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차 십자군 원정은 십자군 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이면서도 상징적인 종말을 장식한 사건이다. 1271년부터 1272년까지 진행된 이 원정은 영국의 왕세자 에드워드가 이끌었으며, 십자군 시대가 저물어가는 황혼을 여실히 보여주는 동시에, 한 개인의 결연한 의지가 역사의 거대한 흐름 앞에서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지를 증명한 사례로 남았다. 이 원정은 단순한 군사적 실패가 아니라 중세 유럽이 새로운 시대로 전환하는 과정의 결정적 순간이었으며, 200년 가까이 지속된 십자군 운동이라는 거대한 서사시의 마지막 장이었다.
13세기 후반, 성지는 그야말로 기독교 세력의 마지막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맘루크 술탄국의 바이바르스는 1260년부터 1277년까지 통치하며 십자군 국가들을 체계적으로 해체해 나갔다. 그는 단순한 전사가 아니라 냉혹한 전략가였다. 킵차크 투르크족 출신의 노예로 팔려왔던 그는 맘루크 군대 내에서 능력으로 승진하며 마침내 술탄의 자리에 올랐다. 1260년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퇴한 그는 맘루크 군사력의 우월성을 입증했고, 이후 십자군 국가들을 향해 맹렬한 공세를 펼쳤다.
바이바르스의 전략은 치밀하고 잔인했다. 1263년 사페드 요새를 포위한 그는 템플 기사단에게 항복하면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다고 약속했지만, 항복 후 기사단 전원을 학살했다. 1265년에는 카이사리아, 아르수프, 하이파를 차례로 점령했고, 각 도시의 방어 시설을 완전히 파괴했다. 그러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1268년 5월 18일 안티오크의 함락이었다. 한때 십자군 국가 중 가장 강력했던 안티오크 공국은 불과 며칠 만에 무너졌다. 바이바르스의 군대는 도시를 완전히 약탈했고, 약 17,000명의 주민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팔았다. 생존자들은 거의 없었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 패배를 넘어 심리적 충격이었다. 유럽의 기독교 군주들은 200년 가까이 지켜온 성지가 완전히 상실될 위기에 처했음을 깨달았다.
바이바르스의 성공은 맘루크 군사 체제의 우월성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40,000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고, 그 중 15,000명은 정예 기병이었다. 맘루크 기병들은 어린 시절부터 궁술과 마상 전투 훈련을 받았고, 중무장 기병으로서의 역할과 경기병으로서의 기동성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바이바르스는 또한 전비둘기를 이용한 통신망을 구축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받을 수 있었다. 이는 세계 최초의 국가 규모 우편 체계로 평가받는다. 그의 군대는 속도와 조직력에서 십자군을 압도했다.
반면 십자군 국가들은 내부 분열로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1271년 당시 모든 십자군 국가를 합쳐도 5,000명 미만의 기사와 병사만이 주둔하고 있었다. 템플 기사단, 성 요한 기사단, 튜튼 기사단은 각자의 영역을 지키느라 급급했고, 서로 협력하기를 거부했다. 성채 지휘권과 휴전 협상을 놓고 다투는 일이 빈번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들은 무역 이권을 놓고 1258년 아크레 내에서 무력 충돌을 벌였고, 이는 방어에 필요한 자원을 고갈시켰다. 지역 귀족들은 공동의 안보보다 개인의 영지를 우선시했으며, 부재 영주들은 지휘 체계를 더욱 분산시켰다. 이는 바이바르스의 중앙집권적 권위와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역설적이게도 유럽은 그 어느 때보다 분열되어 있었다. 프랑스의 루이 9세는 1270년 튀니지에서 시작된 8차 십자군 원정 중 질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십자군 운동에 대한 열정에 찬물을 끼얹었다. 루이 9세는 '성왕'으로 추앙받던 인물이었고, 그의 1248-1254년 7차 십자군 원정 실패 후에도 다시 십자가를 짊어진 헌신적인 십자군 지도자였다. 그러나 8차 십자군에서 그는 형제인 시칠리아와 앙주의 왕 샤를이 제안한 튀니지 공격이라는 이상한 목표에 동의했다. 역사가들은 여전히 이 선택의 이유를 논쟁한다. 어떤 이들은 튀니지 술탄을 개종시켜 이집트를 공격하려 했다고 주장하고, 다른 이들은 샤를이 지중해 남부로 영향력을 확장하려 했다고 본다. 어찌 되었든 1270년 7월 18일 십자군은 카르타고를 점령했지만, 튀니지는 견고했고 술탄은 항복할 의사가 없었다. 질병이 진영을 휩쓸었고, 8월 25일 루이 9세가 사망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8차 십자군은 사실상 종료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의 왕세자 에드워드가 십자군을 조직한다고 나섰을 때, 많은 이들은 회의적인 시선을 보냈다. 에드워드는 당시 32세의 젊은 왕세자로, 키가 188cm에 달하는 장신으로 '롱생크스'(긴다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강인한 체격을 지닌 전사였으며, 아버지 헨리 3세의 통치 기간 동안 시몬 드 몽포르가 이끈 귀족 반란(제2차 남작 전쟁, 1264-1267)을 겪으며 정치적, 군사적 역량을 키웠다. 1265년 이브샴 전투에서 에드워드는 반란군을 격파하고 시몬 드 몽포르를 전사시켰다. 이 경험은 그를 단련시켰고, 전략적 사고와 냉정한 판단력을 갖춘 지도자로 성장하게 했다.
에드워드는 1268년 6월 24일 십자가를 짊어지겠다고 서약했다. 하지만 그의 십자군 원정 동기는 단순한 종교적 열정만이 아니었다. 영국 왕실의 위신을 회복하고, 유럽 무대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정치적 계산도 깔려 있었다. 남작 전쟁의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은 영국에서, 십자군 원정은 에드워드가 국내 분열을 넘어 더 높은 목표를 추구하는 지도자임을 보여줄 기회였다. 그는 십자군 원정을 통해 자신이 단순한 지방 군주가 아니라 기독교 세계의 지도자로 발돋움할 수 있다고 믿었다.
1270년 8월 20일, 에드워드는 도버에서 출항했다. 그는 프랑스 왕 루이 9세로부터 70,000 리브르 투르누아(약 반 톤의 은)를 빌렸고, 약 1,000명의 정예 병력을 이끌었다. 이 중 225명은 기사였고, 나머지는 궁수와 보병이었다. 13척의 배에 나누어 탄 이 부대는 과거 십자군의 대규모 군대에 비하면 초라한 규모였다. 1차 십자군은 수만 명의 전사들이 참여했고, 3차 십자군에서는 리처드 1세와 필립 2세가 각각 방대한 군대를 이끌었다. 심지어 루이 9세의 7차 십자군도 수천 명의 기사를 포함한 대군이었다. 에드워드의 군대는 그에 비하면 소규모 원정대에 불과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질로 승부할 생각이었다. 그의 부대에는 영국의 정예 장궁병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은 후에 백년전쟁에서 프랑스 기사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 바로 그 전술의 초기 형태를 보여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에드워드는 먼저 튀니지에서 루이 9세와 합류하려 했지만, 1270년 11월 10일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성왕이 세상을 떠난 후였다. 프랑스군은 사기가 떨어져 대부분 귀향을 선택했다. 샤를과의 협상 끝에 튀니지 술탄은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시칠리아 왕에게 정기적으로 세금을 내며 기독교 상인들의 자유로운 무역을 허용하기로 약속했다. 10월 30일 협정이 체결되었고, 11월 11일 십자군은 튀니지 평야에서 철수했다.
에드워드는 절망하지 않았다. 1271년 2월 6일, 그는 영국 정부로부터 아버지가 중병에 걸렸으니 귀국하라는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흔들리지 않았다. 대신 헨리 오브 알마인을 가스코뉴를 거쳐 영국으로 보내 정치적 문제를 처리하게 했다. 십자군 서약에 대한 그의 헌신은 확고했다. 한 연대기는 그가 신의 피를 걸고 맹세했다고 기록한다. 설령 마부 포윈만 남더라도 아크레에 도달해 서약을 이행하겠다고. 심지어 비테르보에서 헨리 오브 알마인이 시몬과 기 드 몽포르 형제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조차 그의 결의를 흔들지 못했다. 이는 이브샴에서 전사한 시몬 드 몽포르의 아들들이 저지른 복수극이었다.
소수의 프랑스 귀족들과 함께 에드워드는 계속 동쪽으로 향했다. 시칠리아에 머물던 중 11월 18일, 샤를은 에드워드에게 안전 통행증을 발급했다. 다른 십자군들이 귀국을 결정했지만, 에드워드는 성지로 가서 안티오크 공이자 트리폴리 백작인 보에몽 6세를 도우기로 결정했다. 1271년 봄, 그는 키프로스에 도착해 재정비 시간을 가졌다. 키프로스 왕국은 십자군의 중요한 전진기지였지만, 이곳 역시 내부 분쟁으로 약화되어 있었다. 키프로스의 휴 3세는 명목상 예루살렘 왕이었지만, 키프로스의 이벨린 가문 기사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1271년 5월 9일, 에드워드의 함대는 마침내 아크레에 도착했다. 그는 8척의 범선과 30척의 갤리선을 이끌었다. 아크레는 레반트 지역에 남은 기독교 세력의 마지막 주요 거점이었다. 도시는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외벽과 내벽의 이중 방어선에 12개의 탑이 있었는데, 이들은 유럽의 왕들과 부유한 순례자들이 건설한 것이었다. 항구는 여전히 활기찼지만, 도시 안의 분위기는 절망적이었다. 바이바르스의 군대가 30,000명에 달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주민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에드워드가 도착했을 때 아크레의 지도자들이 보여준 것은 환영이 아니라 냉소였다. 겨우 1,000명의 병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에드워드의 도착은 포위당한 도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오랫동안 패배만 거듭하던 십자군 세력에게 에드워드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에드워드가 템플 기사단, 성 요한 기사단, 튜튼 기사단의 기사들을 규합해 약 7,000명의 병력을 지휘했다고 주장하지만, 이 수치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는 훨씬 적었을 것이다.
에드워드는 즉시 상황을 분석하고 실질적인 군사 작전을 계획했다. 당시 맘루크 군대는 바이바르스의 지휘 아래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정면 대결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에드워드는 대신 기습 공격과 소규모 전투를 통해 적의 보급선을 교란하고, 아크레 주변 지역을 방어하는 전략을 택했다.
1271년 6월 8일, 에드워드는 나자렛으로 진격했다.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도시의 모든 무슬림과 유대인 주민을 학살했다. 이는 중세 십자군 전쟁의 잔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7월 12일에는 아크레 동쪽 약 15마일 떨어진 세인트 조지 뒤 레베인으로 공격을 이끌었다. 목표는 맘루크가 장악한 농업 지역을 파괴해 자원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습격대는 곡물과 보급품을 파괴했지만, 극심한 더위와 질병, 그리고 맘루크 반격의 위협으로 조기 철수했다. 영토 획득은 없었지만 일시적으로 적의 보급망을 방해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가장 성공적인 작전은 1271년 11월 24일 카쿤 요새 근처에서 벌어졌다. 에드워드는 키프로스의 휴 3세 왕과 군사 수도회 병력을 동원해 아크레에서 남쪽으로 약 30마일 떨어진 카쿤으로 진격했다. 이 요새는 카이사리아로 가는 길을 통제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에드워드의 군대는 야간 기습을 감행해 근처에 주둔한 투르코만 부대의 야영지를 공격했다. 맘루크의 보조 병력으로 편입되어 있던 약 1,500명의 유목민들이 학살당했고, 5,000마리 이상의 가축이 노획되었다. 이는 맘루크의 유목 보급망에 즉각적인 타격을 입혔다. 바이바르스는 가축 떼를 재건하고 경기병을 재편성하기 위해 자원을 전용해야 했고, 이로 인해 십자군 해안 거점에 대한 공격이 단기적으로 연기되었다. 무슬림 기록에 따르면 이 공격으로 한 명의 에미르가 전사하고 다른 한 명이 부상당했으며, 성채 지휘관은 직위를 버리고 도주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카쿤 요새 자체를 점령하려 하지 않았다. 십자군 공병들이 요새화된 탑을 돌파할 수 없었고, 알레포에 있던 바이바르스가 몽골 위협에 대비하던 군대를 이끌고 반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271년 12월, 에드워드는 아크레에 대한 바이바르스의 공격을 격퇴하는 데 참여했다. 이는 수년 만에 십자군이 거둔 첫 번째 중요한 승리였지만, 전략적으로 큰 의미는 없었다. 에드워드의 소규모 부대는 맘루크의 거대한 군사력에 비하면 미미했고, 바이바르스는 언제든지 더 큰 공격을 개시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의 가장 야심찬 계획은 몽골 제국과의 동맹이었다. 아크레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사절단을 페르시아의 일칸국 통치자 아바카 칸에게 파견했다. 사절단은 레지날드 러셀, 고드프루아 드 보, 존 파커로 구성되었고, 그들의 임무는 맘루크에 대한 협공 작전에 대한 군사 지원을 얻는 것이었다. 이는 1260년대 루이 9세 시대의 미완성 프랑스-몽골 동맹 계획을 되살린 것이었다.
당시 일칸국과 맘루크는 치열한 적대 관계에 있었다. 1258년 훌라구 칸의 몽골군은 바그다드를 정복하고 압바스 칼리프국을 멸망시켰다. 이는 이슬람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몽골군은 시리아로 진격했고, 1260년 초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를 점령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3일,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바이바르스가 이끈 맘루크 군대가 몽골군을 결정적으로 격퇴했다. 이는 몽골 군대가 겪은 최초의 중대한 패배로 간주되며 역사의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맘루크와 몽골은 시리아를 놓고 지속적인 충돌을 벌였다.
1271년 9월 4일, 아바카 칸은 협력에 동의한다는 답변을 보냈다. 그는 맘루크에 대한 협공 공격을 언제 시작할지 물었다. 1271년 10월 말, 몽골군이 시리아에 도착했다. 그러나 아바카는 투르키스탄의 다른 분쟁에 몰두하고 있어 사마가르 장군 휘하의 기병 10,000명만 보낼 수 있었다. 이 병력은 셀주크 아나톨리아의 주둔군과 보조 셀주크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비교적 소규모 병력이었지만, 그들의 도착은 여전히 무슬림 주민들의 대탈출을 촉발했다. 이전 킷부카의 원정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카이로까지 남쪽으로 도망쳤다.
몽골 기병대는 하마를 지나 다마스쿠스로 진격하며 북부 시리아를 약탈했다. 그들의 기동성과 파괴력은 여전히 공포스러웠다. 에드워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남쪽으로 진격했다. 그는 카쿤을 공격하고 맘루크의 보급선을 차단하려 했다. 그러나 바이바르스는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다마스쿠스 주변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방어 태세를 유지했다. 몽골군은 알레포 지역을 약탈했지만 맘루크의 주력군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을 꺼렸다. 겨울이 다가오자 몽골 기병대는 결국 퇴각했다. 유목민 전사들에게 겨울 원정은 부담스러웠고, 아바카 칸도 시리아를 점령할 의도는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약탈과 맘루크 세력 약화였지, 영토 확보가 아니었다.
에드워드는 몽골군의 철수로 인해 고립되었다. 그의 군대는 도시를 포위할 만큼 강력하지 못했다. 몇 차례 기동 후 그는 해안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은 명확했다. 유럽에서 대규모 증원군이 오지 않는 한, 에드워드는 바이바르스에 대항할 수 없었다. 영국에서는 기사 몇 명, 그 중 사보이의 오토 드 그랑송 같은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왔지만, 유의미한 증원은 키프로스의 헨리 2세가 보낸 병력뿐이었다. 헨리는 성벽을 강화하고 동생 티레의 아말릭이 이끄는 군대를 파견했다.
1271년 바이바르스는 함대를 건조한 후 십자군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키프로스에 상륙을 시도했다. 그의 전략은 휴 3세와 그의 함대를 아크레에서 끌어내어 섬을 정복하고 에드워드와 십자군을 성지에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바이바르스는 17척의 전함을 기독교 선박으로 위장하고 리마솔을 공격했다. 그러나 뒤따른 해전에서 함대가 리마솔 해안에서 파괴되었고 바이바르스의 군대는 격퇴당했다.
이 승리 후 에드워드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예루살렘을 되찾을 수 있는 병력을 만들려면 기독교 국가 내부의 불안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휴와 키프로스의 이벨린 가문의 비협조적인 기사들 사이를 중재했다. 중재와 병행해 에드워드와 휴는 바이바르스와의 휴전 협상을 시작했다. 1272년 5월, 카이사리아에서 특이한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10년 10개월 10일 동안의 휴전이었다. 이 협정은 아크레, 티레, 시돈, 아틀릿 같은 주요 십자군 해안 거점의 보존을 보장했다. 순례, 상업, 명확한 영토 경계에 대한 조항이 포함되었다.
표면적으로는 관대한 제안이었지만, 실제로는 바이바르스의 전략적 계산이었다. 그는 십자군 세력이 자연스럽게 쇠퇴하도록 내버려두고, 그 사이 내부 통합과 군사력 강화에 집중할 계획이었다. 바이바르스는 에드워드를 위협으로 평가했다. 젊은 왕세자는 분명 몇 년 내에 더 큰 원정대를 이끌고 돌아올 수 있었고, 그의 능력과 헌신은 명백했다. 휴전은 양측 모두에게 시간을 주었다.
협정 직후, 에드워드의 동생 에드먼드는 1272년 7월 5일 영국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협정이 지켜질지 확인하기 위해 남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달, 에드워드는 생명을 위협하는 암살 시도의 표적이 되었다.
1272년 6월 16일 밤, 아크레의 왕궁에서 에드워드와 그의 아내 카스티야의 엘레노어가 잠들어 있을 때, 한 첩자가 만나자고 요청했다. 템플 기사단의 티레 연대기에 따르면, 이 첩자는 기독교로 개종한 무슬림으로, 에드워드가 성지에 도착한 직후부터 그를 섬겨왔다. 에드워드는 침대에서 일어나 속옷만 입은 채 첩자를 들여보냈다.
연대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사라센인이 그를 만나자마자 단검으로 그의 엉덩이를 찔러 깊고 위험한 상처를 입혔다. 에드워드 왕세자는 공격받았음을 느끼고 주먹으로 사라센인의 관자놀이를 강타해 그를 땅바닥에 쓰러뜨렸다. 그런 다음 에드워드 왕세자는 방 안 탁자에서 단검을 집어 사라센인의 머리를 찔러 죽였다."
그러나 왕세자는 아직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료에 따르면 암살자의 단검에는 독이 발라져 있었다. 암살 배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어떤 자료는 라믈라의 에미르가 보냈다고 하고, 다른 자료는 바이바르스가 직접 지시했다고 한다. 일부 전설은 시리아의 이스마일파 지도자, 즉 "산의 노인"으로 불리는 하샤신의 수장이 보냈다고 주장한다. 바이바르스는 이전에도 암살을 이용한 전력이 있었다. 1260년 아인 잘루트 전투 후 술탄 쿠투즈가 암살당했을 때 바이바르스가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고, 최근에는 트리폴리의 마지막 영주 중 한 명을 몽골과의 회담에서 돌아오는 길에 제거하려고 하샤신을 고용한 적도 있었다.
에드워드의 치료에 대해서도 여러 이야기가 전한다. 가장 유명한 전설은 그의 아내 엘레노어가 입으로 독을 빨아냈다는 것이다. 이는 1세기 후에 처음 등장한 이야기로, 낭만적이지만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초기 자료들은 에드워드의 충성스러운 장교인 사보이 출신의 오토 드 그랑송이 독을 빨아냈다고 기록한다. 어떤 자료는 영국인 외과의사가 호출되어 감염된 살을 도려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엘레노어가 울기 시작하자 짜증난 외과의사가 그녀를 내보내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지금 그녀가 우는 것이 나중에 온 영국이 우는 것보다 낫다는 이유에서였다. 독이 남아 있었거나 템플 기사단의 의료 치료가 서툴렀는지 감염이 발생했다.
회복 기간 동안 에드워드는 성지의 미래에 대해 깊이 성찰했다. 그는 십자군 국가들이 내부 분열과 리더십 부재로 인해 스스로 붕괴하고 있음을 목격했다. 군사적 열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의지의 상실이었다. 아크레의 귀족들은 더 이상 성지를 지키겠다는 결의가 없었다. 그들은 이탈리아로 돌아가거나 키프로스로 이주할 계획만 세우고 있었다.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은 명목상 성지 수호를 외쳤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재산과 특권을 보존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성직자들은 신학 논쟁에 몰두했고, 상인들은 이익 극대화에만 관심이 있었다.
에드워드는 아크레에 소규모 영국 수비대를 배치하는 것 외에는 우트르메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1272년 9월 8일, 여전히 회복 중이던 에드워드는 예루살렘에 대한 직접 공격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곧 그는 아버지 헨리 3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헨리는 1272년 11월 16일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보다 앞서 에드워드는 아들 존이 사망했다는 비보도 받았다.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에드워드는 영국의 왕이 되었고, 그의 우선순위는 완전히 바뀌었다. 1272년 9월 27일, 에드워드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아크레를 떠났다. 그는 동방에서 16개월을 싸운 후였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에드워드의 십자군은 우트르메르를 위해 거의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막대한 부채를 초래했다. 추정치는 100,000파운드를 넘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에드워드는 시칠리아로 향했고, 그곳에서 상당 기간 머물며 회복했다. 그는 1273년 이탈리아, 가스코뉴, 파리를 거쳐 귀국 여정을 시작했다. 에드워드는 마침내 1274년 여름 영국에 도착했고, 1274년 8월 19일 웨스트민스터에서 잉글랜드 왕으로 대관식을 가졌다.
흥미롭게도 에드워드에게는 테오발도 비스콘티가 동행했는데, 그는 1271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되었다. 그레고리오는 1274년 리옹 공의회에서 새로운 십자군을 요청했지만, 아무 성과도 없었다. 유럽의 군주들은 이미 다른 것에 관심을 돌렸다. 신성로마제국은 1250년 프리드리히 2세의 죽음 이후 대공위 시대를 겪고 있었다. 독일의 루돌프 1세는 10년 넘게 십자가를 짊어졌다고 선언했지만 지역 정치에 몰두하다 1291년 7월 15일 사망했다. 프랑스의 필립 4세는 1285년 10월 5일 왕이 되었고 1314년 11월 29일까지 통치했지만, 그의 관심은 성지가 아니라 플랑드르와 교황청과의 갈등이었다.
휴전 협정은 일시적인 평화를 가져왔다. 1272년부터 1277년 바이바르스가 독살로 갑자기 사망할 때까지 5년 동안, 역사 기록에는 맘루크 군대에 의한 요새화된 지역이나 도시 중심지의 중대한 상실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십자군이 방어를 강화하고 요새를 수리하며 지중해 무역로를 통한 경제 활동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처형 집행 유예였을 뿐이다.
바이바르스의 후계자들은 그의 정책을 계속했다. 1289년 4월, 술탄 칼라운의 아들이 이끄는 맘루크 군대는 트리폴리를 포위했다. 트리폴리 백국의 마지막 남은 영토였던 이 도시에는 수만 명의 기독교 난민이 가득했다. 도시는 함락되었고, 성인 남성 전체가 학살당했으며 여성과 아이들은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1291년에 왔다. 1290년 8월, 이탈리아에서 온 십자군들이 아크레에 도착했다. 그들의 지휘관들은 그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이교도와 싸우러 왔다며 무슬림 상인과 시민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8월 말, 폭동이 발생했고 그들은 무차별적으로 무슬림을 학살했다. 수염이 있는 사람은 모두 무슬림이라고 판단해 많은 기독교인도 공격당했다. 당국이 할 수 있는 일은 몇몇 무슬림을 구출해 성으로 피신시키는 것뿐이었다. 주동자들은 체포되었지만, 피해는 이미 발생했다.
술탄 칼라운은 아크레의 모든 기독교인을 죽이겠다고 맹세하며 카이로에서 군대를 이끌고 진군했지만, 병에 걸려 1290년 11월 10일 사망했다. 그의 아들 알-아슈라프 칼릴이 뒤를 이었다. 날씨 때문에 공격이 지연되었지만, 마침내 칼릴은 카이로에서 출발했고 1291년 4월 6일 아크레 포위전이 시작되었다.
맘루크 군대는 십자군 병력을 크게 압도했다. 칼릴은 시리아 전역에서 군대를 소집했다. 다마스쿠스(라진이 이끔), 하마(알-무자파르 타카이 아드-딘이 이끔), 트리폴리(빌반이 이끔), 알-카라크(바이바르스 알-데와다르가 이끔)에서 병력이 왔다. 상당수는 자원병이었다. 군대에는 맘루크 제국 전역의 요새에서 끌어온 대규모 포병대가 포함되었다. 하마는 "승리자"라는 거대한 투석기를 보냈다. "분노한 자"라는 또 다른 거대 투석기도 있었다. "검은 황소"이라 불리는 소형 공성 기계들도 있었다.
십자군의 원조 요청은 거의 성과가 없었다. 영국은 사보이의 오토 드 그랑송을 포함한 몇 명의 기사를 보냈다. 유일하게 주목할 만한 증원은 키프로스의 헨리 2세에게서 왔다. 그는 성벽을 강화하고 동생 티레의 아말릭이 이끄는 군대를 보냈다. 튜튼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 부르하르트 폰 슈반덴은 갑자기 사임하고 유럽으로 떠났다. 그는 콘라드 폰 포이히트방엔에게 승계되었다. 떠난 유일한 주요 집단은 제노바인들로, 칼릴과 별도 조약을 체결했다. 많은 여성과 아이들이 3월에 아크레에서 키프로스로 대피했다.
맘루크의 진지는 도시 성벽에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한쪽 해안에서 다른 쪽 해안까지 펼쳐졌다. 포위전은 6주간 지속되었다. 중세 학자 토마스 애즈브리지는 그의 저서 『십자군: 성지를 위한 전쟁』에서 맘루크의 공격이 "규모 면에서 엄청났고, 강도 면에서 끊임없었다"며 "십자군 전쟁 분야에서 아직 목격된 적 없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맘루크는 밤낮으로 작업하며 포격을 이어갔다.
외벽이 여러 곳에서 붕괴되었다. 군사 수도회들은 일시적으로 맘루크를 격퇴했지만, 3일 후 내벽이 무너졌다. 헨리 왕은 탈출했지만 대부분의 방어자와 시민들은 전투에서 죽거나 노예로 팔렸다. 생존한 기사들은 요새로 후퇴해 10일간 저항했지만, 맘루크가 돌파했다.
1291년 5월 18일, 아크레가 함락되었다. 템플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 기욤 드 보주는 성 안토니오 문을 방어하다 중상을 입고 사망했다. 기독교 목격자는 "아크레 사람들의 눈물과 슬픔을 적절히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기록했다. 루돌프 폰 주헴에 따르면(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아크레와 다른 장소에서 거의 106,000명이 살해되거나 포로가 되었고, 200,000명 이상이 그곳에서 탈출했다."
칼릴은 도시 요새의 완전한 파괴를 명령했다. 그는 미술품과 건축물 조각들을 카이로에서 재사용하기 위해 제거했고, 레반트에 남은 몇 안 되는 라틴 저항 거점을 점령하기 위해 진군했다. 1291년 8월까지 시돈, 티레, 베이루트 도시들과 토르토사와 아틀릿의 템플 기사단 성들이 모두 함락되었다. 칼릴은 철저하게도 해안을 따라 과수원과 관개 수로를 파괴하도록 명령했다. 미래의 십자군이 그것들로부터 이익을 얻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1099년에 수립된 라틴 동방 십자군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성 요한 기사단은 많은 난민들이 키프로스의 안전으로 탈출하는 것을 도운 공로를 인정받았고, 그곳에 새로운 본부를 설립했다(1306년 로도스로 이전하기 전). 템플 기사단도 섬을 새로운 본부로 삼았고, 북부 레반트의 킬리키아와 함께 이 지역에서 유일한 기독교 거점이 되었다.
아크레의 함락은 예루살렘을 향한 십자군의 종말을 의미했다. 이후 성지를 되찾기 위한 효과적인 십자군은 일어나지 않았다. 새로운 십자군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히 흔했지만, 1291년까지 다른 이상들이 유럽 군주들과 귀족들의 관심과 열정을 사로잡았다. 교황의 성지 되찾기 원정을 일으키려는 격렬한 노력조차 거의 반응을 얻지 못했다.
에드워드 1세는 영국으로 돌아가 강력한 왕이 되었다. 그는 1282-1283년 웨일스를 정복하고 그곳에 여러 성을 건설했다. 그 중 하나인 카나번 성에서 그의 아들, 훗날의 에드워드 2세가 태어났고, 이는 왕의 아들이 "웨일스 공"이 되는 전통을 시작했다. 그는 스코틀랜드와 긴 전쟁을 치렀으며, 1296년 스코틀랜드를 침공해 스쿤의 돌을 가져갔다. 그는 영국 법 체계를 개혁해 "영국의 유스티니아누스"로 불렸다.
그러나 그는 평생 성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1307년 7월 7일, 68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직전, 그는 스코틀랜드와의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죽음의 침상에서 아들 에드워드 2세에게 자신의 심장을 성지로 가져가달라고 부탁했다. 어떤 이야기는 그의 뼈를 끓여 살을 제거하고 뼈를 성지로 가져가라고 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영국으로 운반되기를 원했다는 설도 있다. 물론 이 유언들은 지켜지지 않았다.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과 국내 문제로 바빴고, 성지는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후였다.
9차 십자군이 실패한 이유는 여러 층위에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병력 규모가 턱없이 부족했다. 1,000명의 병력으로 맘루크 제국에 맞선다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도전이었다. 맘루크는 20,000~40,000명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고, 그 중 상당수가 어린 시절부터 전투 훈련을 받은 정예 맘루크 전사들이었다. 수적 열세는 전술적 우수성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격차였다.
둘째, 유럽의 지원 부족이 결정적이었다. 13세기 후반, 유럽 군주들은 성지보다 자국 문제에 더 관심이 있었다. 프랑스는 플랑드르와 잉글랜드와의 영토 분쟁에, 신성로마제국은 대공위 시대의 내부 분열에, 교황청은 정치적 생존에 집중했다. 십자군 운동을 추동했던 종교적 열정도 식어가고 있었다. 알비파 십자군(1209-1229)과 같은 이단 심문, 교회 내부 부패, 교황청의 정치 개입으로 인해 교황의 도덕적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셋째, 맘루크의 군사적, 전략적 우월성이 있었다. 바이바르스는 단순한 전사가 아니라 뛰어난 전략가였다. 그는 십자군 국가들을 하나씩 고립시키고 각개격파하는 체계적인 전략을 구사했다. 그의 군대는 기동성, 훈련, 조직에서 십자군을 압도했다. 전비둘기 통신망, 해군력 재건, 베두인 부족들과의 동맹 등 그의 개혁은 맘루크를 당대 가장 강력한 군사력으로 만들었다.
넷째, 십자군 국가 내부의 분열이 치명적이었다. 군사 수도회들 간의 경쟁, 이탈리아 상업 공화국들 간의 충돌, 지역 귀족들의 이기주의는 통일된 방어를 불가능하게 했다. 아크레는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서로 경쟁하는 여러 파벌의 집합체였다. 이는 바이바르스의 중앙집권적 지휘 체계와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다섯째, 시대정신의 변화가 있었다. 13세기 말, 유럽은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었다. 봉건제는 약화되고 있었고, 왕권은 강화되고 있었다. 상업과 도시의 성장은 새로운 경제 구조를 만들어냈다. 지식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재발견하고 있었고, 대학들이 설립되고 있었다. 십자군 이념은 이 새로운 세계에서 점점 더 시대착오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9차 십자군의 의미는 단순한 군사적 실패를 넘어선다. 이는 중세 유럽이 새로운 시대로 전환하는 과정을 상징한다. 십자군 운동은 유럽 사회를 200년 가까이 지배한 이념이었다. 그것은 종교적 열정, 기사도 정신, 교황의 권위, 봉건 질서가 결합된 독특한 현상이었다. 십자군 운동은 유럽을 하나로 묶는 초국가적 사명이었고, 교황을 정점으로 한 기독교 세계의 통일성을 상징했다.
9차 십자군의 실패는 이 모든 것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교황은 더 이상 유럽 군주들을 십자군으로 동원할 수 없었다. 기사도는 점차 형식적인 의례로 변모하고 있었다. 봉건적 충성심은 민족적 정체성에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14세기로 접어들면서 유럽은 민족 국가의 시대, 왕권의 강화, 세속적 가치의 부상을 경험하게 된다.
흥미롭게도 십자군 운동의 실패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십자군은 성지를 잃었지만, 그 과정에서 동방과의 접촉을 통해 막대한 지적, 문화적, 기술적 자산을 얻었다. 아랍어 문헌의 번역을 통해 고대 그리스 철학이 유럽으로 유입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유클리드,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작들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 지식인들에게 전해졌다. 이는 스콜라 철학의 발전과 대학의 성장을 촉진했다.
십자군은 또한 향신료, 비단, 면직물 같은 동방 상품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다. 이는 지중해 무역의 폭발적 성장을 가져왔고,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같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부상을 촉진했다. 상업 혁명은 자본주의의 초기 형태를 만들어냈고, 은행업, 복식부기, 신용 시스템 같은 금융 혁신을 가져왔다.
군사 기술도 발전했다. 십자군은 동방의 공성 기술, 요새 설계, 화약 무기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다. 이는 유럽 성곽 건축과 군사 전술의 발전에 기여했다. 십자군이 건설한 크락 드 슈발리에 같은 거대 요새들은 중세 성곽 건축의 정점을 보여준다.
문화적으로도 십자군은 유럽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기사도 문학, 영웅 서사시, 로맨스 이야기들이 십자군을 소재로 쏟아져 나왔다. 리처드 1세와 살라딘의 대결은 전설이 되었고, 성배 전설은 아서왕 이야기와 결합되었다. 이 문학 전통은 중세 후기와 르네상스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더 근본적으로, 십자군은 유럽인들의 세계관을 확장시켰다. 그들은 처음으로 대규모로 지중해를 건너 낯선 땅을 경험했다. 이는 지리적 발견의 시대를 위한 정신적 준비였다. 15세기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탐험가들은 종종 십자군의 언어를 사용하며 자신들의 항해를 정당화했다. 콜럼버스조차 예루살렘을 해방시키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 자신의 목표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9차 십자군은 웅장한 서사시가 아니라 쓸쓸한 에필로그였다. 한 용감한 전사가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려 했지만, 시대는 이미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에드워드의 원정은 개인의 용기와 결단력이 때로는 역사의 거대한 힘 앞에서 무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1,000명의 병력으로 맘루크 제국에 맞선 것은 돈키호테가 풍차에 맞선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이었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실패는 명예로운 것이었다. 그는 유럽의 다른 군주들이 외면한 의무를 혼자서라도 이행하려 했다.
동시에 9차 십자군은 한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장송곡이었다. 십자군 시대는 끝났고, 유럽은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십자군 원정을 통해 유럽은 동방의 지식, 기술, 문화를 흡수했고, 이는 르네상스의 토양이 되었다. 성지를 잃었지만, 유럽은 그 과정에서 자신을 재발견했다.
1291년 아크레 함락 후, 십자군 국가는 완전히 소멸했다. 일부 기사단은 키프로스, 로도스, 몰타로 철수했고, 거기서 몇 세기 더 존속했다. 그러나 성지는 영원히 잃었다. 교황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십자군을 요청했지만, 진지한 반응은 없었다. 유럽의 에너지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백년전쟁, 장미전쟁, 이탈리아 전쟁 등 유럽 내부의 충돌이 군사적 자원을 소진시켰다.
15세기에 오스만 제국이 부상하면서 십자군의 언어는 다시 사용되었지만, 그것은 다른 맥락이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1456년 베오그라드 포위전, 1683년 빈 포위전 등에서 십자군적 수사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영토 방어 전쟁이었지, 성지 회복 운동이 아니었다. 십자군 정신은 변질되어 대항해시대의 정복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에드워드 1세의 유산은 복잡하다. 그는 영국에서 강력한 왕으로 기억된다. 웨일스를 정복하고, 의회를 발전시키고, 법을 개혁한 지도자. 그러나 스코틀랜드에서 그는 "잔인한 에드워드"로 기억된다. 윌리엄 월리스를 처형하고, 스코틀랜드를 침략한 침략자. 그의 십자군 경험은 종종 잊혀진다. 그것은 그의 통치에서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그러나 9차 십자군의 진정한 의미는 에드워드 개인의 성취나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가 끝나가는 것을 목격한 세대의 이야기다. 에드워드와 함께 아크레에 있던 사람들은 200년 십자군 운동의 마지막 참가자들이었다. 그들이 떠난 후, 성지는 다시는 기독교 세력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역사의 전환점에 서 있었고, 한 시대의 마지막 장을 쓰고 있었다.
템플 기사단의 운명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291년 아크레 함락 후 키프로스로 철수한 템플 기사단은 존재 이유를 잃었다. 성지를 지킨다는 명분 없이, 그들은 단지 부유한 은행가 집단이 되었다. 1307년, 프랑스의 필립 4세는 그들을 체포하고 이단으로 고발했다. 1312년, 교황은 기사단을 해체했다. 그랜드 마스터 자크 드 몰레는 1314년 화형당했다. 성지를 지키기 위해 창설된 기사단은 성지가 상실되자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이것이 9차 십자군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다. 역사는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흘러간다. 시대의 변화는 거스를 수 없다. 에드워드는 용감했지만, 용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는 헌신적이었지만, 헌신만으로는 역사를 바꿀 수 없었다. 그는 혼자였고, 혼자서는 제국을 이길 수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9차 십자군은 인간 정신의 불굴성을 보여준다. 에드워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갔다. 그는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싸웠다. 그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받고도 서약을 지켰다. 이것은 어리석음일 수도 있고, 고집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원칙에 대한 헌신이고, 신념에 대한 충성이다.
역사가들은 종종 9차 십자군을 각주로 취급한다. 8차 십자군의 연장선이거나, 아크레 함락의 전조로.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것은 한 시대의 마지막 순간이다. 햇빛이 지기 전 가장 강렬하게 빛나듯, 십자군 운동은 끝나기 전 마지막으로 빛났다. 에드워드와 그의 1,000명의 병사들은 그 빛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21세기의 우리는 9차 십자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중세의 먼지 낀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신념과 현실의 충돌에 관한 이야기다. 이상과 실용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다. 개인의 용기와 역사적 필연성의 대결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한 시대가 어떻게 끝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시대는 갑자기 끝나지 않는다. 어느 날 누군가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시대는 서서히 저물어간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옛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택한다. 옛 이상은 점점 더 공허해 보이고, 옛 영웅들은 점점 더 시대착오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어느 순간, 돌이켜보면 이미 시대가 바뀌어 있다.
9차 십자군은 바로 그 순간의 기록이다. 에드워드가 아크레에 있었을 때, 십자군 시대는 이미 끝나가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막으려 했지만 할 수 없었다. 그가 떠났을 때, 그와 함께 십자군 정신도 떠났다. 20년 후 아크레가 함락되었을 때,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과정의 마지막 단계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슬픈 이야기만은 아니다. 한 시대가 끝나면 다른 시대가 시작된다. 십자군 시대가 끝났지만,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봉건제가 쇠퇴했지만, 근대 국가가 부상했다. 종교적 열정이 식었지만, 인본주의가 꽃피었다. 성지를 잃었지만,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다.
에드워드의 실패는 유럽의 실패가 아니었다. 그것은 유럽의 변화였다. 유럽은 더 이상 성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유럽은 새로운 목표, 새로운 꿈, 새로운 야망을 찾았다. 그리고 그것이 역사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옛것이 죽어야 새것이 태어날 수 있다.
9차 십자군은 옛것의 죽음이었다. 그것은 아름답고, 슬프고, 필연적이었다. 에드워드는 그것을 막으려 했지만, 역사는 그를 넘어 흘러갔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것은 한 시대에 대한 장엄한 추도사였고, 잊혀져가는 이상에 대한 마지막 경의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때로는 싸움 자체가 목적이고, 노력 자체가 의미다. 승리가 아니라 헌신이 우리를 정의한다.
이것이 9차 십자군의 진정한 유산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시대가 어떻게 끝나는지, 이상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영웅들이 어떻게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우리에게 인간 정신의 불굴성을, 원칙에 대한 헌신을, 끝까지 싸우는 용기를 보여준다. 에드워드와 그의 1,000명의 병사들은 패배했지만, 그들은 명예롭게 패배했다. 그리고 그것이 때로는 승리보다 더 중요하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A0%9C9%EC%B0%A8_%EC%8B%AD%EC%9E%90%EA%B5%B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