하지만 루이는 십자군 기간 동안 잉글랜드의 침공을 막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도 사절단을 파견했다. 루이는 프리드리히 2세와의 화해를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대신 독일 제후들 개개인과 협상했다. 일부 독일 기사들은 루이의 십자군에 합류하기로 약속했다.
가장 야심찬 외교는 몽골 제국을 향했다. 1245년, 루이는 프란체스코회 수사 요한네스 데 플라노 카르피니를 몽골 대칸에게 파견했다. 몽골은 당시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했고, 이슬람 세력과도 적대 관계였다. 루이의 계획은 단순했다. 몽골과 동맹을 맺어 이집트를 동서에서 협공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지정학적으로 타당한 전략이었다. 1258년 몽골이 실제로 바그다드를 함락시킨 것을 보면, 완전히 비현실적인 계획은 아니었다. 그러나 몽골의 대칸 구유크는 루이의 제안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프랑스 왕에게 복종하라고 요구하는 오만한 답신을 보냈다. 그럼에도 루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1248년에는 또 다른 사절단을 파견했고, 이번에는 더 실용적인 선물과 함께 보냈다. 그러나 이 외교도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몽골은 기독교와의 동맹에 관심이 없었고, 자신들의 제국 확장 계획에만 집중했다.
보급 시스템은 루이의 가장 큰 업적이었다. 그는 키프로스를 주요 보급 기지로 선택했다. 키프로스는 성지와 가까우면서도 안전했고, 뤼지냥 왕가가 통치하는 기독교 왕국이었다. 1247년부터 루이는 키프로스에 막대한 물자를 쌓기 시작했다. 곡물 10만 톤 이상이 저장되었고, 포도주 수만 배럴, 소금에 절인 고기와 생선, 치즈, 건과일 등이 창고에 가득했다. 이 물자들은 목제 창고와 지하 저장고에 보관되었으며, 부패를 막기 위한 특별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루이는 또한 현지에서 빵을 굽기 위한 제분소와 빵공장을 설치했다. 의료 시설도 구축되었다. 병원선이 준비되었고, 의사와 외과의사들이 고용되었으며, 약초와 붕대 등 의료 물자가 비축되었다. 이 모든 준비는 루이가 장기전을 각오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1-2년이 아니라 최소 5년 이상의 원정을 계획했고, 실제로 그는 6년을 성지에서 보내게 된다.
1248년 6월 12일, 루이는 생드니 대성당을 방문하여 정식으로 십자군 깃발 오리플람을 받았다. 이 붉은 깃발은 프랑스 왕들이 전쟁에 나갈 때 들고 가는 신성한 상징이었다. 8월 25일, 루이는 마침내 파리를 떠났다. 그의 출발은 장엄한 행렬이었다. 왕은 맨발로 걸으며 파리 시내를 가로질렀고, 수만 명의 군중이 길가에서 눈물을 흘리며 축복을 빌었다. 어머니 블랑슈는 아들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을 예감하며 슬퍼했고, 실제로 루이가 돌아왔을 때 블랑슈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왕비 마르그리트와 세 명의 어린 왕자들도 동행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루이는 가족과 함께 하느님을 섬기기를 원했다.
남프랑스의 엑그모르트에서 루이는 함대에 승선했다. 총 1,800척의 배가 지중해를 메웠고, 이것은 당시로서는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상 함대였다. 제노바와 베네치아, 마르세유의 상선들이 동원되었고, 특수 제작된 수송선들도 포함되었다. 각 배는 말을 운반할 수 있는 특수 설계가 되어 있었고, 폭풍에 대비한 보강도 이루어졌다. 루이의 기함은 몬주아(Montjoie)라는 이름의 대형 갤리선이었고, 여기에는 왕실 예배당이 설치되어 있었다. 출항은 9월 초에 이루어졌다. 지중해의 날씨가 비교적 안정된 시기를 선택한 것이다. 항해는 순조로웠다. 2주 후 함대는 키프로스의 리마솔에 도착했다.
키프로스에서 루이는 9개월을 머물렀다. 이것은 계획에 없던 지연이었다. 원래는 겨울을 키프로스에서 보내고 이듬해 봄에 이집트로 향할 예정이었지만, 보급품 수송이 예상보다 늦어졌다. 그러나 이 기간은 낭비가 아니었다. 루이는 최종 전략을 수립했다. 그의 군대는 약 15,000명의 전투원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2,500명이 중기병인 기사들이었고, 5,000명이 경장보병인 석궁병과 궁수들이었으며, 나머지는 보급과 지원 인력이었다. 추가로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따라왔는데, 이들은 전투원이 아니라 성지를 방문하려는 민간인들이었다. 루이는 엄격한 군율을 제정했다. 도박과 음주를 금지했고, 신성모독에 대해서는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한 병사는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혀에 뜨거운 인두가 찍혔고, 이것은 다른 병사들에게 경고가 되었다.
루이의 전략적 선택은 처음부터 논란의 대상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이집트를 목표로 삼았다. 이 결정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첫째,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가 당시 중동 이슬람 세력의 심장이었다. 카이로는 경제적, 군사적 중심지였고, 이집트를 정복하면 예루살렘은 보급로가 끊겨 자연스럽게 함락될 것이라는 논리였다.
둘째, 나일강 삼각주는 비옥한 농경지로 십자군 국가들에게 경제적 기반을 제공할 수 있었다.
셋째, 해상 보급로를 확보하기 쉬웠다. 지중해를 통해 직접 물자를 수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전략에는 치명적 결함이 있었다. 이것은 정확히 1218-1221년 5차 십자군이 시도했다가 참패한 전략이었다. 당시 십자군은 다미에타를 점령했지만 카이로 진군에 실패했고, 나일강 홍수로 퇴로가 차단되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루이의 고문들 중 일부는 이 위험을 경고했다. 특히 성전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의 베테랑들은 이집트의 지형이 방어자에게 유리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나일강의 수많은 지류와 운하는 천연 방어선이 되었고, 여름철 홍수는 군사 작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집트의 맘루크 군대는 십자군이 이전에 만난 어떤 적보다도 강력했다. 그러나 루이는 자신의 더 나은 준비와 더 큰 규모의 군대, 그리고 무엇보다 신의 은총이 차이를 만들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5차 십자군의 실패는 지휘관들의 오만과 분열 때문이었다고 분석했다. 자신은 단일 지휘 체계를 유지하고, 충분한 보급을 확보하며, 신중하게 작전을 수행할 것이라고 믿었다. 역사가들은 지금도 이 결정의 타당성을 논쟁한다. 예루살렘을 직접 공격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당시 예루살렘은 아이유브 왕조에 의해 대대적으로 재건되어 있었고, 성벽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주변 지역에는 이슬람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보급로도 문제였다. 육로는 길고 위험했으며, 해로는 없었다. 이집트 전략이 최선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대안이 명확히 더 나았다고 보기도 어렵다.
1249년 6월 4일, 십자군 함대는 다미에타 앞바다에 나타났다. 상륙은 다음날 새벽에 이루어졌다. 루이는 친히 첫 번째 보트에 탔고, 그의 뒤를 왕실 근위대가 따랐다. 해변에는 이집트 수비대가 포진하고 있었지만, 십자군의 압도적 화력 앞에 무너졌다. 석궁병들이 제노바 함선에서 일제히 화살을 쏘아댔고, 이집트군은 혼란에 빠졌다. 루이는 갑옷을 입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물이 가슴까지 차올랐지만 왕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칼을 들고 해변으로 돌진했고, 기사들이 뒤따랐다. 이것은 계산된 연출이었다. 왕이 직접 선봉에 서는 모습은 병사들의 사기를 극도로 높였다. 동시에 이것은 루이의 진정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안전한 곳에서 명령만 내리는 지휘관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다미에타는 거의 저항 없이 함락되었다. 6월 5일 저녁, 십자군이 도시로 진입했을 때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주민들은 공포에 질려 밤새 도시를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시장에는 상품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고, 집들은 문이 열린 채 버려져 있었다. 십자군은 엄청난 전리품을 손에 넣었다. 곡물 창고, 무기고, 보석상, 직물 상점 등에서 나온 재물의 가치는 수십만 리브르에 달했다. 루이는 즉시 약탈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모든 전리품은 왕실이 관리하고, 나중에 공정하게 분배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현명한 조치였지만 불만을 야기했다. 많은 기사들과 병사들은 자신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얻은 전리품을 즉시 가지지 못하는 것에 분노했다.
다미에타 함락 소식은 유럽 전역을 환희로 뒤덮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이것을 하느님의 기적이라고 선포했고, 유럽의 교회들은 감사 미사를 올렸다. 루이는 하루아침에 새로운 십자군의 영웅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나 리처드 사자심왕과 비교했다. 프랑스 내에서는 더 많은 자원자들이 십자군에 합류하겠다고 나섰다. 루이의 명성은 정점에 달했다. 그러나 이 쉬운 승리가 오히려 재앙의 씨앗이었다. 십자군은 과도한 자신감에 빠졌다. 많은 기사들은 이집트군이 생각보다 약하다고 착각했다. 실제로는 이집트의 상황이 특수했기 때문이었다.
다미에타가 쉽게 함락된 진짜 이유는 이집트 내부의 정치적 혼란이었다. 술탄 아스살리흐 아이유브는 중병으로 거의 죽어가는 상태였다. 그는 카이로 남쪽의 아슈문타나에서 휴양 중이었는데, 십자군 상륙 소식을 들은 충격으로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술탄의 아내이자 정치적 동반자였던 샤자르 알두르는 남편의 병세를 숨기고 군대를 지휘하려 했지만, 혼란은 막을 수 없었다. 다미에타의 수비대장 파크르 앗딘은 명령 계통이 붕괴된 상황에서 독자적 판단을 내려야 했다. 그는 다미에타를 사수하기보다는 병력을 보존하여 카이로 방어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고, 밤에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전술적으로는 합리적이었지만, 전략적으로는 십자군에게 거대한 보급 기지를 선물한 셈이 되었다.
루이는 다미에타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즉시 카이로로 진격하는 대신, 무려 6개월 동안 다미에타에 머물렀다. 공식적인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첫째, 나일강의 연례 홍수를 기다려야 했다. 6월부터 9월까지 나일강은 범람하여 삼각주 전체가 물에 잠겼다. 이 시기에 군사 작전은 거의 불가능했다.
둘째, 더 많은 원군을 기다렸다. 유럽에서 추가 병력이 오고 있었고, 루이는 그들과 합류하기를 원했다.
셋째, 점령지를 안정화해야 했다. 다미에타를 확실한 기지로 만들지 않으면 후방이 위험했다.
이 모든 이유는 일견 타당해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루이의 강박적 완벽주의가 문제였다.
루이는 다미에타를 단순한 군사 기지가 아니라 기독교 도시로 재건하는 데 집착했다. 그는 모스크를 교회로 개조했다. 가장 큰 모스크는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 되었고, 작은 모스크들은 여러 성인들에게 헌정되었다. 루이는 직접 봉헌식을 주재했다. 그는 행정 체계도 구축했다. 다미에타를 프랑스 도시처럼 통치하기 위해 시장을 임명하고, 법원을 설치하고, 세금 체계를 도입했다. 민간인 정착도 장려했다. 유럽에서 온 상인들에게 면세 혜택을 주어 다미에타에 정착하도록 유도했다. 이것은 전략적으로 무의미한 낭비였다. 다미에타는 최종 목표가 아니라 통과 지점이었다. 카이로를 정복하지 못하면 다미에타도 지킬 수 없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시간이 이집트군에게 재편성의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1249년 11월 22일, 술탄 아스살리흐 아이유브가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 샤자르 알두르는 이 사실을 숨겼다. 그녀는 술탄의 시신을 비밀리에 카이로로 옮기고, 마치 술탄이 살아있는 것처럼 꾸몄다. 술탄의 서명이 필요한 문서들은 샤자르가 위조했고, 병문안을 요청하는 장군들에게는 술탉이 너무 아파서 만날 수 없다고 둘러댔다. 이 대담한 기만은 성공했다. 약 두 달 동안 아무도 술탄의 죽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동안 샤자르는 후계 체제를 정리했다. 그녀는 아스살리흐의 아들 투란샤를 시리아에서 불러들였고, 더 중요하게는 맘루크 근위대의 충성을 확보했다.
맘루크는 원래 노예 출신 군인들이었다.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들은 투르크계와 체르케스계 소년들을 구입하여 엄격한 군사 훈련을 시켰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전투 기술을 배웠고, 이슬람으로 개종했으며, 술탄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주입받았다. 성인이 된 맘루크들은 이집트 군대의 핵심이 되었다. 그들은 뛰어난 기마 궁수였고, 집단 전술에 능숙했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1249년 당시 이집트에는 약 12,000명의 맘루크가 있었고, 그들의 지휘관 중에는 훗날 술탄이 될 바이바르스와 아크타이 같은 천재적 전술가들이 있었다. 샤자르는 맘루크들에게 후한 보상을 약속했고, 그들은 새로운 술탄 투란샤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한편 십자군 진영에서는 규율이 무너지고 있었다. 병사들은 다미에타의 부유함에 취해 방탕한 생활을 했다. 술집과 매음굴이 성행했고, 도박이 만연했다. 루이는 엄격한 군율을 세우려 했다. 그는 도박꾼들을 체포하여 채찍질을 가했고, 술에 취한 병사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한 기사는 신성모독으로 혀를 잘렸다. 그러나 이런 가혹한 처벌은 사기를 더욱 떨어뜨렸다. 병사들은 왜 싸우지도 않으면서 고통받아야 하는지 불만을 품었다. 귀족들 사이에서도 분열이 생겼다. 루이의 동생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는 왕의 신중함을 비겁함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즉시 카이로로 진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많은 젊은 기사들이 그를 지지했다. 반면 나이 든 십자군 베테랑들은 서두르면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루이는 중간에서 갈등을 조정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역사가 장빌은 이 시기를 "신의 승리가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낭비된 시간"이라고 기록했다. 장빌 자신도 십자군에 참여했고, 루이의 측근이었다. 그는 왕의 경건함을 존경했지만, 동시에 전략적 실수를 냉정하게 비판했다. 장빌의 회고록에 따르면, 루이는 다미에타에서 완벽한 기독교 공동체를 만들려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왕은 매일 두 번씩 미사에 참석했고, 가난한 자들에게 직접 음식을 나눠주었으며, 병원을 방문하여 환자들을 돌보았다. 이것은 성자의 행동이었지만, 전쟁터에서 필요한 것은 성자가 아니라 장군이었다. 루이는 영적 완벽함을 추구하는 데 집중한 나머지, 군사적 긴급함을 놓쳤다. 6개월이라는 시간은 이집트에게 너무나 귀중한 선물이었다.
1249년 11월 20일, 십자군은 마침내 카이로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나일강의 홍수가 빠지고 땅이 마르기를 기다린 것이다. 군대는 약 20,000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유럽에서 온 원군들과 합류했기 때문이다. 프로방스 백작 샤를 당주가 이끄는 부대, 윌리엄 롱에스페 백작이 이끄는 잉글랜드 기사단, 그리고 여러 독일 제후들의 소규모 부대가 합류했다. 행군은 나일강을 따라 남쪽으로 이어졌다. 함대가 강을 따라 병행하며 보급품을 운반했고, 육군은 동쪽 강둑을 따라 이동했다. 초반에는 순조로웠다. 이집트군의 저항은 산발적이었고, 십자군은 작은 마을들을 하나씩 점령해갔다.
그러나 상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이집트에서는 새로운 술탄 투란샤가 카이로에 도착했고, 그는 즉시 맘루크 장군들과 전쟁 회의를 열었다. 맘루크의 전략은 십자군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게릴라 전술을 구사하기로 했다. 바이바르스가 제안한 이 전략은 치밀했다. 첫째, 보급선을 차단한다. 나일강에 경쾌한 갤리선을 띄워 십자군 보급선을 공격한다. 둘째, 우물을 오염시킨다. 십자군이 지나갈 경로의 모든 우물에 독을 풀거나 흙으로 메운다. 셋째, 야습을 감행한다. 밤마다 소규모 부대가 십자군 진영을 습격하여 잠을 못 자게 한다. 넷째, 주민을 소개한다. 십자군이 약탈할 것이 없도록 주민들을 미리 대피시키고 곡물을 태운다. 이 초토화 전술은 잔인했지만 효과적이었다.
12월 들어 십자군은 고통받기 시작했다. 나일강의 십자군 보급선은 맘루크 해군의 빈번한 공격을 받았다. 맘루크는 "그리스의 불"이라 불리는 화염병을 사용했다. 이것은 석유를 기반으로 한 소이탄으로, 물에 떨어져도 계속 타올랐다. 십자군 배들이 불타는 광경은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보급이 불규칙해지자 진영에는 식량이 부족해졌다. 병사들은 배급이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우물물도 문제였다. 많은 우물이 오염되어 있었고, 마신 병사들은 심한 설사에 시달렸다. 야습도 계속되었다. 밤마다 맘루크 기병들이 나타나 화살을 쏘고 사라졌다. 십자군은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고, 피로가 누적되었다. 사기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12월 말, 십자군은 만수라 앞에 도착했다. 만수라는 카이로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요새 도시였고, 이집트군의 주력이 집결해 있었다. 도시와 십자군 진영 사이에는 아슈문 운하라는 큰 물줄기가 가로막고 있었다. 운하는 폭이 약 50미터였고, 깊이도 깊어서 쉽게 건널 수 없었다. 다리는 없었다. 이집트군이 미리 파괴해버렸기 때문이다. 십자군은 여기서 막혔다. 루이는 공병들에게 다리를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목재와 돌로 임시 다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집트군은 이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낮에는 궁수들이 다리 건설을 방해했고, 밤에는 사보타주 부대가 건설 중인 다리를 파괴했다. 공사는 지지부진했다.
1250년 1월, 전환점이 왔다. 한 베두인족 안내인이 십자군 진영에 나타났다. 그는 금화를 대가로 운하를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을 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루이는 조심스러웠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는 안내인을 믿기로 했다. 2월 8일 밤, 선발대가 여울목을 건넜다. 놀랍게도 안내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여울목은 실제로 존재했고, 물 깊이는 허리까지밖에 차지 않았다. 선발대를 이끈 것은 루이의 동생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였다. 로베르는 29세의 혈기왕성한 귀족으로, 오랫동안 형의 신중함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는 약 1,5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운하를 건넜고,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도 뒤따랐다.
원래 계획은 단순했다. 선발대는 운하 건너편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방어 위치를 유지한다. 그런 다음 전체 군대가 합류하여 만수라를 공격한다. 그러나 로베르는 계획을 무시했다. 그는 야심에 가득 차 있었다. 이집트군을 기습하여 큰 전과를 올리면, 자신이 형의 그늘에서 벗어나 영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템플 기사단장 기욤 드 소네는 기다려야 한다고 충고했지만, 로베르는 듣지 않았다. "당신은 겁쟁이입니까? 저를 따를 수 없다면 뒤에 남으십시오"라고 로베르가 말했다고 전해진다. 기사단장은 모욕을 참을 수 없었다. 템플 기사들은 명예를 무엇보다 중시했고, 겁쟁이라는 말은 최악의 모욕이었다. 기욤은 로베르를 따르기로 결정했고, 성 요한 기사단도 뒤처질 수 없다며 동참했다.
2월 9일 새벽, 로베르의 기병대는 만수라로 돌진했다. 이집트군 진영은 완전히 허를 찔렸다. 맘루크 장군 파크르 앗딘은 겨우 잠에서 깨어 대응하려 했지만, 너무 늦었다. 십자군 기병들이 진영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혼란이 벌어졌다. 파크르 앗딘은 갑옷을 입을 시간조차 없이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집트군은 공황 상태에 빠졌고, 많은 병사들이 도망쳤다. 초반 30분 동안은 십자군의 완벽한 승리처럼 보였다. 로베르와 그의 기사들은 흥분에 휩싸여 만수라 시내로 진입했다. 그들은 이미 승리를 확신했고, 카이로로 진격하는 상상에 빠졌다.
그러나 이것은 함정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함정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함정이 되었다. 만수라의 좁은 골목길은 기병에게 최악의 지형이었다. 말의 기동력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긴 창은 좁은 공간에서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더 큰 문제는 맘루크의 반격이었다. 초기 혼란에서 회복한 맘루크 지휘관들, 특히 바이바르스는 즉시 반격을 조직했다. 그들은 십자군을 시내로 유인한 뒤, 퇴로를 차단했다. 건물 지붕과 창문에서 궁수들이 나타나 화살을 쏟아부었다. 거리에는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고, 그 뒤에서 맘루크 보병들이 창으로 찔렀다. 십자군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학살이 시작되었다. 좁은 골목에서 중장기병의 갑옷은 오히려 짐이 되었다. 더위 속에서 갑옷을 입은 기사들은 쉽게 지쳤고,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막을 수 없었다. 말들이 쓰러지면서 교통이 마비되었고, 뒤에 있던 기사들은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로베르는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는 개인적으로 탁월한 전사였고, 갑옷 위에 화살이 박혔지만 계속 싸웠다. 그러나 숫자의 열세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템플 기사단장 기욤 드 소네는 로베르 곁에서 전사했다. 성 요한 기사단의 기사들도 하나둘씩 쓰러졌다. 몇 시간의 전투 끝에 로베르도 말에서 떨어졌다. 그는 무수한 칼과 창에 찔려 죽었다. 그의 시신은 너무나 훼손되어 나중에 식별조차 불가능했다.
만수라 시가전에서 십자군은 약 1,300명을 잃었다. 프랑스 최고의 기사들 중 상당수가 전멸했다. 템플 기사단은 280명의 기사 중 5명만 살아남았다. 성 요한 기사단도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 이것은 단순한 전술적 패배가 아니라 십자군의 핵심 전력이 소멸한 것이었다. 루이가 운하를 건너 도착했을 때, 그는 동생의 죽음을 확인했다. 왕은 슬픔에 잠겼지만, 감정을 드러낼 시간이 없었다. 이집트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투란샤 술탄이 친히 도착하여 맘루크 군대를 지휘했다. 맘루크는 사기가 충천했다. 그들은 무적으로 여겨지던 십자군 기사들을 격파했고, 이제 완전한 승리가 눈앞에 있다고 믿었다. 2월 11일, 맘루크는 총공격을 개시했다. 십자군은 운하 건너편에 급조한 진지에서 방어했다. 전투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루이는 직접 최전선에서 싸웠다. 그는 말 위에서 칼을 휘두르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여러 차례 위기의 순간이 있었지만, 십자군은 버텼다. 석궁병들의 집중 사격이 맘루크 돌격을 막았고, 중장기병의 반격이 적을 물리쳤다. 해질 녘이 되자 맘루크는 철수했다. 십자군은 간신히 방어에 성공했다.
그러나 전술적 방어 성공은 전략적 상황을 바꾸지 못했다. 십자군은 만수라에 발이 묶였고, 카이로로 가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더 심각한 문제는 보급이었다. 맘루크는 나일강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져온 대형 갤리선을 분해하여 낙타로 운반한 다음, 만수라 남쪽의 나일강에서 재조립했다. 이 배들은 십자군의 보급선을 차단했다. 2월 말이 되자, 다미에타에서 오는 보급품은 거의 끊겼다. 십자군 진영에는 식량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만수라 전투 이후 십자군의 상황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3월 초, 식량 부족이 심각해졌다. 병사들은 하루 한 끼로 배급이 줄었고, 그마저도 충분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소와 양을 잡아먹었다. 그 다음에는 말을 도축하기 시작했다. 기사들의 군마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전투의 핵심이었고, 무엇보다 기사의 신분과 명예를 상징했다. 자신의 말을 도축해야 하는 기사들의 심정은 참담했다. 말고기마저 떨어지자, 병사들은 나일강에서 잡은 물고기를 먹었다. 그러나 물고기도 충분하지 않았고, 강물 자체가 오염되어 있었다.
더 큰 재앙은 질병이었다. 3월 중순부터 진영에 이질이 창궐했다. 이질은 오염된 물과 불결한 위생 상태에서 빠르게 퍼졌다. 환자들은 심한 복통과 혈변에 시달렸고, 탈수로 급속히 쇠약해졌다. 하루에 수십 명씩 죽어나갔다. 곧 괴혈병도 나타났다. 신선한 채소와 과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환자들의 잇몸이 부어올랐고, 치아가 빠졌으며, 피부에 검은 반점이 생겼다. 이들은 극심한 피로와 우울증에 시달렸다. 의사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당시 의학은 질병의 원인을 "나쁜 공기"나 "체액의 불균형"으로 설명했고, 치료법은 거의 효과가 없었다. 사혈을 하거나 약초를 먹이는 정도였다.
시체 처리가 큰 문제가 되었다. 매일 100명 이상이 죽었지만, 땅을 파서 묻을 인력이 부족했다. 살아있는 병사들도 대부분 병들어 있거나 너무 지쳐서 묘를 팔 수 없었다. 시체들은 강에 던져졌다. 장빌의 기록에 따르면, 나일강은 시체로 뒤덮여 있었고, 악취가 진영을 휩쓸었다. 맘루크는 이것을 이용했다. 그들은 십자군 시체를 강 상류로 떠내려 보내 하류의 십자군 진영을 오염시켰다. 심리적 효과도 컸다. 병사들은 동료들의 시체가 물에 떠다니는 것을 보며 절망했다. 사기는 바닥을 쳤다.
루이 자신도 병에 걸렸다. 3월 말, 왕은 심한 이질로 쓰러졌다. 고열과 복통으로 거의 의식을 잃을 지경이었다. 왕실 의사들이 필사적으로 치료했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루이는 침대에 누워 신음했고, 하루에 수십 번씩 배변을 해야 했다. 시종들은 왕의 바지에 구멍을 뚫어 화장실에 갈 필요 없이 즉시 배설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은 왕의 위엄에 엄청난 모욕이었지만, 루이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병사들과 함께 진영에 머물렀다. 신하들은 왕을 배에 태워 다미에타로 후송하자고 간청했지만, 루이는 거부했다. "나는 내 병사들을 버리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왕의 병세는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루이가 쓰러지자 지휘 체계가 흔들렸다. 왕의 동생 앙주 백작 샤를이 임시로 지휘를 맡았지만, 그는 루이만큼의 권위가 없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의견 충돌이 발생했다. 일부는 즉시 후퇴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이들은 만수라를 포기하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반대했다.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의 생존자들은 카이로로 진군하자는 무모한 제안을 했다. 이것은 절망에서 나온 발상이었다. 앞으로 나아가든 뒤로 물러나든 모두 위험했지만, 적어도 앞으로 나아가면 영광스러운 죽음이라도 맞이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3월 말과 4월 초, 십자군 진영은 사실상 아수라장이었다. 질서가 무너졌고, 병사들은 공포와 절망에 빠졌다. 많은 이들이 탈영을 시도했다. 그러나 탈영병들은 대부분 맘루크에게 붙잡혀 노예가 되거나 처형당했다. 일부 병사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목숨을 구하려 했다. 이것은 십자군에게 최악의 배신이었지만, 생존 본능 앞에서 신앙도 무너졌다. 루이는 병상에서 이런 소식을 들었고,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는 자신의 십자군이 이렇게 비참하게 끝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가장 치명적인 것은 맘루크의 전략적 승리였다. 그들은 나일강을 완전히 장악했을 뿐 아니라, 십자군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만수라 주변은 맘루크 군대로 둘러싸여 있었고, 다미에타로 가는 길도 차단되었다. 십자군은 거대한 야외 감옥에 갇힌 셈이었다. 맘루크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들은 십자군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자멸하기를 기다렸다. 이것은 현명한 전략이었다. 십자군과 정면 대결하면 맘루크도 피해를 입을 것이었지만, 기다리기만 하면 대가 없이 승리할 수 있었다.
4월 5일, 루이는 결국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결정이었다. 퇴각은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었고, 동생과 수천 명의 기사들이 헛되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더욱이 퇴각은 신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졌다. 루이는 하느님을 위해 싸우러 왔는데, 이제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병사들은 죽어가고 있었고, 식량은 완전히 떨어졌으며, 왕 자신도 거의 죽음 직전이었다. 루이는 눈물을 흘리며 결정을 내렸다.
퇴각은 악몽이었다. 병들고 굶주린 십자군은 제대로 행군할 수조차 없었다. 많은 병사들은 말에서 떨어졌고, 걸을 힘조차 없어 길가에 주저앉았다. 맘루크는 후퇴하는 군대를 끈질기게 추격했다. 그들은 사방에서 화살을 쏘아댔고, 낙오자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십자군은 무질서하게 무너졌다. 대열은 붕괴되었고, 각자 살길을 찾아 흩어졌다. 수천 명이 학살당했다. 나일강에는 시체가 떠다녔고, 길가에는 죽어가는 병사들이 널려 있었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대학살이었다.
루이는 마지막까지 후위에 남아 싸웠다. 그는 비록 병들었지만 왕의 책임을 다하려 했다. 루이는 말 위에 거우 앉아 있을 정도로 쇠약했지만, 병사들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칼을 들고 맘루크에게 맞섰다. 왕실 근위대가 그를 둘러싸고 방어했지만, 압도적인 적 앞에 무력했다. 4월 6일 저녁, 미니아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루이는 마침내 포위되었다. 그는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었다. 말에서 떨어진 루이를 근위대가 한 집으로 옮겼고, 맘루크 기병들이 집을 포위했다. 프랑스의 왕, 유럽 최강국의 군주, 하느님의 전사로 자처했던 루이 9세는 이집트의 한 초라한 진흙 오두막에서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루이의 상황은 복잡했다. 맘루크는 프랑스 왕을 죽이지 않았다. 루이는 너무나 귀중한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루이는 엄청난 몸값의 원천이었고, 정치적 협상의 강력한 카드였다. 맘루크는 루이를 만수라로 호송했고, 그곳의 한 저택에 가두었다. 감금 조건은 비교적 양호했다. 루이는 고문당하거나 학대받지 않았다. 그에게는 침대와 음식이 제공되었고, 왕실 의사가 치료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그러나 자유는 없었다. 루이는 엄중한 감시 속에 갇혀 있었고, 언제든 처형될 수 있다는 불안 속에 살았다.
함께 포로가 된 십자군의 운명은 훨씬 비참했다. 약 12,000명이 생포되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일반 병사들이었다. 맘루크는 포로들을 분류했다. 몸값을 낼 수 있는 귀족과 기사들은 따로 분리되어 상대적으로 나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가난한 병사들은 노예 시장으로 보내졌다. 수천 명이 이집트와 시리아 전역의 노예 시장에서 팔렸다. 일부는 광산이나 농장에서 강제 노동을 했고, 다른 이들은 가정 노예가 되었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개종 강요였다. 맘루크는 포로들에게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석방하겠다고 제안했다. 많은 병사들이 절망 속에서 개종을 선택했다. 이것은 그들의 믿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생존 본능이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일부는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프란체스코회 수사들과 독실한 병사들은 개종을 거부했다. 맘루크는 이들 중 많은 수를 처형했다. 장빌의 기록에 따르면, 약 5,000명의 십자군이 참수당했다. 처형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고, 이것은 다른 포로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십자군의 머리는 만수라 성벽에 장식되었고, 이것은 이집트의 승리를 과시하는 상징이 되었다. 루이는 감금된 곳에서 이 소식을 들었고, 깊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는 자신이 이끈 십자군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한편 이집트 내부에서는 중대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술탄 투란샤는 맘루크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시리아에서 자신이 데려온 측근들을 중용하고, 맘루크 장군들을 소외시켰다. 이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맘루크는 십자군을 격파한 영웅들이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공로를 인정받기를 원했다. 투란샤의 무례한 대우는 분노를 샀다. 더 큰 문제는 투란샤가 선왕의 부인 샤자르 알두르를 제거하려 한 것이었다. 샤자르는 맘루크의 실질적 후원자였고, 그녀 없이는 투란샤가 권좌에 오를 수도 없었다. 투란샤의 배신은 맘루크의 반란을 촉발했다.
1250년 5월 2일, 투란샤는 암살당했다. 맘루크 장군들이 술탄의 텐트를 습격하여 그를 칼로 찔렀다. 투란샤는 나일강으로 도망쳤지만, 맘루크는 그를 추격하여 물속에서 끌어내 처형했다. 이것은 이집트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노예 출신 군인들이 주인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샤자르 알두르가 새로운 술탄으로 선포되었다. 그녀는 이슬람 세계 역사상 몇 안 되는 여성 군주였다. 그러나 이것은 논란을 일으켰고, 곧 맘루크 장군 아이바크가 샤자르와 결혼하여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실질적 권력은 바이바르스와 아크타이 같은 맘루크 사령관들에게 있었다.
이 정치적 혼란은 루이에게 기회이자 위기였다. 새로운 권력자들은 정통성이 부족했고, 재정이 필요했다. 그들은 루이의 몸값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동시에 정치적 불안정은 루이가 처형될 가능성도 높였다. 맘루크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일부는 루이를 죽여 십자군에게 교훈을 주자고 주장했고, 다른 이들은 몸값을 받는 것이 더 실용적이라고 반대했다. 결국 실용주의가 승리했다. 맘루크는 루이와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은 치열했다. 맘루크의 초기 요구는 엄청났다. 그들은 100만 베잔트 금화를 요구했다. 이것은 현대 환산으로 수억 달러에 달하는 금액이었고, 프랑스 왕실이 몇 년치 수입을 모아도 모을 수 없는 돈이었다. 또한 맘루크는 다미에타를 돌려주고, 모든 십자군 포로를 석방하며, 십자군 국가들이 점령한 모든 영토를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이것은 7차 십자군의 완전한 무조건 항복을 의미했다. 루이의 협상단은 이 요구를 거부했다. 그들은 몸값을 낮추고, 조건을 완화하려 했다.
협상은 몇 주 동안 지지부진했다. 양측은 서로를 시험했고, 때로는 결렬 직전까지 갔다. 맘루크는 압력을 가하기 위해 일부 귀족 포로들을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 루이는 이런 위협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협상단에게 단호한 지시를 내렸다. "나는 프랑스의 왕이다. 나는 위협에 굴복하지 않는다. 공정한 조건을 제시하라. 하지만 비굴하게 구걸하지는 마라." 이것은 루이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그는 패배를 인정했지만, 왕의 위엄만큼은 지키려 했다.
마침내 5월 중순, 합의가 이루어졌다. 최종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40만 리브르 투르누아의 몸값을 지불한다. 이것은 초기 요구의 절반 이하였지만, 여전히 프랑스 왕실 2년치 수입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둘째, 다미에타를 즉시 반환한다.
셋째, 모든 귀족과 기사 포로를 석방한다. 그러나 일반 병사들의 석방은 보장되지 않았다.
넷째, 루이는 10년간 이집트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이 조건들은 가혹했지만, 루이는 수용했다. 그는 협상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몸값 지불에는 문제가 있었다. 40만 리브르는 현금으로 즉시 마련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루이의 재무관들은 다미에타에 있던 왕실 금고를 조사했다. 거기에는 약 17만 리브르가 있었다. 나머지 23만 리브르는 어디서 구할 것인가? 루이는 템플 기사단에게 차입을 요청했다. 템플 기사단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조직 중 하나였고, 그들의 아크레 지부에는 막대한 금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사단은 거부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금이 십자군을 위한 것이지, 몸값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루이는 분노했다. 왕실 원수였던 조앵빌이 템플 기사단의 금고를 강제로 열었고, 필요한 금액을 가져갔다. 이것은 불법이었지만, 루이는 국가적 긴급상황이라고 정당화했다.
1250년 5월 6일, 첫 번째 지불이 이루어졌다. 20만 리브르가 맘루크에게 전달되었고, 동시에 다미에타가 반환되었다. 맘루크 군대가 다미에타로 입성했을 때, 그들은 도시를 텅 빈 채로 발견했다. 십자군은 떠나면서 모든 것을 가져갔다. 맘루크는 배신감을 느꼈지만, 이미 금을 받은 후였으므로 항의할 수 없었다. 루이와 주요 귀족들은 석방되었다. 그들은 배를 타고 아크레로 향했다. 나머지 20만 리브르는 나중에 지불하기로 약속되었다.
석방된 루이는 자유인이었지만, 완전히 파멸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동생을 잃었고, 수만 명의 병사들이 죽었으며, 프랑스의 재정은 파탄났다. 군사적으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예루살렘은 여전히 이슬람의 손에 있었고, 십자군 국가들은 더욱 약해졌다. 루이 자신은 중병에서 거우 회복한 상태였고, 몸과 마음 모두 지쳐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루이가 즉시 프랑스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패배한 십자군 지도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했다. 그러나 루이는 달랐다.
석방 후 루이의 선택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대부분의 십자군 지도자들은 실패 후 즉시 귀국하여 변명을 늘어놓고 다음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루이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그는 아크레에 도착한 후, 성지에 남겠다고 선언했다. 프랑스 귀족들은 경악했다. 그들은 왕에게 귀국을 간청했다. 프랑스에는 왕이 필요했고, 어머니 블랑슈가 섭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도 이미 60대 후반이었다. 국내 정치는 불안정했고, 귀족들은 왕의 부재를 틈타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루이는 단호했다.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루이가 성지에 남은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첫째, 아직 포로로 남아있는 병사들을 구출해야 했다. 맘루크와의 합의는 귀족과 기사들의 석방만을 보장했고, 수천 명의 일반 병사들은 여전히 이집트의 감옥과 노예 시장에 있었다. 루이는 이들을 버릴 수 없었다. 그는 매년 맘루크와 협상하여 포로들을 속환하기 위해 돈을 지불했다. 1250년부터 1254년까지 4년 동안, 루이는 약 1,200명의 포로를 구출했다. 이것은 전체의 일부에 불과했지만, 루이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각 포로의 몸값은 개인별로 협상되었고, 루이는 프랑스에서 계속 돈을 송금받아 이 비용을 충당했다.
둘째, 루이는 십자군 국가들을 강화하려 했다. 1250년대 초 십자군 국가들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예루살렘 왕국은 이미 사라졌고, 안티오크 공국과 트리폴리 백국은 약해졌으며, 남은 것은 해안의 몇몇 도시뿐이었다. 루이는 이곳들을 방어 가능한 요새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프랑스 왕실의 재정을 동원하여 대규모 건설 사업을 시작했다. 아크레, 카이사레아, 시돈, 자파의 성벽이 보수되고 강화되었다. 루이는 직접 건설 현장을 시찰했고, 엔지니어들과 상의하여 설계를 개선했다. 특히 카이사레아의 경우, 루이는 완전히 새로운 이중 성벽 시스템을 구축했다. 외벽과 내벽 사이에 해자를 파고, 탑을 추가했다. 이 요새는 나중에 맘루크의 공격을 여러 차례 막아내며 그 가치를 입증했다.
건설 비용은 막대했다. 루이는 1250년부터 1254년까지 약 100만 리브르를 성지 방어에 투자했다. 이것은 7차 십자군 전체 비용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프랑스는 이미 십자군으로 재정이 파탄난 상태였는데, 루이는 더 많은 돈을 쏟아부었다. 이것은 프랑스 귀족들의 분노를 샀다. 그들은 왕이 프랑스를 버리고 팔레스타인에 집착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루이는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 성지는 단순한 영토가 아니라 하느님의 땅이었고, 그것을 지키는 것은 신성한 의무였다.
셋째, 루이는 외교를 통해 십자군 국가들의 생존을 보장하려 했다. 그는 이슬람 세력들이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이집트의 맘루크와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조는 적대 관계였고, 다마스쿠스와 알레포도 경쟁했다. 루이는 이 분열을 이용하려 했다. 그는 다마스쿠스의 나시르 유수프와 동맹을 맺으려 시도했다. 제안은 단순했다. 십자군과 다마스쿠스가 협력하여 이집트 맘루크를 견제하자는 것이었다. 협상은 몇 달간 계속되었고, 한때는 성공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결국 실패했다. 나시르 유수프는 기독교인과의 공식 동맹이 이슬람 세계에서 자신의 정통성을 해칠 것을 우려했다.
루이는 또한 몽골과의 협상을 계속했다. 1253년, 그는 윌리엄 루브룩이라는 프란체스코회 수사를 몽골 대칸 몽케에게 파견했다. 루이의 제안은 여전히 같았다. 몽골과 십자군이 협력하여 이슬람 세력을 동서에서 협공하자는 것이었다. 루브룩은 몽골 제국의 수도 카라코름까지 가는 놀라운 여행을 했다. 그러나 몽케 칸의 반응은 차가웠다. 몽골은 동맹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복종을 원했다. 몽케는 루이에게 몽골의 신하가 되라고 요구했다. 이것은 당연히 거부되었다. 그러나 루이의 외교 노력이 완전히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1258년 몽골이 바그다드를 함락시켰을 때, 십자군 국가들은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 않았다. 이것이 루이의 외교 덕분인지, 아니면 우연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루이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넷째, 루이는 성지에서 사회적, 종교적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십자군 국가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믿었다. 귀족들은 사치와 방종에 빠져 있었고, 상인들은 탐욕스러웠으며, 성직자들조차 세속적이었다. 루이는 이것이 십자군 실패의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하느님은 죄로 가득한 십자군을 벌한 것이고, 따라서 승리를 위해서는 먼저 정화가 필요했다. 루이는 자신부터 모범을 보였다. 그는 검소한 생활을 했다. 왕으로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호화로운 식사와 의복을 거부하고, 평범한 옷을 입고 간단한 음식을 먹었다. 그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미사에 참석했고, 하루에 여러 번 기도했다. 금식일에는 엄격하게 금식했고, 참회 기간에는 머리에 재를 뿌렸다.
루이는 또한 가난한 자들을 직접 돌보았다. 아크레에는 수백 명의 병든 순례자들과 전쟁 부상자들이 있었다. 루이는 일주일에 여러 번 병원을 방문하여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는 직접 환자들의 상처를 씻어주고, 음식을 먹여주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특히 그는 나병 환자들을 돌보았다. 당시 나병은 가장 두려운 질병이었고, 나병 환자들은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되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저주받은 자로 여겼고, 접촉조차 거부했다. 그러나 루이는 달랐다. 그는 나병 환자들의 발을 씻어주고, 그들과 함께 식사했다. 목격자들은 왕이 나병 환자를 껴안는 모습을 증언했다. 이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다. 루이는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루이는 또한 십자군 국가들의 사법 체계를 개혁하려 했다. 그는 직접 재판을 주재했다. 아크레의 광장에 재판석이 마련되었고, 루이는 그곳에 앉아 민원을 들었다. 누구든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었다. 가난한 농부도, 부유한 상인도, 기사도 모두 동등하게 대우받았다. 루이는 각 사건을 신중하게 검토했고, 증거를 요구했으며, 공정한 판결을 내리려 노력했다. 그의 재판은 공정하다는 평판을 얻었고, 사람들은 그를 신뢰했다. 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한 가난한 과부가 부유한 귀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귀족은 과부의 토지를 불법으로 점유했다. 증거는 불분명했고, 귀족은 영향력이 있었다. 그러나 루이는 과부의 편을 들었다. 그는 귀족에게 토지를 돌려주고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명령했다. 귀족은 분노했지만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판결들이 쌓이면서 루이는 정의의 왕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루이의 4년간 성지 체류는 군사적으로는 무의미했다. 그는 단 한 번의 전투도 승리하지 못했고, 한 뼘의 땅도 정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루이의 성자적 이미지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유럽 전역에서 루이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다. 사람들은 왕이 포로로 잡혔다가 석방된 후에도 성지를 떠나지 않고, 병자를 돌보고, 가난한 자를 도우며, 공정한 재판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것은 완벽한 기독교 왕의 모습이었다. 루이는 권력이나 영광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을 섬기고 백성을 돌보았다. 이런 헌신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교황은 루이를 찬양했고, 설교자들은 그를 본보기로 삼았으며, 연대기 작가들은 그의 덕행을 기록했다. 루이는 패배한 십자군 지도자에서 살아있는 성인으로 변모했다.
1254년 4월, 루이는 어머니 블랑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받았다. 블랑슈는 루이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이자 조언자였다. 그녀는 루이가 어렸을 때부터 프랑스를 통치했고, 왕이 십자군에 나간 동안에도 섭정으로서 국가를 관리했다. 그녀 없이는 프랑스가 제대로 기능할 수 없었다. 루이는 마침내 귀국을 결정했다. 7월, 그는 아크레를 떠났다. 출발 전 루이는 십자군 국가들에게 막대한 유산을 남겼다. 그는 100명의 기사를 1년간 고용할 비용을 지불했고, 성채 방어를 위한 보급품을 제공했으며, 가난한 순례자들을 위한 기금을 설립했다. 이 기금은 루이가 죽은 후에도 수십 년간 유지되었다. 9월, 루이는 마침내 프랑스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미 블랑슈는 세상을 떠난 후였다. 루이는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귀국한 루이를 맞이한 프랑스는 변화되어 있었다. 6년간의 왕의 부재 동안 블랑슈는 훌륭하게 섭정을 수행했지만, 그녀의 죽음으로 권력 공백이 생겼다. 귀족들은 왕의 권위에 도전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재정은 파탄 직전이었다. 십자군에 투자된 막대한 비용은 프랑스 경제에 심각한 부담을 주었다. 세금은 올랐고, 빚은 쌓여있었으며, 상인들은 불만에 가득했다. 많은 사람들은 루이가 무책임한 모험으로 국가를 위기에 빠뜨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리로 돌아온 루이를 기다린 것은 비난이 아니라 찬양이었다.
루이의 귀환은 개선장군의 귀환이 아니라 순교자의 귀환이었다.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왕을 환영했다. 그들은 루이가 신앙을 위해 목숨을 걸었고, 포로가 되어서도 굴복하지 않았으며,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성지에 남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군사적 패배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루이의 고통과 희생이 그를 더욱 위대하게 만들었다. 중세 기독교 세계관에서 순교는 승리보다 고귀했고, 고통은 영광보다 가치 있었다. 루이는 전투에서는 졌지만 영혼의 싸움에서는 이겼다. 그는 완벽한 기독교 왕의 모델이 되었다.
루이는 또한 귀중한 성유물들을 가져왔다. 성지에서 루이는 비잔티움과 이슬람 상인들로부터 막대한 돈을 주고 성유물을 구입했다. 예수의 가시관 조각, 진짜 십자가의 나무 조각, 성모 마리아의 옷감, 성 요한의 머리카락, 여러 성인들의 유골 등이었다. 이 유물들의 진위는 의심스럽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믿었다. 루이는 이 성유물들을 보관하기 위해 생트샤펠을 건축했다. 이 고딕 양식의 경이로운 예배당은 1248년에 완공되었고,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가 되었다. 스테인드글라스 창문들은 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고, 방문객들은 경외감에 압도되었다. 성유물들은 생트샤펠에 안치되었고, 순례자들이 몰려왔다. 이것은 파리를 기독교 세계의 중요한 순례지로 만들었고, 루이의 영적 권위를 강화했다.
루이의 나머지 치세는 7차 십자군의 경험에 의해 깊이 형성되었다. 그는 더욱 경건해졌고, 동시에 더욱 엄격해졌다. 루이는 프랑스를 완벽한 기독교 왕국으로 만들려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했다. 그는 이것이 다음 십자군의 성공을 보장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7차 십자군의 실패는 하느님의 징벌이었고, 그 원인은 기독교인들의 죄였다. 따라서 죄를 없애면 하느님의 은총을 다시 받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런 신학적 세계관은 루이의 모든 정책을 지배했다.
루이는 사법 개혁에 집중했다. 그는 직접 재판을 주재하며 억울한 백성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루이는 자주 뱅센 숲의 떡갈나무 아래에 앉아 재판을 했다. 누구든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었고, 루이는 각 사건을 신중하게 들었다. 그는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를 동등하게 대했고, 귀족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엄하게 처벌했다. 한번은 한 백작이 농민과의 분쟁에서 폭력을 사용했다. 루이는 백작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명령했다. 백작은 굴욕감을 느꼈지만 복종해야 했다. 이런 판결들은 루이를 "성왕 루이"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왕이 진정으로 정의를 추구한다고 믿었다.
루이는 또한 부패와 싸웠다. 그는 왕실 관리들을 엄격히 감시했고, 부패한 관리들을 가차없이 처벌했다. 그는 "심문관"이라는 특별 조사관들을 파견하여 지방 관리들의 행정을 점검했다. 뇌물을 받거나 권한을 남용한 관리들은 파면되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이것은 프랑스 행정의 효율성을 크게 높였고, 동시에 왕권을 강화했다. 루이의 정의는 단순한 도덕적 원칙이 아니라 정치적 무기이기도 했다. 공정한 왕이라는 명성은 귀족들조차 도전하기 어려운 권위를 만들었다.
그러나 루이의 종교적 열정은 어두운 면도 있었다. 그는 유대인을 박해했다. 루이는 십자군 실패가 신의 분노 때문이라고 믿었고, 그 분노의 원인 중 하나가 기독교 사회 내의 유대인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는 유대인에게 노란색 휘장을 착용하도록 강제했다. 이것은 유대인을 표시하고 격리하기 위한 조치였다. 루이는 또한 유대인의 경제 활동을 제한했다. 고리대금을 금지했고, 기독교인과의 거래를 제한했다. 가장 악명 높은 것은 탈무드 소각이었다. 1240년, 루이는 파리에서 공개적으로 수천 권의 탈무드 사본을 불태웠다. 이것은 유대교의 핵심 경전을 파괴하는 행위였고, 유대인 공동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루이는 이것이 신앙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행동이라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종교적 편협함과 박해였다.
루이는 또한 도덕 규제를 강화했다. 그는 도박을 금지했다. 주사위와 카드는 압수되었고, 도박장은 폐쇄되었다. 매춘도 금지했다. 매춘부들은 도시에서 추방되었고, 매춘 업소는 폐쇄되었다. 신성모독에 대한 처벌도 가혹해졌다.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저주한 사람은 혀에 뜨거운 인두가 찍혔다. 심한 경우 처형되기도 했다. 이런 극단적 조치들은 프랑스를 경건한 사회로 만들려는 루이의 의지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기도 했다.
역설적으로 이런 종교적 광신은 프랑스의 왕권을 강화했다. 루이의 도덕적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그는 단순한 세속 군주가 아니라 하느님의 대리인처럼 여겨졌다. 교회는 루이를 적극 지지했다. 교황은 루이를 "가장 기독교적인 왕"이라고 칭송했다. 주교들은 설교에서 루이를 본보기로 제시했다. 이런 종교적 정당성은 귀족들의 반란을 억제했다. 왕에게 반항하는 것은 곧 하느님에게 반항하는 것이었다. 루이는 종교와 정치를 완벽하게 결합했고, 이것이 카페 왕조의 전성기를 만들었다.
루이는 또한 외교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1258년, 그는 잉글랜드의 헨리 3세와 파리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1세기 이상 계속된 프랑스-잉글랜드 분쟁을 일시적으로 종결시켰다. 루이는 가스코뉴 지방에 대한 잉글랜드의 권리를 일부 인정했다. 프랑스 귀족들은 이것을 약점으로 비난했다. 그들은 왕이 프랑스 영토를 불필요하게 양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루이는 평화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기독교 왕들끼리 싸우는 것은 죄라고 믿었고, 평화를 통해 십자군을 위한 힘을 비축하려 했다. 파리 조약은 수십 년간 지속되었고, 이 기간 동안 프랑스는 내부 발전에 집중할 수 있었다.
1260년대가 되자 루이는 다시 십자군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7차 십자군의 실패를 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평생의 죄책감이었고, 미완의 사명이었다. 루이는 이제 50대였고, 건강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다. 1267년 3월 24일, 루이는 다시 한 번 십자군 서약을 했다. 이것은 8차 십자군의 시작이었다. 주변의 반응은 7차 때보다 더 부정적이었다. 아들 필립은 아버지가 너무 늙었다고 간청했다. 그는 이제 16살이 된 왕세자였고, 아버지 없이 프랑스를 통치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귀족들은 프랑스를 다시 비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재정 고문들은 돈이 없다고 경고했다. 7차 십자군의 빚이 아직 다 갚아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루이는 듣지 않았다. 그에게 십자군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였다. 7차 십자군의 실패는 속죄되어야 했고, 예루살렘은 해방되어야 했다. 루이는 준비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이전만큼 철저하지 못했다. 시간도, 돈도, 열정도 부족했다. 많은 귀족들은 참여를 거부했고, 젊은이들도 예전만큼 열성적이지 않았다. 십자군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루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1270년 7월, 63세의 루이는 다시 한 번 배에 올랐다.
이번 십자군의 목표는 튀니스였다. 이것은 논란이 많은 선택이었다. 튀니스는 성지와 멀리 떨어진 북아프리카에 있었다. 왜 루이가 예루살렘 대신 튀니스를 택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일부 역사가들은 루이의 동생 샤를 당주가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샤를은 시칠리아 왕이었고, 튀니스를 정복하면 시칠리아의 무역이 이익을 볼 것이었다. 다른 역사가들은 루이가 튀니스의 술탄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이든, 이것은 전략적으로 의미가 없는 선택이었다.
7월, 십자군은 튀니스 근처의 카르타고에 상륙했다. 그러나 재앙이 기다리고 있었다. 북아프리카의 여름은 극도로 더웠고, 십자군은 더위에 적응하지 못했다. 더 심각한 것은 전염병이었다. 아마도 이질이나 티푸스였을 것이다. 진영에 질병이 창궐했다. 병사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루이 자신도 감염되었다. 그는 심한 열과 설사로 고통받았다. 왕실 의사들이 치료했지만 소용없었다. 루이의 상태는 날로 악화되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신음했고, 거의 음식을 먹지 못했다. 십자군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진영에 갇혀 있었다.
8월 25일, 루이는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논란이 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예루살렘이여, 예루살렘이여"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서는 그가 간단히 "우리를 하느님의 성스러운 도시로 인도하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어느 쪽이든, 루이의 마지막 생각은 예루살렘이었다. 그는 평생 추구했지만 결코 도달하지 못한 그 성스러운 도시를 꿈꾸며 죽었다. 루이의 시신은 프랑스로 운반되었다. 중세의 관습에 따라, 시신은 분해되었다. 살은 튀니스에 묻혔고, 뼈는 생드니 대성당으로 옮겨져 역대 프랑스 왕들 옆에 안장되었다. 내장은 시칠리아의 몬레알레 성당에 보관되었다.
루이의 죽음은 즉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일부는 이것을 순교로 여겼다. 왕은 신앙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고, 성지로 가는 길에 죽었다. 이것은 가장 고귀한 죽음이었다. 다른 이들은 이것을 비극적 낭비로 보았다. 왕은 무의미한 원정으로 자신과 수천 명의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프랑스는 다시 한 번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루이의 아들 필립 3세와 교회는 첫 번째 해석을 선택했다. 그들은 루이를 순교자이자 성인으로 추앙하기 시작했다.
1297년, 교황 보니파키오 8세는 루이 9세를 성인으로 시성했다. 이것은 루이가 죽은 지 27년 후였다. 시성 과정에서 수많은 기적들이 보고되었다. 루이의 무덤을 방문한 사람들이 병에서 치유되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유골에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런 기적들의 진위는 의심스럽지만, 사람들은 믿고 싶어했다. 루이는 "성왕 루이"가 되었고, 프랑스 왕실의 영원한 상징이 되었다. 그의 후손들은 모두 성왕의 후예라는 정통성을 주장했다. 루이의 이미지는 수세기 동안 프랑스 군주제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7차 십자군은 완벽한 실패였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군사적으로 십자군은 참패했다. 다미에타는 점령했다가 다시 잃었고, 만수라 전투는 대패했으며, 카이로는 꿈도 꾸지 못했다. 루이의 동생과 수천 명의 최정예 기사들이 전사했다. 왕 자신이 포로가 되어 굴욕을 당했다. 예루살렘은 해방되지 않았고, 십자군 국가들은 더욱 약화되었다. 1291년 아크레가 함락되면서 십자군 국가들은 완전히 소멸했다.
경제적으로도 재앙이었다. 7차 십자군의 총 비용은 약 250만 리브르 투르누아였다. 이것은 프랑스 왕실 연간 수입의 10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이 돈은 세금, 차입금, 교회 헌금으로 조달되었고, 프랑스 경제에 장기적 부담을 주었다. 특히 고리대금으로 빌린 돈의 이자는 수십 년간 프랑스 재정을 압박했다. 이 돈으로 프랑스 내에서 다리를 건설하고, 도로를 포장하고, 학교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대신 그것은 이집트 사막에서 낭비되었다.
정치적으로도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루이는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를 약화시키려 했지만, 오히려 맘루크 왕조의 탄생을 촉진했다. 맘루크는 십자군을 격파함으로써 정통성을 얻었고, 이후 2세기 반 동안 이집트를 통치했다. 바이바르스는 나중에 술탄이 되어 십자군 국가들을 체계적으로 파괴했다. 루이의 십자군은 의도와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이슬람 세력은 약화되지 않고 오히려 강화되었다.
인명 피해는 참담했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추정치에 따르면 7차 십자군에서 약 15,000명의 십자군이 전사했고, 12,000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그 중 대부분은 노예가 되거나 처형당했다. 살아서 프랑스로 돌아온 사람은 원래 병력의 4분의 1도 안 되었다. 이것은 한 세대의 프랑스 귀족과 기사들이 거의 전멸한 것을 의미했다. 수많은 가문이 후계자를 잃었고, 과부와 고아들이 생겼다. 루이의 개인적 슬픔도 컸다. 그는 동생 로베르를 잃었고, 이것은 평생 죄책감으로 남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루이 9세는 실패를 통해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군사적 영웅이 되지 못했지만, 도덕적 영웅이 되었다. 그의 십자군은 승리하지 못했지만, 그의 인격은 승리했다. 중세인들에게 루이는 완벽한 기독교 왕의 모델을 제시했다. 그는 권력을 추구하지 않았다. 영광을 원하지 않았다. 정복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오직 하느님을 섬기고 백성을 돌보려 했다. 이런 순수한 의도가 루이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루이가 포로가 되었을 때,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왕의 위엄을 지켰다. 몸값 협상에서 흥정하지 않고 당당하게 조건을 수용했다. 이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였다. 루이는 패배를 인정했지만, 자신이 누구인지는 결코 잊지 않았다. 석방 후 그가 성지에 남은 것은 더욱 놀라웠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실패 후 도망쳤지만, 루이는 책임을 다했다. 그는 포로들을 구출하고, 성채를 재건하고, 병자를 돌보았다. 4년간의 성지 체류는 군사적으로는 무의미했지만, 영적으로는 변혁적이었다. 루이는 왕에서 성인으로 변모했다.
프랑스로 돌아온 루이는 더욱 경건하게 통치했다. 그는 정의를 추구하고, 부패와 싸우고, 가난한 자를 도왔다. 이런 통치는 중세적 이상을 체현했다. 왕은 단순한 군사 지도자나 정치가가 아니라, 하느님의 대리인이었다. 왕의 의무는 정복이 아니라 정의였다. 루이는 이 이상을 완벽하게 실현했다. 그의 통치는 프랑스 역사에서 "황금기"로 기억되었고, 후대 왕들은 모두 루이를 모방하려 했다.
루이의 두 번째 십자군은 첫 번째보다 더 비극적이었다. 그는 늙고 병들었지만, 신앙의 부름을 거부할 수 없었다. 튀니스에서의 죽음은 무의미해 보였다. 그러나 중세인들은 이것을 순교로 해석했다. 루이는 성지로 가는 길에 죽었다. 그는 끝까지 십자가를 짊어졌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완벽한 모습이었다. 루이의 마지막 말 "예루살렘이여, 예루살렘이여"는 그의 평생 소망을 요약했다. 그는 결코 예루살렘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 자체가 그의 정체성이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7차 십자군은 종교적 광신과 정치적 무책임의 결합으로 보인다. 루이는 합리적 계산이 아니라 신비적 환상에 기반하여 결정을 내렸다. 그는 자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무의미한 모험에 낭비했다. 이집트 전략은 이미 실패한 것이었고, 다미에타에서 6개월을 낭비한 것은 치명적 실수였다. 만수라 전투에서 동생의 무모한 돌격을 막지 못한 것도 지휘관으로서의 실패였다. 포로가 된 후에도 즉시 귀국하지 않고 성지에 남은 것은 프랑스를 위험에 빠뜨렸다. 두 번째 십자군은 더욱 무책임했다. 늙은 왕이 국가를 비우고 튀니스로 간 것은 정치적 자살 행위였다.
그러나 루이를 단순히 광신자로 치부하는 것은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는 것이다. 13세기 유럽에서 십자군은 단순한 군사 원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주적 의미를 가진 영적 투쟁이었다. 예루살렘은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었다. 십자군에 참여하는 것은 천국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것은 미신이 아니라 진지한 신학적 믿음이었다. 교황, 주교, 신학자들 모두 이것을 가르쳤고, 사람들은 믿었다. 루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시대가 요구한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더욱이 루이의 선택은 완전히 비합리적이지 않았다. 이집트 전략은 논리적 근거가 있었다. 카이로는 이슬람 세력의 중심이었고, 이집트를 제거하면 예루살렘은 자연스럽게 함락될 것이었다. 5차 십자군의 실패는 잘못된 전략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실행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었다. 루이는 더 나은 준비, 더 큰 군대, 더 강력한 지도력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과도한 자신감이었지만, 완전히 불합리한 것은 아니었다. 역사에는 많은 "거의 성공할 뻔한" 순간들이 있다. 만약 로베르가 무모한 돌격을 하지 않았다면, 만약 맘루크가 내부 분열로 약화되었다면, 만약 날씨가 달랐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었다.
루이의 진정한 의미는 그가 무엇을 성취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대표했느냐에 있다. 그는 중세 기독교 왕권의 이상형이었다. 왕은 정복자가 아니라 보호자였다. 왕은 부를 축적하는 자가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는 자였다. 왕은 권력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자였다. 루이는 이 모든 것을 체현했다. 그는 승리하지 못했지만, 옳은 일을 하려 했다. 그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실패 속에서도 위엄을 지켰다. 그는 예루살렘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평생 그것을 추구했다.
7차 십자군의 진정한 유산은 군사사가 아니라 정신사에서 찾아야 한다. 이 원정은 중세 기독교 세계관의 정점이자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었다. 신앙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 수 있었다. 루이는 신앙 때문에 포로가 되어서도 굴복하지 않았고, 석방 후에도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죽는 순간까지 예루살렘을 꿈꾸었다. 이것은 인간 정신의 고귀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신앙은 또한 인간을 파괴할 수 있었다. 루이는 신앙 때문에 수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국가 재정을 파탄냈으며, 유대인을 박해했다. 이것은 종교적 확신의 위험을 보여준다.
루이 9세는 성자이자 전쟁광이었다. 그는 현자이자 광신자였다. 그는 자비로운 왕이자 무자비한 십자군이었다. 이런 모순이야말로 루이와 7차 십자군을 역사에서 가장 매혹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이야기 중 하나로 만든다. 우리는 루이를 단순히 찬양할 수도, 단순히 비난할 수도 없다. 그는 자신의 시대의 산물이었고, 그 시대를 완벽하게 대표했다. 그를 이해하는 것은 중세를 이해하는 것이고, 신앙과 권력의 복잡한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맘루크에게 포로가 되어서도 왕의 자존심을 잃지 않았던 그 남자는, 결국 자신이 평생 추구한 예루살렘에 닿지 못한 채 북아프리카의 텐트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실패는 후세에 성공보다 강력한 메시지를 남겼다. 때로는 달성하지 못한 꿈이, 이룬 업적보다 더 오래 기억되는 법이다. 루이 9세는 예루살렘을 해방하지 못했지만, 완벽한 기독교 왕의 이상을 남겼다. 7차 십자군은 실패했지만, 신앙과 헌신의 한계와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역사는 승리자만 기억하지 않는다. 때로는 고귀하게 실패한 자들이 더 깊은 울림을 준다. 루이 9세와 7차 십자군이 바로 그런 경우다.
8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루이의 선택을 다르게 평가할 수 있다. 그의 신앙은 광신으로, 그의 헌신은 무책임으로, 그의 이상은 환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의 용기를, 그의 진정성을, 그의 불굴의 정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루이는 틀렸을지 모르지만, 진지했다. 그는 실패했을지 모르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시대착오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믿음에 충실했다. 이것이 그를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인간 조건의 영원한 딜레마를 체현한 상징으로 만든다. 신앙과 이성, 이상과 현실, 헌신과 책임 사이의 긴장은 루이의 시대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시대, 모든 인간이 직면하는 근본적 질문이다. 루이 9세와 7차 십자군의 이야기는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 비록 비극적이지만 진지한 답을 제시한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A0%9C7%EC%B0%A8_%EC%8B%AD%EC%9E%90%EA%B5%B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