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종종 가장 극적인 정복자보다 가장 집요한 생존자를 더 오래 기억한다. 14세기 초 몽골의 멍에 아래 짓눌린 루스의 땅에서, 한 공후(公侯)가 칼 대신 돈주머니를 들고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그의 이름은 이반 1세, 그러나 후세는 그를 '칼리타(Kalita)', 즉 '돈주머니'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렀다. 이 별명은 조롱인가, 아니면 경의인가. 그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곧 이반 칼리타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1911년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그를 가리켜 "흩어진 러시아 땅의 최초의 수집자(sobiratel)"라 불렀고, "미래의 전제 국가의 토대를 민족 제도로서 놓은 인물"이라 평가했다. 이 단 하나의 묘사 속에 이반 칼리타의 삶 전체가 압축되어 있다.
이반이 태어난 1288년경, 루스는 이미 반세기 넘게 몽골 제국의 속국이었다. 1237년과 1238년, 바투 칸이 이끄는 몽골 군대는 키예프 루스를 초토화했고, 1240년 키예프 자체도 함락되었다. 이후 들어선 킵차크 칸국(황금 군단)은 루스 공후들에게 야를리크(yarlyk), 즉 통치 허가증을 발급하는 방식으로 지배를 유지했다. 공후들은 사라이(Sarai)에 있는 칸의 궁정으로 주기적으로 굴욕적인 조공 여행을 떠나야 했으며, 세금 징수권과 통치권은 언제든지 칸의 변덕에 따라 박탈될 수 있었다. 미국의 중세 러시아사 전문가 찰스 J. 헬퍼린(Charles J. Halperin)은 그의 저서 『러시아와 황금 군단(Russia and the Golden Horde)』(1985)에서 이 시대의 핵심적 역설을 날카롭게 포착했다. 러시아의 사료 편찬자들은 대개 정교회 성직자들이었기 때문에 몽골과의 협력 관계를 가능한 한 침묵과 우회로 처리하려 했고, 그 결과 루스의 공후들이 실제로 얼마나 깊이 몽골 체제에 편입되어 있었는지가 오랫동안 과소평가되었다는 것이다. 헬퍼린은 이를 "침묵의 이데올로기(ideology of silence)"라고 불렀다. 이 개념은 이반 칼리타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후대의 기록자들이 그의 몽골 협력을 의도적으로 미화하거나 희석했기 때문에, 우리는 연대기의 행간을 읽어야만 그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반의 아버지 다닐 알렉산드로비치는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막내아들로, 모스크바라는 작은 변방 도시를 물려받았다. 당시 모스크바는 트베리나 수즈달 같은 강력한 공국들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후대의 역사가들이 주목한 중요한 지리적 이점이 숨어 있었다. 러시아 역사학의 태두(泰斗)인 바실리 클류체프스키(Vasily Klyuchevsky)는 그의 5권짜리 대작 『러시아 역사 강좌(Kurs Russkoi Istorii)』에서 모스크바 굴기의 세 가지 구조적 요인을 분석했다. 첫째, 모스크바는 다른 루스 공국들의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동쪽과 서쪽 양방향의 침략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보호받았다. 리잔이나 트베리 같은 국경 지대의 공국들이 몽골 약탈대의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 동안, 모스크바는 완충지대의 혜택을 누렸다. 둘째, 이러한 상대적 안전은 약탈과 전란을 피해 이주해오는 정착 농민들과 납세 주민들을 모스크바로 끌어들였다. 셋째, 모스크바는 노브고로드에서 볼가강으로 이어지는 핵심 교역로 위에 위치하여 경제적 이점을 처음부터 내장하고 있었다. 클류체프스키의 이 분석은 오늘날까지도 모스크바 공국의 부상을 설명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구조론적 틀로 인정받고 있으며, 이반 칼리타의 성공을 단순히 개인의 천재성으로 환원하는 것을 경계하게 만든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이반을 더 흥미롭게 만든다. 구조적 이점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현실로 전환한 것은 결국 이반이라는 인간의 선택과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이반의 아버지 다닐과 형 유리 3세는 이 이점을 서서히 활용하기 시작했고, 유리는 1319년 황금 군단 칸으로부터 블라디미르 대공의 야를리크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유리는 1325년 트베리의 공후 드미트리에게 살해당했다. 이것은 복수였다. 드미트리의 아버지 미하일이 먼저 유리에 의해 황금 군단의 궁정에서 죽음으로 내몰렸기 때문이다. 이 핏빛의 연쇄가 이반에게는 권력의 사다리가 되었다. 칸은 드미트리를 처형했고, 블라디미르 대공의 자리는 트베리 공후 알렉산드르에게 넘어갔다. 이반은 모스크바 공후 자리만을 이어받았지만, 그의 눈은 이미 더 멀리를 향하고 있었다.
이반의 정치적 천재성이 처음 빛을 발한 사건은 1327년 트베리에서 일어난 반란이었다. 당시 킵차크 칸 우즈벡(Özbeg Khan)의 사신 촐한(Chol-khan, 혹은 셰브칼)이 트베리에 주둔하며 주민들을 착취했다. 현대의 학자들은 그의 파견 목적에 대해 이견을 보이는데, 헬퍼린은 그가 페르시아 원정 준비를 위한 징병과 세금 징수를 감독하러 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어떤 이유였든 촐한의 행동은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연대기에 따르면, 1327년 8월 15일 아침, 일군의 타타르인들이 집사 두트코라는 인물의 암말을 빼앗으려 하자 분노한 주민들이 들고일어났고, 그 불꽃은 순식간에 도시 전체로 번졌다. 트베리 연대기와 로고제스키 연대기에 가장 상세하게 기록된 이 봉기에서 촐한은 공후의 궁전에 피신했다가 건물째 불에 타 죽었고, 트베리에 있던 타타르인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 봉기를 루스 역사의 첫 번째 대규모 반몽골 민중 봉기로 평가하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트베리의 공후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가 이 봉기를 사전에 기획했다는 증거는 없다. 현대 역사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는 그가 봉기를 막을 의지나 능력이 없었거나, 혹은 막으려 시도했지만 민중의 분노를 제어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반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연대기에는 그가 칸의 명령으로 소환되었다고 적혀 있지만, 다른 기록들은 이반이 자발적으로 황금 군단의 수도 사라이로 달려가 사건을 고발했다고 전한다. 러시아어 사료의 텍스트학 분석에 탁월한 하버드 대학의 역사가 도널드 오스트로프스키(Donald Ostrowski)의 연구에서도 확인되듯, 당시 연대기 기록자들은 이반의 행동을 직접적으로 찬양할 수 없었다. 그가 몽골과 함께 기독교인들을 응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록자들은 그 결과로 찾아온 "루스 땅의 위대한 평화, 고요함, 해방"을 감사히 여겼다. 이 이중성이 이반 칼리타라는 인물의 본질이다.
칸 우즈벡은 이반에게 몽골 군대를 내주었다. 일설에는 5만 명, 또 다른 기록에는 5개 부대(темник, 테므니크)가 언급된다. 이 몽골-모스크바 연합군이 트베리를 짓밟았다. 마을들이 불탔고,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으며, 알렉산드르는 노브고로드로, 다시 프스코프로, 결국 리투아니아로 도망쳤다. 이반은 단순히 전쟁에 이긴 것이 아니었다. 그는 교회 권력까지 동원했다. 그의 요청으로 키예프 수좌대주교 테오그노스투스(Theognostus)는 알렉산드르를 숨겨준 프스코프의 주민 전체를 파문했다.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의 결합, 이것은 이반이 처음으로 시험한 통치의 방정식이었고, 이후 모스크바 공국이 반복적으로 사용할 무기가 되었다.
1328년 칸 우즈벡은 블라디미르 대공의 야를리크를 이반과 수즈달의 알렉산드르에게 나누어 주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칸이 이반에게 다른 루스 공국들로부터 직접 조공을 걷어 황금 군단에 바칠 권리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례 없는 권한이었다. 과거에는 몽골이 직접 파견한 징세관인 바스카크(baskak)들이 이 일을 담당했다. 칸이 이 기능을 이반에게 넘긴 이유에 대해 학자 바우머(Baumer)는 우즈벡이 "분할 통치" 원칙을 포기하고 모스크바 대공에게 모든 루스 땅의 조공을 일괄 위탁한 것이 "운명적인 결정"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반은 당연히 걷어들인 조공의 상당 부분을 모스크바의 금고에 남겼다. "칼리타"라는 별명이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일부 사료는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돈주머니를 풀어 동전을 나눠주었기 때문에 이 별명을 얻었다고 전하며, 15세기의 수도사 파프누티(Paphnutius of Borovsk, 1477년 사망)는 "그는 매우 자비로웠으며 허리에 은화가 가득 찬 칼리타를 항상 차고 다니며 가는 곳마다 빈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제자들에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반면 클류체프스키는 이 별명이 오히려 그의 인색함과 돈에 대한 집착을 비꼰 것이라는 해석을 지지했다.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깝든, 이 별명은 이반의 통치를 관통하는 핵심—돈, 그리고 그 돈이 만들어내는 권력—을 정확히 가리킨다.
1331년 공동 통치자인 수즈달의 알렉산드르가 사망하자, 이반은 다시 황금 군단 궁정으로 달려가 단독 블라디미르 대공의 지위를 굳혔다. 이때부터 그의 재위 말년까지 약 10년간, 루스의 연대기들은 반복적으로 "루스 땅의 위대한 고요함"을 기록했다. 1327년 트베리 응징 이후 1367년까지 약 40년 동안 몽골 약탈대가 루스 땅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는 것은, 이반의 정책이 가져온 가장 구체적인 혜택이었다. 이 평화의 배당금은 인구 이동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전란에 지친 농민들과 장인들, 상인들이 모스크바로 흘러들었고, 모스크바의 인구와 경제력은 꾸준히 증가했다. 이반은 이 흐름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그는 몽골의 약탈로 포로가 된 루스 사람들을 돈을 주고 직접 구해오기까지 했다. 약탈당한 사람들의 자유를 돈으로 사들인 공후, 이 이미지는 "땅의 수집자"라는 그의 또 다른 별칭과 맞닿아 있다.
이반의 또 다른 결정적인 업적은 모스크바를 단순한 정치 중심지가 아니라 정교회의 영적 수도로 격상시킨 것이었다. 당시 루스 정교회의 수좌대주교(Metropolitan)는 키예프에 명목상의 본거지를 두고 있었지만, 몽골 침공 이후 실질적으로는 블라디미르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었다. 이반은 대주교 표트르(Metropolitan Peter)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표트르는 이반에게 크렘린 언덕 위에 성모 승천 대성당(Uspenskiy Sobor)을 건립할 것을 조언했고, 이반이 이를 받아들여 1326년 건설을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표트르는 이 성당이 완공되기 전인 1326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묘소를 준비해둔 이 미완성 성당에 안장되었다. 그의 후임 테오그노스투스(Feognost)는 자연스럽게 모스크바를 주교좌로 확정했다. 대주교좌의 이전은 단순한 행정적 조치가 아니었다. 이것은 모스크바가 "루스 교회의 수도"임을 세상에 선포하는 상징적 사건이었고, 다른 공후들은 종교적 결정에 영향력을 잃었다. 이반은 대성당 외에도 1326~1327년 사이에 이반 사다리 교회, 1330년 숲의 구세주 성당, 1333년 대천사 미카엘 대성당을 잇달아 건립했다. 미카엘 대성당은 이반 자신과 그 후손들의 영묘가 되었다.
영토 확장 면에서 이반의 방식은 더욱 독창적이었다. 그는 전쟁보다 매입을 선호했다. 우글리치(1323년), 벨로제로 공국(1328~1338년), 갈리치 공국(1340년)이 칼이 아니라 돈으로 모스크바에 편입되었다. 그의 손자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후일 자신의 유언장에서 할아버지가 이 땅들을 "구매"했다고 명시적으로 기록했다. 이 매입 방식은 여러 면에서 영리한 선택이었다. 우선, 전쟁은 몽골의 의심을 살 수 있었다. 또한 토지를 판 빈곤한 공후들 중 상당수는 자신의 땅에서 이반의 대리인으로 계속 통치할 권리를 유지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모스크바 체제 안으로 편입되어 갔다. 더욱 정교한 방법은 이웃 공국들에 돈을 빌려주는 것이었다. 이반의 모스크바는 상당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재정적으로 어려운 인근 공국들에 대출을 제공했고, 이 채무 관계는 점차 정치적 종속으로 이어졌다. 이반 사후에도 이 구조는 계속 작동하여, 그의 후계자들이 채무를 빌미로 공국들을 합병할 수 있는 법적, 경제적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이반의 통치 스타일은 내부적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자신의 영내에서 도둑과 강도들을 철저히 소탕하여 상인들이 안전하게 통행할 수 있게 했다. 연대기는 이 치안 강화 정책을 칭찬했으며, 이것이 모스크바로의 인구 유입과 교역 증가에 큰 기여를 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반은 중소 귀족들을 보야르(보야리네, boyare)로 받아들이고 안정된 봉사 관계를 형성했다. 도널드 오스트로프스키는 그의 저서 『무스코비와 몽골(Muscovy and the Mongols)』(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 1998)에서, 이반 시대의 모스크바 행정 구조 자체가 몽골 제국의 이중 행정 체계, 즉 민간 총독(daruga)과 군사 총독(baskak)의 병렬 구조에서 상당 부분 차용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몽골이 루스에 남긴 제도적 유산에 대한 오스트로프스키의 이 주장은 학계에서 여전히 논쟁적이지만, 모스크바가 단순히 몽골의 지배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몽골의 통치 기술 자체를 학습하고 내면화했다는 시각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이반 칼리타의 통치를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게 한다.
이반 칼리타의 생애 가운데 가장 복잡한 도덕적 질문은 그가 1327년 트베리 봉기를 진압하는 데 몽골 군대를 이끌고 동족에게 칼을 겨눈 일이다. 연대기 기록자들조차 이 사건을 직접 찬양할 수 없었다. 그들은 트베리의 고통을 기록하면서도, 그 결과로 찾아온 "고요함"에 감사했다. 이 이중성은 이반 칼리타라는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왜 그토록 분열되어 있는지를 설명한다. 러시아 민족주의 사학의 전통에서 그는 "루스 땅의 수집자"라는 영웅적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트베리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동족의 피를 이방인의 검으로 씻어낸 배신자였다. 어느 쪽이 옳은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트베리의 봉기는, 1327년의 세력 구도에서, 어차피 실패할 운명이었다. 이반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몽골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와 트베리를 짓밟았을 것이다. 이반이 한 일은 불가피한 결과에 먼저 올라탄 것이었다. 냉혹하지만, 이것이 그 시대 루스의 정치 현실이었다.
더욱이, 사후적으로 평가하자면, 이반의 선택은 루스 전체에 40년간의 평화를 가져왔다. 헬퍼린의 분석처럼, 몽골 지배의 현실을 정면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한 채 저항을 선택한 공후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파멸했다. 트베리의 알렉산드르는 결국 1339년 황금 군단 궁정으로 소환되어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반이 그 처형에 어느 정도 역할을 했는지는 사료에 따라 다르지만, 적어도 이반이 알렉산드르의 귀환을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않았고, 오히려 황금 군단에 그를 불신할 이유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많은 역사가들이 동의하는 바다. 이것이 이반 칼리타의 세계였다. 살아남아야 했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상대가 죽어야 했다. 그 수단은 칼이 아니라 속삭임과 돈과 충성의 연기(演技)였다.
이반이 남긴 유산은 그의 유언장에서도 읽힌다. 그는 자신이 획득한 도시와 공국들을 세 아들 세먄(Semyon, 후에 '자랑스러운 세먄'으로 불림), 이반, 안드레이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유언장 속에서 이반이 세운 모스크바의 한계도 엿보인다. 그는 단일 상속자를 지정하지 않고 영토를 분할했으며, 이는 전통적인 루스의 분권적 상속 관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반이 이루어낸 가장 중요한 제도적 혁신은 따로 있었다. 그는 사라이의 칸에게 자신의 아들 세먄이 블라디미르 대공 자리를 이어받아야 한다고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이후 블라디미르 대공의 자리는 사실상 모스크바 공후 가문의 세습 자산이 되었다. 미국의 역사학자 저서리 닐(Jeffrey Neal)이 서부 오레곤 대학의 연구에서 지적했듯, 이반 칼리타가 유언장으로 남긴 것은 8개의 도시와 공국이었지만 그의 증손자 이반 3세는 87개의 도시와 공국을 유언장에 남겼다. 이 숫자의 차이가 이반 칼리타가 심은 씨앗이 얼마나 거대한 나무로 자랐는지를 웅변한다.
이반은 1340년 혹은 1341년 3월 31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하여 자신이 건립한 대천사 미카엘 대성당에 묻혔다. 그의 유품 목록에는 이후 러시아 군주들의 대관식에 사용될 "황금 모자"(모노마흐의 왕관으로 추정)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죽음 앞에서도 상징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이반 칼리타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그는 자신의 시대 도덕으로 판단받아야 하는가, 아니면 그가 낳은 역사적 결과로 평가받아야 하는가. 그가 1340년에 사망하고 약 140년이 지난 뒤, 그의 후손 이반 3세는 몽골의 멍에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모든 루스의 군주"를 선포했다. 이반 4세, 즉 이반 뇌제는 1547년 최초의 차르가 되었고, 그가 세운 나라는 결국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러시아 제국으로 성장했다. 클류체프스키는 이반 칼리타를 평가하면서, 러시아 국가는 "이반 칼리타의 쉰 목소리 가슴(hoarse chest)에서가 아니라 쿨리코보 들판에서 태어났다"는 유명한 역설적 아포리즘을 남겼다. 1380년 드미트리 돈스코이의 쿨리코보 전투 승리야말로 진정한 러시아 국가 의식의 탄생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 자체가 이반 칼리타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쿨리코보에서 싸울 힘을 키운 것이 바로 이반 칼리타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역사가 엘렌 카레르 당코스(Hélène Carrère d'Encausse)는 이반 칼리타에 대해 "몽골 덕분에 그는 블라디미르 대공의 칭호와 함께 루스 공국들로부터 조공을 걷고 공후들 사이에서 판결을 내릴 권리를 받았다. 모스크바 창건자의 꿈이 실현되고 있었다"고 썼다. 아이러니는 깊다. 루스를 지배한 몽골이, 결국 러시아를 통일하고 훗날 그 몽골의 후예들을 정복할 제국의 씨앗을 이반 칼리타에게 직접 심어준 셈이기 때문이다.
이반 칼리타는 영웅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노래 속의 용사가 아니었고, 몽골에 칼을 겨눈 순교자도 아니었다. 그는 1911년 브리태니커가 말한 대로 "칸에 대한 완전한 복종 정책을 채택하여" 살아남은 자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살아남아야 할 세계를 냉정하게 읽고, 그 세계의 규칙을 자기편으로 만들 줄 아는 인물이었다. 몽골의 지배라는 거대한 외압 속에서 모스크바라는 작은 공국을 훗날 제국의 심장으로 키워낸 것, 그것이 이반 칼리타가 역사에 남긴 유산이다. 그의 돈주머니는 단지 돈을 담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내와 계산과 굴욕을 담는 그릇이었고, 그 안에서 한 문명의 미래가 조용히 익어가고 있었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B0%98_1%EC%84%B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