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부터 정치를 '구경'하기 시작했을까? 아침에 일어나 스마트폰을 켜면 쏟아지는 정치 뉴스들을 마치 어젯밤 놓친 드라마의 하이라이트를 확인하듯 훑어본다. 누가 누구를 공격했는지, 어떤 실언이 화제가 되었는지, 지지율이 몇 퍼센트 올랐는지 내렸는지. 우리는 언제부터 정치의 주인이 아닌 관람객이 되었을까?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에서는 검투사들이 생사를 걸고 싸웠고, 관중들은 엄지손가락의 방향으로 그들의 운명을 결정했다. 현대의 정치 무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치인들은 검투사가 되어 끊임없이 서로를 공격하고, 시민들은 관중석에서 박수를 치거나 야유를 보낸다.
문제는 이 '게임'에서 진짜 중요한 것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 복지, 환경, 경제 정책 같은 복잡하고 지루한 주제들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대신 누가 누구를 더 신랄하게 비판했는지, 어떤 말실수를 했는지가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정책 토론회는 시청률이 낮고, 설전과 공방은 조회수가 높다. 미디어는 이를 잘 알고 있다.
소셜미디어는 이런 현상을 더욱 극대화했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좋아요'를 누를 만한 콘텐츠, 즉 자극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콘텐츠를 우선적으로 보여준다. 복잡한 정책 분석보다는 "○○○ 의원, 대놓고 ××× 비판"이라는 제목의 영상이 더 많이 클릭되고, 더 많이 공유된다.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거대한 디지털 콜로세움 안에 갇혀 있다. 각자의 스마트폰 화면이 개인용 관중석이 되었고, '좋아요'와 '공유'가 엄지손가락의 방향을 대신한다. 그리고 알고리즘은 우리의 취향을 학습해 점점 더 자극적인 콘텐츠를 제공한다. 마치 로마 황제가 더 큰 흥행을 위해 더 사나운 맹수를 풀어놓듯이.
이렇게 정치가 스펙터클이 되면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잃고 있다. 바로 시민으로서의 주체성이다. 진정한 민주주의에서 시민은 관객이 아니라 연출자여야 한다. 정책을 검토하고, 후보를 평가하고, 지역사회 문제에 참여하고, 때로는 직접 정치에 뛰어들기도 해야 한다.
하지만 정치가 오락이 되면서 우리는 점점 더 수동적이 되고 있다. 복잡한 사회 문제를 깊이 있게 고민하는 대신, 트위터의 140자 안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정치인의 정책 공약보다는 말하는 방식이나 외모에 더 관심을 갖는다. 마치 올림픽을 보며 선수들을 응원하듯, 정치인들을 응원하거나 비난할 뿐이다.
콜로세움의 가장 큰 문제는 모든 것을 승부로 환원시킨다는 점이다. 생사를 가르는 단순한 이분법만이 존재할 뿐, 중간지대나 미묘한 차이는 무시된다. 현대 정치도 마찬가지다. 복잡한 사회 문제들이 "찬성 vs 반대", "진보 vs 보수", "우리 편 vs 저쪽 편"의 단순한 구도로 축소된다.
기후변화 대응은 환경과 경제의 정교한 균형을 요구하는 복합적 과제지만, 미디어에서는 "환경 vs 경제"의 대립으로만 다뤄진다. 교육 정책은 수많은 변수와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지만, "사교육비 증가"라는 자극적인 키워드로만 소비된다. 이런 단순화는 문제의 본질을 가리고, 진정한 해결책을 찾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정치의 오락화가 냉소주의를 키운다는 점이다. 정치를 쇼로 보게 되면, 모든 정치인을 연기하는 배우로 여기게 된다. "어차피 다 똑같아", "정치는 원래 더러운 거야"라는 생각이 확산된다. 이런 냉소주의는 정치 참여를 포기하게 만들고, 결국 민주주의 자체를 위험에 빠뜨린다.
젊은 세대의 정치 무관심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지만, 과연 이들만 탓할 수 있을까? 그들이 보기에 정치는 자신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어른들의 게임'일뿐이다. 진짜 중요한 문제들 - 청년 실업, 주거 문제, 기후 위기 - 은 뒷전이고, 대신 정치인들의 막말과 스캔들만 연일 보도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에 관심을 갖기를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디지털 콜로세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능동적인 시민이 되는 것이다. 자극적인 헤드라인에 낚이지 말고, 정책의 내용을 직접 찾아 읽어보자. 정치인의 말보다는 그들의 과거 행적과 공약을 살펴보자. 소셜미디어의 짧은 영상보다는 긴 글과 심층 분석을 찾아 읽어보자.
지역 정치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국정 정치는 멀고 복잡하지만, 우리 동네의 문제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이다. 지방의회 회의록을 읽어보고, 지역 현안에 대해 관심을 갖고, 때로는 직접 의견을 제시해 보자. 민주주의는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이런 작은 참여에서 시작된다.
미디어 소비 습관도 바꿔야 한다. 클릭베이트성 기사보다는 심층 보도를, 선정적인 영상보다는 분석적인 콘텐츠를 선택하자. 한쪽의 목소리만 듣지 말고, 다양한 관점의 의견을 접해보자. 알고리즘이 만든 필터 버블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정보를 찾아 나서자.
콜로세움의 시대가 끝난 것은 관중들이 더 이상 그런 잔혹한 오락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대 정치의 콜로세움화도 우리가 원하지 않으면 끝낼 수 있다. 자극적인 정치 쇼 대신 진지한 정책 논의를, 개인 공격 대신 건설적인 비판을, 일방적인 주장 대신 대화와 타협을 요구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계속해서 관중석에 앉아 정치라는 이름의 쇼를 구경할 것인가, 아니면 무대로 내려가 진정한 민주주의의 주인공이 될 것인가.
로마의 콜로세움은 이제 폐허가 되어 관광객들만이 찾는다. 우리의 디지털 콜로세움도 언젠가는 그런 운명을 맞을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에 우리가 어떤 정치를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 답은 관중석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손안에 있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C%BD%9C%EB%A1%9C%EC%84%B8%EC%9B%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