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는 어째서 사라지지 않는가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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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한편에서 혼자 점심을 먹는 아이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그 아이의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있고, 주변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마치 다른 세계의 일처럼 들려온다. 이것은 단순한 내성적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왕따'라는 현상의 한 단면이며,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은밀하게 반복되고 있는 배제와 고립의 메커니즘이다.

왕따는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기 쉽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근본적인 사회적 본성과 현대 사회의 구조적 특성이 복합적으로 얽혀 만들어내는 현상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잠재된 원시적 집단 본능부터 시작해,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새로운 갈등 구조까지 차근차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특징 중 하나는 복잡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능력이다. 하지만 이 능력의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바로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려는 본능적 욕구다. 이는 생존을 위한 진화적 적응이었다. 원시 시대에 자신의 부족을 다른 부족과 구분하고, 외부의 위협에 맞서 결속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원시적 본능이 현대의 교실과 직장,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그대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들만의 규칙을 만들어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고, 그 경계선 밖에 있는 누군가를 찾아낸다. 이 과정에서 집단의 정체성은 더욱 선명해지지만, 경계 밖으로 밀려난 개인은 철저히 소외된다.

타지펠의 사회정체성 이론이 보여주듯,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집단을 의도적으로 평가절하한다. 학교에서 "쟤는 우리와 달라"라는 말로 시작되는 배제의 논리가 바로 여기서 나온다. 차이는 곧 틀림이 되고, 틀림은 곧 배제의 근거가 된다.


그렇다면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왕따 상황을 목격하면서도 개입하지 않을까? 솔로몬 애쉬의 유명한 동조 실험은 이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사람들은 명백히 틀린 것을 알면서도 집단의 압력 앞에서는 자신의 판단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왕따 상황에서 방관자들의 침묵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방관자들은 나름의 계산을 한다. '내가 나서면 다음 타겟이 될 수도 있다', '굳이 남의 일에 끼어들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내가 한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이런 생각들이 쌓이면서 침묵이 자연스러운 선택이 된다. 특히 한국 사회의 '눈치 보기' 문화와 '튀지 않기'를 중시하는 집단주의적 성향은 이런 방관을 더욱 강화한다.

하지만 이 침묵이야말로 왕따를 지속시키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다. 가해자들은 방관자들의 침묵을 묵시적 승인으로 해석하고, 피해자는 세상 전체가 자신을 버렸다는 절망감에 빠진다. 방관자들의 작은 용기 하나가 전체 상황을 바꿀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용기를 내기는 쉽지 않다.


왕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권력 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 겉으로는 아이들 간의 단순한 갈등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복잡한 권력 역학이 숨어있다. 가해자는 항상 피해자보다 우위에 있다. 이 우위는 물리적 힘일 수도 있고, 사회적 인기나 경제적 배경, 학업 성취도 같은 것일 수도 있다.

특히 청소년기는 사회적 서열에 대한 민감도가 극도로 높아지는 시기다. 이 시기의 아이들에게 자신의 사회적 위치는 정체성과 직결되는 문제다. 따라서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고 상승시키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깎아내리는 전략을 사용한다. 왕따는 이런 맥락에서 '사회적 지위 게임'의 잔혹한 도구가 된다.

가해자들은 왕따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동시에 다른 아이들에게 "나를 거스르면 저렇게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는 매우 효과적인 지배 전략이다. 피해자 한 명을 희생양으로 삼아 나머지 전체를 통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 사회의 과도한 경쟁 문화는 왕따 현상을 더욱 심화시킨다. 상대평가가 지배하는 교육 시스템에서 아이들은 서로를 동반자가 아닌 경쟁자로 인식하게 된다. 다른 아이의 실패가 곧 자신의 기회가 되는 구조에서는 협력보다 배제의 논리가 자연스럽게 자리잡는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 전체가 끊임없이 서열을 매기는 분위기다. 성적, 외모, 집안 배경, 심지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용품을 쓰는지까지 모든 것이 비교와 평가의 대상이 된다. 이런 환경에서 아이들은 자신보다 '낮은' 누군가를 찾아 우월감을 느끼려 한다. 왕따는 이런 욕구의 가장 극단적이고 잔혹한 표현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피해자가 되는 기준이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의 아이들이 대상이 되었다면, 이제는 너무 뛰어난 아이도, 반대로 너무 부족한 아이도, 심지어 그냥 '다른' 아이도 표적이 될 수 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획일성을 강요하고 다양성을 용납하지 않는지를 보여주는 징표다.


소셜미디어와 온라인 환경의 발달은 왕따에 전혀 새로운 차원을 더했다. 사이버불링은 물리적 공간의 제약을 넘어 24시간 지속될 수 있으며, 익명성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더욱 잔혹해질 수 있다. 온라인에서는 평소 소극적이던 아이들도 가해자가 될 수 있고, 한 번 퍼진 이미지나 영상은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더욱 교묘한 것은 디지털 환경에서의 배제 방식이다. 단체 채팅방에서 한 명만 빼고 새로운 방을 만들거나, SNS에서 의도적으로 특정인을 태그하지 않거나, 온라인 게임에서 팀에 끼워주지 않는 것 등은 물리적 폭력보다 더 은밀하면서도 잔인할 수 있다.

또한 SNS는 끊임없는 사회적 비교를 부추긴다. 다른 사람들의 화려한 일상을 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아이들은, 그 스트레스를 자신보다 더 약해 보이는 대상을 공격함으로써 해소하려 한다. 디지털 환경이 만든 새로운 형태의 소외감이 또 다른 왕따를 낳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왕따의 가해자들을 단순히 '나쁜 아이'로 규정하기에는 현실이 복잡하다. 겉으로는 강해 보이는 이들의 내면에는 종종 깊은 불안과 열등감이 자리하고 있다.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며, 다른 누군가를 공격함으로써 그 취약함을 감추려 한다.

일부 가해자들은 과거에 자신이 피해를 당한 경험이 있거나, 가정에서 폭력에 노출된 경우가 있다. 이들에게 왕따는 자신이 당한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또 다른 가해자들은 집단에서의 인기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적'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이들에게 왕따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확인하는 수단이다.

반면 피해자가 되는 조건은 예측하기 어렵다. 외모나 행동이 집단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경우, 경제적 배경이 다른 경우, 사회적 기술이 부족한 경우가 대표적이지만, 때로는 너무 뛰어나거나 교사의 관심을 받는 것도 질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차이'가 본질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이 그 차이를 '문제'로 규정하는 과정에서 왕따가 시작된다는 점이다.


역설적이게도 왕따는 집단 차원에서 일정한 '기능'을 수행한다. 공통의 적을 만들어 집단 구성원들의 결속력을 높이고, 집단의 규범과 가치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는 르네 지라르가 말한 '희생양 메커니즘'의 전형적인 사례다. 한 명을 희생시킴으로써 전체의 평화를 유지하려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인류의 원시적 본능이 현대의 교실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결속은 배제와 차별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건강하지 못하다. 진정한 공동체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데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것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희생양을 통한 결속은 일시적일 뿐만 아니라, 언제든 새로운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불안정한 구조를 만든다.


왕따의 피해는 당장의 고통에서 끝나지 않는다. 피해자들은 평생에 걸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자존감의 근본적 손상, 대인관계에 대한 두려움, 우울증과 불안장애는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되는 경우가 많다. 더 심각한 경우에는 자해나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가해자들 역시 장기적으로는 건강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폭력과 지배에 의존한 관계 패턴을 반복하게 되고,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저하된다. 방관했던 이들도 무력감과 죄책감을 안고 살아간다.

사회 전체적으로는 신뢰와 연대의 기반이 약화된다. 서로를 경계하고 의심하는 분위기가 만연해지고, 갈등과 분열이 심화된다. 왕따를 경험한 세대가 성인이 되어 만드는 사회는 더욱 차갑고 배타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왕따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모두가 이 문제의 당사자임을 인식해야 한다. 직접적인 가해자나 피해자가 아니라고 해서 무관한 것이 아니다. 침묵하는 방관자, 차별을 묵인하는 기성세대,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 시스템의 일부로서 우리 모두는 이 문제에 책임이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다름에 대한 관용과 이해를 기르고, 집단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 용기를 키워야 한다. 방관자들이 침묵을 깨고 피해자 편에 서는 것만으로도 왕따의 동력은 크게 약화될 수 있다. 한 명의 용기가 전체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회적으로는 경쟁보다는 협력을 중시하는 교육 시스템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를 조성하고, 왕따에 대한 명확한 제재와 피해자 보호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디지털 환경에서의 윤리 교육과 규제 강화도 시급한 과제다.


왕따 없는 사회는 불가능한 이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갈 수 있는 현실이다. 그 시작은 '다름'을 '틀림'으로 보지 않는 성숙한 시선에서, 그리고 약한 자를 보호하려는 용기 있는 행동에서 비롯될 것이다.

진정한 강함은 다른 누군가를 짓밟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일어서도록 손을 내미는 데서 나온다. 교실 한편에서 혼자 점심을 먹고 있는 그 아이에게 다가가 "함께 먹자"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바로 왕따 없는 세상을 만드는 첫걸음이다.


(이미지 출처 https://kr.pinterest.com/pin/60094976273899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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