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당신이 곧 닥쳐올 파국을 홀로 알고 있다면, 그리고 아무도 당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어떤 기분일까? 어둠 속에서 홀로 등대를 밝히는 사람처럼, 썰물이 빠진 뒤 드러나는 위험한 암초를 혼자만 보는 사람처럼, 당신은 그 무게를 견딜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경고 속에서 살아간다. 기후 위기, AI의 잠재적 위협, 민주주의의 퇴보, 감시 사회의 확산... 이 경고들은 과연 헛된 비명인가, 아니면 우리가 외면하는 불편한 진실인가?
그리스 신화에서 카산드라는 아폴론의 사랑을 받아 예언의 능력을 선물받았다. 하지만 그녀가 신의 구애를 거절하자, 아폴론은 복수로 끔찍한 저주를 내렸다. 그녀의 예언은 항상 진실이지만,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이보다 더 잔혹한 운명이 있을까? 진실을 보는 능력과 그 진실이 무시당하는 고통을 동시에 안고 살아가는 것. 카산드라는 트로이 목마 속에 숨은 그리스 군사들을 보았고, 도시의 멸망을 예견했다. 그녀는 성벽 위에서 절규했고, 거리를 뛰어다니며 경고했다. 하지만 트로이 사람들은 그녀를 광녀로 취급했고, 심지어 가족들마저 그녀의 말을 헛소리로 여겼다.
그 결과는 예견된 파멸이었다. 트로이는 불타올랐고, 수많은 생명이 스러져갔다. 카산드라는 자신이 막을 수 있었던 비극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진실을 아는 것과 그 진실이 받아들여지는 것 사이의 절망적 간극, 이것이 바로 카산드라의 저주였다.
오늘날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예측하는 사상가들, 과학자들, 작가들이 겪는 고뇌는 바로 이 카산드라의 저주와 닮아있다. 그들 역시 데이터와 논리로 무장한 예언자들이지만, 그들의 경고는 종종 과도한 비관주의나 공포 조장으로 치부된다.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조지 오웰이 런던의 차가운 회색빛 속에서, 전쟁의 그림자 아래서 전체주의의 맹아를 보았을 때, 그 지식은 그의 영혼을 짓눌렀을 것이다. 《1984》는 단순한 소설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체주의의 메커니즘을 정확히 해부하고, 기술과 권력이 결합했을 때 인간의 자유가 어떻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언서였다. 빅 브라더, 뉴스피크, 사상경찰. 이 모든 개념들이 오늘날 우리 현실에서 얼마나 생생하게 구현되고 있는가?
알도스 헉슬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쾌락과 안락함으로 포장된 통제 사회의 모습을 그려냈고, 인간이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게 만드는 시스템의 교묘함을 예견했다. 소마라는 가상의 약물이 오늘날 우리가 중독되어 있는 디지털 플랫폼들과 얼마나 유사한 기능을 하는지 생각해보라. 우리는 편리함과 즐거움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속박되는 것을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예견된 비극 속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아닐까?
이처럼 예견하는 자들은 지식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 다른 이들이 편안한 무지 속에서 살아갈 때, 그들은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위험을 홀로 응시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부담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적 고독이다.
하지만 지식의 무게만으로는 고뇌를 다 설명할 수 없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예측과 행동 사이의 깊은 간극이다. 기후변화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수십 년 전부터 지구 온난화의 심각성을 경고해왔다. 데이터는 명확했고, 예측 모델은 정확했다. 하지만 데이터가 쏟아져 나오고 경고음이 울려 퍼져도, 거대한 관성은 마치 귓속에 모래를 채워 넣은 듯 그들의 목소리를 침묵시킨다. 이는 단순한 좌절이 아니라, 존재론적 무력감에 가깝다.
AI 연구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이 가져올 수 있는 실존적 위험에 대해 경고하는 목소리들이 있지만, 기술 발전의 속도는 제어되지 않는다. 경제적 이익과 국가 간 경쟁이 안전성보다 우선시되는 현실 앞에서, 예측하는 자들은 무력감을 느낀다.
그들은 거대한 바위가 굴러떨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을 막을 수 없는 사람들과 같다. 그들은 그 바위가 파괴할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손끝 하나 대지 못하고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형벌에 처한 듯하다. 외칠 수는 있지만, 그 외침이 실제 변화로 이어지기까지는 너무나 긴 시간이 걸리거나, 아예 무시당하기 일쑤다.
이것이 디스토피아 예측자들이 견뎌야 하는 가장 큰 고뇌다.
그렇다면 디스토피아를 예측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인가? 아니다. 여기에 놀라운 역설이 있다. 가장 암울한 미래를 그리는 이들이야말로, 그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포기하지 않는 역설적인 낙관주의자들이다. 그들의 경고는 공포를 위한 공포가 아니라,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다.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에서 농약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를 경고했을 때, 많은 이들이 그녀를 히스테릭한 환경주의자로 치부했다. 하지만 그녀의 경고는 결국 환경보호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고, DDT 사용 금지라는 구체적 변화를 이끌어냈다. 그녀는 절망 속에서도 변화의 가능성을 믿었던 것이다.
이처럼 디스토피아 예측자들은 절망적인 미래를 그리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피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과 양심이 결국 파멸적 선택을 피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 믿음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고뇌다. 얼마나 처절한 희망인가.
그런데 이러한 개인적 차원의 고뇌를 넘어서, 이들이 짊어진 사회적 책임은 더욱 무겁다. 우리 시대의 디스토피아 예측자들은 단순한 비관주의자가 아니다. 그들은 시대의 증인이며, 미래 세대를 위한 파수꾼이다. 그들의 고뇌는 개인적 고통을 넘어 인류 전체를 위한 숭고한 아픔이다.
슈샤나 주보프는 감시 자본주의의 그림자를 낱낱이 해부했지만, 수많은 이들은 여전히 편리함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저항하지 못한다. 닉 보스트롬이 기술적 특이점의 위험성을 제기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개발 경쟁의 함성에 묻힌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진단하지만, 정치적 양극화는 더욱 깊어진다.
이들 모두가 이 시대의 카산드라들이다. 그들의 예측이 틀렸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그 예측이 현실이 될까봐 두려워한다. 그들이 견디는 것은 단순한 무시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하나다. 디스토피아 예측자들의 고뇌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경고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먼저, 그들을 단순한 공포 조장자로 치부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경고 뒤에는 깊은 인류애와 미래에 대한 책임감이 있다.
둘째, 그들의 예측을 맹신하지도 말고 완전히 무시하지도 말아야 한다. 비판적 사고를 통해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건설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셋째, 예측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구체적 행동에 나서야 한다. 거대한 변화는 작은 인식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그들의 경고를 단순히 듣는 것을 넘어,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작은 균열이라도 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결국 이 모든 논의가 향하는 곳은 한 지점이다. 디스토피아를 예측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고뇌는 결국 인류의 고뇌다. 그들이 홀로 짊어지는 무거운 짐을 우리 모두가 함께 나누어야 한다. 그들의 경고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절망에 공감하며, 그들의 희망에 함께 참여해야 한다.
카산드라의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의 예언을 믿고 행동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저주의 본질은 바로 믿음의 부재에 있었다. 신이 내린 저주는 개인의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구조적이고 숙명적인 비극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카산드라들에게는 다른 가능성이 있다. 고대의 카산드라와 달리, 오늘날의 예언자들은 신의 저주가 아닌 인간의 무관심과 맞서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무관심은 각성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시대의 카산드라들이 겪는 고뇌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이다.
어둠을 응시하는 자들이 있기에 우리는 빛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의 고뇌가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그들의 경고를 나침반 삼아, 오직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위대한 연대의 빛으로 어둠을 밝혀야 할 의무가 있다.
이것만이 디스토피아 예측자들의 고뇌에 대한 우리의 마지막 응답이다.
(이미지 출처 https://steemit.com/kr/@seoinseock/6ezpye-toxic-market)