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출생주의-미지수의 제로화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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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더 복잡해지고 예측 불가능해지는 세상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의문은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기후 변화, 경제적 불안정, 사회적 갈등이 일상이 된 현실에서 이런 고민은 결코 추상적인 철학적 사변이 아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반출생주의(antinatalism)는 현대 철학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며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다. 새로운 생명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이 철학적 입장은 남아프리카 철학자 데이비드 베나타의 저작을 통해 체계화되며, 복잡한 현실에 지친 많은 이들에게 일종의 해답처럼 다가왔다.

하지만 이 이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럴듯한 외관 뒤에 숨겨진 근본적인 문제들이 드러난다. 이 글은 반출생주의가 제시하는 논리적 허점과 실용적 한계를 면밀히 분석하고, 궁극적으로 삶의 복잡성을 외면하는 태도가 아닌, 이를 직시하고 헤쳐나갈 용기의 중요성을 역설하고자 한다.


반출생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른바 "고통과 쾌락의 비대칭성"이라는 논리를 제시한다. 베나타에 따르면, 태어나지 않은 존재에게는 고통의 부재가 좋은 것이지만, 쾌락의 부재는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이를 마치 수학 공식처럼 제시하며, 따라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논리적으로 "더 나은"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수학이 아니다. 베나타의 "비대칭성" 공식은 수학적 엄밀함의 외관을 빌렸을 뿐, 실제로는 검증되지 않은 임의적 가정들의 조합이다. 고통이 없다는 사실이 긍정적 가치를 지니는 것과, 쾌락이 없다는 사실이 중립적이라는 것을 동일 선상에 놓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억지로 연결한 것이다.

구체적인 예로 생각해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태어나지 않아 고통을 겪지 않았다면 그것을 '좋다'고 평가할 수 있는가? 이는 마치 비가 오지 않아서 옷이 젖지 않은 것을 '좋은 일'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비가 오지 않아 느끼는 '맑은 하늘'의 즐거움이 없다는 것을 '나쁘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전자는 부정적인 것의 부재이고, 후자는 긍정적인 것의 부재인데, 이 둘을 동일한 방식으로 가치 판단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라는 개념 자체의 모순이다. 존재하지 않는 주체에게 어떻게 "좋음"과 "나쁨"을 적용할 수 있는가? 이는 논리학의 기본 원칙에 어긋나는 오류다. 평가의 주체가 없는데 평가가 가능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논리적 모순이다.


반출생주의가 직면하는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바로 실용성의 부재다. 우리는 이미 태어나 있다. 이 이론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들린다 해도, 이미 존재하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출생주의자들은 출산을 하지 않는 것이 답이라고 말하지만, 그렇다면 이미 존재하는 인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순히 마지막 세대가 되기를 기다리며 살아가야 하는가? 기후 변화, 사회적 불평등, 기술적 도전과 같은 현실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어떤 해결책이나 책임감 있는 자세도 제시하지 못한다. '마지막 세대가 되자'는 제안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놀랍도록 무책임하게 들린다.

여기서 반출생주의의 근본적인 아이러니가 드러난다. 이 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 자신이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존재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주체 자체가 존재하고 있다는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생존의 의지와 회복탄력성이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인간은 극심한 고통과 불확실성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회복하며,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왔다. 이런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단순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과연 합리적인가?


반출생주의의 본질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한다면, 그것은 "미지수를 제로로 만들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삶이라는 복잡한 방정식 앞에서, 이들은 방정식을 풀려고 노력하는 대신 아예 방정식 자체를 없애버리자고 제안한다.

인간의 삶은 확실히 복잡하다. 고통과 기쁨, 의미와 무의미, 확실성과 불확실성이 뒤섞인 복잡한 방정식이다. 하지만 방정식이 복잡하다고 해서 답이 항상 음수인 것은 아니다. 미지수들 중에는 양수가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무엇보다 방정식을 풀어보지도 않고 "X=0이 최선"이라고 결론내리는 것은 지적 포기에 가깝다.

이는 역사상 다른 철학적 전통들이 취한 태도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에 대한 사랑을 통해 삶의 고통과 불확실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다. 불교는 고통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실존주의는 삶의 부조리를 인정하면서도 그 속에서 자유롭게 의미를 창조해나갈 것을 촉구한다.

반면 반출생주의는 이런 적극적인 철학적 노력을 포기하고, 존재의 불확실성에 대한 근본적 회피를 선택한다. 복잡한 현실과 마주하는 대신 아예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도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어려운 시험을 앞두고 "시험을 안 보면 되잖아"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는 철학적 사유라기보다는 현실 회피에 가깝다.

삶의 복잡성을 단순화하려는 이런 극단적 시도 대신, 우리는 그 복잡함 자체가 인간 존재의 핵심임을 인식해야 한다.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더 깊은 지혜를 얻고, 더 큰 연민을 배우며, 더 나은 해답을 찾게 된다.


반출생주의가 일부에서 호응을 얻는 이유는 복잡한 철학적 용어와 수학적 외관으로 포장된 "사탕발림" 때문이다. 하지만 이 화려한 포장을 벗겨내면, 결국 핵심은 "세상이 너무 힘들어서 안 태어나는 게 낫다"는 개인적 감정을 체계화한 것에 불과하다.

물론 삶의 고통을 인정하고 이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하는 것 자체는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결론이 존재 자체의 부정이라면, 이는 철학적 탐구라기보다는 절망의 합리화에 가깝다. 진정한 철학적 탐구라면 고통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그 속에서 의미를 찾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반출생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 맹목적 낙관주의를 지지한다는 뜻은 아니다. 삶에는 분명히 고통이 있고, 불확실성이 있으며, 때로는 견디기 힘든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존재 자체를 부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

삶의 의미는 단순히 쾌락과 고통의 산술적 계산으로 환원될 수 없다.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깊은 유대감, 창조와 성취에서 오는 만족감,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순간들, 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발견하게 되는 의미와 성장의 가능성들 - 이런 것들을 어떤 수학적 공식으로 계산할 수 있겠는가?

더욱 중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다. 인류는 지속적으로 발전해왔고, 고통을 줄이고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왔다. 의학의 발전으로 질병을 정복하고, 기술의 진보로 삶의 질을 향상시키며, 사회제도의 개선으로 불평등을 줄여나가고 있다. 미래 세대가 더 나은 세상에서 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현재의 한계만을 근거로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과연 합리적인가?


반출생주의는 그럴듯한 논리적 외관을 갖추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존재의 복잡성을 견디지 못하는 지적 포기의 산물이다. 인생이라는 다차원적 퍼즐을 맞춰보려는 노력 대신, 아예 퍼즐판을 뒤엎어버리자는 극단적 단순화 전략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여기에 있다. 이미 태어나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존재를 부정하는 철학이 아니라, 복잡하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용기다.

삶이 어렵다고 해서 삶 자체를 포기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더 깊은 지혜와 더 큰 연민을 배울 수 있다. 존재의 도전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전들과 정면으로 마주하며 성장해나가는 것 - 그 과정에서 발견하는 성취와 의미, 그리고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야말로 진정한 인간다움의 증거일 것이다.

삶의 고통을 외면하는 대신,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용기야말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이다. 미래 세대가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이미 존재하는 우리의 진정한 책임이자 특권이 아닐까.


(이미지 출처 https://www.bbc.com/korean/news-49328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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