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허무적 아름다움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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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일본 문학사를 통틀어 이보다 강렬한 첫 문장을 꼽기는 쉽지 않다. 단 열네 글자. 그러나 이 열네 글자 안에는 소설 전체가 압축되어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가 1935년부터 문예지 『문예춘추』와 『개조』 등에 분재(分載) 형식으로 연재를 시작하여 1948년에야 단행본으로 완결 지은 소설 『설국(雪國)』은 이 단 하나의 문장으로 독자를 완전히 다른 세계로 끌어당긴다. 터널이라는 경계, 그것을 통과하는 순간의 단절감, 그리고 갑자기 펼쳐지는 흰 세계. 가와바타는 소설의 첫 줄에서 이미 이 작품의 전부를 말해버린다. 이쪽과 저쪽, 일상과 비일상, 삶과 그 너머의 무엇.


흥미로운 것은 이 터널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니가타현(新潟縣)으로 향하는 철길에는 우오누마 지역을 통과하는 긴 터널이 있고, 그 터널을 빠져나오면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폭설 지대가 펼쳐진다. 가와바타는 1934년 무렵부터 이 지역을 직접 여러 차례 방문하며 취재를 했고, 유자와 온천의 풍경과 분위기를 꼼꼼히 기록했다. 소설 속 설국은 허구의 공간이지만 동시에 구체적인 지리적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혼합이 『설국』에 독특한 존재감을 부여한다. 읽는 사람은 이 세계가 어딘가에 실제로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실제로 있다.


『설국』을 단순한 연애 소설로 읽는 것은 가능하다. 도쿄의 유한계급 청년 시마무라가 니가타현 산간 온천 마을을 오가며 게이샤 고마코와 정을 나누고, 그 과정에서 수수께끼 같은 여인 요코에게 매혹된다는 줄거리는 그 자체로 충분히 읽힌다. 그러나 그렇게 읽어버리면 무언가를 잃는 기분이 든다. 마치 터널을 통과하기 전 차창에 비치던 요코의 얼굴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것처럼.


사실 『설국』에는 이렇다 할 사건이 없다. 시마무라는 오고, 고마코와 시간을 보내고, 다시 도쿄로 돌아간다. 그리고 다시 온다. 소설의 구조는 이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사의 긴장을 추동하는 갈등도, 반전도, 드라마틱한 클라이맥스도 없다. 있는 것은 오직 계절의 변화와 그 속에서 변해가는 인물들의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 눈이다. 무수히 쏟아지고, 쌓이고, 녹고, 또 쌓이는 눈. 가와바타는 사건 대신 분위기로, 플롯 대신 감각으로 독자를 붙잡는다. 이것은 기술의 문제이기 이전에 세계관의 문제다. 삶은 극적인 사건들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삶은 대부분 이 눈처럼, 조용히 쌓이고 조용히 녹는 것들로 이루어진다.


가와바타는 1899년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두 살이 되기도 전에 아버지를 잃었고, 세 살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으나 일곱 살에 누나가, 열 살에 할머니가, 그리고 열다섯 살에 마지막 혈육이었던 할아버지마저 눈을 감았다. 그는 이 일련의 죽음들을 어린 눈으로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훗날 자신을 "장례식의 명인(葬式の名人)"이라고 불렀는데, 이 자조 어린 표현에는 단순한 쓴웃음 이상의 것이 담겨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는 일에 어쩔 수 없이 숙달되어버린 사람, 상실이 삶의 배경음처럼 항상 깔려 있는 사람. 그것이 가와바타가 스스로를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이력을 알고 나면 『설국』의 아름다움이 달리 보인다. 이 소설의 눈은 그저 계절의 풍경이 아니라, 모든 것을 덮어 지우는 망각의 은유다. 그리고 동시에, 그 하얀 망각 속에서 오히려 더 선명하게 빛나는 것들을 포착하려는 필사적인 시도이기도 하다. 가와바타에게 아름다움이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찬가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애도였다. 그리고 그 애도가 너무 오래, 너무 깊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문장들은 남다른 온도를 지닌다. 슬프지만 차갑지 않고, 아름답지만 달콤하지 않은 그 특유의 온도.


가와바타가 『설국』을 쓰기 시작한 1934~35년은 그의 나이 서른다섯 무렵이었다. 그는 이미 「이즈의 무희(伊豆の踊子)」(1926)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었고, 신감각파(新感覚派) 운동의 핵심 인물로서 일본 현대 문학의 지형을 바꾸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신감각파는 서구 모더니즘의 충격을 흡수하면서도 그것을 일본적 감수성으로 소화하려 했다. 가와바타의 문학은 그 실험의 가장 세련된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설국』은 그 세련됨이 어느 한 정점에 도달한 작품이다.


시마무라라는 인물은 의도적으로 무위도식하는 자로 설계되어 있다. 그는 서양 무용을 연구한다고 하지만 단 한 번도 서양 무용을 실제로 관람한 적이 없다. 직접 볼 수 없는 것, 상상과 텍스트로만 존재하는 예술에 집착한다. 이것은 기이하지만 동시에 일관된 논리를 지닌다. 실제로 보는 순간 환상은 깨진다. 손에 닿는 순간 신성함은 사라진다. 그는 환상이 환상인 채로 완전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시마무라의 미학이며, 동시에 그의 비겁함이다.


고마코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다. 그는 그녀를 진지하게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떠나지 못한다. 요코에게 끌리면서도 다가서지 않는다. 그는 두 여인 모두에게 반쯤만 존재한다. 이것은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가와바타는 시마무라를 악인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이 무능한 방관자적 태도에서 하나의 진실을 건져낸다. 어쩌면 인간은 가장 아름다운 것들 앞에서 본능적으로 물러서는 존재가 아닐까. 눈부신 것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처럼, 진짜 아름다움 앞에서는 참여보다 거리가 오히려 더 정직한 반응일 수 있다.


시마무라가 서양 무용 비평가임에도 무용을 직접 보지 않는다는 설정은 현실적으로는 우스꽝스럽지만, 상징적으로는 완벽하다. 그는 체험이 아니라 상상으로 세계를 구축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상상으로 구축된 세계는 현실의 접촉으로 쉽게 무너진다. 어쩌면 가와바타 자신도 그런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실제로 그는 평생 독특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살았다. 가까이 있으면서 늘 한발 물러서 있는 사람. 그 거리감이 『설국』의 아름다움을 만들었고, 동시에 그 고독을 만들었다.


고마코는 그런 시마무라와 정반대의 지점에 있다. 그녀는 죽어가는 전 약혼자 유키오의 치료비를 갚으려고 스스로 게이샤의 길을 택한 여인이다. 이미 파혼한 사이임에도, 이미 자신의 감정이 어떤 보답도 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몸과 시간을 그 헌신에 바친다. 이것은 어리석음인가, 아니면 숭고함인가. 가와바타는 이 질문에 답을 내놓지 않는다. 다만 그 행위의 순수함을 조명한다.


고마코는 자신의 일기를 꼼꼼히 기록한다. 매일 밤 술에 취해 돌아와도, 아침이면 일어나 샤미센을 연습한다. 그녀의 삶에는 일관성이 있다. 슬픔도, 기쁨도, 사랑도 아낌없이 쏟아내는 사람. 그녀의 감정은 낭비적이리만치 충만하고, 그 충만함이 오히려 시마무라의 눈에는 '헛되다'는 인상을 준다. 소설에서 시마무라가 고마코의 열정을 보며 "아름다운 허무"를 느끼는 장면은 작품 전체에서 가장 잔인하면서도 솔직한 순간이다. 그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아무 데도 닿지 않을 것임을 안다. 마치 이미 녹을 것을 알면서도 쌓이는 눈처럼.


그러나 가와바타는 이 판단을 시마무라의 한계로만 제시하지도, 고마코의 비극으로만 제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간극 자체가 의미를 지닌다. 완전히 소비되는 삶과 완전히 소비하지 않는 삶 사이의 긴장. 고마코의 낭비적 헌신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헛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수 있다. 헛됨을 알면서도 쏟아붓는 것, 그것은 어쩌면 삶을 가장 충실하게 사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참여하지 못하는 시마무라는, 고마코보다 더 충실하게 살지 못하는 자신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떠나지 못한다. 그녀는 그가 결코 될 수 없는 무언가의 표상이다.


요코는 또 다른 차원의 존재다. 소설의 첫 장면에서 그녀는 기차 차창에 반사된 이미지로 등장한다. 바깥의 어두운 설경과 요코의 얼굴이 중첩되어, 그녀는 처음부터 현실과 환영의 경계 어딘가에 위치한다. 시마무라는 그 이중 노출된 이미지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현실의 풍경 위에 투영된 요코의 얼굴, 그것은 존재와 부재가 동시에 나타나는 순간이다.


이 장면은 가와바타의 미학이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이다. 그것은 사진의 이중 노출 기법과 유사하다. 두 개의 이미지가 하나의 면 위에 겹쳐지면서 각각의 이미지보다 더 강렬한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요코는 현실에 있지만 마치 환상처럼 보이고, 설경은 현실이지만 요코의 얼굴을 배경으로 꿈처럼 보인다. 가와바타는 이 첫 장면에서 이미 이 소설 전체의 미적 원리를 설명해버린다. 실재와 허상의 중첩, 그 중첩 속에서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무언가.


요코가 유키오를 간호하며 보이는 헌신은 고마코의 헌신과 표면적으로 닮았지만 그 질이 다르다. 고마코의 헌신은 감정으로 가득 차 있고, 요코의 헌신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 그녀는 유키오를 사랑하는 것인지, 단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그 어떤 이유도 없이 그저 그것이 자신의 방식인지 불분명하다. 시마무라가 요코의 목소리를 "아름다운 슬픔으로 가득 찬 소리"라고 묘사하는 것은 단순한 수식이 아니다. 요코는 내용 없이 형식만 있는 아름다움의 표상이다. 설명 없이 감동을 주는 음악처럼. 이유 없이 마음을 흔드는 첫눈처럼.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그녀는 불 속에서 떨어진다.

결말의 화재 장면은 『설국』 전체에서 가장 논쟁적인 부분이다. 마을 창고에서 불이 나고, 2층에 있던 요코가 아래로 추락한다. 사람들이 그녀에게로 달려가는 그 순간, 시마무라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은하수가 시마무라의 내부로 쏟아져 내려오는 것 같았다."


이 문장은 맥락 없이 읽으면 당혹스럽다. 사람이 부상당하는 급박한 순간에, 왜 소설의 주인공은 하늘을 바라보는가? 이것은 무감각한 것인가, 아니면 의도된 것인가? 그러나 가와바타의 논리 안에서 이것은 필연이다. 요코가 현실에서 사라지는 순간, 그녀는 비로소 시마무라의 내면에 완전히 들어온다. 살아있는 동안 그녀는 차창 너머의 환영이었다. 그러나 그 환영이 현실에서 소멸하는 순간, 그것은 영원히 환영으로 고정된다. 이제 요코는 시마무라의 내부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이 『설국』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잔인한 진실이다. 가와바타의 세계에서 아름다운 것은 소멸함으로써 완성된다. 고마코의 열정이 헛될수록 그것은 더 아름답고, 요코가 손에 닿지 않을수록 그녀는 더 완전하다. 그리고 은하수, 그 장대하고 냉정한 우주적 배경 앞에서 한 인간의 추락은 하나의 작은 점에 불과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 점은 은하수 전체보다 더 강렬하게 시마무라의 내부로 쏟아져 들어온다. 가와바타는 이 역설을 소설의 마지막 문장으로 삼는다. 설명하지 않고, 그냥 거기 세워둔다. 독자는 그 앞에서 스스로 침묵하게 된다.


가와바타의 이 미학은 일본 전통 미의식인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와 깊이 연결된다. 이 개념은 헤이안(平安) 시대 문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가 11세기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의 『겐지 이야기(源氏物語)』를 분석하며 이론화한 것으로, 사물의 슬픔, 혹은 무상함에서 오는 정취를 가리킨다. 이것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다. 아름다운 것이 필연적으로 사라진다는 인식에서 우러나오는 복합적인 감정, 슬픔과 찬탄과 체념이 뒤섞인 그 미묘한 감각이다.


벚꽃이 이틀 만에 지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처럼, 설국의 풍경도, 고마코의 열정도, 요코의 존재도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 선명하게 빛난다. 가와바타는 이 전통적 감수성을 현대 소설의 형식으로 구현하면서, 그것을 단순한 복고나 향수로 전락시키지 않는다. 그는 모노노아와레를 20세기의 언어로 다시 번역한다. 그래서 『설국』은 고풍스럽지 않다. 오히려 놀랍도록 현대적이다.


스웨덴 아카데미가 1968년 가와바타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하며 "섬세한 감수성으로 일본인의 마음의 정수를 표현했다"고 언급한 것은 단순히 이국 취향의 반영이 아니었다. 위원회는 가와바타의 문학이 특정 문화의 지역적 아름다움을 넘어, 인간 보편의 무언가를 건드린다는 것을 알았다. 상실과 무상함 앞에서 아름다움을 감지하는 능력은 동서를 가리지 않는다. 가와바타는 그 보편성을 가장 일본적인 형식으로 구현했다. 이것이 그의 성취다.


그러나 모노노아와레가 가와바타 미학의 전부는 아니다. 거기에 더해 그의 문학에는 '유겐(幽玄)'의 감각이 있다. 유겐은 노(能) 연극과 연관된 미적 개념으로, 말로 완전히 설명될 수 없는 신비롭고 어두운 아름다움을 가리킨다. 설국의 밤, 눈 속에 반쯤 묻힌 온천 마을, 람프 불빛 아래에서 술에 취한 고마코의 얼굴, 이 모든 것에는 설명할 수 없는 깊이가 있다. 그 깊이가 바로 유겐이다. 가와바타는 모노노아와레와 유겐을 하나의 소설 안에서 교직하면서, 일본 미학의 가장 깊은 층을 드러낸다.


그러나 『설국』을 일본 전통 미학의 현대적 재현으로만 읽는 것 역시 충분하지 않다. 이 소설이 연재되던 1935년부터 1948년까지는 일본 근현대사에서 가장 격변하는 시기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태평양 전쟁이 터지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일본이 패전을 맞이했다. 이 모든 역사적 사건들이 『설국』의 연재 기간 안에 들어 있다. 그러나 소설 안에는 전쟁의 흔적이 거의 없다. 눈이 쌓이고, 고마코가 샤미센을 켜고, 시마무라가 온천에 몸을 담근다. 세상이 무너지는 동안, 설국은 조용히 눈이 내린다.


이 선택은 가와바타에게 종전 후 협력 작가라는 비판을 불러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이력을 더 면밀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단순한 회피나 부역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가와바타는 전쟁 중 전시(戰時) 선전 활동에 최소한으로 참여했고, 그마저도 직접적인 군국주의 찬양과는 거리를 두었다. 오히려 그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라져가는 일본의 전통적 아름다움을 보존하려는 사명감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그의 침잠은 도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일종의 저항이기도 했다. 무엇이 불타도 사라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기록하는 것, 그것 자체가 파괴에 대한 조용한 항거였다.


전쟁이 끝나고 패전의 충격 속에서 가와바타는 "이제 나는 일본의 슬픔만을 쓸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 말을 듣고 나면 전후에 완결된 『설국』의 마지막 부분, 화재와 추락의 장면이 다르게 읽힌다. 그것은 단순히 한 여인의 추락이 아니라,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후 폐허 위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한 나라의 눈빛처럼 보이기도 한다. 은하수가 내부로 쏟아져 내려온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하늘은 여전히 있다. 이 처연한 긍정, 혹은 긍정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 침묵의 바라봄.


소설의 언어 자체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와바타의 문장은 하이쿠적이다. 짧고, 감각적이며, 여백이 많다. 인과를 설명하지 않고, 심리를 분석하지 않는다. 대신 사물의 질감, 빛의 방향, 냄새의 농도, 소리의 결 같은 것들이 전면에 나선다. "밤의 밑바닥이 하얗게 되어 있었다." "삼나무 향이 차갑게 코를 찔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눈 위에 내린 이슬처럼 맑고 차가웠다." 이런 문장들은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준다. 그리고 독자는 설명 없이도 이해한다. 아니, 설명이 없기 때문에 더 깊이 이해한다.


이것은 단순한 문체적 선택이 아니라 존재론적 선언이다. 인간의 내면은 언어로 완전히 포착될 수 없다. 세계는 논리적 설명보다 감각적 포착에 더 충실하게 드러난다. 가와바타는 언어가 직접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윤곽을 그리고 그 내부는 독자의 감각이 채우도록 한다. 이것은 서구 모더니즘의 의식의 흐름 기법과 유사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르다. 조이스나 울프가 내면의 흐름을 언어로 포화시키려 한다면, 가와바타는 언어를 비움으로써 내면을 드러낸다.


번역의 어려움도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에드워드 사이든스티커(Edward Seidensticker)가 1956년 완성한 영역본이 지금도 가장 뛰어난 번역으로 꼽히는 것은 그가 이 하이쿠적 리듬을 영어 안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살려냈기 때문이다. 그는 훗날 이 번역 작업에 대해, 단어와 문장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감각과 침묵을 옮기는 작업이었다고 회고했다. 그 침묵 속에 소설의 영혼이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리고 한국어 번역에서도 이 감각적 여백이 얼마나 살아 있느냐에 따라 독서 경험이 크게 달라진다.


가와바타가 『설국』에서 구사하는 또 하나의 언어적 전략은 색채다. 이 소설은 놀랍도록 색채가 풍부하다. 흰 눈 위에 얹힌 붉은 석양, 검은 기차 창문에 비치는 요코의 흰 얼굴, 녹색 삼나무 숲 사이로 내리는 흰 눈. 가와바타의 색채는 인상파 화가처럼 빛의 변화에 민감하고, 그 변화 속에서 감정의 뉘앙스를 포착한다. 설국의 풍경은 단순히 아름다운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인물들의 내면 상태를 반영하고, 때로는 그것을 앞질러 보여주는 시각적 언어다.


가와바타는 1972년 4월, 노벨문학상을 받은 지 불과 4년 만에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가스를 마시고 생을 마감했다. 향년 72세. 유서는 없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이 죽음에 당혹감을 표했다. 그는 당시 건강도 비교적 양호했고, 문단의 원로로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 중이었다. 왜 그랬는지, 아무도 명확히 알지 못한다.


한 가지 자주 언급되는 사실은, 2년 전인 1970년에 그의 절친한 벗이자 후배였던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가 자위대 본부에서 할복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가와바타는 미시마의 장례식에서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였으며, 이후 주변 사람들에게 미시마의 죽음이 자신에게 큰 충격이었다고 토로했다. "미시마가 죽고 나는 살아 있을 수 없다"는 말을 했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추측이다. 유서가 없으니 그 죽음의 이유는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장례식의 명인"이라고 스스로를 불렀던 사람이, 결국 자신의 장례식을 마지막으로 치렀다는 사실에는 묘한 완결성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먼저 보내고, 마지막까지 남아 그 모든 장례식을 치른 사람. 그는 어쩌면 자기 생의 마지막 의식도 그 자신이 직접 준비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혹은 단순히, 너무 오래 지속된 고독이 마침내 임계점에 이른 것인지도 모른다.


가와바타의 죽음은 그의 문학을 바꾸지 않는다. 그러나 그 죽음을 알고 나면 『설국』의 아름다움이 더 투명해진다. 마치 서리가 내린 유리창처럼, 그것을 통해 세계가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처럼.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작가 자신도 결국 사라짐으로써 그 사랑을 완성했다. 이 해석이 너무 문학적이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가와바타의 삶과 문학 앞에서, 우리는 그보다 더 문학적인 독법을 갖기 어렵다.


『설국』을 다 읽고 나면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줄거리가 잘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시마무라가 몇 번 설국을 방문했는지, 고마코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요코가 정확히 어떤 사연을 가진 인물인지, 읽는 동안에는 분명히 알았던 것들이 책을 덮고 나면 흐릿해진다. 그러나 무언가는 남아 있다. 어떤 빛이, 어떤 냄새가, 어떤 온도가. 복도를 걷다가 갑자기 눈 냄새가 나는 것 같은 느낌, 이유 없이 슬픈 기분,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아름다운 것을 방금 놓쳤다는 감각.


이것은 가와바타가 의도한 효과일 것이다. 이야기는 잊혀도 감각은 남는다. 사람은 떠나도 그 사람이 남긴 향기는 남는다. 설국의 눈은 매년 쌓이고 녹지만, 그 흰빛의 기억은 어딘가에 계속 남아 있다. 사실 이것은 모든 위대한 문학이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와바타는 이 작동 방식 자체를 소설의 주제로 삼는다. 그는 망각과 기억, 소멸과 잔존의 역설 안에 자신의 미학 전체를 건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이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이유를 생각해본다. 『설국』이 쓰인 1930~40년대와 지금은 세계가 다르다. 일본의 온천 마을도 다르고, 게이샤 문화도 다르고, 기차 여행의 풍경도 다르다. 그러나 소설이 묻는 질문들은 하나도 낡지 않았다. 우리는 삶에 완전히 참여하고 있는가, 아니면 차창 너머로 바라보고 있는가. 아름다움은 그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다운가, 아니면 아름답기 때문에 사라지는가. 헛된 줄 알면서 쏟아붓는 사랑은 어리석은가, 아니면 가장 진실한가. 그리고 손에 닿을 수 없는 것을 손에 닿는 것보다 더 강렬하게 원한다면, 그 욕망은 어디서 오는가.


이 질문들 앞에서 독자는 잠시 멈추게 된다. 터널을 빠져나온 것처럼, 갑자기 눈의 고장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그리고 은하수가 내부로 쏟아져 내려오는 것 같은 감각을, 설명할 수 없지만 부정할 수도 없는 그 감각을, 어쩌면 잠깐 경험하게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가와바타는 아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C%84%A4%EA%B5%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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