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독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데 천재적이었다. 그것도 아주 우아하게. 불편함이란 보통 거칠고 날 것의 형태로 찾아오지만, 나보코프는 그것을 비단결 같은 언어로 포장해 독자의 손에 쥐여준다. 독자가 그 감촉에 황홀해하는 동안 불편함은 이미 피부 속으로 스며들어 있다. 1955년 파리의 올림피아 프레스에서 처음 출간된 『롤리타』는 출간 직후부터 외설 논란의 한복판에 놓였다. 영국은 1955년 이 소설을 금서로 지정했고, 아르헨티나도 같은 조치를 취했다. 프랑스에서조차 처음에는 출판사를 찾기 어려웠다. 나보코프는 네 곳의 미국 출판사로부터 출간을 거절당했고, 결국 포르노그래피를 주로 출판하던 올림피아 프레스에서 책을 낼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이러니는 소설 자체의 아이러니를 미리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소설은 단순한 불온서적이 아니라 20세기 영문학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1998년 모던 라이브러리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영어 소설 100선"에서 『롤리타』는 4위에 올랐다. 오르한 파묵은 이 소설을 읽고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고 말했다. 마틴 에이미스는 나보코프를 "영어를 모국어로 쓴 작가보다 더 위대한 영어 작가"라고 불렀다. 어떻게 소아성애자의 독백이 문학적 걸작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이야말로 『롤리타』라는 텍스트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가장 정직한 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섣불리 답하려는 순간, 우리는 이미 나보코프의 함정 안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 된다.
험버트 험버트.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같은 음절을 반복하는 이 이름은 우스꽝스럽고, 자기도취적이며, 어딘가 가짜처럼 들린다. 실제로 이것은 가명이다. 그는 자신의 진짜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험버트는 자신을 프랑스계 스위스 태생의 문학 학자로 소개한다. 그는 포와 보들레르를 즐기고, 유럽의 낡은 카페와 고풍스러운 풍경을 그리워하는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다. 독자는 처음에 그를 교양 있고 매력적인 인물로 받아들이기 쉽다. 바로 이 수용의 순간이 위험하다.
그는 열두 살 소녀 돌로레스 헤이즈를, 자신이 "롤리타"라 부르는 이 아이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아니, 그 이상이다. 그는 자신의 감정이 단순한 욕정이 아니라 고결하고 비극적인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목소리로 쓰여 있다. 서술의 전권이 가해자에게 있다는 것. 독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험버트의 눈을 통해 세계를 보아야 하고, 험버트의 언어로 롤리타를 만나야 한다. 피해자는 오직 가해자의 시선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이것이 나보코프가 설계한 함정이면서, 동시에 이 소설이 제기하는 가장 심오한 문학적·윤리적 질문이다. 우리는 악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얼마나 쉽게 그에게 공감하는가. 그리고 그 공감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험버트가 구사하는 자기변호의 수사는 정교하다. 그는 롤리타가 자신을 유혹했다고 주장한다. 그녀가 먼저 접근했고, 먼저 키스를 시도했으며, 자신은 오히려 억제하려 했다고 말한다. 이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는 잠시 후 드러나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주장이 화려한 문장으로 포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독자는 아름다운 언어에 홀려 잠시 그 논리를 받아들이려는 유혹을 느낀다. 나보코프는 바로 이 유혹의 메커니즘을 해부하고 있다.
나보코프의 삶 자체가 하나의 망명 소설이다. 1899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세 가지 언어—러시아어, 프랑스어, 영어—를 동시에 익혔다. 나비 채집을 사랑하고 체스 문제를 창작하는 취미를 지닌 이 다재다능한 청년의 삶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가족은 재산을 모두 잃고 크림반도를 거쳐 서유럽으로 망명했다. 그의 아버지 블라디미르 드미트리예비치 나보코프는 자유주의 정치인이었는데, 1922년 베를린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다른 연사를 겨냥한 암살 시도를 막다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 죽음은 나보코프의 내면에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다.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슬라브 및 로망스 문학을 전공한 뒤, 베를린과 파리에서 러시아 망명자 공동체를 위해 "브이 시린"이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썼다. 나치즘의 부상과 함께 유대인 아내 베라를 데리고 1940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이후 하버드 자연사박물관에서 나비 표본 연구원으로, 그리고 웰즐리 칼리지와 코넬 대학에서 문학 교수로 일했다. 그의 코넬 강의는 전설적이었다. 카프카의 「변신」을 가르칠 때 그는 칠판에 그레고르 잠자가 변한 벌레의 정확한 크기를 그려가며 수업을 했다. 그는 작품 속의 물리적 디테일에 집착했고, 학생들이 텍스트를 감정이 아닌 눈으로 읽기를 원했다.
『롤리타』를 쓰기 위해 나보코프는 1948년부터 1953년 사이 여름마다 미국 서부를 자동차로 여행했다. 표면적인 목적은 나비 채집이었지만, 그는 동시에 모텔과 드라이브인 식당, 고속도로 풍경을 꼼꼼히 관찰하며 노트에 기록했다. 험버트가 롤리타를 데리고 1년 넘게 미국 대륙을 가로질러 떠도는 여정은 그 기록들의 소산이다. 나보코프가 묘사하는 아메리카나—네온사인, 핫도그 가판대, 인조 가죽 소파가 놓인 모텔 방—는 관광객의 시선이 아니라 정밀한 관찰자의 눈으로 포착된 것들이다. 외국인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 나보코프는 미국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거리를 전제로 한 사랑이었고, 그 거리가 날카로운 시선을 만들었다.
소설은 본문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독자를 조종하고 있다. 허구의 편집자 "존 레이 주니어"가 쓴 서문이 그것이다. 레이는 험버트 험버트가 재판을 앞두고 심장마비로 사망하기 전 남긴 회고록을 정리해 출판한다고 밝히며, 이 텍스트가 "탁월한 교훈적 가치"를 지닌다고 강조한다. 그는 이 책이 젊은 부모들, 사회학자들, 형법 학자들에게 유용할 것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위험하지 않으며 오히려 유익하다는 선언이다. 도덕적 면죄부가 선불로 지급된다.
그러나 존 레이 주니어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 이름조차 의미심장하다. "John Ray Jr."—존 레이는 17세기 영국의 박물학자로 자연을 분류하고 명명하는 데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나보코프는 이 이름을 선택함으로써 편집자의 역할 자체를 패러디한다. 텍스트를 분류하고 의미를 확정하려는 학문적 시도를 미리 비웃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서문 안에는 소설 전체의 결말이 암시되어 있다. 돌로레스 헤이즈가 사망했다는 사실, 험버트도 죽었다는 사실. 나보코프는 서두에서 이미 모든 것을 말해버린다. 스릴러처럼 결말을 숨기지 않는다. 그가 숨기는 것은 다른 무엇이다. 바로 그 결말에 이르는 과정의 진실, 독자가 그 과정에서 경험하게 될 자기 자신의 반응이다.
이 서문 장치는 나보코프 소설 기법의 핵심과 연결된다. 그는 독자가 텍스트와 편안한 거리를 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서문의 도덕적 언어는 독자를 안심시키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독자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기 위한 준비다. 당신은 정말 도덕적 교훈을 얻기 위해 이 책을 읽는가? 아니면 무언가 다른 이유로 읽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허리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로-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세 번 밟고 내려온다. 세 번째에 이를 두드린다. 롤. 리. 타."
영문학에서 이토록 많이 인용되는 첫 문장이 또 있을까. 영어 원문은 더욱 음악적이다. "Lolita, light of my life, fire of my loins. Lo-lee-ta." 두음법의 완벽한 구사, "l"과 "t" 음의 반복, 이름을 음절로 쪼개 천천히 음미하는 관능. 이 문장은 시다. 아니, 시보다 더 위험하다. 시는 적어도 허구의 화자와 실제 독자 사이의 거리를 분명히 해두지만, 이 소설의 1인칭 서술은 독자를 험버트의 의식 안으로 직접 끌어들인다.
나보코프는 언어가 어떻게 현실을 변형하는지를 평생 탐구한 작가였다. 그는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잃고 영어로 옮겨갔을 때의 경험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했다. 새 언어로 쓴다는 것은 세계를 다시 명명하는 일이었다. 험버트의 언어는 바로 이 명명의 권력을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그는 돌로레스를 "롤리타"로 명명함으로써 그녀를 자신의 욕망의 언어 안에 가두어버린다. 이름을 바꾸는 행위는 정체성을 박탈하는 행위다. 돌로레스는 스페인어로 "슬픔들"을 의미한다. 험버트는 그 슬픔의 이름을 지우고,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롤리타—를 그 자리에 새겨넣는다.
독자가 이 아름다운 첫 문장에 매혹되는 순간, 우리는 험버트의 명명 행위에 동참하는 셈이 된다. 우리도 "롤리타"를 떠올리고, "돌로레스"를 잊는다. 나보코프는 이 메커니즘을 설계하면서 독자에게 암묵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은 언제까지 이 아름다운 언어의 공모자로 남을 것인가?
험버트의 화려한 자기서술 뒤에 가려진 실제 인물, 돌로레스 헤이즈를 직접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것이 이 소설의 가장 교묘하고 가장 폭력적인 구조다. 소설 전체가 험버트의 1인칭 서술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돌로레스는 결코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지 못한다. 우리가 보는 그녀의 행동, 그녀의 말, 그녀의 표정은 모두 험버트라는 필터를 통과한 것들이다.
험버트의 시선 안에서 롤리타는 "님펫"이다. 그가 발명한 이 단어는 나이로는 아홉 살에서 열네 살 사이이지만, 어른 남자를 유혹하는 신비로운 힘을 지닌 소녀들을 가리킨다. 그는 이 개념에 정교한 신화적 근거까지 들이댄다. 그러나 이 단어의 발명 자체가 가해의 언어다. 피해자를 특별한 존재로 격상시킴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정상화하고, 나아가 그 욕망의 방향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것이다. "그녀가 나를 유혹했다"는 주장은 이 개념 위에 서 있다.
그런데 텍스트를 꼼꼼히 읽다 보면 험버트의 서술 안에서도 돌로레스의 진짜 모습이 파편처럼 튀어나오는 순간들이 있다. 그녀는 껌을 씹는다. 영화배우의 사진을 오린다. 싸구려 잡지를 읽는다. 야구 경기를 좋아한다. 이 디테일들은 험버트의 미적 이상에 전혀 맞지 않는 것들이고, 그래서 그는 이것들을 거의 경멸하는 어조로 서술한다. 그러나 독자는 바로 이 경멸당한 디테일들을 통해 돌로레스를 본다. 껌을 씹는 평범한 미국 소녀,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고, 만화 잡지를 읽고,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을 천천히 소화하고 있는 열두 살짜리 아이를.
소설 중반부에 험버트는 자신이 모텔에서 롤리타와 첫 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 그녀가 그에게 먼저 성행위를 제안했다고 서술한다. 그는 이것을 그녀가 이미 경험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즉 그가 그녀를 "타락시킨" 것이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 서술 직후 텍스트 안에는 작은 균열이 생긴다. 롤리타는 그 후 밤마다 울었다. 험버트는 이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과 관련된 것임도 어렴풋이 안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을 빠르게 서술하고 넘어간다. 마치 중요하지 않은 세부 사항처럼. 그러나 그것은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이다. 독자는 그 울음 안에서 험버트의 모든 자기변호가 무너지는 소리를 듣는다.
나보코프가 생전에 이 소설에 대한 해석을 통제하려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롤리타』가 어떤 도덕적 메시지나 사회적 교훈을 전달하기 위한 작품이 아니라고 반복해서 강조했다. 1956년에 쓴 후기 "롤리타에 관하여"에서 그는 자신의 소설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 "그 공기, 그 빛, 그 신기루"라고 말했다.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의 신봉자였고, 문학에서 일반적인 도덕적 관념을 찾으려는 시도를 평생 조롱했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와 텍스트의 효과 사이에는 언제나 간극이 있다. 나보코프가 어떤 의도를 가졌든, 『롤리타』는 읽힐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 특히 나보코프의 "예술을 위한 예술" 선언 자체를 텍스트와 함께 읽으면 흥미로운 반전이 드러난다. 험버트 험버트야말로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하는 인물이 아닌가. 그는 롤리타를 예술 작품처럼 바라보고, 자신의 욕망을 미학적 감수성의 언어로 정당화한다. 그렇다면 나보코프는 자신의 미학적 입장 자체를 험버트라는 인물을 통해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아직까지 나보코프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쟁 중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보코프가 단순한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설 곳곳에는 정교한 문학적 암호들이 숨겨져 있다. 험버트가 처음 사랑했다가 열네 살에 잃은 소녀 아나벨 리의 이름은 에드거 앨런 포의 시 「아나벨 리」를 직접 환기한다. 포는 십대 사촌과 결혼한 것으로 유명하며, 험버트는 포를 자신과 동류로 여기며 자기변호에 활용한다. 나보코프는 이 문학적 참조를 통해 험버트의 자기기만을 더욱 선명히 드러낸다. 고전 문학의 언어로 자신의 행위를 낭만화하려는 시도. 이것은 험버트의 전략이면서, 그를 바라보는 나보코프의 차가운 시선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은 역설적이게도 험버트가 아니라 클레어 퀼티다. 퀼티는 소설 후반부에 등장하는 극작가이자 또 다른 아동 성범죄자로, 험버트와는 다른 방식으로 롤리타를 착취한다. 험버트가 롤리타를 "사랑"하면서 착취한다면, 퀼티는 아무런 낭만적 포장 없이 그녀를 이용하다 버린다. 이 두 인물의 대비는 단순하지 않다. 퀼티는 험버트의 거울상이다. 낭만적 언어를 걷어낸 험버트의 민낯. 나보코프는 이 두 인물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독자에게 묻는다. 험버트의 "사랑"은 퀼티의 착취와 본질적으로 다른가?
소설의 후반부, 험버트는 퀼티를 살해한다. 이 장면은 기이하게도 희극적으로 서술된다. 두 남자가 총격 속에서도 말장난을 하고, 퀼티는 죽으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말을 중얼거린다. 이 블랙코미디적 질감은 의도적이다. 험버트의 복수는 정의를 실현하는 영웅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자기도취적 퍼포먼스다. 그는 롤리타의 고통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이 침해당했다는 상처 때문에 퀼티를 죽인다. 정의가 아니라 소유욕의 발현이다.
퀼티 살해 장면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롤리타의 반응이다. 험버트가 퀼티를 죽이겠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말린다. 그리고 험버트에게 퀼티 대신 자신과 함께 떠나자고 제안하지 않는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명확하다. 자신의 삶, 자신의 선택, 험버트도 퀼티도 없는 자신만의 미래. 이 순간 돌로레스 헤이즈는 험버트의 서술 안에서 잠시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는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매우 피곤하고 매우 단호하다.
소설이 출간된 1955년을 생각해보자. 냉전의 한복판, 매카시즘의 광풍이 막 지나간 미국, 텔레비전이 거실을 침략하고 고속도로가 전국을 하나로 잇기 시작하던 시대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었고, 미국은 스스로를 자유세계의 수호자로 정의하며 낙관주의와 소비주의를 동시에 포용하고 있었다. 이 시대의 미국은 표면적으로 건강하고 밝고 깨끗했다. 아버지는 직장에 나가고, 어머니는 주방에서 새 냉장고를 자랑하고, 아이들은 깔끔한 교외 주택 마당에서 뛰어노는 그 그림.
험버트가 롤리타를 데리고 가로지르는 미국은 바로 이 그림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 그림의 표면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을 나보코프는 집요하게 기록한다. 험버트와 롤리타가 묵는 모텔들, 그들이 먹는 드라이브인의 햄버거, 롤리타가 열광하는 할리우드 영화배우들. 이 소비문화의 아이콘들은 롤리타가 욕망하는 전부이면서, 동시에 그녀를 가두는 세계의 경계이기도 하다. 그녀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 어머니는 죽었고, 아버지는 없으며, 험버트가 전부인 상황에서 그녀가 매달릴 수 있는 것은 팝 문화의 환상뿐이다.
나보코프는 험버트를 통해 이 소비 사회를 경멸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그 경멸 자체를 아이러니로 뒤집는다. 험버트는 미국의 키치를 조롱하는 유럽 지식인이지만, 그 지식인이야말로 이 땅에서 가장 야만적인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유럽적 교양은 문명의 증거가 아니라 착취를 세련되게 포장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아메리카나를 경멸하면서도 그 안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험버트는 구세계의 오만함이 어떻게 신세계에서 새로운 형태의 폭력으로 발현되는지를 보여주는 아이러니한 표본이다.
더불어 이 소설은 전후 미국 사회가 얼마나 아동에게 취약한 환경을 만들었는지를 슬쩍 드러내기도 한다. 샬럿 헤이즈—롤리타의 어머니—는 전형적인 전후 미국 중산층 미망인이다. 그녀는 허영심이 있고, 얄팍하고, 지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녀는 딸을 사랑하는 어머니이기도 하다. 험버트는 그녀를 끊임없이 조롱하고 경멸하지만, 독자는 샬럿이 험버트의 실체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 그녀의 어리석음 때문만이 아님을 안다. 교양 있고 매력적이며 유럽의 세련미를 풍기는 하숙인—험버트는 이 사회가 신뢰를 부여하도록 설계된 모든 자질을 갖추고 있다.
『롤리타』를 둘러싼 비평적 논쟁의 역사는 이 소설만큼이나 복잡하다. 출간 초기에는 주로 외설성 여부가 문제였다. 그레이엄 그린은 1955년 영국 선데이 타임스에 이 소설을 그해 최고의 책 중 하나로 꼽았고, 이로 인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1960년대 이후 소설이 영미권에서 정식 출판되면서 논의는 더 정교해졌다.
1970년대와 80년대 페미니즘 비평의 부상은 이 소설에 전혀 새로운 독법을 가져왔다. 마이클 우드와 같은 비평가들이 이 소설의 문학적 가치를 옹호하면서도 그 윤리적 복잡성을 인정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 소설이 아동 성범죄를 낭만화하고 피해자를 지워버린다는 강력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특히 크리스틴 클리먼트 같은 논자는 험버트의 서술이 독자로 하여금 가해자의 시각을 내면화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소설 자체가 하나의 해로운 텍스트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비판에 대해 마이클 우드를 비롯한 또 다른 비평가들은 텍스트가 험버트를 신뢰할 수 없는 화자로 명확히 설정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반론했다. 험버트의 서술 안에는 자기 배반의 순간들이 무수히 숨어 있다. 롤리타의 밤마다 우는 소리, 그녀가 새어나가려 했다는 암시들, 퀼티에게 도망간 이유. 독자가 충분히 주의 깊게 읽는다면, 험버트의 화려한 언어 뒤에 숨겨진 진실을 스스로 재구성할 수 있다. 나보코프는 독자의 능동적 읽기를 신뢰하며, 오히려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독법 중 어느 것이 옳은가를 결정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을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 긴장 자체다. 『롤리타』가 오늘날까지 읽히고 논의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불편한 긴장을 해소하지 않기 때문이다. 명쾌한 도덕적 결론을 제공하는 소설은 읽고 나서 덮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덮고 나서도 계속 말을 걸어온다.
소설이 끝나기 얼마 전, 험버트는 수년 만에 돌로레스를 다시 만난다. 그녀는 이미 열일곱 살이 되어 있다. 퀼티에게 버려진 후 딕 슈일러라는 평범한 노동자와 결혼해 알래스카의 오지로 이주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녀는 임신 중이고, 가난하다. 험버트의 눈에 비친 그녀는 더 이상 "님펫"이 아니다. 통통해졌고, 손이 거칠어졌으며, 한때 그가 찬미했던 어린 소녀의 흔적은 없다.
이 장면에서 험버트는 처음으로 무언가 진실에 가까운 것을 발화한다. 그는 자신이 그녀의 어린 시절을 망쳤다는 것을, 그녀의 삶에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남겼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돈을 주려 하고, 함께 도망치자고 말한다. 돌로레스는 거절한다. 단호하게. 그 거절의 순간이야말로 소설 전체에서 돌로레스 헤이즈가 가장 뚜렷하게 자신의 주체성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그녀는 험버트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퀼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이었다는 것을.
그러나 이 장면에서도 나보코프는 쉬운 카타르시스를 허락하지 않는다. 험버트는 이 만남 이후 쓰는 글에서 여전히 자기중심적이다. 그는 죄책감을 느끼지만, 그 죄책감의 무게 중심은 여전히 자신에게 있다. 그는 자신이 느끼는 상실감, 자신이 경험하는 비극성에 더 집중한다. 돌로레스가 실제로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그녀의 내면이 어떻게 망가졌는지는 험버트의 시야 안에서 결코 완전히 펼쳐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까지 유지되는 가장 큰 폭력이다. 피해자의 고통을 서술할 권한조차 가해자가 독점하고 있다는 것.
소설의 결말에서 돌로레스 헤이즈는 출산 중 사망한다. 험버트도 재판을 기다리다 심장마비로 죽는다. 나보코프는 그 누구에게도 살아있는 결말을 허락하지 않는다. 퀼티는 험버트에게 살해당했다. 샬럿은 이미 교통사고로 죽었다. 이 소설 안에서 살아남는 인물은 없다. 그것은 어쩌면 가장 솔직한 진술이다. 이 이야기는 아무도 온전히 살아남지 못하는 이야기라는 것. 가해자도, 피해자도, 방조자도. 그리고 어쩌면 이 이야기를 읽은 독자도.
나보코프가 코넬 대학에서 강의했던 방식은 지금도 많은 이야기를 낳는다. 그는 수업 첫날 학생들에게 "등을 곧게 세우고 앉으라"고 요구했다. 그것은 어떤 자세의 문제가 아니었다. 텍스트와의 관계에 대한 요구였다. 게으르게, 수동적으로, 텍스트에 기대지 말라는 것. 능동적으로, 비판적으로, 눈을 크게 뜨고 읽으라는 것. 그는 학생들에게 카프카의 소설을 읽히면서 그 속의 지리적 디테일을 지도로 그리게 했고, 오스틴의 소설 속 저택의 구조를 스케치하게 했다. 세부를 통해 전체를 보는 것, 텍스트가 스스로 말하게 두는 것.
이 강의 방식이 『롤리타』를 읽는 데 적용된다면 어떨까. 험버트의 아름다운 언어 뒤에서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밤마다 들리는 소녀의 울음소리. "롤리타"라는 이름 대신 지워진 "돌로레스"라는 이름. 험버트가 빠르게 넘어가는 문장들. 반쪽짜리 자백들. 이 디테일들을 모으면 험버트의 서술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구성된다. 나보코프는 이 숨겨진 이야기를 독자가 스스로 발견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롤리타』를 읽는 경험은 그래서 단순히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읽기 방식 자체를 의식하는 경험이다. 나는 왜 이 문장에서 멈추었는가. 나는 왜 이 부분에서 험버트에게 공감했는가. 나는 왜 롤리타보다 험버트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있는가. 이 질문들은 소설 안의 이야기에 대한 질문이면서, 독자 자신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아름다운 언어에 설득당하는가. 권위 있는 목소리에 굴복하는가.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서사에 집중하는가.
이 자기성찰의 불편함이 『롤리타』의 진짜 힘이다. 그것은 독자를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참여자로 만든다. 그리고 그 참여에는 책임이 따른다.
지금 이 시대에 『롤리타』를 읽는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미투 운동 이후 성적 착취와 권력 구조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이 급격히 높아진 오늘날, 험버트의 자기변호는 훨씬 더 낯익게 들린다. 그것은 단지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그녀가 먼저 시작했다", "사실 그녀는 원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그건 사랑이었다"—이 말들은 현실 세계의 수많은 가해자들이 반복해온 언어다. 험버트 험버트는 허구의 인물이지만, 그의 언어는 너무나 실제적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나보코프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 소설을 통해 가장 오래 살아남는 기여를 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착취의 언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게 포장될 수 있는지를,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쉽게 속을 수 있는지를 이 소설은 700페이지에 걸쳐 보여준다. 예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식을 위해서. 나보코프가 교훈적 의도를 강하게 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결과적으로 착취의 언어에 대한 가장 정교한 해부서가 되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험버트가 롤리타에게—이미 죽어버린 그녀에게—남기는 말이다. 그는 자신의 "부패하고 죽어가는 육체"와 대비하여 그녀의 영원성을 말한다. 이 결말에도 자기도취는 여전하다. 그러나 그 안에서 어떤 진심의 파편이 반짝이는 것도 사실이다. 나보코프는 험버트에게 완전히 나쁜 사람의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무언가를 느끼는 사람이다. 그냥 느끼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 죄책감이 죄를 지우지 않는다는 것을 소설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인간적 복잡성을 완전히 거세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이 소설을 단순한 악당 이야기로 만들지 않는 요소다. 그리고 그래서 더 불편하다.
『롤리타』는 읽기 쉬운 소설이 아니다. 읽어서 기분이 좋아지는 소설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독자를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자신을, 언어를, 권력을, 아름다움의 위험을 생각하게 만든다. 출간된 지 7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이 소설이 살아있는 이유는 그것이 여전히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편안한 답을 가지고 덮을 수 있는 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책을 덮고 나서도 오래도록 찜찜하고 매혹되고 혼란스럽다면, 나보코프는 정확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낸 셈이다. 좋은 소설의 유일한 임무는 독자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롤리타』는 그 임무를 불편할 만큼 완벽하게, 아름다울 만큼 냉혹하게 수행한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A1%A4%EB%A6%AC%ED%83%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