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은 없다. 그런데...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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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 선다. 어떤 음식이 맛있는지, 어떤 영화가 좋은지, 어떤 정치적 견해가 옳은지에 대해 판단을 내려야 한다. 이때 우리는 종종 "다수의 의견"이라는 나침반에 의존한다.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은 좋은 것이고, 대부분이 옳다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과연 다수의 합의가 곧 진리를 의미할까?

이 질문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진리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가 숨어있다.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는가, 아니면 모든 진리는 상대적인가? 만약 절대적 진리가 존재한다면, 그것을 발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리고 다수의 합의는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우리가 감각으로 경험하는 현실 너머에 완전하고 불변하는 이데아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진정한 진리는 이 이데아의 세계에 있으며, 우리의 임무는 감각에 속지 않고 이성을 통해 그 진리에 다가가는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보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벽에 비친 그림자를 실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진정한 철학자만이 동굴을 벗어나 태양의 빛 아래서 실체를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다수의 의견은 오히려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림자를 실체라고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진리는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다.


반면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이 모든 것의 척도"라고 선언하며 상대주의적 관점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각 개인이나 집단이 느끼고 판단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진리가 된다. 이 관점에서 보면, 다수의 합의는 적어도 그 공동체 내에서는 유효한 진리가 될 수 있다.

현대의 사회 구성주의자들도 비슷한 입장을 취한다. 그들은 진리나 지식이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된다고 본다. 따라서 어떤 것이 진리인지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어떻게 합의하느냐에 달려있다.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의 발전이 점진적 축적이 아니라 패러다임의 혁명적 전환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패러다임이란 특정 시대의 과학자 공동체가 공유하는 기본적인 가정과 방법론을 의미한다.

쿤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대부분 "정상과학" 활동을 하면서 기존 패러다임 내에서 문제를 해결한다. 하지만 기존 패러다임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변칙 사례들이 누적되면서 위기가 발생하고, 결국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과학자 공동체의 합의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받아들여지려면 충분한 수의 과학자들이 그것을 지지해야 한다.

이는 과학에서조차 "진리"가 어느 정도는 사회적 합의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이것이 과학적 진리가 단순한 다수결로 결정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과학자들의 합의는 엄격한 검증 과정과 논리적 추론에 기반한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을 믿고 있었다. 교회의 권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뒷받침된 천동설은 당시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갈릴레이의 망원경 관찰과 수학적 계산은 다수의 믿음과는 다른 진실을 보여주었다.

이 사례는 다수의 합의가 항상 진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때로는 소수의 의견이, 심지어 한 사람의 통찰이 진리에 더 가까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의견이 얼마나 많은 지지를 받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탄탄한 근거를 가지고 있느냐이다.


정치 영역에서 다수결 원리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다. 하지만 이것이 다수의 의견이 항상 옳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경고했듯이, "다수의 폭정"은 민주주의의 어두운 면이다.

역사상 많은 부당한 정책들이 다수의 지지를 받아 시행되었다. 미국의 노예제도,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 정책 등은 모두 당시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이런 사례들은 다수의 합의가 도덕적 정당성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대 사회에서 여론은 미디어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빠르게 형성되고 확산된다. 하지만 이런 여론이 항상 사실에 기반한 것은 아니다. 가짜 뉴스, 확증 편향, 집단 사고 등의 요인들이 작용하여 잘못된 정보가 마치 진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백신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확산된 것이 좋은 예다.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음모론들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빠르게 퍼지면서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이는 다수의 믿음과 과학적 사실 사이에 큰 괴리가 생길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다수의 합의가 항상 절대적 진리를 의미하지는 않지만, 사회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공통된 기준과 규범이 필요하다. 법률, 도덕 규범, 사회적 예의 등은 모두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에 기반한다. 이런 합의가 없다면 사회는 무질서와 혼란에 빠질 것이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특정 단어가 특정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그 언어 공동체 구성원들의 암묵적 합의에 의한 것이다. 이런 합의는 자의적일 수 있지만,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때로는 다수의 판단이 전문가 개인의 판단보다 더 정확할 수 있다. 제임스 서로위키가 『집단지성』에서 소개한 다양한 사례들은 적절한 조건 하에서 집단의 평균적 판단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것이 성립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구성원들의 다양성, 독립적 판단, 분산된 의사결정 등이 그것이다. 이런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집단 사고나 폭포 효과 등으로 인해 오히려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진리에 다가갈 수 있을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비판적 사고다. 다수의 의견이라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이지도, 무조건 거부하지도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대신 그 의견이 어떤 근거에 기반하는지, 논리적으로 타당한지, 반박 가능한 증거가 있는지 등을 냉정하게 검토해야 한다.

칼 포퍼가 제시한 반증 가능성의 원리도 유용하다. 어떤 주장이 과학적으로 의미가 있으려면 그것을 반박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해야 한다. 반증이 불가능한 주장은 진리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


진리는 독단적으로 선언되는 것이 아니라 열린 대화와 토론을 통해 점차 명확해진다. 요르겐 하버마스의 담론 윤리학에서 제시하는 이상적 담화 상황처럼, 모든 참여자가 평등하게 발언할 기회를 갖고, 어떤 강제나 왜곡 없이 오직 더 나은 논거의 힘에 의해서만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물론 현실에서 완전히 이상적인 담화 상황을 만들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런 이상을 향해 노력하는 것 자체가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이다.


과학의 발전 과정에서 보듯이, 진리는 한 번 발견되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고 더 정교한 이론이 개발되면서 기존의 "진리"도 수정되거나 폐기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주장이 현재 다수의 지지를 받는다고 해서 그것을 절대불변의 진리로 여겨서는 안 된다.

겸손한 태도가 필요하다. 우리의 현재 지식은 불완전하며, 언제든 새로운 발견에 의해 수정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독단주의를 피하고 진정한 진리 추구를 가능하게 하는 태도다.


"정답은 없다. 그런데 대다수가 정답이라고 하면 그것은 정답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단순한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질문 자체가 진리의 복잡성을 보여준다.

다수의 합의는 분명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필요하며, 적절한 조건 하에서는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또한 개인의 독단을 견제하고 다양한 관점을 고려하게 하는 역할도 한다.

하지만 다수의 합의가 곧 절대적 진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역사상 수많은 사례들이 보여주듯이, 때로는 소수의 의견이, 심지어 한 사람의 통찰이 진리에 더 가까울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면서도 항상 비판적 사고를 잃지 않아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 자체다. 완벽한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고 토론하며 끊임없이 검증하고 수정해 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조금씩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 다수의 합의는 이 과정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다수가 정답이라고 하는 것"을 맹목적으로 따르지도, 무조건 거부하지도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대신 그것을 진리 탐구의 여정에서 하나의 중요한 참고점으로 여기면서, 더 나은 근거와 논리를 찾아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태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진리, 또는 적어도 진리에 더 가까운 것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8F%99%EA%B5%B4%EC%9D%98_%EC%9A%B0%ED%9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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