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0년 전,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이 가장 먼저 마주한 고뇌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라는 절망적인 질문이었다. 모든 언어를 초월한 체험을 언어로 전달해야 하는 불가능한 과제 앞에서, 그는 한동안 침묵을 고려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깨달음이 오히려 우리를 영원히 고립시킨다면 어떨까? 2,5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여전히 부처님의 그 첫 번째 고뇌를 해결하지 못했다. 아니, 더 나아가 그 고뇌가 해결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아가고 있다.
공 사상을 철학적 개념으로 해석하는 순간, 우리는 또 다른 '실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이 우리를 이끌어갈 여정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 끝에서 우리는 가장 웅변적인 침묵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공 사상을 바라보는 가장 급진적인 관점 중 하나는 분해주의다. 인간의 존재를 물 35리터, 탄소 20kg, 질소 3kg, 칼슘 1kg, 인 780g으로 분해해보자. 주기율표의 원소들로 환원하고 나면, '김철수'라는 고유한 실체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원자들의 일시적 배열일 뿐이다.
불교에서 인간을 오온(五蘊)으로 분해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색온(물질), 수온(감수), 상온(인식), 행온(의지작용), 식온(의식) - 이렇게 분해하고 나면 '나'라는 것은 이 다섯 요소가 찰나적으로 결합한 현상에 불과하다. 현대 뇌과학은 이를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 의식을 1,000억 개의 뉴런이 만드는 전기화학적 패턴으로 분해하면, '자아'는 신경세포들의 일시적 공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철학적 사변이 아니라, 과학적 사실에 기반한 냉정한 분석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소통의 근본적 문제가 시작된다. 만약 '나'라는 개념 자체가 해체된다면, 소통의 주체는 누구인가? 실체가 없는 존재들 사이의 대화는 과연 가능한가?
분해주의의 냉혹함에 직면하여, 많은 불교 해석자들은 '과정주의'라는 정교한 대안을 제시한다. 강물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강물을 H2O 분자로 분해할 수는 있지만, 강물의 진정한 본질은 '흐름' 그 자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존재도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주의는 공 사상의 급진성을 회피하려는 교묘한 시도일 수 있다. 부처님이 "실체에 집착하지 말라"고 했다면, 내가 강물이라는 집착을 버리라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 과정에서 '흐름'이라는 개념조차 버려야 하는 것 아닌가?
'흐름'이라는 개념 자체가 또 다른 고정된 관념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실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려다 '과정'이라는 새로운 감옥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바로 여기서 공 사상의 진정한 파괴력이 드러난다.
나가르주나가 "공성을 견해로 삼는 자는 구제불능이다"라고 한 것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다. 이는 공 사상 자체도 하나의 개념일 뿐이며, 거기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폭탄 선언이다. "공도 공하다"는 명제는 모든 철학적 시도를 무화시키는 파괴적 힘을 가지고 있다.
부처님의 뗏목 비유가 이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강을 건너기 위해 뗏목을 만들어서 탔는데, 강을 다 건넌 후에도 뗏목을 계속 지고 다니면 바보라는 것이다. 여기서 뗏목은 바로 공 사상 자체다. 깨달음이라는 강을 건넌 후에는 공 사상이라는 뗏목도 버려야 한다.
이는 단순한 방법론적 조언이 아니다. 이는 모든 개념적 붙잡음을 놓아버리는 것이 진짜 공 사상의 완성임을 의미한다. 흐름도, 과정도, 심지어 공성도 -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모든 가르침을 버리라는 가르침, 모든 개념을 넘어서라는 개념, 모든 집착을 놓으라는 마지막 집착.
그렇다면 이러한 깨달음은 일종의 허무에 가까운 것일까?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
허무주의는 "아무것도 의미 없어, 다 부질없어"라고 말한다. 이는 여전히 일종의 부정적 판단이다. 절망과 체념이 그 안에 스며있다. 반면 불교의 깨달음은 판단 자체를 멈추는 것이다. "의미 있다/없다"는 이분법적 사고 너머로 가는 것이다.
허무주의자는 우울하고 절망적이다. 그들은 여전히 '무의미'라는 개념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깨달음을 체험한 이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오히려 "모든 게 그냥 완벽해", "아무 문제가 없었네", "원래 이랬구나"라고 말한다. 이는 허무가 아니라 충만함의 경험이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무(無)"는 적극적 무다.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상태다. 텅 빈 그릇이 뭐든 담을 수 있는 것처럼, 모든 개념이 비워진 마음은 무한한 자유를 품고 있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드러난다. 깨달은 사람들은 이미 저편으로 넘어간 상태이니, 우리로서는 감히 재단할 수 없다. 즉, 그들의 말은 우리에게 닿지 않는다.
이는 불교 철학의 근본적 딜레마다. 깨달음은 언어 너머의 경험인데, 그것을 언어로 전달해야 하는 모순이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깨달음의 순간은, 그 어떤 단어로도 재현될 수 없는 순수한 경험이다. 언어는 개념을 담는 그릇이지만, 깨달음은 모든 개념을 초월한 체험이다.
꿈을 깬 사람이 꿈꾸는 사람에게 "이건 꿈이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 말이 아무리 진실하고 절실해도, 꿈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또 다른 꿈의 내용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언어의 장벽'을 넘어, '인식의 차원'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존재론적 단절이라고 할 수 있다.
선불교의 지월지(指月指) 비유가 이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면, 바보는 손가락을 본다." 달은 깨달음이고, 손가락은 가르침이나 언어이며, 바보는 바로 우리다. 깨달은 자의 말은 손가락일 뿐, 진짜 달은 우리가 직접 봐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손가락만 바라보며 "달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부처님이 깨달음 직후에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라고 고민한 것은 단순한 방법론적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궁극적인 자비와 소통 불가능성의 역설 사이에서 느꼈던 깊은 번뇌였다. 중생을 구원하고 싶은 무한한 자비심과, 그 구원의 방법을 전달할 수 없는 절망적 현실 사이에서 겪었던 존재론적 고뇌였다.
결국 그는 방편으로 가르침을 베풀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뗏목일 뿐이었다. 그 뗏목들이 오히려 새로운 집착의 대상이 되고, 종교적 교리가 되고, 철학적 시스템이 되는 것을 보며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결국 우리는 언어의 감옥 안에 있고, 깨달은 자들은 그 밖에 있다. 이는 단순한 철학적 난제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적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단어, 모든 개념, 모든 사유는 그 감옥의 벽을 더욱 두텁게 만들 뿐이다.
진짜 깨달은 사람일수록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한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와 같은 맥락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진정한 지혜에 도달한 자들은 모두 같은 결론에 이른다: 알면 알수록 모른다는 것을 안다.
어쩌면 그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진짜 메시지는 "답을 찾으려 하지 마라"일지도 모른다. 질문하지 마라. 이해하려 하지 마라. 그냥 있어라. 그냥 지금 여기에 있어라.
공 사상을 깊이 파고들수록, 우리는 점점 더 깊은 침묵에 도달한다. 이는 패배가 아니라 승리다. 모든 개념적 시도가 무너지는 지점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맛볼 수 있다.
침묵이 가장 웅변적인 가르침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모든 개념과 판단이 사라진 자리에 찾아오는 완전한 자유와 평온이 그 침묵 속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이 끝나는 곳에서 진정한 소통이 시작된다. 설명이 불가능한 곳에서 진정한 이해가 일어난다.
깨달음이란, 우리가 이해하려 할수록 멀어지고, 모든 것을 놓았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역설적인 진리가 아닐까?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과 마주한다. 언어로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언어를 초월한 전달의 경지에 이른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깨달은 자들과 마찬가지로 말문이 막힌다. 하지만 이 침묵이야말로 2,500년 전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처음 마주했던 그 고뇌의 완성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마침내 진정한 자유를 발견한다.
소통의 불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가장 완전한 소통의 시작이다.
(이미지 출처 https://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014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