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바르스-사자의 심장을 가진 술탄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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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중반, 지중해 동안을 무대로 펼쳐진 십자군 전쟁의 마지막 막이 열리고 있었다. 이슬람 세계는 두 개의 거대한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서쪽에서는 십자군이 여전히 레반트 해안의 요새들을 장악하고 있었고, 동쪽에서는 몽골의 대군이 바그다드를 함락시키며 이슬람 문명의 심장부를 짓밟았다. 1258년 2월, 훌라구 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를 포위했다. 일주일간의 살육 끝에 칼리프는 살해되었고, 500년 동안 이슬람 세계를 상징적으로 통치해온 아바스 왕조가 무너졌다. 역사가 나지르 아흐메드의 표현대로, "이슬람 세계는 멸망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바로 이 절망적인 순간, 한 노예 출신 전사가 역사의 무대 중앙으로 걸어나왔다.


바이바르스의 이름은 투르크어로 '위대한 표범' 또는 '표범의 군주'를 뜻했다. 이 이름은 그가 다마스쿠스의 노예 시장에 섰을 때 첫 주인이 붙여준 것으로, 그의 본래 이름은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그는 1223년경 킵차크 초원, 지금의 카자흐스탄 어딘가에서 태어났다. 흑해 북쪽 끝없이 펼쳐진 대초원에서 자란 그는 투르크계 유목민의 아들이었다. 당시 킵차크 초원은 몽골 제국의 서진 경로에 있었고, 1236년부터 1245년 사이 몽골군의 침략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가 되어 노예로 팔려갔다. 바이바르스도 그 중 하나였다.


노예 상인의 손에 이끌려 긴 여정을 거쳐 다마스쿠스에 도착한 소년 바이바르스는 노예 시장에 섰다. 한 구매자가 그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그의 푸른 눈동자에서 백내장 기미를 발견하고 거래를 거부했다. 이 일화는 여러 역사 기록에 남아있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의 독특한 외모에 주목했다. 바이바르스는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가진 금발의 청년으로, 한쪽 눈에는 흰 반점이 있어 밝고 광택이 나는 푸른색으로 빛났다고 한다. 이 외모적 특징은 나중에 그를 거의 신화적인 인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결국 그를 800개의 구리 동전에 구매한 것은 이맛 알사이그라는 군사 장교였다. 이 '결함 있는' 노예는 곧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살리흐 나즘 알딘 아이유브의 소유가 되었다.


맘루크 제도는 이집트와 시리아 지역의 독특한 군사 시스템이었다. 어린 노예들을 사들여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고, 철저한 군사 훈련과 교육을 통해 엘리트 전사로 양성하는 이 체계는 혈통이 아닌 능력으로 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 특별한 경로를 제공했다. 투르크계 유목민들은 특히 말 타기와 궁술 실력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이집트의 지배자들은 이들을 군사 노예로 선호했다. 바이바르스는 나일강의 한 섬에 위치한 엘리트 맘루크 훈련 학교로 보내졌다. 이곳에서 그는 수년간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말 타기, 궁술, 검술은 물론이고, 아랍어와 이슬람 신학, 그리고 전략과 전술까지 배웠다. 훈련을 마친 후 해방되어 술탄의 친위대인 바흐리야 맘루크 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연대는 술탄을 직접 호위하는 최정예 부대였다.


바이바르스는 이 시스템 안에서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뛰어난 신체 능력뿐 아니라, 전략적 사고와 리더십을 겸비한 보기 드문 인재였다. 동료 맘루크들 사이에서도 그의 존재감은 남달랐다. 키가 크고 위압적인 외모, 날카로운 시선, 그리고 결단력 있는 성격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존경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그는 곧 소규모 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실전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1250년, 바이바르스의 운명을 바꾼 전투가 벌어졌다.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이끄는 제7차 십자군이 이집트를 침공했다. 이 십자군은 1248년부터 준비된 대규모 원정이었고, 루이 9세는 성지를 해방시키겠다는 강한 종교적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1249년 6월, 십자군은 나일강 하구의 다미에타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11월에 카이로로 진군을 시작했을 때,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해 11월, 술탄 알살리흐가 결핵으로 사망한 것이다.


술탄의 아내 샤자르 알두르는 놀라운 용기를 발휘했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을 비밀로 유지하면서 맘루크 장군들과 함께 전쟁을 계속 지휘했다. 군대의 사기를 유지하고 적에게 약점을 보이지 않기 위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비밀은 오래가지 않았다. 루이 9세는 스파이를 통해 술탄의 죽음을 알아냈고, 나일강을 건너 맘루크 진영을 공격할 방법을 찾았다.


1250년 2월, 루이 9세는 동생 로베르 다르투아를 선봉으로 보내 이집트군을 공격했다. 십자군 기사들은 후퇴하는 이집트군을 추격하며 만수라 시가지로 진입했다. 이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바로 이 순간, 바이바르스가 그의 군사적 천재성을 처음으로 드러냈다. 그는 맘루크 부대를 이끌고 좁은 골목길에서 십자군을 기습했다. 템플 기사단을 포함한 프랑스의 정예 기사들은 좁은 거리에서 기동력을 발휘할 수 없었고, 맘루크 전사들의 맹렬한 공격에 포위되어 학살당했다. 로베르 다르투아와 윌리엄 롱스페도 전사했으며, 템플 기사단 중에서는 단 다섯 명만이 살아남았다.


만수라 전투는 전세를 뒤집었다. 2월 말에 술탄의 아들 투란샤가 도착하면서 이집트군은 재정비되었고, 곧 십자군은 완전히 패배했다. 루이 9세 자신이 포로로 잡히는 전무후무한 사건이 일어났다. 유럽의 왕이 무슬림에게 생포된 것은 십자군 전쟁 역사상 유례없는 굴욕이었다. 루이 9세는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되었지만, 제7차 십자군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승리의 환희 속에서도 바이바르스는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곧 맘루크 지도부에 심각한 균열이 생겼다. 투란샤는 아버지의 오랜 맘루크 장군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그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교체하려 했다. 더욱이 그는 오만하고 무례한 태도로 맘루크들을 대했다. 이는 치명적인 실수였다. 1250년 5월, 바이바르스를 포함한 맘루크 장군들은 투란샤를 암살했다. 아이유브 왕조의 마지막 술탄이 제거되면서, 맘루크들이 이집트의 실권을 장악했다. 샤자르 알두르가 술탄으로 옹립되었고, 이는 이슬람 역사상 드문 여성 통치자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바이바르스의 정치 경력은 순탄하지 않았다. 첫 번째 맘루크 술탄 아이박은 바이바르스를 위협적인 존재로 여겼다. 만수라 전투에서 보여준 그의 군사적 재능과 부하들 사이의 인기는 술탄의 권력에 도전이 될 수 있었다. 결국 바이바르스는 다른 맘루크 지도자들과 함께 시리아로 도망쳤다. 이것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였다. 그는 다마스쿠스와 그 주변 지역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때로는 무법자처럼 생활하며 생존했다. 그러나 이 경험은 나중에 큰 자산이 되었다. 시리아의 지형, 도시들, 정치적 역학을 직접 체험하면서, 그는 이 지역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었다.


1259년, 상황이 급변했다. 몽골군이 시리아로 진격하면서 이슬람 세계는 새로운 위기에 직면했다. 훌라구 칸의 군대는 1260년 1월 알레포를 포위했고, 일주일간의 공성전 끝에 도시는 함락되었다. 3월에는 다마스쿠스가 저항 없이 항복했다. 몽골군은 계속 남진하여 팔레스타인의 나블루스와 가자를 점령했다. 다음 목표는 명백히 이집트였다. 훌라구는 이집트의 술탄 쿠투즈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을 요구했다. 그 메시지는 위협적이었다.

"동방과 서방의 왕들의 왕, 위대한 칸으로부터. 우리는 신의 칼이다. 우리에게 저항하는 자는 멸망한다."


쿠투즈의 반응은 대담했다. 그는 몽골 사절들을 처형하고 그들의 머리를 카이로의 바브 주웨일라 성문에 걸어 놓았다. 이는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쿠투즈는 홀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망명 중인 맘루크 지도자들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고, 바이바르스는 다른 장군들과 함께 이집트로 돌아왔다. 쿠투즈는 바이바르스를 환영하며 그에게 영지를 하사했고, 더 중요하게는 그의 군사적 재능을 인정했다.


1260년 여름, 운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그러나 몽골 진영에 예상치 못한 변화가 생겼다. 대칸 몽케가 중국 남부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후계자 선출을 위한 쿠릴타이가 소집되었고, 훌라구는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갔다. 그는 유프라테스강 서쪽에 약 1만에서 2만 명의 병력만을 남겨두었는데, 이들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인 투르크계 장군 킷부가가 지휘했다. 역사가들은 이 병력이 원래는 훨씬 컸지만 훌라구의 귀환으로 대폭 축소되었다고 본다.


쿠투즈는 이것이 기회라는 것을 즉각 깨달았다. 그는 카이로에서 대군을 모아 7월 26일 출발했다. 놀랍게도 아크레의 십자군 국가는 중립을 선택했다. 그들은 맘루크를 전통적인 적으로 여겼지만, 몽골을 더 큰 위협으로 판단했다. 실제로 그들은 맘루크 군대가 자신들의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용했고, 아크레 근처에서 재보급할 수 있도록 했다. 바이바르스는 심지어 다른 무슬림 귀족들과 함께 아크레 시내에 명예 손님으로 초대받기도 했다. 이는 당시 정치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놀라운 장면이었다.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공통의 적에 대항하여 사실상의 동맹을 맺은 것이다.


1260년 9월 3일, 갈릴리 지역의 아인 잘루트 샘 근처, 예즈르엘 계곡에서 역사의 흐름을 바꾼 전투가 벌어졌다. 이 장소의 이름은 아랍어로 '골리앗의 샘'을 뜻하는데,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곳으로 믿어졌다. 양측 군대는 각각 약 2만 명 규모였다. 몽골군에는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기독교 부대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킷부가는 그들이 배신할까 염려하여 예비대로 남겨두었다.


쿠투즈는 바이바르스를 선봉대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이는 전투의 승패를 가를 중요한 결정이었다. 바이바르스는 이 지역의 지형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망명 시절 이곳에서 생활했기 때문이다. 그의 작전은 대담하면서도 교묘했다. 맘루크 군대를 언덕과 나무 사이에 숨긴 후, 바이바르스는 소규모 부대만을 이끌고 몽골군 앞에 나타났다. 그는 몽골군을 도발하며 앞뒤로 기동했고, 몽골 기병들은 이 유인에 걸려들었다. 맘루크 부대는 의도적으로 후퇴하는 척했고, 몽골군은 추격했다.


몽골군은 자신들이 가장 성공적으로 사용했던 전술, 즉 위장 후퇴에 속아넘어간 것이다. 그들이 협소한 지형으로 깊숙이 들어왔을 때, 양쪽 언덕에 매복해 있던 맘루크 본대가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맘루크군은 몽골군이 해가 뜨는 방향을 바라보도록 위치를 잡아 시각적 불리함을 조성했다. 더욱이 맘루크들은 미드파라고 불리는 초기 화약 무기를 사용했다. 이것은 적을 살상하기보다는 엄청난 소음으로 몽골 말들을 놀라게 하여 혼란을 일으키는 데 효과적이었다. 현대 학자들은 이것이 전투에서 폭발성 무기가 사용된 가장 이른 사례 중 하나라고 본다.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쿠투즈는 투구를 벗어던지며 부하들에게 외쳤다. "이슬람의 이름으로 싸우라!" 이 극적인 장면은 맘루크 전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바로 그때 시리아 보조군이 배신하여 맘루크 편으로 돌아섰다. 몽골군은 포위되었고, 킷부가는 전사했다. 한 기록에 따르면 그는 포로로 잡혀 쿠투즈 앞에 끌려왔고, 술탄이 그를 비난하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교만한 자여, 오늘의 승리를 자랑하지 마라. 내가 그대 손에 죽는다면 이는 신의 뜻이지 그대의 공이 아니다. 이 소식이 훌라구 칸에게 전해지면 그의 분노의 바다가 끓어오를 것이고, 아제르바이잔에서 이집트 성문까지 몽골 말발굽 소리에 땅이 진동할 것이다." 그는 현장에서 참수당했다.


몽골군은 13킬로미터 떨어진 베이산으로 후퇴했지만, 맘루크군이 추격했다. 베이산에서 그들은 다시 한번 싸웠으나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아인 잘루트 전투는 몽골 제국의 서진을 저지한 결정적 순간이었다. 몽골군은 이전에도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있었지만, 항상 돌아와서 복수했다. 그러나 아인 잘루트 이후 그들은 다시는 이집트를 위협하지 못했다. 이 전투는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 심리적, 문화적 전환점이었다. 무적으로 여겨졌던 몽골의 신화가 깨진 것이다.


맘루크군은 선전 가치를 최대한 활용했다. 킷부가의 머리를 창에 꽂아 카이로로 보냈고, 승리의 소식은 이슬람 세계 전역에 퍼졌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카이로로 돌아가는 길에서 비극이 일어났다. 10월 24일, 쿠투즈의 일행이 사냥을 하던 중, 바이바르스가 술탄에게 다가가 몽골 포로 소녀를 선물로 달라고 요청했다. 쿠투즈가 동의하자 바이바르스는 그의 손에 입맞추었다. 이것은 사전에 약속된 신호였다. 다른 맘루크 장군들이 일제히 쿠투즈를 공격했고, 바이바르스는 칼로 그의 목을 찔렀다.


이 암살은 바이바르스의 경력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를 순수한 권력욕의 발로로 해석한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 맥락을 고려하면 더 복잡한 이야기가 드러난다. 바이바르스는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의 공로로 알레포의 영지를 받기를 기대했지만, 쿠투즈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는 맘루크 군단 내부의 불만을 키웠다. 더욱이 쿠투즈는 바이바르스의 야망을 두려워했다. 맘루크 사회에서 술탄의 자리는 세습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장군이 차지하는 것이었고, 정치적 암살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바이바르스의 행동은 잔혹했지만, 그것은 다른 맘루크 엘리트들의 암묵적 지지를 받았다. 그들도 쿠투즈의 배신에 분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쿠투즈의 시신은 카이로로 옮겨졌고, 바이바르스는 1260년 10월 네 번째 맘루크 술탄으로 즉위했다. 그는 '알말리크 알자히르'라는 칭호를 택했는데, 이는 '승리자'를 의미했다. 처음에 그는 '공포를 일으키는 자'라는 칭호를 고려했으나, 좀 더 긍정적인 이미지를 선택했다. 그러나 두 칭호 모두 그에게 어울렸다. 그의 외모 자체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 날카로운 시선, 특히 한쪽 눈의 흰 반점은 사람들에게 거의 초자연적인 인상을 주었다.


술탄이 된 바이바르스는 단순한 군사 지도자를 넘어 뛰어난 통치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의 첫 번째 과제는 이집트와 시리아를 하나의 강력한 국가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이전의 아이유브 왕조 하에서 시리아는 여러 왕자들로 나뉘어 있었고, 각자가 반독립적으로 통치했다. 바이바르스는 1261년부터 1263년까지 이들을 차례로 제거하거나 복속시켰다. 다마스쿠스, 알레포, 홈스의 아이유브 영주들은 바이바르스의 압력 앞에 굴복했다. 이로써 이집트와 시리아는 처음으로 진정한 단일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바이바르스는 단순히 영토를 통합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체계적인 행정 개혁을 단행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가 구축한 통신망이었다. 바이바르스는 바리드라고 불리는 우편 제도를 재건하고 확장했다. 이 제도는 원래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 비잔틴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제도를 모방하여 만들어졌고, 아바스 왕조 하에서 발전했다. 그러나 몽골 침략과 정치적 혼란으로 크게 쇠퇴했었다. 바이바르스는 이 제도를 부활시키되, 몽골의 얌 제도에서 영감을 얻어 더욱 효율적으로 만들었다.


그는 카이로에서 다마스쿠스까지 역참을 설치했는데, 각 역참은 6-12마일(약 10-20킬로미터) 간격으로 배치되었다. 각 역참에는 신선한 말, 식량, 물, 사료가 준비되어 있었고, 파발마와 달리기 전령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 시스템을 통해 정보는 카이로에서 다마스쿠스까지 나흘 만에 전달되었다. 당시로서는 놀라운 속도였고, 이는 바이바르스가 광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있게 했다. 그는 적의 움직임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고, 지방 총독들의 행동을 감시할 수 있었다. 최근 다마스쿠스 문서고에서 발견된 1275년 문서는 바이바르스의 비둘기 우편 제도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정보 네트워크가 얼마나 정교했는지를 보여준다.


바이바르스는 또한 이크타 제도를 재정비했다. 이크타는 토지 하사 제도로, 맘루크 장군들에게 토지의 수익을 받을 권리를 주는 대신 일정 규모의 병력을 유지하게 하는 시스템이었다. 바이바르스는 이 제도를 체계화하여 아미르들을 계급별로 나누었다. 1000명의 맘루크를 거느릴 수 있는 아미르, 100명을 거느리는 아미르, 40명, 10명을 거느리는 아미르로 구분했다. 각 계급은 그에 상응하는 이크타를 받았고, 이크타의 생산성을 높이면 더 높은 계급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이는 제한적이나마 사회적 이동성을 가능하게 했고, 맘루크 엘리트들의 충성심을 확보하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바이바르스의 군사 개혁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맘루크 군대를 13세기 후반 가장 강력한 전투 조직으로 만들었다. 맘루크 전사들은 이미 뛰어난 기마 궁수였지만, 바이바르스는 훈련과 조직을 더욱 강화했다. 그는 또한 해군을 재건했다. 이집트는 전통적으로 육군 중심 국가였지만, 바이바르스는 키프로스의 십자군을 견제하고 지중해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전함과 화물선을 건조했다. 다마스쿠스와 알렉산드리아에 조선소를 세우고, 숙련된 선원들을 모집했다.


그러나 바이바르스의 진정한 업적은 십자군 국가들의 체계적인 제거였다. 그는 십자군 요새들이 서로 고립되어 있고, 유럽으로부터의 지원이 불규칙하다는 약점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1265년부터 그는 거의 매년 봄마다 군사 원정을 떠났다. 이는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캠페인이었다. 그는 한 번에 하나씩 십자군 요새를 공략하면서, 그들의 영토를 점진적으로 축소시켰다.


1265년 2월, 바이바르스는 카이사리아를 공격했다. 도시는 함락되었고 주민들은 학살되거나 노예로 팔렸다. 4월에는 아르수프가 차례였다. 이 요새는 호스피탈 기사단이 지키고 있었는데, 3월 21일부터 4월 30일까지 40일간의 포위 끝에 함락되었다. 바이바르스는 기사단에게 자유로운 통행을 약속하며 항복을 권유했다. 기사단이 거대한 성채를 포기하고 나오자, 바이바르스는 약속을 어기고 그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그리고 성을 완전히 파괴했다. 이러한 배신은 바이바르스의 전술적 특징이었다. 그는 약속을 통해 적을 항복시킨 후 무자비하게 배신함으로써, 다른 요새들에 공포를 심었다. 다음 목표는 더 쉽게 항복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같은 해, 그는 하이파와 아틀리트를 공격했다. 1266년 7월, 바이바르스는 사파드 요새를 포위했다. 이 요새는 갈릴리 지역을 내려다보는 전략적 요충지로, 템플 기사단의 자랑이었다. 포위는 16일간 계속되었고, 막대한 공성 무기가 동원되었다. 투석기는 끊임없이 성벽을 두드렸고, 기사단은 용감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결국 식량과 물이 떨어지면서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바이바르스는 다시 한번 자유를 약속했고, 기사단이 성문을 열자 그들을 모두 처형했다. 사파드의 함락은 십자군에게 큰 충격이었다.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요새가 불과 2주 만에 무너진 것이다.


1266년, 바이바르스는 방향을 바꾸어 아르메니아 실리시아를 침공했다. 아르메니아는 몽골의 동맹국으로, 알레포와 다마스쿠스 공격에 참여했었다. 바이바르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아르메니아 왕국을 황폐화시켰다. 수많은 도시와 마을이 약탈당했고, 아르메니아 왕 헤툼 1세는 참담한 패배를 당한 후 수도원으로 은퇴했다. 이 캠페인은 십자군의 잠재적 동맹국을 무력화시켰고, 안티오크를 더욱 고립시켰다.


1268년 5월, 바이바르스는 가장 야심찬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 안티오크 공략이었다. 이 고대 도시는 로마 제국 시대 세 번째로 큰 도시였고,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중심지였다. 제1차 십자군이 1097년 10월부터 1098년 6월까지 8개월의 피비린내 나는 포위 끝에 점령한 이래, 안티오크는 170년 동안 십자군의 지배를 받았다. 안티오크 공국은 한때 강력했지만, 1260년대에는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공작 보헤몬드 6세는 안티오크를 떠나 트리폴리에 거주하고 있었고, 도시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떠난 상태였다.


5월 15일, 바이바르스의 대군이 안티오크를 포위했다. 방어는 집정관 시몽 망셀이 맡았는데, 그는 성 밖으로 나가 기습 공격을 시도했다가 포로로 잡혔다. 바이바르스는 그에게 수비대에 항복을 명령하라고 강요했지만, 수비대는 거부했다. 18일, 바이바르스는 총공격을 명령했다. 맘루크 부대는 실피우스 산 쪽에서 성벽을 기어올라 도시로 진입했다. 주민들은 성채로 도망쳤지만, 맘루크 전사들이 거리를 휩쓸며 약탈과 살육을 벌였다. 현대 역사가 토머스 매든의 평가에 따르면, 이는 "전체 십자군 시대를 통틀어 가장 큰 규모의 학살"이었다.

역사 기록들은 끔찍한 장면을 전한다. 이븐 알푸라트는 3일간의 약탈 동안 10만 명 이상이 살해되고, 10만 명이 노예로 팔렸다고 기록했다. 8000명이 성채로 도망쳤지만 결국 항복했다. 바이바르스는 요새를 불태우고, 성 바울 교회와 성 베드로 교회를 포함한 모든 교회를 파괴했다. 안티오크 외곽의 성 시메온 스틸리테스 수도원도 파괴되었다. 기독교 안티오크는 완전히 사라졌고, 다시는 재건되지 않았다.


바이바르스의 잔인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안티오크의 통치자 보헤몬드 6세에게 조롱과 비난이 가득한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는 역사상 가장 악의적인 문서 중 하나로 꼽힌다. 바이바르스의 비서이자 전기 작가인 이븐 압드 알자히르가 작성한 이 편지에서 바이바르스는 안티오크에서 벌어진 살육을 상세히 묘사하며 보헤몬드를 조롱했다.

"죽음은 포위된 자들에게 모든 방향과 모든 길에서 왔다. 우리는 그대가 도시를 지키라고 임명한 자들을 모두 죽였다... 그대가 안티오크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러면 그대는 우리의 칼이 그대의 기사들을 어떻게 도살했는지 보았을 것이며, 우리의 화살이 어떻게 비처럼 쏟아져 그대의 백성을 베어갔는지 보았을 것이다."


안티오크의 함락은 십자군에게 파멸적인 타격이었다. 호스피탈 기사단의 대단장 위그 드 레벨은 유럽에 절망적인 편지를 보냈다.

"사파드는 템플 기사단의 자랑이었지만 16일 만에 함락되었습니다. 벨포르 요새는 1년은 버틸 것이라 했지만 4일도 채 안 되어 무너졌습니다. 고귀한 도시 안티오크가 점령당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땅의 상황이며, 이것이 우리를 압도하는 위험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될지 정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위해 여러분의 온 마음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가능한 한 많은 도움을 보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소서..."

이 편지는 절망과 체념이 뒤섞인 고전적인 문서다. 위그는 도움을 간청하면서도, 그것이 너무 늦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1268년, 바이바르스는 자파를 공격했다. 이 도시는 12시간의 전투 끝에 함락되었고, 대부분의 주민이 학살당했다. 그러나 바이바르스는 수비대에게는 자유를 허락했는데, 이는 드문 자비였다. 아마도 요새가 잘 방어되어 있어 장기 포위전이 많은 희생을 요구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1271년, 바이바르스는 전설적인 크락 데 슈발리에 요새를 공격했다. 이 거대한 성은 호스피탈 기사단의 본거지로, 살라딘조차 공략하지 못했던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러나 바이바르스는 대규모 공성전을 펼쳤고, 결국 기사단은 항복했다.


1271년 5월, 바이바르스는 트리폴리 공격을 중단하고 휴전을 선언했다. 이는 새로운 위협 때문이었다. 영국의 에드워드 왕자가 제9차 십자군을 이끌고 아크레에 도착한 것이다. 에드워드는 젊고 야심찬 기사로, 몽골과 동맹을 맺으려 했다. 바이바르스는 이 새로운 적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트리폴리와 휴전을 맺고, 에드워드와도 협상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바이바르스는 에드워드를 암살하려 했는데, 암살단 출신으로 위장한 자객이 독이 묻은 단도로 그를 찔렀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강건한 체질로 상처에서 회복했고, 1272년 아버지 헨리 3세의 죽음 소식을 듣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제9차 십자군도 실패로 끝났다.


바이바르스는 또한 남쪽과 서쪽의 이집트 국경을 확보했다. 1265년과 1272년, 그는 누비아의 마쿠리아 왕국에 원정을 보냈다. 마쿠리아는 이전 이슬람 제국들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격퇴한 것으로 유명했지만, 바이바르스는 나일강을 따라 남쪽으로 진격하여 돈골라까지 도달했다. 이는 마쿠리아에 대한 이집트의 영향력을 확립했다. 그는 또한 리비아로도 원정군을 보내 서쪽 국경을 안전하게 했다. 15번의 캠페인에서 바이바르스는 직접 지휘를 맡았고, 종종 자신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렸다.


바이바르스의 외교 정책도 그의 군사적 성공만큼 인상적이었다. 그는 적의 적은 친구라는 원칙을 철저히 실천했다. 가장 중요한 동맹은 킵차크 한국의 베르케 칸과의 관계였다. 베르케는 바이바르스와 같은 킵차크 투르크 출신이었고, 더 중요하게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최초의 몽골 칸이었다. 그는 사촌 훌라구가 바그다드를 파괴하고 칼리프를 살해한 것에 분노했다. 무슬림 역사가 라시드 알딘에 따르면, 베르케는 몽케 칸에게 이렇게 항의했다고 한다.

"그는 모든 무슬림의 도시를 약탈했고 칼리프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신의 도움으로 나는 그에게 이 무고한 피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바이바르스는 베르케와의 동맹을 세심하게 가꾸었다. 그는 사절과 선물을 보냈고, 무역 관계를 구축했다. 가장 중요하게는 킵차크 초원에서 맘루크 군대를 위한 노예를 계속 공급받을 수 있었다. 이 동맹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킵차크 한국과 일 한국은 서로 적대 관계였기 때문에, 훌라구는 두 전선에서 동시에 싸워야 했다. 이는 그가 이집트를 공격할 여력을 갖지 못하게 만들었다.


바이바르스는 또한 비잔틴 제국과도 우호 관계를 맺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미카엘 8세 팔레올로구스 황제에게 사절을 보냈고, 비잔틴 황제는 이에 응답하여 카이로의 오래된 모스크를 복원하도록 명령했다. 이집트 상인들과 대사들이 헬레스폰트와 보스포루스 해협을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게 했다. 이는 무역과 외교 모두에 중요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바이바르스가 시칠리아의 샤를 1세, 심지어 신성 로마 제국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유럽 정치의 복잡한 역학을 이해하고 활용했다. 시칠리아의 샤를은 비잔틴 제국을 위협했기 때문에, 미카엘 황제의 적이었다. 바이바르스는 이러한 경쟁 관계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다.


그러나 바이바르스는 또한 상징과 정통성의 중요성을 이해했다. 몽골이 아바스 칼리프조를 멸망시킨 후, 이슬람 세계는 정신적 공백 상태에 있었다. 칼리프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계자로서 이슬람 공동체의 종교적 지도자였다. 비록 아바스 왕조가 정치적 권력을 상실한 지 오래되었지만, 칼리프의 존재는 여전히 상징적으로 중요했다.


1261년, 바이바르스는 놀라운 쿠데타를 감행했다. 그는 바그다드 학살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아바스 가문의 후손을 찾아냈다. 알무스탄시르라는 이 인물은 바그다드에서 다마스쿠스로 도망쳐 숨어 지내고 있었다. 바이바르스는 그를 카이로로 데려와 새로운 칼리프로 옹립했다. 1261년 6월, 성대한 의식에서 알무스탄시르는 칼리프로 선포되었고, 바이바르스는 그로부터 술탄으로서의 승인을 받았다.


이는 교묘한 정치적 행보였다. 형식적이나마 칼리프의 승인을 받음으로써, 노예 출신인 바이바르스는 자신의 통치에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단순히 권력을 찬탈한 군인이 아니라, 칼리프가 인정한 정당한 통치자였다. 칼리프 자신은 실질적인 권력이 없었지만, 그의 존재는 바이바르스의 권위를 크게 강화했다. 바이바르스는 자신을 이슬람 세계의 수호자로 제시할 수 있었고, 이는 그의 십자군과 몽골에 대한 전쟁을 종교적 성전으로 정당화했다.


바이바르스는 또한 종교적 후원자로서의 역할을 열심히 수행했다. 그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생가를 수리하고, 메카와 메디나로 가는 순례길의 안전을 확보했다. 이 순례길은 이전에 십자군과 베두인 약탈자들에게 위협받았지만, 바이바르스는 요새와 우물을 건설하고 순찰대를 배치하여 순례자들을 보호했다. 그는 카이로, 다마스쿠스, 알레포를 포함한 여러 도시에 모스크와 마드라사(이슬람 학교)를 건설했다.


1268년, 바이바르스는 카이로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자히르 바이바르스 모스크를 건설했다. 이 모스크는 맘루크 건축의 초기 걸작 중 하나로, 현재 복원 중이다. 다마스쿠스에서는 그의 묘 옆에 알마드라사 알자히리야 학교를 세웠다. 이 건물은 지금도 알자히리야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귀중한 고문서를 보관하고 있다.

바이바르스 자신은 문맹이었다고 전해지지만, 그는 학자들을 후원했고 지적 교류를 장려했다. 그의 궁정에는 역사가, 시인, 법학자들이 모였다. 이븐 압드 알자히르는 바이바르스의 공식 전기 작가이자 비서로 활동하며 그의 업적을 기록했다. 이 기록들은 후대에 전해져 '시라트 알자히르 바이바르스'라는 민중 서사시의 기초가 되었다. 카이로는 바그다드를 대신하여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문화 중심지로 부상했다.


바이바르스의 건축 사업은 실용적인 목적도 있었다. 그는 몽골의 침략으로 파괴된 시리아의 성채와 요새를 모두 재건했다. 다마스쿠스 성채는 확장되고 강화되었으며, 그의 비문과 건축 작업의 흔적이 여전히 보인다. 그는 또한 새로운 무기고를 건설하고, 전함과 화물선을 제조했다. 이 모든 것은 맘루크 국가를 군사적으로 준비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이바르스는 자신의 상징으로 사자 또는 표범을 사용했다. 이 문양은 그의 문장으로, 동전과 건물에 새겨졌다. 알루드 근처에 바이바르스가 건설한 다리에는 쥐와 놀고 있는 사자/표범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바이바르스와 그의 십자군 적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시각적 상징은 그의 권력을 과시하고 백성들에게 그의 강인함을 상기시켰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집트는 번영했다. 바이바르스는 무역로를 복원하고 치안을 확립했다. 십자군 전쟁과 몽골 침략으로 인한 혼란 이후, 안정은 경제 회복의 기초였다. 알렉산드리아는 다시 한번 지중해 무역의 중요한 항구가 되었고, 카이로는 향료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했다. 바이바르스는 또한 학문과 예술을 지원하여 마드라사, 모스크, 병원을 건설했다.


그러나 끊임없는 전쟁은 그에게 휴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1277년, 그는 아나톨리아로 원정을 떠났다. 일 한국의 몽골군이 셀주크 투르크를 압박하고 있었고, 바이바르스는 이를 기회로 보았다. 그는 대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했다. 4월 11일, 엘비스탄 전투에서 바이바르스는 몽골군과 충돌했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 대규모 전투였다.


전투는 치열했다. 몽골군은 바이바르스의 좌익을 강타했고, 그것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바이바르스는 직접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몽골의 우익을 공격했다. 그는 하마의 군대에게 좌익을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맘루크의 수적 우위가 결국 승리를 가져왔다. 몽골군은 말에서 내려 마지막까지 싸웠지만 압도당했다. 일부는 언덕으로 도망쳤지만, 포위되어 전멸했다. 바이바르스는 카이세리(고대 카이사리아)를 점령했다.


그러나 승리의 축하 속에서도 바이바르스는 불안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는가? 나는 나와 내 부하들만으로 몽골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좌익이 그들에게 패배했다. 오직 알라만이 우리를 도왔다."

새로운 몽골 군대가 올 가능성 때문에 바이바르스는 시리아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보급선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마스쿠스에 도착한 바이바르스는 갑자기 병에 걸렸다. 일부 기록은 그가 쿠미스라는 발효 음료를 마셨다고 한다. 쿠미스는 말젖으로 만든 투르크 전통 음료로, 바이바르스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즐겼을 법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는 그 음료에 독이 들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그 독이 원래 다른 사람을 위해 준비된 것이었고 바이바르스가 실수로 마셨다는 설이다. 다른 설명은 과로와 질병, 혹은 전투 중 입은 상처가 그를 쓰러뜨렸다고 본다.


1277년 7월 1일, 바이바르스는 54세의 나이로 다마스쿠스에서 사망했다. 그는 자신이 세운 알자히리야 도서관의 돔 아래 묻혔다. 그가 죽자 이슬람 세계는 가장 위대한 수호자를 잃었다. 그의 죽음은 학문적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독살설은 여러 출처에서 언급되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바이바르스 같은 강력한 통치자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언제나 음모론을 낳기 마련이다.


바이바르스의 유산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오래 지속되었다. 그의 두 아들 알사이드 바라카와 술라미시가 차례로 술탄이 되었지만, 둘 다 아버지의 카리스마와 능력이 부족했다. 진정한 권력은 바이바르스의 최고 장군 칼라운에게 넘어갔다. 칼라운과 그의 후계자들은 바이바르스가 시작한 일을 완성했다. 1289년 트리폴리가 함락되었고, 1291년 아크레가 최후의 십자군 거점으로 무너졌다.


아크레 공성전은 십자군 시대의 종말을 상징했다. 1291년 4월 5일, 맘루크 술탄 알아슈라프 칼릴이 이끄는 거대한 군대가 아크레를 포위했다. 6만 명의 기병과 16만 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이 군대는 성벽 안의 방어군보다 10배나 많았다. 템플 기사단과 호스피탈 기사단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거의 두 달의 포위 끝에 도시는 함락되었다. 생존자들은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도망쳤다. 레반트의 십자군 시대는 끝났다.


바이바르스가 세운 맘루크 술탄국은 1517년 오스만 제국에 정복될 때까지 존속했다. 257년 동안 맘루크들은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치하며 십자군의 마지막 거점들을 완전히 제거했고, 몽골의 추가 침입을 막아냈다. 그들은 또한 홍해와 인도양을 통한 향료 무역을 통제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더 중요한 것은 바이바르스가 보여준 리더십의 모델이다. 노예의 신분에서 시작하여 순전히 능력과 결단력으로 제국의 지배자가 된 그의 삶은, 출신이 아닌 성취로 평가받는 사회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맘루크 제도는 독특한 능력주의 시스템이었다. 혈통이나 귀족 신분과 상관없이, 가장 유능한 전사가 최고위에 오를 수 있었다. 바이바르스는 이 시스템의 가장 성공적인 산물이었다.


민중의 상상력 속에서 바이바르스는 신화적 인물이 되었다. '시라트 알자히르 바이바르스'는 수세기 동안 중동의 커피하우스와 시장에서 낭송되었다. 이야기꾼들은 그를 초인적인 영웅으로 묘사했다. 실제 역사적 사건들은 환상적인 모험담으로 각색되었다. 그는 십자군과 몽골을 물리친 전사일 뿐 아니라, 마법과 음모를 헤쳐나가는 지혜로운 통치자로 그려졌다. 때로는 그가 마술적인 힘을 가졌다거나, 변장의 명수였다거나, 심지어 하룻밤 사이에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추가되었다.


이러한 민속 전통은 그가 단순히 정치적 지도자가 아니라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아랍 세계에서 바이바르스는 살라딘과 함께 가장 위대한 이슬람 영웅으로 기억된다. 그의 이름은 용기, 전략적 지혜, 그리고 이슬람의 수호를 상징한다. 카자흐스탄에서는 그를 킵차크 투르크의 가장 위대한 아들로 기념한다.


현대의 역사가들은 바이바르스를 더 복잡한 인물로 평가한다. 그의 잔혹함과 무자비함은 부인할 수 없다. 안티오크 함락 후 수만 명의 기독교인이 살해되거나 노예로 팔렸다. 쿠투즈의 암살은 그의 도덕적 타협을 보여준다. 그는 약속을 어기고 항복한 적들을 학살했다. 그의 십자군에 대한 전쟁은 종종 무자비한 폭력을 수반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붕괴 직전의 이슬람 세계를 구했다. 1260년 몽골군이 가자에 도달했을 때, 이집트 정복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만약 훌라구가 전군을 이끌고 왔다면 맘루크들이 이길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그러나 바이바르스는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인 잘루트에서 그는 몽골 제국의 무적 신화를 깨뜨렸고, 이슬람의 독립을 보존했다.


그의 행정 개혁은 맘루크 국가를 200년 이상 지속될 안정적인 체제로 확립했다. 그가 구축한 바리드 통신망, 이크타 제도의 체계화, 해군의 재건, 그리고 외교 네트워크는 모두 맘루크 국가의 힘의 기초였다. 그의 후계자들은 이 시스템을 물려받아 계속 발전시켰다.


바이바르스는 또한 상징의 힘을 이해한 정치가였다. 아바스 칼리프를 카이로에 복원하고, 종교 건축물에 투자하며, 메카 순례길을 보호함으로써, 그는 자신을 이슬람의 정당한 수호자로 제시했다. 이는 단순한 선전이 아니라 실질적인 정치적 자산이었다. 그의 종교적 정통성은 그가 이집트와 시리아의 무슬림들로부터 충성을 얻는 데 도움이 되었고,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그의 외교적 수완도 주목할 만하다. 킵차크 한국과의 동맹, 비잔틴 제국과의 우호 관계, 그리고 유럽 국가들과의 복잡한 외교는 모두 전략적 사고의 산물이었다. 바이바르스는 국제 정치를 깊이 이해했고, 먼 곳의 동맹이 가까운 곳의 적에 대항하는 데 얼마나 유용한지 알았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들은 바이바르스의 치세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안티오크(안타키아)에서 최근 지진 이후 이루어진 발굴은 십자군-맘루크 층위를 드러냈는데, 이는 바이바르스의 포위와 그 후의 도시 재건의 증거를 보여준다. 다마스쿠스 문서고에서 재발견된 1275년의 문서 단편은 그의 비둘기 우편 제도를 놀라운 행정적 세부 사항으로 기술하고 있어, 그의 정보 네트워크가 얼마나 정교했는지를 시사한다.


살아남은 맘루크 검에 대한 금속학적 연구는 인도와 중앙아시아에서 수입된 강철을 나타내는데, 이는 바이바르스의 광범위한 무역 및 외교 연결을 보여주는 징후다. 바이바르스의 국가가 단순한 반동적 군사 정권이 아니라, 정보, 상업, 그리고 군사적 준비에 기반한 역동적이고 조직화된 시스템이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바이바르스의 이야기는 역사가 단순한 개인의 전기 이상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의 삶은 13세기 중동의 격변, 문명의 충돌, 그리고 한 개인이 어떻게 시대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킵차크 초원의 이름 없는 소년이 술탄의 자리에 오르고, 십자군 전쟁의 흐름을 역전시키며, 몽골의 서진을 저지한 이야기는 단순한 성공담이 아니다.


그것은 위기의 시대에 리더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역사가 어떻게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교훈이다. 바이바르스는 자신의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였다. 이슬람 세계가 멸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군사적 천재성, 정치적 교활함, 그리고 무자비한 결단력을 결합하여 상황을 역전시켰다.

오늘날 바이바르스를 기억하는 것은 과거를 낭만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삶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무엇이 승리를 가능하게 하는가? 출신과 환경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고 한 개인의 비전과 결단이 어떻게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가?


바이바르스는 이 질문들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그것은 완벽한 대답이 아니며, 때로는 불편한 진실을 포함하고 있다. 그의 성공은 잔혹함과 배신을 포함했다. 그는 자비보다는 공포를 통해 지배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무너져가는 문명을 구했고, 더 강하게 재건했다. 그는 능력주의가 실제로 작동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노예가 술탄이 될 수 있고, 변방의 소년이 제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바로 그 복잡성이 그를 단순한 영웅 이상의 존재로 만든다. 그는 자신의 시대를 살아낸 인간이었고, 그 과정에서 역사를 다시 썼다. 그의 유산은 건물과 문서, 동전과 무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기의 순간에 한 개인이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들 수 있는지, 그리고 역사가 결코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교훈에 있다.


바이바르스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운명은 출생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과 행동으로 만들어진다고.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도 용기와 지혜, 그리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그리고 진정한 지도자는 자신의 이익만이 아니라 자신이 섬기는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싸운다고.


이것이 바이바르스의 진정한 유산이다. 단순히 전투를 승리한 장군이나 영토를 확장한 정복자가 아니라, 절망의 순간에 희망을 창조하고, 혼란 속에서 질서를 세우며, 파괴된 것을 재건한 지도자로서의 유산. 그의 이야기는 7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울림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의지와 능력, 그리고 한 시대를 정의하는 선택들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B0%94%EC%9D%B4%EB%B0%94%EB%A5%B4%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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