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위버멘쉬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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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제시하는 모든 기준과 가치가 흔들릴 때,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하는가? 전통적인 종교와 도덕이 설득력을 잃고, 과학과 이성마저 절대적 해답을 주지 못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마치 나침반을 잃은 배처럼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 "신이 죽었다"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선언은 단순한 무신론적 주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길을 잃은 듯한 인간 실존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자, 각자의 삶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할 숙제를 던졌다.

이러한 허무주의적 위기 속에서 니체가 제시한 답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었다. 인간 스스로가 삶의 의미를 창조하는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는 통찰, 즉 빈 도화지에 새로운 색을 입히는 화가처럼 자신만의 가치를 그려나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위버멘쉬(Übermensch)', 초인 개념의 핵심이었다.


위버멘쉬는 '초인' 또는 '초월인간'으로 번역되는 개념으로, 니체 철학의 가장 빛나는 보석과 같은 아이디어다. 이는 전통적인 도덕과 가치관을 넘어서서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기존 질서를 파괴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숙련된 조각가가 거친 돌덩어리에서 아름다운 조각상을 만들어내듯이, 자신의 삶이라는 원석을 깎고 다듬어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위버멘쉬의 핵심 특징은 세 가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끊임없는 자기 극복이다. 이는 단순히 고난을 이겨내는 것을 넘어, 자신의 약점, 편견, 관습화된 사고방식까지도 넘어서는 내면적 투쟁을 의미한다. 마치 나비가 번데기를 벗고 날개를 펼치듯, 기존의 자아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자아로 탄생하는 과정이다.

둘째, 독립적 판단력이다. 위버멘쉬는 사회의 여론이나 다수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한다. 이는 오만함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한 온전한 책임을 지겠다는 용기의 표현이다.

셋째, 삶에 대한 긍정이다. 위버멘쉬는 삶의 고통과 모순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모든 것을 포함해 삶 자체를 긍정한다. 이는 맹목적인 낙관주의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그 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발견하는 성숙한 지혜다.


그렇다면 이런 초인이 사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세상에 이로울까? 이 질문은 날카로운 양날의 칼과 같다. 한쪽 날은 혁신과 창조의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다른 쪽 날은 독단과 폭정의 위험을 숨기고 있다.

니체 자신은 위버멘쉬를 정치적 지도자의 개념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개인의 자기실현과 예술적, 철학적 창조에 관심이 있었고, 정치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위버멘쉬는 권력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개척하는 탐험가에 가깝다.

위버멘쉬가 정치적 권력과 결합할 때의 위험성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기존 가치를 무시하는 태도가 민주적 합의나 법치주의를 경시할 수 있고, 자신만의 가치를 절대화하여 독단적 지배로 이어질 수 있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지배자가 되려 할 때, 마치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통제 불가능한 재앙을 낳을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지도자가 홀로 가치를 창조하는 것보다는 시민들과의 대화와 합의를 통해 공동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이 더 건전하다. 위버멘쉬의 창조적 사고는 개인의 삶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정치적 맥락에서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문제다.


아나키즘적 사회에서 모두가 위버멘쉬가 되면 그것이 니체가 꿈꾼 이상향일까? 이는 아름다운 환상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 니체는 유토피아를 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완벽한 사회나 이상향에 대한 생각 자체를 의심했다.

먼저 니체는 모든 사람이 위버멘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위버멘쉬를 매우 드문 예외적 존재로 보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리"에 속한다고 여겼다. 이는 냉혹한 현실 인식이었다.

또한 모든 사람이 각자의 가치를 창조한다면, 마치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처럼 소통과 조화가 어려워질 것이다. 위버멘쉬는 자신만의 독특한 가치를 추구하는데, 이들이 모두 모이면 아름다운 화음이 아니라 불협화음을 낼 가능성이 높다.

니체는 오히려 갈등과 투쟁을 삶의 본질로 보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평화로운 사회가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과정이었다. 편안함 속에서는 진정한 성장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니체가 계층화를 원했던 것일까? 이는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다. 니체는 명시적으로 계층화된 사회를 설계하려 했다기보다는, 인간의 차이와 불평등을 자연스러운 현실로 받아들였다. 그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계몽주의적 관념이 현실을 외면하는 거짓된 평등주의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것이 기존의 사회적 계급제도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었다. 니체는 혈통이나 재산에 기반한 기존 귀족제도도 비판했다. 그들이 진정한 우수성이 아닌 특권에 안주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니체가 원한 것은 "정신적 귀족주의"였다. 이는 혈통이나 재산이 아닌 개인의 창조력, 의지력, 자기극복 능력에 따른 자연스러운 구별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단순한 우월감이 아니라, 더 큰 책임과 의무를 감당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높은 산에 오른 등반가가 더 넓은 시야를 갖는 것과 동시에 더 큰 위험도 감수해야 하는 것처럼.


니체의 위버멘쉬 개념은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들을 던진다. 전통적 가치가 흔들리고 개인의 자율성이 강조되는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진정한 자기실현을 추구할 수 있을까? 사회의 기대와 압력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 가능할까?

물론 니체의 위버멘쉬 개념은 여전히 많은 논쟁과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다. 하지만 그 핵심 통찰은 변함없이 빛난다. 인간은 수동적으로 주어진 가치를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가치를 창조하고 삶을 예술작품으로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결국 니체의 위버멘쉬는 도달해야 할 완성된 인간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하고 매 순간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나가는 삶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홀로 선 영웅적 개인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성장해나가는 성숙한 인간, 즉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예술가적 인간이 아닐까 한다.

"신이 죽은 시대,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니체의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야말로 우리 각자를 진정한 초인으로 이끄는 길이 될 것이다. 답은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 자체에 있다. 그리고 그 여정을 걸어가는 용기 있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바로 위버멘쉬의 실존적 의미인 것이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C%9C%84%EB%B2%84%EB%A9%98%EC%89%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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