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7년 12월 16일, 보로네즈 강가에 진을 친 몽골군의 모닥불이 겨울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징기스칸의 손자 바투칸이 이끄는 대군은 이제 키예프 루시의 첫 번째 목표물인 랴잔 공국의 수도를 향해 칼날을 겨누고 있었다. 이 공성전은 단순한 한 도시의 함락이 아니라, 유라시아 역사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꿀 파국의 서막이었다. 5일간의 처절한 저항 끝에 랴잔이 완전히 파괴되었을 때, 연대기 기록자는 이렇게 적었다. "신음할 자도 울부짖을 자도 남지 않았다." 이 문장은 수사적 과장이 아니라 역사적 현실이었다.
랴잔 공국은 13세기 초 키예프 루시의 동쪽 변경에 위치한 중요한 공국이었다. 오카 강 우안의 높은 지대에 자리잡은 구랴잔(현재의 스타라야 랴잔)은 약 65헥타르에 달하는 면적을 2킬로미터 길이의 성벽과 해자로 둘러싸고 있었다. 이 도시는 11세기 초 남부 루시 공국들과 크리비치 부족의 이주민들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12세기 중반 야로슬라프 스뱌토슬라비치의 아들들 사이에서 무롬-랴잔 영토가 분할되면서 공국의 정치적 중심지로 부상했다. 고고학적 증거는 랴잔이 북캅카스와 흑해 연안 민족들과 활발한 교역 관계를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랴잔의 보석 세공 기술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오카 강과 볼가 강을 통한 동쪽 무역로, 그리고 돈 강과 흑해를 통한 남쪽 무역로를 장악하고 있던 랴잔은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변경 공국이었다.
그러나 번영은 취약성과 동전의 양면이었다. 랴잔 공국은 이웃한 체르니고프 공국 및 블라디미르 공국과 빈번한 갈등을 겪었으며, 이러한 공국 간 불화는 몽골의 침략이 임박했을 때도 치명적인 분열을 초래했다. 1237년 당시 랴잔의 대공은 유리 이고레비치였으며, 그의 형제 올레그도 공동으로 통치에 참여하고 있었다. 공국의 군사력은 주로 보야르 귀족들이 이끄는 친위대(드루지나)와 도시 민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정예 기병은 수백 명에 불과했고, 전체 동원 가능한 병력은 기껏해야 수천 명 수준이었다.
몽골 제국의 서방 원정은 1235년 쿠릴타이(대회의)에서 결정되었다. 오고타이 칸의 명령에 따라 조치의 아들 바투가 명목상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지만, 실질적인 전략가이자 현장 지휘관은 전설적인 장군 수부타이였다. 수부타이는 이미 1223년 칼카 강 전투에서 루시 군대를 격파한 경험이 있었으며, 14년 후 그는 더욱 치밀한 계획으로 돌아왔다. 1236년 가을, 몽골군은 카스피 해 스텝 지역에 집결했다.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몽골군의 정확한 병력 수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일부 기록은 각각 만 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14개의 투멘(tumen)을 언급하며 총 14만 명의 대군을 주장하지만, 보다 보수적인 추정치는 4만 명 정도로 본다. 그러나 수적 규모와 무관하게, 이 군대는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규모였으며 완벽에 가까운 조직력과 전투 기술로 무장하고 있었다.
몽골군의 강점은 단순한 기병술이나 활쏘기 실력에만 있지 않았다. 그들은 중국에서 얻은 공성 기술을 완벽하게 습득하고 있었다. 중국인 기술자들로 구성된 특수 부대가 투석기, 공성추, 그리고 각종 화공 무기를 운용했다. 망고넬(mangonel)이라 불리는 견인식 투석기는 수십 명의 병사가 동시에 로프를 잡아당겨 거대한 돌덩이를 발사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이 투석기들은 50킬로그램이 넘는 발사체를 수백 미터 거리까지 날릴 수 있었다. 더 나아가 몽골군은 화염 화살, 기름통, 그리고 나프타 폭탄까지 활용했다. 13세기 페르시아의 한 역사가는 몽골의 투석기 운용자들이 "돌멩이 하나로 바늘구멍을 낙타가 지나갈 수 있는 통로로 만들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이는 과장이 섞인 표현이지만, 그들의 정확성과 파괴력을 입증하는 증언이다.
1237년 가을, 몽골군은 먼저 볼가 불가리아를 번개같은 속도로 정복했다. 불가리아인들은 몽골의 침략에 대비해 숲 속에 방벽을 세우고 도시를 요새화했으며 수비대를 증강했지만, 모든 준비는 무용지물이었다. 1237년 봄까지 불가리아는 완전히 정복되었다. 이어서 몽골군은 쿠만족과 알란족을 격파하고 부르타스족, 모크샤족, 에르자족의 영토를 점령했다. 수라 강 인근의 전략적 교차로에서 벌어진 졸로타레프스코예 전투는 규모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이며, 역사학자 바딤 카르갈로프는 1237년의 이 전투들이 루시 공국 공격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분석했다. 1237년 말, 엄청난 규모의 몽골군과 그들의 동맹 부대가 러시아 국경에 집결해 있었다.
몽골군은 겨울 원정을 선택했다. 이는 전략적 천재성의 표현이었다. 얼어붙은 강들은 자연스러운 도로가 되었고, 단단하게 얼어붙은 대지는 기병의 기동에 이상적이었다. 몽골 기병과 그들의 강인한 말들은 시베리아 스텝의 혹독한 겨울에 익숙했다. 반면 루시의 군대는 겨울철 대규모 군사 작전에 익숙하지 않았고, 농민 민병대를 동원하기도 어려웠다. 몽골군은 보로네즈 인근에 집결했으며, 이전에 쿠만족 및 알란족과 싸웠던 부대들도 합류했다.
12월 초, 몽골군은 랴잔 영토로 진입하여 오누자라는 마을을 점령하고 불태웠다. 그리고 나서 랴잔의 대공들에게 사절단을 보냈다. 러시아 연대기에 따르면, 사절단은 한 명의 여성 무당과 두 명의 남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몽골의 요구는 명확했다. 공국의 모든 재산의 10분의 1, 완전한 무장과 말들, 그리고 공국의 귀족 여성들을 바치라는 것이었다. 일부 전승에 따르면, 바투칸은 특별히 대공의 며느리인 비잔틴 귀족 출신의 아름다운 예브프락시야를 요구했다고 한다.
랴잔의 대공 유리 이고레비치와 그의 형제 올레그는 사절단을 성안으로 들이지 않고, 무롬 공국 및 프론스크 공국의 군주들과 함께 보로네즈 방향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갔다. 랴잔 공국의 대답은 단호했다. "우리가 모두 사라진 후에야 모든 것이 당신들의 것이 될 것이다." 이 용감한 거부는 공국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대공 유리는 블라디미르 대공국의 유리 브세볼로도비치에게 긴급 원군을 요청하는 사절을 보냈다. 또한 체르니고프 공국에도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제때 지원군이 도착하지 않았다. 이것이 키예프 루시의 비극이었다. 공국들 간의 오랜 불화와 경쟁심은 공동의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연합을 가로막았다.
랴잔의 군대는 보로네즈 강 인근에서 몽골군과 맞닥뜨렸다. 전투의 세부 사항은 명확하지 않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러시아 연대기는 전투가 "무자비하고 신을 모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기록한다. 대공의 아들 표도르 유리예비치는 협상을 시도했으나, 아버지에 대한 모욕적인 요구를 거부했다가 그의 수행원들과 함께 살해당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표도르의 아내 예브프락시야는 몽골군에게 포로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어린 아들과 함께 높은 탑에서 투신했다고 한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는 '랴잔 파괴 이야기'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러시아 정교회의 순교 전통 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12월 16일, 몽골군은 랴잔 시를 포위했다. 고고학적 증거와 연대기 기록을 종합하면, 공성전의 양상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몽골군은 먼저 도시를 완전히 포위했다. 수부타이의 전형적인 전술에 따라,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압박을 가했다. 일부 부대는 수즈달 방향에서, 일부는 볼가 강에서, 또 다른 부대는 남쪽에서 접근했다. 이러한 다방면 공격은 방어군의 병력을 분산시키고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효과가 있었다.
포위가 완성되자, 몽골의 공성 무기들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중국인 기술자들이 조립한 투석기들이 성벽을 향해 거대한 돌덩이를 발사했다. 13세기의 러시아 목조 요새는 석조 성벽만큼 견고하지 않았다. 10미터 높이의 통나무 성벽은 인상적이었지만, 반복된 투석에는 취약했다. 투석기들은 돌덩이뿐만 아니라 화염병, 기름통, 그리고 때로는 부패한 동물 사체까지 던졌다. 후자는 생물학적 전쟁의 초기 형태였으며, 포위된 도시 내부에 질병과 공포를 퍼뜨리는 목적이었다.
동시에 몽골군은 땅을 파고 들어가 갱도를 통해 성벽 아래로 접근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러한 지하 작업은 성벽의 기초를 약화시키거나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공성추를 사용하여 성문과 성벽의 취약한 지점을 직접 타격했다. 몽골군은 포로로 잡은 지역 주민들을 방패 삼아 전면에 배치하는 잔혹한 전술도 서슴지 않았다. 이는 방어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동시에 몽골 병사들을 화살과 투창으로부터 보호하는 이중의 효과가 있었다.
랴잔의 방어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성벽 위에서 활과 투창으로 공격자들을 막아냈고, 뜨거운 기름과 끓는 물을 부었다. 목재로 만든 방어 구조물을 불태우는 화염 화살에 대응하여 소방조를 운영했다. 그러나 병력의 열세는 극복할 수 없었다. 몽골군은 24시간 교대로 공격을 이어갔다. 한 부대가 물러나면 즉시 새로운 부대가 공격을 재개했다. 방어군은 휴식을 취할 틈이 없었다.
12월 21일, 5일간의 포위 끝에 몽골군은 성벽의 한 구간을 돌파했다. 투석기의 집중 공격으로 약해진 부분이 무너졌거나, 성문이 공성추에 의해 부서졌을 가능성이 크다. 일단 돌파구가 열리자, 몽골 기병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거리에서 벌어진 시가전은 처참했다. 보스크레센스크 연대기의 기록은 생생하다. "타타르족은 랴잔 시를 점령하고... 모두 불태웠으며, 대공 유리와 그의 공비를 살해했다...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 수도사들, 수녀들, 사제들을 붙잡았다. 어떤 이들은 칼로 베었고, 어떤 이들은 화살로 쏘아 불길 속으로 던졌으며, 또 어떤 이들은 붙잡아 묶고 찢어 내장을 끄집어냈다."
학살은 조직적이고 철저했다. 몽골군은 항복하지 않는 도시에 대한 경고로 완전한 파괴를 자행했다. 이는 냉혹한 전략적 계산이었다. 다음 도시들이 저항을 포기하도록 만들기 위해 랴잔을 본보기로 삼은 것이다. 대공 유리 이고레비치와 그의 형제 올레그는 최후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공국의 귀족들 대부분이 살해되었다. 라브렌티 연대기의 1237년과 1238년 항목은 "도시에는 단 한 명의 살아있는 영혼도 남지 않았다. 모두 함께 죽었고 모두 죽음의 잔을 마셨다"고 기록한다.
구랴잔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건물들은 불타고, 성벽은 무너졌으며, 거리는 시체로 가득 찼다. 고고학 발굴은 12월의 파괴 흔적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두꺼운 재 층, 불에 탄 목재 잔해, 그리고 인간과 동물의 유골이 뒤섞여 발견되었다. 일부 생존자들은 폐허를 탈출하여 북쪽으로 도망쳤다. 도시는 다시는 이전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했다. 고고학자 M. W. 톰슨은 "생활은 곧 재개되었다. 교회와 요새가 복원되고 새 집들이 지어졌다"고 쓰면서도, 14세기에 공국의 수도가 페레야슬라블-랴잔스키(1778년 랴잔으로 개칭)로 이전되었다고 지적한다. 구랴잔의 위치는 오늘날 스타라야 랴잔(구랴잔)이라는 작은 마을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랴잔의 이야기는 파괴로 끝나지 않았다. '랴잔 파괴 이야기'에 보존된 전승에 따르면, 공성전 당시 체르니고프에 있었던 랴잔의 보야르 예브파티 콜로브라트는 소식을 듣고 급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본 것은 재와 시체뿐이었다. 분노에 찬 예브파티는 1,700명의 병사들을 모아 서쪽으로 향하는 몽골군의 후미를 추격했다. 이 "작은 부대"는 기습 공격으로 몽골군의 후위대를 격파했다.
콜로브라트의 게릴라 전술은 몽골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바투칸은 그의 친척인 호스토브룰이라는 용맹한 전사를 보내 콜로브라트를 제압하도록 했다. 전승에 따르면, 호스토브룰은 콜로브라트를 생포하겠다고 장담하며 일기토를 신청했다. 그러나 초인적인 힘을 가진 콜로브라트는 칼로 적을 두 동강냈고, 주변의 몽골 병사들을 "안장까지 쪼개며" 살해했다. 결국 몽골군은 원거리에서 투석기를 동원하여 콜로브라트를 죽였다.
바투칸은 콜로브라트의 용맹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포로들에게 콜로브라트의 시신을 돌려주고 그들을 석방하라고 명령했다. 이 이야기는 16세기 필사본에 처음 등장하며,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민속 서사시(뷜리나)의 특징을 많이 담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콜로브라트가 실존 인물이었는지, 아니면 러시아 저항 정신을 구현한 전설적 인물인지에 대해 논쟁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역사성 여부와 무관하게, 예브파티 콜로브라트는 러시아 문화에서 불굴의 저항과 희생의 상징이 되었다.
랴잔의 함락 이후, 몽골군은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을 향해 진격했다. 1238년 1월 1일, 콜롬나 인근에서 블라디미르에서 랴잔을 구원하러 오던 군대가 격파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전투에서 몽골군도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는 전체적인 진군을 막지 못했다. 모스크바가 불탔고, 수즈달이 함락되었다. 1238년 2월 7일, 블라디미르가 몽골의 공성추와 투석기에 무너졌다. 대공 유리 브세볼로도비치는 도시를 탈출했지만, 그의 아내와 아들들은 불타는 대성당에서 죽었다. 대공의 군대는 시트 강 전투에서 격멸되었고, 대공 자신도 전사했다.
랴잔 공성전이 러시아 역사에 미친 영향은 심대했다.
첫째, 이는 몽골군의 공성 능력과 무자비함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랴잔의 운명은 다른 도시들에 경고가 되었다. 항복하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저항하면 완전한 파괴가 기다리고 있었다.
둘째, 공국들 간의 분열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입증했다. 블라디미르와 체르니고프가 신속하게 원군을 보냈다면, 혹은 적어도 몽골군의 서쪽 진격을 지연시킬 수 있는 연합 전선을 구축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셋째, 랴잔의 파괴는 키예프 루시 문명에 대한 몽골 침략의 성격을 규정했다. 이는 단순한 정복이나 조공 요구가 아니라 체계적인 파괴와 복속이었다. 1240년 키예프가 함락될 때까지, 몽골군은 루시의 주요 도시들을 하나하나 파괴했다. 1246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사절로 이 지역을 방문한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조반니 드 플라노 카르피니는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가 그 땅을 여행할 때, 땅바닥에 흩어진 무수한 두개골과 뼈를 보았다. 키예프는 매우 크고 인구가 많은 도시였으나, 이제는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현재 거기에는 200채의 집도 채 되지 않으며, 주민들은 완전한 노예 상태에 놓여 있다."
넷째, 랴잔 공성전은 러시아인들의 집단 기억 속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랴잔 파괴 이야기'는 16세기에 기록되었지만, 구전 전승은 사건 직후부터 전해져 내려왔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순교 문학이자 저항 서사시였다. 표도르 공자와 그의 아내의 비극, 예브파티 콜로브라트의 영웅적 복수, 그리고 대공 잉바르(일부 기록에서는 잉가레비치)가 돌아와 시체 더미 속에서 친족들을 찾고 애도하는 장면 등은 러시아 문학과 예술에서 반복적으로 재현되었다.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시인 니콜라이 야지코프는 1824년 시 "예브파티"에서 애국적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레프 메이는 1859년 "보야르 예브파티 콜로브라트에 관한 노래"에서 민속 자료를 직접 활용하여 불굴의 전사상을 그렸다. 20세기에는 소비에트 문학이 콜로브라트를 반제국주의 투쟁과 집단 영웅주의의 상징으로 재해석했다. 세르게이 예세닌은 1912년 "예브파티 콜로브라트에 관한 노래"에서 랴잔의 민속 전통을 담아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바실리 얀의 소설 "바투"(1942)는 이 서사를 활용하여 소비에트 저항 정신을 고취했다.
군사사적 관점에서 랴잔 공성전은 몽골 공성술의 진화를 보여준다. 징기스칸이 북중국의 성채들을 공격하면서 공성전의 어려움을 처음 깨달았을 때, 몽골군은 요새화된 도시를 다루는 데 서툴렀다. 그러나 중국 기술자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몽골군은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숙련된 공성전 전문가 중 하나가 되었다. 1237년 랴잔에서 사용된 기술들은 이미 수십 년간의 경험이 축적된 결과였다.
투석기(mangonel)는 전국시대 중국에서 기원한 견인식 투석기로, 여러 명의 병사가 로프를 당겨 발사하는 방식이었다. 몽골군은 이를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를 정복하면서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1272년 쿠빌라이 칸이 일칸국의 아바가로부터 이슬람 기술자 두 명을 초청했을 때, 그들은 평형추 투석기(counterweight trebuchet)를 도입했다. 이 새로운 설계는 발사체가 90킬로그램을 넘을 수 있었고, 사정거리도 훨씬 길었다. 원사(元史)의 기록에 따르면, 이 투석기가 발사한 돌이 땅에 떨어질 때 직경 2.17미터의 구덩이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1237년 랴잔 공성전에서는 아직 평형추 방식이 아닌 전통적인 견인식 투석기가 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몽골군의 또 다른 혁신은 공성 무기의 이동성이었다. 그들은 공성 무기를 분해하여 수송하고 필요한 곳에서 신속하게 조립하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를 통해 빠르게 이동하는 기병 부대의 속도를 유지하면서도 요새화된 도시를 공격할 수 있었다. 랴잔의 경우, 몽골군은 불과 며칠 만에 포위 진지를 구축하고 공성 무기를 배치했다. 이러한 효율성은 준비되지 않은 방어자들에게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심리전 또한 몽골 전술의 핵심이었다. 랴잔 공성전 이전에 몽골군은 오누자 마을을 불태움으로써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사절단에 무당을 포함시킨 것도 의도적인 심리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러시아인들에게 이국적이고 불길한 인상을 주기 위함이었다. 공성전 중에는 밤낮없이 북소리와 나팔 소리로 방어군을 지치게 만들었다. 1240년 키예프 포위 시 러시아 연대기는 "수레가 삐걱거리고, 낙타가 울부짖고, 나팔과 오르간 소리, 말의 울음소리, 그리고 무수한 군중의 울음과 흐느낌 때문에 도시 안에서는 서로의 말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고 기록한다. 이러한 소음 전술은 랴잔에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랴잔 공성전의 유산은 다층적이다. 즉각적인 수준에서, 그것은 몽골의 서방 침략이 단순한 약탈이 아니라 체계적인 정복임을 보여주었다. 중기적으로, 그것은 러시아 공국들에게 240년간의 몽골 지배, 즉 "타타르의 멍에"의 시작을 알렸다. 이 시기는 러시아 역사의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역사가 니콜라이 카람진은 논쟁적으로 몽골 침략을 "축복"이라 불렀다. 그는 몽골의 지배가 분열된 공국들을 통합하는 데 기여했고, 결국 모스크바 공국의 부상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엄청난 인명 손실과 문화적 파괴를 간과한다. 랴잔뿐만 아니라 수십 개의 도시가 파괴되었고, 수십만 명이 살해되거나 노예로 끌려갔다. 키예프 루시의 문화적 중심지들이 불탔고,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 그리고 그 안에 보관된 필사본과 성화상이 사라졌다. 경제 시스템이 붕괴했고, 무역로가 차단되었으며, 도시 문명이 수세기 동안 후퇴했다.
장기적으로, 랴잔 공성전은 러시아 정체성 형성의 한 요소가 되었다. 몽골의 침략과 지배는 러시아를 서유럽과 분리시켰다. 카톨릭 및 프로테스탄트 서방과 구별되는, 정교회 비잔티움의 계승자로서의 자기 인식이 강화되었다. 동시에, 스텝 지역의 유목 민족들과의 투쟁 경험은 러시아의 군사 문화와 팽창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16세기 이반 뇌제가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을 정복하고 시베리아로 진출한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몽골 지배에 대한 역사적 복수이자 극복이었다.
현대 역사학은 랴잔 공성전을 더 넓은 맥락에서 이해하려 노력한다. 이는 13세기 유라시아의 권력 재편성의 한 장면이었다. 몽골 제국은 태평양에서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시베리아에서 페르시아만까지 이르는 역사상 최대의 육상 제국을 건설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국가와 도시가 랴잔과 같은 운명을 맞았다. 그러나 동시에 몽골의 팍스 몽골리카는 실크로드를 따라 전례 없는 교류를 가능하게 했다. 기술, 사상, 그리고 질병(흑사병 포함)이 유라시아를 가로질러 이동했다.
랴잔의 유적지는 오늘날 고고학적 발굴의 대상이다. 12-13세기 도시 생활의 흔적, 그리고 1237년 12월의 파괴 증거가 지속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불탄 건물의 잔해, 전투의 흔적이 있는 무기들, 그리고 서둘러 매장된 것으로 보이는 집단 묘지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물질적 증거는 연대기와 전승의 이야기를 보완하고 검증한다.
문화적 기억의 차원에서, 랴잔 공성전은 여전히 러시아 대중문화에 살아있다. 1985년 소비에트 애니메이션 단편 '예브파티 콜로브라트 이야기'가 제작되었고, 2017년에는 일리야 말라코프 주연의 대작 영화 '퓨리어스(콜로브라트 전설)'가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역사적 정확성보다는 판타지적 요소를 가미했지만, 여전히 러시아 관객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영화의 주제가는 System of a Down의 세르지 탱키언이 러시아 가수 예카테리나 이반치코바와 협업하여 작곡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2017년 크렘린에서 이 영화의 시사회에 참석하여 영화 제작진을 만났다.
결론적으로, 1237년 12월의 5일간의 랴잔 공성전은 단순한 군사적 사건을 넘어선다. 그것은 문명의 충돌이었고, 한 시대의 종말이자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다. 키예프 루시의 분권화된 공국 체제는 몽골의 집중화된 제국 권력 앞에 무너졌다. 목조 성벽은 중국의 공성 기술에 의해 부서졌다. 기독교 정교회의 도시는 텡그리 신앙을 가진 유목민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랴잔의 저항은 러시아 역사에서 굴복하지 않는 정신의 상징이 되었다. "우리가 모두 사라진 후에야 모든 것이 당신들의 것이 될 것이다"라는 대답은 단순한 허세가 아니라 실제로 실행된 결의였다. 예브파티 콜로브라트의 전설적 복수담은, 비록 역사적 사실 여부가 불확실하더라도, 압도적인 힘 앞에서도 존엄과 명예를 지키려는 인간 정신의 승리를 상징한다.
역사가들은 계속해서 논쟁한다. 만약 러시아 공국들이 단결했다면? 만약 블라디미르가 제때 원군을 보냈다면? 만약 몽골군이 겨울이 아닌 다른 시기에 침략했다면? 그러나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 1237년 12월 21일, 랴잔은 함락했다. 그리고 그 함락은 러시아 역사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그리고 영구적으로 바꾸었다. 오늘날 스타라야 랴잔의 초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그 옛날의 비극을 속삭이고 있다. 신음할 자도 울부짖을 자도 남지 않았던 그 5일간의 기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