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개월의 함정
한국 고용 시장은 위태롭다. 법의 맹점을 파고들어 노동자의 삶을 흔드는 교묘한 편법들이 더욱 깊이 자리 잡고 있다. 면접장에서 듣는 "1년 계약이요? 아니에요, 11개월입니다." 이 한 마디는,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이 1년 이상 계속 근무한 근로자에게 퇴직금을 지급하도록 규정한 법적 기준선을 아슬아슬하게 비켜가며 노동자의 권익을 갉아먹는 한국 고용 시장의 모든 모순을 압축한다.
고용 불안을 조장하는 '꼼수' 계약들 가장 흔하고 교묘한 편법은 바로 11개월 계약이다. 기업들은 1년 이상 근무자에게 퇴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근로기준법을 악용해, 정확히 11개월만 계약을 맺는 식이다. 1년째가 되면 "회사 사정이 어려워져서" 혹은 "업무 성과가 아쉬워서" 등 온갖 핑계를 대며 계약을 종료한다. 그리고 몇 달 후 같은 자리에 새로운 11개월 계약직을 뽑는다. 이는 단순한 편법이 아닌 시스템화된 착취다. 노동자는 11개월 동안 정규직 못지않은 업무 강도를 견디지만, 단 한 달 때문에 퇴직금, 정규직 전환 같은 미래조차 불안하다. 경력 단절의 위험은 물론, 불안정한 고용 형태 탓에 낮은 신용으로 주거 대출 등 기본적인 금융 서비스 이용에도 어려움을 겪고 미래 설계마저 불투명해지는 악순환에 빠진다.
'초단시간'의 덫- 주휴수당 없는 직원들
카페와 편의점 등 서비스업에서는 또 다른 편법이 만연하다. 근로기준법 제18조는 주당 15시간 미만 근무하는 '초단시간 근로자'에게는 주휴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규정한다. 업체들은 이 조항을 악용해 아르바이트생을 정확히 주 14시간만 일하게 한다. "월요일 점심 3시간, 수요일 저녁 4시간, 토요일 오후 6시간"처럼, 손님이 가장 몰리는 바쁜 시간대에만 아르바이트생을 부려먹고 한가할 때는 "오늘은 손님이 없으니까 일찍 가도 돼"라며 내보낸다. 아르바이트생은 일주일 내내 업체 스케줄에 맞춰 대기해야 하지만, 받는 건 고작 14시간치 최저임금뿐이다. 주휴수당은 물론, 퇴직금 적용에서도 배제된다. 이는 단순한 시간 관리를 넘어 노동자의 삶을 조각내는 행위다. 법적으로는 합법이지만, 그 법의 취지를 완전히 왜곡한 착취다.
매월이 지옥
1개월 단위 계약의 불안정 공장 생산직 노동자들에게는 또 다른 형태의 불안이 만연하다. 이들은 한 달 단위 계약서를 받아들고 매달 초 불안에 떤다. "이번 달도 계약이 연장될까? 물량이 줄어들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업체 입장에서는 완벽한 시스템이다. 주문이 많을 때만 인력을 쓰고, 물량이 줄어들면 부담 없이 내보낼 수 있으니까. 노동자에게는 매월이 취업과 실업을 반복하는 지옥과 다름없다. 기업은 근로 기간을 극단적으로 쪼개어 상시적인 고용 불안을 조장하고, 인력 운용의 유연성을 확보한다는 명목 아래 노동자에게 모든 위험을 전가하는 '위험의 외주화'를 서슴지 않는다. 노동자는 직업 안정성은 물론, 숙련도를 쌓거나 경력을 개발할 기회마저 박탈당한 채 불안정한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
합법이라는 이름의 착취 이러한 관행들의 가장 교묘한 점은 모두 '합법'이라는 것이다. 11개월 계약? 법적으로 아무 문제없다. 한 달 단위 계약? 당연히 합법이다. 주 14시간 근무? 오히려 법정 기준을 '준수'하고 있다. 기업들은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기에 "우리는 불법적인 일은 하지 않습니다. 모든 계약은 합법적으로 진행됩니다"라는 말을 단골 멘트로 사용한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최대한 노동자를 쥐어짜는 방법을 연구하고, 그것을 '합리적 경영'이라고 포장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법 조항들이 원래부터 기업의 편의와 유연한 경영을 위해 마련된 측면이 강하다는 점이다. 1년 미만 근로자에게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는 것은 기업이 단기 프로젝트나 시범 운영 등을 통해 인력을 유연하게 활용하고 부담을 줄이도록 설계된 규정이었다. 주 15시간 미만 근로자에게 주휴수당을 주지 않는 것 역시 소규모 사업장의 운영 부담을 경감하고 단기 아르바이트 고용을 용이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기업들은 이러한 의도를 넘어, 이 규정들을 악용하여 영구적으로 단기 계약을 반복하며 퇴직금 지급을 회피하고, 실질적으로는 풀타임급 구속력을 행사하면서도 주휴수당 등 혜택은 주지 않는다. 법은 기업의 '유연성'을 명분으로 만들어졌지만, 현실은 그 유연성을 이용해 노동자의 권리를 박탈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 모순 이 문제를 "을의 설움" 정도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한국고용정보원 자료에 따르면 비정규직 비율은 전체 근로자의 3분의 1을 넘어선다. 11개월 계약직, 초단시간 근로자, 그리고 1개월 단위 계약 노동자들이 이 통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이는 개별 업체의 일탈이 아니라 시스템적 문제다.
불안정한 고용은 경제 전체에 악영향을 미친다. 11개월 계약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어떻게 집을 사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는가? 매주 14시간씩 일하며 최저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어떻게 소비를 늘리고 경제성장에 기여할 수 있겠는가? 더 큰 문제는 이런 관행이 "정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업체도 다 그래요", "요즘 경기가 어려워서요"라는 말로 편법이 정당화되고, 젊은이들은 체념하며, 기성세대는 현실을 외면한다.
변화를 향한 첫걸음 변화는 인식에서 시작된다. 합법이라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니라는 인식부터가 시작이다. 11개월 계약이 "법적으로 문제없는 현실적 대안"이 아니라 "법의 허점을 악용한 도덕적 착취"임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14시간 아르바이트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모범 사례"가 아니라 "법의 취지를 무력화하는 편법"임을 깨닫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법은 완벽하지 않다. 입법자들이 모든 편법을 예상할 수는 없지만, 그 틈새를 악용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법의 문구가 아닌 법의 정신을 따르는 것, 그것이 진정한 준법이다. 이를 위해 입법 기관은 계속 근로 기간 산정 기준의 재정립, 초단시간 근로자 범위 및 권리 재검토, 반복적인 단기 계약에 대한 규제 강화 등 구체적인 법 개정 방향을 논의해야 한다. 또한, 노동자 스스로 권리 의식을 함양하고 연대하며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며, 이러한 편법을 사용하는 기업에 대한 소비자의 이성적인 목소리와 시민 단체의 감시 및 비판 등 사회 전반의 감시와 압력이 필요하다.
11개월이라는 함정에서, 14시간이라는 덫에서, 그리고 1개월 단위의 불안정 속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합법적 착취가 더 이상 용인되지 않는 사회, 우리 각자의 관심과 용기 있는 목소리가 법의 허점이 아닌 정의가 살아 숨 쉬는 고용 시장을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