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라는 개념은 고정불변의 절대적 범주가 아니다. 그것은 시대와 상황, 그리고 권력 관계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상대적 지위이다. 특히 현대사회에서 약자는 더 이상 수동적 존재가 아닌, 적극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사회 변화를 이끄는 주체로 거듭나고 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는 바로 이러한 "약자의 강자화" 현상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전통적으로 장애인은 사회적 약자의 대표적 범주로 여겨졌다. 동정과 시혜의 대상,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전장연의 시위는 이러한 통념을 정면으로 뒤엎는다. 지하철 탑승을 막고 출근길 시민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그들의 행동은, 약자가 더 이상 조용히 구석에서 도움을 기다리는 존재가 아님을 선언한다.
이들의 시위 방식은 기존의 '점잖은' 시위와는 전혀 달랐다. 시민들의 일상을 직접적으로 방해하고, 불편을 감수하게 만들며, 때로는 분노를 자아내기도 했다. 이는 단순한 관심 끌기가 아닌, 사회 시스템의 모순을 몸으로 드러내는 행위였다. 매일 이동권을 제약받는 장애인의 절망적 현실을 비장애인들이 몇 분간이라도 체감하게 만드는 것이다.
전장연 시위가 보여주는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권력 관계의 일시적 역전이다. 평소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던 장애인들이 순간적으로 대중교통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수많은 시민들의 동선을 좌우하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는 약자가 가진 잠재적 파워, 즉 "약자의 강자화" 가능성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이러한 강자화는 역설적이다. 그들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이 약자이기 때문이다. 만약 기업 임원이나 정치인이 같은 방식으로 지하철을 막았다면 사회적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이라는 약자의 지위는 그들의 행동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사회적 관용을 이끌어낸다.
전장연 시위를 둘러싼 사회적 반응은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복잡한 딜레마를 보여준다. 한편에서는 "약자를 위해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성이 존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개인의 일상을 방해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는 권리 의식이 충돌한다.
더 나아가 이 시위는 약자 개념의 상대성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시위로 인해 지각 위험에 처한 최저임금 근로자는 누가 더 약자인가? 장애인과 비정규직 노동자 사이에서 약자성을 비교할 수 있는가? 현대사회에서 약자의 정의는 이처럼 복잡하고 중층적이다.
전장연의 시위 전략은 약자성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정교한 사회 운동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들의 약자 지위를 무기로 삼아 사회적 어젠다를 설정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는 과거의 수동적 약자상과는 완전히 다른, 능동적이고 전략적인 약자상이다.
이들의 행동은 "약자도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주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동시에 기존 사회 시스템이 얼마나 약자를 배제하고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가 없어 휠체어 이용자가 접근할 수 없다는 현실, 이것이 바로 일상적으로 작동하던 "구조적 차별"이었다.
전장연 시위는 약자성이 정치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개인적 불편이나 한계로 여겨지던 장애가 사회적 의제로, 정치적 쟁점으로 전환된다. 이는 약자가 단순히 도움을 받는 객체가 아닌, 사회 변화를 요구하는 정치적 주체로 등장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양상은 전장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미투 운동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이 침묵을 깨고 가해자를 고발하며 사회 구조를 뒤흔든 것, 기후 변화에 취약한 청년들이 기성세대를 향해 미래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 모두 약자의 강자화 현상의 다른 형태들이다. 이들은 모두 기존의 수동적 약자상을 거부하고 적극적 변화 주체로 나섰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화 과정에서 또 다른 딜레마가 발생한다. 약자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사회 내 다른 집단과의 갈등도 심화된다. 전장연 시위에 대한 시민들의 엇갈린 반응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다. 약자의 권리 신장이 다른 시민들의 권리와 충돌할 때, 사회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전장연 시위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약자는 더 이상 사회의 주변부에서 조용히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약자성을 무기 삼아 사회의 중심으로 진입하고, 기존 질서에 균열을 내며,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내는 강력한 주체로 거듭났다.
이는 현대사회의 권력 관계가 얼마나 유동적이고 복잡한지를 보여준다. 약자와 강자의 경계는 절대적이지 않으며, 상황과 맥락에 따라 언제든 역전될 수 있다. 전장연의 시위는 바로 그러한 역전의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그러나 약자의 강자화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책임을 수반한다. 강력한 영향력을 획득한 약자들은 이제 그들의 목소리가 사회 전체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고려해야 한다. 자신들의 정당한 요구를 관철시키면서도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의 공존을 모색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새로운 책임이 따르게 된 것이다. 이는 약자에게만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강자화된 약자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사회 전체의 성숙함을 요구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 이들의 시위가 제기하는 것은 "진정한 사회 통합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이다. 약자를 시혜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온정주의를 넘어서, 그들을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회. 동시에 서로 다른 집단 간의 권리가 충돌할 때 건설적 대화를 통해 해결책을 모색하는 사회. 그것이야말로 전장연이 그토록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는 진정한 변화일 것이다.
약자의 강자화는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문제는 사회가 이러한 변화를 어떻게 수용하고,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갈 것인가이다. 전장연의 시위는 그 답을 찾아가는 험난하지만 필요한 여정의 시작점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