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종종 승리자의 이름을 기억하지만, 진정으로 세계를 바꾼 인물은 그 승리의 절정에서 갑작스럽게 사라진 자들일 때가 있다. 몽골 제국 제4대 대칸 뭉케(蒙哥, Möngke Khan, 1209~1259)는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의 치세는 불과 8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8년은 유라시아 대륙의 운명을 결정짓는 밀도로 가득 차 있었다. 뭉케가 살아 있었다면 이슬람 세계는 완전히 붕괴했을지도 모르고, 중국은 훨씬 더 빠르게 정복되었을 것이며, 유럽 십자군 원정의 역사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를 쓰촨(四川)의 어느 성벽 아래에서 멈추게 했다.
몽골학의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인 데이비드 모건(David Morgan)은 그의 저서 『몽골인들(The Mongols)』(1986)에서 뭉케를 "몽골 대칸들 가운데 가장 유능하고 능력 있는 인물"로 평가했다. 티머시 메이(Timothy May)는 『몽골의 정복들(The Mongol Conquests in World History)』(2012)에서 뭉케의 치세를 몽골 제국이 단순한 정복 기계에서 행정 국가로 이행하는 결정적 전환점으로 규정했다. 잭 웨더포드(Jack Weatherford)는 『칭기즈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Genghis Khan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2004)에서 이 시대의 팍스 몽골리카가 오늘날 세계화의 원형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뭉케 칸을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한 군주의 전기를 읽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사의 가장 극적인 분기점 중 하나를 직접 목격하는 경험이다.
뭉케는 칭기즈 칸의 장남 주치가 아닌, 넷째 아들 툴루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 혈통적 사실은 단순한 족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몽골의 관습에 따르면 막내 아들이 아버지의 본거지와 핵심 영토를 계승하는 '오트치긴(末子相續)' 원칙이 있었다. 툴루이는 이 원칙에 따라 칭기즈 칸의 핵심 본군(本軍)을 물려받았다. 토마스 올슨(Thomas Allsen)이 그의 기념비적 저작 『뭉케 칸 치하의 몽골 제국주의(Mongol Imperialism: The Policies of the Grand Qan Möngke in China, Russia, and the Islamic Lands)』(1987)에서 지적하듯, 툴루이 가문이 물려받은 이 핵심 병력은 훗날 권력 계승 경쟁에서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했다. 오고타이 계통이 대칸의 자리를 독점하던 시절, 툴루이 가문은 표면적으로는 주변부에 밀려 있었지만 실제 군사력의 중심은 그들의 손에 있었다.
여기에 결정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뭉케의 어머니, 소르칵타니 베키(Sorghaghtani Beki)다. 그녀에 대한 평가는 동서양의 사료 모두에서 경이로울 정도로 일치한다. 시리아의 기독교 역사가 바르 헤브라에우스(Bar Hebraeus)는 그녀를 "만약 나로 하여금 탁월한 여성을 한 명 들라 하면, 소르칵타니를 들겠다"라고 기록했다. 페르시아의 역사가 라시드 앗-딘(Rashīd al-Dīn Ṭabīb)은 그의 방대한 역사서 『집사(集史, Jāmiʿ al-Tawārīkh)』에서 그녀를 "세계에서 가장 지성적인 여성"이라 칭했다. 현대 학자 루스 더넬(Ruth Dunnell)과 모리스 로사비(Morris Rossabi)의 공동 연구는 소르칵타니가 단순히 아들들을 뒷바라지한 여성이 아니라 능동적인 정치 전략가로서 툴루이 사후 가문의 이익을 지키고 확대한 핵심 행위자였음을 밝히고 있다.
소르칵타니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에게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적 소양을 심어주는 데 모든 힘을 기울였다. 뭉케는 페르시아어와 한문을 익혔고, 쿠빌라이는 중국의 학자들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훌라구는 이란 문화에 깊이 노출되었다. 로사비가 그의 저작 『쿠빌라이 칸: 그의 삶과 시대(Khubilai Khan: His Life and Times)』(1988)에서 지적했듯, 이러한 교육 전략은 훗날 각 지역의 통치에 있어 현지 문화에 대한 이해와 적응력을 가진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뭉케의 등장은 따라서 한 개인의 부상이 아니라 어머니가 수십 년에 걸쳐 기획한 가문 전략의 결실이었다.
뭉케가 대칸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은 결코 깨끗하지 않았다. 올슨의 분석에 따르면, 1251년 쿠릴타이의 개최 자체가 이미 절차적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었다. 오고타이 가문과 차가타이 가문의 주요 인물들이 배제된 상태에서 열린 이 회의는 실질적으로 툴루이-주치 연합의 무력 시위 아래 진행되었다. 바투 칸의 지지는 단순한 정치적 승인이 아니었다. 바투는 킵차크 초원에서 수만에 달하는 기병을 거느리고 있었고, 그의 군사력은 오고타이 계통의 물리적 저항을 사전에 차단하는 억지력으로 작동했다. 피터 잭슨(Peter Jackson)은 그의 논문 「1251년의 몽골 쿠릴타이와 그 전후 맥락」에서 이 과정을 "무력에 의해 담보된 합의의 연극"이라고 표현했다.
즉위 후 뭉케가 단행한 숙청은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그 규모를 놓고 논쟁이 계속된다. 라시드 앗-딘은 처형된 인물이 수십 명에 이른다고 기록했고, 주바이니(ʿAlāʾ al-Dīn ʿAṭā-Malik Juvaynī)의 『세계 정복자의 역사(Tārīkh-i Jahāngushāy)』는 오고타이의 손자 시레문(Shiremun)을 비롯한 여러 왕족이 연루된 반역 음모가 발각되어 숙청이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올슨은 이 숙청이 단순한 정적 제거가 아니라 재정 감사와 결합된 구조적 권력 재편이었음을 강조한다. 뭉케는 오고타이 시대에 이루어진 재산 분배와 면세 특권들을 전면 재검토했고, 이를 통해 경제적 이권을 중앙으로 집중시키는 동시에 반대 세력의 물질적 기반을 무너뜨렸다. 폭력과 행정이 동시에 구사된 정교한 권력 공고화 전략이었다.
권력을 장악한 뭉케는 즉각 제국 재건에 착수했다. 그가 물려받은 제국은 외형적으로는 광대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심각하게 망가져 있었다. 조세 체계는 지역마다 달랐고, 정복지에서 거둔 수입은 중앙 재정으로 귀속되지 않고 현지 총독과 군벌들의 사적 부로 축적되었다. 올슨은 『뭉케 칸 치하의 몽골 제국주의』에서 이 문제를 상세히 분석하며, 뭉케가 단행한 인구 조사와 조세 표준화 작업이 몽골 제국 행정사에서 전례 없는 시도였다고 평가한다. 뭉케는 이란과 이라크에 대한 전면적인 인구 조사를 명령했고, 조세 징수를 위한 기준 단위로 '호(戶, household)'를 채택했다. 이 체계는 완성되지 못한 채 그의 죽음으로 중단되었지만, 훗날 쿠빌라이가 원나라에서 실시한 인구 조사 행정의 직접적인 선구가 되었다.
주바이니는 뭉케가 제국의 역참(驛站, yam) 체계를 대대적으로 정비했다고 기록한다. 역참 체계는 단순한 교통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칸의 명령이 제국 구석구석까지 신속하게 전달되고, 중앙이 변방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수집할 수 있게 하는 제국의 신경망이었다. 잭 웨더포드가 지적했듯, 이 체계는 최대 하루 400킬로미터에 달하는 통신 속도를 가능하게 했으며, 이는 당시 세계 어떤 제국도 따라올 수 없는 수준이었다. 뭉케는 이 체계를 유지하고 확장함으로써 행정적 통일성을 강화했다. 상업 측면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오르탁(ortaq) 상인 네트워크, 즉 칸들의 자본을 위탁받아 운영하는 무역 파트너십은 뭉케 시대에 더욱 활성화되었고, 이는 유라시아 교역로의 안전과 수익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뭉케의 개혁이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티머시 메이는 뭉케의 재정 개혁이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몽골 제국의 권력은 근본적으로 분산적이었다. 각 칸국은 사실상 독립적인 재정 단위로 운영되었고, 대칸의 명령은 종종 협상의 대상이었지 절대적 복종의 대상이 아니었다. 뭉케가 아무리 뛰어난 행정가였다 해도, 그가 직면한 구조적 한계는 그의 개인적 역량을 초과하는 것이었다. 그가 이루고자 했던 중앙집권적 제국은 몽골 씨족 정치의 DNA와 근본적으로 충돌했다.
뭉케의 통치 철학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측면은 종교적 관용이었다. 그러나 이 관용의 성격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데이비드 모건이 정확하게 짚었듯, 뭉케의 종교적 다원주의는 깊은 신학적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제국 통치의 실용적 필요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아우르는 제국에서 특정 종교를 강요하는 것은 반란의 씨앗을 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관용은 따라서 미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계산된 통치 전략이었다.
1254년 뭉케의 수도 카라코룸을 방문한 루브룩 수도사(William of Rubruck)의 기록은 이 시대를 이해하는 데 빠질 수 없는 1차 사료다. 루브룩은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특사로 파견되었으며, 그의 여행기 『동방 여행기(Itinerarium)』는 당시 몽골 제국의 일상과 궁정 문화를 외부인의 눈으로 생생하게 기록한 문헌으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루브룩은 카라코룸에서 유럽 기독교인,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 불교 승려, 무슬림 학자들이 한 도시 안에 공존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그가 기록한 종교 토론 장면, 즉 기독교·이슬람·불교 학자들이 뭉케 앞에서 자신의 신앙의 우월성을 논증하는 장면은, 뭉케가 어떤 한 종교에도 정치적으로 귀의하지 않으면서도 이 다양성을 통치 자원으로 활용했음을 보여준다.
루브룩의 기록에서 뭉케는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우리 몽골인은 신이 하나라고 믿는다. 그러나 신에게로 가는 손가락은 여럿이다." 이 구절이 실제로 뭉케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루브룩이 가공한 것인지는 검증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말이 상징하는 실용주의적 다원주의는 뭉케 치세의 종교 정책 전반에서 실제로 관찰된다. 그는 이슬람 학자들에게 모스크 건립을 허용하는 동시에 불교 사원에도 토지를 하사했고, 기독교 교회에도 세금 면제를 부여했다. 클로드 길로(Claude Gillot)를 비롯한 이슬람학 연구자들은 뭉케의 이러한 정책이 피정복민의 저항 의지를 약화시키고 지역 종교 엘리트들을 제국 행정에 포섭하는 효과를 낳았다고 분석한다.
다만 이 관용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었다. 복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가차없는 폭력이 뒤따랐다. 이슬람 세계에서 이스마일파 암살단 조직의 본거지 알라무트가, 중국에서 남송이 타협 없이 정복 대상이 된 것은, 뭉케의 관용이 정치적 주권의 포기를 전제로 한 것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종교는 허용하되, 정치적 독립은 허용하지 않았다. 이것이 뭉케 제국의 근본 문법이었다.
뭉케는 재위 기간 내내 지구 역사상 전례 없는 규모의 동시 다방면 전략을 추진했다. 서방에서는 동생 훌라구가 이란과 이라크를 향해 진격하고, 동방에서는 쿠빌라이가 남중국 측면을 위협하는 동안, 뭉케 자신은 쓰촨을 돌파해 남송의 심장부로 파고들 계획을 세웠다. 이 세 방향의 동시 원정은 단순한 군사적 야심의 표현이 아니었다. 올슨은 이것이 뭉케의 제국적 비전, 즉 칭기즈 칸이 시작한 세계 정복을 자신의 손으로 완성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해석한다.
훌라구의 서방 원정은 그 결과만으로도 세계사를 바꾸어 놓았다. 1256년 알라무트 함락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가 아니었다. 약 150년간 이슬람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이스마일파 암살단 조직의 실질적 소멸을 의미했다. 페르시아 역사가 주바이니는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명백한 안도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직접 알라무트 도서관에서 필사본들을 수집했으며, 이후 그것들이 불태워지는 것을 보았다고 전한다. 지식의 파괴와 안도가 동시에 교차하는 이 장면은 몽골 정복의 양면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1258년 바그다드 함락은 그 충격의 규모에서 알라무트를 압도했다. 티그리스 강변의 이 도시는 750년경 아바스 왕조에 의해 건설된 이래 약 500년간 이슬람 세계의 지적·정치적 수도였다. 도서관, 천문대, 병원, 학자들이 집결한 지적 중심지가 1258년 2월 훌라구의 군대에 의해 초토화되었다. 칼리프 알-무스타심은 처형당했다. 중세 아랍의 역사가 이븐 알-아티르(Ibn al-Athir)의 앞 세대가 1219년 몽골의 첫 이슬람 세계 침공을 기록하면서 "이보다 더 큰 재앙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곧 세상의 끝일 것"이라고 썼는데, 1258년은 그 예언이 현실이 된 해였다. 데이비드 모건은 이 사건이 이슬람 세계의 집단 기억에 남긴 충격이 수백 년간 지속되었으며, 이슬람 정치 사상에서 칼리프 제도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변질시켰다고 평가한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바그다드 학살의 규모에 대한 논쟁이 지금도 계속된다. 전통적으로 80만에서 200만 명이 학살되었다는 수치가 인용되어 왔지만,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 수치에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조지 레인(George Lane)은 『초기 몽골 지배하의 이란(Early Mongol Rule in Thirteenth-Century Iran)』(2003)에서 당시 바그다드의 인구 자체가 그러한 수치를 뒷받침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며, 실제 희생자 수는 훨씬 적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러나 수치의 정확성과 무관하게, 칼리프 제국의 수도가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갖는 문명사적 의미는 축소될 수 없다. 이슬람 세계의 심리적 외상으로서 바그다드 함락의 기억은 현대 아랍 세계의 역사 의식 속에도 살아 있다.
동방에서의 전황은 서방만큼 순탄하지 않았다. 남송(南宋)은 몽골에게 어느 정적보다도 강인한 상대였다. 1234년 금(金) 왕조를 무너뜨린 몽골이 남송을 향해 본격적으로 진격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남송은 20년 이상 버텨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우선 지형이었다. 양쯔 강 이남의 중국은 조밀한 수로망, 높은 습도, 울창한 산림으로 이루어진 지형으로, 초원에서의 속도와 기동성을 생명으로 하는 몽골 기병의 강점을 근본적으로 무력화했다. 허버트 프랭크(Herbert Franke)와 데니스 트위첫(Denis Twitchett)이 편집한 『케임브리지 중국사(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6권은 남송이 강력한 수군과 성벽 방어에 투자해 몽골의 기병 중심 전술에 대응하는 비대칭 전략을 개발했음을 상세히 설명한다.
남송에는 또한 기꺼이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는 민심이 있었다. 메이는 남송의 저항이 단순한 군사적 지구전이 아니라 문화적 정체성 수호의 의미를 띠었음을 강조한다. 남송의 지식인들은 유교적 전통 속에서 '화이지변(華夷之辨)', 즉 중화와 오랑캐의 구분이라는 이념적 틀로 저항을 정당화했다. 뭉케가 직접 쓰촨 원정에 나선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의 전략적 돌파구를 찾기 위함이었다. 쓰촨은 지형적으로 험준했지만, 이 지역을 장악하면 양쯔 강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오며 남송의 배후를 칠 수 있는 전략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1259년 여름, 뭉케의 군대는 허저우(合州)를 포위했다. 이 성은 지아 쒸(賈似道)가 아닌 왕 지엔(王堅) 장군이 지키고 있었으며, 몽골군의 공격을 완강하게 막아냈다. 뭉케는 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여름의 혹독한 더위와 역병에 시달렸다. 그의 정확한 사인에 대해서는 사료들이 일치하지 않는다. 라시드 앗-딘의 『집사』는 이질(痢疾)에 의한 병사를 기록하는 반면, 원나라 관방 사서인 『원사(元史)』는 이 문제를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처리했다. 일부 중국 측 자료는 화살에 의한 전사를 암시하기도 한다. 뭉케의 죽음을 둘러싼 이 모호성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다. 몽골 제국의 대칸이 정복하지도 못한 적의 성벽 앞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은, 그의 후계자들이 역사적으로 가장 편안한 방식으로 기억하고 싶었던 진실이 아니었을 것이다.
뭉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초래한 파급 효과는 세계 지도를 다시 그릴 뻔했던 사건을 막아냈다는 점에서 특히 극적이다. 훌라구는 1260년 초 시리아를 완전히 장악하고 다마스쿠스를 함락시킨 뒤 이집트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이집트를 지배하던 맘루크 술탄국은 군사적으로는 강력했지만, 훌라구의 주력군에 맞설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만약 이집트가 함락되었다면, 그나마 이슬람 세계에 남아 있던 마지막 독립 정치 구심점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뭉케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훌라구는 즉각 주력 병력을 이끌고 동쪽으로 철수했다. 그는 대칸 계승 분쟁에 개입해 자신의 가문, 즉 쿠빌라이 측의 이익을 지켜야 했다. 피터 잭슨은 훌라구가 이집트 원정을 포기한 것이 군사적 자신감의 결여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계승 정치의 요구 때문이었음을 강조한다. 시리아에 남겨진 소수의 몽골 병력은 1260년 9월 팔레스타인의 아인 잘루트(عين جالوت)에서 맘루크 술탄 쿠투즈(Qutuz)와 바이바르스(Baybars)가 이끄는 이집트군에 패배했다.
아인 잘루트 전투는 이후 이슬람 역사에서 문명 수호의 상징으로 신화화된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 전투의 의미를 보다 냉정하게 바라본다. 레인과 잭슨은 아인 잘루트가 몽골의 "무적 신화"를 깬 최초의 전투라는 통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훌라구가 주력군을 이끌고 있었다면 이 전투의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아인 잘루트는 몽골의 군사력이 한계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뭉케의 죽음으로 인한 정치적 공백이 얼마나 결정적인 전략적 차질을 초래했는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것은 전장의 패배가 아니라 카라코룸의 정치가 낳은 결과였다.
훗날 일 칸국을 세운 훌라구와 그의 후계자들은 맘루크 술탄국과 끝없는 전쟁을 벌였지만 이집트를 끝내 정복하지 못했다. 이슬람 문명의 아랍적 중심, 즉 카이로와 이집트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뭉케가 쓰촨의 성벽 앞에서 죽지 않았다면 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렇듯 때로 가장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결정된다.
동방에서도 뭉케의 죽음은 즉각 대격변을 일으켰다. 대칸 자리를 둘러싼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 사이의 내전은 단순한 형제간의 권력 다툼이 아니었다. 그것은 몽골 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놓고 두 개의 근본적으로 다른 비전이 충돌하는 이념 전쟁이었다. 쿠빌라이는 중국 문명을 흡수하고 정착 농경 사회의 행정 모델을 받아들이는 노선을 추구했다. 아릭 부케는 순수한 몽골 유목 전통으로의 회귀를 주창하며, 중국화(sinification)에 반대하는 보수적 몽골 귀족들의 지지를 등에 업었다.
로사비의 분석에 따르면, 이 내전은 군사적 측면보다 경제적 측면에서 쿠빌라이의 우위가 결정적이었다. 쿠빌라이는 중국의 농업 생산력과 행정 자원을 장악하고 있었고, 아릭 부케는 초원의 유목 경제에 의존했다. 장기전이 될수록 쿠빌라이에게 유리했고, 4년간의 내전 끝에 아릭 부케는 1264년 항복했다. 그러나 쿠빌라이의 승리는 제국 통일의 시작이 아니라 분열의 확인이었다. 킵차크 칸국의 베르케(Berke Khan)는 훌라구와 코카서스에서 전쟁을 벌였고, 차가타이 칸국은 쿠빌라이의 권위를 사실상 인정하지 않았다. 뭉케가 그토록 단단히 묶어두려 했던 제국은 그의 사후 4개의 독립적 칸국으로 해체되었다.
이 분열의 불가역성에 주목한 학자들은 뭉케의 사망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제국의 구조적 취약성이 드러난 계기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메이는 몽골 제국이 애초부터 단일한 주권 국가로 유지될 수 있는 구조적 기반이 부족했다고 주장한다. 분봉(分封) 체계, 즉 칭기즈 칸이 아들들에게 울루스(ulus, 영지)를 나누어준 전통은 장기적으로 분리주의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었다. 뭉케가 이 구조를 극복하려 했지만, 그 시도는 그의 죽음과 함께 중단되었고, 이후 그 누구도 동일한 시도를 진지하게 이어가지 못했다.
뭉케의 치세를 평가할 때 결코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있다. 몽골의 정복이 인류 문명에 가져온 것은 파괴인가, 아니면 교류인가. 이 질문은 학계에서도 첨예하게 대립하는 주제다. 잭 웨더포드는 『칭기즈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에서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 전체에 걸쳐 상품과 기술과 지식의 유례없는 교류를 촉진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실크로드의 안전, 종이와 화약과 나침반의 서방 전파, 동서 의학 지식의 교환 등이 모두 팍스 몽골리카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낙관적 해석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연구들도 있다. 재러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와 여러 인구사 연구자들이 주목한 것은 몽골 정복이 초래한 인구 감소의 규모다. 중앙아시아, 이란, 이라크, 중국 북부, 러시아 일대에서 몽골 정복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수천만 명에 달한다는 추정이 있다. 매튜 화이트(Matthew White)는 그의 저작 『잔혹의 역사(The Great Big Book of Horrible Things)』(2012)에서 뭉케의 재위 기간을 포함한 몽골 제국 전성기의 사망자 수를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인명 손실 사건 중 하나로 분류한다. 물론 이 수치들은 여전히 논쟁 중이지만, 몽골 정복이 특정 지역 문명에 가한 타격이 수백 년의 회복 기간을 필요로 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뭉케 시대의 팍스 몽골리카는 이러한 파괴 위에 세워진 평화였다. 교역로의 안전은 저항한 자들의 완전한 파멸을 전제로 확보된 것이었다. 이 아이러니를 외면하지 않는 것이 뭉케 칸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출발점이다. 그는 분명히 정복자였고, 그의 명령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동시에 그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공간에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교류할 수 있는 틀을 만든 인물이기도 했다. 이 두 측면을 함께 안고 가는 것이 역사가의 과제이자 독자의 과제다.
더 깊이 생각할 점은 뭉케가 제국의 한계와 씨름하던 최초의 대칸이었다는 사실이다. 칭기즈 칸은 정복했고, 오고타이는 확장했으며, 구유크는 단명했다. 뭉케는 그 광대한 정복의 결실을 지속 가능한 구조로 전환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은 최초의 인물이었다. 올슨의 표현을 빌리면, 뭉케는 "제국의 가능성과 제국의 한계를 동시에 살아낸 칸"이었다. 그는 행정 개혁을 단행했지만 완수하지 못했다. 세계 정복을 기획했지만 성벽 하나를 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미완성은 이후 수십 년간 그의 후계자들이 씨름하게 될 모든 문제의 원형으로 남았다.
현대 국제 정치학자 존 미어샤이머(John Mearsheimer)의 패권 경쟁 이론의 시각에서 보면, 뭉케의 제국은 역사상 가장 완전한 형태의 대륙 패권 시도였다. 해양 세력에 의해 견제받지 않는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단일 권력 아래 통합하는 것, 그것이 뭉케가 추구한 목표였다. 그 목표가 쓰촨의 성벽 앞에서 멈춘 것은 단순한 역사적 우연이 아니라, 패권 프로젝트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한계를 드러낸다는 보다 보편적인 진실의 표현이기도 하다.
뭉케 칸은 역사가 완성을 허락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가 쓰촨의 어느 성벽 앞에서 죽지 않았다면, 세계의 지형도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과 전혀 달랐을 것이다. 이슬람 문명의 아랍적 심장부는 살아남지 못했을 수도 있고, 중국은 더 일찍 통일되었을 것이며, 유럽의 십자군 국가들은 뜻밖의 동맹을 얻어 역사의 궤도를 바꾸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조건법을 모른다. 역사는 실제로 일어난 일만 기록한다.
그리고 실제로 일어난 일은 이것이다. 뭉케 칸은 살아서 세계를 정복하려 했고, 죽음으로써 세계가 그대로 남겨지게 했다. 데이비드 모건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듯, 역사에서 "만약"의 질문은 결코 확정적인 답을 줄 수 없다. 하지만 그 질문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역사가 얼마나 우연과 인간 의지의 교차점 위에서 만들어지는지를 자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뭉케를 읽는 것은 제국의 절정을 읽는 것이자, 인간의 의지가 역사의 우연 앞에서 얼마나 쉽게 꺾일 수 있는지를 읽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읽는 가장 깊은 이유일 것이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AA%BD%EC%BC%80_%EC%B9%B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