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은 읽는 순간보다 덮고 난 뒤에 더 강렬해진다. 읽는 동안은 잘 몰랐다가, 책을 내려놓고 일상으로 돌아온 순간 갑자기 사방이 낯설어 보이는 경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가 정확히 그런 책이다. 1932년에 출판된 이 소설은 벌써 한 세기 가까이 지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사는 독자에게는 오히려 동시대의 경고처럼 읽힌다. 아니, 경고라는 말조차 부족하다. 이 소설은 우리가 이미 절반쯤 도달해 있는 세계를 먼저 그려 놓았다는 점에서 예언에 가깝다. 그런데 가장 무서운 것은 그 예언의 내용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읽고도 우리가 별로 놀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소설의 배경은 서기 2540년으로 설정되어 있다. 헉슬리는 이 미래를 '포드 기원 632년(A.F. 632)'이라고 부른다. 기준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아니라 헨리 포드의 첫 번째 모델 T 자동차 생산 연도인 1908년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헉슬리에게 산업화된 대량생산 체계의 등장은 단순한 경제적 혁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을 규격화하고 대체 가능하게 만드는 세계관의 출발점이었다. 컨베이어 벨트 위의 자동차처럼 인간도 동일한 공정을 거쳐 찍혀 나올 수 있다면, 그 세계에서 '인간'이라는 개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소설은 이 질문에서 시작한다.
헉슬리가 그린 '세계국가(World State)'는 표면적으로 이상향이다. 전쟁은 없고, 빈곤은 없으며, 사람들은 늘 웃는다. '공동체, 동일성, 안정(Community, Identity, Stability)'이라는 세 가지 표어 아래 모든 것이 정밀하게 설계되고 관리된다. 아이들은 자궁이 아닌 공장에서 태어난다. 보카노프스키 공정(Bokanovsky's Process)이라 불리는 인공 복제 기술은 하나의 수정란으로 최대 96명의 동일한 인간을 만들어 낸다.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이라는 다섯 계급은 태어나기 전부터 화학적으로 결정된다. 알파와 베타는 지적 노동을 위해 온전하게 발달하도록 배양되고, 엡실론은 단순 노동에 적합하도록 의도적으로 산소 공급을 줄이고 알코올을 투입해 지적 능력을 억제한다. 이 세계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모든 것은 수정란 단계에서 이미 결정된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아무도 선택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엡실론으로 태어난 사람은 자신이 엡실론임을 기뻐한다. 그는 알파가 되고 싶다는 욕망 자체를 갖도록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단순한 억압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억압은 욕망을 막는다. 하지만 이 세계는 애초에 욕망의 방향 자체를 만들어 낸다.
그 도구가 바로 조건화(conditioning)다. 소설 속 아이들은 수면 중에도 도덕적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주입받는다. 자연을 사랑하는 것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자연은 소비를 유도하지 않으니까.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꽃을 두려워하도록 조건화한다. 반면 새로운 옷을 사고, 새로운 스포츠 용품을 구입하는 것은 미덕이 된다. 낡은 것을 고쳐 쓰는 행위는 반사회적으로 간주된다. 이 논리는 소름 끼칠 만큼 현대의 소비주의와 닮아 있다. 오늘날 우리는 작년 모델 스마트폰을 쓰는 것을 약간 부끄럽게 여기고, 새 계절이 올 때마다 옷장을 바꾸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 같은 불안을 느낀다. 그 불안은 어디서 왔는가. 우리가 스스로 원해서인가, 아니면 그렇게 원하도록 만들어졌는가. 헉슬리는 이 질문을 90년 전에 이미 던졌다.
바로 이 지점에서 헉슬리의 통찰은 조지 오웰의 것과 결정적으로 갈라진다. 오웰의 『1984』가 공포를 통한 통제를 묘사했다면, 헉슬리는 쾌락을 통한 통제를 그렸다. 두 소설은 종종 함께 언급되지만 그 철학적 함의는 전혀 다르다. 오웰의 디스토피아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억압받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빅 브라더는 폭력으로 강제한다. 저항의 의지가 있어도 몸이 부서지는 세계다. 하지만 헉슬리의 세계에서는 아무도 억압받는다고 느끼지 않는다. 저항의 의지 자체가 발생하지 않는다. 미디어 이론가 닐 포스트만은 1985년 저서 『죽도록 즐기기(Amusing Ourselves to Death)』에서 이 차이를 날카롭게 포착했다. 오웰은 우리가 증오하는 것에 의해 파괴될 것을 두려워했지만, 헉슬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의해 파괴될 것을 두려워했다고. 그리고 포스트만은 헉슬리가 옳았다고 결론지었다. 텔레비전, 이후의 인터넷, 그리고 소셜미디어는 시민을 소비자로, 사유하는 인간을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로 서서히 변환시켰다.
세계국가의 시민들은 소마(soma)라는 약을 복용하고, 감각 영화(feelies)를 즐기며, 자유로운 성생활을 영위한다. 소마는 부작용 없는 환각제이자 안정제로, 불안이나 슬픔이 찾아오는 순간 즉시 복용하도록 장려된다. 소설 속에서 '소마 휴가(soma holiday)'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화학적으로 탈출하는 것을 여행처럼 이야기하는 어법이다. 감각 영화는 시각과 청각뿐 아니라 촉각까지 자극하는 몰입형 오락이다. 관객은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경험한다. 그러나 그 경험은 어떠한 의미도, 어떠한 질문도 담고 있지 않다. 순수한 자극의 연속일 뿐이다. 이것을 읽으며 오늘날의 VR 기기와 숏폼 콘텐츠를 떠올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어렵다. 틱톡과 인스타그램 릴스가 설계된 방식, 즉 3초마다 새로운 자극을 제공하고 스크롤을 멈출 수 없게 만드는 알고리즘은 헉슬리의 감각 영화와 본질적으로 같은 목적을 가진다. 사유하는 틈을 없애는 것. 내면의 침묵을 두려운 것으로 만드는 것.
소설의 세 주인공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 세계에 반응하며, 그 반응의 차이가 소설의 핵심 논점을 만들어 낸다. 첫 번째는 버나드 맑스다. 알파 플러스 계급의 심리 기술자인 그는 신체가 다른 알파들보다 왜소하다. 배양 과정에서 실수로 알코올이 과다 투입된 결과라는 소문이 있다. 그 왜소함 때문에 그는 사회에서 미묘하게 소외감을 느끼고, 그 소외감이 체제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헉슬리는 버나드를 결코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다. 버나드의 불만은 철학적 성찰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이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는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야만인(Savage)' 존을 세계국가에 데려온 뒤 한때 유명인사가 된다. 그 순간 버나드는 자신이 비판하던 세계에 기꺼이 편입되려 한다. 파티를 열고, 여자를 만나고, 자신의 명성을 즐긴다. 체제의 외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체제의 혜택을 덜 받고 있었을 뿐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버나드의 모습은 독자에게 불편한 거울을 들이민다.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불만과 저항감이 진정한 자유에 대한 갈망인지, 아니면 더 많은 특권에 대한 갈망인지 따져보게 만든다.
두 번째 인물은 헬름홀츠 왓슨이다. 그는 버나드와 달리 외모도 능력도 출중한 알파 플러스이지만, 자신의 글쓰기 능력이 허무한 선전문구 작성에만 쓰이고 있다는 공허함을 느낀다. 그에게는 무언가를 진정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존이 셰익스피어를 읽어 주었을 때 그는 격렬한 감동을 받지만, 동시에 그 언어가 담고 있는 고통과 상실의 감각이 자신에게 낯설다는 것도 느낀다. 그는 진실에 다가가고 싶어 하지만, 그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너무 완벽하게 조건화된 세계 안에서 자랐다. 헉슬리는 헬름홀츠를 통해 지식인의 딜레마를 보여 준다. 문제를 인식하는 능력은 있지만, 그 문제를 뛰어넘기 위한 경험과 언어가 없는 상태. 그것은 현대의 많은 비판적 지식인들이 놓인 처지와 다르지 않다.
세 번째이자 가장 중심적인 인물은 존, '야만인'이다. 그는 세계국가 밖의 보호구역(Reservation)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린다는 세계국가 출신이지만 사고로 보호구역에 남겨진 채 존을 낳았다. 존은 문명도, 보호구역의 전통도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성장했고, 그 과정에서 찾아낸 유일한 정신적 자양분은 낡은 셰익스피어 전집이었다. 소설의 제목 '멋진 신세계'는 바로 그 셰익스피어, 즉 『템페스트』의 5막 1장에서 미란다가 외치는 대사에서 가져온 것이다. "O brave new world, that has such people in't!" 그러나 헉슬리는 이 구절을 반어로 사용한다. 미란다가 그 말을 외쳤을 때 그녀는 갓 문명 세계를 접한 순진한 소녀였다. 존 역시 세계국가를 처음 보았을 때 같은 설렘을 느낀다. 그리고 그 설렘이 얼마나 빠르게 환멸로 바뀌는지를 추적하는 것이 소설의 중반부다.
존과 세계 통제관 무스타파 몬드의 대화는 소설 전체의 철학적 절정이다. 몬드는 소설에서 가장 복잡한 인물이다. 그는 세계국가의 체제를 설계하고 유지하는 자이지만, 동시에 그 체제의 한계와 희생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자이기도 하다. 그는 젊은 시절 물리학 연구자였고, 위험한 실험을 감행했다가 당국의 제재를 받았다. 그 순간 그에게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아이슬란드로 유배되어 연구를 계속하거나, 안정을 택하고 통제관이 되거나.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옳았다고 아직도 믿는다. 아니, 믿는다고 말한다.
존이 고통받을 권리, 신을 믿을 권리, 시를 쓸 권리, 더럽고 위험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 권리를 요구하자, 몬드는 놀랍게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존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옳다고 인정한다. 인류가 예술, 종교, 사랑, 고통을 잃어버린 것은 사실이며, 그것들은 진정한 인간성의 구성요소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과 안정을 맞바꾸는 것이 결국 더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99퍼센트의 사람들이 고통 없이 살 수 있다면, 1퍼센트의 깊은 인간성을 희생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것은 철학에서 '공리주의의 함정'이라 불리는 문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원칙이, 소수의 자유와 존엄을 체계적으로 제거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헉슬리는 이 물음에 답을 내리지 않는다. 그는 다만 그 물음이 얼마나 무겁고 회피하기 쉬운지를 보여 줄 뿐이다.
몬드의 서재에는 금서들이 가득하다. 셰익스피어, 성경, 철학서들. 그는 이것들이 불온하기 때문에 금지했지만, 자신은 읽는다.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자가 타인에게는 그 접근을 막는 것이다. 이 장면은 정보 통제의 핵심을 찌른다. 지식은 무기이기도 하고 특권이기도 하다. 알 권리가 선택적으로 허용되는 세계에서, 앎이란 결국 권력의 또 다른 이름이다. 오늘날 주요 플랫폼의 알고리즘이 어떤 정보를 보여 주고 어떤 정보를 숨기는지를 결정하는 방식은 이 장면과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다. 우리는 알고리즘의 큐레이션을 '개인화 서비스'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사유를 특정 방향으로 안내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불편한 진실이다.
헉슬리라는 인물을 이해하지 않고 이 소설을 읽는 것은, 악보 없이 교향곡을 듣는 것과 같다. 그는 단순한 소설가가 아니었다. 다윈의 진화론을 대중에게 처음으로 설득력 있게 전파하며 '다윈의 불독'이라 불렸던 생물학자 토머스 헨리 헉슬리가 그의 할아버지이고, 생물학자이자 인본주의자이며 UNESCO 초대 사무총장을 지낸 줄리언 헉슬리가 그의 형이다. 올더스는 이 집안에서 자랐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과학, 진화론, 윤리학, 사회사상의 교차점에 놓인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개인사에서 더욱 결정적인 사건은 따로 있었다. 열여섯 살에 각막염으로 시력을 거의 잃은 것이다. 그는 한동안 글을 읽을 수도, 쓸 수도 없었다. 그 시간은 그를 내면으로 몰아넣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사유하는 능력, 관찰이 아니라 상상으로 세계를 재구성하는 힘은 이 시기에 더욱 단련됐다. 이후 시력이 어느 정도 회복됐을 때 그는 타자기 글자를 읽기 위해 강력한 돋보기를 사용해야 했다. 그 불편함 속에서 그는 계속 썼다.
『멋진 신세계』는 헉슬리가 당대의 가장 첨예한 과학적·철학적 논쟁들을 흡수하여 소설로 증류한 결과물이다. 1920년대와 30년대는 행동주의 심리학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다. 이반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실험은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졌고, 존 B. 왓슨은 "나에게 열두 명의 건강한 아이를 주면 내가 원하는 어떤 사람으로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유명한 선언을 했다. 이 선언은 과장이었지만, 인간의 행동이 환경과 반복된 자극에 의해 설계될 수 있다는 믿음은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 헉슬리는 이 흐름을 포착하고, 그것을 극단까지 밀고 갔다. 소설 속에서 갓 태어난 아이들에게 꽃과 책을 주었다가 전기충격을 가해 공포를 조건화하는 장면은, 파블로프의 실험실이 국가 단위로 확대된 악몽이다.
소설이 출판된 지 26년이 지난 1958년, 헉슬리는 『재방문된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Revisited)』를 출판하며 자신의 예언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현실화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당초 소설을 쓸 때 그는 이 세계가 600년쯤 뒤에나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불과 30년 만에 그 세계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이미 대중매체와 광고산업이 소비자를 합리적 시민이 아닌 충동적 욕망의 담지자로 재정의하고 있음을 포착했다. 에드워드 버네이스라는 인물이 그 상징이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조카이기도 했던 버네이스는 '홍보(Public Relations)'라는 직업 자체를 만들어 낸 인물로, 무의식적 욕망을 자극해 소비를 유도하는 기술을 체계화했다. 버네이스는 자신의 일을 '동의의 제조(manufacturing consent)'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원하지 않던 것을 원하게 만드는 것. 헉슬리는 바로 이것이 세계국가의 조건화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헉슬리의 경고는 1958년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같은 에세이집에서 과학적 독재(scientific dictatorship)의 가능성을 논하며, 미래의 가장 위험한 권력은 폭력이 아니라 생물학적·심리학적 조작을 통해 지배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인터넷도, 소셜미디어도, 뇌과학의 폭발적 발전도 없던 시대에 한 작가가 이 수준의 예측을 했다는 사실은 경탄스럽다. 오늘날 인간의 감정과 행동이 도파민 분비와 연결된다는 것을 이용해 설계된 플랫폼들, 뇌-컴퓨터 인터페이스를 개발하는 기업들, 그리고 유전자 편집 기술이 인간의 형질을 선택적으로 설계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논의가 오간다. 헉슬리의 소설이 디스토피아 소설 선반에 꽂혀 있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사회과학 코너에 있어야 하는지 모를 지경이다.
존의 비극은 소설의 마지막에 폭발한다. 세계국가의 삶을 거부한 그는 런던 외곽에 버려진 등대로 물러나 혼자 살기로 한다. 그는 스스로 고통을 가하며 문명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정화하려 한다. 그러나 그 고통 자체가 구경거리가 된다. 사람들이 몰려오고 감각 영화 카메라가 그를 촬영하고, 존의 자기부정 행위는 오락으로 소비된다. 그는 저항하고 있지만 그 저항이 상품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 반(反)소비주의 메시지가 광고로 팔리고, 저항의 미학이 패션이 되며, 분노가 클릭으로 환산되는 구조와 정확히 겹친다. 진정한 저항은 어떻게 가능한가. 체계가 모든 것을 흡수하고 소비할 수 있는 세계에서, 저항 자체가 체계의 일부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존은 그 해답을 찾지 못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 죽음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많은 독자들은 존의 결말을 패배로, 체계에 굴복한 것으로 읽는다. 그러나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존은 끝까지 체계의 언어로 살기를 거부했다. 소마를 먹지 않고, 감각 영화를 즐기지 않으며, 쾌락으로 고통을 지우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그는 철저히 혼자였다. 누구도 그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이해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선택을 유지했다. 그것은 어쩌면 가장 외로운 형태의 자유다. 헉슬리는 자유가 반드시 아름답거나 승리하는 형태로 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자유는 때로 처절하고, 이해받지 못하고, 죽음으로 귀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유다.
이 소설이 지금도 읽혀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결말의 처절함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디스토피아를 먼 미래의 이야기로, 혹은 덜 발전한 다른 나라의 이야기로 거리를 두며 읽는다. 하지만 헉슬리의 디스토피아는 칼날이 아니라 솜이불처럼 다가온다. 너무 포근하고, 너무 따뜻하고, 너무 편안해서 그것이 질식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아니, 깨닫더라도 그 편안함을 포기하기가 싫어진다. 소마 한 알을 먹으면 불안이 사라지는 세계에서, 불안을 견디는 것은 어리석음처럼 보인다. 그런데 헉슬리는 바로 그 불안이 인간임의 증거라고 말한다. 고통을 느끼는 능력, 질문을 멈추지 않는 정신, 답이 없음에도 계속 물음을 던지는 태도. 그것들이 인간을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와 구분 짓는 것이라고.
『멋진 신세계』를 읽는다는 것은 그 솜이불의 감촉을 의식하는 행위다. 알고리즘이 권장하지 않는 책을 손에 드는 것, 불편한 생각을 소마로 덮지 않고 직면하는 것, 효율이 아닌 의미를 기준으로 시간을 쓰는 것. 이 사소해 보이는 선택들이 헉슬리가 말하는 저항의 출발점이다. 거대한 혁명이 아니라 일상의 마찰이다. 쾌락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쾌락이 어디서 왔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 물음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아직 존처럼 살 수 있다. 비극적일지 몰라도, 인간으로서.
결국 이 소설은 질문으로 끝난다. 당신은 행복을 원하는가, 아니면 자유를 원하는가? 이 두 가지가 반드시 함께 올 수 없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무스타파 몬드는 안정을 선택했다. 버나드 맑스는 결국 편안함 쪽으로 돌아섰다. 헬름홀츠 왓슨은 아이슬란드로 유배되는 것을 택하며 비로소 자신의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존은 자유를 택했고, 그 자유로 죽었다. 이 네 가지 선택지 중 어느 것도 쉽지 않다. 헉슬리는 답을 주지 않는다. 그는 다만 그 질문을 회피하지 말라고, 소마 한 알로 덮어두지 말라고, 무엇보다 그 질문이 아직 살아있는 동안에는 당신이 아직 인간이라는 증거라고 말한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A9%8B%EC%A7%84_%EC%8B%A0%EC%84%B8%EA%B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