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기억하는 정복자는 흔히 전장에서 적을 무찌른 영웅이거나, 광대한 제국을 건설한 군주이다. 그러나 13세기 유라시아 대륙을 뒤흔든 몽골 제국의 역사 속에서 바투 칸은 그 어느 쪽에도 완전히 부합하지 않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은 서방 원정의 총사령관이었지만, 정작 전투의 전략과 전술을 수립한 것은 명장 수부타이였다. 그는 대칸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지만, 몽골 제국의 대칸을 선택하는 가장 강력한 왕조 건설자였다. 이러한 모순은 바투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열쇠이자, 그가 몽골 제국사에서 차지하는 특별한 의미를 드러낸다.
1205년경, 바투는 칭기즈 칸의 장남 주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출생은 축복보다는 논란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주치는 어머니 보르테가 메르키트족에게 납치되었다가 구출된 직후 태어났기 때문에, 칭기즈 칸의 친아들인지에 대한 의혹이 평생 따라다녔다. 차가타이는 공개적으로 주치를 메르키트의 사생아라고 모욕했고, 이 혈통 문제는 주치 가문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피터 잭슨 교수가 지적했듯이, 이러한 혈통 의혹은 바투의 정치적 행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으며, 그가 대칸 자리를 직접 추구하지 않고 킹메이커의 역할을 선택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몽골의 전통에 따라 장남은 아버지로부터 가장 먼 땅을 물려받았고, 주치는 킵차크 초원과 볼가강 유역을 배정받았다. 1227년 칭기즈 칸이 사망했을 때, 주치 또한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주치의 장남 오르다는 형으로서의 권리를 양보하고, 차남 바투가 주치 울루스의 통치권을 계승했다. 당시 주치 울루스는 불과 4,000명의 군대를 보유한 몽골 제국의 가장 먼 변방이었다. 그러나 마리 파베로 교수가 강조했듯이, 이 먼 변방은 바투에게 위기이면서 동시에 기회였다. 제국의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황족들의 모욕과 감시에서 벗어나 독자적 권력 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했다.
1234년 금나라가 멸망한 후, 오고타이 칸은 서방 원정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1235년 쿠릴타이에서 바투는 서방 원정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명예로운 임명이었지만, 동시에 위험한 도전이기도 했다. 원정군에는 오고타이의 아들 귀위크, 툴루이의 아들 몽케, 차가타이의 아들 부리, 그리고 명장 수부타이를 포함한 15만 명 이상의 대군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투는 총사령관이라는 직함을 받았지만, 황족 사촌들과의 관계는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1236년 몽골군은 볼가강을 건너 키예프 루시의 공국들을 향해 진격했다. 러시아의 도시들은 몽골군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1237년 랴잔을 시작으로 수많은 러시아 도시들이 함락되었다. 그러나 원정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코젤스크 포위전에서는 7주나 허비하며 상당한 병력 손실을 입었고, 이는 바투의 군사적 능력에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수부타이의 원사 전기에 따르면, 실제 전략적 결정의 상당 부분은 이 노련한 장군이 담당했다.
더 큰 문제는 원정 중 발생한 황족들 간의 갈등이었다. 차가타이의 아들 부리는 주치 가문을 공개적으로 모욕했고, 귀위크는 이에 동조했다. 한 술자리에서 귀위크는 바투를 늙은 여자 같다고 비웃었다. 1240년 키예프 점령 후 승전 축하연에서는 누가 먼저 건배를 할 것인가를 두고 시비가 붙었다. 귀위크는 자신이 대칸의 아들이므로 바투보다 우선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모욕은 바투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바투는 오고타이 칸에게 이를 보고했고, 분노한 오고타이는 귀위크를 소환했다. 피터 잭슨의 연구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바투는 오고타이 가문 및 차가타이 가문과 회복할 수 없는 원한을 맺게 되었다.
1241년 4월, 몽골군은 세 갈래로 나뉘어 동유럽을 침공했다. 북로군은 폴란드를 공격하여 레그니차 전투에서 승리했고, 본대는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헝가리로 진격했다. 4월 11일, 모히 평원에서 바투와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헝가리의 벨러 4세와 격돌했다. 최근 학술 연구들, 특히 요제프 라슬로브스키와 스티븐 파우의 고고학적 연구는 이 전투의 실상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전투 초기, 바투는 셔요강 다리를 정면 공격했지만 헝가리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원사의 수부타이 전기는 바투가 수부타이의 우회 계획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조급하게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고 기록한다. 바투는 이 과정에서 30명의 바타르(근위대)를 잃었고, 그의 신임 장수 바카투가 전사했다.
몽골 측 사료들이 일치하여 증언하듯, 이 시점에서 바투는 철수를 고려했다. 그는 수부타이가 늦게 도착했다며 불평했다. 그러나 수부타이는 바투의 결정과 무관하게 자신은 페스트까지 진격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수부타이는 밤사이 별동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우회하여 헝가리군의 후방을 공격했다. 그의 부대가 헝가리군 진영 뒤에 나타나자, 헝가리군은 양쪽에서 포위당할 위기에 처했다. 수부타이는 의도적으로 포위망의 일부를 열어두었고, 헝가리군이 도주하기 시작하자 몽골 경기병들이 추격하며 대학살을 벌였다. 토마스 오브 스플리트의 기록에 따르면, 헝가리군 시체가 낙엽처럼 쌓였고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모히 전투는 결과적으로 몽골군의 대승이었지만, 그 과정은 바투의 군사적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동방 사료들은 몽골군도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고 기록하며, 특히 바투의 조급한 정면 공격이 불필요한 희생을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전투 후 바투와 수부타이 사이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바투는 처음에는 수부타이를 비난했지만, 결국 자신이 수부타이 덕분에 이긴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경험은 바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었다. 그는 자신이 뛰어난 전략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이후 군사 문제에서는 전문가들에게 의지하는 현명함을 보였다.
모히 전투 이후 몽골군은 헝가리와 폴란드를 초토화했다. 바투는 오스트리아까지 정찰을 보내고 더 서쪽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241년 12월, 오고타이 칸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몽골의 관습에 따라 새로운 대칸을 선출하기 위한 쿠릴타이가 소집되어야 했다. 수부타이를 비롯한 대부분의 장군들은 즉시 몽골 초원으로 귀환했지만, 바투는 볼가강 유역에 남아 미적거렸다. 이는 단순한 지체가 아니라 깊이 계산된 정치적 선택이었다.
바투는 귀위크가 차기 대칸이 되려는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었다. 오고타이는 유언으로 손자 시레문을 후계자로 지정했지만, 귀위크의 어머니 퇴레게네는 자신의 아들을 대칸으로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바투는 여러 차례 소집된 쿠릴타이에 불참함으로써 자신의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1246년, 귀위크는 바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제3대 대칸에 올랐다. 바투는 즉위식에 불참했고, 이복형 오르다를 대신 보냈다. 이는 공개적인 도전이었다.
귀위크 칸의 즉위 이후 바투는 사실상 반독립 상태로 자신의 왕국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마리 파베로의 연구가 밝힌 바에 따르면, 바투가 건설한 킵차크 칸국은 단순한 유목 국가가 아니라 정교한 정치·경제 시스템을 갖춘 제국이었다. 바투는 볼가강 하류에 사라이를 수도로 정했다. 사라이는 유목민이 건설한 도시로는 유례없는 규모로 성장하여, 전성기에는 유럽에서 가장 큰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바투는 정복한 러시아 공국들에 대해 직접 통치보다는 간접 지배 방식을 택했다. 공국의 대공들은 바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조공을 바치는 대가로 자치를 허용받았다. 파베로는 이러한 체제를 울루스 시스템이라 명명하며, 이것이 킵차크 칸국이 다른 몽골 칸국들보다 훨씬 오래 지속된 핵심 요인이라고 분석한다.
귀위크 칸과 바투의 관계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귀위크는 바투가 이란과 캅카스에 임명한 지방관을 자기 사람으로 교체했다. 1248년, 귀위크는 바투를 몽골 초원으로 소환했다. 바투는 귀위크의 진의를 의심하며 대규모 군대를 모아 천천히 동쪽으로 이동했다. 귀위크 역시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갔다. 몽골 제국은 내전 직전까지 치달았다. 그러나 1248년 4월, 귀위크가 급사하면서 위기는 해소되었다. 귀위크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바투가 직접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다만 이 적절한 시기의 죽음은 바투에게 제국의 권력 구조를 재편할 기회를 제공했다.
귀위크의 사망으로 바투는 칭기즈 칸 일족의 가장 연장자가 되었다. 이제 그는 제국의 차기 대칸을 결정하는 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정통성은 오고타이 가문에 있었지만, 바투는 이를 무시했다. 오고타이 가문과 차가타이 가문은 주치 가문을 모욕한 원수였다. 반면 툴루이 가문은 마찬가지로 오고타이로부터 압박을 받아온 동병상련의 관계였다. 툴루이의 미망인 소르칵타니 베키는 바투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녀의 아들 몽케를 바투에게 여러 차례 보냈다. 통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바투를 몽케가 직접 찾아가 예를 갖추었다.
1251년 여름, 케룰렌 강의 쿠데우 아랄에서 쿠릴타이가 개최되었다. 이곳은 1206년 칭기즈 칸이 쿠릴타이를 연 상징적 장소였다. 바투는 쿠릴타이 직전 베르케에게 10만 명의 병력을 주어 오르타르에 배치함으로써 차가타이 가문의 군사적 움직임에 대비했다. 쿠릴타이에서 몽케는 제4대 대칸으로 선출되었다. 오고타이 가문과 차가타이 가문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었다. 음모에 가담한 명장 부리와 엘지기데이는 체포되어 바투에게 보내져 처형되었다.
몽케의 즉위는 바투의 승리였다. 그는 대칸이 되지 않고도 대칸을 선택하는 킹메이커가 되었다. 몽케는 바투에게 대칸 자리를 제안했지만, 바투는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몽케에게 대칸이 될 것을 권고했다. 이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주치 가문의 혈통 문제로 인해 바투가 직접 대칸이 되기에는 정통성 시비가 불가피했다. 또한 몽골 초원에서 멀리 떨어진 킵차크 칸국을 통치하면서 동시에 제국 전체를 다스리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파베로가 지적했듯이, 바투는 자신의 왕국에서 사실상 독립적인 권력을 누리면서, 제국 전체에 대해서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중 전략을 택했다.
몽케 칸은 1251년 쿠릴타이에서 바투에게 자치권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이로써 킵차크 칸국은 몽골 제국의 일부이면서도 독자적인 정책을 펼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바투는 또한 몽골 일족의 장로로서 아가라는 존칭으로 불렸다. 그의 정치적 위상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그러나 몽케와의 관계도 완전히 순탄하지는 않았다. 칭기즈 칸이 분배한 영역에 따르면 이란 서부와 서아시아는 원래 주치 가문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몽케는 동생 훌라구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이 지역을 정복하게 했다. 이는 사실상 주치 가문의 몫을 강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투는 이에 대해 불만을 가졌지만, 공개적으로 대립하지는 않았다. 그는 실리를 택했고, 이것이 그의 정치적 지혜였다.
1255년 혹은 1256년, 바투는 볼가강 하류의 사라이에서 사망했다. 그의 정확한 사망일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바투는 장남 사르타크를 후계자로 내정한 것으로 보이며, 몽케 칸도 사르타크를 후계자로 승인했다. 그러나 사르타크는 몽케를 만나러 가는 도중 병으로 사망했고, 다른 아들 울라크치도 약 반년 후 사망했다. 결국 바투의 동생 베르케가 킵차크 칸국을 계승했다. 베르케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독실한 무슬림이었고, 바그다드를 파괴한 훌라구와 적대 관계를 형성했다. 이로써 킵차크 칸국과 일 칸국은 오랜 대립의 길로 접어들었다.
바투의 유산은 단순히 영토나 왕조를 넘어선다. 파베로의 연구가 강조하듯이, 그가 세운 킵차크 칸국은 다른 몽골 칸국들이 14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멸망한 것과 달리 1502년까지 지속되었다. 오고타이 칸국은 1310년에, 일 칸국은 1355년에, 차가타이 칸국은 1370년에 멸망했다. 킵차크 칸국의 후신 국가들 중 크림 칸국은 1783년 러시아 제국에 병합될 때까지 존속했다. 이는 바투가 구축한 정치적, 제도적 기반이 얼마나 견고했는지를 보여준다. 파베로는 킵차크 칸국의 성공 요인으로 유목적 기동성과 정주 사회의 행정 능력을 결합한 독특한 통치 모델을 꼽는다.
바투의 성격과 업적에 대한 평가는 문화권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몽골인들은 그를 사인 칸이라 불렀다. 이는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의 정치적 수완과 통치 능력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었다. 조반니 다 피안 델 카르피네는 바투를 동족에게 충분히 친절했지만 크게 두려움의 대상이며, 싸움에서 가장 잔인하고 전쟁에서 매우 영리하고 극도로 교활한 인물로 묘사했다. 아타 말릭 주베이니에 따르면 바투는 어떤 특정 종교나 종파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종교는 신을 아는 방법일 뿐이라며 종교적 관용을 보였다. 이러한 관용 정책은 파베로가 지적하듯 킵차크 칸국의 다문화적 성격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반면 러시아인들에게 바투는 지옥에서 올라온 무자비한 폭군이었다. 러시아 연대기들은 몽골군의 잔혹함을 상세히 기록했다. 당대 러시아 시문학에서는 우리는 열심히 싸웠는데 하느님의 군대에게 이길 수는 없었다는 식으로 몽골군을 묘사했다. 이는 몽골의 군사력이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다고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15세기 러시아 연대기들에는 헝가리에서 성왕 블라디슬라프가 바투를 죽였다는 완전히 허구적인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피정복민들의 트라우마와 희망사항이 뒤섞인 결과였다.
군사적 측면에서 바투의 능력은 제한적이었다. 실제 서방 원정에서 전술을 수립하고 전투를 지휘한 것은 수부타이였다. 모히 전투의 사례가 보여주듯, 바투는 때때로 조급하고 충동적인 결정을 내렸다. 바투 자신도 이를 인정했다. 그러나 이것이 바투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다. 바투의 진정한 천재성은 군사가 아닌 정치에 있었다. 그는 혈통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정적들과의 갈등 속에서 살아남았으며, 제국의 권력 구조를 재편했다. 그는 대칸이 되는 대신 대칸을 만드는 사람이 되었고, 이는 어떤 면에서 더 큰 권력이었다.
바투가 구축한 킵차크 칸국의 통치 체제는 파베로가 울루스 시스템이라 명명한 독특한 형태였다. 이 시스템은 몽골의 유목 전통과 정주 사회의 행정 기술을 결합했다. 칸과 귀족들 사이의 복잡한 권력 공유 체제는 능력있는 행정가와 외교관에게 보상을 제공했고, 기동적이고 조직적이며 혁신적인 경제 질서를 촉진했다. 러시아 공국들은 내정 자치를 유지하는 대가로 세금을 납부하고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이러한 체제는 효율적이었고, 장기간 안정적으로 작동했다. 바투는 또한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펼쳤다. 기독교, 이슬람, 불교 등 다양한 종교가 킵차크 칸국 내에서 공존했다.
바투의 정치적 유산은 몽골 제국의 권력 구조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몽케 칸의 즉위로 툴루이 가문이 대칸 계승권을 확보했고, 이는 이후 쿠빌라이 칸과 원나라로 이어졌다. 만약 바투가 귀위크를 지지하거나 중립을 지켰다면, 몽골 제국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피터 잭슨이 지적했듯이, 바투의 정치적 선택은 13세기 유라시아의 지정학적 지형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했다. 바투는 또한 주치 가문의 정통성을 확립했다. 혈통 문제로 의심받던 주치의 후손들은 바투를 통해 몽골 제국 내에서 확고한 지위를 얻었다.
파베로의 연구는 킵차크 칸국이 단순한 유목 국가가 아니라 유라시아 교역망의 중심 노드였음을 밝혔다. 사라이는 13세기와 14세기 유라시아 상업 붐의 핵심 거점이었고, 수천 마일에 걸친 교환의 통로였다. 이탈리아 상인들, 아랍 학자들, 러시아 상인들,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이 사라이에 모여들었다. 킵차크 칸국은 러시아에 통치 모델을 제공했고, 이슬람 문화권 전반의 사회 관습과 국가 구조에 영향을 미쳤으며, 자연 세계에 대한 정교한 이론을 전파했고, 종교적 관용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역사가들은 바투를 다양한 관점에서 평가한다. 일부는 그를 단순히 수부타이의 그림자로 보지만, 이는 피상적인 관찰이다. 군사적 천재가 아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바투는 복잡한 정치 상황을 읽고 전략적으로 대응하는 능력에서 탁월했다. 그는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 싸우기보다는 기다릴 줄 알았고, 직접적인 권력보다는 영향력을 추구했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수부타이 같은 전문가에게 군사 문제를 맡기는 현명함을 보였다. 이러한 자기 인식과 현실주의가 그를 위대한 통치자로 만들었다.
바투의 삶은 13세기 유라시아 정치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혈통의 불리함, 황족 간의 갈등, 제국의 팽창과 분열, 유목민과 정주민의 공존 등 당대의 주요 이슈들이 그의 생애에 모두 반영되어 있다. 그는 이러한 도전들을 군사적 정복이 아닌 정치적 협상과 전략적 동맹으로 극복했다. 이것이 바투를 단순한 정복자가 아닌 왕조 건설자로 만든 핵심이다.
오늘날 바투 칸의 흔적은 러시아, 카자흐스탄, 타타르스탄 등 광대한 지역에 남아 있다. 타타르스탄의 수도 카잔은 킵차크 칸국의 후신인 카잔 칸국의 수도였고, 이곳의 박물관들은 바투와 킵차크 칸국의 유산을 보존하고 있다. 크림 반도의 바흐치사라이는 크림 칸국의 수도로, 몽골-투르크 문화의 융합을 보여준다. 러시아 역사에서 타타르의 멍에로 불리는 몽골 지배의 시기는 바투로부터 시작되었고, 이는 러시아의 정치, 문화, 사회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조지 베르나드스키를 비롯한 많은 역사가들은 러시아의 중앙집권적 국가 구조와 행정 시스템이 몽골의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한다.
바투 칸은 역사의 전면에 서지 않고도 역사를 만든 인물이다. 그는 칭기즈 칸처럼 제국을 세우지도, 쿠빌라이처럼 문명을 통합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시대에 가능한 최선의 선택을 했고, 그 결과 250년 이상 지속한 왕조를 건설했다. 이는 단기적 군사적 승리보다 더 지속적인 유산이었다. 바투의 이야기는 권력이 반드시 왕좌에 앉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때로는 왕좌를 선택하는 것이 더 큰 힘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피터 잭슨, 마리 파베로, 요제프 라슬로브스키를 비롯한 현대 학자들의 연구는 바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깊게 만들었다. 그들의 연구는 바투가 단순한 야만적 정복자가 아니라 복잡한 정치 환경에서 탁월한 전략적 판단을 내린 정치가였음을 보여준다. 바투는 사인 칸, 훌륭한 칸이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업적은 칸이 된 것이 아니라, 칸국을 만들고 제국의 운명을 결정한 것이었다. 그는 제국의 그림자에서 시작하여 왕조의 설계자가 되었고, 이로써 유라시아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B0%94%ED%88%AC_%EC%B9%B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