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전례 없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여전히 갈등과 불평등, 환경 위기에 직면해 있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연결시켜주었지만 동시에 더 깊은 고립감을 안겨주었고, 민주주의는 성숙했지만 정치적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 시대에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이며, 과연 우리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2500년 전 혼란의 시대를 살았던 공자는 **'인(仁)'**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과 배려, 통치자의 도덕적 모범을 통한 이상 사회를 꿈꿨다. 얼마나 아름다운 비전인가. 하지만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공자가 말하는 인의 핵심은 단순하면서도 심오하다. 효(孝)와 제(悌)를 근본으로 하여,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소극적 황금률과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이루고자 하면 남을 이루게 해준다"는 적극적 실천을 통해 사회 전체의 조화를 이루자는 것이다.
특히 그는 통치자가 인을 실천하면 백성들이 자연스럽게 따르게 되어 이상적인 사회가 실현된다고 믿었다. 마치 북극성이 가만히 있어도 모든 별들이 그 주위를 도는 것처럼, 덕을 갖춘 지도자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인간 본성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이 아닐까?
역사를 돌이켜보면, 훌륭한 통치자가 있어도 백성들의 행동이 즉시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권력자의 위선이나 이중성이 드러나는 경우가 더 흔하다. 사람들은 각자의 이익과 상황에 따라 행동하며, 단순히 모범을 보인다고 해서 따라하지는 않는다.
행동경제학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손실 회피 성향을 가지고 있다. 타인을 위한 이타적 행동이 자신에게 손실을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저한다. 또한 확증 편향으로 인해 자신의 기존 믿음을 강화하는 정보만을 받아들이려 하고, 집단 내 편향으로 인해 내 집단의 이익을 외집단보다 우선시한다.
이는 진화론적 관점에서도 설명된다. 인류는 수십만 년간 생존과 번식을 위해 경쟁해왔다. 당장의 생존이 우선이었던 동물로서, 장기적 관점에서 전체 이익을 고려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공자 자신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 했지만, 어느 군주도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권력자들에게는 부국강병과 생존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공자의 덕치주의를 보면 20세기 공산주의가 떠오른다. 공산주의도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이상적 사회를 꿈꿨다. 이론적으로는 완벽해 보였지만, 현실에서는 독재와 억압으로 귀결됐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는 단순히 경제적 실패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과소평가한 결과였다. 사람들은 공동체의 이익보다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했고, 권력자들은 이상을 실현하기보다는 권력 유지에 몰두했다.
마찬가지로 공자의 덕치주의도 후에 권력자들이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악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적 지배 이데올로기가 그 대표적인 예다.
이상주의의 공통점은 인간 본성에 대한 과도한 기대이다. 사람이 교육과 수양을 통해 완전히 변할 수 있다는 믿음,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할 수 있다는 믿음. 하지만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인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택한 길은 어떨까? 공산주의의 실패 이후, 인류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선택했다. 하지만 이 또한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환경 파괴, 불평등 심화, 자원 고갈... 모두 알고 있지만 멈출 수 없는 상황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이기심을 원동력으로 삼아 효율적인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무한 성장의 신화에 갇혀 지구의 유한한 자원을 고갈시키고 있다.
기후 변화에 대한 과학적 경고가 수십 년간 계속되었지만, 각국 정부와 기업들은 여전히 단기적 이익을 우선시한다. 개인들 역시 환경 보호의 필요성을 알면서도 편리함을 포기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인류의 구조적 한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리석은 것일까? 아니면 공자는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는 이상론을 떠든 것뿐일까?
아마도 둘 다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이상이 완전히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공자의 인(仁)을 다시 생각해보자. 그것은 완벽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과정 그 자체일 수 있다. 공자 자신도 "인을 구하면 인을 얻는다"고 했지, "인을 완성했다"고 하지는 않았다.
현대 사회의 복잡한 문제들—양극화, AI 시대의 인간성 상실, 가짜 뉴스의 확산—을 해결하는 데도 '인'의 정신이 필요하다. 타인에 대한 배려, 공동체 의식, 장기적 관점에서의 사고. 이런 것들이 없다면 기술 발전도 인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지 못할 것이다.
북유럽 국가들의 성공을 보자. 그들은 완벽한 사회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상대적으로 높은 신뢰 사회를 구축했다. 이는 공자가 말한 인(仁)의 정신, 즉 타인에 대한 배려와 장기적 관점이 현실에서도 어느 정도 구현 가능함을 보여준다.
비록 완벽한 실현은 불가능해도, 그런 이상이 있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을 방지할 수 있었다. 인권 선언, 민주주의의 확산, 국제법의 발전... 이 모든 것들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인류가 야만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최소한의 안전장치 역할을 하고 있다.
실패를 통한 성장이야말로 인류 역사의 본질이다. 우리는 무수한 전쟁을 통해 평화의 소중함을 배웠고, 독재의 참혹함을 경험하며 민주주의의 가치를 깨달았다. 환경 파괴의 심각성을 목격하며 지속 가능한 발전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공자의 인(仁)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고뇌하고 노력하는 과정 그 자체다.
결국 우리는 완벽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 이상을 향해 끊임없이 손을 뻗어야 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완벽한 사회는 만들 수 없지만, '인'이라는 이정표를 통해 우리는 매 순간 조금이라도 더 인간다운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비로소 극단적인 파멸을 피하며 인류의 존엄성을 지켜나갈 힘을 얻을 것이다.
2500년이 지난 지금도 공자의 인(仁)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낡은 고전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길을 밝히는 영원한 등불이다. 비록 그 빛이 모든 어둠을 밝히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이상주의의 영원한 딜레마이자, 동시에 인류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의 빛이다. 우리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손을 뻗어야 한다.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인간다워지며, 공자가 꿈꿨던 '인(仁)'의 진정한 의미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https://wikis.krsocsci.org/index.php/%EA%B3%B5%EC%9E%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