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경쟁을 승자와 패자의 문제로 생각한다. 누가 더 빨리 달리는가, 누가 더 높은 점수를 받는가, 누가 더 많은 것을 성취하는가. 하지만 현대 사회에는 이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경쟁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누가 더 큰 피해자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은밀하고도 격렬한 다툼이다. 이 기묘한 현상은 우리 시대의 가장 역설적인 문화적 특징 중 하나로, 겉으로는 공감과 연대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고통의 위계를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피해자 지위를 둘러싼 경쟁의 시작은 그 자체로는 정당한 사회적 각성에서 비롯되었다. 20세기 중반 이후 인권운동, 여성운동, 소수자 권리 신장 운동은 오랫동안 침묵 속에 묻혀 있던 구조적 억압과 부정의를 드러냈다. 억압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 그들의 경험을 인정하는 것은 더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정당한 인식의 전환이 점차 왜곡되면서, 피해 경험 자체가 일종의 도덕적 권위와 사회적 자본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전환의 핵심에는 '피해자성'이 부여하는 독특한 힘이 있다. 피해자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동정을 받는 것을 넘어선다. 그것은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것이며, 비판으로부터의 면책특권을 얻는 것이고, 자신의 주장에 특별한 정당성을 부여받는 것이다. 피해자의 말은 의심받아서는 안 되고, 피해자의 감정은 존중되어야 하며, 피해자의 요구는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피해자 지위는 더 이상 불운한 처지가 아니라 오히려 탐나는 위치가 되었다.
피해자 경쟁의 역학은 일종의 '고통의 올림픽'처럼 전개된다. 한 집단이 겪은 차별과 고통이 인정받으면, 다른 집단들은 자신들의 고통이 더 깊고, 더 오래되었으며, 더 구조적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미묘한 서열화 논리가 작동한다. 누군가의 고통을 인정하는 것이 곧 자신의 고통을 축소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따라서 공감은 제로섬 게임이 된다. 한정된 사회적 관심과 자원, 도덕적 정당성을 두고 피해자들이 서로 경쟁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략은 점점 정교해진다. 가장 기본적인 전략은 '교차성'의 강조다. 단일한 정체성보다는 복수의 억압받는 정체성을 가진 것이 더 강력한 피해자 지위를 부여한다. 여성이면서 동시에 유색인종이고, 성소수자이며, 장애를 가진 사람의 목소리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큰 무게를 갖는다. 이것이 원래 교차성 이론의 의도였는지와는 별개로, 실제로는 고통의 점수를 합산하는 계산법처럼 작동하기도 한다.
또 다른 전략은 '트라우마 서사'의 극대화다. 개인적 고통 경험을 최대한 극적으로 표현하고, 그것을 구조적 억압의 증거로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제 고통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포장하느냐다. SNS와 미디어는 이러한 서사를 증폭시키는 완벽한 무대를 제공한다. 한 줄의 트윗, 한 장의 사진, 몇 분짜리 영상이 누군가를 순식간에 '인정받는 피해자'의 위치에 올려놓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피해의 기준은 계속 낮아진다. 처음에는 명백한 폭력, 차별, 억압이 피해로 인정받았다면, 이제는 '미시공격', '무례함', '불편함', 심지어 '잠재적 위험'까지도 피해의 범주에 포함된다. 누군가의 말투, 시선, 침묵조차도 폭력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확장은 한편으로는 미묘한 형태의 차별을 가시화했다는 의의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불편함을 피해로 규정하면서 진짜 심각한 피해와 사소한 불쾌감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었다.
피해자 경쟁은 언어의 인플레이션을 동반한다. '불편하다'는 말은 '폭력적이다'가 되고, '의견 차이'는 '공격'이 되며, '비판'은 '혐오'가 된다. 점점 더 강한 표현을 사용해야만 자신의 피해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화폐가치가 하락할 때 더 큰 액면가의 지폐가 필요한 것과 같다. 결국 모든 사람이 '트라우마', '학대', '폭력'이라는 단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게 되고, 정작 진짜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의 호소는 언어의 소음 속에 묻혀버린다.
흥미롭게도 이 경쟁은 피해자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가 아닌 사람들, 특히 역사적으로 특권을 누려온 집단의 구성원들도 이 게임에 참여하고자 한다. 그들은 자신들 역시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경쟁에 뛰어든다. 남성들은 남성도 피해자라고 말하고, 다수 인종은 역차별을 호소하며, 경제적 기득권층은 자신들이 부당하게 비난받고 있다고 항변한다. 이들의 주장 중 일부는 실제로 정당한 문제제기를 담고 있지만, 많은 경우 기존의 권력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방어 기제로 작동한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피해자를 자처하는 사회에서는 역설적으로 진정한 피해자가 사라진다. 피해자성이 보편화되면 그것은 더 이상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모두가 피해자라면 아무도 피해자가 아닌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과정에서 실제로 심각한 피해를 겪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상대화되고 희석된다는 점이다. 체계적인 인종차별을 겪는 사람의 고통과 커피숍에서 무례한 대우를 받은 사람의 불쾌감이 같은 선상에서 비교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피해자 경쟁은 연대의 가능성을 파괴한다. 원래 억압받는 이들의 연대는 더 큰 힘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피해자 지위를 둘러싼 경쟁 구도에서는 다른 집단의 고통을 인정하는 것이 곧 자신의 고통을 축소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따라서 각 집단은 자신의 고유한 피해를 강조하며 고립되고, 서로를 잠재적 경쟁자로 바라본다. 원래 같은 편이어야 할 사람들이 누가 더 큰 피해자인지를 두고 다투는 동안, 실제로 억압을 유지하는 구조는 온전하게 보존된다.
이러한 역학은 개인의 심리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 피해자 정체성에 과도하게 의존하게 되면, 자신을 끊임없이 약하고 상처받은 존재로 규정하게 된다. 이것은 일시적인 자기보호 전략을 넘어 정체성의 핵심이 되어버린다. 피해자로 인정받는 것이 자존감의 원천이 되고,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 오히려 정체성의 상실로 느껴지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한다. 치유는 피해자 지위의 상실을 의미하기에 무의식적으로 회피되고, 회복력은 오히려 약점이 된다.
더 나아가 이 경쟁은 사회적 담론을 왜곡시킨다. 정책이나 제도에 대한 논의가 누구의 피해가 더 중요한가를 겨루는 싸움으로 변질된다. 합리적 토론은 불가능해지고, 모든 의견 교환은 피해 경험의 진정성을 검증하는 과정이 된다. "당신은 그 경험이 없으니 말할 자격이 없다"는 논리는 대화를 차단하고, 결국 각자의 울타리 안에서만 공명하는 메아리방이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첫 번째 단계는 피해 경험의 인정과 피해자 정체성의 고착을 구분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고통을 인정하고 공감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사람을 영원히 피해자로만 규정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억압이 될 수 있다. 진정한 공감은 상대를 온전한 인간으로, 고통받는 동시에 회복력을 가진 주체로 바라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고통을 서열화하려는 충동을 경계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고통이 더 크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고통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공감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며, 한 사람의 피해를 인정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피해를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양한 형태의 고통을 인정하고 그것의 맥락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세 번째는 피해자성을 넘어선 정체성과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겪은 고통 이상의 존재다. 회복력, 연대, 창조성, 희망은 피해 경험만큼이나 중요한 인간 경험의 일부다. 피해를 인정받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것을 극복하고 변화를 만들어내는 행위자로서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것이 진정한 해방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구조적 문제와 개인적 경험을 연결하되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개인의 고통 서사는 감동적이고 강력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복잡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체계적인 분석, 증거 기반의 정책, 집단적 행동이 필요하다. 피해자 경쟁은 종종 이러한 실질적 변화로부터 관심을 분산시키고, 상징적 인정의 영역에만 머물게 만든다.
피해자의 경쟁이라는 현상은 우리 시대의 깊은 모순을 드러낸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공감과 인정을 중시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동시에 그 공감과 인정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피해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 정당한 운동이 피해 자체를 경쟁하는 왜곡된 형태로 변질되었다. 이 역설을 인식하는 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정의롭고 공감하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피해자를 가리는 경쟁이 아니라 함께 치유하고 변화를 만들어가는 연대다. 각자의 고통을 무기로 삼는 대신, 그것을 서로를 이해하는 다리로 삼을 때, 우리는 고통의 위계가 아닌 공동의 인간성을 발견할 수 있다. 피해자 경쟁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피해자가 아닌 온전한 인간이 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