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하지 마라. 기대지도 마라.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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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흔들린다. 수천 년간 우리를 지탱해왔던 절대적 가치, 영원한 진리, 불변의 도덕이라는 거대한 기둥들이 균열하고 있다. 니체가 선언한 "신은 죽었다"는 단순한 종교의 종말이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하늘에서 내려온 계명도, 사회가 정해준 견고한 규칙도 우리 삶의 좌표가 될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의 선포다.

그런데 니체는 이 허무주의적 진단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이 파괴가 창조의 전제조건임을 보았다. 기존의 가치들이 무너지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마주하게 된다. 길을 잃은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혼돈 속에서 우리는 깨닫게 된다. 우리 자신이 가치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는 필연적인 진리를 말이다.

더 이상 외부의 기준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이제 우리 자신이 삶의 의미를 만들어가야 한다.


세상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다. 당신의 부모도, 친구도, 연인도, 직장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무언가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사랑받을 권리, 인정받을 권리, 성공할 권리. 하지만 위버멘쉬는 이런 권리 따위에 기대지 않는다. 권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기대들은 결국 우리를 약자로 만들 뿐이다.

기대한다는 것은 타인에게 자신의 운명을 인질로 맡기는 일이다.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주길 바라고, 세상이 내가 그린 그림대로 돌아가길 바란다. 하지만 이 허구의 시나리오가 어긋나는 순간, 우리는 깊은 실망과 분노,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진다. 이는 주체적인 삶의 주인이 아닌, 타인의 행동에 일희일비하는 노예의 사고방식에 다름 아니다.

타인은 당신의 시나리오대로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의지가 있다. 그들만의 권력에의 의지가 꿈틀거리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대를 완전히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니체가 말하는 것은 맹목적이고 의존적인 기대와,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희망을 품는 건강한 기대 사이의 구별이다. 부모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기대하되, 그것이 충족되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의 가치가 무너지게 해서는 안 된다. 친구에게 우정을 기대하되,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회사에게 충성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되, 그것이 보장된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위버멘쉬는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스스로 창조한다.


기대를 내려놓는 순간, 더 이상 타인의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된다. 인정받지 못해도 괜찮고, 사랑받지 못해도 괜찮다. 왜냐하면 당신의 가치는 타인의 평가에 달려있지 않기 때문이다. 위버멘쉬는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 대신 예상치 못한 기쁨들이 삶을 채워간다. 기대를 버린다는 것은 사람에 대한 믿음까지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대로 인한 약자의 심리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는 강자의 자세다.

니체가 말한 '아모르 파티(Amor Fati)' - 운명에 대한 사랑이 바로 이것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 현실 위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는 체념이 아니라 적극적인 긍정이다. 삶의 고통과 기쁨, 성공과 실패, 모든 것을 자신의 성장의 재료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자유로운 정신은 우리를 진정한 독립으로 이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니체가 말한 권력에의 의지의 진정한 의미다. 타인을 지배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성장시키려는 의지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려는 마음, 누군가가 나를 구원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버려라. 이는 약자의 도덕, 노예의 도덕이다.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라. 친구의 도움을 당연하게 여기지 마라. 연인에게 당신의 외로움을 해결해달라고 떠넘기지 마라. 위버멘쉬는 홀로 선다.

하지만 이는 냉혹한 개인주의를 뜻하지 않는다. 니체가 말하는 것은 건강한 독립성이다. 자신의 중심을 확고히 한 상태에서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의존적 관계가 아닌, 상호 존중과 성장을 바탕으로 한 관계다.

기댈 곳을 잃는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고독과 두려움을 동반하는 일이다. 익숙했던 안정의 울타리가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심연의 불안과 마주한다. 하지만 바로 그 두려움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것을 견뎌내는 자만이 진정한 자기 극복, 즉 스스로를 넘어서는 위버멘쉬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한계와 취약성을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나약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이야말로 그것을 넘어서는 첫걸음이다. 니체의 말처럼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누군가에게 기대어 사는 삶은 언제나 불안하다. 그 기댈 곳이 사라지면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버멘쉬는 다르다. 자신의 힘으로 서고, 자신의 의지로 나아간다. 누군가가 떠나가도, 상황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자신만의 중심을 만들어라.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라. 세상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는 힘을 기르라. 니체가 말한 '자기 긍정'이 바로 이것이다. 혼자서도 충분히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 이렇게 내적 힘을 기를 때, 비로소 진정한 관계가 시작된다.


물론 홀로 고립되라는 말이 아니다. 위버멘쉬도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그 관계는 약자들의 상호 의존과는 다르다. 강자와 강자가 만나는 것이다. 서로에게 기대지 않고, 서로에게서 무언가를 얻으려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진정한 연결이 가능해진다.

두 개의 완전한 원이 만날 때 가장 아름다운 교집합이 생긴다.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려는 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완전함과 충만함을 기꺼이 나누는 관계. 서로의 권력에의 의지가 때로는 치열하게 충돌하면서도, 결국은 더 높은 차원의 조화를 이루어내는 관계. 이것이 바로 위버멘쉬들의 관계다.

이는 니체가 말하는 '고귀한 우정'의 모습이다. 서로를 성장시키고 도전하게 만드는 관계. 편안함보다는 자극을, 안정보다는 변화를 추구하는 관계. 이런 관계 속에서야 비로소 개인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이런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존재다. 이 자유야말로 새로운 인간이 되는 출발점이다.


세상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처럼, 같은 고통과 시련이 끝없이 반복될 수도 있다. 하지만 위버멘쉬는 이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삶을 다시 한 번, 아니 영원히 다시 살겠는가?"라는 질문에 당당히 "그렇다!"고 외칠 수 있는 삶을 창조한다.

이는 니체 철학의 가장 급진적인 사상 중 하나다. 영원회귀는 단순히 시간의 순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의 의미와 가치를 극대화하라는 도전이다. 만약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당신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아무도 당신의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역설적으로 완전히 자유롭다. 누구의 기대에도 부응할 필요 없고, 누구의 승인도 필요 없다. 이 거대한 자유야말로 당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자산이다. 하지만 이 자유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완전한 책임이라는 무게를 동반한다.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적 불안의 원천이다. 하지만 위버멘쉬는 이 불안을 창조의 에너지로 전환시킨다. 불확실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 기존의 도덕과 가치에 매달려 살아가는 동안,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해야 한다. 니체가 말한 '가치의 전도'를 실행하라. 선악을 넘어서라. 기존의 가치관을 깨뜨리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라.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라.

하지만 이는 무차별적인 파괴를 의미하지 않는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은 도덕의 완전한 포기가 아니라, 기존의 이분법적 도덕을 넘어선 새로운 윤리의 창조를 의미한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더 깊은 책임감, 더 섬세한 판단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위버멘쉬가 된다는 것은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를 끊임없이 넘어서려 하는 것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며,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기존의 통념에 도전하는 사상가. 새로운 예술 언어를 개발하는 창작자. 사회적 편견을 깨뜨리는 혁신가. 개인적 한계를 극복하는 모든 이들. 이들이 바로 현대의 위버멘쉬다.

이는 거창한 업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에서 주어진 역할을 넘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모든 이들이 위버멘쉬의 길을 걷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니라 의지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려는 의지다.

남들이 안전하다고 여기는 울타리 안에서 머물지 않고, 미지의 영역으로 과감히 뛰어드는 것이다. 세상은 평범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주어진 틀 안에서 살아가며, 기존의 질서에 순응한다. 하지만 위버멘쉬는 그 틀을 깨뜨리는 존재다.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존재다.

타인의 승인 없이도 자신의 가치를 확신하라. 사회의 상식에 굴복하지 말고, 자신만의 상식을 만들어라. 다수가 옳다고 여기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소수의 목소리에서 진실을 찾아라. 평범함을 거부하고, 비범함을 추구하라. 이것이 바로 니체가 꿈꾼 위버멘쉬의 모습이다.

오롯한 나 자신이 되어라. 타인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기준으로 살아라. 세상이 박수쳐주지 않아도, 홀로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라. 그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당신만의 것이 될 것이다.

이 시대는 더 이상 주어진 삶에 순응하는 평범한 인간을 원치 않는다. 기존의 모든 한계를 뛰어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며, 자신의 운명을 주도할 새로운 인간을 기다리고 있다.

기대하지 마라. 기대지도 마라. 그리고 스스로 빛이 되는 위버멘쉬가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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