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비자발적이다. 우리는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으며, 의식이 형성되기 전 이미 세상에 던져진 채로 자아를 인식하게 된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말한 '피투성(Geworfenheit)'의 개념이 바로 이를 설명한다. 우리는 특정한 시대, 장소, 가족 구조 안으로 던져진 존재로서, 이러한 조건들을 전혀 선택할 수 없었다.
이러한 비자발적 존재는 근본적인 철학적 질문을 제기한다. 만약 우리가 존재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존재에 대한 의무나 책임이 있는가? 더 나아가, 우리의 존재는 무엇인가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하는가? 이는 단순한 개인적 고민을 넘어서, 존재론적 윤리학의 핵심 문제다.
현대 사회에서 많은 개인들이 성장 과정에서 '조건부 존재론'을 내재화하게 된다. 이는 자신의 존재 가치가 특정 조건들의 충족 여부에 달려있다는 믿음 체계로, 주로 가족 내 양육 과정에서 형성된다. 이러한 사고 체계는 존재를 일종의 계약 관계로 환원시키는 특징을 보인다.
조건부 존재론의 핵심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부모는 자녀에게 물질적·정서적 투자를 하고, 이에 대한 보답을 기대한다. 이 과정에서 자녀는 구체적인 경험들을 통해 조건부 인정을 학습하게 된다. 예를 들어, 시험 성적이 좋을 때만 칭찬받거나, 부모의 기대에 부응했을 때만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경험, 혹은 "네가 이렇게 해줘야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받는 경험들이다. 자녀는 이러한 기대를 내재화하여 자신의 존재 가치를 보답 능력과 동일시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개인의 자아 정체성이 타인의 기대와 요구에 종속되는 구조가 형성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근본적인 논리적 모순을 내포한다.
첫째, 권위의 정당성 문제가 있다. 존재 자체가 조건부라면, 그 조건을 설정하는 주체의 권위는 어디서 나오는가? 부모가 자녀에게 보답을 요구할 권리는 자녀의 동의 없는 일방적 결정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이미 불평등한 관계를 전제한다.
둘째, 가치 측정의 불가능성이다. 사랑, 돌봄, 교육과 같은 무형의 가치를 어떤 기준으로 정량화할 것인가? 더 나아가 개인의 보답 능력을 누가,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것인가? 이러한 측정 자체가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셋째, 개별성과 상황적 맥락의 무시다. 각 개인의 능력, 상황, 가치관은 고유하며, 획일적 기준의 적용은 필연적으로 부당한 결과를 초래한다. 특히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요인들 (건강, 경제적 여건, 사회적 환경) 이 보답 능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이러한 기준은 더욱 문제적이다.
이론적 모순과 더불어, 조건부 존재론은 경험적 현실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만약 세계가 진정 '주고받음'의 원리로 작동한다면, 노력과 결과, 투입과 산출 사이에 일정한 비례 관계가 성립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정반대의 양상을 보인다.
사회학적 연구들이 일관되게 보여주는 것은 기회의 불평등한 분배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자본 이론에 따르면, 개인의 성취는 개인적 노력보다는 물려받은 경제적·문화적·사회적 자본에 더 크게 의존한다. 출생 가정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교육 기회, 인적 네트워크, 심지어 인지적 능력의 발달에까지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또한 현대 경제학의 연구 결과들은 메리토크라시(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드러낸다. 토마 피케티의 분석에 따르면, 소득과 부의 분배는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보다는 자본 수익률과 상속, 그리고 구조적 불평등에 의해 좌우된다. 동일한 노력을 기울여도 출발점의 차이에 따라 결과는 천양지차가 된다.
이러한 현실은 조건부 존재론의 전제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린다. 만약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한다'는 원리가 타당하다면, 먼저 '받는 것'이 공정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요인들 (출생지, 부모의 경제력, 유전적 특성) 이 '받는 것'의 양과 질을 좌우한다. 따라서 보답의 의무를 개인에게 부과하는 것은 불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강요하는 것과 같다.
조건부 존재론의 한계를 인식한다면, 보다 근본적인 존재론적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실존주의 철학의 통찰을 검토해볼 수 있다.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는 여기서 핵심적 의미를 갖는다. 인간은 미리 정해진 본질이나 목적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존재하고 이후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만들어간다. 이는 존재 자체가 어떤 외부적 조건이나 목적에 의해 정당화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한다.
또한 임마누엘 칸트의 인격성 개념은 중요한 윤리적 토대를 제공한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그 자체로 목적'인 존재다. 이는 인간의 가치가 유용성이나 생산성 같은 외부적 기준에 의해 측정될 수 없으며, 존재 자체가 절대적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피투성' 개념은 더욱 깊은 차원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선택 없이 특정한 상황에 '던져진' 존재지만, 바로 이 피투성이야말로 존재론적 자유의 원천이 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던져진 상황 속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가능성들을 발견하고 실현할 수 있는 존재다.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조건 속에 던져졌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과 마주하며 무한한 가능성을 열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우리의 출생 조건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제약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한 자유의 조건이 된다. 미리 정해진 본질이나 목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존재 방식을 창조할 수 있다. 피투성은 숙명이 아니라 가능성의 지평을 여는 출발점인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관점들을 종합하면, 대안적 존재론의 윤곽이 드러난다. 인간의 존재는 조건부가 아닌 무조건적이며, 정당화가 필요한 것이 아닌 그 자체로 완전하다. 따라서 삶의 의미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창조해나가는 과정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철학적 관점 전환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가? 무엇보다 관계의 패러다임 변화가 필요하다. 조건부 존재론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거래적 관점이 아닌 상호 인정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의미다.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학은 이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타자는 나의 필요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무한한 가치를 지닌 존재다. 진정한 윤리적 관계는 상호 부채의 청산이 아니라, 타자의 존재 자체에 대한 무조건적 환대에서 시작된다.
또한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자아 가치를 외부의 승인이나 성취에 의존시키는 대신, 존재 자체의 소중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 연민이나 무책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차원의 자기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이 말한 '의미에의 의지'는 여기서 중요한 지침이 된다. 삶의 의미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발견하고 창조하는 것이다.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자유가 있으며, 바로 이 선택을 통해 삶의 의미를 실현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관점은 현대 심리학의 연구 결과들과도 일치한다. 자기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에 따르면, 인간의 웰빙은 외재적 보상보다는 자율성, 유능감, 관계성이라는 내재적 욕구의 충족에 더 크게 의존한다. 조건부 존재론에서 벗어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내재적 욕구를 회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 "왜 태어났는가?" 이 질문 자체가 이미 조건부 존재론의 전제를 담고 있다. 마치 존재에는 반드시 어떤 '이유'나 '목적'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찾아야만 존재가 정당화될 수 있다는 듯이.
하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러한 전제는 논리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지지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질문 자체를 바꿔야 한다. "왜 태어났는가"가 아니라 "태어난 이상 어떻게 살 것인가"로.
이러한 관점 전환은 단순한 사고의 전환을 넘어서, 삶에 대한 근본적 태도의 변화를 의미한다. 존재를 정당화해야 할 대상에서 축복해야 할 기회로, 빚진 상태에서 자유로운 상태로, 수동적 존재에서 능동적 창조자로의 전환이다.
물론 이러한 전환이 쉽지는 않다. 조건부 존재론은 단순히 개인적 사고방식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깊이 뿌리내린 구조적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가족 관계, 교육 시스템, 경제 구조, 사회적 평가 체계 모두가 이러한 조건부 존재론을 강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 차원에서의 인식 전환은 가능하며, 또한 필요하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을 바꿀 수 있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조건부가 아닌 무조건적 인정을 실천할 수 있다. 이러한 작은 변화들이 축적될 때, 보다 근본적인 사회적 변화의 가능성도 열린다.
결국 존재론적 자유의 실현은 "나는 빚진 존재가 아니라 자유로운 존재다"라는 인식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우리의 존재를 정당화할 필요가 없으며, 동시에 우리 존재를 통해 세상에 의미를 더할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존재의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통해 이유를 만들어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인간의 과제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