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0년 8월 25일, 튀니지 해안의 카르타고 폐허 근처에서 한 노왕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이질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며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주변에는 그를 따라온 기사들과 성직자들이 둘러서서 기도를 올렸다. 죽어가는 이는 다름 아닌 프랑스의 루이 9세, 후대에 성 루이로 추앙받게 될 그 인물이었다. 그가 이끈 8차 십자군 원정은 시작한 지 불과 두 달 만에 참담한 실패로 끝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실패의 이야기는 단순한 군사적 패배를 넘어서, 중세 유럽의 신앙심과 정치적 현실, 그리고 한 이상주의자의 비극적 집념이 충돌한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루이의 임종 장면은 당대의 연대기 작가들에 의해 상세히 기록되었다. 왕의 고해신부였던 조프루아 드 보리외는 루이가 마지막 며칠 동안 거의 말을 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시편을 암송하려 애썼다고 전한다. 그의 몸은 금욕적인 생활과 잦은 자기 고행으로 인해 이미 수년 전부터 쇠약해져 있었다. 루이는 자신의 몸에 철사로 만든 채찍질 도구를 감고 있었고, 금요일마다 스스로를 징벌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경건함은 그의 신앙관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가 얼마나 현세의 고통을 통해 영혼의 구원을 추구했는지를 드러낸다. 침상에서도 그는 성유물인 십자가 조각을 손에 쥐고 있었으며,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예루살렘으로"라는 말을 되뇌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은 단순히 한 왕의 종말이 아니라, 십자군 운동 그 자체의 이상이 함께 죽어가는 상징적 순간이었다.
루이 9세가 두 번째이자 마지막 십자군 원정을 결심한 것은 그의 성격과 시대적 배경을 이해해야만 비로소 설명될 수 있다. 1214년에 태어난 루이는 카페 왕조의 정통성을 구현하는 인물로 성장했다. 그의 어머니 카스티야의 블랑슈는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엄격한 종교 교육을 시켰으며, "차라리 네가 죽는 것을 보는 편이 네가 대죄를 짓는 것을 보는 것보다 낫다"는 말로 그를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교육은 루이의 성격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1244년 12월, 루이는 심각한 병을 앓았다. 당시 그는 말라리아나 이질로 추정되는 질병에 걸려 거의 사경을 헤맸다. 궁정의 의사들은 그의 회복을 포기했고, 이미 시신을 덮을 천까지 준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루이는 기적적으로 회복했고, 이를 하느님의 은총으로 해석했다. 병상에서 일어난 루이는 즉시 십자군 서약을 선언했다. 그의 어머니 블랑슈와 귀족들은 이를 만류했지만, 루이는 결연했다. 1248년, 마침내 그는 약 1만 5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7차 십자군을 시작했다.
7차 십자군의 전개 과정은 루이의 군사적 능력과 한계를 모두 드러냈다. 원정대는 먼저 키프로스에서 겨울을 보낸 후, 1249년 6월 이집트의 다미에타를 공격했다. 다미에타는 놀랍도록 쉽게 함락되었다.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아스살리흐 아이유브가 심각한 병에 걸려 있었고, 수비군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루이의 군대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도시에 입성했다. 이 승리는 십자군에게 큰 고무를 주었지만, 동시에 과신을 낳았다. 루이는 다미에타에서 여러 달을 보내며 시간을 낭비했다. 이는 치명적인 실수였다.
1249년 11월, 십자군은 마침내 카이로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나일강을 따라 올라가는 행군은 험난했다. 이집트군은 후퇴하면서 곡물을 불태우고 우물에 독을 풀었다. 12월, 십자군은 만수라에 도달했다. 이곳에서 루이는 전략적 실수를 연속으로 저질렀다. 그의 동생 로베르 다르투아 백작이 이끄는 선봉대가 이집트군을 급습하여 초반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로베르는 승리에 도취되어 만수라 시내로 깊숙이 추격했고, 결국 좁은 골목에서 포위당해 전멸했다. 로베르 본인도 전사했다.
동생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루이는 공세를 계속했지만,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다. 이집트의 새로운 술탄 투란샤는 나일강에 함대를 배치하여 십자군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설상가상으로 질병이 십자군 진영을 휩쓸었다. 괴혈병과 이질이 만연했고, 루이 자신도 병에 걸렸다. 1250년 4월, 루이는 마침내 퇴각을 명령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다미에타로 향하는 도중 이집트군에게 포위당한 십자군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루이 9세는 프랑스 왕으로서는 처음으로 이교도의 포로가 되는 굴욕을 겪었다.
포로 생활은 루이에게 깊은 정신적 흔적을 남겼다. 그는 만수라의 한 집에 감금되어 있으면서도 매일 미사에 참석할 것을 요구했고, 이집트인 간수들은 이를 허락했다고 한다. 결국 막대한 몸값이 협상되었다. 40만 리브르의 금화와 다미에타의 반환이 대가였다. 이 금액은 프랑스 연간 세입의 세 배에 달하는 천문학적 액수였다. 1250년 5월, 루이는 풀려났지만 즉시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4년 동안 아크레와 예루살렘 왕국의 잔존 영토에 머물며 방어 시설을 강화하고 포로들을 석방하는 데 노력했다.
이 경험은 보통의 군주라면 십자군의 비현실성을 깨닫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루이는 달랐다. 그에게 7차 십자군의 실패는 자신의 신앙심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신을 시험하신 것이라고 해석되었다. 당대의 신학에서 고난은 영혼을 정화하는 수단으로 여겨졌고, 순교는 최고의 신앙 표현으로 간주되었다. 루이는 자신의 실패를 이러한 신학적 틀 안에서 이해했다. 그는 요나서의 이야기처럼,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더 큰 희생이 필요하다고 믿게 되었다. 이러한 신학적 자기 합리화는 그를 더욱 깊은 신앙의 길로 이끌었고, 결국 두 번째 십자군을 준비하게 만들었다.
프랑스로 돌아온 루이는 성왕의 면모를 보여주며 통치했다. 1254년부터 1270년까지의 그의 통치 기간은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시기 중 하나로 기록된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직접 만나 발을 씻겨주고, 나병환자들을 돌보았으며, 공정한 재판으로 명성을 얻었다. 뱅센 숲의 떡갈나무 아래에서 백성들의 청원을 직접 들었다는 유명한 일화는 그의 통치 철학을 보여준다. 생동이 작성한 '성 루이의 생애'에 따르면, 왕은 여름이면 종종 뱅센 숲으로 가서 떡갈나무 아래 앉아 누구든 자신에게 청원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귀족과 평민,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가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었고, 루이는 이들의 말을 경청했다.
루이의 사법 개혁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는 전통적인 결투 재판(trial by combat)을 크게 제한하고, 증거와 증인에 기반한 합리적 재판을 도입했다. 1254년의 대칙령(Grande Ordonnance)을 통해 그는 왕실 관리들의 부패를 단속하고, 사법 절차를 표준화했다. 또한 그는 앙캉(Enquêteurs)이라는 특별 조사관 제도를 만들어 지방 관리들의 부정을 감시하게 했다. 이들은 왕의 이름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고충을 청취하고 부당한 세금이나 억울한 처벌이 있는지 조사했다.
루이는 또한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금화인 에퀴(écu)와 은화인 그로(gros)를 발행하여 프랑스 화폐의 안정성을 높였다. 이는 경제적 효과뿐만 아니라 왕권 강화에도 기여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수많은 영주들이 각자의 화폐를 발행하고 있었는데, 루이의 화폐가 가치와 순도에서 신뢰를 얻으면서 점차 전국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그의 경건함은 일상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루이는 매일 두 번의 미사에 참석했고, 성무일도를 빠짐없이 외웠다. 금요일과 사순절 기간에는 거친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맨바닥에서 잤다. 그는 왕궁의 식탁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초대해 함께 식사하는 것을 관례로 삼았다. 매주 목요일에는 13명의 가난한 이들을 궁전으로 초대해 직접 그들의 발을 씻기고 식사를 대접했다. 이는 예수가 최후의 만찬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긴 행위를 재현한 것이었다.
루이의 자선 사업도 광범위했다. 그는 파리에 여러 병원과 구빈원을 설립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킹시-뷰-브리(Quinze-Vingts)인데, 이는 십자군 전쟁에서 사라센에게 눈을 잃은 300명의 기사들을 위한 양로원이었다. 또한 그는 수아송, 퐁투아즈, 베르농 등지에 수녀원을 설립하여 가난한 여성들이 피난처를 찾을 수 있게 했다. 1248년에는 파리 시테섬에 생트샤펠(Sainte-Chapelle)을 건축했다. 이 고딕 양식의 걸작은 콘스탄티노플의 라틴 제국으로부터 구입한 가시관과 십자가 조각 등의 성유물을 보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성유물들을 구입하는 데 드는 비용은 생트샤펠의 건축비보다 세 배나 많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루이의 경건함에는 어두운 면도 있었다. 그는 유대인들에 대해 가혹한 정책을 펼쳤다. 1240년, 그는 탈무드 심판을 개최하여 유대교 경전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파리에서 수천 권의 탈무드를 불태웠다. 또한 1254년 칙령을 통해 유대인들의 고리대금업을 금지했고, 1269년에는 유대인들이 공공장소에서 노란색 배지를 착용하도록 강제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당시 기독교 신학의 반유대주의를 반영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경제적 동기도 있었다. 유대인 대금업자들로부터 빌린 빚을 탕감하거나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은 왕실 재정에 도움이 되었다.
루이는 또한 이단 심문에도 적극적이었다. 남프랑스의 카타리파(알비파) 이단을 근절하기 위한 노력을 지원했고, 도미니크회 심문관들에게 왕권의 힘을 빌려주었다. 1255년에는 프로방스 지방의 이단자들을 처형하는 것을 승인했다. 그에게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은 타협할 수 없는 의무였다.
이러한 경건함과 자비심은 역설적이게도 그를 다시 십자군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루이에게 예루살렘의 회복은 단순한 정치적 목표가 아니라 영혼의 구원과 직결된 신성한 의무였다. 1260년대 들어 중동 정세가 다시 악화되었다. 맘루크 왕조가 이집트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십자군 국가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1265년 바이바르스 술탄이 카이사레아와 아르수프를 함락시켰고, 1268년에는 안티오크가 함락되었다. 안티오크의 함락은 십자군 국가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 도시는 1차 십자군 이래 170년 동안 기독교 세력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바이바르스의 군대는 도시를 약탈하고 수만 명의 주민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팔았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루이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1267년 3월, 그는 파리에서 모인 귀족들 앞에서 다시 한번 십자가를 메겠다고 선언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이미 53세였고, 건강도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소명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의 세 아들인 필리프, 장트리스탕, 피에르도 아버지와 함께 십자가를 메겠다고 서약했다. 루이의 결정에 대해 궁정은 분열되었다. 많은 귀족들과 고문들은 왕이 너무 늙었고, 프랑스를 떠나는 것이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루이는 확고했다. 그는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믿었고,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번 원정의 목표 선정 과정은 8차 십자군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루이의 동생이자 시칠리아와 나폴리의 왕인 샤를 당주는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튀니지를 공격 목표로 제안했다. 샤를은 1266년 베네벤토 전투에서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만프레디를 격파하고 시칠리아 왕국을 장악한 야심찬 인물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남부를 넘어 지중해 전체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튀니지의 하프스 왕조는 샤를의 시칠리아 왕국과 지중해 무역을 두고 경쟁 관계에 있었다. 튀니지는 북아프리카의 곡물과 사하라를 통해 오는 금, 노예 등을 유럽으로 수출하는 중요한 무역 중심지였다. 특히 튀니지 항구들은 제노바와 베네치아 상인들의 주요 거점이었는데, 이들은 샤를의 경쟁자들이기도 했다. 샤를은 튀니지를 장악함으로써 지중해 무역로를 통제하고, 북아프리카에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게다가 하프스 왕조의 술탄 무함마드 1세 알무스탄시르는 샤를의 시칠리아 왕국에 연간 공물을 바치기로 한 협정을 지키지 않고 있었다. 이는 샤를에게 군사 행동의 명분을 제공했다.
샤를은 형 루이에게 튀니지의 술탄이 기독교 개종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정보를 전했다. 이 정보의 출처는 명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샤를이 고용한 정보원이나 튀니지에서 추방된 정치적 망명객들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일부 역사가들은 샤를이 의도적으로 정보를 왜곡하거나 과장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실제로 술탄 알무스탄시르가 개종을 고려했다는 어떠한 독립적인 증거도 없다. 오히려 그는 독실한 무슬림이었고, 튀니지에 많은 모스크와 마드라사(이슬람 학교)를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루이는 이 정보를 믿었거나 믿고 싶어 했다. 한 이슬람 통치자를 개종시킬 수 있다는 전망은 그의 선교적 열정을 자극했다. 루이는 십자군을 단순한 군사 원정이 아니라 선교 활동으로 이해했다. 그는 이슬람교도들이 진리를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기독교로 개종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순진한 믿음은 당시 프랑스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 선교사들의 신학적 낙관주의를 반영한다. 특히 마요르카의 라몬 율은 이슬람교도들과의 이성적 대화를 통한 개종을 주장했고, 이는 루이의 사고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게다가 튀니지는 이집트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이곳을 장악하면 다시 이집트를 공격할 수 있다는 전략적 논리도 있었다. 루이는 7차 십자군의 실패가 보급 부족과 이집트군의 나일강 통제 때문이었다고 분석했다. 만약 튀니지를 십자군의 전진 기지로 삼을 수 있다면, 이집트 공격 시 안정적인 보급선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었다. 또한 튀니지를 개종시키거나 정복하면, 북아프리카 전체가 기독교 세력권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거대한 비전도 있었다. 이는 중세 기독교 세계가 오랫동안 꿈꾸던 '프레스터 존의 왕국'과 연결될 수 있다는 환상과도 맞물려 있었다.
그러나 튀니지 선택의 배후에는 샤를 당주의 치밀한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 샤를은 자신이 직접 십자군에 참여할 것을 약속했지만, 출발 시기를 의도적으로 늦췄다. 그는 루이의 군대가 먼저 튀니지에 가서 술탄의 방어력을 약화시킨 후, 자신이 도착해 결정타를 날리고 승리의 과실을 챙기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샤를은 루이가 출발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시칠리아를 떠났다. 이러한 지연은 루이의 군대가 튀니지의 혹서 속에서 질병으로 고통받는 동안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루이의 참모들 중 일부는 튀니지 공격에 반대했다. 특히 경험 많은 기사들은 예루살렘이나 적어도 아크레로 직접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튀니지가 십자군의 본래 목적과 무관하며, 샤를의 사적 이익을 위한 우회로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루이는 동생을 신뢰했고, 술탄의 개종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결국 튀니지로의 방향이 결정되었고, 이는 8차 십자군의 운명을 결정짓는 치명적 선택이 되었다.
1270년 7월 1일, 십자군 함대는 사르데냐의 칼리아리를 떠나 튀니지로 향했다. 함대에는 약 1만 명의 전사들이 승선해 있었다. 하지만 이 숫자는 7차 십자군 때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함대는 제노바 상인들이 제공한 선박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루이는 이 배들을 빌리는 데 막대한 비용을 지불했다. 제노바 사람들은 십자군 사업을 종교적 열정보다는 수익성 있는 계약으로 보았다. 배마다 식량, 무기, 공성 장비, 말들이 실렸고, 이를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조직력이 필요했다.
루이의 신앙심과 명성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많은 군주들은 이번 원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영국의 헨리 3세는 늙고 병들어 있었고, 그의 아들 에드워드(후날의 에드워드 1세)는 참여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준비가 늦어졌다. 에드워드는 결국 약 1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나중에 출발했는데, 튀니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후였다. 신성로마제국의 루돌프 1세는 제국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느라 십자군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교황 클레멘스 4세는 십자군을 지지했지만, 1268년 사망했고 후임자가 선출되지 않아 교황청은 공석 상태였다. 이는 십자군 운동에 상징적 리더십의 공백을 의미했다.
이베리아 반도의 왕들은 자국 내 레콘키스타에 집중하고 있었다.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는 그라나다의 나스르 왕조와 전쟁 중이었고, 아라곤의 하이메 1세는 무르시아 지역을 정복하는 데 몰두했다. 그들에게는 중동의 십자군보다 이베리아의 무어인들이 훨씬 현실적인 적이었다. 동유럽의 왕들 역시 참여하지 않았다. 헝가리는 몽골의 위협에 대비하고 있었고, 폴란드는 내부 분열로 약화되어 있었다.
십자군 운동의 열기는 이미 식어가고 있었다. 1270년 무렵 유럽 사회는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가 1차 십자군을 선포했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도시들이 성장했고, 상업이 발달했으며, 화폐 경제가 확산되었다. 귀족들은 더 이상 영지를 팔아 십자군에 참여하는 것을 명예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영지 경영과 수익 증대에 더 관심이 많았다. 평민들 역시 성지 순례에 대한 열정을 잃어가고 있었다. 12세기의 광적인 민중 십자군 운동은 이제 먼 과거의 일이 되었다.
또한 십자군의 효용성에 대한 회의론도 커지고 있었다. 200년 가까운 십자군 전쟁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여전히 이슬람의 손에 있었다. 1187년 살라딘에게 예루살렘을 빼앗긴 후, 기독교 세력은 이를 되찾는 데 실패했다. 3차 십자군의 영웅 리처드 1세도,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도 예루살렘을 영구적으로 회복하지 못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1229년 협상을 통해 잠시 예루살렘을 되찾았지만, 1244년 다시 빼앗겼다. 십자군 국가들은 지중해 연안의 좁은 띠로 축소되어 있었고, 언제 완전히 소멸할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십자군 원정의 경제적 부담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7차 십자군은 프랑스 왕실 재정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루이의 몸값으로 지불한 40만 리브르 외에도, 원정 자체의 비용이 막대했다. 배를 빌리고, 식량을 공급하고, 병사들에게 급료를 주고, 무기와 장비를 구입하는 데 드는 비용은 상상을 초월했다. 루이는 이를 충당하기 위해 교회와 귀족들에게 특별세를 부과했지만, 이는 불만을 일으켰다. 8차 십자군을 위한 재정 조달은 더욱 어려웠다. 많은 귀족들이 참여를 거부했고, 교회도 이전만큼 적극적이지 않았다.
십자군에 참여한 이들의 동기도 순수하지 않았다. 일부는 진정으로 신앙심에서 참여했지만, 많은 이들은 경제적 이득이나 모험을 추구했다. 전과자들은 형벌을 면제받기 위해 십자군에 참여했고, 빚쟁이들은 채권자를 피해 도망치는 수단으로 십자군을 이용했다. 차남 삼남들은 상속받을 땅이 없어 중동에서 영지를 얻으려 했다. 이러한 혼합된 동기는 십자군의 규율과 결속력을 약화시켰다.
루이의 원정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거스르는 시대착오적인 기사도 정신의 마지막 발현처럼 보였다. 그는 여전히 1차 십자군의 고드프루아 드 부이용이나 3차 십자군의 리처드 1세 시대의 이상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1270년의 유럽은 더 이상 그러한 이상을 공유하지 않았다. 루이는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지만, 역사의 시계는 이미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사르데냐를 떠나는 함대는 웅장해 보였지만, 그것은 이미 끝나가는 시대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7월 18일, 십자군은 카르타고 근처에 상륙했다. 한때 로마의 위대한 적이었던 카르타고는 이제 폐허로 남아 있었다. 기원전 146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도시를 파괴한 이후, 카르타고는 결코 예전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로마인들이 그 자리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지만, 반달족과 비잔틴 제국, 그리고 이슬람 정복자들의 연이은 침략으로 대부분 파괴되었다. 1270년에는 거대한 석조 기둥들과 부서진 수로, 모자이크 파편들만이 과거의 영광을 증언하고 있었다.
십자군은 이 고대 도시의 잔해 사이에 진영을 구축했다. 병사들은 무너진 로마 건물의 돌을 사용해 방어벽을 쌓았다. 텐트들이 한때 카르타고의 포럼이었던 곳에 세워졌다. 루이는 가장 큰 폐허 중 하나를 왕실 숙소로 삼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 십자군은 로마가 파괴한 이교도 도시의 잔해 위에서 또 다른 이교도(그들의 관점에서)와 싸우기 위해 진을 치고 있었다. 역사의 순환이 이보다 명확하게 드러난 적은 없었다.
상륙 자체는 비교적 순조로웠다. 술탄의 군대는 해안에 나타나지 않았고, 십자군은 저항 없이 상륙할 수 있었다. 이는 십자군에게 잘못된 낙관론을 심어주었다. 많은 기사들은 튀니지 정복이 생각보다 쉬울 것이라고 기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는 술탄 알무스탄시르의 전략이었다. 그는 해안에서 십자군과 싸우기보다는, 그들을 내륙으로 유인하거나 시간을 끌면서 튀니지 시의 방어를 강화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또한 그는 튀니지의 여름 기후가 자신의 가장 강력한 동맹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루이의 계획은 튀니지 시를 포위하고 술탄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것이었다. 튀니지 시는 카르타고에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내륙에 위치해 있었다. 도시는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충분한 식량과 물을 비축하고 있었다. 루이는 먼저 카르타고 진영을 확고히 한 후, 튀니지로 진군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첫째, 그는 상륙 시기를 잘못 선택했다. 7월과 8월은 튀니지에서 가장 더운 계절이었다. 낮 기온은 섭씨 40도를 넘나들었고, 습도도 높았다. 유럽인들, 특히 북프랑스에서 온 기사들은 이러한 혹서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들은 무거운 쇠사슬 갑옷과 판금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사우나와 같았다. 많은 병사들이 열사병으로 쓰러졌다. 게다가 그들이 가져온 물은 빨리 떨어졌고, 현지의 우물은 충분하지 않았다.
둘째, 위생 상태가 극도로 열악했다. 1만 명의 병사들이 좁은 지역에 밀집해 있었고, 적절한 배수 시설이 없었다. 배설물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아 진영 전체에서 악취가 났다. 파리와 모기가 들끓었다. 음식은 빨리 부패했고, 신선한 식수를 구하기 어려웠다. 카르타고의 고대 수로는 오래전에 파괴되었고, 병사들은 때때로 고인 웅덩이의 물을 마셔야 했다. 이는 수인성 질병의 완벽한 온상이었다.
셋째, 루이는 식량 보급에 대한 계획이 불충분했다. 그는 현지에서 식량을 약탈하거나 구매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술탄은 이미 카르타고 주변 지역의 곡물을 튀니지 시내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농민들은 밭을 버리고 도시로 피신했다. 십자군은 텅 빈 농촌만을 발견했다. 제노바 상인들이 가끔 식량을 실어 날랐지만, 이는 비싸고 불규칙했다. 병사들은 배급량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느꼈다.
오염된 물과 음식, 그리고 밀집된 야영지는 질병의 온상이 되었다. 이질과 티푸스가 진영을 휩쓸기 시작했다. 이질은 특히 치명적이었다. 감염자는 극심한 설사와 복통에 시달렸고, 탈수로 빠르게 죽어갔다. 13세기의 의학 지식으로는 이를 치료할 방법이 거의 없었다. 의사들은 사혈(bloodletting)이나 기도를 권했지만, 이는 효과가 없었다. 티푸스는 이에 의해 전파되는데, 비위생적인 진영에서 이가 크게 번식했다. 감염자는 고열과 두통, 발진에 시달렸고, 많은 경우 사망했다.
질병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처음에는 하루에 몇 명씩 죽었지만, 곧 수십 명씩 죽기 시작했다. 시체를 처리하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기독교 의식에 따라 매장해야 했지만, 땅은 단단했고 인력은 부족했다. 일부 시체는 얕게 묻혀 야생동물에게 파헤쳐졌다. 죽어가는 병사들의 신음 소리가 밤낮으로 진영에 울려퍼졌다. 성직자들은 쉴 새 없이 임종성사를 집전했다. 진영의 분위기는 점점 절망적으로 변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는 공격을 감행하지 않았다. 그는 샤를 당주의 도착을 기다리며 공격을 미루었다. 이는 또 하나의 치명적 실수였다. 샤를은 시칠리아에서 병력을 집결하느라 지체되고 있었다. 루이는 동생이 곧 올 것이라고 믿었고, 그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매일 수십 명의 병사들이 죽어가고 있었고, 살아남은 자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십자군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술탄 알무스탄시르는 이 시간을 최대한 활용했다. 그는 성벽을 강화하고 병력을 집결시켰으며, 십자군 진영에 질병이 만연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정찰병들을 보내 십자군의 상태를 관찰하게 했고, 그들이 약해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술탄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그는 십자군을 직접 공격할 필요가 없었다. 시간과 기후가 자신을 위해 싸워주고 있었다. 때때로 그는 기병대를 보내 십자군 진영 주변을 교란했지만, 본격적인 공격은 하지 않았다. 이는 십자군의 긴장을 유지하면서도 소모전을 강요하는 현명한 전략이었다.
튀니지의 무슬림들은 기독교로 개종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침략자들을 격퇴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술탄은 울라마(이슬람 학자들)와 협의하여 지하드를 선포했다. 도시의 모스크에서는 설교자들이 신자들에게 이슬람을 지킬 것을 촉구했다. 자원병들이 몰려들었고, 무기가 제작되었다. 튀니지 시민들은 성벽 위에서 십자군 진영을 내려다보며 그들이 서서히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루이가 믿었던 개종의 희망은 처음부터 허상이었다. 샤를 당주가 전한 정보는 거짓이거나 극도로 과장된 것이었고, 루이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 것이다.
8월 초, 질병은 왕실 가족에게까지 퍼졌다. 루이의 막내아들 장 트리스탕이 병으로 쓰러졌다. 이 아이는 1270년 출발 직전에 태어났고, 여행 중에도 계속 허약했다. 어머니인 마르그리트 드 프로방스 왕비가 직접 간호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8월 3일, 장 트리스탕은 겨우 몇 달을 살고 죽었다. 아들의 죽음을 목격한 루이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는 작은 관 앞에 무릎을 꿇고 몇 시간 동안 기도했다. 왕비는 통곡했고, 궁정 전체가 애도에 잠겼다.
하지만 루이는 이를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더욱 기도에 매진했다. 그는 아들의 죽음이 자신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했고, 더욱 엄격하게 자신을 절제했다. 그는 금식을 더 자주 했고, 밤에는 차가운 바닥에서 잤다. 측근들은 왕이 스스로를 너무 혹사하고 있다고 우려했지만, 루이는 듣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고행이 하느님을 기쁘게 하고 십자군을 성공으로 이끌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곧 그 자신도 이질에 걸렸다. 정확히 언제 증상이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8월 중순 무렵 루이는 심한 설사와 복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56세의 루이는 여러 차례의 십자군 원정과 금욕적인 생활로 이미 건강이 악화되어 있었다. 그의 면역 체계는 약해져 있었고, 영양 상태도 좋지 않았다. 고열과 설사가 그의 몸을 급격히 쇠약하게 만들었다.
왕실 의사들이 소집되었다. 그들은 중세 의학의 모든 지식을 동원했다. 사체액 이론(humoral theory)에 따라 루이의 몸에서 나쁜 체액을 빼내기 위해 사혈을 시도했다. 그들은 왕의 팔에서 피를 뽑아냈지만, 이는 오히려 그를 더 약하게 만들었다. 각종 약초 처방이 시도되었다. 아편이 든 물약으로 통증을 가라앉히려 했고, 쑥과 카모마일 차를 마시게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효과가 없었다. 설사는 멈추지 않았고, 열은 계속 올라갔다.
왕이 병들었다는 소식은 진영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놓았다. 병사들은 이미 수백 명의 동료가 죽는 것을 목격했고, 이제 왕마저 죽어가고 있었다. 신이 십자군을 버렸다는 두려움이 퍼졌다. 일부 병사들은 이것이 잘못된 전쟁이며, 튀니지에 온 것 자체가 실수였다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탈영병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밤중에 배를 훔쳐 시칠리아로 도망쳤다. 장교들은 규율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점점 어려워졌다.
루이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필리프(후날의 필리프 3세)도 병에 걸렸지만,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 필리프는 아버지의 병상 곁에서 회복했고, 왕국의 미래를 걱정했다. 그는 아직 25세에 불과했고, 통치 경험이 적었다. 만약 루이가 죽으면, 그는 이 재앙적인 십자군의 잔해를 수습하고 프랑스로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야 했다. 그 책임의 무게가 그를 짓눌렀다.
루이는 죽음이 가까워짐을 느끼면서도 신앙을 잃지 않았다. 8월 20일 무렵, 그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약해졌다. 그럼에도 그는 침상에서 일어나려 애썼고, 십자가 위에 몸을 뻗고 기도했다. 그의 고해신부 조프루아 드 보리외는 왕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자세를 흉내 내며 팔을 벌렸다고 기록했다. 루이는 예수의 수난에 자신을 동일시하려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고통이 그리스도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성무일도를 계속 외우려 했다. 특히 시편 119편("주의 종에게 선을 베푸소서")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약해졌지만, 입술은 계속 움직였다. 성직자들이 그의 침상 주변에 모여 함께 기도했다. 그들은 임종 미사를 집전하고 성체를 모셨다. 루이는 마지막 성체를 받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루이의 마지막 말들은 여러 연대기 작가들에 의해 기록되었는데, 약간씩 차이가 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예루살렘"이라는 단어이다. 조프루아 드 보리외에 따르면, 루이는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으로(Jérusalem, Jérusalem)"라는 말을 되뇌었다고 한다. 또 다른 증언에서는 "우리를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하소서(Introduc nos in Jerusalem)"라고 했다고 전한다. 이는 육체적 예루살렘인 동시에, 천상의 예루살렘, 즉 천국을 의미했을 것이다. 루이는 지상에서 예루살렘을 되찾는 데 실패했지만, 죽음을 통해 영원한 예루살렘에 들어가기를 바랐다.
8월 25일,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루이는 거의 의식을 잃었고, 간헐적으로만 깨어났다. 오후가 되자 그의 호흡은 더욱 약해졌다. 측근들은 왕이 곧 숨을 거둘 것임을 알았다. 오후 3시경,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과 같은 시간에, 루이는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그의 임종을 지켜본 이들은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성인의 모습을 보였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그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고, 고통의 흔적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이는 나중에 그의 시성 과정에서 중요한 증거로 사용되었다.
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진영에 퍼지자, 깊은 슬픔과 절망이 엄습했다. 병사들은 통곡했고, 많은 이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루이는 단순한 군사 지도자가 아니라 십자군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의 죽음은 원정의 목적과 의미 자체가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더 이상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할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탈영은 급증했고, 일부 부대는 자체적으로 철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루이의 죽음 이후 십자군 원정은 사실상 종료되었다. 그러나 형식적인 절차들은 계속되어야 했다. 루이의 시신은 즉시 처리되어야 했다. 당시의 관습에 따라 왕의 시신은 내장을 제거하고 방부 처리를 했다. 의사들이 루이의 복부를 절개하여 내장을 꺼냈다. 이는 시신이 프랑스로 운송되는 동안 부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내장은 따로 항아리에 보관되었고, 나중에 시칠리아의 몬레알레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루이의 시신을 더 오래 보존하기 위한 조치였다. 시신을 포도주에 삶아 살을 뼈에서 분리했다. 이렇게 얻은 뼈들은 별도로 보관되어 프랑스로 운송되었고, 나중에 생드니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살과 기타 연조직은 카르타고에 묻혔다가 나중에 시칠리아로 옮겨졌다. 이러한 관행은 현대인에게는 충격적으로 보이지만, 중세에는 높은 신분의 인물이 원정 중 사망했을 때 흔히 행해지던 방식이었다. 이는 "분할 매장(divided burial)"이라고 불렸는데, 심장, 내장, 뼈를 각각 다른 장소에 안치하여 여러 교회가 성유물을 소유할 수 있게 했다.
루이가 죽은 지 며칠 후인 8월 말, 샤를 당주가 마침내 시칠리아 함대를 이끌고 도착했다. 그가 도착했을 때 보게 된 광경은 참혹했다. 십자군 진영은 병자와 죽어가는 자들로 가득했고, 시체의 악취가 진동했다. 형 루이의 죽음 소식을 들은 샤를은 공개적으로는 슬픔을 표현했지만, 속으로는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 기회를 엿보았다. 그는 이제 십자군의 실질적 지도자가 되었고, 협상을 주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샤를은 술탄 알무스탄시르와 협상을 시작했다. 술탄 역시 협상을 원했다. 비록 십자군이 질병으로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위협적인 군사력이었고, 샤를의 증원군이 도착하면서 상황이 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술탄은 장기전이 튀니지 경제에 부담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역이 중단되었고, 농민들이 도시로 피난 와서 식량 소비가 증가했다. 협상을 통해 십자군을 평화롭게 내보내는 것이 모든 면에서 유리했다.
협상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11월 1일, 최종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의 내용은 십자군에게 굴욕적인 것이었다. 술탄은 21만 금 온스의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했는데, 이는 루이가 7차 십자군 때 지불한 몸값의 절반 정도였다. 이 돈의 3분의 1은 샤를에게, 나머지는 프랑스 왕실과 다른 십자군 지도자들에게 분배되었다. 또한 술탄은 튀니지에 거주하는 기독교 선교사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기독교 상인들에게 무역 특권을 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 조약에서 십자군은 아무런 영토도 얻지 못했다. 튀니지는 그대로 이슬람의 손에 남았고, 술탄의 권위는 오히려 강화되었다. 그는 강력한 십자군 원정을 격퇴한 통치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예루살렘은 여전히 멀리 있었고, 십자군 국가들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다. 8차 십자군의 원래 목적인 성지 탈환은 완전히 망각되었다.
배상금의 분배를 둘러싸고 갈등이 있었다. 샤를은 자신이 가장 큰 몫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군대가 협상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배상금의 상당 부분이 자신에게 빚진 공물의 연체분을 충당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필리프와 다른 프랑스 귀족들은 반발했지만, 결국 샤를의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8차 십자군이 처음부터 샤를의 개인적 이익을 위한 도구였다는 의심을 더욱 강화시켰다.
11월 중순, 십자군은 철수를 시작했다. 이때까지 질병으로 죽은 병사의 수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최소한 수천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추정에서는 1만 명의 십자군 중 절반 이상이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본다. 살아남은 병사들도 대부분 병들어 있었고, 영양실조와 외상 후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배에 오른 병사들은 여윈 모습이었고, 눈빛은 공허했다. 그들은 출발할 때의 희망과 열정을 완전히 잃었다.
함대가 카르타고를 떠날 때, 폭풍이 일었다. 여러 배가 난파되었고, 더 많은 병사들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는 신이 십자군을 저주하고 있다는 미신을 강화시켰다. 일부 배는 시칠리아로 향했고, 다른 배들은 직접 프랑스로 향했다. 항해는 몇 주가 걸렸고, 그 동안에도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 계속되었다. 배 위에서 죽은 이들은 바다에 수장되었다.
한편 영국의 에드워드 왕자는 8월 말 튀니지에 도착했다. 그는 약 1천 명의 영국과 웨일스 병사들을 이끌고 왔는데, 십자군이 이미 끝났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실망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항해하여 아크레에 도착했다. 1271년부터 1272년까지 그는 소규모 부대로 맘루크군과 싸웠다. 에드워드의 원정은 "9차 십자군"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실질적인 성과는 거의 없었다. 그는 술탄 바이바르스와 10년 휴전 조약을 체결하고 귀국했다. 이것이 실질적으로 마지막 십자군 원정이었다.
수천 명의 십자군 전사들이 질병으로 죽었고, 막대한 비용만 소모되었다. 프랑스 왕실 재정은 다시 한번 큰 타격을 입었다. 튀니지 원정에 투입된 비용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지만, 수십만 리브르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를 빌리고, 식량을 공급하고, 병사들에게 급료를 주고, 무기를 구입하는 데 엄청난 돈이 들었다. 받은 배상금은 이 비용의 일부만을 충당했을 뿐이다. 게다가 많은 귀족들이 자신의 재산을 팔아 원정에 참여했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일부는 빚더미에 앉았고, 영지를 잃었다.
군사적 관점에서 8차 십자군은 완벽한 실패였다. 단 한 번의 제대로 된 전투도 없었다. 튀니지 시의 성벽에 한 번도 공격하지 못했다. 십자군은 질병과 싸우다가 무너졌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철수했다. 이는 십자군 역사상 가장 무익한 원정 중 하나였다. 루이의 7차 십자군은 적어도 다미에타를 점령하고 만수라에서 싸웠다. 하지만 8차 십자군은 카르타고의 폐허에서 질병으로 죽어간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역사는 루이 9세를 실패한 군주가 아니라 성인으로 기억했다. 그의 손자인 필리프 4세(미남왕)는 1297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로부터 루이의 시성을 이끌어냈다. 시성 과정은 정치적 동기로 가득했다. 필리프 4세는 프랑스 왕권의 신성성을 강화하고, 교황청과의 권력 투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할아버지의 시성을 추진했다. 만약 프랑스 왕조가 성인을 배출했다면, 이는 왕권이 신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었다.
시성 조사 과정에서 수많은 증언이 수집되었다. 루이를 가까이에서 모셨던 사람들이 그의 덕행과 기적에 대해 증언했다. 조프루아 드 보리외, 생동(Jean de Joinville) 같은 이들은 루이의 경건함, 자비심, 정의로움을 상세히 기록했다. 특히 생동의 '성 루이의 생애(Vie de Saint Louis)'는 루이를 이상적인 기독교 군주로 묘사한 대표적 저작이 되었다. 이 책은 루이의 십자군 원정을 실패가 아니라 신앙의 증거로 재해석했다.
시성 과정에서는 루이와 관련된 여러 기적들이 보고되었다. 그의 무덤을 찾은 병자들이 치유되었다는 증언, 그의 유골에 기도한 후 임신한 여성의 출산이 순조로웠다는 이야기, 그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한 선원들이 폭풍에서 살아남았다는 일화 등이 수집되었다. 이러한 기적 증언들은 중세 시성 과정의 필수 요소였다. 물론 이들 중 상당수는 과장되거나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를 진심으로 믿었다.
1297년 8월 11일,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오르비에토에서 루이를 성인으로 선포했다. 루이는 성 루이(Saint Louis)가 되었고, 그의 축일은 8월 25일, 그가 죽은 날로 정해졌다. 프랑스 전역에서 축제가 열렸고, 루이를 기리는 교회와 제단이 세워졌다. 파리의 생트샤펠은 성 루이의 성지가 되었고, 생드니 대성당의 그의 무덤은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성 루이는 프랑스 왕권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후대 프랑스 왕들은 자신을 성 루이의 후손이자 계승자로 내세웠다. 그들은 루이의 정의와 경건함을 본받겠다고 공언했고, 루이의 이름으로 통치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루이 12세, 루이 13세, 루이 14세, 루이 15세, 루이 16세 등 루이라는 이름은 프랑스 왕조에서 가장 명예로운 이름이 되었다. 특히 루이 14세는 자신을 "태양왕"이라 부르면서도, 성 루이의 후계자임을 강조했다.
루이의 경건함과 정의로움은 후대 군주들의 모범으로 제시되었다. 중세의 정치 사상가들은 루이를 "거울 속의 왕자(speculum principis)", 즉 이상적인 군주의 전형으로 삼았다. 왕은 강력해야 하지만 자비로워야 하고, 정의로워야 하지만 관대해야 하며, 세속적 권력을 가져야 하지만 영적 순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루이를 통해 구현되었다고 여겨졌다. 이러한 이상은 비현실적이었지만, 오랫동안 왕권의 도덕적 기준으로 기능했다.
십자군에서의 실패는 오히려 그의 순교자적 이미지를 강화시켰다. 중세 기독교 신학에서 순교는 최고의 신앙 표현이었다. 루이는 신앙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고, 결국 십자군 원정 중에 죽었다. 비록 전투에서 죽은 것은 아니지만, 신앙의 길에서 죽었다는 점에서 순교자로 간주될 수 있었다. 그의 고난과 죽음은 예수의 수난과 유비되었고, 그가 십자가 위에 몸을 뻗고 죽었다는 일화는 이를 더욱 강화했다.
신앙을 위해 죽었다는 사실이 군사적 무능을 가렸다. 루이의 전략적 오판, 잘못된 목표 선정, 비현실적인 계획 등은 시성 과정에서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순수한 동기, 헌신적인 태도, 고귀한 희생만이 강조되었다. 8차 십자군의 실패는 루이의 잘못이 아니라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이라고 해석되었다. 하느님이 루이를 시험했고, 루이는 그 시험을 통과하여 천국으로 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재해석은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는 측면이 있다. 루이의 의도가 선했다는 것과 그의 행동이 현명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는 진심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기독교를 수호하려 했지만, 그 과정에서 수천 명의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의 신앙심은 존경할 만하지만, 그의 판단력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중세 사회는 이러한 구분을 하지 않았다. 의도와 결과, 동기와 성취가 분리되지 않았고, 신앙적 순수성이 모든 것을 정당화했다.
루이의 유산은 복잡하다. 한편으로 그는 프랑스 왕권을 강화하고, 사법 제도를 개선하고,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는 안정과 번영을 누렸다. 그는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한 왕이었고, 정의를 추구한 통치자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두 차례의 실패한 십자군으로 막대한 인명과 재산을 낭비했다. 그의 종교적 편협함은 유대인과 이단자들에게 고통을 안겼다. 그의 이상주의는 때로 현실과 괴리되어 비극을 낳았다.
8차 십자군의 실패는 여러 층위에서 분석될 수 있다.
첫째, 가장 명백한 것은 전략적 오판이었다. 튀니지는 예루살렘 회복이라는 본래 목표와 무관한 곳이었다. 십자군의 명분은 항상 성지를 이교도로부터 해방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나사렛, 베들레헴 같은 기독교의 성지들은 튀니지가 아니라 팔레스타인에 있었다. 튀니지를 공격한다는 것은 십자군의 근본 정당성을 스스로 훼손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튀니지 공격은 샤를 당주의 사적 이익을 위한 우회로에 불과했다. 샤를은 지중해 무역권을 장악하고 북아프리카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자신의 야심을 위해 형의 십자군을 이용했다. 루이가 술탄의 개종 가능성을 믿었다는 것 자체가 정치적 현실 감각의 결여를 보여준다. 13세기 후반의 북아프리카 이슬람 국가들은 십자군 시대 내내 기독교에 대항해 싸워온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하프스 왕조는 무와히드 왕조의 후계자로서 이슬람 신앙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술탄 알무스탄시르가 갑자기 개종을 고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만약 루이가 정말로 십자군의 성공을 원했다면, 직접 팔레스타인으로 가서 아크레와 남은 십자군 국가들을 지원했어야 했다. 1260년대와 1270년대 초 맘루크 왕조의 바이바르스 술탄은 십자군 영토를 계속 잠식하고 있었다. 1265년 카이사레아와 아르수프 함락, 1268년 안티오크 함락, 1271년 크락 데 슈발리에(Krak des Chevaliers) 성의 함락 등 십자군 국가들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만약 루이의 1만 명 군대가 팔레스타인에 도착했다면, 적어도 바이바르스의 공세를 늦추고 십자군 국가들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신 그들은 튀니지에서 질병으로 죽어갔다.
둘째, 시기와 장소의 선택이 재앙적이었다. 튀니지의 한여름은 유럽 군대에게 지옥이었다. 기후학적 증거에 따르면 13세기 중반은 중세 온난기의 후반부로, 여름 기온이 현대보다 높았을 가능성이 있다. 7월과 8월의 튀니지는 낮 기온이 섭씨 40도를 넘고, 밤에도 크게 내려가지 않는다. 습도도 상당히 높아서, 체감 온도는 더욱 올라간다. 북유럽의 온대 기후에 익숙한 병사들에게 이는 견딜 수 없는 환경이었다.
게다가 위생 관리의 실패는 예견된 것이었다. 중세 군대는 전염병에 매우 취약했다. 대규모 병력이 한곳에 집결하면 거의 항상 질병이 발생했다. 1218-1221년의 5차 십자군도 이집트의 다미에타에서 질병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루이 자신도 7차 십자군에서 같은 경험을 했다. 만수라 전투 후 이집트에서 질병이 창궐하여 수천 명이 죽었고, 루이 자신도 병에 걸렸었다. 그런데도 그는 이러한 교훈을 8차 십자군에 적용하지 못했다.
중세 의학은 질병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했다. 세균 이론은 19세기에야 확립되었고, 13세기 사람들은 질병이 나쁜 공기(miasma)나 체액의 불균형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오염된 물과 음식이 질병을 일으킨다는 것을 몰랐고, 따라서 위생 관리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배설물 처리, 음용수 정화, 시체 격리 같은 기본적인 공중보건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과는 참혹했다.
셋째, 시대적 맥락을 무시했다. 13세기 중반의 유럽은 더 이상 십자군에 열광하지 않았다. 1차 십자군(1096-1099)의 성공은 예외적인 것이었다. 이후 십자군들은 대부분 실패했거나 제한적 성과만 거두었다. 2차 십자군(1147-1149)은 참패했다. 3차 십자군(1189-1192)은 리처드 1세와 살라딘의 영웅적 대결로 유명하지만, 예루살렘을 되찾지는 못했다. 4차 십자군(1202-1204)은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는 것으로 끝나 십자군 운동의 이상을 완전히 배신했다. 5차 십자군(1217-1221)과 6차 십자군(1228-1229)도 영구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00년에 걸친 이러한 실패의 역사는 유럽 사회에 회의론을 퍼뜨렸다. 초기의 종교적 열정은 식었고, 사람들은 점점 더 세속적이고 실용적이 되었다. 12세기 말부터 유럽은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도시들이 성장했고, 상업이 발달했으며, 화폐 경제가 확산되었다. 대학들이 설립되어 새로운 지식과 사고방식이 퍼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아랍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어 스콜라 철학이 발전했다. 이러한 지적 발전은 사람들을 더 이성적이고 비판적으로 만들었다.
귀족들의 경제적 계산도 변했다. 초기 십자군 시대에는 많은 귀족들이 영지를 팔아 십자군에 참여했다. 그들은 성지에서 새로운 영지를 얻거나, 적어도 천국에서 보상받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13세기에는 영지 경영이 점점 더 수익성 있는 사업이 되었다. 농업 기술의 발전, 시장의 확대, 무역의 증가로 영지 소유주들은 안정적인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이를 포기하고 불확실한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비합리적이었다.
게다가 십자군의 비용은 계속 증가했다. 초기 십자군은 상대적으로 저렴했다. 기사들이 자비로 무장하고 참여했으며, 보급은 현지 약탈에 의존했다. 하지만 13세기의 십자군은 전문화되고 조직화되었다. 배를 빌려야 했고, 용병들에게 급료를 지불해야 했으며, 대규모 보급 체계를 구축해야 했다. 이는 막대한 비용을 요구했고, 왕실이나 교황청도 이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또한 십자군에 대한 대안적 관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부 신학자들은 무력으로 성지를 되찾는 것이 정말 하느님의 뜻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프란체스코회의 일부 수사들은 이슬람교도들과의 평화적 대화와 선교를 주장했다. 1219년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는 이집트에서 술탄 알카밀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비록 개종시키지는 못했지만, 이는 십자군과 다른 접근 방식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경제적 실리와 영토 확장이 종교적 이상보다 중요해졌다. 유럽의 군주들은 십자군보다 자국 내 권력 강화에 집중했다. 프랑스 왕들은 영국 왕이 소유한 프랑스 내 영토를 회복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영국 왕들은 웨일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정복하는 데 몰두했다. 신성로마제국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과 교황청 사이의 복잡한 정치에 얽혀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왕들은 레콘키스타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중동은 너무 멀었고, 예루살렘은 실질적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루이의 원정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이전 세기의 이상을 추구하고 있었다. 11세기 말 교황 우르바노 2세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을 선포했을 때의 열정, 1099년 고드프루아 드 부이용이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의 환희, 12세기 십자군 국가들의 영광을 루이는 재현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1270년의 유럽은 더 이상 그러한 이상을 공유하지 않았다. 루이는 과거로 돌아가려 했지만, 역사의 시계는 이미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넷째, 리더십과 의사결정의 문제가 있었다. 루이는 경건하고 도덕적인 왕이었지만, 뛰어난 군사 전략가는 아니었다. 그는 7차 십자군에서도 여러 전략적 실수를 저질렀다. 다미에타에서 너무 오래 지체했고, 만수라 전투에서 동생 로베르의 무모한 돌진을 제어하지 못했으며, 퇴각 시기를 놓쳤다. 8차 십자군에서는 이러한 패턴이 반복되었다.
루이의 가장 큰 약점은 그가 동생 샤를 당주를 지나치게 신뢰했다는 점이다. 샤를은 야심적이고 정치적으로 교묘한 인물이었다. 그는 형의 신앙심과 순진함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다. 튀니지로의 우회는 샤를의 계략이었고, 루이는 이를 간파하지 못했다. 혹은 간파했더라도 동생을 의심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따라갔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는 치명적인 판단 착오였다.
또한 루이는 참모들의 조언을 충분히 듣지 않았다. 경험 많은 기사들이 튀니지 공격에 반대했지만, 루이는 자신의 결정을 밀어붙였다. 그는 하느님이 자신을 인도하고 있다고 믿었고, 인간의 조언보다 신의 계시를 더 중시했다. 이러한 종교적 확신은 때로 현실적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루이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 타협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는 도덕적으로는 존경할 만하지만, 정치적·군사적으로는 위험한 특성이었다.
그러나 루이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완전히 다른 평가가 가능하다. 그에게 십자군은 정치적 계산이 아니라 신앙적 소명이었다. 현세의 성공보다 내세의 구원이 중요했고, 세속적 권력보다 영적 순결이 우선이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루이의 세계관, 즉 13세기 중세 기독교의 우주론적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중세 기독교 세계관에서 역사는 선형적이었다. 창조, 타락, 구속, 최후의 심판으로 이어지는 신의 계획이 역사를 지배했다. 인간의 삶은 이 거대한 서사의 일부였고, 각자는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세속적 성공이나 실패는 일시적인 것이었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죽음 이후의 영원한 운명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루이의 십자군은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는 하느님께 봉사하고, 성지를 회복하며, 이교도들을 개종시킴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려 했다.
루이는 또한 왕으로서의 특별한 책임을 느꼈다. 중세 왕권 이론에서 왕은 단순한 정치적 지도자가 아니라 신이 선택한 대리인이었다. 왕은 하느님으로부터 권력을 받았고, 따라서 하느님에게 책임을 져야 했다. 프랑스의 대관식에서 왕은 성유로 기름부음을 받았는데, 이는 구약의 다윗과 솔로몬처럼 왕이 신성한 임무를 부여받았음을 상징했다. 루이는 이 신성한 임무 중 하나가 기독교를 수호하고 확장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게다가 루이는 개인적으로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을 수 있다. 1244년 병에서 회복한 후 그가 십자군 서약을 한 것은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하느님께 빚을 갚기 위함이었다. 7차 십자군의 실패는 이 빚을 다 갚지 못했음을 의미했다. 루이는 자신이 아직 하느님께 충분히 봉사하지 못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다시 한번 시도해야 한다고 느꼈다. 이는 현대적 관점에서는 비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루이의 신학적 틀 안에서는 완벽하게 일관적이었다.
루이의 금욕주의와 자기 고행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몸을 절제하고 고통을 감내함으로써 영혼을 정화하려 했다. 중세 신학에서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었고, 육체적 욕망은 영혼을 타락시키는 위험이었다. 금식, 절제, 자기 징벌 등은 육체를 영혼에 복종시키는 수단이었다. 루이가 철사 채찍을 몸에 감고, 맨바닥에서 자고, 거친 옷을 입은 것은 자신을 고문하기 위함이 아니라 영적으로 고양되기 위함이었다.
또한 루이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다른 이들을 인도하려 했다. 왕이 경건하고 희생적인 삶을 살면, 귀족들과 백성들도 따라할 것이라고 믿었다. 루이는 자신의 십자군 참여가 유럽 전체에 신앙의 불을 다시 지필 것이라고 기대했다. 비록 많은 군주들이 참여하지 않았지만, 루이는 자신의 행동이 씨앗을 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언젠가는 그 씨앗이 자라나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루이는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관철했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이러한 일관성과 헌신은 역설적이게도 그를 중세가 추구했던 이상적 군주의 모델로 만들었다. 중세 사회는 성공보다 동기를, 결과보다 의도를 중시했다. 루이는 실패했지만, 그의 실패는 고귀한 실패였다. 그는 세속적 권력이나 부를 추구하지 않았고, 개인적 영광이나 명성을 구하지 않았다. 오직 하느님을 섬기고 기독교를 수호하려 했다. 이러한 순수성이 그를 성인으로 만들었다.
그가 실패한 것은 그 자신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시대가 그의 이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루이는 너무 앞서갔거나, 아니면 너무 뒤처졌다. 그는 11세기의 이상을 13세기에 실현하려 했다. 그는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며 홀로 싸웠다. 이는 비극적이지만, 동시에 영웅적이기도 하다. 돈키호테가 풍차와 싸우는 것처럼, 루이는 불가능한 꿈을 좇았다. 하지만 돈키호테와 달리, 루이는 자신의 꿈이 환상임을 깨닫지 못했다. 아니, 그는 깨달았지만 포기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루이의 삶은 신앙과 이성, 이상과 현실, 천국과 지상 사이의 긴장을 체현한다. 그는 완벽한 기독교인이 되려 했지만, 동시에 현실 세계의 왕이어야 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려 했지만, 동시에 이단자와 유대인을 박해했다. 그는 평화를 원했지만, 전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모순들은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이상 자체가 세속 세계와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루이는 이 세상의 왕이었다. 그는 두 세계 사이에서 찢겨졌고, 결국 이 긴장이 그를 파멸시켰다.
8차 십자군은 또한 십자군 운동 전체의 종말을 상징한다. 이후 소규모 원정들이 간헐적으로 있었지만, 루이의 죽음은 실질적으로 십자군 시대의 끝을 알렸다. 영국의 에드워드 왕자가 이끈 원정(1271-1272)은 규모도 작았고 성과도 미미했다. 에드워드는 아크레에서 맘루크군과 몇 차례 교전했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1272년 그는 술탄 바이바르스와 10년 휴전 조약을 맺고 귀국했다. 이 조약은 십자군 국가들의 생존을 잠시 연장시켰을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1274년 리옹 공의회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새로운 십자군을 조직하려 했다. 그는 유럽의 군주들에게 십자군 참여를 촉구했고, 재정 지원을 약속했다. 하지만 반응은 미지근했다. 프랑스의 필리프 3세는 아버지의 실패를 목격했고, 십자군에 열의가 없었다. 영국의 에드워드 1세는 이미 팔레스타인에 다녀왔고, 다시 갈 생각이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은 대공위 시대(Great Interregnum)의 혼란에 빠져 있었다. 결국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1291년 5월 18일, 마지막 십자군 거점인 아크레가 함락되었다. 맘루크 술탄 알아슈라프 할릴의 군대가 두 달간의 포위 끝에 도시를 점령했다. 아크레의 함락은 잔혹했다. 수만 명의 기독교도들이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팔렸다.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의 기사들은 끝까지 싸우다 거의 전멸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탈출했다. 아크레 함락 후 몇 주 만에 타이르, 시돈, 베이루트 등 남은 십자군 거점들도 차례로 함락되었다.
이로써 1099년 1차 십자군 이후 약 200년간 유지되었던 십자군 국가들이 완전히 소멸했다. 예루살렘 왕국, 안티오크 공국, 트리폴리 백작령, 에데사 백작령 등으로 구성되었던 십자군 국가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오직 키프로스의 뤼지냥 왕국만이 명목상 "예루살렘 왕국"의 계승자로 남았지만, 실질적으로는 레반트에서 완전히 축출된 상태였다.
1291년 아크레의 함락으로 십자군 국가들이 완전히 소멸했을 때, 유럽은 이미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14세기는 큰 변화의 시대였다. 단테가 『신곡』을 쓰고 있었고, 조토가 새로운 회화 양식을 개척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은 번영하며 르네상스의 씨앗을 뿌리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북이탈리아와 플랑드르 지방에서 자본주의의 초기 형태가 나타나고 있었다. 은행업이 발달하고, 복식부기가 도입되었으며, 국제 무역망이 확장되었다.
정치적으로는 국민국가들이 형성되고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백년전쟁(1337-1453)을 통해 중앙집권적 왕국으로 강화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은 점점 더 분열되어 명목상의 제국으로 전락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카스티야, 아라곤, 포르투갈이 독립적인 왕국으로 공고화되었다. 이들은 중동의 십자군보다 자국 영토의 확장과 통합에 관심이 많았다.
상업과 무역이 새로운 동력이 되고 있었다.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같은 이탈리아 도시들은 지중해 무역을 장악했다. 그들은 십자군 국가들과 무역했지만, 동시에 이슬람 국가들과도 거래했다. 그들에게 종교는 무역의 장애물이 아니었다. 이윤이 신앙보다 중요했다. 한자동맹은 발트해와 북해를 연결하는 무역망을 구축했다. 유럽은 점점 더 상업화되고 있었다.
문화적으로도 변화가 일어났다. 12세기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지적 부흥은 13-14세기에도 계속되었다. 대학들이 확산되어 파리, 옥스퍼드, 볼로냐, 살라망카 등지에서 학문이 발전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독교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종합했다. 로저 베이컨은 실험적 과학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이러한 지적 발전은 사람들을 더 비판적이고 탐구적으로 만들었다.
십자군 시대의 종말은 또한 기사도 문화의 변화를 의미했다. 십자군은 기사도의 최고 표현이었다. 기사들은 신앙, 명예, 용기를 위해 싸웠다. 하지만 14세기에는 기사도가 점점 더 형식화되고 낭만화되었다. 기사들은 여전히 마상시합에 참여하고 연애시를 읊었지만, 실제 전쟁에서의 역할은 줄어들었다. 장궁과 석궁, 그리고 나중에는 화약 무기가 전장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기사의 갑옷과 기마 돌격은 점점 구식이 되어갔다.
루이 9세는 중세의 마지막 순간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11-12세기의 이상을 체현했지만, 13세기 후반의 현실과는 맞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한 시대의 종말을 표시했다. 8차 십자군 이후, 십자군 운동은 더 이상 유럽 사회의 중심적 기획이 아니었다. 교황들은 여전히 십자군을 선포했지만, 이는 주로 수사적 차원에 머물렀다. 실제로 조직된 대규모 원정은 없었다.
물론 십자군 정신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5세기에 오스만 제국이 발칸 반도로 확장하자, 헝가리와 폴란드는 방어적 십자군을 조직했다.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 1444년 바르나 전투 등에서 기독교 연합군은 오스만군과 싸웠다. 하지만 이들은 성지 회복이 아니라 유럽 방어를 목표로 했다. 이베리아의 레콘키스타는 1492년 그라나다 함락으로 완성되었는데, 이는 십자군 정신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16세기 레판토 해전(1571)에서 기독교 연합 함대가 오스만 함대를 격파한 것도 십자군적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이러한 후기 "십자군"들은 초기 십자군과는 성격이 달랐다. 그들은 성지 탈환이라는 종교적 목표보다는 영토 방어라는 정치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십자군 운동은 점차 국가 간 전쟁, 식민지 확장, 종교 개혁 등 다른 형태로 변형되었다. 루이 9세가 꿈꾸었던 순수한 신앙의 십자군은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
튀니지 해안의 폐허에서 죽어간 루이 9세의 모습은 신앙과 현실, 이상과 실제 사이의 간극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순수한 신앙심으로 무장했지만, 정치적 현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기사도적 이상을 추구했지만, 시대는 이미 마키아벨리적 실용주의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는 성인의 삶을 살았지만, 그것이 반드시 훌륭한 통치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러한 괴리는 근본적으로 기독교 윤리와 정치적 현실 사이의 긴장에서 비롯된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 "검을 버려라",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왕은 원수와 싸워야 하고, 검을 들어야 하며, 재산을 축적해야 한다. 기독교의 이상은 본질적으로 반정치적, 반국가적이다. 그것은 개인의 영혼 구원을 추구하지, 국가의 번영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루이는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키려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시도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지상의 나라(civitas terrena)와 하느님의 나라(civitas Dei)를 구분했다. 지상의 나라는 자기애와 권력욕으로 지배되고, 하느님의 나라는 신에 대한 사랑으로 지배된다. 이 두 나라는 섞여 있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 루이는 지상의 나라를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려 했다. 그는 프랑스를 성스러운 왕국으로, 십자군을 신성한 사업으로, 자신을 하느님의 도구로 만들려 했다. 하지만 지상의 나라는 결코 하느님의 나라가 될 수 없다. 전쟁, 정치, 권력은 본질적으로 타협과 계산과 때로는 폭력을 포함한다.
그렇다면 루이는 실패한 것인가?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그는 자신이 설정한 목표들을 달성하지 못했다. 예루살렘은 되찾지 못했고, 이슬람은 개종시키지 못했으며, 십자군 국가들은 구하지 못했다. 그는 수천 명의 병사들을 죽음으로 이끌었고, 왕국의 재정을 고갈시켰다. 객관적으로 그의 십자군들은 재앙이었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그는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가치관을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지켰다. 그는 권력, 부, 명예를 추구하지 않고 오직 신앙을 추구했다. 그는 편안한 삶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고난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자신의 확신을 위해 죽었다. 이는 어떤 면에서는 궁극적인 성공이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신 것, 토마스 모어가 참수당한 것, 간디가 암살당한 것처럼, 루이의 죽음은 그의 신념의 진정성을 증명한다.
8차 십자군의 비극은 루이 개인의 비극인 동시에, 중세 유럽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과정이었다. 십자군 운동은 기독교 세계의 통합, 신앙의 순수성, 선과 악의 명확한 구분이라는 이상을 대표했다. 하지만 현실은 분열, 타협, 도덕적 애매함으로 가득했다. 십자군은 때로 약탈자가 되었고, 순례자는 정복자가 되었으며, 신앙은 탐욕의 가면이 되었다.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한 것, 알비 십자군이 프랑스 남부의 기독교도들을 학살한 것은 십자군 이상의 타락을 보여준다.
루이는 이러한 타락을 거부하고 십자군의 원래 순수성을 회복하려 했다. 그는 약탈을 금지했고, 이슬람교도들과의 평화적 개종을 꿈꾸었으며, 스스로를 정화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순수한 의도만으로는 복잡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없었다. 신앙심만으로는 군사적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개인의 도덕성만으로는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없었다.
현대의 관점에서 루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그를 광신자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이상주의자로 볼 것인가? 그의 십자군을 침략 전쟁으로 규정할 것인가, 아니면 신앙의 증거로 이해할 것인가? 이는 쉽지 않은 질문이다. 현대적 가치관으로는 십자군은 종교적 불관용과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이슬람 세계를 침략하여 강제로 개종시키려 한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유대인과 이단자를 박해한 것은 명백한 인권 침해이다.
하지만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면 다른 평가도 가능하다. 루이는 자신의 시대의 산물이었다. 그는 13세기의 도덕적, 신학적 틀 안에서 행동했다. 그 시대에는 종교적 진리가 절대적이었고, 이단은 영혼의 질병이었으며, 십자군은 성스러운 의무였다. 루이를 현대의 기준으로 재단하는 것은 역사적 불공정일 수 있다. 우리는 그를 비판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가 처한 시대적 제약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루이의 긍정적 유산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의 사법 개혁은 프랑스 법률 체계의 기초를 놓았다. 그의 자선 사업은 수많은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그의 도덕적 권위는 왕권을 강화하고 프랑스를 통합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진정으로 정의를 사랑하고 백성을 돌보는 왕이었다. 그의 개인적 청렴함과 경건함은 부패한 시대에 빛을 발했다. 이러한 면모들이 그를 성인으로 만든 것이다.
루이 9세의 삶과 8차 십자군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첫째, 선한 의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루이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의 계획은 비현실적이었고 결과는 참담했다. 정치와 전쟁에서는 도덕적 순수성뿐만 아니라 전략적 지혜도 필요하다.
둘째,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고 적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루이는 과거의 이상에 집착하여 현재의 변화를 보지 못했다.
셋째, 개인의 영웅주의는 감동적이지만, 집단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는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루이의 순교는 고귀했지만, 그를 따른 수천 명의 병사들은 무익하게 죽었다.
동시에 루이의 이야기는 신념의 힘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는 편안함과 안전을 거부하고 위험과 고난을 선택했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이러한 헌신과 용기는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지닌다. 우리가 루이의 목표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의 진정성은 존경할 만하다.
오늘날 우리가 루이 9세와 8차 십자군을 돌아볼 때, 단순히 실패한 군사 작전으로만 볼 수는 없다. 이것은 신념의 힘과 한계, 이상주의의 아름다움과 위험성, 그리고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냉엄한 교훈을 동시에 담고 있다. 루이는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일을 끝까지 밀고 나갔고, 그 대가를 자신의 생명으로 치렀다. 그것이 어리석음인지 고귀함인지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그의 삶은 타협 없는 신념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실험이었다.
카르타고의 폐허 위에서 또 다른 폐허를 만들고 떠난 8차 십자군은, 인간의 신앙과 집념이 때로는 비극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루이 9세는 중세의 가장 고귀한 이상을 체현했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한계도 드러냈다. 그는 성인이 되었지만, 그가 이끈 원정은 실패했다. 그는 천국에 들어갔을지 모르지만, 그가 남긴 지상의 유산은 복잡하고 모순적이다. 이러한 복잡성과 모순이야말로 역사의 진실이며, 루이 9세와 8차 십자군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역사는 단순한 성공과 실패로 나뉘지 않는다. 루이의 실패한 십자군은 중세 정신의 마지막 빛이었고,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그림자였다. 그의 죽음과 함께 한 시대가 막을 내렸고, 유럽은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미래는 르네상스, 종교개혁, 계몽주의, 그리고 근대 세계로 이어질 것이었다. 루이 9세는 그 전환점에 서 있었던 인물이며, 8차 십자군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A0%9C8%EC%B0%A8_%EC%8B%AD%EC%9E%90%EA%B5%B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